7. 이름이 곧 존재라는 착각
내가 물었다. “그 사람이 뉜가?” “김홍연이외다.” “이른바 김홍연은 뉜가?” “그 자字가 대심大深이외다.” “대심이라는 이는 뉜가?” “자호自號를 발승암髮僧菴이라고 하외다.” “이른바 발승암은 뉜가?” 余問: “是人爲誰?” 曰: “金弘淵.” “所謂金弘淵爲誰?” 曰: “字大深.” 曰: “大深者誰歟?” 曰: “是自號髮僧菴.” “所謂髮僧菴誰歟?” |
이 단락은 마치 선문답 같다. 단락 전체가 물음과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문답이란 무엇인가? 통념과 지식을 허물어뜨려 깨달음, 즉 절대의 진리에 이르는 방편 아닌가. 이 단락에서 연암이 톡톡 던지는 물음은 이런 의미의 선문답적 물음이다.
연암은 먼저 ‘김홍연’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상대방은 ‘대심’이라고 답한다. 연암은 다시 ‘대심’은 누구냐고 묻는다. 상대방은 ‘발승암’이라고 대답한다. 연암은 다시 ‘발승암’은 누구냐고 묻는다. 상대방은 아무 말도 못한다. ‘김홍연’은 성명이고, ‘대심’은 자이며, ‘발승암’은 호다. 이 셋은 모두 존재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존재는 아니다. 실제 존재와는 아무 상관없이 외부에서 덧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존재의 일부도 아니며, 존재의 고유한 본질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름에 집착하며, 어떻게든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 이름이란 실재가 아니라 허상인데, 미망에 빠져 허상을 좇는 것이다. 연암이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 것은 이 점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이름이라는 건 허상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것을 실체로 착가해 손을 잡으려 하거나 그에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 이름과 ‘나’는 별개이니 그것을 남긴다고 해서 ‘나’가 영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 문답에서 연암은 김홍연을 “이른바 김홍연”이라고 말하고 있고, 발승암을 “이른바 발승암”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름 앞에 ‘이른바’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름이란 기실 가상임을 보이기 위해서다. 가상은 아무리 추궁하더라도 실체에 이를 수 없다. 실체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발승암은 누굽니까”라는 물음 앞에 상대방은 마침내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만다. 지금까지 이름에 대한 물음에 이름으로 대답해왔지만 더 이상의 이름이 없으니 대답할 도리가 없다. 이로써 이름이 실제 존재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뿐 아니라, 이름이 곧 그 존재라는 우리의 통념이 커다란 착각임이 현시된다. 이 문답을 통해 연암이 노린 효과는 바로 이것이다.
▲ 전문
인용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14.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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