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몽주(鄭夢周)의 호방(豪放)과 이숭인(李崇仁)의 전아(典雅)
정몽주(鄭夢周, 1337 충숙왕 복위6~1392 공양왕4, 자 達可, 호 圃隱)는 인종(仁宗) 때에 문명(文名)을 드날린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그는 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과 더불어 유가(儒家)ㆍ정치가로서 시가(詩家)를 겸한 여말(麗末)의 학자 문인이다. 그가 우왕(禑王)ㆍ창왕(昌王)을 폐할 때 이성계(李成桂)에게 협력하였다 하여 이를 흠으로 일컫는 후대의 비평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기울어져 가는 고려 왕실을 붙들려다가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피살된 고려왕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은 틀림없다. 이성계(李成桂) 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그였지만, 그의 정충대절(精忠大節)만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사(高麗史)』에서도 그는 ‘반역(叛逆)’을 면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이색(李穡)이 ‘몽주가 이치를 논할 때면 횡설수설하지만 이치에 도달하지 않음이 없기에 추대되어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삼았다[夢周論理, 橫說竪說, 無非當理, 推爲東方理學之祖].’라 하여 한마디로 끝막음을 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도 김종직(金宗直)과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는 계보를 도통(道統)의 근원으로 삼았다.
그의 시 역시 호방(豪放)한 기상(氣象)과 애군허국지의(愛君許國之意) 때문에 대체로 높은 칭예를 받았다. 하륜(河崙)이 ‘말은 호방하고 뜻은 자유분방하여 조화롭지만 부류 짓는 데엔 이르지 않고 곱지만 과장됨엔 이르지 않는다[辭語豪放, 意思飄逸, 和不至於類, 麗不至於靡].’라 한 것이라든가 권채(權採)가 「포은선생시권서(圃隱先生詩卷序)」의 ‘발설하여 문장이 되는 것들이 웅장하고도 깊으며 우아하고 강인하며 넉넉하고 포괄적이며 조화롭다[發而爲文章者, 雄深而雅健, 渾厚而和平].’이라 한 것 등이 모두 ‘웅혼(雄渾)’과 ‘화아(和雅)’를 함께 말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 권하 47을 보면, 변계량(卞季良)은 ‘포은호방준장 횡방걸출기상(圃隱豪放俊壯, 橫放傑出氣象).’이라 하여 특히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을 칭도했으며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16번에서 그의 높은 조감(藻鑑)으로 ‘정포은은 이학과 절의가 한 때에 우뚝했을 뿐 아니라, 그 문장은 호방하고도 걸출했다[鄭圃隱非徒理學節義冠于一時, 其文章豪放傑出].’이라 한 것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을 함께 일컫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작(詩作)은 시문집(詩文集) 외에도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40여수나 전하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그의 시세계를 알아보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는 「춘흥(春興)」(五絶), 「강남곡(江南曲)」(七古), 「정부원(征婦怨)」(七絶) 등 수작(秀作)이 많지만 특히 그의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을 알게 해주는 것은 율시(律詩)에 더 많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홍무정사봉사일본(洪武丁巳奉使日本)」(五律),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七律), 「중구일제익양수이용명원루(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七律)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춘흥(春興)」은 다음과 같다.
春雨細不滴 夜中微有聲 | 봄비 가늘어 방울 듣지 않더니 밤중에사 조그맣게 소리 들리네. |
雪盡南溪漲 草芽多少生 | 눈이 녹아 남쪽 개울에 물이 불어났겠으니 풀 싹은 얼마쯤 돋아났을까. |
봄을 노래하고 있지만, 목전사경(目前寫景)의 수법에 의존하지 아니하였다. 가랑비 오는 것을 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자연의 이(理)에서 구하고 있어 유가시(儒家詩)의 면목이 남달리 돋보인다. 특히 ‘춘우세부적(春雨細不適)’에서 명사 ‘적(滴)’을 동사화하고 있는 기법은 동적(動的)인 미감의 표현을 한눈으로 읽게 해준다.
그런가 하면 승구(承句)의 ‘야중미유성(夜中微有聲)’에 이르러서는 빗소리가 너무 약하여 ‘군동(群動)이 정식(停息)하는 밤중에서야 가느다랗게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동정(動靜)의 대응을 높은 솜씨로 이룩하고 있다. 기구(起句)와 결구(結句)의 호응도 좋다.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는 다음과 같다.
定州重九登高處 | 정주(定州)에서 중구(重九)날 높은 곳에 오르니 |
依舊黃花照眼明 | 국화꽃 예와 같이 눈 앞에 환하네. |
浦敍南連宣德鎭 | 개펄은 남으로 선덕진(宣德鎭)에 이어졌고 |
峯巒北倚女眞城 | 산봉우리는 북으로 여진성(女眞城)에 기대었네. |
百年戰國興亡事 | 백 년 동안의 전쟁은 흥하고 망하는 일, |
萬里征夫慷慨情 | 만리(萬里)에 온 병사는 강개(慷慨)로운 정일세. |
酒罷元戎扶上馬 | 술 끝나자 대장이 말 위에 올려 주니 |
淺山斜日照紅旌 | 얕은 산 빗긴 해가 붉은 깃발 비추네. |
이 작품은 물론 관북(北關)에서 지은 것이기도 하지만,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이 달리는 듯하다. 김종직(金宗直)이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 이 작품을 뽑아주지 않은 것도 이 ‘호방(豪放)’을 싫어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려(流麗)’로 이름난 정포(鄭誧)를 보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두 작품이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정포(鄭誧)의 「중구(重九)」(五律)는 다음과 같다.
地僻秋將盡 山寒菊未花 | 땅이 궁벽하여 가을도 가려 하는데 산이 추워 아직 국화도 피지 않았네. |
病知詩愈苦 貧覺酒難賖 | 병이 드니 시 짓기 더욱 괴로운 줄 알겠고 가난할 때 술 사오기 어려움 깨닫네. |
野路天容大 村墟日脚斜 | 들길에 하늘이 크고 마을 빈 터에 햇발이 비꼈네. |
客懷無以遣 薄暮過田家 | 나그네 회포를 풀 길이 없어 어둑한 저녁 무렵 전가(田家)를 지나네. |
정(情)과 경(景)을 반반으로 뒤섞으면서 미끄럽고 곱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는 이와 대조적이다. 웅혼계(雄渾系) 시인들은 대체로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를 억제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거니와 이 작품에서도 작자는 꾸미는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문자 그대로 ‘대박이미산(大樸而未刪)’이다. 그러나 그는 미련(尾聯)에 이르러 대장이 말에 올려주었기 때문에 높이 말을 타고 있는 그는 주변에 있는 본래의 산들이야 높건 말건 일언(一言)으로 ‘천산(淺山)’으로 만들어 그의 기상(氣象)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포은시(圃隱詩)의 가장 높은 경지는 ‘기실(紀實)’에 있다. 「홍무정사봉사일본(洪武丁巳奉使日本)」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11수 중 그 네번째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平生南與北 心事轉蹉跎 | 평생 남북으로 돌아다니는 신세, 마음과 일도 따라서 어긋나네. |
故國海西岸 孤舟天一涯 | 고국은 서해안에 있고 외로운 이 몸 멀리 하늘가에 있네. |
梅窓春色早 板屋雨聲多 | 매화 핀 창에는 봄빛이 빨리 오고 나무 지붕에는 빗소리가 크네. |
獨坐消長日 那堪苦憶家 | 홀로 앉아 긴 날을 보내노라니 고향 생각 괴로움을 어찌하리요? |
동사의 사용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있지만, 전편의 구도(構圖)가 크고 넓어 호방(豪放)한 그의 기상(氣象)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실(事實)의 기술(記述)만으로도 명작(名作)을 가능케 한 학자시(學者詩)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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