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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19장 - 소박하게 살며 사욕을 줄이라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19장 - 소박하게 살며 사욕을 줄이라

건방진방랑자 2021. 5. 10.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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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장

 

 

絶聖棄智,
절성기지,
성스러움을 끊어라!
슬기로움을 버려라!
民利百倍;
민리백배;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할 것이다.
絶仁棄義,
절인기의,
인자함을 끊어라!
의로움을 버려라!
民復孝慈;
민복효자;
백성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다.
絶巧棄利,
절교기리,
교사스러움을 끊어라!!
이로움을 버려라!
盜賊無有.
도적무유.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此三者, 以爲文, 不足,
차삼자, 이위문, 부족,
이 세가지는
문명의 장식일 뿐이며
자족한 것이 아니다.
故令有所屬.
고령유소속.
그러므로
돌아감이 있게 하라!!
見素抱樸,
현소포박,
흰 바탕을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아라!
少私寡欲.
소사과욕.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하라!!

 

 

1. 유가를 비판하기 위해 도가가 등장한 건 아니다

 

이 장은 우리가 여태까지 얘기해온 반주지주의(反主知主義, anti-intellectualism), 반문명론(反文明論, counter-culturalism), 그리고 무위적(無爲的) 정치철학의 입장을 아주 강렬한 명령형으로 정리해 놓은 장으로 노자의 사회관을 이야기할 때 심히 인용이 많이 되는 장이다.

 

현소포박(見素抱僕)이니, 소사과욕(私募欲)이니 하는 문구는 거의 노자철학을 대변하는 숙어로서 잘 인용된다. 그리고 이 장은 죽간(竹簡)의 갑본(甲本) 제일 첫머리에 거의 전문이 다 등장함으로써 마치 노자의 제1장과도 같은 느낌의 중요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왕본(王本)죽간본(竹簡本)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18장에서 우리가 토의했던 주제와 일치되는 것이다. 양자를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王本 簡本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智棄辯,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亡有.
絶巧棄利, 盜賊無有. 絶僞棄慮(), 民復孝慈.

 

 

왕본의 성지(聖智), 인의(仁義), 교리(巧利)의 삼자(三者)가 간본에서는 지변(智辯), 교리(巧利), 위려(僞慮)의 삼자(三者)가 된다(간본에는 자 속에 들어있는 자가 자로 되어 있는데, 裘錫圭는 이것을 자로 보았다. 나는 그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간본에는 인의(仁義)’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간본의 층대에서는 도무지 인()과 의()를 끊고[] 버려야 할[]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가사상의 출현이 결코 유가사상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것은 아니며,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은 초기에는 서로 공감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 지도자는 종교적 인간이 되어선 안 되고 인의로 백성을 대해선 안 된다(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과 지()를 절기(絶棄)하라! 물론 이것은 노자가 범인에게 던지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인간세의 리더들에게 던지는 말인 것이다. 백성을 이끌어 가는 치자들이 공연히 자신을 성스럽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곧 훌륭한 치자가 될 수가 없다. 치자들의 성지(聖智)의 자기기만성 때문에 오히려 백성들은 괴로움을 당하고 이로움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 백서(帛書) 갑본(甲本)에는 ()’으로 되어 있고 을본(乙本)에는 (耳口)’으로 되어 있는 상황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에는 신의 신탁을 듣는다는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통치자의 종교적 성향은 가장 경계해야 할 아집이다. 어떤 상황이든지, 한 종교의 성스러운 경지에 미쳐있는 사람은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지도자는 성인(聖人,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신적인 지혜의 자만감을 가져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종교적 집단에 있어서 조차도 과도하게 성스러운 사람은 그 집단의 참된 리더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인의(仁義)를 절기(絶棄)하라! 지도자는 인의로써 아랫사람을 대해서는 아니된다. 인의의 덕목을 초월하는 불인(不仁)한 보편주의로써 백성을 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오히려 백성들이 효성스럽고(, 자식이 부모에게 대하는 감정), 자애롭게(,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감정) 될 것이다.

 

 

3. 문명의 이기를 발전시키면 백성은 도둑놈이 된다(絶巧棄利, 盜賊無有)

 

교리(巧利)를 절기(絶棄)하라! 백성을 이롭게 한다 하면서 자꾸만 교사(巧詐)스러운 문명의 이기를 발전시키면 시킬수록 백성은 도독놈이 되어갈 뿐이다. 교리(巧利)는 문명의 이기를 발전시키는 모든 테크놀로지를 총칭한다고 볼 수도 있다. 장자(莊子)』 「천지편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고사가 실려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남쪽의 초나라로 여행을 갔다가 진()나라로 돌아올려고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저 들판에서 한 노인이 깊은 우물에서 물을 일일이 항아리로 길어내어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주 힘들게 보였다. 그래서 자공은 그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제가 물을 효율적으로 퍼올릴 수 있는 기계를 소개해드리지요. 이것은 고()라는 이름의 기계입니다만 이런 방식으로 물레방아처럼 퍼올리면 노력은 조금 들이고도 그 공이 클 수가 있습니다[用力甚寡, 而見功多].”

 

이때 노인이 자공을 무안하게 한참 빤히 쳐다보다가 되물었다.

 

댁은 뭐하는 사람이요[子奚爲者耶]?”

 

저는 공자(孔子)의 제자로서 여기저기 공부하러 다니는 사람입니다[孔丘之徒也].”

 

그러자 그 노인은 발끈 성을 내는 듯이 한바탕 유려하게 내뱉었다.

 

~ 그 창녀새끼의 새끼로구만! 여기저기 벼슬아치 밑구멍이나 빨러 다니면서 성학(聖學)을 팔어먹고, 저 혼자 거문고를 타면서 아주 슬픈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대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명성을 천하에 휘날리는 그자의 주구로구만[子非夫博學以擬聖, 於於以蓋衆, 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 汝方將忘汝神氣, 墮汝形骸, 而庶幾乎! 而身之不能治, 而何暇治天下乎! 子往矣, 無乏吾事]!”

 

노인장!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그려!”

 

그랬더니 노인장은 대짜고짜 반문하는 것이었다.

 

여보시오! 내가 당신이 말하는 기계를 몰라 이 짓을 하고 있는 줄 아시오? 나는 내가 지킬려는 도()가 있소. 도 앞에 부끄러워 나는 기계를 쓰지 않을 뿐이요. 내 몸 하나 못 다스리는 자가 어찌 천하를 다스리려 하오[]?”

 

자공은 약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子貢瞞然慚, 俯而不對]. 이때 노인은 자공에게 위대한 연설을 늘어 놓았다.

 

나는 내 스승에게 일찍이 들었소[吾聞之吾師. 인간의 삶에 기계가 도입되게 되면 기계로 인한 일들이 반드시 생겨나게 되오[有機械者, 必有機事]. 그리고 기계로 인한 일들이 생겨나면 반드시 기계로 인한 나태한 마음이 생겨나게 마련이오[有機事者, 必有機心]. 그리고 이러한 기계로 인한 마음이 가슴에 들어박히게 되면 순결하고 물들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해치게 마련이라오[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인간의 본성을 해치게 되면 신령스러운 우리의 생명이 제자리를 잃고 불안하게 되오[純白不備, 則神生不定]. 신령스러운 우리의 생명이 불안하게 되면 우리 존재는 영영 도에서 멀어져 갈 뿐이라오[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이 말을 듣는 순간 자공은 크게 깨달았다. 공자라는 스승 이외에도, 너무도 큰 스승이 논이랑에 숨어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이었다. 자공은 두려워 움츠러든 채 창백해져서 멍청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머리를 못든 채 30리를 가서야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다[行三十里而後愈].

 

 

4. 우리는 과학 보편주의의 제물이 되어선 안 된다

 

장자(莊子)』 「천지의 이 고사는 동양문명이 왜 기술문명을 고도화시키지 않았는가에 대한 깊은 반추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기술문명을 극대화시키지 않은 것은 의식적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노자가 말하는 교리(巧利)’는 결국 기사(機事),’ ‘기심(機心)’의 산물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궁극적으로 문명의 형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웁게 살 수 있는 삶이다. 밭에 양수기를 쓰는 것은 물론 에너지의 효율로 볼 때는 정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정당성의 이면에는 끊임없는 인성의 타락이 동반된다. 양수기를 안 쓰고도, 자족한 순백(純白)한 인간의 본성이 보존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우리는 존중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반()문명적인 가치관을 서양의 제국주의, 특히 자본주의적 보편주의의 횡포는 허락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밭의 노인은 자공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도덕적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 미국 자본주의는 그러한 노인을 존중치 않는다. 그리고 그 노인에게 기계를 사용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우리시대의 논리는 아무리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싸이언스나 테크놀로지를 강요한다 하더래도 우리의 선택의 여지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참으로 깨어있다면 우리의 삶의 양태에 맞지 않는 과학이나 기술을 배제할 수 있는 실력도 함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보편주의의 제물이 될 수가 없다. 우리에게 맞는 과학과 기술문명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기사(機事)와 기심(機心)을 배제시키는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과학의 발전이라고 외치는 많은 문명의 양태들이 그 근본을 뒤집고 보면 아주 하찮은 인간의 나태의 산물(the victory of human indolence)일 수도 있다. 나태하고자 하는 마음, 조금 더 편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문명은 발전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21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5. 문화는 문식이 되어선 안 된다(此三者, 以爲文, 不足)

 

여기서 말하는 삼자(三者)는 성지(聖智)ㆍ인의(仁義)ㆍ교리(巧利)이다. 그런데 이 삼자(三者)()’이라는 것이다. ()이라는 것은 원래 ()’이라는 글자와 통한다.

 

()무늬요 문양이요 문식(紋飾)이다. 즉 그것은 인간의 삶의 본질이 아닌 표피적인, 감각적인 장식이다. 바로 노자의 반문명론은, 문명 그 자체의 거부라기 보다는 문명의 형태를 불필요한 장식 쪽으로 치우치게 만드는 유위에 대한 반성인 것이다.

 

그 문()은 항상 부족(不足)한 것이다. 우리의 본질적 삶에 대해 항상 부족(不足)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충족이 아닌 것이다.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고, 오색(五色)ㆍ오음(五音)ㆍ오미(五味)의 광란(12)으로만 치우치게 만드는 불행한 문화(文化)인 것이다. 문화(文化)의 본질은 생명의 창조에 있는 것이지 죽음의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文化)가 생화(生化)가 되어야지 문식(文飾)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6. 소박하게 살며 사욕을 줄이라(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그러므로 돌아가게 하라! 소속(所屬)이 있게 하라! 우리는 문()에서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여기 노자가 항상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소()와 박()이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어법에서 소박(素朴)이라고 하는 말이 곧 노자의 이 용법에서 유래된 것이다. 소박은 심플리시티(Simplicity)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것은 원초주의(primitivism)이며, 미니말리즘(minimalism)이라 할 수 있다.

 

()’란 물감을 들이기 이전의 흰 천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그림도 그려질 수 있는 가능태요, 무규정자이다. 그것은 록크(John Locke: 1632~1704)가 말하는 백지(타부라 라사, tabula rasa)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노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인식론적인 규정이 아니라 의 우주론적 규정인 것이다.

 

()’도 마찬가지다. ()은 우리 성씨의 박()과 같은 글자이다. 그것은 통나무이다. ‘박산즉위기(樸散則爲器)’라는 말이 있다. 통나무를 우리가 쪼아[]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통나무는 무한한 그릇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태이다. 그것은 모든 형상(에이도스, eidos)이 가해지기 이전의 질료(휠레, hyle)이며, 그것은 무엇으로 실현되기 이전의 가능태(두나미스, dunamis)인 것이다. 따라서 통나무[]는 허()의 극대치이며 문식(文飾)이전의 질박한 원래모습이다.

 

현소포박(見素抱樸)과 짝을 이루는 말로서 소사과욕(少私寡欲.)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자는 문자 그대로의 무욕(無欲)’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욕(無欲)의 실제적 의미는 소과(少寡, 줄인다)의 역동적ㆍ항상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욕()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항상 사()를 줄이고 욕()을 적게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와 과()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즉 역동적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무욕에 대해 과욕을 말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욕이야말로 우리가 소박(素樸)한 삶을 살 수 있는 첩경이며, 욕망의 완전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은 과욕의 노력의 과정인 것이다.

 

여태까지 고증가들이 20 첫머리에 나오는 절학무우(絶學無憂)’19장 끝머리에, 현소포박(見素抱樸)ㆍ소사과욕(少私寡欲)과 함께 트리오로 붙는 것이라 생각했다. 易順鼎馬敍倫蔣錫昌李大防 등 모든 주석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학설을 찬동하였다. 그리고 백서(帛書)의 출현은 이 부분의 텍스트가 구독점없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증가들의 입장을 정당화시켜주는 듯했다. 그런데 곽점 죽간(竹簡)의 출현은 이러한 고증가들의 쓸데없는 장난을 또 다시 으로 만들어 버렸다. 갑본(甲本)에서 19장이 분명 소사과욕(少私寡欲)’에서 끝날 뿐 아니라, 을본(乙本) 세번째에 절학무우(絶學無憂)’유지여아(唯之與阿)’와 함께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본(王本)의 장구는 정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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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19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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