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말여초시의 만당(晚唐)과의 거리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소단(騷壇)이 만당(晚唐)과 육조(六朝) 사이를 왕래하면서 문학 유교의 자유분방한 풍토에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장학(詞章學)이 떨칠 수 있는 여건은 우리 문학사(文學史)에서 보기 드문 호황을 맞이한다.
그러나 당시의 시인들이 만당(晚唐)을 배우고 육조(六朝)에 연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익히어 그것들을 우리 시(詩)로서 변용할 수 있었는지 그 현장을 점검하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다. 물론 한두 수의 시작을 대비시켜 그 영향관계를 점치거나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구체적인 사실을 통하여 만당(晚唐)과의 거리를 측정했으며 나말여초 한시의 일반적인 성격은 이미 앞에서 보였다. 그러나 많은 만당(晚唐)의 시작(詩作)들을 일일이 섭렵하여 우리 시(詩)와의 친근도(親近度)를 가늠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며 그 의미도 부여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만당(晚唐)의 대표적인 시인(詩人)으로 꼽히는 이상은(李商隱)을 비롯하여 정곡(鄭谷)ㆍ위장(韋莊)ㆍ고병(高騈) 등 일부 시인과 그 밖의 당대시인(唐代詩人)들을 대상으로하여 그 분위기가 닮아있거나 시어(詩語)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을 서로 맞대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작품의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만당(晩唐) 이전의 작품도 참고자료로 붙여 답습(踏襲)의 현장을 검색해 보았다.
① 위장(韋莊), 「금릉도(金陵圖)」
江雨霏霏江草齊 六朝如夢鳥空啼
無情最是台城柳 依舊煙籠十里堤
②-1 정곡(鄭谷), 「회상여우인별(淮上與友人別)」
揚子江頭楊柳春 楊花愁殺渡江人
②-2 두보(杜甫), 「봉기고상시(逢寄高常侍)」
汶上相逢年頗多 飛騰無那故人何
天涯春色催遲暮 別淚遙泳錦水波
③-1 왕유(王維), 「송별(送別)」
送君南浦淚如絲 君向東州使我悲
③-2 옹완(翁緩), 「절양유(折楊柳)」
紫陌金堤映綺羅 遊人處處動離歌
④ 노륜(盧綸), 「산점(山店)」
登登山路何時盡 決決溪水到處聞
⑤ 박인범(朴仁範), 「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
燈撼螢光明鳥道 梯回紅影倒岩扃
人隨流水何時盡 竹帶寒山萬古靑
雨歇長提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⑦ 고병(高騈), 「산정하일(山亭夏日)」
綠樹陰濃夏日長 樓臺倒影入池塘
⑧ 최치원(崔致遠), 「조랑(潮浪)」
石壁戰聲飛霹靂 雲峰倒影撼芙蓉
⑨ 박인량(朴寅亮), 「사송과사주귀산사(使宋過泗州龜山寺)」
巉巖怪石疊成山 上有蓮坊水四環
塔影倒江翻浪底 磬聲搖月落雲間
⑩ 이상은(李商隱), 「무제(無題)」
曉鏡但愁雲鬢改 夜吟應覺月光寒
⑪ 최광유(崔匡裕), 「장안춘일유감(長安春日有感)」
麻衣難拂路岐塵 鬂改顏衰曉鏡新
⑫ 유우석(劉禹錫), 「자낭주지경희증제군자(自朗州至京戲贈諸君子)」
紫陌紅塵拂面來 玄都觀裡桃千樹
無人不道看花回 盡是劉郞去後栽
⑬ 정지상(鄭知常), 「서도(西都)」
紫陌春風細雨過 輕塵不動柳絲斜
線窓朱戶笙歌咽 盡是李園弟子家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⑮ 김부식(金富軾),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自慚蝸角上 半世覓功名
위의 예에서 보면, 위장(韋莊)의 「금릉도(金陵圖)」(①)와 정곡(鄭谷)의 「회상여우인별(淮上與友人別)」(②), 그리고 정지상(鄭知常)의 「대동강(大同江)」(③)은 그 분위기에 있어서 너무도 가까운 거리를 느끼게 한다. 「대동강(大同江)」은 ‘강우비비강초제 육조여몽조공제 무정최시태성류 의구연롱십리제(江雨霏霏江草齊 六朝如夢鳥空啼 無情最是台城柳 依舊煙籠十里堤)’에서 봄비가 지나간 강둑의 소경(小景)을 취하고 ‘양자강두양유춘 군향소상아향진(揚子江頭楊柳春 君向瀟湘我向秦)’에서 농도 짙은 이별의 서정(抒情)을 뽑아내어 대동강(大同江)의 분위기를 서정(抒情)의 소경(小景)으로 무르익게 한다.
더욱이 정지상(鄭知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왕유(王維) 「송별(送別)」의 ‘송군남포루여사(送君南浦淚如絲)’(③-1)와 옹완(翁緩) 「절양유(折楊柳)」의 ‘유인처처동리가(遊人處處動離歌)’(③-2), 그리고 노륜(盧綸) 「산점(山店)」의 ‘등등산로하시진(登登山路何時盡)’(④), 박인범(朴仁範) 「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의 ‘인수류수하시진(人隨流水何時盡)’(⑤) 등 만당(晩唐) 이전의 당시(唐詩)에서부터 우리 시에 이르기까지 그 답습이 예상되는 시어(詩語)들을 따서 쓰고 있으며 그 소유래(所由來)가 분명한 것은 두보(杜甫)의 「봉기고상시(逢寄高常侍)」(②-2) 시(詩)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모방 수준에서 뛰어 넘어 점화(點化)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유우석(劉禹錫, 中唐)의 「자낭주지경희증제군자(自朗州至京戱贈諸君子)」(⑫)와 정지상(鄭知常)의 「서도(西都)」(⑬)는, 전자(前者)의 서정이 동적(動的)인데 반하여 후자(後者)의 그것이 정적(靜的)인 차이는 발견되지만 시인이 느낀 분위기, 감정은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을 또 알게 해준다.
다음의 것들은 답습한 인상은 지울 수 없지만, 부착(斧鑿)의 흔적 없이 자기 시(詩)로서 소화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고병(高騈) 「산정하일(山亭夏日)」의 ‘녹수음농하일장 누대도영입지당(綠樹陰濃夏日長 樓臺倒影入池塘)’(⑦)과 최치원(崔致遠) 「조랑(潮浪)」의 ‘석벽전성비벽력 운봉도영감부용(石壁戰聲飛霹靂 雲峰倒影撼芙蓉)’(⑧), 박인범(朴仁範) 「경주용삭사(涇州龍朔寺)」의 ‘등감형광명조도 제회홍영도암경(燈撼螢光明鳥道 梯回紅影倒岩扃)’(⑤), 박인량(朴寅亮)의 ‘상유연당수사환 탑영도강번낭저(上有蓮坊水四環 塔影倒江翻浪底)’(⑨)를 한자리에 펴놓고 보면,
박인범(朴仁範)의 ‘제회홍영도암경(梯回紅影倒岩扃)’과 박인량(朴寅亮)의 ‘탑영도강번랑저(塔影倒江飜浪底)’의 소유래(所由來)를 한 눈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인(前人)의 시작(詩作)을 본뜬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써 새로운 분위기를 양출(釀出)한 점화(點化)의 솜씨는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들이다.
다음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른 것은 없지만, 이상은(李商隱) 「무제(無題)」의 ‘효경단수운빈개 야음응각월광한(曉鏡但愁雲鬢改 夜吟應覺月光寒)’(⑩)과 최광유(崔匡裕) 「장안춘일유감(長安春日有感)」의 ‘마의난불로기진 빈개안쇠효경신(麻衣難拂路岐塵 鬂改顏衰曉鏡新)’(⑪)을 보면 최광유(崔匡裕)의 빈개안쇠효경신(鬂改顔衰曉鏡新)이 어디서 온 것인지 한눈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광유(崔匡裕)는 이를 수련(首聯)에서 원용(援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구(轉句)와의 연결에서 작의(作意)를 과다하게 노출시키고 있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아직 과거에 오르지도 못한 포의(布衣)의 처지에서 흰 머리가 돋아난 것을 새벽 거울을 보고 놀란다는 것은 분위기를 그만큼 감각(減却)시키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상은(李商隱)의 경우는, 이것이 경련(頸聯)에 해당하므로 대구(對句)의 효과를 이용하여 그 분위기를 최대한도로 살리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참고로 보인 김부식(金富軾)의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은 성당(盛唐)의 것을 과시(誇示)하기 위하여 이백(李白)의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의 ‘중조고비진 고운독거한(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⑭)을 경련(頸聯)에 옮겨 ‘백조고비진 고범독거경(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⑮)으로 읊어 보았지만 ‘고범독거경(孤帆獨去輕)’의 부박(浮薄)으로써 ‘백조고비진(白鳥高飛盡)’을 받쳐 주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孤)’, ‘독(獨)’, ‘경(輕)’이 모두 겹치고 있어 ‘고독한(孤獨閑)’의 여유와 운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중국시를 배우고 익히어 우리 시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감내해야만 했던 우리나라 초기 시인들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읽을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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