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박
박(駮)
맹수(猛獸)의 이름이다. 말과 비슷하며 범을 잡아먹는다 한다.
박(亳)
은(殷) 나라 성탕(成湯)의 도읍지이다.
박(狛)
짐승의 이름이다. 이리와 비슷하다.
「박계행(縛鷄行)」
두시(杜詩) 「박계행(縛鷄行)」에 “종이 닭을 시장에 팔러 가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닭이 벌레와 개미를 쪼아 먹는 것이 보기 싫어서입니다.” 하였다. 두보(杜甫)가 말하기를 “닭과 벌레는 같은 동물이니 어느 것에는 후하고 어느 것에는 박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닭을 풀어주라.” 하고 탄식하기를 “닭과 벌레 둘 다 온전할 수는 없다. 벌레를 살리자니 닭이 죽고, 닭을 살리자니 벌레가 죽는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잘못하는 것인가? 잘되고 못됨이 끝날 때가 없겠구나.” 하였다.
박고(薄姑)
은(殷) 나라 때 제후(諸侯)의 성(姓). 『사기(史記)』 「주본기(周本記)」에, “成王東伐淮夷 殘奄 遷其君薄姑”라고 보인다.
박고지금(博古知今)
옛날 일을 널리 알게 되면 오늘날의 일도 알게 된다.
박광우(朴光佑)
조선조 연산군~명종 연간의 문신. 자는 국이(國耳)ㆍ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투옥, 이어 선동(仙洞) 역에 도배(徒配)되었다가 죽었음. 시호는 정절(貞節).
박괘(剝卦)
『주역(周易)』의 박괘는 양(陽) 1획(畫)이 위에 있고 음(陰) 5획이 아래에 있어, 음이 성하고 양이 쇠하는 상(象)으로 9월에 해당하며, 10월은 음 6획인 곤괘(坤卦)가 되었다가 11월이 되면 다시 양 1획이 밑에서 생긴다. 이때문에 양이 회복한다 하여 「복괘(復卦)」라 한다. 12월은 양 2획이 아래에 있는 임괘(臨卦), 정월은 양 3획이 아래에 있는 태괘(泰卦)로서 태평의 상이 있다 한다. 박괘의 상구효(上九爻)는 양 1획이 여러 음에게 실려져 있는 상이라 하여 구오 효사(爻辭)에 “군자는 수레를 얻게 된다[君子得輿].” 하였다.
박노직(朴魯直)
노직은 박로(朴𥶇)의 자(字)이다.
박대관(朴大觀)
대관(大觀)은 박정(朴炡)의 자(字)이다. 인조(仁祖) 3년(1625) 홍문관에 재직 중 노서(老西)의 추천으로 대사헌에 임명된 남이공(南以恭)을 탄핵하다가 함평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박대균(朴大均)
연파거사(煙波居士), 박개(朴漑)의 아들로서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형.
박대포의(博帶褒衣)
폭이 넓은 띠와 품이 큰 옷을 이르는 말로, 즉 선비의 옷차림을 말한다.
박덕우(朴德雨)
덕우(德雨)는 박황(朴潢)의 자(字)이다.
박도풍(舶䑲風)
초여름에 매우(梅雨)가 내릴 때에 부는 계절풍으로, 며칠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분다. 『평강기사(平江紀事)』
박동량(朴東亮)
광해군 5년(1613)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박동량이 모반 혐의로 심문을 받던 중에, 반역 관계는 극구 부인하면서도 선조(宣祖)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使嗾)로 궁녀들이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유릉(裕陵)에 저주했다는 무고(誣告)는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그의 그러한 태도 때문에 인목대비가 유폐(幽閉)되게 했다는 죄목으로 부안(扶安)에 유배되었다.
박람강기(博覽强記)
고금의 글을 널리 읽고 사물을 기억한다. 넓게 보고 두루 그 내용을 잘 기억한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고 사물을 잘 기억함
박람구경(博覽九經)
오(吳) 나라 대제(大帝) 손권(孫權)이 조자(趙咨)를 위(魏)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보냈더니, 위제(魏帝) 조비(曹丕)가 묻기를, “오왕(吳王)이 학문을 아는가.” 하였다. 조자가 답하기를, “오왕이 경전(經傳)을 박람(博覽)하여 기이(奇異)한 것을 채취(采取) 합니다.” 하였다.
박랑(博浪)
박랑사(博浪沙).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이다. 장량(張良)이 한(韓) 나라 원수를 갚기 위해 철퇴로 진시황(秦始皇)을 저격했다가 실패한 곳.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박망망(泊莽莽)
아득히 먼 데 머물다
박망사(博望槎)
① 박망후는 한(漢) 나라 장건(張騫)의 봉호이다. 장건은 무제(武帝) 때 대월지국(大月氏國)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匈奴)에게 포로가 되어 고절(苦節)을 굳게 지키다가 13년 만에야 돌아와서, 서역(西域) 제국에 국위를 크게 선양한 공으로 박망후에 봉해졌다. 뗏목의 고사에 대해서는, 『한서(漢書)』 장건전(張騫傳)에는 “한 나라 사신이 은하수까지 갔다[漢使窮河源].” 한 말만이 있을 뿐인데, 이를 후인들이, 곧 장건이 뗏목을 타고 은하수까지 갔던 것이라고 부회(附會)함으로 인하여, 심지어 두보(杜甫) 같은 시인도 여러 차례 이 고사를 인용하였으나, 사실 여부는 자세하지 않다.
② 사신이 타고 가는 배를 말한다. 박망후(博望侯)는 한 나라 장건(張騫)의 봉호(封號)이다. 한 나라 무제(武帝)가 장건을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고 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박망승사(博望乘槎)
박망후(博望侯)는 한(漢) 나라 장건(張騫)의 봉호이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무제(武帝)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槎)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박망역(博望役)
어렵고 힘든 사신의 임무를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이 흉노를 제압하기 위하여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장건전(張騫傳)」
박망후(博望侯)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신(使臣) 장건(張騫)의 봉호이다. 장건은 일찍이 대월지국(大月氏國)에 사신으로 가다가 흉노(匈奴)에게 포로가 되어 고절(苦節) 10년을 겪고, 틈을 보아 흉노에게서 탈출하여 대월지국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사기(史記)』 卷一百十一
박물지(博物志)
장화(張華)는 진(晉) 나라 혜제(惠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냈으며 박학다식하여 참위(讖緯)ㆍ방기(方技)의 책에 이르기까지 상람(詳覽)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박물지(博物志)는 바로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저서이다. 『진서(晉書)』 卷36
박미중(朴美仲)
미중(美仲)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자이다.
박박(剝剝)
문 두드리는 소리, 사람의 발소리
박박(拍拍)
새가 날개 치는 소리의 형용 / 인용: 永保亭(박은)
박벌(薄伐)
“오랑캐를 가볍게 쳐서(薄伐玁狁)”라는 구절이 있는데, 주(周)의 선왕(宣王)이 오랑캐를 물리친 것을 칭송한 시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유월(六月)」 / 인용: 金將軍應河輓(송영구)
박부주선료일생(拍浮酒船了一生)
진(晉) 나라 필탁(畢卓)이 “수백 섬의 술을 배에다 싣고 나서 한 손엔 게 다리 한 손엔 술잔을 들고 주지(酒池)를 떠다니면서 일생을 마쳤으면 좋겠다.”고 말한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畢卓傳
박부추수(剝膚椎髓)
한유(韓愈)가 사용했던 말로, “살을 깎고 골수를 부순다[剝膚椎髓]”는 뜻이다. ‘가혹한 수탈 정책’을 상징하는 말이다. / 인용: 豪民論(허균)
박빙여림(薄氷如臨)
마치 엷은 얼음(살얼음)을 밟는 듯한다. 매우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 또는 살얼음을 걸어갈 때에는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아주 위태로운 일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
박사(亳社)
은(殷) 나라의 사당을 말한다. 은 나라가 박(亳)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망국(亡國)의 사당’을 말한다.
박사암(朴思菴)
사암은 박순(朴淳)의 호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명종(明宗) 8년(1553)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장원한 뒤, 선조(宣祖) 5년(1572)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재직했는데, 동서(東西) 당쟁이 격심할 무렵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편들다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은거하기에 이르렀다.
박산(博山)
① 중국 산동성(山東省) 박산현(博山縣)에 있는 산.
② 향로의 이름인 박산로(博山爐)를 말한다.
박산로(博山爐)
옛날 향로(香爐)의 이른다.
박상(搏桑)
동쪽 바다의 해 돋는 곳에 있다는 신목(神木)을 이르는데, 또는 그 신목이 있는 곳을 가리키기도 한다.
박상지(朴尙之)
상지는 박서(朴遾)의 자이다.
박서(搏黍)
모시(毛詩)의 황조우비(黃鳥于飛)의 주에 ‘황조는 박서새다’ 하였다.
박서(朴犀)
몽고군(蒙古軍)을 격파한 고려의 명장. 고종(高宗) 18년(1231) 몽고 장수 살리타(撒禮塔)가 쳐들어왔을 때 박서가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으면서 김중온(金仲溫),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구주(龜州)를 사수하며 한 달간이나 격전을 벌여 이를 격퇴했으며, 이에 구주를 버리고 개경(開京)을 먼저 함락시켜 고종의 항복을 받은 뒤 다시 공격해 온 몽고군을 또 다시 대파하여 그 용명(勇名)이 천하를 진동시켰는데, 마침내는 항복하라는 왕명을 받고서 항복한 고사가 있다.
박선적(縛禪寂)
선적은 불가(佛家)에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 조용히 명상(冥想)에 잠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얽매인다는 것은 곧 그 목적인 진리는 깨닫지 못하고 행위에만 얽매임을 말한 것으로, 두보(杜甫)의 시에 “나도 승찬과 혜가를 스승삼아, 몸이 오히려 선적에 얽매였네[余亦師粲可 身猶縛禪寂].”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三
박속방기정(薄俗防機阱)
온갖 핑계를 대고 겁을 주면서 찾아 온 손님의 면회를 사절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薄俗防人面 全身學馬蹄”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20, 課小豎 鋤斫舍北果林 枝蔓荒穢淨訖移牀 2
박송당(朴松堂)
송당(松堂)은 조선 성종(成宗) 때의 무신이며 학자인 박영(朴英)의 호이다.
박수아(拍手兒)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양양(襄陽)의 어린이가 다 손뼉치며 길 막고 백동제(白銅鞮)를 부른다는 구절이 있다[].
박수제창양양가(拍手齊唱襄陽歌)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양양의 아이들이 손뼉치며 거리를 질러막고 백동(白銅 노래 이름)을 부른다[襄陽小兒齊拍手 攔街爭唱白銅鍉 ].”는 구절이 있다.
박순(朴淳)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박식(薄蝕)
해와 달에 빛이 없는 것을 박이라 하고, 한쪽이 훼손되는 것을 식이라 한다.
박액(迫阨)
협박과 곤궁(질투).
박약(博約)
『논어(論語)』 「옹야(雍也)」, 「안연(顔淵)」에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면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不畔矣].” 한 데서 온 말이다.
박약간이(博約簡易)
송(宋) 순희(淳熙) 2년(1175) 육상산과 주희가 여동래(呂東萊)의 주선으로 신주(信州) 아호사(鵝湖寺)에서 만나 학풍(學風)에 관해 3일 동안 토론했으나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결렬되었는데, 박람한 뒤 요약(博約)하려고 한 주희는 육상산을 태간(太簡) 공소(空疏)하다고 비판하고, 우선 본심(本心)을 밝혀야 함(簡易)을 강조한 육상산은 주희를 지리(支離)하다고 비판하였다.
박양(剝陽)
마지막 하나 남은 양(陽)의 기운이 맨 위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 박괘(剝卦)의 시절이라는 뜻으로, 음력 9월을 가리킨다.
박연(博衍)
널리 퍼지다.
박옥(璞玉)
정련(精鍊)하지 않은 옥돌.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에 “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세 차례나 형벌을 받아가면서까지 왕에게 박옥을 바친 일이 있다.” 하였다.
박옥혼금(璞玉渾金)
박옥(璞玉)은 갈고 닦지 않은 옥, 혼금(渾金)은 아직 제련하지 않은 금. 곧 검소하고 질박한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박옹(泊翁)
동번(東樊) 이만용(李晩用)의 아버지인 이명오(李明五)의 호이다. 자는 사위(士緯). 시에 능했다. 정종(正宗) 때 사람이다.
박우(朴牛)
길들인, 쟁기를 끌 수 있는 소.
박원(璞冤)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옥덩이를 얻어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드렸으나 가짜라는 오인을 받고 왼발과 오른발을 차례로 잘리운 다음 옥덩이를 안고 슬피 울다가 문왕(文王)의 배려로 진짜임이 밝혀졌다.
박원제(縛元濟)
당(唐) 나라 헌종(憲宗) 때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켜서 오랫동안 평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있던 이소(李愬)가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눈 오는 밤중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포박하였다. 『신당서(新唐書)』 卷154 李晟列傳 李愬
박이부정(博而不精)
여러 방면으로 많이 아나 정통하지 못한다.
박자건(朴子建)
자건은 박홍중(朴弘中)의 자(字)이다.
박자흥(朴自興)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이요, 이이첨(李爾瞻)의 사위이며, 그의 딸은 광해군의 세자빈이었다.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하며 자책해 마지않았던 자기 부친과는 정반대로, 형조 참판으로서 폐비절목(廢妃節目)을 작성하는 등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廢黜)에 앞장섰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군사를 모아 광해군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려다가 부친의 만류를 받고는 마침내 부자(父子)가 함께 목매어 자결하였다.
박장대소(拍掌大笑)
손바닥을 치면서 크게 웃음.
박정길(朴鼎吉)
조선조 광해군 때 병조참판을 지냈고, 인조반정 후에 죽음을 당했다.
박중구(朴仲久)
중구는 박장원(朴長遠)의 자(字)이다.
박중련(朴仲漣)
중련은 박의(朴漪)의 자(字)이다.
박진양부생(剝盡陽復生)
박은 『주역(周易)』의 괘 이름으로 음(陰)이 자라나서 양(陽)이 없어져 가는 괘니 간상곤하(艮上坤下)로서 음력 9월에 해당됨. 이 상구(上九)가 변해서 곤괘(坤卦)가 되면 10월에 해당하고 11월이 되면 다시 한 양이 자라나서 곤상진하(坤上震下)의 「복괘(復卦)」가 됨을 말한다. 『주역(周易)』 總目
박천(薄天)
‘하늘에 닿다’라는 말이다.
박체(駁遞)
벼슬아치가 대각(臺閣)의 탄핵으로 갈리는 일.
박초풍(舶超風)
음력 5월에 부는 바람을 말한다.
박충원(朴忠元)
자는 중초(仲初)로 판서까지 되었으며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박취금(朴醉琴)
박팽년(朴彭年)을 말한다. 그의 호가 취금헌(醉琴軒)이다.
박탁(剝啄)
문을 두드린다는 뜻으로 즉 손님이 찾아옴을 말한다.
박탁명(剝啄鳴)
손님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
박탁풍(舶趠風)
계절풍을 말한다. 초여름에 매우(梅雨)가 내릴 때에는 반드시 큰 바람이 며칠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분다고 한다. 『평강기사(平江紀事)』
박학과(博學科)
당 나라 개원(開元) 19년에 학식이 많고 글 잘하는 사람을 시험 보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를 두었다. 『당서(唐書)』 「육지전(陸贄傳)」
박학다식(博學多識)
‘학문이 넓고 아는 것이 많음’을 말한다.
박학심문(博學審問)
두루 널리 배우고 자세하게 따져 물음. 곧, 바람직한 학문의 자세(학문 연구의 방법)를 말함 『중용(中庸)』 20장 / 인용: 우린 등산하며 공부한다, 책 밖에 길이 있다
박혁현호이(博奕賢乎已)
“장기와 바둑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라도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不有博弈者乎, 爲之猶賢乎已].” 하였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박회양(薄淮陽)
한 무제(漢武帝)가 급암(汲黯)을 불러 회양태수(淮陽太守)를 제수하였는데, 급암이 사양하고 인(印)을 받지 않자, 무제가 이르기를 “그대는 회양을 박하다고 여기는가? …… 회양의 이민(吏民)들이 서로 불화하므로, 내가 그대의 중(重)함을 얻어서 편히 누워 그 곳을 다스리고자 한다[君薄淮陽邪? 吾今召君矣. 顧淮陽吏民不相得, 吾徒得君之重, 臥而治之].” 한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급암전(汲黯傳)
박효백(朴孝伯)
퇴우당(退憂堂), 박승종(朴承宗)의 자로서 시호는 숙민공(肅敏公)이다.
박희(薄姬)
박씨 계집이란 바로 진(秦) 나라 말기에 이왕 표(魏王豹)의 궁중(宮中)에 있었던 미천한 신분의 여자였는데, 위왕 표가 멸망한 뒤에 그가 한 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문제(文帝)를 낳았는바, 문제가 대왕(代王)에 봉해지자 대태후(代太后)가 되었고, 문제가 제위(帝位)에 오름에 미쳐서는 황태후(皇太后)가 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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