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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29장 - 천하를 얻으려 발버둥치는 이들에게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29장 - 천하를 얻으려 발버둥치는 이들에게

건방진방랑자 2021. 5. 1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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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將欲取天下而爲之,
장욕취천하이위지,
천하를 가질려고
발버둥치는 자를 보면
吾見其不得已.
오견기부득이.
나는 그 얻지 못함을 볼 뿐이다.
天下神器,
천하신기,
천하란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不可爲也:
불가위야:
도무지 거기다 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爲者敗之,
위자패지,
하는 자는 패할 것이요,
執者失之.
집자실지.
잡는 자는 놓칠 것이다.
故物或行或隨,
고물혹행혹수,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는
앞서 가는 것이 있으면
뒤따라가는 것이 있고,
或歔或吹,
혹허혹취,
들여 마시는 것이 있으면
내 뿜는 것이 있고,
或强或羸,
혹강혹리,
강한 것이 있으면
여린 것이 있고,
或挫或隳.
혹좌혹휴.
솟아나는 것이 있으면
무너지는 것이 있다.
是以聖人去甚,
시이성인거심,
그러하므로 성인은
극심한 것을 버리고
去奢, 去泰.
거사, 거태.
사치한 것을 버리고
과분한 것을 버린다.

 

 

1. 인생의 무상함과 인간세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 장

 

인생을 살다 보면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되씹히는 구절이 있다. 어릴 적에 고전을 암송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유희다. 뜻 모르고, 생각없이 암송하는 것을 소독(素讀)’이라 하는데, 이 소독이야말로 그 인간의 일생을 풍부하게 하는 거름이 될 수 있다. 소독이 되어 있어야만, 그것이 문득 문득 삶의 시공간에서 의미체로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와 인생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과도 같이, 한 생명과 한 생명의 만남과 헤어짐과 같다. 문자도 생명이요 인생도 생명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적절함의 예술이다. 한 문자가 그때, 바로 그때, 그 공간의 나의 체험 속에 있을 때만이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싸늘한 시체와도 같은 무의미한 형상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나의 체험의 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형태로 기억되어 있다는 것이 곧 그 문자의 생명이다.

 

이 장이 없었더라면, 이 장과 나의 삶의 해후가 없었더라면 나의 인생은 정말 삭막했을 것이다. 나는 이 장을 인간적으로 깊게 깊게 사랑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나이가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 장의 문자가 나의 가슴에 뼈저리게 와닿는 것이다.

 

나는 이 장의 말씀에서 로고스의 빛보다도 더 찬란한 생명력을 얻었다. 그리고 무한한 위로를 얻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여기 이 한마디의 명구가 가슴을 때리고 또 때린다. 깨달음을 주고 또 주는 것이다. 나를 철들게 만든 이 한마디의 명언, 그리고 인생의 무상함과 인간세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 이 명언, 그리고 인간역사의 모든 모순역설을 갈파하게 해준 이 명언, 이 명언은 바로 천하신기 불가위야(天下神器, 不可爲也).’라는 이 한마디였던 것이다. 이장은 천하신기(天下神器)) 장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이 장은 간본(簡本)에 없다. 그러나 백본(帛本)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한두 구절을 빼놓고 왕본(王本)과 작은 대차가 없다.

 

 

2. 천하를 얻으려 발버둥치는 이들에게(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나는 노숙하거나 원숙한 언사로써 젊음의 패기나, 용기있는 자들의 정의로운 행동이나, 인간세의 개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의 푸릇푸릇한 행위를 조롱하거나 좌절시키거나 뒷짐 지고 앉아서 관조할 생각은 없다. 비양거리는 것처럼 더러운 것은 없다. 도통한 체하는 것처럼 비노자적인 것은 없다. 세상을 달관한 체하는 것처럼 비열한 것은 없다. 세상만사와 무관한 체하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다. 그것은 원숙함이 아니라 무기력함이요, 그것은 달관이 아니라 체념이요, 그것은 도통(道通)이 아니라 도색(道塞)이다.

 

청운의 꿈! 저 푸른 하늘의 구름과도 같은 꿈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상을 향한 비상이요, 인간의 순수한 정열과 생명력의 발출이다. 그런데 이러한 푸른 꿈의 대부분이 항상 이 세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將欲取天下)에서 출발한다는 데 인간의 비극이 존()한다고 노자는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무장(武將)은 전쟁을 일으켜 인간세의 패자(覇者)가 되려 하고, 정치가는 유세(遊說)를 일삼아 일국의 우두머리가 되려 하고, 부호(富豪)는 금권(金權)으로 인간의 허약함을 지배하려 하고, 문필가는 붓을 휘둘러 인간의 정신을 복속시키고, 언론가는 매일 매일 자기의 붓끝에서 세상이 춤춘다고 생각한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출세의 꿈을 꾸며, 벤쳐(venture)를 획책하며, 칸막이 책상에 엎드려 열심히 책을 읽는 모든 청운의 젊은이들이 바로 이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 꾸벅꾸벅 밀려닥치는 잠도 물리치고 그 곤요로운 시간들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출세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취천하(取天下)! ‘천하(天下)’인간세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 ()이란 별다른 뜻이 아니라 인간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아마도 이 세상에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산다고 하는 데는 이견(異見)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왜 되는가? 위대한 철인은 왜 되는가? 거대 다국적기업의 회장은 왜 되는가? 은빛 금빛 찬란한 상패를 휘날리는 챔피온은 게 되는가? 은막이나 가요의 여왕은 왜 되는가? 이 모두의 동이 곧 이 세상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기 위함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왜 영향력이 있고자 하는가?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천하를 취할 수 있다. 즉 천하를 마음 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묻는다. 천하를 취()해서 무엇하겠다는 것인가?

 

장욕취천하이위지(將欲取天下而爲之)’에서 장욕(將欲)’‘~하려하여의 뜻이다. 여기 위지(爲之)’는 유위적 행위, 인위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발버둥친다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은 인위적 행위를 열심히 한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이 천하를 취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런데 노자는 뭐라 말했는가? 오견부득이(吾見不得已).

 

여기 부득이(不得已)’는 한 관용구로 붙여 쓰일 때는 우리말에 그 뜻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부득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여기의 부득이(不得已)’부득(不得)’()’는 분리시켜 해석해야 한다. ‘()’이이(而已)’ 뿐이다의 뜻이다.

 

나는 그 얻지 못함을 볼 뿐이다.

 

천하를 얻기 위해 힘쓰는, 발버둥치는 모든 사람을 향해 노자는 일갈하는 것이다. 천하를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여! 나는 그대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빤히 알고 있네. 나는 천하를 얻는다 함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천하를 얻으려고 발버둥친 모든 자들이 천하를 얻지 못함을 볼 뿐이네! 오호(嗚呼)!

 

 

3. 천하는 신기(神器)이기에 얻을 수 없다(天下神器, 不可爲也)

 

천하는 왜 얻을 수 없는가? 천하는 왜 취할 수 없는가? 대통령과 같은 최상의 권력자가 되면, 대언론사의 회장과 같은 막강한 권세인이 되면, 다국적기업 재벌의 오너와 같은 천하무적의 재력가가 되면 분명, 한 파리 새끼와도 같은 서민들에 비한다면 분명, 천하를 움직이고 천하를 만들어 가고 천하를 쥐흔들고 있지 아니한가? 노자는 말한다. 나는 그 얻지 못함을 볼 뿐이다. 왜 그런가? 천하(天下)는 신기(神器)이기 때문이다.

 

天下神器!

 

여기 문장의 구조는 비(be)동사 구문이다. 천하(天下)와 신기(神器)는 동격이다. 그런데 정확히 천하(天下)와 대응하는 단어, 즉 주격보어는 ()’ 한 글자이다. 그리고 신()은 기()라는 주격보어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는 앞장에서 말한 박산위기(樸散爲器)’의 기(). 그것은 악기(樂記)에서 말한 바 성인의 ()’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명()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하는 문명(文明, Civilization)은 분명 인간이 주체적으로 하여(만들어) 온 것이다. 문명(文明)의 주체는 분명 인간이요, 그것은 인간의 작()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천하(天下)가 기()라면, 그것은 분명 성인의 작위(作爲)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천하(天下)는 위()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노자는 불가위야(不可爲也)’라고 말했는가?

 

이러한 파라독스를 해결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힌트가 바로 이 ()’이라는 글자에서 주어진다. 천하(天下)는 분명 기()이다. 그렇다면 기()는 분명 위()의 대상이다. 만들어지지 않는 그릇이 과연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왜 그 기()가 불가위(不可爲)란 말인가? 그것은 그 기()가 보통 기()가 아니요, 신기(神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냥 기()가 아니라 신()한 기()이기 때문에 위()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기()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작위(作爲)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란 무엇인가?

 

 

4. 호랑이와 산신령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칠성각이나 산신전에 가면 반드시 누런 꼬부랑 지팽이를 짚고 있는 산신령 할아버지가 계시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반드시 호랑이를 타고 있다. 반드시 호랑이 옆에 으젓하게 앉아 있다. 왜 그런가? 산신령 할아버지와 호랑이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사돈의 팔촌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 그 이상의 관계가 있다!

 

육이오 전란 이후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우리나라 산들은 모두 벌거숭이 누런 산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 주변에 모두 뻘건 황토흙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산들이었다. 더구나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장작으로 온방을 했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산 꼭대기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 산을 보고 우리는 신령스럽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눈으로 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시각에 노출되지 않는 부분이 없다.

 

그런데 그 산에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하고 헤아릴 수 없는 아람드리 적송들이 빽빽이 들어차게 되면 우리는 그 산을 신령스럽다고 말한다. 우리 시각에 그 산의 모든 것이 노출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살아있는 나무 일만그루의 집합체는 살아있는 나무 한그루의 성질의 일만개적 확대로 해석될 수가 없다. 나무라는 성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수 없는 다른 성질이 발현(emergence)하게 된다. 안개가 끼고 계곡에 물이 흐르고 온갖 생물체가 서식하며 기상조건에까지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는 여기 전체는 부분의 집합이 아니라고 하는, 수리적(數理的) 합리성을 거부하는 어떤 성질의 발현에 대하여 우리는 보통 신령스럽다라고 하는 형용사를 붙이게 되는 상황을 발견한다.

 

호랑이 한 마리가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멧돼지 백 마리 이상은 살아야 할 것이고, 멧돼지가 백 마리 살기 위해서는 수만 마리의 다람쥐가 있어야 할 것이고, 수만 마리의 다람쥐가 있기 위해서는 수백ㆍ수천만개의 도토리가 있어야 할 것이고, 수백ㆍ수천 만개의 도토리가 있기 위해서는 수십만 그루의 도토리 나무가 있는 숲(Forest)이 형성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즉 호랑이 한 마리가 살기 위한 에코시스템의 범주는 반드시 신령스러운, ()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호랑이는 곧 산의 신령스러움의 물상적(物象的)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호랑이가 곧 산의 신령스러움이요, 산의 신령스러움의 의인화된 인격체가 곧 산신령 할아버지인 것을 발견한다. 호랑이는 곧 산신령인 것이다.

 

호랑이 = 산신령

 

 

5. 천하는 신령스러운 그릇이기에 작위할 수 없다

 

신령스럽다라는 말은 형용사이다. 그런데 이 형용사를 명사화하면 신령이 된다. ‘신령(神靈)’을 더 줄이면 ()’이 된다. ‘이 곧 ‘God’ 이다. 일본사람들이 말하는 카미(かみ, Kami)’.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신이라는 인격체는 알고 보면 우주의 신령스러움의 명사화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동양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너무도 쉽고 명료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이러한 ()’의 문제로 존재론적 거짓말(an ontological lie)’을 일삼거나, 그를 빙자하여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세를 억압하거나, 신비주의적 환상을 지어내는 그런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인간세의 모든 종교라는 것은 바로 너무도 쉬운 이 신성(神性)’의 파악에 관하여 거짓을 일삼아온, 미개하고 우둔한 인간정신의 소치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령스럽다 신령 (God)

 

6장에서 곡신불사(谷神不死)’라 했을 때의 신()은 바로 이런 맥락의 뜻이 명사로 쓰인 예이다. 여기 29장의 천하신기(天下神器)’의 신()은 같은 맥락의 뜻이 형용사로 쓰인 예이다. 천하(天下)는 기()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데미우르고스의 제작의 산물임이 분명하지만, 결코 데미우르고스의 지배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신()하기 때문이다. 즉 산()의 만 그루의 나무가 나무 만개의 성질의 집합이 아니듯이, 천하(天下)라는 기()는 우리의 감관적 능력이 미칠 수없는 무한한 함수가 착종되어 있는 집합체이기 때문에 도저히 나 개인의 유위적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릇이되, 우리가 상식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그릇의 성질을 초월하는 신령스러운 그릇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불가위(不可爲)’라는 것이다.

 

오호라! 천하는 신령스러운 그릇이로다! 그것은 내가 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만들거나 주무르거나 할 수 있는 그러한 성격의 그릇이 아닌 것이다.

 

 

6. 천하가 신기(神器)임에도 작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먹어가면서, 천하신기 불가위야(天下神器, 不可爲也)’라는 이 한 구절에서 인생의 무한한 지혜를 배웠다. 나는 어

쩌다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퍽으나 알려진,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것도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유명해져 온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TV방송을 하다 보니 정말 유명해졌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그래서 불행히도 나는 많은 이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셈부들에게 저작(咀嚼, 씹힘)당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 사회에서 정당한 비판은 항상 장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비판이 없다. 오로지 비난과 비양과 빈정댐만 있을 뿐이다. 비판이란 오직 동일한 관심과 동일한 언어의 께임방식을 준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수작(酬酌)이다. 도대체 이창호와 박세리가 만나서 무슨 께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창호와 께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조훈현이나 조치훈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설사 바둑께임을 아는 사람이 이창호에게 붙었다 한들, 이창호가 9급짜리 초심자들과 앉아서 무슨 께임을 하며, 그들로부터 무슨 평을 들으며, 그들로부터 무슨 정당한 비판을 들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닌가?

 

너무도 부정적으로 감정적으로 신문에다가 나에 관한 거대한 기사를 쓰신 분이 나에게 다가와서 명함을 내밀고 인사를 한다. 엊그제 일이다. 나는 동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얘기를 건네보니 바로 내가 가르친 대학에서 내 강의를 수강한 제자였다. 내가 뭔 얘기를 하겠는가?

 

자네같은 사람들 덕분에, 내가 너무도 이 사회에서 대접을 못 받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억울한 느낌이 드니까 겸손해질 수 있고 울분에 찰 수 있고 그래서 깊은 생각에 침잠할 수밖에! 그래서 나는 나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야! 감사허이.” 쓰디쓴 털털 웃음을 지으며 일어날 수밖에

 

나를 비난하는 자들, 나를 씹는 자들에게 공통된 하나의 전제가 있다. 그들은 진정코 노자의 천하신기 불가위야(天下神器, 不可爲也)’라는 이

한마디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유명해서 천하(天下)를 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필의 영향력이 강해서 천하(天下)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몰아가고 있는 잘못된 천하(天下)의 방향을 다시 틀어주어야 할 사명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천하(天下)라는 그릇을 작위(作爲)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 전제하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올바르게 천하(天下)를 위() 해야한다는 신념에 불타있는 것이다.

 

나를 씹으면, 씹는 만큼 천하(天下)를 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망상이 그들을 비굴하고, 용렬하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간곡히 말하노라! 천하는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하(天下)를 나의 붓끝에서, 나의 혀끝에서 주무를 수 있다는 그 망상을 먼저 버려라! 나 도올은 최소한 천하(天下)라는 신기(神器)를 작위(作爲)하지 않는다. 나의 언설(言說)은 오직 사람들의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본연을 일깨웠을 뿐이다. 나는 그대들의 분별적 언어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침묵하리라!

 

 

7. 노자는 삶의 현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천하신기 불가위야(天下神器, 不可爲也)’라는 구절과 관련하여 우리의 일상경험에서 만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의식의 충돌과 대면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충돌은 곧, 천하가 신기라서 위()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럼 천하에 대해서는 일체의 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사회적 행위(social activity)의 불가능성을 선포해야할 것이 아닌가? 과연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칼 맑스는 일찌기 말했다. 사상가의 임무는 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이 세계를 변혁하는 데 있다. 변혁은 곧 이 세계에 대한 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의 행위가 근원적으로 이 세계의 개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건강한 믿음은 노자에게 있어서는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노자사상의 귀결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소극적 관조(contemplation), 아니면 무위적 회피(escapism), 아니면 무관심한 방관(disinterestedness)이라 해야 할 것인가?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은 일찌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한 표현은 오직 삶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Ein Ausdruck hat nur im Strome des Lebens Bedeutung. (A Memoir, by Norman Malcolm, Oxford, 1967, p.93)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한 단어의 의미는 오직 그 언어에서의 사용일 뿐(The meaning of a word is its use in the language. PI, 43)’이라는 재미있는 테제를 제시한다. 그 사용은 궁극적으로 삶의 양태(forms of life)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언어의 의미의 체()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언어의 체()는 오직 용(, the use)에서만 발현될 뿐이라는 것이다. ()은 비올 때 쓰면 우산이 되고, 햇빛이 쨍쨍 찔 때 쓰면 그것은 양산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라고 하는 어떤 절대적 의미의 본질이 선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는 알고 보면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행위이다. 그것은 삶의 행위이다. 삶의 행위는 일정한 양식(forms)을 가지고 있다. 언어란 이러한 양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게임이다. 언어는 절대적 의미의 조합체가 아니라, 삶의 행위의 께임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바로 이러한 께임의 맥락에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한 단어의 의미는 한 문장이 쓰여지는 맥락에서 주어질 뿐이고, 그 문장은 그것이 말하여지고 있는 삶의 현장의 행위적 맥락에서 주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모든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가 휴가 갔을 때만 생겨난다.

Philosophical problems arise when language goes on holiday.(PI, 38)

 

 

여기서 언어가 휴가간다는 말은 언어가 삶의 현장성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즉 철학적 문제들은 단지 언어를 삶의 행위의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 추상시키고 고착시킬 때만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를 일상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철학적 문제가 발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너 시간 있니?” “시간이 되었냐?” “지금이 뭔 시간이냐?” 등등의 말을 묻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시간은 하등의 문제될 거리가 없다. 그 의미는 삶의 현장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란 무엇인가?’하고 철학적 성찰을 일삼는 사람들에게서의 시간은 한없이 어렵고 한없이 복잡하고 한없이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개념을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실제 상황의 틀로부터 추상시키는 모든 논의가 철학적 논의의 비극적 오류라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시간론, 베르그송의 시간론이니 하는 따위의 모든 논의가 이런 오류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노자를 철학적 논의로 읽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노자를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 삶의 현장이란 반드시 상황과 맥락과 형식을 갖는다.

 

 

8. 이 세계를 변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여 귀를 기울이라

 

천하신기 불가위야(天下神器, 不可爲也)’라는 이 한마디가 만약 현재 안국동에 그 본부가 있는 참여연대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해보자!

천하란 신령스러운 기물이래서 도무지 작위(作爲)를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 노자의 말씀은 작은 작위적(作爲的) 행위를 통하여서라도 우리사회의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많은 진취적인 젊은 이들에게 픽으나 좌절감을 안겨주는 명제(a quite depressing statement)가 될 것이다. 그리고 노자의 사상은 보수주의자들의 음험한 음모나, 기껏해야 자유주의자들의 방임주의를 표방하는 소극적 명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맥락을 이렇게 바꾸어보자! 만약 이 노자의 말씀이 유신체제를 획책하는 박정희대통령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천하는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감히 천하에 무엇을 한다고 덤비들지 말라! 신령스러운 기물을 농단치 말라! 너의 유신체제는 보나마나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박정희에게 주어진 이 한마디는 박정희의 운명을 예고하는 날카로운 비수가 될 것이다. 그것은 보수주의자의 방임주의적 회피가 아니라, 진취적인 사회변혁가의 날카롭고 지혜로운 비판의 공격이 될 것이다.

 

내가 항상 노자를 일반대중들의 삶의 일반상황 속에서만 읽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양식과 관련이 있다. BC 4세기에 죽간(竹簡)을 소유하고 죽간(竹簡)을 읽고 그 의미를 터득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왕후장상들이었다. 노자의 주어는 기본적으로 성인인 것이다. 그는 치자(治者)요 작자(作者)요 인간세의 리더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자일서(一書)는 사회적 영향력이 지고한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말들인 것이다. 이 세계를 변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그들은 노자가 말하는 이 깊은 충고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 세계는 결코 그대가 변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신령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인성적인 것이 아니라 신성적인 것이다(It is not humane, but divine)/ 이 세계는 스스로 그렇게 되어갈 뿐인 것이다. 왕필은 말한다.

 

 

신이란 형체도 없고 각도도 없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릇이라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요소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형으로써 합쳐진 것이다. 그래서 신기라고 일컬은 것이다.

, 無形無方也. , 合成也. 無形以合, 故謂之神器也.

 

 

9. 붙잡으려고만, 성공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爲者敗之, 執者失之. 故物, 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挫或隳)

 

爲者敗之, 執者失之천하라는 신기(神器)에다가 작위(作爲)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노자는 말한다. 하는 자는 패할 것이요, 잡는 자는 놓칠 것이다. 왕필은 말한다.

 

 

만물은 스스로 그러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삼는다. 그러므로 말미암을 수는 있으나 작위는 할 수가 없다. 그리고 통할 수는 있으나 잡을 수는 없다. 사물은 항상 그러한 자기의 성질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조작하려하니 반드시 패하게 마련이다. 사물은 항상 왔다갔다 하게 마련인데, 그것을 꽉 붙잡는다면 다시 놓치게 될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萬物以自然爲性, 故可因而不可爲也, 可通而不可執也. 物有常性, 而造爲之, 故必敗也. 物有往來, 而執之, 故必失矣. 凡此諸或

 

 

이땅의 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이여! 이 왕필소년의 충고 한마디를 꼭 기억하자! 사물은 왔다갔다[往來]하게 마련인데 왜 그렇게도 미련스럽게 꼭 붙잡으려고만 하는가? 꼭 붙잡으면 잃어버리게 될 것은 너무도 뻔한 이치가 아닌가? 여기 이 왕필의 주석에 깔린 집지(執之)’의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이 비판하는 언어의 본질주의(essentialism)와도 상통한다. 즉 언어의 의미를 절대적이고 불변적이고 실체적이고 추상적인 그 무엇으로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29장의 ()’이라는 노자의 용어가 후대불교의 집착(執着, abhiniveśa)과 같은 용어의 번역술어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故物, 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挫或隳이것은 물론 상대적 가치()=()’의 논리를 부연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 장황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 구인 혹좌혹휴(或挫或隳)’가 정확한 대구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 뜻은 작게 꺾이는 것이 있으면, 크게 무너지는 것이 있다정도로 해석될 것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백서(帛書本)에 모두 그것이 혹배혹타(或培或墮)’로 되어있다. 원의에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는 윗방향으로 북돋아지는 것을 말하고 타()는 아랫방향으로 무너지는 것을 말하므로 정확한 대구가 된다. 그래서 번역에 왕필본의 뜻을 취하지 않고 솟아나는 것이 있으면 무너지는 것이 있다(Some rise up while others fall down)’라고 번역하였다.

 

 

10. 극렬한 광란의 시대에 모든 지나친 행동을 삼가라(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백본(帛本)에는 거태(去泰)’거사(去奢)’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의미상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 ‘천하신기 불가위야(天下神器, 不可爲也)’ 라는 임페라티비(imperative)의 최종결론은 이것이다. ()ㆍ사()ㆍ태()를 버려라[]! 여기 심()ㆍ사()ㆍ태()는 모두 최상급이요. 모두가 중용에서 지나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인은 모든 지나친 행동을 삼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ㆍ사()ㆍ태()는 모두 한 가치관에 치우친 과도한 행위인 것이다. 사물의 이치는 앞서 가는 것이 있으면 뒤따라가는 것도 있고, 들여 마시면 뿜는 것도 있게 마련이요, 강한 것이 있으면 여린 것이 있고, 솟아나는 것이 있으면 무너지는 것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순환의 양면을 전관해야 하는 것이다. 필은 말한다.

 

 

여기서 혹은 혹은 하고 나열한 구문들은 사물들의 순과 역이 항상 반복되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조작하여 어느 한 면에 집착하고 자르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인은 스스로 그러하게 이르는 것에 이를 뿐이요, 그렇게 해서 만물의 정을 창달케 하는 것이다.

凡此諸或, 言物事逆順反覆, 不施爲執割也. 聖人達自然之至, 暢萬物之情.

 

그러므로 말미암을 지언정 작위하지 않고 따를 지언정 풀지 않는다. 그 혼미되는 바를 제거시키고 그 의혹되는 바를 없애버린다. 그러므로 마음에 어지러움이 좋을뿐 아니라 사물은 제 본성에 따라 스스로 얻어갈 것이다.

故因而不爲, 順而不施. 除其所以迷, 去其所以惑, 故心不亂而物性自得之也.

 

 

거심(去甚), 거사(去奢), 거태(去泰)!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기만 하는 극렬한 광란의 시대에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지혜의 말이다. 노자는 삶의 세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고 있다고 자기 삶의 실존적 고백을 67에서 한다.

 

 

我有三寶, 나에겐 세가지 보배가 있는데
持而保之. 이를 늘 지니고 지킨다.
一曰慈, 첫째는 자비로움이다.
二曰儉, 둘째는 검약함이다.
三曰不敢爲天下先. 셋째는 천하에 감히 앞서지 않음이다.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29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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