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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 적암기(寂菴記) 본문

산문놀이터/삼국&고려

이색 - 적암기(寂菴記)

건방진방랑자 2020. 8. 1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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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중시하는 ()’을 유가적으로 풀어내다

적암기(寂菴記)

 

이색(李穡)

 

 

경원의 적암에 기문을 쓰게 된 연유

華嚴大選景元興王寺, 未幾, 絶去世綱, 超然雲水間, 衲衣蔬食, 將終身焉. 而氣豪志潔, 人之見之, 無不愛敬, 予之往來甓寺, 始內交焉.

元公嘗師事懶翁, 翁名之曰寂, 久矣. 今得孟雲韓先生大字以扁, 徵予文爲記.

 

불교의 언어를 풀어낸 경원

且曰: “二覺歸於寂, 敎之極也; 三觀終於寂, 禪之極也. 功行已斷, 知見不立, 俱忘永嘉是非, 直透達磨功德, 是吾志也. 然先生何能知之?

予之在山也, 晝而一鳥不鳴, 夜而孤月又出, 水流花間, 雪壓松上. 獨立固寂, 群居亦寂. 寂之有味, 舌難以旣, 吾是以扁之吾菴.

吾觀先生似避喧者, 然未必知吾道也. 故略擧二覺三觀達磨永嘉之說, 而終之以山中之事, 先生何所取乎?”

 

()’은 유학에서도 나오는 것

予曰: “吾儒者自庖羲氏以來, 所守而相傳者, 亦曰寂而已矣, 至于吾不肖, 蓋不敢墜失也.

大極寂之本也, 一動一靜而萬物化醇焉; 人心寂之次也, 一感一應而萬善流行焉. 是以, 大學綱領, 在於靜定, 非寂之謂乎? 中庸樞紐, 在於戒懼, 非寂之謂乎? 戒懼, 敬也; 靜定, 亦敬也. 敬者, 主一無適而已矣, 主一, 有所守也; 無適, 無所移也. 有所守而無所移, 不曰寂不可也. 治平, 政事之明效; 位育, 道德之大驗, 師之寂也, 其亦普利含識之源本歟?

如或槁木其形, 寒灰其心, 而滯於寂, 則與吾儒之群鳥獸者何異? 吾儒之絶物也, 釋氏之罪人也.

吾與寂菴, 當善自圖, 不流入於一偏可也. 若夫山中之寂, 屬之師而不屬於我, 我奈何我奈何?” 牧隱文藁卷之六

 

 

 

 

 

 

해석

 

경원의 적암에 기문을 쓰게 된 연유

 

華嚴大選景元興王寺, 未幾,

화엄종의 대선대선(大選): 승과(僧科)에 합격한 승려에게 주던 초급(初級) 법계(法階)를 말한다.인 경원이 흥왕사에 머물다가 얼마 안 되어

 

絶去世綱, 超然雲水間,

세상의 그물망을 절대로 끊고 초연하게 구름과 물 사이에서

 

衲衣蔬食, 將終身焉.

납의를 입고 채소를 먹으며 장차 몸을 마치려 했다.

 

而氣豪志潔, 人之見之,

기운이 호탕하고 뜻이 깨끗해 사람이 그를 보면

 

無不愛敬,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음이 없어

 

予之往來甓寺, 始內交焉.

내가 벽사벽사(甓寺): 여주(驪州)의 신륵사(神勒寺)가 벽돌로 쌓였기에 벽절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에 왕래할 적에 비로소 사귀게 되었다.

 

元公嘗師事懶翁, 翁名之曰寂,

경원공이 일찍이 나옹을 스승으로 삼으니 나옹은 그에게 ()’이라 이름 지어준 지

 

久矣.

오래되었다.

 

今得孟雲韓先生大字以扁,

이제 맹운한 선생에게 큰 글자를 얻어 편액으로 걸고

 

徵予文爲記.

나에게 문장을 부탁했기에 기문을 짓는다.

 

 

 

불교의 언어를 풀어낸 경원

 

且曰: “二覺歸於寂, 敎之極也;

또한 말했다. “본각(本覺)과 시각(視覺)이각(二覺):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한다. 본각은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바, 여래(如來)와 똑같은 청정한 지혜를 말하고, 시각은 일단 미혹(迷惑)된 중생의 본각이 다시 본성으로 환원된 지혜를 말한다.은 적막으로 돌아가리니 교()의 극치이고

 

三觀終於寂, 禪之極也.

삼관삼관(三觀) : 관법(觀法)을 닦을 때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여기서는 당()나라 징관(澄觀)이 말한 정관(靜觀)ㆍ환관(幻觀)ㆍ적관(寂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은 적막으로 끝나리니 선()의 극치입니다.

 

功行已斷, 知見不立,

공력을 쌓으려는 행동도 이미 끊어지고 분별심지견(知見):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도 세우지 않으니

 

俱忘永嘉是非, 直透達磨功德,

모두 영가가 말한 시비도 잊고영가시비(永嘉是非): 일숙각(一宿覺)으로 유명한 당나라 승려 영가의 증도가(證道歌)그르다고 하는 것도 사실 그른 것이 아니고, 옳다고 하는 것도 사실 옳은 것이 아니니, 처음에 털끝만큼이라도 분별심을 낸다면 나중에는 천리나 어긋나게 될 것이다.[非不非是不是 差之毫釐失千里]”라는 말이 나온다. 다만 달마가 말한 공덕도 꿰뚫는 것달마공덕(達磨功德): 양 무제(梁武帝)가 보리 달마(菩提達磨)에게 내가 즉위한 이후로 절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며 승려를 양성하는 일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하였는데, 앞으로 무슨 공덕을 받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달마가 하나도 공덕이 없다.”고 대답했던 그 진정한 뜻을 말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3

 

是吾志也.

저의 뜻입니다.

 

然先生何能知之?

그러나 선생이 어찌 그걸 알겠습니까?

 

予之在山也,

제가 산에 있을 때

 

晝而一鳥不鳴, 夜而孤月又出,

낮인데도 한 마리 새도 울지 않았고 밤엔 외로운 달이 또한 나왔으며

 

水流花間, 雪壓松上.

물은 꽃 사이에서 흐르고 눈은 소나무 위를 누릅니다.

 

獨立固寂, 群居亦寂.

홀로 서 있어도 진실로 적막하지만 여럿이 거처해도 또한 적막합니다.

 

寂之有味, 舌難以旣,

적막엔 맛이 있어 혀로 다 말하기 어려워

 

吾是以扁之吾菴.

저는 이 때문에 저의 암자에 편액을 걸었습니다.

 

吾觀先生似避喧者,

제가 선생을 보니 시끄러운 데서 피하려는 것 같지만

 

然未必知吾道也.

반드시 우리의 도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故略擧二覺三觀達磨永嘉之說,

그러므로 대략 이각ㆍ삼관ㆍ달마ㆍ영가의 말을 거론하고

 

而終之以山中之事, 先生何所取乎?”

산중의 일로 끝을 냈으니 선생은 어떤 것을 취하시겠습니까?”

 

 

 

()’은 유학에서도 나오는 것

 

予曰: “吾儒者自庖羲氏以來,

내가 말했다. “우리 유학자는 포희씨 이래로부터

 

所守而相傳者, 亦曰寂而已矣,

지켜 서로 전한 것이 또한 ()’일 뿐이니,

 

至于吾不肖, 蓋不敢墜失也.

저의 불초함에 이르러서도 대개 감히 실추시킬 수 없습니다.

 

大極寂之本也,

태극은 적막함의 근본이니

 

一動一靜而萬物化醇焉;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함에 만물의 변화가 순일하고

 

人心寂之次也,

인심이 적막한 건 다음이니,

 

一感一應而萬善流行焉.

한번 감동하고 한번 감응하여 모든 선이 유행합니다.

 

是以, 大學綱領,

이런 까닭으로 대학의 강령은

 

在於靜定, 非寂之謂乎?

정정에 있으니 적막함을 말한 게 아니겠습니까?

 

中庸樞紐, 在於戒懼,

중용의 요점은 경계하고 두려워함에 있으니

 

非寂之謂乎?

적막함을 말한 게 아니겠습니까?

 

戒懼, 敬也; 靜定, 亦敬也.

경계하고 두려워함도 ()’이고 정정도 또한 ()’입니다.

 

敬者, 主一無適而已矣,

()은 하나를 주장하여 다른 데에 가지 않는다는 것뿐이니

 

主一, 有所守也;

한 가지를 주장한다는 것은 지킬 게 있음이고

 

無適, 無所移也.

다른 데 가지 않는다는 것은 옮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有所守而無所移, 不曰寂不可也.

지킬 게 있고 옮기지 않는다는 것이니 적이라 말하더라도 불가한 것은 아닙니다.

 

治平, 政事之明效;

치평(治平)은 정치의 밝은 공효이고

 

位育, 道德之大驗,

천지가 자리잡고 만물이 길러진다는 것은 도덕의 큰 증험입니다.

 

師之寂也, 其亦普利含識之源本歟?

스님의 적막도 또한 대중함식(含識): 심령(心靈)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중생을 달리 이르는 말.에게 이익을 베풀려는 본원이겠죠?

 

如或槁木其形, 寒灰其心,

만약 혹 형체를 마른 나무처럼하고 마음을 식은 재처럼 하여

 

而滯於寂, 則與吾儒之群鳥獸者何異?

적에만 골똘한다면 우리 유자들이 짐승과 모여 산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吾儒之絶物也, 釋氏之罪人也.

그렇게 한다면 우리 유학자들이 사물을 끊어내는 것이고 석가는 죄인이 됩니다.

 

吾與寂菴, 當善自圖,

저와 그대가 마땅히 잘 스스로 도모하여

 

不流入於一偏可也.

한 편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若夫山中之寂, 屬之師而不屬於我,

산중의 적막함 같은 경우는 스님에게 속한 것이고 나에게 속한 건 아니니

 

我奈何我奈何?” 牧隱文藁卷之六

제가 어찌 하겠습니까? 제가 어찌 하겠습니까?”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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