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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28장 - 통나무 같은 우두머리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28장 - 통나무 같은 우두머리

건방진방랑자 2021. 5. 1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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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知其雄, 守其雌,
지기웅, 수기자,
그 숫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키면
爲天下谿.
위천하계.
천하의 계곡이 된다.
爲天下谿,
위천하계,
천하의 계곡이 되면,
常德不離,
상덕불리,
항상스런 덕이 떠나질 아니하니,
復歸於嬰兒.
복귀어영아.
그리하면 다시 갓난아기로 되돌아 간다.
知其白, 守其黑,
지기백, 수기흑,
그 밝음을 알면서도 그 어둠을 지키면
爲天下式.
위천하식.
천하의 모범이 된다.
爲天下式,
위천하식,
천하의 모범이 되면,
常德不忒,
상덕불특,
항상스런 덕이 어긋나질 아니하니,
復歸於無極.
복귀어무극.
그리하면 다시 가없는 데로 되돌아 간다.
知其榮, 守其辱,
지기영, 수기욕,
그 영예를 알면서도 그 굴욕을 지키면
爲天下谷.
위천하곡.
천하의 골이 된다.
爲天下谷,
위천하곡,
천하의 골이 되면,
常德乃足,
상덕내족,
항상스런 덕이 이에 족하니,
復歸於樸.
복귀어박.
그리하면 다시 질박한 통나무로 되돌아간다.
樸散則爲器,
박산즉위기,
통나무에 끌질을 하면
온갖 그릇이 생겨난다.
聖人用之,
성인용지,
성인은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여
則爲官長.
즉위관장.
세속적 다스림의 우두머리 노릇을 한다.
故大制不割.
고대제불할.
그러므로
위대한 다스림은 자름이 없는 것이다.

 

 

1. 노자 사상을 화론의 기초로 삼은 석도

 

이 장은 노자의 여든 한 개의 장 중에서 매우 인용의 빈도가 높은 장에 속한다. 특히 박산즉위기(樸散則爲器)’라는 말은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명구로서 유명하다. 아마도 이 28장은 박산위기(樸散爲器)’ 장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위대한 화가 스타오(石濤, 1642~1707)가 이 박산위기라는 노자의 말을 빌어 그의 화론(畵論)의 대강(大綱)을 삼았기 때문에, 중국미술사분야에 있어서도 이 장의 논의는 빼놓을 수 없는 출건으로 꼽히고 있다. 중국문명은 세계적으로 회화의 높은 수준을 과시하는 문명이라 말할 수 있는데, 중국미술이론은 그 근원을 캐고 들어가보면 모두 노자사상에 연원하는 것이다.

 

이 장은 간본(簡本)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백서본(帛書本)에는 그대로 다 보존되어 있다. 백본(帛本)과 왕본(王本)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의미의 변화를 결정적으로 일으킬 만한 차이는 없다. 굳이 문제를 삼자면, 고증가들이 떠벌릴 만한 텍스트의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러한 문제는 간략히 취급해도 무방함으로, 일차적으로 왕본(王本)의 맥락에 충실하면서, 해설의 붓을 옮긴다.

 

 

2. 사랑할 때 미움을 생각하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나는 평생 노자와 더불어 살면서 노자에게 배운 가장 큰 교훈을 꼽으라면, ‘삶의 양면성(The Compatibility of Dualities inherent in Life)’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삶의 양면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삶의 양면성이란 삶의 이중성(Janusian Structure of Life)’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삶의 이중성? 좀 기분 나쁘게 들린다. ‘이중인격과 같은 냄새가 나질 않는가? 내가 말하는 삶의 이중성이란 결코 지킬 앤 하이드와 같은 인격분열이나 음흉한 위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노자적 삶에는 이중성이 숨어있다. 그래서 노자적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좀 음흉해 보일 수도 있고, 뭔가 어둠침침하게 보이는 구석이 있을 수 있고, 뭔가 심오한 듯해서 그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대체로 노자적 삶의 태도가 강한 중국인들은 우리 한국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음흉하고 밝지가 않다. 좀 후리후투(胡哩胡塗) 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노자적인 사람은 애매모호하거나 후리후투할 수가 없다. 노가적인 사람들이 가진 양면성이나 이중성이란, 일면을 계산하여 타면을 악용하거나 일면에 집착하여 타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면을 동시에 수용함으로써 이중적인 것처럼 보이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인간의 모든 상대적 가치에 대한 전관(全觀, Total View)이다.

 

내가 산다고 할 때에 오직 산다는 것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 산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나의 삶이 곧 죽음이라는 생각을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삶 속에는 이미 죽음이 포섭되어 있다고 하는 그 이중성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는 모든 순간에 나는 죽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죽음도 삶의 한 고리로서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한 여인을 사랑할 때, 오직 사랑만을 생각하고, 사랑만에 집착하고,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그 여인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 사랑이 하시(何時)고 증오로 바뀔 수 있으며, 그 사랑이 그 사랑으로 인해 많은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다른 가능성의 측면을 포섭할 때만이 그 사랑은 지속될 수가 있고, 또 그 사랑은 여유있는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랑만에 집착하면 사랑의 작은 좌절도 배신이나 미움이나 증오로 확대해석될 수가 있다. 사랑만에 집착하면 사랑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허상들에 의하여 사랑 그 자체의 본질이 파멸될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느낌 자체가 이미 허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깊은 의미에서 사실 이중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죽음을 생각해야 하고, 사랑할 때 미움을 생각해야 하고, 승리의 순간에 패배를 생각해야 하고, 성교의 올가즘의 환희 속에서도 불쾌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이중성의 허구가 아니라, 삶의 양면성의 직관(直觀)이요. 전관(全觀)이요, 동관(同觀)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큰 인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서구인들이 우리 동양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깊은 구석일 것이다. 수학적 합리성으로 이루다 해석이 되질 않기 때문이다.

 

여기 이 짧은 한 구절 속에 노자가 도()를 비유하는 중요한 메타포들이 다 들어있다. 암컷(여성), 계곡, 영아(갓난아기)! 아마 물[]만 첨가한다면 노자가 도()나 허()와 같은 추상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물상적 예는 이 장에 다 포섭될 것이다.

 

 

3. 숫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암컷이란 절대적 실체가 아니다. 암컷은 오로지 숫컷을 전제로 해서만 이루어지는 개념일 뿐이다. 암컷과 숫컷은 모든 존재의 양면이다. 숫컷이란 불뚝불뚝 스기를 좋아하고 우뚝우뚝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며(dominating),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암컷은 자기를 낮추며 겸손하게 감추기를 좋아하며, 양보할 줄 알며(condescending),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 양면적 가치의 일면도 결할 수 없는 것이다. 여자라 해서 양보만 하고 살 수 없는 것이요, 남자라 해서 지배만 하고 살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삶은 여성적 가치와 남성적 가치가 공존한다. 그런데 노자가 말하는 삶의 지혜란 바로 남성적 가치의 모든 가능성을 알고 터득할 수 있으며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남성적 가치에 머물지 않고 여성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기웅 수기자(知其雄, 守其雌)’라는 말의 참뜻이다.

 

다시 말해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양보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높이 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낮게 사는 것이다. 강할 수 있는 사람이 부드럽게 사는 것이다. 우리 속언에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모두 이러한 심오한 노자사상의 속화된 표현들인 것이다. 강할 줄 알면서도 약할 수 있는 것, 때릴 수 있으면서도 맞아 주는 것, 이러한 이중성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지혜의 양면성이다. 이것이 곧 동양인의 삶의 멋이다.

 

이란 참으로 번역되기 어려운 우리 동양인들의 고유의 삶의 맛을 표현한다. 따라서 노자의 약함이나 부드러움, 낮춤이나 양보함은, 하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연약함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연약함 속에는 무서운 강인함이 숨어 있다. 노자가 말하는 패배 속에는 영원한 승리가 숨어있다. 노자가 말하는 양보 속에는 영원한 지배의 배면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양사상의 위대함이요, 서양적 가치에만 젖은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동양인들의 내면적 가치. 아마도 기독교가치도 이러한 노자적 가치 속에서 승화되는 것만이 우리의 삶 속에서 그 깊은 뜻을 발양케 되는 유일한 통로라고 나는 믿는다.

 

숫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 어떻게 되는가? 노자는 말한다! 천하의 계곡이 된다. 계곡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암컷의 구체적 의미다. 계곡은 봉우리라는 숫컷에 대해 암컷이다.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그 자태를 천하에 뽐내지 아니하고, 자기를 낮추고 숨기고 양보하고 순종하지만, 모든 양적인 가치들이 결국 굴복하고 그리로 모여들며, 또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생성하고 촉촉하게 샘솟는 그 곳! 그 곳이 바로 곡신불사(谷神不死)의 계곡이 아니었던가?

 

위천하계 상덕불리(爲天下谿, 常德不離)’ 천하의 계곡이 되면 상덕(常德, 항상스런 덕)이 떠나질 아니한다. 여기 판본의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백본(帛本)에는 상덕불리(常德不離)’복귀어영아(復歸於嬰兒)’ 사이에 상덕불리(常德不離)’가 한번 더 나오고 있다. 이것은 곧 앞의 주절을 다시 조건절로서 반복하는 용법인데 물론 백본(帛本)의 이러한 형태가 고본(古本)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왕본(王本)위천하계(爲天下谿)’만 한번 반복하고, ‘상덕불리(常德不離)’는 반복하질 않고 그냥 결론으로 연결시켰다.

 

 

帛本乙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雞.
爲天下雞, 恆德不離.
恆德不離, 復歸於嬰兒.

 

 

 

4. 암컷과 영아를 칭송한 이유

 

아래 계속 나오는 병치된 문장들도 모두 이와 같이 반복이 되어 있으나, 왕본(王本)은 모두 세번째 줄의 조건절을 생략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번역할 때 그 자리에 그리하면이라는 말을 살짝 삽입함으로써 의 원문맥의 의미를 살렸다.

 

영아(嬰兒)’라는 표현은 20에 기출(旣出)하였다. 그것은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영아에게서 부드러움만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부드러움 속에 감추어진 강인함을 말하고 있다. 이 영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55에 다시 나온다. 뻐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도 어른들은 죽지만 갓난애기는 살 경우가 많다. 일요일 북한산에 가봐도 때로 어른들은 헉헉대는 산행을 어린 초등학교 아들들은 아무 부담 없이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영아란 곧 지기웅 수기자(知其雄, 守其雌)’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왕필은 말한다.

 

 

숫컷이란 앞섬을 상징하는 것이다. 암컷이란 뒤로 물러남을 상징하는 것이다. 천하의 선두가 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자기를 뒤로 물러 세운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선다고 말했던 것이다.

, 先之屬. , 後之屬也. 知爲天下之先()<>必後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也.

 

계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물을 구하지 않아도 모든 물이 저절로 몰려드는 것을 말한 것이다. 영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지혜를 구사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러한 지혜에 합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谿不求物, 而物自歸之. 嬰兒不用智, 而合自然之智.

 

 

역시 천하의 명주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5. 법제국가의 장점과 한계(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역시 마찬가지의 논리가 반복되고 있다. 미국은 법제국가(a legal society). 법제국가라 함은 사회적 노모스(nomos)를 법을 통해 형성해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민권의 성립과정도 오로지 법적 투쟁을 통하여 하나 하나 이룩해가는 사회다.

 

법제국가는 물론 장점이 많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명백하며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보편적인 기준을 기초로부터 쌓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법으로 다 해결될 수가 없다. 법이라는 것은 인간성(humanity)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다. 그리고 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법을 넘어서는 가치, 법을 법다웁게 만들고 있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미국에서 나오는 상당수의 영화가 배심원 판결을 위한 검사의 논고나 변호사의 변론, 그리고 판사의 판결 등을 다루고 있는 법정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에 내가 본 영화만 해도, 삼나무에 내리는 눈(Snow Falling on Cedars), 그린마일(The Green Mile), 허리케인 카터(The Hurricane)등이 모두 이러한 주제와 직ㆍ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법정에서 결백을 당당하게 주장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죄를 저지른 자일 수도 있고, 법정에서 죄를 지은 듯 수세에 몰리고 있는 사람들이 결백한 자일 상황은 얼마든지 있다. 여기 바로 노자가 말하는 지기백 수기흑(知其白, 守其黑)’의 주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란 무엇이고 흑()이란 무엇인가?

 

 

6. 누명을 끝없는 법적 투쟁으로 이겨낸 허리케인 카터

 

최근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덴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 주연의 허리케인 카터는 실존인물인 루빈 허리케인 카터(Rubin Hurricane Carter)라는 흑인 복서의 실제이야기(a true story)에 기초한 작품이다.

 

카터는 미국의 인종차별적 분위기 속에서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복역하게 된다. 어렸을 때 소년범죄로 기소되어 10년 형을 살고 커서는 세계챔피언이 될 수도 있는 출세의 가도를 걷고 있었으나, 우연히 살인죄의 누명을, 그것도 참으로 터무니없이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20년을 복역하고 결국에는 법적인 투쟁 끝에 무죄판결을 받게 되는 인간승리를 그린 작품이다. 참으로 한번 볼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카터가 흑인이라는 것, 그리고 백인과의 관계에서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것, 이런 사실은 지기백 수기흑(知其白, 守其黑)’이라는 노자의 표현과 실제 의미맥락은 무관한 것이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정확히 상통하는 것이다. ‘하양을 알고서 까망을 지킨다는 뜻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하양과 까망은 백인과 흑인을 의미할 수도 있고, 감옥 밖의 밝은 세상과 감옥 안의 어두운 세상을 의미할 수도 있고, 결백(Innocence)과 유죄(Guilt)를 의미할 수도 있다. ‘결백함을 알면서도 유죄를 지킨다함은 무엇일까?

 

 

7. 억울한 정죄의 길을 걸어간 죤 커피

 

최근 나에게 감동의 눈물을 안겨준 그린마일이라는 영화도 역시 동일한 주제를 웅변하고 있다. 그린마일역시 강간당해 죽은 두 소녀 아이들을 구하려고 애쓰던 거대한 흑인이 오히려 강간범으로 오인당해 억울하게 사형당하는 과정을 세심한 필치로 그려간, 우리시대의 위대한 대중소설가 스테판 킹(Stephen King)의 원작을 프랭크 다라본트(Frank Darabont)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이 거대한 흑인은 자신의 이름을 죤 커피(John Koffee)’라고 소개하면서 꼭 먹는 커피와 스펠이 하나만 틀리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매우 상징성이 있다. ‘Coffee’‘Koffee’는 물론 스펠이 하나만 틀린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스테판 킹은 바로 이 말을 통하여 죤 커피가 곧 각 단어의 첫 글자만을 따서 변형시키면 지저스 크라이스트’ (Jesus Christ)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킹이 그리고 있는 죤 커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21세기적 의미를 묻는 예수의 새로운 버전(version)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의 죄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왜 사형을 당한 것일까?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하고 십자가에 죽었는데, 과연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Redemption)하는 것이 과연 십자가형에 처해질 만큼의 죄목이 되는가?

 

죤 커피가 기소된 이유는 바로 죽은 아이들을 살리려는 그의 노력 때문이었다. 죽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에겐 실제로 병든 사람을 치유하고 죽어가는 생물을 살려낼 수 있는 기적적인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적 능력을 우리는 사실의 체계로 파악하면 그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은 범인에게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능력을 보지한다는 것은 곧 그러한 삶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상징체계(a symbolic system)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다. 이것은 분명히 존 커피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람들의 상식과 위배된다. 도무지 이해될 수 없는 인간의 꿈이요 실천이다. 예수나 죤 커피는 바로 이러한 당시의 사람들의 상식과 위배되는 선행(善行)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하는 억울한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나의 텔레비전 강의는 죽은 심령을 살려내고, 그동안 육신의 대지 속에 잠들어 있었던 많은 깨달음의 씨앗을 일깨웠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곧 이 시대의 상식과 위배되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나쁜 놈이 되고 죽일 놈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이 땅의 식자라 자처하는 우매한 사람들은 나를 죽이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내가 이 땅의 죽은 심령들을 부활시키고 있다하는 것이 도무지 그들의 상식체계 속에서는 용납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죤 커피는 이러한 정죄에 항거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결백을 알지마는 그 죄를 자기가 떠안고 죽는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죄인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태연히 그린마일을 걸어나가 전기의자의 형틀에 앉는다. 그런데 이러한 죤 커피의 그린마일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억울한 정죄의 길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간수들이 있다. 죤 커피의 사형을 집행하고 있는 그들이 곧 죤 커피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억울함의 이중주가 곧 인류의 죄의 대속이다.

 

 

8. 끊임없이 주어진 불행을 지켜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진실(Truth)이나 정의(Justice)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억울한 죽음에 의하여 반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죤 커피의 억울한 죽음이 있고, 그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자들에 의하여 그 억울함을 씻고 그 억울함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깊은 정의구조를 형성시켜온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다시금 그러한 십자가를 후세에 물리지 않으려는 노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유업(遺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또 다시 자기가 십자가를 멜 수도 있는 희생적이고도 헌신적인 가치관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죤 커피는 자신의 백()을 알고도 흑()을 지켰다.’ ()과 더불어 죽었다. 그리하여 영원한 백()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21세기적 의미라는 것이 스테판 킹의 역설이다.

 

루빈 카터도 마찬가지다. 카터는 비록 법적 투쟁을 통해 감옥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가 견지한 삶의 자세는 바로 감옥에서의 삶에 충실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증오가 나를 감옥에 가뒀지만 또한 사람들의 사랑이 나를 자유케 하리라! 그가 그의 결백만을 생각하고 감옥생활의 억울함만을 고민했다면 그는 단 하루의 삶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글을 배웠고 신체를 단련했고 저술을 했다. 그는 그를 면회 온 흑인 소년에게 말한다. “글을 배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말을 문자로 옮긴다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영혼의 비상이다. 글을 쓰는 순간 나는 감옥의 벽을 투시하여 드넓은 푸른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루빈 카터는 결국 자기와의 투쟁 속에서 승리한 것이다. 종신형이라는 터무니없는 죽음의 전제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산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노자가 말하는 지기백 수기흑(知其自, 守其黑)’의 의미를? 우리 인생에는 밝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어둠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터무니없는 억울한 상황이 계속 닥친다. 노자는 말한다. ‘밝음을 알되 그 어둠을 지키라!’

 

 

9. 불행을 지킬 때 천하의 모범이 된다

 

어둠을 지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천하(天下)의 모범이 된다. ‘위천하식(爲天下式)! 왕필은 식 모칙야(, 模則也)’라고 주를 달았다. ()이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준칙[]이란 뜻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천하(天下)의 식()이 된 것이다. 의로움의 기준[模則]이 된 것이다. 그 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한 것이다.

 

爲天下式, 常德不忒. 천하의 모범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특()하다. 왕필은 특 차야(, 差也)’라고 주를 달았다. 어긋난다는 뜻이다. 항상스런 덕이 어긋남이 없다. 항상스런 덕이 어긋남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復歸於無極. 무극(無極)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 무극(無極)에 대해 왕필은 불가궁야(不可窮也)라고 주석을 달았다. 궁진(窮盡)함이 없는 것, 즉 그 제한성(limitation)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뮤극(無極)은 곧 극()이 없음이다. 그것은 곧 혼성(混成)이요, 곧 자연(自然)의 개방이다. 그것은 인천(人天), 지대(地大), 천대(天大), 도대(道大)가 놓이는 극()이 없는 역()이다.

 

송명(宋明) 유학 즉 신유학이라 우리가 흔히 부르는 사조의 선하(先河)를 이루는 중국철학사의 기념비적인 문헌인 주렴계(周廉溪, 1017~1073)태극도설(太極圖說)의 첫문장이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하는 매우 암시적(cryptic)인 구절로 시작되고 있는데, 그 첫말인 무극(無極)’이라는 단어는 바로 노자28장에 출전을 둔 것이다. ‘지기백 수기흑(知其白, 守其黑)’하여 천하(天下)의 식()이 되고, 천하(天下)의 식()이 되어 상덕(常德)이 불특(不忒)하고, 상덕(常德)이 불특(不忒)하면 곧 무극(無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과 흑()의 분별이 없는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십자가의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고 그 상징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수를 신격화하고 절대화하고 실체화하고 역사화하고 믿음의 대상화 해버렸다.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라는 상징에 있는 것이지, 예수라는 역사적 실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하늘나라로 승천해야할 것이 아니라, 구극적으로 땅도 하늘도 사라진 무극(無極)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復歸]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는 진정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0. 통나무로 되돌아가게 된다(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지기영 수기욕(知其榮, 守其辱)’지기백 수기흑(知其白, 守其黑)’과 그 의미가 대차가 없다. 영예로운 자리를 알면서도 굴욕의 자리를 지키고, 영화로운 자리를 알면서도 모욕의 자리를 지킨다. 그럼으로써 천하(天下)의 곡(, )이 된다. 여기 곡()은 계(谿)와 별 차이가 없다. 천하(天上)의 곡()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이에 충만하게 된다[常德乃足]. 항상스런 덕이 충족하게 되면 통나무로 되돌아가게 된다[復歸於樸].

 

통나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 보존되어 있는 가능성의 상태를 말한다. 통나무란 인위적인 끌질이 가해지기 이전의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상태이다. 통나무는 나무로 만드는 모든 그릇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지한 사물의 본래의 모습이다. ()은 곧 무극(無極)이며 영아(嬰兒). 왕필은 말한다.

 

 

이상의 세 비유는 항상 그 궁극으로 되돌아감을 말한 것이다. 되돌아가야만 비로소 그 항상스런 덕이 있는 그 자리에서 온전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아랫 장에서 돌아가는 것이 곧 도의 움직임이다라고 말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공이라는 것은 따먹을 것이 못 된다. 항상 그 어미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此三者, 言常反終, 後乃德全其所處也. 下章云, 反者道之動也. 功不可取, 常處其母也.

 

 

결국 왕필은 이 장의 3개의 병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복귀어(復歸於)’라는 돌아감(Returning)의 뜻을 축으로 삼고 있음이 드러난다. ()과 자(), ()과 흑(), ()과 욕(), 이것은 궁극적으로 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영아(嬰兒), 무극(無極), ()의 현상적 표현일 뿐이다.

 

 

11. 통나무가 이데아를 따를 때 그릇이 된다(樸散則爲器, 聖人用之則爲官長)

 

(, 통나무)이 흩어져[] 그릇[]이 된다는 것은 노자의 우주론을 아주 명료하게 나타내주는 명언이다. ()은 잠재태요 가능태요 원초적인 그 무엇이다. ()는 그것의 실현태요 현실태요 제약된 그 무엇이다. 즉 박()이라는 자연(自然), 혼성(混成)에 제약이 가해지면[] ()라는 현실적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은 무명(無名)이요 무위(無爲). ()는 유명(有名)이요 유위(有爲).

 

 


()


()

 

 

()은 가능태(potentiality), 뒤나미스(dynamis, 활력). 질료(hylē)의 세계다. 그리고 여기에 끌질이 가해지면, 제한이 가해지면 그 박()은 기()라는 현실태(actuality) 즉 에네르게이아(energeia, 언어의 동적인 활동을 뜻하는 훔볼트 언어 철학의 개념)로 바뀐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박()은 무차별의 공()의 세계며, ()는 차별의 윤회세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박()과 기()의 관계를 사작인설(四作因說)’로 발전시켰고 이것은 기독교적 세계관, 특히 중세 카톨릭 신학을 집대성(集大成)한 토미즘의 사유의 틀이 되었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이미 그의 명저 티마이오스(Timaios)에서 이 박()과 기()의 관계를 데미우르고스(dēmiourgos)의 우주 창조론의 틀을 빌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데미우르고스(dēmiourgos)란 직인(artisan)이요, 장인(craftsman)이요, ‘만드는 이(poiētēs: maker). 그는 박()을 가지고 기()를 만드는 목수다. 그는 모든 가치의 구현자요, 우주의 창조자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말하는 우주의 창조는 제작이며 헤브라이즘이나 요한복음적 세계관이 말하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니다. 즉 목수의 제작에는 반드시 통나무라는 질료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생성되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인 없이는 생성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匠人, :dēmiourgos)’이건 간에, 그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며, 이런 걸 본(paradeigma)으로 삼고서, 자기가 만드는 것이 그 형태(모습: idea)와 성능(dynamis)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이렇게 완성되어야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됩니다.

-티마이오스, 28a, 박종현 ㆍ김영균 공동 역주

 

 

그러나 데미우르고스의 제작에는 박() 이외에 반드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생성 변화와 무관한 어떤 (paradeigma)’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이데아(idea)라고 불렀다. 즉 박()에 데미우르고스의 이데아(형상)가 가해졌을 때 그것은 기()로 되는 것이다. 그 기()의 세계가 곧 코스모스(cosmos)라는 것이다.

 

 


(원질)
데미우르고스의 이데아
(코스모스)

 

 

 

12. 통나무가 흩어지면 그릇이 된다

 

그런데 동양인의 세계관을 대변해주는 예기(禮記)악기(樂記)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다.

 

 

무엇을 짓는 자(데미우르고스)를 일컬어 성인이라 한다. 무엇을 기술하는 것을 일컬어 밝음이라 한다. 밝음과 성인, 이것은 기술함과 지음을 일컫는 것이다.

作者之謂聖, 述者之謂明. 明聖者, 述作之謂也.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인의 작술(作述)의 대상은 곧 ()’이라는 것이다. ()밝음이다. 그것은 어둠과 대비되는 것이다. 즉 을 어둠()이라고 한다면 기()는 밝음()이 되는 것이다. 즉 밝은 꿈의 세계야말로 성인의 제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제작자야말로 곧 성인(聖人)이다. 무엇을 처음으로 짓는 자, 그가 곧 성인(聖人)이다. 그렇다면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말하는 데미우르고스는 악기(樂記)의 저자가 말하는 성인(聖人)’의 다른 이름인가?

 

 

다시 한번 노자의 말을 되씹어 보자!

 

樸散則爲器!

 

여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아니 될 중요한 사실은 이 기()가 되는 과정에는 ()’이라는 동사가 있을 뿐, ‘데미우르고스와 데미우르고스의 에이도스,’ ‘이데아가 없다는 것이다. ()은 어떤 제작자의 의지에 의하여 기()로 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본(paradeigma)에 의하여 모사되는 것이 아니다. 노자의 박산즉위기(樸散則爲器)’에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외재적 존재가 없고, 또 데미우르고스라는 외재적 존재가 본을 뜨는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데아)’이 있질 아니하다. ()과 기()의 관계는 단지 ()’일 뿐이다. ()의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도법자연(道法自然)’일 뿐이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Platon: BC 427~347)의 데미우르고스적 세계관의 거대한 함정, 그의 권위 때문에 지나치고 마는 거대한 오류를 발견한다. 예기』 「악기가 지적하는 뜻은 데미우르고스적 제작의 대상은 천지자연(天地自然)일 수 없다는 것이다. 데미우르고스적 제작은 오직 성인(聖人)의 밝음[], 즉 문명의 세계(Civilization)에 국한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작자(作者)는 성()이다. 술자(述者)는 명()이다. 성인(聖人)이 작술(作述)하는 것은 곧 문명()이다. 데미우르고스가 제작한 코스모스는 우주일 수 없다. 그것은 문명의 제작에나 적용될 수 있는 논리의 아날로기를 비약시킨 오류에 불과한 것이다. 천지는 제작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Platon: BC 427~347)티마이오스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뮈토스(mythos), 꾸며낸 이야기 즉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천지는 작자(作者)에 의하여 제작될 수 없는 것이다. ()과 기()의 관계는 순환적인 스스로 그러함의 관계인 것이다.

 

요한복음의 로고스적 세계관의 황당함이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적 세계관에서는 보다 구체화되고 합리화되고 있는 느낌을 받지만, 이 양자가 모두 동일 문화권의 신화적 상상력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는 노자적 도법자연(道法自然)의 개방적 세계로 또다시 전상법(轉相法)’해야 하는 당위성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 문명의 제작의 논리를 천지의 제작의 논리로 비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논리의 비약이 결국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신화적 상상력을 결합시켜 기독교적 세계관을 지어낸 것이다.

 

 

13. 일획 속에 만획이 있다

 

석도(石濤)는 말한다.

 

 

태고에는 법이라는 게 없었다. 그리고 거대한 통나무, 즉 모든 가능성의 혼돈은 원래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허나 그것이 일단 흩어지면 법이라는 게 생겨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그 법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太古無法, 太朴不散, 太朴一散, 而法立矣. 法於何立?

 

그것은 한번 그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한번 그음이라고 하는 것은 뭇 존재의 뿌리요, 온갖 모습의 근본이다. 그 한번 그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작용을 신묘한 신의 세계 앞에서는 잘 드러내지만, 통속적 인간의 인식 앞에서는 그 작용을 감출 뿐이다.

立於一畫. 一畫者, 衆有之本, 萬象之根, 見用於神, 藏用於人.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그 한번 그음의 위대함을 잘 알아 차릴 수 없다. 그러므로 한번 그음의 법은 오로지 도를 체득한 주체인 나로부터만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번그음의 법을 세울 수 있는 자는 대저 법이 없음을 가지고 법이 있음을 창조하고, 법이 있음을 가지고 모든 다양한 법을 꿰뚫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而世人不知. 所以一畫之法, 乃自我立, 一畫之法者, 蓋以無法生有法, 以有法衆宗法也.

 

 

광막한 화선지에 펼쳐진 무법(無法)의 세계를 생각해보라! 아무것도 그어지지 않는 박()의 화선지를 생각해보라! 거기에 무슨 법()이 있겠는가? 그런데 거기 펼쳐지는 묵()의 세계를 상상해보라! 그 일 획 속에 만 획이 들어있다는 석도의 화론을 한번 되새겨 보라!

 

 

14. 통나무 같은 우두머리

 

여기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인용지 즉위관장(聖人用之, 則爲官長)’이라는 구절이다. 여기 성인(聖人)을 주어로 보고 용()을 동사로 보면, 그 용()의 목적인 지시대명사 ()’는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왕필은 재미있게도 그것을 박()으로 보지 않고 기()로 보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키에 왕필의 이와 같은 해석은 전후문맥을 잘못 파악한 오류로 간

주된다. 필은 말한다.

 

 

통나무란 그 질박한 원래의 참된 모습을 말한다. 그 참된 원래 모습이 흩어지게 되면 백 가지 행태가 생겨나고 온갖 특이한 종류가 생성된다. 그것을 그릇이라 표현한 것이다. 성인은 이렇게 그릇으로 분산되기 때문에 그 그릇들을 질서지우기 위하여 법제적 질서를 만들어 권위로운 직책들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선한 사람으로 스승을 삼고, 불선한 사람으로 바탕을 삼게 하여, 그 풍속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문명이 결국 하나의 질박한 질서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 眞也. 眞散則百行出, 殊類生, 若器也. 聖人因其分散, 故爲之立官長. 以善爲師, 不善爲資, 移風易俗, 復使歸於一也.

 

 

여기 제일 마지막의 부사귀어일야(復使歸於一也)’에서 어느 정도 박()에 대한 힌트가 있기는 하지만, 왕필의 전체주석은 박()보다는 기()에 그 중점이 있다. 즉 박산위기(樸散爲器)를 문명의 질서의 창조로 보고, 그 문명의 질서를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정치제도나 문물을 관장(官長)’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왕필처럼 해석하면 박산즉위기(樸散則爲器)’위관장(爲官長)’인제불할(人制不割)’이 일관된 축으로 해석되기가 힘들다. ‘성인용지(聖人用之)’()’는 기()보다는 박()으로 보아야 하고, ‘박산즉위기(樸散則爲器)’의 논리에서 관장(官長)은 박()의 무위적 가능태로서의 근원의 뜻으로 새겨야 마땅하다.

 

즉 성인(聖人)의 제작의 대상은 문명이요, 문명이란 곧 정치적 제도를 말하는 것이요, 성인은 그 정치적 제도를 관장하는 관장(官長, 우두머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장(官長)의 정치는 기()적인 정치가 아니라 박()적인 정치가 되어야 한다. 공자(孔子)논어(論語)』 「위정(爲政)에서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한 것은 군자(君子) 즉 세속적 질서의 관장(官長)노릇을 하는 자는 작은 일재일예(一才一藝)에 구애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즉 불기(不器)한 군자(君子)는 노자말로 바꾸면 곧 ()의 군자(君子)’, 즉 통나무의 관장(官長)이 되는 것이다.

 

 

15. 통나무 우두머리의 다스림은 가름과 자름이 없다(故大制不割)

 

로마의 치자들,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디바이드 앤 룰(Divide and rule! divide et impera)!’을 현명한 지고의 치술(治術)처럼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얄팍한 치술의 유치한 방편에 불과하다. 이 작은 제잠의 나라조차 경상도왕국과 전라도왕국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그것도 모자라 충청도왕국과 강원도왕국으로 나누고, 또 그것도 모자라 온갖 정적들을 중상모략으로 가르고 다스린다.

 

그러나 통나무의 관장(官長)이 다스리는 다스림은 대제불할(大制不割)이다. 통나무적인 큰 다스림은 가름, 자름이 없는 것이다[不割]. ‘()’란 본시 칼 도 변이 있듯이 그것 자체가 가름이요. 자름이요 데미우르고스(dēmiourgos)란의 끌질이다. 그러나 위대한 다스림은 가름이 없고 자름이 없는 것이다. 대제불할(大制不割)! 이것은 동양정치 철학의 일대 모토인 것이다. 왕필은 말한다.

 

 

위대한 다스림이란, 천하의 마음으로써 그 마음을 삼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가른다 함이 있을 수 있을손가!

大制者, 以天下之心爲心, 故無割也.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28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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