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李建昌, 1852 철종3~1898 광무2, 자 鳳藻ㆍ鳳朝, 호 寧齋, 堂號 明美堂)은 강화도 사곡(沙谷)에서 태어났다. 피난지(避難地) 수도(首都)라는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인 강화도는 이건창(李建昌)의 가문(家門)에 있어서는 신임옥사(辛壬獄事)와 나주벽서(羅州壁書) 사건으로 이어지는 정쟁(政爭)으로부터의 피신처이기도 하였으며 양명학(陽明學)이라는 가학(家學)을 이룩한 고장이기도 하다.
이건창(李建昌)은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조부(祖父) 시원(是遠)의 순절(殉節)을 계기로 강화별시(江華別試)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였다. 그 뒤 벼슬이 참판에 이르는 동안 47년의 생애 가운데 태반을 묘당(廟堂)에서 보냈지만, 관인으로서는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오히려 문명(文名)으로 영채(英彩)를 발하였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시명(詩名)이 문명(文名)에 가려진 결과가 되었지만, 구한말의 문인으로 시와 문에 양미(兩美)한 이를 꼽는다면 역시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과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을 들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시는 백거이(白居易)ㆍ소식(蘇軾)ㆍ육유(陸游)ㆍ전겸익(錢兼益) 등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영재(寧齋) 자신의 진술에서도 그는 “두보(杜甫)는 감히 엄두도 못내고 육유(陸游)는 너무 광박(廣博)하고 원호문(元好問)은 너무 준험(峻險)해서 배우기가 어려웠지만, 전겸익(錢謙益)이 스승이라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四十年來苦學詩, 何曾夢見杜陵爲, 劍南廣博遺山峻 不諱錢翁是本師 「題有學集後」].”라 하여 전겸익(錢謙益)를 배운 것을 실토하고 있다. 다만 그 골력(骨力)이나 신운(神韻)에 있어서는 매천(梅泉)과 창강(滄江)을 따르지 못한다는 비평도 없지는 않지만, 평담(平淡)함을 특장(特長)으로 삼는 그의 시풍은 일세(一世)의 명가(名家)로서 손색이 없는 명편(名篇)을 남기고 있다.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여얼(餘孽)로 일문(一門)이 파가(破家)의 대극(大棘)을 겪으면서도 가문의 전통을 이어 벼슬길에서도 그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이건창(李建昌)은, 고종(高宗)의 누차에 걸친 엄지(嚴旨)에도 불구하고 해주관찰사(海州觀察使)라는 영관(榮官)을 버리고 고군산도(古群山島) 유배를 자청했다. 만년에는 망국으로 줄달음치는 국운을 차마 지켜 볼 수 없어 강화에 돌아가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광무(光武) 2년 세상을 등졌다. 그래서 그에게는 순국(殉國)의 기회나 우국시(憂國詩)를 남길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매천(梅泉)이 영재(寧齋)에 대한 생전의 충절을 기려 그의 오애시(五哀詩)에 조병세(趙秉世)ㆍ민영환(閔泳煥)ㆍ최익현(崔益鉉)ㆍ홍만식(洪萬植) 등 사절제신(死節諸臣)과 동렬에 서게 하였을 뿐이다.
저서로 『명미당고(明美堂稿)』가 전한다. 영재(寧齋)가 남긴 우국시로는 「아산과이충무공묘(牙山過李忠武公墓)」를 들 수 있을 정도이지만, 이 시가 씌어진 시기에 나라의 대세가 온통 개화의 물결에 휘말려 있었는데도 벌써 닥쳐올 나라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탁월한 예지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울부짖는 화전민의 생활을 그린 「협촌기사(峽村記事)」를 비롯하여, 서울 양반을 기롱한 「노오(老烏)」가 있으며,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정주남지일(定州南至日)」, 「도망(悼亡)」(이상 五絶), 「안시성(安市城)」, 「설성세시가(雪城歲時詞)」, 「홍류동희제(紅流洞戲題)」, 「구성도중(駒城途中)」, 「고차잡절(古次雜絶)」, 「제제회전등사분득생자견기(諸弟會傳燈寺分得生字見寄)」(이상 七絶), 「금석산(金石山)」, 「과령작(過嶺作)」, 「천마산회우림(天磨山懷于霖)」(이상 五律), 「회양(淮陽)」, 「십삼산망해(十三山望海)」, 「운재장인직려념이혜길운기회(雲齋丈人直廬拈李惠吉韻記懷)」, 「세모즉사(歲暮卽事)」, 「동허방숙등금오산성(同許方叔登金烏山城)」, 「무망루감회(無忘樓感懷)」(이상 七律), 「숙광성진기선중새신어(宿廣城津記船中賽神語)」(이상 五古) 등 18수에 이르는 시편을 뽑고 있다.
이 중에서 평담한 이건창(李建昌)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정주남지일(定州南至日)」과 친구를 그리며 읊은 「천마산회우림(天磨山懷于霖)」을 보기로 한다.
一陽南至日 萬里北行人 | 해가 동지에 이른 날, 만리 북으로 가는 나그네. |
忽見梅花發 猶疑漢水春 | 문득 매화꽃 피어 있어 한강에 봄이 왔나 의심나게 하네. |
한겨울 동지(冬至)날, 정주에서 머물고 있을 때 홀연히 매화가 피어난 것을 보고 지은 시이다. 매화는 이른 봄에 피는 꽃이다. 그런데 한겨울 북변(北邊)에 매화가 핀 것을 보고 지금쯤 한강가에도 봄이 왔을 것이라는 심사를 소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도 그의 아기(雅氣)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다음은 「천마산회우림(天磨山懷于霖)」이다.
嶻櫱天磨鎭 蕭條蜀莫州 | 가파른 천마진(개성)이요, 쓸쓸한 촉막주(개성)라. |
江山餘故國 風雨送殘秋 | 강산은 옛나라 자취 남아 있는데 비바람은 늦은 가을 보낸다. |
古寺楓林落 空城瀑布流 | 옛 절엔 단풍잎 떨어지고 빈 성엔 폭포수 흘러내린다. |
故人京雒去 惆悵不同游 | 옛친구 서울로 떠나고 없어 서글퍼라, 함께 노닐지 못하네. |
개성 부근에 있는 천마산을 유람하다가 서울로 간 문우(文友) 김택영(金澤榮, 于霖)을 그리워하면서 쓴 시이다. 천마산 주변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옛부터 소인(騷人)과 묵객(墨客)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처연한 정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경련(頸聯)에 이르기까지 주변 경물의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비록 감정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노출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소조(蕭條)’, ‘고국(故國)’, ‘잔추(殘秋)’, ‘풍림(楓林)’, ‘공성(空城)’ 등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침울하게 하고 있어, 친구를 만나지 못한 서글픔을 받쳐주는 데 모자람이 없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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