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예
예(羿)
① 봉황(鳳凰)과 비슷하면서도 봉황이 아닌 새의 이름이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옥규를 사마로 삼고 예를 타노라(駟玉虯而乘翳)”하였다.
② 옛날에 활을 잘 쏘던 사람의 이름이다. 『맹자(孟子)』 「이루(離婁)」 下에 “방몽(逄蒙)이 예(羿)에게 활 쏘는 법을 배워 예의 기술을 다 배우고는 천하에 오직 예만이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 예를 죽였다.” 하였다.
③ 요(堯)때의 명사수(名射手). 요 임금 때 열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나와 초목이 다 말라죽으므로 요가 예로 하여금 쏘게 하니 일(日)중에 있던 아홉 까마귀가 죽어서 날개를 떨어뜨리고 하나가 남았다고 한다. 예가 태양을 향해 활을 쏘았을 때 하늘의 해가 터지고 금빛 깃털들이 이리저리 흩날렸는데 떨어진 것을 보니 거대한 삼족(三足)의 까마귀였다고 한다. 참고로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에 “一日方至, 一日方出, 皆戴于烏”라 하였다.
④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전설상의 영웅. 유궁후(有窮后) 예(羿)를 가리킨다.
예개인오설(禮豈因吾設)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완적(阮籍)이 어떤 이와 바둑을 두고 있다가 모친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그냥 태연하게 바둑을 다 끝낸 뒤에, 술 두 말을 다 마시고 한 번 통곡하면서 몇 되의 피를 쏟았는가 하면, 장례에 임해서도 삶은 돼지고기에 다시 술을 마시고 통곡하며 피를 쏟는 등 뼈만 앙상한 몰골로 거의 멸성(滅性)의 단계에 이르렀는데, 조문객이 그의 행태를 의아하게 여겨 묻자 완적이 이에 대답하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예거(曳裾)
긴 옷자락을 늘어뜨린다[曳長裾]의 준말로, 즉 ‘왕후의 문에 출입한다’는 뜻이다.
예견칭의사(禮遣稱義士)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온나라 치는 것을 말리므로 좌우에서 죽이려 하는 것을 태공이 “이는 의사(義士)다.” 하고 붙들어서 가게 하였다.
예구비오추(羿彀飛烏墜)
예(羿)는 태곳적 오랑캐족의 수령으로 활을 잘 쏘았다는 사람이다. 당요(唐堯)때 열 개의 태양이 함께 떠올라 초목이 말라버려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당요가 그에게 아홉 개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게 하였는데 태양 속에서 산다는 까마귀가 다 죽어 날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한다. 『회남자(淮南子)』 本經
예구중(羿彀中)
후예는 하(夏) 나라 때 사람으로 활을 매우 잘 쏘았고, 구중은 화살이 미치는 범위 이내라는 뜻으로, 전하여 사람을 농락하는 술중(術中)의 의미로 쓰인다.
예기비(禮器碑)
한(漢) 시대에 노(魯) 나라 재상 한칙(韓勅)이 공자묘(孔子廟)에 예기비(禮器碑)를 만들었는데, 비는 분서(分書)로 되어서 지금 세상에도 예서(隸書)를 익히는 사람은 범본(範本)으로 삼고 있다.
예둔(銳鈍)
날카로움과 무딘 것을 말한다.
예라(禮羅)
그물로 새나 물고기를 잡듯이 예로써 인재(人才)를 맞아들여 등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리상가(曳履商歌)
증자(曾子)가 7일을 굶고 신을 끌면서 상송(商頌)을 외우는 소리가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다 하였다. 『장자(莊子)』 「양왕(讓王)」
예망역치흉(羿莽亦致凶)
예(羿)는 하(夏) 나라 때의 제후인 유궁국(有窮國)의 임금 이름인데, 그는 하 나라를 찬탈하였으나 끝내 자기 신하인 한착(寒浞)에게 멸망당하였다. 망(莽)은 곧 한(漢) 나라 황실의 외척인 왕망(王莽)을 가리키는데, 그 역시 한 나라를 찬탈하여 신(新) 나라를 세웠으나 끝내 광무제(光武帝)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좌전(左傳)』 양공(襄公) 『한서(漢書)』 卷九十九
예맥(刈麥)
‘보리를 수확하다’는 뜻이다.
예맥(濊貊)
① 한족(韓族)의 조상이 되는 민족.
② 고조선(古朝鮮) 관할 경내에 있던 나라로서,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을 가리킨다.
예문지(藝文志)
정사 기록 가운데 그때에 있던 책의 목록을 말함.
예미(曳尾)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닌다’는 뜻으로 부귀를 누리면서 구속된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낫다는 말의 비유하였다. 그래서 벼슬길에 속박받지 말고 향리에서 안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거북이 죽어서 뼈를 묘당(廟堂) 위에 얹혀서 귀여움을 받기보다는 살아서 꼬리를 진흙탕 속에 끌고 다니는 것이 나을 것이다[此龜者, 寧其死爲留骨而貴乎? 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 하였다. / 유의어: 예미도중(曳尾塗中)
예백(曳白)
과거 보던 시대에 고권(考卷)을 등사하면서 엽(葉)을 건너뛰는 것을 말한다.
예범(倪范)
원(元) 나라 때의 문인화가로서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던 예찬(倪瓚)과 송(宋) 나라 때의 화가로서 역시 산수화를 잘 그렸다는 범관(范寬)을 합칭한 말이다.
예부투영약(羿婦偸靈藥)
하우(夏禹) 때 유궁후(有窮后) 예(羿)가 불사약(不死藥)을 얻어다 감춰 둔 것을 그 아내가 훔쳐먹고 신선이 되어 월궁(月宮)에 도망가 항아(姮娥)가 되어 홀어미로 광한전(廣寒殿)에 거처한다는 전설이 있다.
예빈원(禮賓院)
제후국의 빈객을 접대하는 관청 이름이다.
예상(翳桑)
무성한 뽕나무라는 뜻인데, 일설에는 지명이라고도 한다.
예상(霓裳)
당나라 현종(玄宗)이 꿈에 천상에 가서 배워왔다는 온 춤이다.
예상무(霓裳舞)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의 준말이다. 당 현종(唐玄宗)이 꿈에 본 달 나라 선녀들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춤인데, 양 귀비(楊貴妃)가 잘 추었다. 이때 입었던 춤 옷은 희고 긴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예상우의(霓裳羽衣)
① 나공원(羅公遠)이 비술(秘術)이 많았는데, 일찍이 현종(玄宗)과 함께 월궁(月宮)에 이르니, 선녀 수백이 흰 비단 무지개 치마로 넓은 뜰에 춤추고 있었다. 그 곡을 물으니, ‘예상우의(霓裳羽衣)’라 했다. 공원이 잠자코 그 음조를 기억하고 돌아와 다음날 악공을 불러 그 음조대로 ‘예상우의곡’을 지었다.
② 일사(逸史)에 “나공원(羅公遠)이 지팡이를 허공에 던져서 은교(銀橋)를 화현(化現)시키고 명황을 안내하여 월궁에 들어갔다. 이에 선녀(仙女) 수백 명이 다 하얀 명주옷 차림으로 넓다란 궁정(宮庭)에서 춤추는 광경을 보고 그 곡(曲)을 묻자 예상우의(霓裳羽衣)라고 했다.” 하였다.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① 당(唐) 나라 현종이 꿈에 천궁(天宮)에 가서 선녀(仙女)들이 무지개치마 깃 옷(霓裳羽衣)으로 춤추며 음악하는 것을 보고 깨어난 뒤에 그것을 기억하여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만들어서 양귀비(楊貴妃)와 향락(享樂)하였더니, 그 뒤 안녹산(安祿山)의 난(亂)이 끝난 뒤에 개원(開元 현종의 처음 연호) 시대의 태평 세월을 보던 늙은이들이 어떤 사람이 부르는 예상우의곡을 들으며 추억의 눈물을 흘렸다.
② 현종이 도사 엽법선(葉法善)이라 사람의 도술로 월궁(月宮)에 올라가 보았는데, 월궁 항아들이 무지개같은 치마와 새털로 된 옷을 입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고와서 그 곡조대로 작고하여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과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를 창작하여 그것을 양귀비에게 추게 하였다.
예서(隸書)
전서가 복잡하여 실용생활에 쓰기에는 어려움을 느끼고 간소화시킨 것이다. 이는 특히 노예를 관리하던 문서에 쓰였다 하여 ‘노예 예’자를 써서 隸書라 한다. 소전의 속필체(필기체?)라고도 하는 이 예서(隸書)는 필법이 소전보다 간략하여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한대(漢代)에 와서 예서는 당시에 통용되던 글자체가 되어 ‘한예(漢隸)’,‘금예(今隸)’라고도 불렸다. 소전에서 예서로 발전함에 따라 전통적인 육서의 조례를 파괴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서의 특징은 우선 구불구불한 획들을 곧은 획으로 고쳤으며, 부수의 위치가 다름에 따라 상이한 필법을 취하였고, 같은 글자인데도 불구하고 각기 다르게 표현되던 부분들이 같은 형체를 취하게 되었다는 점등을 들 수 있다.
예성(蕊城)
충주(忠州)의 옛 이름이다.
예송(禮訟)
조선조 효종 기해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복제로 인한 예송(禮訟)이 유신(儒臣) 허목(許穆)ㆍ송시열(宋時烈)의 사이에서 일어났음.
예순이동(豫順以動)
예는 모든 일을 미리 대비함으로써 즐거움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 「예괘(豫卦)」 단사(彖辭)에 “예는 순하고 동한다[豫順以動].” 하고, 또 “예의 시기와 의리가 크다[豫之時義 大矣哉].” 한 데서 온 말이다.
예양(豫讓)
전국시대(戰國時代) 진(晉) 나라 사람으로, 조양자(趙襄子)를 죽여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으려고 스스로 벙어리가 되기까지 했던 유명한 자객(刺客)이다. 조양자가 예양에게 “어째서 옛날 섬기던 주인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유독 지백을 위해서만 복수를 하려 하는가?”하고 묻자, “옛날 범씨와 중행씨를 섬길 때 그들이 나를 보통 사람(衆人)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했지만,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했기 때문에 나 역시 국사의 입장에서 보답하려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던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卷86 「자객열전(刺客列傳)」,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 /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 사람으로 임금 지백(智伯)이 조 양자(趙襄子)에게 죽임을 당하자,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이로 가장하고 숯을 삼켜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발각되어 죽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 「주본기(周本紀)」
예양교(豫讓橋)
전국시대(戰國時代) 지백(智伯)의 충신 예양(豫讓)이 조양자(趙襄子)에게 피살된 다리. 양자가 그의 원수 지백을 죽이고 지씨의 종족을 멸하자, 지백의 국사(國士) 대접을 받던 예양은 원수를 갚기 위해 온몸에 옻칠하여 나환자처럼 꾸미고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된 다음, 시장에서 걸인 행세를 하니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 마침 그를 알아본 친구가 “조양자를 섬기다가 기회를 노려 복수하면 쉬울 터인데 뭣하러 이런 고생을 하는가?” 하자 그는 글을 써서 대답하기를 “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는 뜻은 장차 천하 후세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고 해서이다.” 하고는 끝내 충절을 지켰으며, 뒤에 양자를 죽이려고 다리 밑에 숨었다가 결국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卷86 「자객열전(刺客列傳)」,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
예양탄탄감단시(豫讓呑炭邯鄲市)
전국시대(戰國時代) 진(晉) 나라 지백(智伯)의 신하 예양(豫讓)이 자기 임금을 죽인 조양자(趙襄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몸에는 옻칠을 발라 문둥이처럼 꾸미고 숯불로 혀를 태워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품안에 비수를 품고 조양자 변소에 들어가서 양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음. 『사기(史記)』 卷86 「자객열전(刺客列傳)」,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
예예(橤橤)
꽃술마다, 드리워져 떨어지는 모양
예예(曳曳)
나부끼는 모양, 힘들일 때 내는 소리, 함성, 웃음소리
예예(呭呭)
수다스러운 모양
예오(倪汚)
난찬예오(嬾瓚倪迂)의 준말로 원(元) 나라 예찬(倪瓚)의 호이다. 시화(詩畵)에 능하였다. 만년에 전원에 묻혀 명화(名畵)와 전적을 많이 수집해 놓고 스스로 호를 운림거사(雲林居士)라 하였다.
예우(倪迂)
원(元) 나라 때의 문인화가인 예찬(倪瓚)의 호이다. 예찬이 평소에 삼묘호를 왕래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한다.
예원(藝苑)
① 글을 저술하는 일을 담당하거나 서책을 간수하는 곳으로, 홍문관과 예문관 따위를 가리킨다.
② 국가의 문장 짓는 곳이나, 일정한 관청은 없고 지제교(知製敎)라는 관직만이 있다.
예원자황(藝苑雌黃)
송(宋) 나라 엄유익(嚴有翼)이 지은 책으로, 현존하는 것은 후인의 가탁이라 한다.
예원진(倪元鎭)
원(元) 나라 때의 뛰어난 문인화가인 예찬(倪瓚)을 이른다. 예찬의 자는 원진(元鎭)으로 시ㆍ서ㆍ화에 모두 뛰어났는데, 명(明) 나라가 창업함에 이르러 그는 대삿갓을 쓰고 일엽편주를 타고서 진택(震澤)ㆍ삼묘(三泖) 사이를 왕래하며 숨어살았다. 『명사(明史)』 卷二百九十八
예원치언(藝苑巵言)
왕세정이, 명(明) 나라 서 정경(徐禎卿)이 찬한 『담예록(談藝錄)』과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의 미비점을 보충해 만든 책. 총 6권으로 되었다.
예위(禮闈)
과거(科擧) 회시(會試)를 말한다.
예이가상(曳履歌商)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뒤축이 없는 신발을 끌고 상송(商頌)을 노래하는데 소리가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하였다.
예장(豫樟)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교목인 녹나무이다. 「술이기(述異記)」에 “曳長裾 7년을 자라야 알아볼 수 있다. 한 무제(漢武帝) 보정(寶鼎) 2년에 예장관(豫樟官)을 설치하고 곤명지(昆明池) 가운데에 예장전(豫樟殿)을 건축하였다.”고 하였다.
예장(豫章)
① 녹나무의 일종. 천하에 이름 높은 재목으로 일컬어진다. 『산해경(山海經)』 주(註)에, “예장(豫章)은 큰 나무인데 추(楸)와 같다.” 하였다.
② 침목(枕木)과 장목(樟木)의 병칭으로, 흔히 동량지재(棟梁之材)로 쓰이는 거목이다.
예장유자(豫章孺子)
유자(孺子)는 후한(後漢) 서치(徐穉)의 자(字)이다. 벼슬에 응하지 않고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로 일컬어졌으며, 태수(太守) 진번(陳蕃)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는데, 그의 고향이 바로 예장(豫章)의 남창(南昌)이다. 『후한서(後漢書)』 卷84
예장천심죽전조(豫章千尋竹箭稠)
죽(竹)은 대죽(大竹), 전(箭)은 소죽(小竹)으로서 즉 대소(大小)의 인재들이 천하의 명목(名木)인 예장(豫章)처럼 길러지고 있다는 말이다.
예정(霓旌)
오색 깃털로 만든 깃발로, 천자(天子)의 의장(儀仗) 가운데 하나이다.
예정리(曳鄭履)
한 애제(漢哀帝) 때 상서복야(尙書僕射) 정숭(鄭崇)이 직간을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그는 임금을 뵈러 대궐을 들어갈 때마다 가죽신을 끌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卷七十七
예좌(猊座)
① 부처를 가리킨다. 부처는 사람 가운데 지극히 높은 존재라 하여 백수(百獸)의 왕(王)인 사자(獅子)에게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② 사자 모양으로 만든 불좌(佛座), 부처나 고승(高僧)이 앉는 자리를 말한다.
예주(蕊珠)
꽃과 구슬로 꾸민 궁전(宮殿)을 말한다.
예주(睨柱)
전국(戰國) 시대 때 조(趙) 나라 인상여(藺相如)가 왕명(王命)으로 화씨벽(和氏璧)을 가지고 진(秦)의 15성(城)과 바꾸려 진정(秦廷)에 가서 구슬을 소왕(昭王)에게 바쳤더니 왕이 받고 성을 줄 뜻이 없는지라, 상여가 계교로 구슬을 도로 받아들고 이내 몇 걸음을 물러나 돌기둥을 흘기며, “억지로 이 구슬을 빼앗으려면 이 구슬이 신(臣)의 머리와 함께 기둥에 부딪쳐 부숴지리이다.” 하였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전(廉頗藺相如傳)」
예주(蘂州)
충주(忠州)의 옛 이름으로 예성(蕊城)이라고도 한다.
예주경(蕊珠經)
도교(道敎)의 경전 이름이다.
예주궁(蕊珠宮)
도교의 경전에 나오는 전설상의 선궁(仙宮)인데, 여기서는 절을 뜻하는 듯하다.
예지사일(羿之射日)
요(堯) 임금 때에 해 열 개가 한꺼번에 뜨니 초목이 모두 마르므로, 후예(后羿)가 활로 쏘아 아홉 해를 떨어뜨렸다 한다.
예착(羿浞)
하(夏) 나라 때 있었던 오랑캐 나라의 임금들로, 모두 사냥이나 포악한 짓을 일삼다가 나라를 망치고 자신을 망친 사람들이다. 예는 궁(窮) 나라의 임금이었는데, 어진 신하들을 멀리하고 착(浞)을 총애하다가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으며, 예 대신에 나라를 차지한 착 역시 포악한 짓을 하다가 나라를 망쳤다.
예착상위(枘鑿相違)
예는 둥근 장부를 말하고 착은 네모진 구멍을 뜻한 것으로, 둥근 장부를 네모진 구멍에 넣으면 맞지 않듯이 쌍방(雙方)이 서로 맞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예찬(倪瓚)
원(元) 나라 때의 문인화가(文人畫家)로서 산수화(山水畫)에 극치를 이루었고 시(詩)에도 뛰어났다. 예찬의 자는 원진(元鎭), 호는 예우(倪迂)이다. 시ㆍ서ㆍ화에 모두 뛰어났는데, 명(明) 나라가 창업함에 이르러 그는 대삿갓을 쓰고 일엽편주를 타고서 진택(震澤)ㆍ삼묘(三泖) 사이를 왕래하며 숨어살았다. 『명사(明史)』 卷二百九十八
예처(羿妻)
옛날 유궁(有窮)의 임금 예(羿)의 아내인 항아(姮娥)를 말한다. 예(羿)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놓았는데, 아직 먹기도 전에 그의 처가 몰래 복용하고는 신선이 되어 달속으로 숨어 들어가 월정(月精)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회남자(淮南子)』 卷6 「현명훈(賢冥訓)」
예천(醴泉)
태평시대에는 상서(祥瑞)로서 땅에서 예천(醴泉)이 솟아난다 한다. 예천은 샘 맛이 달아서 단술과 같다는 말이다. 『예기(禮)』 「예운(禮運)」에 “天降甘露 地出醴泉”이라는 대문이 있다.
예학명(瘞鶴銘)
남조(南朝)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이 글을 짓고 상황산초(上皇山樵)가 글씨를 쓴 비각(碑刻)이름인데, 필법이 꾸밈이 없이 순수하여 서예의 진수로 평가되고 있다.
예형(禰衡)
동한(東漢) 평원(平原) 사람으로 자는 정평(正平)인데 공융(孔融)과 친히 지냈다. 공융이 그의 문재(文才)를 대단히 아낀 나머지, 예형이 겨우 20여 세에 공융은 40세였지만 마침내 교우(交友)가 되었다. 공융은 상소하여 예형을 천거하면서 “새매[鷙] 수백 마리가 독수리 한 마리보다 못합니다. 만약 형이 조정에 서게 된다면,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젊었을 때 재주가 있고 언변이 좋아 명사로 이름났으나 지나치게 강직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다가 강하 태수(江夏太守) 황조(黃祖)에게 살해당했다. 『후한서(後漢書)』 「녜형전(禰衡傳)」
예형패신(禰衡敗身)
예형(禰衡)은 한(漢) 나라의 문인(文人)으로, 재주를 믿고 오만하여 조조(曹操)를 모욕하고 쫓겨나 황조(黃祖)에게 의지하여 앵무부(鸚鵡賦)를 지어 칭찬도 받았으나 끝내 황조의 비위를 거슬려 피살(被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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