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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성리학의 수입과 한국시의 정착 - 2. 한국시의 정착, 5) 려말의 시인들(신천&한종유&이달충)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성리학의 수입과 한국시의 정착 - 2. 한국시의 정착, 5) 려말의 시인들(신천&한종유&이달충)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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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려말(麗末)의 시인(詩人)

 

목은(牧隱)포은(圃隱)도은(陶隱) 등 이른바 삼은(三隱)을 전후한 시대에는 안정된 우리의 진귀(珍貴)를 맛보게 하는 많은 소인(騷人)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을 일일이 적어 보일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도 높은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하고 있는 일부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박상충((朴尙衷)ㆍ권한공(權漢功)ㆍ민사평(閔思平)ㆍ신천(辛蕆)ㆍ전녹생(田祿生)ㆍ한종유(韓宗愈)ㆍ백문보(白文寶)ㆍ오순(吳珣)ㆍ최원우(崔元祐)ㆍ이공수(李公遂)ㆍ이달충(李達衷)ㆍ탁광무(卓光茂)ㆍ한수(韓脩)ㆍ정추(鄭樞)ㆍ설손(偰遜)ㆍ이인복(李仁復)ㆍ김구용(金九容)ㆍ유숙(柳淑)ㆍ이집(李集)ㆍ이존오(李存吾)ㆍ원천석(元天錫)ㆍ원송수(元松壽)길재(吉再) 등이 려말(麗末)에서 선초(鮮初)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성망(聲望)이 높았던 시인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신천(辛蕆)목교(木橋)(七絶), 한종유(韓宗愈)한양촌장(漢陽村庄)(七絶), 이달충(李達衷)낙오당감흥(樂吾堂感興)(五古), 한수(韓脩)야좌(夜坐)(五律), 정추(鄭樞)정주도중(定州途中)(七絶)오리동박헌납용진간재운부지(汚吏同朴獻納用陳簡齋韻賦之)(五古), 설손(偰遜)산중우(山中雨)(五絶), 김구용(金九容)범급(帆急)(五律), 유숙(柳淑)벽란도(碧瀾渡)(五絶), 이집(李集)한양도중(漢陽途中)(五律) 등은 명편으로 알려진 것들이다.

 

 

신천(辛蕆, ?~1339 충숙왕 복위 8, 德齋)은 안향(安珦)의 문인(門人)으로 여말(麗末)주자학(朱子學) 수용과정에서 크게 기여하였으며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목교(木橋)(七絶), 평해동헌(平海東軒(七律) 등이 여러 시선집(詩選集)에 보인다. 목교(木橋)를 보인다.

 

斫斷長條跨一灘 긴 가지 잘라서 여울에 걸치니
濺霜飛雪帶驚瀾 서리 뿌리고 눈 날리듯 놀랜 물살 이루네
須臾步步臨深意 잠깐 사이에 걸음걸음 깊은 데까지 이르는 뜻을
移向功名宦路看 공명 찾는 벼슬길에 빗대어 본다.

 

환로(宦路)에 나아가는 것이 마치 깊은 여울에 걸쳐져 있는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음을 직절하게 말한 것이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의 상응이 선명하여 작자의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세교(世敎)를 의식한 유가(儒家)의 작품이어서 문학의 효용적 기능을 확인하는 데 모자람이 없지만, 예술적인 단련은 찾아볼 수 없다.

 

 

한종유(韓宗愈, 1287 충렬왕13~1354 공민왕3, 師古, 復齋)는 충숙(忠肅)ㆍ충혜왕(忠惠王)의 복위 과정에서 원(0나라를 내왕하며 왕권(王權) 수호에 공을 세웠으며 벼슬이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그의 시작(詩作)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대동시선(大東詩選)등에 전하고 있는 한양촌장(漢陽村莊)이 있을 뿐이다. 작품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十里平湖細雨過 십리 길 조용한 호수에 보슬비 지나가고
一聲長笛隔蘆花 한 가닥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 들리네
直將金鼎調羹手 금솥에서 국 끓이던 그 솜씨로
還把漁竿下晚沙 도리어 낚시대 들고 저녁 모래밭으로 내려가네

 

젊은 시절에는 양화도(楊花徒)라 불리울만큼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재상이 되어서는 공명을 이루어 이름을 떨쳤다. 만년(晩年)에 고향으로 돌아가 한적(閑適)을 즐기며 쓴 작품이다. 재상의 여유를 한 눈으로 읽을 수 있으나 전구(轉句)가 지나치게 돌출하여 전편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있다. 재상의 경륜으로 낚시질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인(文人)의 경계(境界)와 다른 점이다.

 

 

이달충(李達衷, ?~1385 우왕11, 霽亭)은 성품이 강직하여 신돈(辛旽)의 전횡 시대에 신돈에게 직언을 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신돈이 주살(誅殺)된 후 다시 등용되어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고시(古詩)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낙오당감흥(樂吾堂感興)(五古), 취가(醉歌)(七古)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낙오당감흥(樂吾堂感興)을 보기로 한다.

 

將行有河海 將涉無舟航 가려니 강과 바다 건너려니 배가 없네
要見我所思 欲往還彷徨 다만 생각하는 사람 보려함이나 가려다가 도리어 주저하네
才非傅說楫 世運亦未昌 재주는 부열의 노가 되지 못하고 세상의 운 또한 트이지 않네
潛光且竢命 妄動遭禍殃 빛 숨기고 천명을 기다려야지 망령되이 움직이다 재앙을 만날 걸세

 

동문선(東文選)에 전하고 있는 팔수(八首) 중 제 7수이다. 섭세(涉世)에 신중하여야 함을 스스로 경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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