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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27장 - 지혜를 거부하는 지혜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27장 - 지혜를 거부하는 지혜

건방진방랑자 2021. 5. 1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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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善行無轍迹,
선행무철적,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善言無瑕讁,
선언무하적,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아니한다.
善數不用籌策,
선수불용주책,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善閉無關楗而不可開,
선폐무관건이불가개,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善結無繩約而不可解.
선결무승약이불가해.
잘 맺는 자는 끈으로 매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是以聖人常善救人,
시이성인상선구인,
그러하므로 성인은
늘 사람을 잘 구제하며
故無棄人.
고무기인.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常善救物,
상선구물,
그 사물을 잘 구제하며
故無棄物.
고무기물.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是謂襲明.
시위습명.
이것을 일컬어 밝음을 잇는다고 한다.
故善人者,
고선인자,
그러므로 좋은 사람은
不善人之師;
불선인지사;
좋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며,
不善人者,
불선인자,
좋지 못한 사람은
善人之資.
선인지자.
좋은 사람의 거울이다.
不貴其師,
불귀기사,
그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고
不愛其資,
불애기자,
그 거울을 아끼지 아니하면,
雖智大迷.
수지대미,
지혜롭다 할지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
是謂要妙.
시위요묘,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요체라 한다.

 

 

1. 언어란 느낌의 유발일 뿐이다(善行無轍迹, 善言無瑕讁)

 

노자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그 핵심되는 사상은 어떤 역사적 인물에 의하여 형성되었을 수 있지만 오늘날의 노자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작은 눈덩이가 굴러가듯 많은 사람들의 지혜의 경구나 잠언들의 전승이 융합되면서 오늘의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어떤 일관된 논리적 사색을 전달하려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시()요 노래요 지혜의 포효다. 그래서 그 파편과 파편의 틈새에는 무한한 논리의 비약들이 숨어있다. 그래서 노자는 글로서 읽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서 읽어야 한다. 노자는 마음과 마음, 통찰과 통찰의 몽따쥬(montage)라 할 수 있다.

 

이 장도 정확한 논리적 연결이 어색한 틈새가 많다. 이 장은 간본(簡本)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백본(帛本)에는 그 내용이 고스란히 실려있다. 그러나 백본(帛本)과 왕본(王本)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의미의 출입(出入)이 있는 것이다.

 

()’이란 도덕적 의미에서의 선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잘함(excellence)’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여기서는 이라는 부사로 쓰였다. ‘()’은 일차적으로 간다(to go)’의 뜻을 지니지만, 또 동시에 인간의 행위일반(to do)을 가리키고 있다. ‘선행(善行)’잘 감이요, ‘잘 함이다. 잘 가는 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정말 위대하게 행동하는 자들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취란 여기서 행위(行爲)의 부자연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의 생애는 물위를 가르는 뱃길과도 같다. 한 점의 조각배는 창창한 수면위에 뚜렷한 궤적을 남긴다. 그러나 수면은 곧 그 궤적을 지워버린다. 오간 곳이 없다. 여전히 망망한 대해만이 넘실거릴 뿐이다. 많은 자들이 나의 언어의 행적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곤 한다. 나는 그 행적을 이 역사에 남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것은 곧 잊혀지고 지워질 뿐이다. 그 망각에 나는 연연하지 않는다. 왕필은 말한다.

 

 

스스로 그러함을 따라 갈 뿐이다. 억지로 꾸미어 만들거나 내가 무엇을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물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다 갈 뿐이다. 그래서 자취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順自然而行, 不造不始, 故物得至, 而無轍迹也.

 

 

인간의 언어 또한 그렇다. 위대한 언어,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않는다. 트집잡힐 구석이 없다. 진정으로 위대한 언어는 논리적으로 타인에게 진위의 승부를 가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궁극적으로 느낌의 유발일 뿐이다. 그런데 그 느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위적으로 조작되는 대상이 아니다. 왕필은 말한다.

 

 

잘하는 말은 사물의 제성질을 따라간다. 구별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트집이 내 삶의 문깐을 헤집고 들어올 길이 없다.

順物之性, 不別不析, 故無瑕讁可得其門也.

 

 

분석철학의 한계는 바로 언어의 분석만을 통해 그 언어가 외연적으로 지시하는 대상 즉 실재의 세계의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 있었다. 언어는 근원적으로 본질이 없다. 그것은 정확한 정의의 대상이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쓰여지는 맥락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의미를 지닐 뿐이다. 중론(中論)에서 말하는 바대로 언어는 실재를 그려낼 수 없다. 그것은 매우 불완전한 약속체계일 뿐이다. 대상세계는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언어는 그 변하는 세계를 고착화시켜 표현할 뿐이다. 그리고 언어는 내 혀끝의 맛의 느낌 하나도 정확히 표현할 길이 없다. 언어는 느낌의 유발을 위한 하나의 방편적 설정일 뿐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위대한 언어는 언어의 궤적을 남기지 아니한다. 언어는 느낌을 유발시키고 곧 느낌의 대해(大海)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언어는 실재가 아니다.

 

 

2. 수학을 잘하는 사람은 수를 쓰지 않는다(善數不用籌策)

 

주책(籌策)’이란 주산즉 셈을 하는 기구를 말한다. 추상적으로 쓰일 때는 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말에 주책이 없다’ ‘주책맞다는 표현은 바로 그 사람의 언행에 어떤 합리적인 이 없다는 뜻이다. 주책맞은 사람들은 이 안 서기 때문에 그 행동을 예상키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주책없다느니 주책 바가지니 하는 말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셈을 잘하는 사람은 주책을 쓰지 않는다. 왕필은 말한다.

 

 

셈을 정말 잘하는 사람은 사물의 내재적인 질서를 따라간다. 그 외형적인 형태에 의존하지 않는다.

因物之數, 不假形也.

 

 

이 말은 무엇인가?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물리학의 천재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말한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게 된 것은 그가 물리학에 대해 너무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느 방면에 대한 무지가 그에게 독창적인 새로운 사고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위대한 과학자가 꼭 수학의 천재이기 때문에만, 반드시 수식의 치밀한 계산의 결과로만 물리학의 신기원을 이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학은 기만적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세계만을 추상해서 계산적으로 완벽하게 구성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픽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리학의 위대한 발견은 수리의 결과라기보다는 수리에 앞서는 전체에 대한 통찰이다. 그 통찰의 순간은 수학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영감일 수도 있다. 정말 셈을 잘하는 사람은 주판을 쓰지 않는다. 정말 수학을 잘 하는 사람은 수를 쓰지 않는다. 위대한 과학자의 영감은 인식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의문이요, 새로운 우주에 대한 통찰이다. 과학은 영감이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외국에 나가면 한결같이 수학의 신동으로 불리운다. 수학점수가 눈부시게 높다. 그런데 나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진정 수학계에 이름을 드날리는 자를 보지 못했다. 왜 그런가? 그들이 잘하는 수학은 셈본이요, 영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과학자가 배출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노자적인 통찰력을 우리나라 교육이 제공하고 있질 못하기 때문이다. 선수불용주책(善數不用籌策)! 두고두고 되씹어야 할 명언이다!

 

 

3. 끈으로 묶지 않았는데 풀리지 않는 매듭(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

 

관건(關楗)’백서본(帛書本)에는 관약(關籥)’으로 되어있다. 옛날에는 나무 대문에 달린 빗장도 나무빗장이었기 때문에 관건(關楗, 건이 나무목변)이라고 썼다. 그것이 쇠자물통으로 바뀌면 관건(關鍵, 건이 쇠금변)이 될 것이다. 백서본(帛書本)관약(關籥)’관건(關鍵)’과 통한다. ‘()’은 본시 악기와 같은 관통을 의미하는데 자물쇠의 어떤 부분을 형용하는 말일 것이다. ()은 약()과 통한다.

 

알렉산더대왕의 고디언 노트(Gordian Knot)’의 무용담도 이 노자의 한마디 앞에서는 무색해지고 만다. 여기에는 칼로 잘라버릴 복잡한 매듭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매듭은 끈을 쓰지 않는다.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고, 잘 맺는 자는 끈으로 매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나에게 닥치는 모든 환난에 대하여 나의 삶의 문을 꼭꼭 빗장을 질러 닫어 보아라! 과연 그것이 해결책이 되겠는가? 빗장이 없는데도 환난이 나의 삶의 문을 진입할 길이 없다. 문의 안과 밖이 근원적으로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안에 도둑질당할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매듭을 잘 맺어보라! 아무리 약속을 잘 맺고, 인생의 의형제를 잘 맺어보라! 과연 아니 깨질 날이 있으랴! 위대한 매듭은 끈으로 꽁꽁 묶는 매듭이 아니다. 매듭이 없이도 매듭지어질 수밖에 없는 그 삶의 어떤 다른 차원의 도덕성과 결집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아무리 회사에서 단결을 외치며 약속을 하고 선서를 한들, 그 매듭이 풀리지 않을 날이 있으랴! 한 뭉치로 뭉친 듯이 보이는 거대한 기업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흩어지고 마는 비극을 너무도 생생하게, 우리는 주변에서 목격하지 않았는가? 끈으로 묶지 않았는데도 풀리지 않는 매듭, 과연 그 매듭은 어떤 매듭일까? 왕필은 말한다.

 

 

사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따라갈 뿐, 무엇을 새로 만들거나 인위적으로 베풀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무빗장이나 밧줄매듭을 쓰지 않아도 열거나 풀거나 할 수가 없다. 선행ㆍ선언ㆍ선수ㆍ선폐ㆍ선결,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호의를 베풀거나 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사물의 제 품성에 맡길 뿐, 그 외형으로써 사물을 억압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因物自然, 不設不施, 故不用關楗繩約, 而不可開解也. 此五者, 皆言不造不施, 因物之性, 不以形制物也.

 

 

 

4. 선악의 기준(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여기 재미있게도 구인(救人)’ 인간의 구원(Salvation of Man)’이라는 주제가 등장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구원이란 곧 죄사함을 얻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죄의 몸이 사망하고, 예수와 더불어 다시 부활함으로써 의로움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로마인서6장 참조).

 

그러나 여기 노자가 말하는 인간의 구원이란 곧 앞서 말한 선행(善行)ㆍ선언(善言)ㆍ선수(善數)ㆍ선폐(善閉)ㆍ선결(善結)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순물지성(順物之性)하고 인물지수(因物之數)하며 사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따라가는 것이다. 즉 율법(Law)과 의로움(Righteousness), (Good)과 악(Evil), 사망(Death)과 생명(Life), 사람의 법(Law of Man)과 하나님의 법(Law of God)이라고 하는 이원적 대립을 근원적으로 해소시키는 것이다. 왕필은 말한다.

 

 

성인은 외형적인 이름이나 율법을 세워서 사물을 구속하는 법이 없고, 진보의 기준을 세워서 그 진보에 뒤쳐지는 사람들을 못났다고 버리는 법이 없다. 사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뿐이며 사물의 무엇을 자기가 리드한다고 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자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聖人不立形名以檢於物, 不造進向以殊棄不肖. 輔萬物之自然而不爲始, 故曰無棄人也.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들을 숭상치 않으면 백성이 다툴 일이 없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만들지 않으면 백성이 도적질할 까닭이 없고, 욕심낼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럽게 될 이유가 없다. 항상 백성들의 마음을 욕심없게 하고 의혹됨이 없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함이다.

不尙賢能, 則民不爭, 不貴難得之貨, 則民不爲盜, 不見可欲, 則民心不亂. 常使民心無欲無惑, 則無棄人矣.

 

 

우리가 선ㆍ악의 기준을 세워서 악을 내치고 선을 권하는 것은, 지나치게 선을 강조했기 때문일 수 있다. 생각해보라! 역사는 진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이삭을 줍고 평온히 쉴 뿐이다. 그렇게 사시를 반복해가면서 평온히 사는 사람들에게 진보의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의 잣대에 못 따라온다고 갑자기 미개인이 되고, 갑자기 후진국인이 되고, 갑자기 불선한 낙오자가 된다면 도대체 그게 뭔 날벼락인가?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선악의 기준이 다 이런 것이 아닐까? ‘부조진향이수기불초(不造進向以殊棄不肖)’라는 왕필의 언사는 현대 문명의 진보사관에 대한 통렬한 반어(反語)라 할 수 있다.

 

 

5. 죄와 나의 이분법

 

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탐심(covetousness)이다. 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되는 것이다. 율법이 없을 때는 죄는 죄로서 인식이 되질 않는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어야 도둑질이 도둑질로서 인식이 되고 그것이 죄로서 나에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율법은 나에게 죄를 일깨우는 도구적 선이다. 죄라는 것은 결국 나의 실존이율배반적 상황들이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인서7 : 14~17

We know that the law is spiritual; but I am carnal, sold under sin. I do not understand my own actions. For I do not do what I want, but I do the very thing I hate. Now if I do what I do not want, I agree that the law is good. So then it is no longer I that do it, but sin which dwells within me. (RSU)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들을 내가 행한다는 이 상황이 바로 나의 원죄다! 소식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식을 하고, 음주가 해를 끼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음주를 행하고, 음란한 짓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음란한 짓을 하고, 탐욕의 뇌물을 거래치 않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뇌물을 수수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스러운 상황이다. 이 죄를 드러내는 선()이 곧 율법이다. 율법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율법은 어디까지나 악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근원적으로 이 율법이 사망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내가 행한다면, 그 행함의 주체가 내가 아니요 죄라고 바울은 독백한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인서7 : 20

Now if I do what I do not want, it is no longer I that do it, but sin which dwells within me. (RSU)

 

 

그렇다면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그 주체는 죄요 내가 아니므로 그 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죄스러운 행동의 주체가 죄요 내가 아니라면, 죄스러운 행동의 죄값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죄로 갈 것이 아닌가? 여기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 갈등에 노자는 완벽한 쐐기를 박는다. (I)와 죄(Sin)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원화될 수가 없다. 죄가 곧 나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이원성과 일원성의 파라독스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로마인서7 : 24

Wretched man that I am ! Who will deliver me from this body of death? (RSU)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의 궁극적 의미는 죄인 나의 사망이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로마형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물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궁극적 의미는 바로 그 십자가가 나를 죽임으로써 나를 죄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하는 해방’ ‘자유해탈이다. 해탈이란 곧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남이다. 십자가는 열반(涅槃)이다. 열반이란 곧 영생으로의 부활이다. 열반이란 죽음이 아닌 새로운 생명인 것이다.

 

 

6. 인간의 구원만 외친 기독교문명, 사물의 구원까지 외친 노자철학

 

노자는 이러한 기독교 불교적인 패러다임을 수용하지 않는다. 노자의 도는 근원적으로 선과 악을, 사망과 생명을, 율법과 의로움을,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을 이원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자리에서만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버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도 바울에게는 인간의 욕망, 혹은 죄스러운 행위에 대한 매우 심각한 고민이 있다. 이원적으로 파악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탐욕의 현실에 대한 직시가 있다. 노자 역시 인간의 욕망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의식이 줄기차게 있다. 그러나 그 접근방식이 매우 다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예수의 십자가가 되었든, ‘()의 자연(自然)’이 되었든, 그 궁극적 과제가 과연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어떻게 구현되느냐는 데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더불어 죄의 나가 사망하고 생명의 나가 부활했다면 그 논리는 쉽게 수긍이 간다. 그러나 과연 나의 삶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가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느냐에 대한 통찰이나 방법은 사도 바울에 있어서도 언급이 없다. 단순한 믿음이라는 말장난으로 이루어지는 사태는 아닐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나 불교나 도가철학이나 유가철학을 불문하고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노자의 논리는 인간의 구원이라고 하는 좁은 논리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을 구원함으로써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구원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유대교 기독교의 소박하고도 편협한 생각의 굴레요, 서구문명의 한계다. 노자는 구인(救人)’을 반드시 구물(救物)’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반드시 사물의 구원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이치는 인간을 고립시키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다움고자 한다면, 물론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도 사물다움고자 하는 것이다. ()이 인()다웁고자 하는 것이 인성(人性)이요 인권(人權)이라면, ()이 물()다웁고자 하는 것이 물성(物性)이요 물권(物權)이다. 미국의 헌법은 인권(人權)을 말했을 지언정 물권(物權)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미국문명이 이 지구상에서 인권(人權)을 보호한다하면서 물권(物權)을 박탈하는 음흉한 제국주의의 가면을 쓰게 되는 소이다.

 

 

7. 백서본과 왕필본의 차이

 

여기 왕본(王本)백본(帛本) 사이에 미묘한 텍스트의 문제가 있다. 왕본(王本)은 구인(救人)과 구물(救物)의 논리를 완벽한 변문(騈文)으로 병치시키고 있다.

 

 

王本 常善救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그러나 백서본(帛書本)은 물()의 문제를 이와같이 명료하고 깔끔하게 병치시키지는 않는다.

 

 

帛書乙本 恆善人救人, 而无棄人, 物无棄財,

 

물론 시이성인(是以聖人)’이라는 도입부와 주어는 동일하다. ‘()’백서(帛書)에는 거의 일관되게 ()’으로 되어 있다. ‘()’ 대신 ()’라는 접속사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상선구물 고물기물(常善救物, 故無棄物)’ 대신에 물무기재(物无棄財)’라는, 대구를 형성하지 않는 짧막한 한마디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훈고학자들이 떠벌이듯이 그리 크게 의미의 변화가 있을 건덕지는 별로 없다. ‘물무기재(物无棄財)’에서 물()은 기()라는 동사의 직접적인 주어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이 문장의 전체 주어는 어디까지나 성인(聖人)’이다. 성인의 행위를 기인(棄人)과 무기재(无棄財)로 병치시킨 것이다. 무기재(无棄財)의 주어는 성인이다. 그러니까 물무기재(物无棄財)’는 이와같이 번역된다.

 

성인은 물()에 있어서도 그 물()의 재료됨을 버리지 않는다.

 

여기서 ()’()’와 통한다. 한 사물은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따라 제각기 재료로서의 쓰임이 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책상은 글을 쓸 때는 책상으로서의 재()가 있지만, 드러누울 때는 침대로서의 재()가 있고, 추위 불쏘시개로 쓸 때에는 장작으로서 재()가 있다. 이 재()됨은 어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것이다. 끝까지 활용(活用)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에너지보존의 법칙의 궁극적 의미일 것이다.

 

백서(帛書) 텍스트의 모습이 보다 고본(古本)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아마도 왕본(王本)의 원래 모습도 백본(帛本)에 가까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왕필의 주석에 구물(救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후대에 물무기재(物无棄財)’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이 구문을 앞의 것과 맞추어 병문으로 늘여 놓았을 것이다.

 

 

帛書乙本 王本
物无棄財 常善救物, 故無棄物.

 

 

 

8.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끊임없이 밝음을 이어가리라는 낙관론

 

그런데 사실 이 단락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은 바로 최후의 시위습명(是謂襲明)’이라는 한 마디일 것이다. 습명(襲明)이란 과연 무엇인가?

 

습명(襲明)이란 밝음[]을 잇는다[]는 뜻이다. ()은 계승한다. 순승(順承)한다는 뜻이다. 밝음은 물론 어둠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밝음과 어둠은 이원론적으로 분할되는 사태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16에서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이라는 노자의 논의를 분석한 바 있다. 근원의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이라 하고, 그 상()을 아는 것을 명()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밝음그 자체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밝음은 어둠과 끊임없이 순환적인 관계에 놓여있지만 성인이 해야할 일은 곧 그 밝음을 이어가는 것이다. 성인은 문명 속에 있다. 문명(文明)은 밝음[]의 소산이다. 다시 말해서 구인(救人), 구물(救物)이란 곧 인물(人物)의 밝은 측면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을 버리고, ()을 버림이 없이 끊임없이 그 명()의 측면을 이어가는 것이다. ()과 물()에는 끊임없이 어둠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성인이 이어가야 할 것은 인간과 사물의 밝은 측면이다. 이런 맥락에서 도법자연(道法自然)’에는 끊임없는 낙관주의(perennial optimism)가 있다. 우주는 내일 멸망할지도 모른다. 미래는 분명 미지의 모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불신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끊임없이 밝음을 이어가리라는 낙관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문명을 건설할 수가 없다. 우주가 내일 멸망한다고 해서 오늘 종말론을 세우는 것은 인간의 가장 치졸한 업보에 속하는 것이다. 구인(救人), 구물(救物)은 곧 습명(襲明)이다.

 

 

9.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 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바탕[]이 된다. 이것은 선행(善行), 선언(善言), 선수(善數), 선폐(善閉), 선결(善結)로부터 습명(襲明)을 거쳐 내려오는 구인(救人).구물(救物)의 논리를 이해하면 쉽게 이해가 갈 수 있다.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은 가치론적으로 실체화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므로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은 서로 관계에 놓인다는 것이다.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의 이원적 구분 속에서 인간을 버리지 않는 것[無棄人]이 곧 습명(襲明)이라는 것이다.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의 밝은 측면을 함께 계승해나 가야 바른 문명의 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서양의 이원론을 뛰어넘는 위대한 노자의 논리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 관해 백서(帛書)는 매우 다른 판본을 제시하고 있다.

 

 

王本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帛本 乙 故善人, 善人之師; 不善人, 善人之資也.

 

 

왕본(王本)은 분명하게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을 대비적으로 설정하고 호상으로 관계지웠지만, 백서(帛書) ()ㆍ을본(乙本)은 모두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을 선인(善人) 하나의 주제의 사()와 자()로 보고 있다. “선인(善人) 또한 선인(善人)의 스승이요, 불선인(不善人) 또한 선인(善人)의 바탕이다.”

 

외면적으로 보면 이 두 판본은 날카롭게 대립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不善人, 善人之資라고 하는 이 한마디가 시인되는 한에 있어서는, 왕본(王本)의 의미가 더 백본(帛本)의 원래적 의미를 명료하게 발현시킨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텍스트상으로 보면 백본(帛本)이 보다 고본(古本)의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흔히 일상담론에서 착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식의 느낌을 강화한 것이다. 즉 주체를 선인(善人)으로만 설정한 것이다. 선인(善人) 또한 선인(善人)의 스승이요, 불선인(不善人) 또한 선인(善人)을 선인(善人)다웁게 만드는 바탕이요, 거울이다. 선인(善人) 속에는 이미 불선인(不善人)의 요소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로마인서7 : 21

So I find it to be a law that when I want to do right, evil lies close at hand. (RSV)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은 항상 나의 실존 속에 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조선의 유생들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다.

 

이 구절에 관한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백본(帛本)은 텍스트의 원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왕본(王本) 또한 그 텍스트의 내면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의미론적으로 명료하게 한 것으로 선본(善本)이라 말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10. 지혜를 거부하는 지혜야말로 우주와 삶을 통찰하는 방법이다(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是謂要妙)

 

요묘(要妙)’가 갑()ㆍ을()에 모두 요묘(要妙)’로 되어 있다. 의미상의 대차가 없다. ()ㆍ불선(不善)에 대한 분별심을 일으켜 기인(棄人)ㆍ기물(棄物)하게 되면 비록 지혜롭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그 지혜는 참 지혜가 될 수 없다. 거대한 초미의 미궁으로 빠져들어갈 뿐이다. 왕필은 말한다.

 

 

비록 그 지혜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지혜롭다고 판단하며, 사물의 스스로 그러한 이치에 맡기지를 못하니, 도에 있어서 크게 잃어버림이 있게 된다. 그래서 비록 지혜롭다 할지라도 크게 미혹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雖有其智, 自任其智. 不因物, 於其道必失, 故曰雖智大迷.

 

 

바로 이 지혜를 거부하는 지혜를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우주와 삶을 통찰하는 현묘한 요체[妙要], 요체의 현묘함[要妙]이다.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27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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