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최척전(崔陟傳)
「최척전」은 「기달록(奇達錄)」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1567~1649)이 광해군 30년인 1621년에 지은 작품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최척전」의 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남원의 주포에 머물고 있었는데, 때마침 최척이 방문해서 자기가 겪었던 일을 이처림 이야기하고이어서 그 전말을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경개를 대략기술하였다. 천계 원년 신유년 윤이월 소옹이 짓다.
余流寓南原之周浦, 陟時來訪余, 道其事如此, 請乃記其顚末, 無使湮沒. 不獲已略擧其槪. 天啓元年, 辛酉潤二月日, 素翁題. 「최척전」, 『필사본 고전소설전집』 3, 아세아문화사, 198쪽.
위의 기록은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최척전」의 말미에 씌어 있는 것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최척전」의 말미에도 똑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다만 ‘소옹제(素翁題)’ 대신에 ‘소옹(素翁) 조위한(趙緯韓)’이라고 되어 있는 것만이 다르다. 천계원년(天啓元年)은 청태조(淸太祖) 6년이며, 소옹(素翁)은 조위한의 자(字)이다. 이들 기록으로 보아 「최척전」은 조위한이 1621년에 지은 것임을 알 수있다. 또 이덕무(李德懋)의 『아정유고(雅亭遺稿)』에 “나는 일찍이 소옹의 최척전을 읽어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余嘗讀素翁崔涉傳 而詳知也.].”【이덕무, 「雅亭遺稿」 7, 『靑莊館全書』제15권.】라는 기록이 있는바, 「최척전」의 작자는 조위한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조위한의 호는 현곡(玄谷)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1567년 서울 서부의 반석방(盤石坊)에서 아버지 양정(楊庭)과 어머니 한씨(韓氏)의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세 때 이미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으며, 15세 때는 『사서삼경』을 외웠고, 16세 때는 선소(先素)의 고문(古文)을 널리 섭렵했다고 한다. 26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 연천과 토산 등지로 피난하였으며, 그 해 겨울에 다시 어머니의 친정인 남원으로 내려와 피난살이를 하였다. 남원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잠시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전란의 와중에서 딸·모친·아내 등을 잃은 나머지 실의에 차서 중국의 명승지를 유람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는 35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43세 때에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비로소 관계에 진출하였다. 관계에 진출한 이후 예조정랑·지제교 등을 역임하였으나 45세 때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면서 너무 사치스럽게 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으며, 47세 때는 정협의 무고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이후 그는 문란한 정치현실에 실망하여 가족을 이끌고 남원의 주포(周浦)로 이사를 하였으며, 권필· 이안눌·허균 등 뜻맞는 벗들과 어울려 시주와 여행을 즐기면서 생활하였다. 그가 「최척전」을 지은 것도 이 시기였다.
남원에 은거하던 조위한은 57세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다시 벼슬생활을 시작하는데, 사헌부 편수관·동부승지·예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76세 때 인조의 특명으로 공조참판에 제수되고, 80세에는 정2품 벼슬 이상을 한 사람에게 경노와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다가 83세 되던 해인 1649년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문집으로는 14권 3책으로 된 『현곡집(玄谷集)』이 남아 있으며, 광해군 시절 백성들의 처참한 생활을 보고 우리말로 「류민탄(流民嘆)」이라는 가사를 지었다고 하나 현재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조위한의 생애와 관련된 내용은 민영대의 『조위한과 최척전』(아세아문화사, 1993)의 연구성과를 발췌·정리한 것임.】.
「최척전」은 동아시아를 휩쓴 정유재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무대로 남녀의 애정 문제와 함께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친구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던 최척은 부친의 병에 따라 정상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최척이 글을 읽을 때마다 어떤 아가씨가 창 밑에 숨어 몰래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던 어느 날 창 틈으로 구혼의 내용이 담긴 종이 쪽지 하나가 들어온다. 쪽지를 보낸 사람은 서울의 사족 출신인 옥영이었으며, 그녀는 모친인 과부 심색를 따라 친척인 정상사 집으로 피난을 온 터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은 아버지를 통해 정상사에게 구혼을 하지만, 심씨가 최척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구혼을 거절한다. 옥영은 심씨를 설득하여 최척과 약흔을 하나, 최척이 의병으로 뽑혀 가는 바람에 둘은 혼례를 치르지 못한다. 혼례 일이 되어도 최척이 돌아오지 않자, 부유한 양생이 정상사 부부를 통해 옥영에게 구혼하여 심씨의 허락을 받는다. 이에 옥영은 자결을 기도함으로써 양생과의 혼인을 파기시키며, 이러한 내막을 전해들은 최척은 의병장에게 호소하여 집으로 돌아와 옥영과 혼례를 치른다. 결혼한 최척과 옥영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오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여 매월 초하루만 되면 만복사에 올라가 기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육금불이 옥영의 꿈에 나타나 아들을 점지해 주며, 옥영은 아들 몽석을 남는다. 이후 최척과 옥영은 애정이 더욱 돈독해져 하루도 떨어지지 않고 생활한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한 생활은 오래 가지 않는다. 정유년 8월에 왜구가 남원을 함락함에 최척은 가족을 이끌고 연곡사로 피난을 갔는데, 최척이 구례로 식량을 구하러 가는 사이에 왜적이 연곡사에 쳐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붙잡아 가버린다 왜적이 물러간 뒤 연곡사로 돌아온 최척은 가족을 찾아 섬진강 등을 헤매지만 찾지 못하고 남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명나라 장수인 여유문을 만나 그와 함께 중국으로 간다. 최척의 부친 최숙과 장모 최씨는 포로로 붙들려 가는 도중 왜적이 방심한 들을 타 연곡사로 달아나 오는데,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손자인 몽석을 찾아 함께 남윈으로 돌아가 옛집을 수리하고 산다. 한편, 남장을 하고 있던 옥영은 외병인 돈우에게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간다. 돈우는 본래 배를 타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옥영을 남자로 알고 배에 태워 함께 장사를 다닌다. 중국으로 간 최척은 여유문이 죽자, 주우라는 사람을 따라 배를 타고 차를 팔면서 떠돌다가 안남에 이른다. 이때 일본인 상선 10여 척도 안남에 정박해 있었는데, 밤에 문득 일본인 상선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린다. 최척이 쓸쓸한 마음에 피리를 꺼내 불자, 일본인 배에서 자신이 지어서 옥영에게 들려주었던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려온다. 최척과 옥영은 이렇듯 머나먼 이국에서 기적적으로 만나 중국에서 살게 되며, 그 사이 장육금불의 현몽과 함께 둘째 아들 몽선을 낳는다. 몽선이 장성하여 장가를 보내려고 할 즈음에 이웃에 홍도라는 처녀가 이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홍도는 아버지가 조선에 출군했다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가서 마음속에 맺힌 원한을 풀고자 했는데, 몽선이 혼처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모에게 중매를 부탁한다. 최척은 홍도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며느리로 맞이하여 함께 산다.
다음 해인 무오년에 오랑캐 추장이 요양을 침범하자, 최척은 부득이 부총인 오세영을 따라 전쟁에 참여했다가 오랑캐의 포로가 된다. 이때 강홍립을 따라 전쟁에 참여했던 몽석도 강홍립이 항복하는 바람에 포로가 되어 최척과 함께 어떤 오람캐의 뜰에 감금된다. 최척과 몽석은 뒤늦게 서로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말고 통곡하는데, 늙은 오랑캐 병사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그 오랑캐는 자신도 조선 사람이었는데 벼슬아치들의 학정을 견디지 못해 오랑캐 땅에 살게 되었다며 최척과 몽석을 풀어준다. 최척과 몽석은 고국으로 돌아오던 도중 홍도의 부친인 진위경을 만나 함께 남원에 이르러서 부친과 장모를 모시고 산다. 한편 중국에 남아 있던 옥영은 최척이 살아 남았다면 조선으로 갔으리라 생각하여 몽선과 홍도를 데리고 조선행을 감행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온갖 고난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남원에 이르러 마침내 온 가족과 상봉하게 된다. 이후로 최척과 옥영은 위로는 아버님과 장모님을 잘 받들고, 아래로는 자식과 며느리들을 잘 보살피며 서문 밖 옛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이상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최척전」은 남녀 주인공의 애정을 바탕으로 하면서 전란으로 인해 야기된 한 가족의 이산과 기적적인 재회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최척전」에서 최척과 옥영이 결연하는 과정은 「주생전」이나 「위경천전」 등과 마찬가지로 전기소설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정 갈등 및 그 전개 양상은 다소 차이가 있다. 「주생전」이나 「위경천전」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우연히 연인을 만나 가문의 멸망과 자신의 파멸을 부르는 ‘위험한 불장난’을 저지르긴 하지만, 자신들의 애정을 성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애로운 부모들의 헤아림으로 일단 애정을 성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해 「주생전」이나 「위정천전」에서는 남녀의 애정에 따른 현실적 제약이 구체화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달리 「최척전」에서 최척과 옥영, 특히 옥영은 자신의 애정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그녀는 최척에게 먼저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대담할 뿐만 아니라, 최척의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현명함을 보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척전」은 남녀 애정에 따른 갈등과 현실적제약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최척전」은 전쟁의 형상화 및 내적 성격의 측면에서도 「주생전」이나 「위경천전」 등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전쟁 모티프는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에도 나타나는 바, 「주생전」이나 「위경천전」은 물론 「최척전」의 전쟁 모티프도 이들 전기소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들 작품 모두에서 전쟁은 주인공들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척전」에서의 전쟁은 여타의 전기소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최척전」을 제의한 여타의 작품에서는 전쟁이 홍건적의 침입이나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구체성을 띠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전쟁을 사회적 측면이나 민중적 삶과 연계시키지 않고 개인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이들 작품에서 전쟁은 그저 남녀 주인공의 애정을 파탄시키는 운명적 불행 그 자체이거나 우연한 불행의 학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최척전」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한 가족이 붙들려 가거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 상황과 민중들이 겪는 고통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는 작품의 후기에 씌어 있는 대로 「최척전」이 사실에 기초하여 창작된 것과 무관하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최척전」에 여실하게 그려진 전쟁의 참상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전쟁이 민중의 삶에 어떠한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우는가에 대한 작가의 탐구정신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최척전」에서의 전쟁은 남녀 주인공의 애정을 파탄시키는 계기로서만이 아니라 민중들의 고통과 생존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는 비극적이며 극한적인 상황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렇듯 「최척전」은 애정 갈등은 물론 전쟁의 참상을 한 가족의 이합집산을 중심으로 사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초기소설의 리얼리즘이 갖는 한계를 크게 극복하면서 17세기 소설로 하여금 리얼리즘의 진경(眞境)을 이룩하게 하는 데 선도적으로 기여 했다는 평가【박희병(1990), 「최척전」, 『한국고전소설작품론』, 집문당, 91쪽.】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최척전」 또한 일정하게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즉 「최척전」은 최척 일가의 기적적인 재회를 부처님의 가호라는 초현실적인 힘의 작용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분명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단순히 한계나 문제점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척전」은 실로 「기우록」이라 일컬을 만큼 최척 일가의 이산과 기적적인 재회를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머나먼 이국에서 최척과 옥영의 재회, 오랑캐 감옥에서 최척과 몽석의 만남, 홍도와 진위경의 만남 등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큼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다. 때로 현실은 소설보다도 더 소설적인 경우도 없지 않기에, 이것은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적인 만남이 아무리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우연한 기적 그 자체로 형상화한다면, 소설 내적 필연성이나 통일성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최척전」의 불교적 요소는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기적같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데 대해 작가가 나름대로 필연성과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도입한 측면이 없지 않다【박희병(1990), 「최척전」, 앞 책 96쪽.】. 요컨대 최척 일가의 기적적인 재회를 부처님의 가호라는 초현실적인 힘의 작용으로 그린 것은 소설 내적 필연성과 통일성을 갖추는데 기여하고 있는 바, 그 내용이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주의적 정신에 배치된다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편,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홍도(紅桃) 이야기」가 있는데, 줄거리가「최척전」과 거의 같아 주목된다. 줄거리가 같은 점으로 인해 「홍도 이야기」가 먼저 설화형태로 성립되고, 「최척전」은 이를 토대로 소설화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우야담』이 완성된 시기(1621년)와 「최척전」이 창작된 시기가 거의 동일한바, 「홍도 이야기」가 「최척전」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두 작품이 서로 영향관계가 없다는 것은 등장인물의 명칭이 심하게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최척전」에서 최척과 옥영이 부부간으로 나오며, 홍도는 중국 사람으로 최척의 며느리이다. 그런데 「홍도 이야기」에서는 정생(鄭生)과 홍도가 부부간으로 되어 있으며, 옥영이라는 이름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따라서 「홍도 이야기」는 최척의 이야기가 유포되는 과정에서 사건의 줄거리를 중심으로 기록·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인용
1. 머리말
2. 작품의 성격과 그 의의
1) 주생전
2) 위경천전
3) 운영전
4) 상사동기
5) 최척전
3.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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