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영
영가(永嘉)
① 남조 송(南朝宋) 때 사령운(謝靈運)이 영가태수(永嘉太守)로 나갔을 적에 영가군에는 이름난 산수가 많았으므로, 사령운이 산수를 대단히 좋아하여 여러 현(縣)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마음껏 완상하고 가는 곳마다 시(詩)를 읊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송서(宋書)』 卷六十七
② 복주(福州)ㆍ영가(永嘉)는 모두 안동(安東)의 고호(古號)이다.
③ 진 회제(晉懷帝)의 연호
영가(嬴家)
진시황(秦始皇)의 성(姓)이 영씨(嬴氏)로, 즉 진(秦) 나라를 지칭한 말이다.
영가납극개족도(永嘉蠟屐豈足道)
선불교(禪佛敎)에서 말하는 깨달음 같은 것은 거론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당(唐) 나라 영가(永嘉)의 현각선사(玄覺禪師)가 조계(曹溪)의 육조대사(六祖大師)를 만나 언하(言下)에 계오(契悟)하고 하룻밤을 묵은 뒤 떠나갔으므로 당시에 일숙각(一宿覺)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전등록(傳燈錄)』 卷5ㆍ宋高僧傳 卷8
영가산수(永嘉山水)
남조(南朝) 송(宋)의 문인 사영운(謝靈運)이 좌천되어 영가 태수(永嘉太守)로 내려간 뒤 산수 좋은 석문산(石門山)에서 시를 지으며 오유(遨遊)했던 고사가 있다.『송서(宋書)』 卷67 / 이백(李白)의 시에 “康樂上官去 永嘉遊石門”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태백집(李太白集)』 卷19 與周剛 淸溪玉鏡潭宴別
영가시비(永嘉是非)
일숙각(一宿覺)으로 유명한 당나라 승려 영가의 「증도가(證道歌)」에 “그르다고 하는 것도 사실 그른 것이 아니고, 옳다고 하는 것도 사실 옳은 것이 아니니, 처음에 털끝만큼이라도 분별심을 낸다면 나중에는 천리나 어긋나게 될 것이다.[非不非是不是 差之毫釐失千里]”라는 말이 나온다. / 인용: 寂菴記(이색)
영각(鈴閣)
한림원 혹은 장수나 지방 장관이 집무하는 곳을 말한다. 영헌(鈴軒)과 같은 말로 지방 수령이 집무하는 관청.
영갑(令甲)
법령(法令)의 제일장(第一章).
영객가(郢客歌)
따라 부르기 힘든 상대방의 고아(高雅)한 노래를 말한다. 영(郢)은 초(楚) 나라의 수도로, 그곳에서 불리워지는 양춘백설곡(陽春白雪曲) 등은 겨우 수십 명밖에 따라 부르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其爲『陽阿』ㆍ『薤露』, 國中屬而和者數百人; 其爲『陽春』ㆍ『白雪』, 國中屬而和者不過數十人而已]].
영견조이불면(嬰罥組而不免)
패공(沛公) 유방(劉邦)이 진 나라에 쳐들어가니, 진왕(秦王) 자영(子嬰)이 옥쇄를 가지고 목에다 끈을 매고 패상(覇上)에 나와 항복하였더니, 뒷날 항우(項羽)가 들어가서 자영을 죽이었다.
영겸(盈謙)
『주역(周易)』 겸괘(謙卦)에, “천도(天道)는 영(盈)한 것을 손(損)하고 겸(謙)한 것을 익(益)하게 하여 주며, 귀신(鬼神)은 영(盈)한 것을 해(害)하고 겸(謙)한 것은 복을 주며, 인도(人道)는 영(盈)한 것을 미워하며, 겸(謙)한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영계(盈戒)
송 나라 소이간(蘇易簡)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물이 그릇에 가득 차면 엎질러지는 것이니 폐하(陛下)께서는 찬 그릇 들 듯 조심하소서.” 하였다.
영계기(榮啓期)
춘추시대(春秋時代) 사람으로, 공자(孔子)가 태산(泰山)에서 영계기(榮啓期)가 녹구(鹿裘)를 입고 새끼 두르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무엇이 그리 즐거우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내매 사람이 가장 귀한데 내가 사람이 되었으니 한 가지 낙이고,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한데 내가 남자가 되었으니 두 가지 낙이고, 사람이 나서 일월을 보지 못하고 강보에서 죽는 자가 많은데 내 나이 90이니 이것이 세 가지 낙이다.” 하였다. 『열자(列子)』 「천서(天端)」
영계삼락(榮啓三樂)
영계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은사 영계기(榮啓期)이다. 영계기가 사슴갖옷에다 풀잎으로 꼬은 띠를 띤 초라한 행색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다가 공자(孔子)가 선생의 즐거움은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하늘이 낳은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데 나는 이미 사람이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의 즐거움이고[天生萬物, 唯人爲貴. 而吾得爲人, 是一樂也], 남녀가 구분되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나는 남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고[男女之別, 男尊女卑, 故以男爲貴, 吾旣得爲男矣, 是二樂也], 사람이 태어나 강보를 면치 못하고 죽는 자도 있는데 내 나이는 지금 90살이니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입니다[人生有不見日月不免襁褓者, 吾旣已行年九十矣, 是三樂也]. 가난은 선비의 떳떳한 도이고 죽음은 인생의 끝인 것이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하였다 한다. 『열자(列子)』 「천서(天端)」
영고(寧古)
6의 뜻으로 청(淸) 조정의 발상지인데, 청나라의 시조 6형제가 여기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일대이다. / 인용: 梨花庵老僧行(최성대)
영고반(詠考槃)
산수(山水) 사이에 은거하며 즐김을 이른다. 자세한 것은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나타나 있다.
영고성쇠(榮枯盛衰)
사람의 일생이나 나라의 운명이 필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으며 융성할 때도 있고 쇠퇴할 때도 있음을 말한다.
영곡(郢曲)
초(楚) 나라의 도성(都城)인 영(郢)에서 부르는 노래로, 양춘곡(陽春曲) 등 수준이 높은 것을 말한다.
영공(令公)
절도사의 별칭이다. 보통 방백(方伯)을 영공이라고 불렀다.
영공도리(令公桃李)
당 나라 적인걸(狄人傑)이 인재를 추천하여 벼슬에 오른 문생들이 많았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천하(天下)의 도리(桃李)가 모두 공(公)의 문하(門下)에 있다.” 하였다.
영과(靈瓜)
먹으면 천만 년 장수한다는 외.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음황후(陰皇后)가 꿈에 영과를 먹었는데, 당시 돈황(燉煌)에서 이상한 외씨를 바치며 부로(父老)들이 이르되, “옛날에 도사(道士)가 봉래산(蓬萊山)에서 이 외를 얻었는데, 이름이 ‘공동(崆峒)의 영과’로, 백 겁(?)에 한 번 열매를 맺는다 했사오며, 서왕모(西王母)가 이 땅에 물려주었나이다.” 하였다. 후(后)가 말하되, “외를 내가 먹었으니 만세를 살리로다.” 하니, 서왕모가 말하되, “주염산(朱炎山) 언덕에 갔다가 영과를 먹었는데 맛이 대단히 좋더군. 그게 오랜 일 같지 않게 기억되는데 벌써 7천 년이 되었어.” 하였다. 『습유기(拾遺紀)』ㆍ『한무내전(漢武內傳)』
영과이후진(盈科而後進)
물이 흐를 때는 조금이라도 오목한 데가 있으면 우선 그 곳을 가득 채우고 아래로 흘러간다. 배움의 길도 속성으로 이루려 하지 말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닦아야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孟子)』 「이루(離婁)」ㆍ「진심(盡心)」 上 “흐르는 물이 구덩이에 차지 않으면 앞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군자가 도에 뜻을 두어도 문장을 이루지 못하면 통달하지 못한다.” 하였다. / 유의어: 영과행험(盈科行險)
영관(靈關)
사천성(四川省) 보흥(寶興)에 있는 산 이름이다. 험고한 지형을 가리킬 때 대표적으로 쓰는 말이다.
영관(伶官)
① 악관(樂官)인데, 현자로서 뜻을 펴지 못하여 미직(微職)에 종사하고 있었음.
② 영인(伶人)과 같으며 악관(樂官)을 말한다. 황제(黃帝) 때에 영륜(伶倫)이라는 사람이 악관이 되었는데, 그 뒤에 영씨가 대대로 악을 잘 맡았으므로 후세에서 악관을 영관이라고도 했다. 『시경(詩經)』 패풍(邶風) 「간혜(簡兮)」 序
영관(瀛館)
당 태종(唐太宗)이 설치한 문학관(文學館) 이름으로, 홍문관(弘文館)을 말한다.
영광(靈光)
마지막 남은 원로 석학(碩學)을 말한다. 영광은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인 공왕(恭王)이 산동성 곡부(曲阜)에 건립한 영광전(靈光殿)을 가리키는데, 후한(後漢) 왕연수(王延壽)가 지은 ‘노영광전부서(魯靈光殿賦序)’에 “서경(西京)의 미앙(未央)과 건장(建章) 등 궁전이 모두 파괴되어 허물어졌는데도, 영광전만은 우뚝 홀로 서 있었다[靈光巋然獨存]”라는 글이 있다.
영광전부(靈光殿賦)
후한 때 왕연수(王延壽)가 지은 글 이름이다. 그 서문에 의하면, 영광전은 바로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공왕(恭王)이 건립한 궁전 이름인데, 한나라 중엽에 도적들이 횡행함으로 인해 모든 궁전들이 다 파괴되었으나 유독 이 영광전만은 우뚝이 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영교(令嬌)
남의 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자신의 아들 | 자신의 딸 |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 女息(여식) |
남의 아들 존칭 | 남의 딸 존칭 |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
영구(靈龜)
상고 시대의 길흉을 점치는 도구이다.
영구(營丘)
영구(營丘) 출신으로 산수화(山水畫)에 뛰어났던 송(宋) 나라의 화가 이성(李成)을 가리킨다.
영구(營丘)
제(齊) 나라의 수도(首都). 주 무왕(周武王)이 태공 망(太公望)을 제(齊)에 봉하여 영구에다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山東 靑州
영구사퇴고(寧久事推敲)
함께 어울려 노닌 일을 상대방이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잊어버릴 것이라는 말이다. ‘퇴고(推敲)’는 하나의 시구를 가지고 여러 모로 고민한 끝에 완성했다는 가도(賈島)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어떤 일에 대해서 뒤에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영구수(營丘叟)
영구(營丘)의 노인은 주 무왕(周武王)에 의해 영구에 봉해져 제(齊) 나라의 시조가 된 태공 망(太公望)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영구학사(營丘學士)
노중련(魯仲連)을 말한 것. 영구(營丘)는 제(齊) 나라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卷84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영굴(靈窟)
‘신령한 굴’이란 뜻이다.
영궁(靈宮)
선인(仙人)의 궁전(宮殿)이란 뜻으로, 산의 승경(勝景)을 의미한다.
영균(靈均)
초(楚) 회왕(楚懷王) 때의 충신 굴원(屈原)의 자이다. 그는 충성스럽고 깨끗하였으나 회왕이 멀리하자 「이소경(離騷經)」를 지었으며, 뒤에 참소를 받아 귀양갔다가 멱라수(汨邏水)에 빠져 죽었다. 『사기(史記)』 卷八十四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영균구가(靈均九歌)
초(楚)의 굴원(屈原)이 내쫓김을 당한 뒤 동황태일(東皇太一)ㆍ운중군(雲中君)ㆍ상부인(湘夫人) 등 구변의 노래를 지어 불렀음. 영균(靈均)은 굴원의 자(字)이다. 『초사(楚辭)』 九歌
영균부(靈均賦)
영균은 초(楚) 나라 대부 굴원(屈原)의 자. 여기서는 그가 지은 「이소경(離騷經)」를 말한다.
영균사(靈均詞)
난세(亂世)를 탄식하며 함께 시를 읊어 회포를 풀었다는 말이다. 영균(靈均)은 초 나라 굴원(屈原)의 호인데, 그가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游於江潭 行吟澤畔”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영균손국(靈均飱菊)
영균은 굴평(屈平)의 자, 「이소경(離騷經)」에 저녁에는 국화의 떨어진 꽃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영균원폐현(靈均怨蔽賢)
영균은 초 회왕(楚懷王) 때의 충신 굴원(屈原)의 자인데, 그는 소인의 참소에 의해 쫓겨난 뒤, 그에 대한 우사 번민(憂思煩悶)을 견디지 못하여 끝내 자살하고 말았으므로 이른 말이다.
영균철패(靈均綴佩)
영균(靈均)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호이다. 회왕(懷王) 때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어 국정(國政)을 행하였는데, 다른 대부의 투기를 받아 신임을 잃자 「이소경(離騷經)」를 지어 왕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으며, 회왕의 아들 양왕(襄王) 때에 이르러 참소를 받고 장사(長沙)로 옮겨지자 어부(漁父) 등 제편(諸篇)을 지은 뒤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였다. 이소경에 “가을 난초를 매달아 허리에 찬다”라고 했는데, 이는 향기로운 물건을 지님으로써 자신을 깨끗이 하는 뜻이 있다. 『사기(史記)』 卷84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영근(靈根)
① 신령한 나무의 뿌리로, 지혜(智慧)를 가리킨다.
② 돌아가신 할아버지인 조고(祖考)를 비유한 말이다.
영근(郢斤)
영땅 사람의 자귀질이란 뜻으로 글을 잘 고침을 말한다.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영땅 사람이 코끝에 파리 날개 같은 것을 붙여 놓고 장인(匠人)을 시켜 깎게 하니 자귀에 바람이 나도록 움직여도 코끝을 상하지 않았다[郢人堊慢其鼻端若蠅翼, 使匠人斲之. 匠石運斤成風, 聽而斲之, 盡堊而鼻不傷].” 하였다.
영녀(令女)
남의 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자신의 아들 | 자신의 딸 |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 女息(여식) |
남의 아들 존칭 | 남의 딸 존칭 |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
영단양주(靈丹良疇)
사람의 배꼽 밑에 단전(丹田)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선가(仙家)의 양생법(養生法)에 단전에 결단(結丹)한다는 말이 있다.
영당(令堂)살아 계신 남의 어머니를 말한다.
영당(鈴堂)장수 혹은 지방 장관의 거소인 영각(鈴閣)을 말한다.
영대(靈臺)
①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누대 이름으로 천기(天氣)를 살펴보던 곳이다. 『시경(詩經)』에 영대편이 있다.
② 영부(靈府)와 같은 말인데 마음을 이른다.
영대상분(靈臺祥氛)
영대(靈臺)는 운기(雲氣)를 관측하는 천문대(天文臺)의 유이고, 상분(祥氛)은 상서와 요기를 이르는 것으로, 즉 옛날 영대에서 운기의 상서와 요기를 관찰했던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영대(靈臺)」
영대영소(靈臺靈沼)
『시경(詩經)』 대아(大雅) 「영대(靈臺)」에 “문왕이 영대(靈臺)를 짓는데 백성들이 일을 도와 불일성지(不日成之)했으며, 왕이 영소를 지으니 아름다운 물고기가 뛰논다.” 하였는데, 맹자(孟子)는 이를 찬양하여 “문왕이 백성의 힘을 빌어 대를 짓고 못을 팠으나, 백성들은 그의 덕화에 젖어 도리어 즐거워했다.”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영대일편(靈臺一片)
배도의 「화상자찬(畫像自贊)」에 “爾貌不揚 爾身不長 胡爲將 胡爲相 一片靈臺 丹靑莫狀”이라 하였는데 여기 보이는 영대는 마음을 말한다.
영도(郢都)
초나라의 도읍. 지금의 호북성 강릉
영도교(永渡橋)
서울 동대문 밖 개천 하류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영락대전(永樂大全)
총서(叢書)의 이름이다. 명(明) 나라 영락(永樂) 원년(1403)에 해진(解縉) 등이 명을 받아 편찬한 일대 유서(類書)이다. 그 뒤에 전화(戰火)로 소실되어 현재는 5백여 권만 남았다.
영락비(永樂碑)
영락(永樂)은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이다. 영락비는 성조가 연경(燕京)으로 수도를 옮기고 세운 기념비.
영랑(伶郞)
심명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랑(令郞)
남의 아들을 말한다.
자신의 아들 | 자신의 딸 |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 女息(여식) |
남의 아들 존칭 | 남의 딸 존칭 |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
영랑(永郞)
신라(新羅) 효소왕(孝昭王) 때의 화랑(花郞)으로,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 등과 더불어 이른바 사선(四仙)의 하나로 꼽힌다. 전설에 의하면 이들이 금강산에서 수련하고 무술대회에 나가기 위하여 삼일포(三日浦)에서 3일 동안 쉬다가 금성(金城)으로 가는 길에 영랑호(永郞湖)에 도착하였는데, 영랑이 이 호반의 풍경에 도취된 나머지 대회 참석도 잊고 그만 거기에서 노닐었으므로, 호수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영랑술랑(永郞述郞)
모두 신라(新羅) 때의 신선으로서 남석랑(南石郞)ㆍ안상랑(安祥郞)과 함께 네 신선이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의 한 호수에서 3일 동안 놀았다 하여 이 호수를 삼일포(三日浦)라 하였고, 또 여기에 사선정(四仙亭) 등의 고적이 있기도 하다.
영려상승(嬴呂相承)
진(秦) 나라 왕의 성은 영(郢)씨였다. 그런데 진시황(秦始皇)은 그 영씨가 아니요 여불위(呂不韋)라는 사람의 자식이라 하였었다.
영령(泠泠)
음성이 맑고 시원한 모양, 물이 흐르는 소리의 형용, 낙숫물 소리의 형용, 바람 소리의 형용, 말고 시원한 형용, 심중이 맑고 깨끗한 형용
영령(令令)
개의 목에 단 방울 소리를 형용하는 말
영령성악강(英靈星岳降)
예전에 명현들은 하늘의 별이나 땅 위에서도 높고 큰 산의 정기를 타고서 탄생한다 하여 성악(星岳)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영로(郢路)
영도로 가는 길
영록주(酃醁酒)
중국 형양현(衡陽縣) 동쪽에 있는 영호(酃湖)의 물로 빚은 미주(美酒)의 이름이다.
영롱팔창(玲瓏八窓)
당(唐) 나라 노륜(盧綸)의 시 ‘부득팽조루송양덕종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德宗歸徐州幕)’에 “네 개의 문에 여덟 개의 창 어찌 밝은지, 영롱해라 하늘 기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오네[四戶八窓明 玲瓏逼上淸].”라는 표현이 있다.
영류(零柳)
체질이 매우 유약함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고열(顧悅)이 간문제(簡文帝)와 같은 나이로 머리가 일찍 희었으므로, 간문제가 이르기를, “경이 어찌하여 먼저 희었는고?” 하니, 고열이 대답하기를, “포류(蒲柳)의 자질은 가을을 바라만 보고도 잎이 먼저 머리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영륜(伶倫)
황제(黃帝) 때의 악관(樂官)으로 대피리(竹笛)의 명수이다. 곤륜산(崑崙山)의 대나무를 가져다가 처음으로 악률(樂律)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릉(永陵)
영조(英祖)의 아들인 경의군(敬義君)의 묘. 후에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영릉(英陵)
우리나라 세종대왕을 말한다.
영릉(零陵)
①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지명으로 창오산(蒼梧山)과 소상강이 있다. 그곳에서 석종유(石鍾乳)가 나온다.
② 진 공제(晉恭帝)를 말한다. 유유(劉裕)가 원희(元熙) 원년에 공제를 폐하여 영릉왕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해에는 마침내 공제를 시해하고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국호를 송(宋)으로 했었다.
③ 순(舜) 임금을 장사 지냈다는 중국의 옛 지명이다.
영릉복유(零陵復乳)
없어졌다고 한 것이 다시 생겨남. 영릉(零陵)에서 생산되는 석종유(石鍾乳)를 공물(貢物)로 바치는데, 그것을 채취하기가 너무 힘이 들고 게다가 정당한 보상도 없이 괴롭기만 하여 지방민들이 석종유가 다 없어졌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최민(崔敏)이 자사(刺史)로 와서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은 그에 감복하여, 석종유가 이제 다시 생겨났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유종원(柳宗元)의 「영릉군복유혈기(零陵郡復乳穴記)」
영릉유혈(零陵乳穴)
국가에서 뇌록을 공물(貢物)로 책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시달림을 받지 않고 뇌록은 뇌록대로 흥청망청 있다. 중국 영주(永州) 영릉현(零陵縣)에서 석종유(石鍾乳)가 생산되는데, 국가에서는 그것을 공물로 받았기 때문에 해마다 힘들여 그것을 채취하고서도 별 보상도 받지 못한 지방민들이 그에 싫증을 느끼고는, 그곳 석종유가 이제 바닥이 나고 없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그 후 5년이 지나서 최민(崔敏)이 영주 자사(永州刺史)로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자 그곳 백성들이, 이제 석종유가 되살아났다고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유종원(柳宗元)의 「영릉군복유혈기(零陵郡復乳穴記)」
영만지구(盈滿之咎)
가득 차면 기울고 넘친다. 만사가 다 이루어지면 도리어 화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영매(嶺梅)
기후의 차이에 따라 남쪽과 북쪽의 개화(開花) 시기가 다르다는 대유령(大庾嶺)의 매화로, 옛날 친지들끼리 서로 매화꽃 가지를 부쳐주던 풍속이 있었다.
영매(迎梅)
영매우(迎梅雨)의 준말로, 중국 강남(江南) 풍속에 의하면, 음력 3월에 내린 비를 영매우라 하고 5월에 내린 비를 송매우(送梅雨)라 하였다.
영매우(迎梅雨)
음력 3월에 내리는 비.
영모정(永慕亭)
장원(壯元) 곽인(郭麟)이 일본으로 사신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손자 대사성(大司成) 충수(忠守)가 정자를 지었다.
영몽(楹夢)
사람이 죽는 꿈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꿈속에서 자신이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밥을 받아먹는 것을 보고서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병을 앓은 지 7일 만에 죽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上
영묘(靈苗)
선경(仙境)에 있는 영초(靈草)를 가리킨 말이다.
영무(靈武)
현종(玄宗)이 안녹산에게 쫓기어 촉(蜀) 나라로 들어가면서 영무(靈武)에 있는 태자에게 전위(傳位)하였으니 그가 곧 숙종(肅宗)이다.
영무우(寧武憂)
나라가 무도하면 일부러 어리석은 척하는 것.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영무자(甯武子)는 나라가 유도하면 슬기로워지고, 나라가 무도하면 어리석어지는데 그의 슬기는 따를 수 있어도 그의 어리석음은 따를 수가 없다[甯武子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하였다.
영무치(寗武痴)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영무자는 “난세를 만나면 어리석어진다.” 하였다.
영물정종제처험(英物定從啼處驗)
진(晉) 나라 환온(桓溫)이 태어나서 채 돌이 되기 전에, 온교(溫嶠)가 와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는 “앞으로 분명히 걸출한 인물이 될 것이다.(眞英物也)”라고 예언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卷98 「환온전(桓溫傳)」
영미시(潁尾詩)
영미(潁尾)는 지명으로 송(宋) 나라 때 구양수(歐陽修)가 단계(端谿)의 녹석침(綠石枕)과 기주(蘄州)의 죽점(竹簟)을 얻고 나서 매우 기뻐하여 지은 시에 “단계에선 이운 달 모양 베개를 만들어 내고, 기주에선 두 물결무늬 자리를 짜내었네……끝내는 의당 자리 걷고 베개 들고 떠나서, 맑은 영미에 집 짓고 토지 사서 살리라.(端谿作出缺月樣 蘄州織成雙水紋……終當卷簟携枕去 築室買田淸潁尾)” 한 데서 온 말이다. 『충문집(文忠集)』 卷八
영미전(潁尾田)
영미 전답은 당 나라 구양수(歐陽修)의 “대자리랑 베개랑 끝내 거둬 가져가 맑디맑은 영수 강변 집을 짓고 밭을 사리[終當卷簟携枕去 築室買田淸潁尾].”에서 나온 것이다.
영백(營魄)
‘혼백’을 말한다.
영백사정(令伯私情)
영백은 서진(西晉) 이밀(李密)의 자(字)로, 늙고 병든 조모(祖母)의 봉양을 호소하며 진 무제(晉武帝)에게 올린 「진정표(陳情表)」가 유명하다.
영벽(瓴甓)
벽돌을 말한다. 화서(化書)에 “解瓴甓之音 則背膂澟森”이라 하였다.
영벽(靈壁)
중국 안휘성(安徽城)의 고을 이른다.
영벽구지(靈壁仇池)
영벽(靈壁)은 중국 영벽현(靈壁縣)인데 그 고을에서 경석(磬石)이 나므로 칭한 것이고, 구지는 산 이름인데 양질의 돌이 나옴.
영벽태호(靈璧太湖)
중국의 안휘성(安徽省) 영벽현(靈璧縣) 경석산(磬石山)과 평강부(平江府) 태호(太湖), 즉 동정호(洞庭湖)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수석(壽石)을 말한다.
영보(靈保)
신으로 분장한 무인(巫人)을 말한다.
영보정(永保亭)
보령(保寧)의 수영(水營) 안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영분(靈氛)
점을 잘 쳤던 고대의 신무(神巫), 정전은 점치는 대조각을 말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영초(靈草)와 대조각을 찾아낸 다음 나를 위해 점치라고 영분에게 부탁했네[索藑茅以篿兮 命靈氛爲余占之].”라는 말이 나온다.
영빈재(詠蘋才)
시를 짓는 탁월한 능력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남(召南) 「채빈(采蘋)」이 있는데,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화석팔십이운(和席八十二韻)’에도 “傍砌看紅藥 巡池詠白蘋”이라는 구절이 있다.
영빈학공환(迎賓鶴共還)
송(宋) 나라의 은군자(隱君子)인 화정 선생(和靖先生) 임포(林逋)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오직 매화와 학을 벗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는데, 멀리 나가 있다가도 집에서 날려 보낸 학을 보면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고 학과 함께 돌아왔다는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서일(棲逸)」
영빙(伶俜)
① 고독하다
영사(靈槎)
한(漢) 나라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使臣)으로 가면서, 뗏목(槎)을 타고 갔다가 물을 따라 올라가서 은하수(銀河水)에 이르러, 직녀성(織女星)을 만나고 왔다는 전설(傳說)이 있으므로, 신령스러운 뗏목이라 하였다.
영사(穎士)
당 나라 소정(蕭晶)의 손자, 자는 무정(茂挺). 노이(盧異) 등이 그를 사사했으며, 호를 소부자(蕭夫子)라 했다.
영사(詠史)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하여 시가(詩歌)를 지음을 말한다. 진(晉) 나라 사상(謝尙)이 가을 달밤에 원굉(袁宏)과 뱃놀이를 하면서 영사시(詠史詩)를 읊었다는 고사이다. 『진서(晉書)』 「원굉전(袁宏傳)」
영사금(穎師琴)
한퇴지(韓退之)의 시 가운데 영사(穎師)의 탄금(彈琴)을 듣는다는 것이 있다.
영사시(詠史詩)
역사에서 소재를 취하여 지은 시를 말한다.
영사천우두(靈槎穿牛斗)
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이 서쪽 외국에 사신으로 나갈 때 하수(河水)의 발원지를 찾아보라는 무제의 명에 따라 뗏목을 타고 천하(天河)에까지 올라갔다 왔다는 전설을 인용한 말이다. 두우는 견우성과 북두성이다.
영산(靈山)
『산해경(山海經)』에 “천문(天門)의 해와 달 들어가는 곳에 영산(靈山)이 있는데 거기에 무힐(巫肹)ㆍ무팽(巫彭)ㆍ무진(巫眞)ㆍ무례(巫禮)ㆍ무저(巫抵)ㆍ무사(巫謝)ㆍ무라(巫羅) 등 일곱 무당들이 살고 있다.” 하였다.
영산(靈山)
인도(印度)의 영취산. 석가모니가 거기서 법회(法會)를 열었다.
영산친수촉(靈山親受囑)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가리킨 것인데,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영취산(靈鷲山)에서 그 경을 설(說)하여, 모든 나한(羅漢)들에게 장래에 성불(成佛)하기를 부촉(咐囑)하였다.
영산회(靈山會)
석존(釋尊)이 영추산에 있으면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을 말한다. 주로 『법화경(法華經)』를 설하던 모임이다.
영색(鈴索)
태수(太守)의 응접실에 설치한 방울을 단 노끈을 말한다. 태수를 방문하는 사람이 이 노끈을 잡아당긴다고 한다.
영서(靈犀)
영묘(靈妙)한 서각(犀角)을 말한다. 서각은 한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 양방(意思)이 서로 관통되었으므로, 전하여 두 사람의 의사(意思)가 서로 투합됨을 비유한 말이다. / 인용: 懊惱曲(신국빈)
영서(靈胥)
오자서(伍子胥)의 이칭(異稱)으로, 파도(波濤)를 자서도(子胥濤)라 하니 곧 강해(江海)의 신(神)을 가리킨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오왕(吳王)이 오자서(伍子胥)를 죽여 강물에 던졌는데, 뒤에 오자서의 영혼이 수신으로 되었다 한다.
영서도(靈胥濤)
『문선(文選)』 좌사(左思) 「오도부(吳都賦)」에 “영서는 오자서(伍子胥)의 귀신을 말한다. 그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초 나라 사람으로 오 나라에 와서 초 나라와 월 나라를 쳐 공이 있었으나 참소를 만나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그 후 강해(江海) 사이에 사는 사람들이 그 귀신을 두려워하여 물을 건너려면 모두 그 사당(祠堂)에 제사를 지냈다.” 하였다.
영서상방심(詠絮想芳心)
진(晉)나라의 사안(謝安)이 여러 아들과 딸뜰에게, “저 눈 오는 것이 무엇과 같다고 비유하겠는가.” 하고 물으니, 어린 딸 도온(道蘊)이 버들개지가 바람에 날리는 것(柳絮因風飛)과 같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서 유명하였다.
영서연설(郢書燕說)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도리에 맞는 것처럼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영서점(靈犀點)
마음이 서로 통함을 말한다. 물소의 두 뿔 속에 실 같은 흰 무늬가 있어서 두 뿔 사이가 서로 감응하여 통한다는 전설이 있다
영석(英石)
물속에서 나는 돌의 일종으로 산호(珊瑚)처럼 여러 가지 양상과 색채를 갖추고 있다.
영석인둔철(靈石引鈍鐵)
자석과 바늘을 들어 비유한 말이다.
영선(舲船)
창 있는 작은 배.
영설(映雪)
진(晉) 나라의 손강(孫姜)이 가세가 빈한하므로 눈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글을 읽었다 한다.
영설편(詠雪篇)
남조(南朝) 송 문제(宋文帝)때 사혜련(謝惠連)이 사도(司徒) 팽성왕(彭城王)의 법조행참군(法曹行參軍)으로 있으면서 지은 설부(雪賦)를 말하는데, 그 구성 내용이 한 나라 양효왕이 토원(免園)에 추양(鄒陽)ㆍ매승(枚乘)ㆍ사마상여 등 당대의 유수한 사부가를 불러 함께 놀 때 함박눈이 내리자 사마상여에게 붓을 주고 눈을 주제로 글을 지으라 하니, 사마상여가 글을 지어내려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선(文選)』 卷十三 「설부(雪賦)」
영성(甯成)
한 나라의 혹리(酷吏)를 말한다.
영성(嬰城)
농성(籠城)하여 굳게 지킴을 말한다.
영소(韺韶)
영(郢)은 제곡(帝嚳)의 음악이고 소(韶)는 순(舜) 임금의 음악이다.
영수(靈修)
어진 임금에게 비유하여 쓰는 말이다.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영수가 자주 마음 변하는 것이 슬프다[傷靈修之數化].” 한 데서 온 말이다.
영수(靈壽)
영수목(靈壽木)으로 만든 즉 영수장(靈壽杖)을 가리키는데, 전한(前漢) 때 공광(孔光)이 태사(太師)로 있을 적에 태후(太后)가 조서하기를 “스승을 존중하는 뜻에서 태사에게는 조회(朝會)도 하지 말게 하고 영수장을 하사하라.”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 卷八十一 「공광전(孔光傳)」
영수(靈脩)
산귀.
영수(濚水)
영산강(榮山江)의 일명.
영수(潁水)
중국 하남(河南) 등봉현(登封縣)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우현(禹縣)ㆍ임영(臨潁)ㆍ서화(西華)ㆍ상수(商水)를 경유하여 회수(淮水)로 들어가는 강 이름으로 본디 영하(潁河)라고 하는데, 요(堯) 임금 때 고사(高士) 소보(巢父)와 허유(許由)가 은거하였다는 곳이다. 허유가 자기에게 천하를 양여(讓與)하겠다는 요임금의 말을 듣고는 귀가 더러워졌다 하여 영수에서 귀를 씻었다 한다.
영수강운(嶺樹江雲)
멀리 헤어져 있는 벗을 생각할 때 쓰는 표현이다. 두보(杜甫)가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에 “위수(渭水) 북쪽엔 봄 하늘에 우뚝 선 나무, 강 동쪽엔 저문 날 구름.”이라 하였다.
영수군성(潁水群星)
그때 한집안의 걸출한 인물들이 한데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는 말이다. 영천(潁川) 출신인 동한(東漢)의 명사(名士) 진식(陳寔)이 자제들과 연회를 베풀었을 때, 태사(太史)가 천문을 관측하다가 상서로운 덕성(德星)이 모였다고 위에 아뢴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
영수귀전록(潁水歸田錄)
영수는 요(堯) 임금 때에 요 임금이 천하(天下)를 양여하려 하였으나 그 말도 듣기를 싫어하여 영수에 귀를 씻었던 은사(隱士) 허유(許由)를 말하고, 귀전록(歸田錄)은 곧 시골로 돌아가 은거하는 것을 의미한 말이다.
영수목(靈壽木)
마치 대처럼 마디가 있는데, 가벼우면서도 잘 부러지지 않으며 크기는 8~9척에 불과하고 둘레는 3~4치 정도여서 다듬지 않아도 천연으로 지팡이에 알맞다고 한다.
영수장(靈壽杖)
영수목(靈壽木)으로 만든 지팡이로 궤장을 하사할 때 원로를 예우하는 최고의 선물로 꼽힌다. 한(漢) 나라 공광(孔光)에게 “나라가 흥성하려면 사부를 높이고 존중해야 한다.”고 태후(太后)가 조서를 내려 조회에도 참여하지 말게 하고 열흘만에 한번씩 사찬(賜餐)하며 영수장을 내려 사부(師傅)를 위하는 예우를 다했다는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공광전(孔光傳)」
영숙(永叔)
① 송방조(宋邦祚)의 자(字)이다.
② 송(宋)의 으뜸 가는 문장(文章)이었던 구양영숙(歐陽永叔) 즉 구양수(歐陽修)의 자(字)인데, 4세 때 아버지를 잃은 구양수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서책도 지필(紙筆)도 없었으므로 항상 물억새를 꺾어 그것으로 땅바닥에다 그어가며 글을 배웠음. 『송사(宋史)』 卷三百十九
영숙추성부(永叔秋聲賦)
영숙은 송(宋)의 학자 구양수(歐陽修)의 자. 가을을 읊은 「추성부(秋聲賦)」가 유명하다.
영식(令息)
남의 아들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자신의 아들 | 자신의 딸 |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 女息(여식) |
남의 아들 존칭 | 남의 딸 존칭 |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
영심통점서(靈心通點犀)
당(唐) 이상은(李商隱)의 「무제시(無題詩)」에 “心有靈犀一點通”이란 글귀가 있는데 서각(犀角)이 양두(兩頭)를 통했으므로 통서(通犀)라고도 한다. 『신주이물지(神州異物志)』에는 “서(犀)가 신이(神異)를 지녀 뿔로써 영(靈)을 표하므로 영서라 한다.” 하였다.
영씨(伶氏)
황제(黃帝) 시대의 악관(樂官)인 영륜(伶倫)으로, 음악을 창제하였다고 한다.
영아(靈椏)
산삼. 삼아오엽(三椏五葉)을 말한다.
영아전(營衙前)
토관(土官)이나 향리(鄕吏)의 동아리를 포괄한 말이다.
영악(永樂)
명 성조(明聖祖)의 연호이다.
영안잠귀(永安潛晷)
소열(昭烈)이 오(吳) 나라를 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오다가 백제성(白帝城)의 영안궁(永安宮)에서 죽었다.
영알(永遏)
끝내 죽다. 길이 갇히다. 감금되다.
영애(令愛)
남의 딸을 말한다.
자신의 아들 | 자신의 딸 |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 女息(여식) |
남의 아들 존칭 | 남의 딸 존칭 |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
영애(榮哀)
살아서는 존경하고 죽어서는 애도한다는 것.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살아서는 누구나 존경하고 죽어서는 누구나 애도한다[其生也榮 其死也哀].” 하였다.
영약수쇠옹(靈藥壽衰翁)
중국 남양(南陽)이라는 지방 어느 촌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장수하였는데, 그 동네 우물 위에 국화가 항상 성하여서 그 밑에서 솟아 나오는 물을 먹어서 장수한다는 것이었다.
영양(令孃)
남의 딸을 말한다.
자신의 아들 | 자신의 딸 |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 女息(여식) |
남의 아들 존칭 | 남의 딸 존칭 |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
영양(永陽)
영천(永川)의 고호이다.
영양괘각무흔(羚羊掛角無痕)
영양은 양(羊)과 비슷하면서 약간 큰데, 잘 적에는 뿔을 나무에 걸어, 자던 자리의 흔적을 없애 후환을 방지한다 한다. 이 말은 시의 경지가 매우 절묘해서 인위적인 흔적이 보이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송(宋) 나라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 “盛唐諸人 惟在興趣 羚羊掛角 無迹可求 故其妙處 透徹玲瓏 不可湊泊 如空中之音 相中之色 水中之月 鏡中之象 言有盡而意無窮”이라고 보이고 『전등록(傳燈錄)』에 “我若羚羊掛角 汝向什麽處捫摸”이라고 보인다. / 유의어: 영양괘각처(羚羊掛角處)
영어(泠馭)
시원하게 타는 물건. 『장자(莊子)』 「소요유(逍遼遊)」에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다니니 시원해서 좋았다[列子御風而行 泠然善也].”는 대목에서 나온 문자로, 시원스럽게 속세를 떠나 보고 싶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馭’는 ‘御’와 같다.
영염사녀재(詠鹽謝女才)
진(晋)나라 사안(謝安)이 눈 오는 날에 집안 자녀(子女)들과 놀면서 시를 읊기를 “흰 눈이 분분(紛紛)하니 무엇과 같으냐.” 하니, 그 조카가, “공중에 소금 흩는 것을 견줄 만하네.” 하였다. 그 질녀 도온(道蘊)이, “버들개지 바람에 날라 일어나는 것보다 못하네.” 하였다.
영영(央央)
선명한 모양, 소리가 부드러운 모양
영영(泱泱)
흰 구름이 성하게 일어나는 모양
영영(永永)
길이길이, 영구히
영영(榮榮)
번성하는 모양
영영(營營)
악착같이 이익을 추구하는 모양을 말한다.
영영일수(盈盈一水)
서로 바라다 보이는 거리에서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뿐 만나서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리킨다.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읊은 고시(古詩) 중에 “찰랑찰랑 은하수물 사이에 두고, 애틋하게 바라볼 뿐 말 한마디 못 건네네[盈盈一水間 脈脈不得語]”라는 표현이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선(文選)』 古詩 十九首
영영점백(營營點白)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승(靑蠅)」에 “앵앵거리며 나는 똥파리가 가까운 곳에 있도다……” 하였는데, 그 주에 “똥파리는 흰 데 똥을 싸면 검은 점으로 나타나고 검은 데는 그 반대로 되므로, 참소 잘하는 간신을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영왕(寧王)
수명(受命)한 임금을 말하는데, 즉 천하를 편안하게 한 임금이라는 뜻이다.
영왕(寧王)
당 예종(唐睿宗)의 장자요 현종(玄宗)의 형으로, 처음에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다가 뒤에 영(寧) 땅의 왕(王)으로 봉해졌다.
영왕전리(纓王剸李)
항우(項羽)가 거록(鉅鹿) 싸움에서 진 나라 장수 왕리(王離)를 사로잡고, 그의 숙부 항량(項粱)이 삼천수(三川守) 이유(李由)를 목베어 죽였다.
영왕찬(迎王粲)
겸손하여 선비를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왕찬은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박학 다식한 고사였는데, 채옹(蔡邕)이 그의 재주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한번은, 왕찬이 채옹의 집을 방문하자 채옹이 그를 맞으러 급히 나오느라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왕찬전(王粲傳)」
영우명가창(郢寓名佳唱)
굴원(屈原)의 제자인 송옥(宋玉)이 초(楚) 나라의 수도인 영(郢)에서 백설곡(白雪曲)을 불렀는데 너무 그 곡조가 고상하였기 때문에 창화(唱和)한 자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영운(靈運)
진(晉) 나라 사영운(謝靈運). 『남사(南史)』 「사령운전(謝靈運傳)」
영운과(靈運過)
옛날 진(晉) 나라 때에 여산(盧山)에 혜원(惠遠)이란 고승이 있었는데, 그 고승을 찾아서 사령운(謝靈運)이라는 시인이 여러 번 찾아갔었다.
영운극(靈運屐)
사영운(謝靈運)은 남조(南朝) 때 송(宋) 나라 사람으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났다. 그는 등산을 좋아하여 언제나 큰 나막신을 신었는데, 산에 오르려면 앞굽을 떼고, 산에서 내려오려면 뒷굽을 떼고 신었다 한다. 『송서(宋書)』 卷六十七 「사령운전(謝靈運傳)」
영운망가(靈運忘家)
진(晉) 나라 사람 사영운(謝靈運)을 말하는데, 시문(詩文)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는 벼슬길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시문을 즐겼는데, 한 번은 원 법사(遠法師)를 만나보고 숙연히 감복된 바가 있어 그 절에 나아가 『열반경(涅槃經)』을 공부하였다 한다. 『연사(蓮杜)』 「고현전(高賢傳)」
영운이망가(靈運已忘家)
송나라의 사령운(謝靈運)이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므로 집에 있으면서도 집을 잊었다는 말이다.
영웅기인(英雄忌人)
영웅은 공을 세우기 위해서 남을 시기한다.
영웅호걸(英雄豪傑)
‘영웅과 호걸’을 말한다.
영원(靈源)
신비한 약수가 샘솟는다는 영원산을 말한다.
영원(伶院)
장악원(掌樂院)을 말한다.
영원(鴒原)
척령재원(鶺鴒在原)의 준말로, 급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형제가 서로 돕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할미새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서로 어려움을 구해주도다.[鶺鴒在原 兄弟急難]” 한 데서 온 말이다. 척령(鶺鴒)은 할미새로 형제간에 의좋은 새라 한다.
영원(令媛)
남의 딸을 말한다.
자신의 아들 | 자신의 딸 |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 女息(여식) |
남의 아들 존칭 | 남의 딸 존칭 |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
영원별(鴒原恨)
영원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의 “할미새 안절부절 들에 있으니 형제가 어려움을 서로 구제해[鶺鴒在原 兄弟急難].”에서 나온 것으로, ‘우애 깊은 형제가 서로 헤어지는 것’을 말한다
영원분수(鴒原分手)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의 “할미새 들에서 바삐 날듯이 형제는 어려움 서로 구하네[鶺鴒在原 兄弟急難].”에서 나온 것으로, ‘형제간의 작별’을 말한다.
영원숙초정(鴒原宿草情)
무덤에 풀이 묵도록 가보지 못함을 탄식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척영새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한 일 있는가. 좋은 벗은 늘 있어도 길이 탄식만 할 뿐이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怳也永歎]” 하였다.
영원한(鴒原恨)
할미새는 항상 꼬리를 위아래로 흔들어 마치 화급한 일을 고하는 것 같으므로, 전하여 ‘형제가 위급한 때에 서로 돕는 비유’로 쓰이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할미새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난한 때를 당했도다[鶺鴒領在原 兄弟急難].” 한 데서 온 말이다.
영원회(鴒原會)
영원(鴒原)은 할미새로, 형제의 별칭으로 쓰인다. 곧 형제의 만남을 말한다.
영월루(詠月樓)
간성(杆城)의 객관(客館) 동쪽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영위(令威)
한(漢) 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 정령위(丁令威)를 가리키는데, 그가 일찍이 영허산(靈虛山)에 들어가 서술(仙術)을 배워, 뒤에 학(鶴)으로 화(化)하여 요동에 돌아와서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영위(英衛)
당(唐) 나라 초기의 공신(功臣)들로서 영국공(英國公)에 봉해진 이적(李勣)과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진 이정(李靖)을 합칭한 말이다.
영유전궐(嬴劉顚蹶)
진시황(秦始皇)의 중국 통일과 유방의 창업은 대단한 것이었으나, 그들이 세운 나라는 다 망하고 말았으니 하잘것없는 일들이었다는 뜻이다.
영윤(令胤)
남의 아들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자신의 아들 | 자신의 딸 |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 女息(여식) |
남의 아들 존칭 | 남의 딸 존칭 |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
영윤삼무온(令尹三無慍)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초(楚)의 영윤(令尹) 자문(子文)이 세 번 벼슬에 올랐으나 기뻐하지 않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어도 노여워하지 않았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영인(郢人)
초(楚)나라 사람을 말한다. 영(郢)은 초(楚)나라의 도성(都城)으로,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이다.
영인근(郢人斤)
절묘(絶妙)한 재주를 비유한 말이다. 영인(郢人)은 옛날 흙을 잘 발랐는데, 한 번은 자기 코끝에다 백토(白土) 가루를 마치 파리 날개만큼 엷게 발라 놓고 장석(匠石)을 시켜 그를 깎아내라고 하자, 장석이 휙휙 소리가 나도록 자귀를 휘둘러 그 흙을 깎아냈으나, 흙만 다 깎아지고 코는 상하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 / 유의어: 영인착비(郢人斲鼻)
영자(榮子)
춘추(春秋) 때 송(宋) 나라의 현인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영자비산석(寗子悲山石)
요순(堯舜)의 시대를 만나지 못한 한스러움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 나라 영척(甯戚)이 소의 뿔을 두드리면서 노래 부르기를 “南山矸 白石爛 生不遭堯與舜禪 短袍單衣適至骭”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산(山)과 석(石)을 취하여 표현한 것이다. 『몽구(蒙求)』 中 寗戚扣角, 『사기(史記)』 八十三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 유의어: 영자중소원단의(寗子中宵怨短衣) / 인용: 聖主得賢臣頌(왕포)
영장(靈掌)
선인장(仙人掌)이다.
영장(迎將)
‘사람을 맞이하여 보내는 것’을 말한다.
영장상대성(郢匠相待成)
호적수(好敵手)인 동시에 뜻이 맞는 동지로서 함께 절차탁마해 나가기를 기대했었다는 말이다. 장주(莊周)가 평생 토론을 벌였던 혜시(惠施)의 묘소에 들러 그를 회고하며 인용했던 “운근성풍(運斤成風)”의 비유에서 나온 고사로서, 영인(郢人)의 코 끝에 살짝 흙덩이를 묻혀 놓고 장석(匠石)이 자귀를 휘둘러 흙덩어리만 떨어뜨리곤 할 때마다 영인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태연히 있었는데, 일단 영인이 죽고 나자 장석이 그 기술을 일체 발휘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
영재(泠齋)
① 영각(鈴閣)으로, 지방장관이 관할하는 지역을 말한다.
② 유득공(柳得恭)의 호이다. 조선 정조(正祖) 때 사가(四家) 중의 한 사람으로 규장각 검서(奎藏閣檢書)와 풍천부사(豐川府使)를 지냈으며 회고시(懷古詩)와 기행문(紀行文)을 잘 지었다.
영재(令宰)
수령에 대한 경칭이다.
영제(禜祭)
수해(水害)ㆍ한재(旱災)ㆍ여역(癘疫) 등을 물리치기 위하여 산천의 신에게 비는 제사를 말한다.
영제(令製)
태자가 지은 글을 말한다.
영정(零丁)
‘영락(零落)하여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 인용: 陳情表(이밀)
영조(靈照)
부친의 뜻을 잘 이해하는 어린 딸을 말한다. 방 거사(龐居士)의 딸 영조가 장차 아비가 입멸(入滅)하려는 것을 알고 아비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자기가 먼저 그 자리에 올라앉아 합장(合掌)하고 세상을 떠난 고사가 전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양주거사방온(襄州居士龐蘊)」
영족(靈族)
선인(仙人)의 무리들을 가리킨다.
영존(令尊)
살아 계신 남의 아버지를 말한다.
영주(榮趎)
남영주(南榮趎). 경상초(庚桑楚)의 제자로서 도(道)를 듣기 위해 식량을 싸서 이레 낮 이레 밤을 걸어 노자(老子)가 있는 곳을 찾아갔음.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
영주(瀛洲)
①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으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자란다고 한다.
② 제주도를 가리킨다.
③ 당 태종(唐太宗)이 설치한 문학관(文學館) 이름으로 ‘영주관(瀛洲關)’의 준 말이다, 여기에 임명된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등 이른바 ‘십팔학사(十八學士)’를 당시에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영주에 올랐다[登瀛洲].’고 일컬었던 고사가 전한다. 『신당서(新唐書)』 卷102 「저량전(褚亮傳)」
④ 고부(古阜)의 고호이다.
⑤ 예문관(藝文館) 등의 청직(淸職)을 말한다.
영주구(伶州鳩)
주(周) 나라 경왕(景王)의 악관(樂官). 영주구(泠州鳩)라고도 한다.
영주산(瀛洲山)
①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새와 짐승이 모두 희며,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② 한라산(漢拏山)을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이라고도 한다.
영주십팔(瀛洲十八)
당 태종이 설치한 영주관(瀛洲館)에 뽑혀 들어간 열여덟 명의 학사(學士)를 말한다. 당 태종이 인재들을 모두 끌어모으고는 문학관(文學館)을 설치하여서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등 18명의 문관을 임명하여 학사로 삼았다. 그런 다음 이들을 돌아가면서 관중에 머물게 하고 한가한 날이면 그들과 더불어 정사를 논의하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리고 또 염입본(閻立本)에게 명하여 화상(畫像)을 그리게 하고 저량(褚亮)에게 찬(贊)을 짓게 해서 이를 관 안에다가 걸고는 이들을 ‘십팔학사’라고 불렀는데 당시 사람들이 몹시 흠모하여 등영주(登瀛洲)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저량전(褚亮傳)」
영주지언(瀛州之彦)
당 나라 태종(太宗)이 글 잘하는 18명의 학사(學士)를 모아서 우대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그들을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올랐다고 부러워하였다.
영중가(郢中歌)
비속한 유행가. 영(郢)은 초(楚)의 수도이다. 전하여 속인들의 환심을 말한 것이다.
영중무인(郢中無人)
품격이 높을수록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문선(文選)』 송옥 대초왕문(宋玉 對楚王問)에 “한 사람이 영중에 나가서 하리파인(下里巴人) 같은 낮은 곡을 부르자 따라 부르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더니, 양춘백설(陽春白雪) 같은 높은 곡을 부르자 따라 부르는 자가 몇 명에 불과하더라.” 하였다. 영은 초(楚)의 수도이다.
영중유음(郢中遺音)
언영(鄢郢)은 초 나라 서울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초 나라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에 나온 말을 인용한 것인데, 어떤 사람이 언영에서 노래를 부를 때 그가 하리파인(下里巴人)을 부르자 그에 화답한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으나 양춘백설(陽春白雪)을 부르자 화답하는 자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영중질(郢中質)
영중(郢中)에 어느 장인(匠人)이 자귀(斤)질을 잘하여 사람의 코에다 조그맣게 흙을 얹어 두고 자귀로 그것을 깎았는데, 자귀에서 바람이 나서 흙은 다 깎아 내어도 코는 상함이 없었다. 다른 사람은 감히 코를 대 주지 못했는데, 한 사람은 코를 대 주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은 뒤에 장인(匠人)이, “이제는 나의 바탕(質)이 없어졌다.” 하고 자귀질을 그만두었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
영지(靈芝)
삼신산(三神山)에 있다는 신초(神草) 이름으로 선인(仙人)이 먹는데 일찍이 서복(徐福)이 봉래산(蓬萊山)에서 캐어 왔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두보(杜甫)의 시 ‘증정십팔분(贈鄭十八賁)’에 “靈芝冠衆芳 安得闕親近”이라는 똑같은 구절이 보인다.
영지(令支)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산융(山戎)의 속국(屬國)이었다가 한(漢) 나라 때에 요서군(遼西郡)으로 편입된 현(縣) 이름이다. 『한서(漢書)』 地理志下ㆍ國語 齊語 注
영진(盈進)
물은 웅덩이에 찬 뒤에 나아간다[盈科而後進]. 과(科)는 구덩이(坎)의 뜻이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원천(原泉)이 솟아나와 주야를 쉬지 않고 흘러 구덩이를 채운 다음에 나가서 사해(四海)에 이른다.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으니, 이것을 취해야 한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학문을 끊임없이 점차적으로 닦아 나가서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경계한 말이다. 『맹자(孟子)』 「이루(離婁)」ㆍ「진심(盡心)」 上
영진(嬴秦)
영(郢)은 진나라의 성이다.
영질(甯郅)
한 나라의 혹리(酷吏)였던 영성(甯成과 질도(郅都)의 병칭이다.
영질(郢質)
① 서로 어울리는 짝을 말한다. 영(郢) 땅의 장석(匠石)이 도끼를 휘둘러 상대방 코 끝의 흰 흙만을 교묘하게 떼어 내는 기술을 발휘하다가, 그 짝(質)이 죽고 나서는 그런 기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
② 영공(郢工)의 재질.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영(郢) 땅에 유명한 공인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이 코끝에 백토가루를 얇게 바르고는 이 공인을 시켜서 깎아내게 하였더니 그는 자귀를 돌려 바람을 일으켜서 코는 조금도 상하지 않고 백토만 깨끗이 깎아내었다.” 하였다.
영착위수공(郢斲爲誰工)
영(郢) 땅의 사람이 친구의 코 끝에다 흰 흙덩어리를 묻혀 놓고는 도끼를 휘둘러 흙만 교묘하게 떼어 내곤 하였는데, 그 친구가 죽고 나서는 “나의 짝이 죽었다[臣之質死].”고 하면서 그 기술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
영척(甯戚)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위인이다.
영척반우(寗戚飯牛)
영척(寗戚)이 남의 집에서 소를 먹여 주며 생활하다가 제환공(齊桓公)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소의 뿔을 두드리며 노래 부르기를, “남산에 흰 돌이 있어 요순(堯舜)을 만나지 못했구나.” 하니 환공이 듣고 그를 데리고 가서 정승을 삼았다. 『사기(史記)』 八十三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영척수(寗戚愁)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 나라 사람 영척이 집이 가난하여 남의 수레를 끌었고 제(齊) 나라에 이르러서는 소를 먹이다가 쇠뿔을 두들기며 자신의 시름을 노래했는데, 환공(桓公)이 현인(賢人)임을 알고 상경(上卿)으로 맞이했다. 『사기(史記)』 八十三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영천(潁川)
① 물 이름이다. 여기서 고대 중국의 고사(高士) 허유(許由)가, 요(堯)에게서 천하를 맡아 달라는 권유를 받고,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 하여 귀를 씻었다 한다. 『고사전(高士傳)』
② 한나라 조광한(趙廣漢)이라는 사람이 영천(穎川) 태수로서 정치를 잘하였으므로 명성이 높아졌다.
영천금(令千金)
남의 딸을 말한다.
자신의 아들 | 자신의 딸 |
가돈(家豚), 가아(家兒), 돈아(豚兒), 미돈(迷豚), 미식(迷息), 미아(迷兒) | 女息(여식) |
남의 아들 존칭 | 남의 딸 존칭 |
영랑(令郞), 영윤(令胤), 영식(令息), | 영교(令嬌), 영녀(令女), 영애(令愛), 영양(令孃), 영원(令媛), 영천금(令千金) |
영천대성(穎川大姓)
한무제(漢武帝) 때에 관부(灌夫)의 족속(族屬)들이 영천(穎川)에 살면서 관부의 세력을 빙자하고 호세(豪勢)와 횡포를 부렸다.
영천수(榮川守)
일찍이 영천 군수(榮川郡守)를 지냈던 여동근(呂東根)을 이르며, 그의 호가 곧 청탄(靑灘)이다.
영천옹(潁川翁)
요(堯) 임금이 제위(帝位)를 맡기려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고서 귀를 씻었고, 이 말을 들은 소부가 또 소에게 더러운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서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상산에는 사호(四皓)가 있고, 영천에는 소부와 허유가 있었다오[商山有黃綺 潁川有巢許].”라는 구절이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 卷2 讀史五首
영천태수(潁川太守)
한(漢) 나라 황패(黃覇)를 말하는데, 훌륭한 정사를 펼쳐 “황패정수(黃霸政殊)”라는 『몽구(蒙求)』의 표제가 전해 온다. 『한서(漢書)』 卷89
영천훈업(潁川勳業)
한(漢) 나라 때 황패(黃覇)가 영천 태수(潁川太守)로 있으면서 크게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높이가 한 길이나 되는 수레 덮개를 특별히 하사받는 등 융숭한 포장(褒獎)을 입은 데서 유래한다. 『한서(漢書)』 「순리전(循吏傳)」 황패전(黃覇傳)
영철야(靈撤夜)
부모의 상장(喪葬)에 가재를 기울여 유밀과(油蜜果)를 많이 장만하고 손님을 모아 풍악을 벌여 시신을 즐겁게 하는 풍습.
영철유조(靈徹有嘲)
불가(佛家) 내부의 비난을 말한다. 영철(靈徹)은 당 나라 때의 시승(詩僧)으로, 늘 교연(皎然)과 교유하면서 포길(包佶), 이서(李紓)의 지우를 얻어 장안에 이름을 떨쳤는데, 승도(僧徒)가 질시하여 참소한 나머지 정주(汀州)로 귀양간 적이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 卷15
영첩(靈輒)
춘추(春秋) 시대 때 진(晉) 조돈(趙盾)이 예상(翳桑)에 사냥갔다가 영첩(靈輒)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밥먹여 살렸더니, 뒤에 영공(靈公)이 갑사(甲士)를 매복시켜 돈을 죽이려 하므로 첩이 마침 공의 무사가 되었다가 창을 거꾸로 하고 막아 돈이 죽음을 면하였다.
영첩기(靈輒飢)
영첩(靈輒)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 사람인데, 조선자(趙宣子)가 수산(首山)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영첩이 배가 고파 기진맥진한 것을 보고 밥을 주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좌씨전(左氏傳)』 宣公 二年
영첩지은(靈輒知恩)
영첩(靈輒)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 사람이다. 진 나라 조돈(趙盾)이 예상에서 사냥을 할 적에, 굶주림에 지친 영첩을 보고 먹을 것을 주어 구해주었는데, 뒤에 영공(靈公)이 복병(伏兵)을 시켜 조돈을 죽이려 하자, 영첩이 이때 마침 영공의 무사(武士)가 되어 창뿌리를 거꾸로 돌려서 도리어 영공의 군사를 방어하여 조돈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조돈이 그 이유를 묻자, 말하기를 “나는 예상에서 굶주리던 사람이다.” 하므로, 이름과 주거(住居)를 물으니 대답하지 않고 가버렸다는 고사이다. 『좌전(左傳)』 宣公 二年
영추선(詠秋扇)
한성제(漢成帝)의 궁인(宮人) 반첩여(班倢伃)가 소박을 당하였는데, 그 시(詩)에, “흰 비단으로 부채를 만들어 흔들면, 바람이 나서 임의 품에 드나들었네. 가을철이 다가오면 서늘한 밤이 더위를 빼앗아가니, 부채는 상자 속에 버려져서 은정(恩情)이 중도에 끊어지리.” 하였다.
영춘(靈椿)
대춘(大椿)이라는 영목(靈木)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상고 시대에 대춘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매우 장수하여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한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남의 장수(長壽)를 비는 데에 쓰는 말이다.
영춘(靈椿)
매우 수명이 긴 나무로서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는 뜻을 취해 타인의 부친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송(宋) 나라 때 두의(竇儀)가 그의 아우 엄(儼)ㆍ간(侃)ㆍ칭(偁)ㆍ희(僖)와 함께 서로 이어 과거에 급제하자, 풍도(馮道)가 시를 주어 축하하기를 “영춘은 한 그루가 늙었는데 붉은 계수나무는 다섯 그루가 향기롭네[靈椿一株老 丹桂五株芳]”하였다.
영출(靈朮)
약명(藥名)으로 삽주 뿌리를 말하는데, 창출(蒼朮)ㆍ백출(白朮) 두 종류가 있다. 사람이 복용하면 좋은 효과를 본다하여 영출이라 한 것이다.
영취(靈鷲)
① 인도(印度)의 영취산이 중국에 날아와 비래봉(飛來峯)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② 중인도에 있다. 이곳에서 석가세존이 『법화경(法華經)』ㆍ무량수경(無量壽經)을 설강하였으므로 약칭하여 영산(靈山) 또는 취봉(鷲峯)이라 한다.
영취산(靈鷲山)
석가모니가 불법(佛法)을 설했던 중인도(中印度)의 산 이름이다.
영치(詠鴟)
올빼미를 읊음.
영치사(領置事)
연산군(燕山君) 때에 특별히 설치한 관명(官名)으로 옥수(獄囚)를 관장하게 하던 것이다.
영탁(營度)
헤아려 다스리다.
영탈(穎脫)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서, 자연적으로 재기(才氣)가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제76권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평원군(平原君)이 말하기를, ‘무릇 현사(賢士)가 이 세상에 처함에 있어서는 비유하자면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 끝이 드러나지 않으면 남들이 알 수가 없다.’ 하자, 모수(毛遂)가 말하기를, ‘신을 오늘 주머니 속에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로 하여금 일찌감치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와서[穎脫而出] 끝이 보이는 정도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영탈이출(穎脫而出)
재능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제76권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평원군(平原君)이 말하기를, ‘무릇 현사(賢士)가 이 세상에 처함에 있어서는 비유하자면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 끝이 드러나지 않으면 남들이 알 수가 없다.’ 하자, 모수(毛遂)가 말하기를, ‘신을 오늘 주머니 속에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로 하여금 일찌감치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와서[穎脫而出] 끝이 보이는 정도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영탈처낭(穎脫處囊)
좋은 재능으로 좋은 자리에 등용되기를 기대한 말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 나라 평원군(平原君)이 초(楚) 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갈 적에 문객(門客)의 한 사람인 모수(毛遂)가 자청하여 일원으로 따라 가려고 하자, 평원군이 “어진 선비란 마치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어 끝이 당장 비져나오는 것처럼 재능이 뛰어나서 남에게 칭송되는 것인데, 그런 칭송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니, 모수가 대답하기를 “신이 진작 주머니 속에 있었더라면 끝만 삐져나올 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제76권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
영통(苓通)
영(苓)은 돼지똥이고 통(通)은 말똥으로 매우 천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영투원공사(永投遠公社)
동진(東晉) 때의 고승(高僧)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동림사(東林寺)를 세우고, 명승(名僧)ㆍ명유(名儒) 등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사(結社)하고서 같이 종유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여기의 원공(遠公)은 바로 혜원법사(慧遠法師)를 가리킨 것이다.
영평(鈴平)
파평(坡平)의 고호인데, 파평의 윤씨(尹氏)를 가리키기도 한다.
영평(永平)
동한 명제(東漢明帝)의 연호이다. 통감(通鑑) 후한기(後漢紀)에 “영평 2년 정월에 광무(光武)를 명당(明堂)에 제사 지내고 영대에 올라 운물(雲物)을 바라보았으며, 3월에는 벽옹에 임해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했다.”고 하였다.
영평(營平)
한(漢) 나라 때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진 맹장 조충국(趙充國)을 말한다. 조충국은 노장(老將)으로서 오랑캐를 정벌하는 데 대하여 수 차에 걸쳐 훌륭한 계책으로 주의(奏議)를 올려 오랑캐들을 무난히 평정하였다. 『한서(漢書)』 卷六十九
영포(盈抱)
한 아름에 가득 차다.
영표(靈標)
신령스러운 지혜를 말한다.
영풍(永豐)
안변에 속한 폐현(廢縣)의 이름으로, 안변의 서쪽에 있다.
영풍한로(迎風寒露)
피서(避暑)를 하기 위해 세운 전각(殿閣) 이른다. 즉 영풍관(迎風觀)과 한로대(寒露臺)를 말한다. 「관중기(關中記)」에 “진제(晉帝)가 영풍관과 한로대를 지어 피서를 하였다.” 했고, 두보(杜甫)의 시에는 “영풍 한로의 옥병을 두었네[置之迎風寒露之玉壺]” 하였다.
영하(鈴下)
문졸(門卒)을 말하며, 방울이 달린 협문의 아래에 있으면서 비상시나 교대할 때 방울을 울려 전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생겼다. / 인용: 杯弓蛇影
영항(永巷)
‘죄를 지은 궁녀가 갇혀 있는 감옥’을 말한다.
영항잠계(永巷箴戒)
영항은 궁중의 복도를 뜻하는데, 임금이 더욱더 국사에 관심을 쏟도록 왕비가 안에서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주 선왕(周宣王)이 항상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고 아침 늦게야 일어나곤 하자, 강후(姜后)가 영항(永巷)에 무릎을 꿇고는 짐짓 자신의 죄를 열거하면서 왕을 경계시켜 깨닫게 한 일화가 전한다. 『열녀전(列女傳)』 「주선강후(周宣姜后)」
영해(嶺海)
호남(湖南)과 호북(湖北)의 두 고을을 지칭한다.
영허(盈虛)
달이 보름에는 찼다가 차차로 어지러져 비는 것 등을 천도(天道)의 영허(盈虛)라 한다.
영허상재신경월(盈虛象在辛庚月)
십간(十干)을 팔괘(八卦)로 분납(分納)하는 한역(漢易)의 이른바 ‘납갑법(納甲法)’에 의하면, 진(震)은 경(庚)에 배당되고 손(巽)은 신(辛)에 배당되는데, 경이 되면 음이 줄어들고 양이 불어나며(陰消陽息) 신이 되면 그 반대가 된다고 한다. 이황(李滉)의 시에 “그동안의 별의별 일 생전에 보게 되다니요, 찼다 기우는 신경의 달 고요히 살펴보오이다[萬事由來在我生 靜看消息月辛庚]”라는 구절이 있다. 『퇴계집(退溪集)』 卷5 「차운기명언(次韻奇明彦)」 二首
영형(寧馨)
소년의 미칭(美稱)이다.
영혜실(永惠室)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던 궁인이 죽으면 그 곳에 신주를 모시고 삭망과 명절에 제사를 지내던 곳을 말한다.
영호쌍미(令狐雙美)
쌍미(雙美)는 둘이 함께 뛰어나다는 뜻인데, 당(唐) 나라 때 영호초(令狐楚)와 그의 아들 영호도(令狐綯)가 다같이 문장(文章)으로 유명하였고, 벼슬도 다같이 재상(宰相)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당서(唐書)』 卷一百七十二 「영호도전(令狐綯傳)」
영화(永和)
당(唐) 나라 때 조효손(祖孝孫)이 지은 악곡으로 현종(玄宗)은 이것을 사당에 사용하고는 대당 아악(大唐雅樂)이라 이름하였다.
영화(永和)
진 목제(晉穆帝)의 연호인데, 영화 9년 3월에 진 나라의 사안(謝安)ㆍ왕희지(王羲之) 등 40여 인이 산음현(山陰縣)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계사(禊事)를 치르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놀이를 하면서 풍류를 즐기었다. 「난정기(蘭亭記)」
영훼인형(靈卉人形)
인삼을 말한다.
영휘(永徽)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이다. 고종은 바로 태종의 아들인데, 그가 만년에, 앞서 태종 때 재인(才人)으로 궁중에 있다가 태종이 붕어한 후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던 무측천(武則天)을 다시 데려와 황후(皇后)로 책봉함으로써, 자신이 죽은 뒤에 황태자가 폐위되고 무측천이 천권(擅權)하여 황실을 탁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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