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예술이 간신히 탄생하는 순간
재경 이야기
재경(梓慶)이 나무를 깎아서 악기 받침대를 만들었다. 받침대가 만들어지자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귀신의 솜씨와 같다며 놀라워했다. 노나라 군주도 악기 받침대를 보고 재경에게 그에 대해 질문했다. “너는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만들었는가?”
梓慶削木爲鐻, 鐻成, 見者驚猶鬼神. 魯侯見而問焉, 曰: “子何術以爲焉?”
재경은 대답했다. “저는 비천한 목공인데, 무슨 별다른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받침대를 만들 때 저는 기를 소모하는 일 없이 재계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만듭니다.
對曰: “臣, 工人, 何術之有! 雖然, 有一焉. 臣將爲鐻, 未嘗敢以耗氣也, 必齊以靜心.
3일 동안 재계하면 치하의 상이나 작록 등에 대한 기대를 마음에 품지 않게 됩니다. 5일 동안 재계하면 비난과 칭찬, 그리고 숙련과 거침이라는 평가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됩니다. 7일 동안 재계하면 문득 나 자신에게 사지와 몸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국가의 위세에 대한 두려운 생각 이 마음에서 없어지게 되고 안으로는 마음이 전일해지고 밖으로 는 방해 요인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다음에 저는 산림으로 들어가 나무들의 자연스러운 성질을 살피는데, 그러면 나무들의 몸이 하나하나 제게 다가옵니다. 그 후 완성된 악기 받침대를 떠 올리도록 만드는 나무 한 그루가 마음에 들어와야 저는 손을 대서 자르기 시작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는 결코 나무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저의 역량과 나무의 역량이 부합되니, 제가 만든 악기 받침대를 귀신이 만든 것 같다고 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齊三日, 而不敢懷慶賞爵祿; 齊五日, 不敢懷非譽巧拙; 齊七日, 輒然忘吾有四枝形體也. 當是時也, 無公朝, 其巧專而外骨消, 然後入山林, 觀天性形軀. 至矣, 然後成鐻, 然後加手焉, 不然則已.則以天合天, 器之所以疑神者, 其是歟!” 「달생」 10
자본과 권력의 족쇄를 끊을 자유의 힘
이야기 모음집 『장자』의 특이성 중 하나는 예술가의 경지에 이른 장인들을 찬양하는 우화들이 많다는 겁니다. 소를 잡는 포정, 수레바퀴를 만드는 윤편, 목재를 다루는 공수 등이 바로 그 장인들입니다. 장인들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만 앞세울 뿐 현실에 무능한 사변적 지식인들, 나아가 정신노동의 우월성으로 억압체제를 정당화하는 대인들을 비판하려는 겁니다. 포정과 같은 푸주한이 없다면 고기 한 점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이들이죠. 정신노동자는 육체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는 하루라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지만, 육체노동자는 정신노동자가 없어도 거뜬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강자입니다. 장자는 소인으로 폄하된 민중이 지배자들이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걸 자각하기를 원했습니다. 육체노동이 비천함의 표시가 아니라 당당한 자유인의 자긍심이 되는 사회, 바로 이것이 장자가 꿈꾸던 사회였으니까요. 장자가 장인을 이야기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또 다른 이유는 미숙한 사람이 장인이 되는 과정이 타자와 소통하는 방법, 나아가 타자에 이르는 길을 만드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포정에게 소는, 그리고 윤편이나 공수에게 나무는 모두 타자를 상징합니다. 소를 잡는 방법이나 목재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엄청난 시행착오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포정은 포정이, 윤편은 윤편이 그리고 공수는 공수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타자에 대해 육체적 이성이나 이성적 육체를 달성할 때, 소통은 이루어지니까요. 문제는 장인이 된다는 사실, 대인이 존중하는 소인이 된다는 것에는 묘한 불편함이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 불편함은 정착사회, 나아가 영토국가가 분업체제로 기능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수직적으로는 천 - 천자 - 대인 - 소인이라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분업이 있고, 수평적으로는 다양한 정부 부처나 회사의 부서처럼 대등한 역할들 사이의 분업이 있습니다. 수직적 분업과 수평적 분업이 결합되면서 위계질서의 피라미드 구조가 완성됩니다. 포정이든 윤편이든 공수든 피라미드 제일 하층부 어느 자리에 속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분업체계에 적응하면 체제의 부품이 됩니다. 전체 기계를 떠나서는 존재 이유가 없는 나사와 같죠. 자본주의 분업체계가 발달하면서, 우리 주변에 노숙자가 늘어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전문직은 버려지는 순간 생계 수단이 막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장자가 찬양했던 장인들도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유목민과는 다릅니다. 소를 귀신처럼 잡으려면, 수레바퀴를 정교하게 만들려면, 목재를 예술적으로 다루려면, 소에만 집중하고 수레바퀴나 목재하고만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 분야를 제외하고는 젬병이 되어야 기술의 달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소를 잡지 않으면 표정은 생계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이것은 윤편이나 공수도 마찬가지죠. 군주나 대인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경지를 피력했던 장인들은 사실 분업체제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바로 여기가 장자의 장인 예찬이 묘한 불편함을 주는 대목입니다. 고기를 먹고 수레를 타고 목공예품을 소비하는 지배계급, 이런 사치와 허영의 존재들이 사라지면, 포정도 윤편도 그리고 공수도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 테니까요.
장자의 영민함은 그가 이런 묘한 불편함을 분명히 느꼈다는 데 있습니다. 포정 이야기를 떠올려보세요. 그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소에만 집중합니다. 소에만 집중할 때 그는 순간적이나마 억압체제 전체를 잊습니다. 포정 자신과 소 사이에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으니까요. 바로 이 부분에 장자는 초점을 모으고 있는 겁니다. 윤편도 공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업을 하기 전에 그들은 군주의 권세나 명령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작업이 시작되면 수레바퀴나 목공예품을 만들라는 상부의 명령은 의식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이 장인이라는 생각마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작업하는 동안 장인은 완전 한 자유인이 됩니다. 빈 배처럼, 빈 구멍처럼, 혹은 대붕처럼 되 니까요. 소가 부위별로 해체된 다음, 수레바퀴가 만들어진 다음, 그리고 공예품이 완성된 다음, 표정이나 윤편 그리고 공수는 분업체제가 규정한 자기 자리로 돌아옵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과 같은 불행한 과정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장자는 순간적이나마 자유인이 되는 장인의 경험에 밑줄을 긋습니다. 자 유인의 경험이 반복되고 쌓이면 이것은 대붕을 비상시켰던 바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입니다. 윤편 이야기에서 윤편은 당상에 올라 군주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아니 생명마저 안중에도 없어야 가능한 행동을 윤편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그는 자유인의 당당함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겁니다. 장인들을 예찬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장자가 ‘재경 이야기’를 다시 만든 이유는 분명합니다. 작업에 몰두하는 순간 반드시 비워야 하는 것, 아니 비워지는 건 국가주의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자본 과 권력에 포획되어 있을지라도 예술은 그 족쇄를 끊을 수 있는 자유의 힘을 품고 있다는 통찰을 장자는 했던 겁니다.
재경이 7일 동안 비운 것들
포정, 윤편, 공수처럼 재경도 성(姓)이 없는 사람, 대인에게 소유될 뿐 무언가를 가질 수는 없는 소인입니다. 재경도 그냥 그를 부리는 귀족이 부르던 이름일 뿐입니다. “야! 목공[梓] 경(慶)아!” 이 목공은 자기 주인의 거대한 저택 내부를 장식하는 가구나 장식품을 잘 만들었나 봅니다. 손님들이 놀러 와 그 목제품들을 보고 경탄을 자주 하자, 노나라 대인이었던 주인은 자기 목공을 경탄이나 축하를 뜻하는 ‘경(慶)’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목공 경! 즉 재경은 주인이 자랑하는 목공이었습니다. 이번에 주인은 선물로 근사한 현악기를 받습니다. 당연히 그걸 장식할 장식대가 필요하겠죠. 재경이 나무를 깎아 악기 받침대, 즉 거를 만든 이유입니다. 이번에도 재경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악기 받침대를 만듭니다. “받침대가 만들어지자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귀신의 솜씨와 같다며 놀라워했습니다.” 이제 누구도 악기 받침대에 올려진 악기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악기 받침대가 압도적 아우라를 뿜어냈으니까요. 동료 대인들의 관람이 이어지고 악기 받침대의 명성이 높아지자, 노나라 군주도 소문을 듣고 왔나 봅니다. 악기 받침대에 매료된 군주는 재경을 불러오라고 명령했고, 마침내 재경은 군주 앞에 섭니다. 재경을 보자 노나라 군주가 묻습니다. “너는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러자 재경은 대답합니다. “저는 비천한 목공인데, 무슨 별다른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이렇게 재경 이야기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멋지게 시작됩니다. 악기 받침대가 악기를 집어삼킬 만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었던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인으로부터 악기 받침대를 제작하라는 명령을 듣자, 재경은 “기(氣)를 소모하는 일 없이 재계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다른 데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에너지를 모아 야 그것을 악기 받침대 제작에 투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든다는 뜻의 “정심(靜心)”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과거 귀족들이 청동거울로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면, 가난한 민중들은 물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당연히 청동거울에 녹이 슬면 안 되고, 물은 요동치면 안 됩니다. 녹슨 청동거울이나 요동치는 물은 사물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으니까요.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사자성어는 이런 문맥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밝게 닦인 청동거울[明鏡]’과 ‘고요하게 멈춘 물[止水]’이라는 뜻입니다. 재경이 말한 ‘정심’은 명경보다는 직접적으로 지수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지수’는 ‘물을 고요하게 만드는’ 노력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고, 그런 노력으로 달성한 ‘고요해진 물’의 상태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한 줄기 바람도 불어서는 안 되고, 나뭇잎 한 장도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고요해진 물이 요동치는 순간 그 물은 더 이상 외부 사물을 맑게 반영할 수 없으니까요. 물과 사물 사이에 바람이든 나뭇잎이든, 삼자가 개입하면 안 됩니다. 재경의 마음과 나무 사이에도 어떤 것도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나무의 모양, 나무의 결, 나무의 재질 등이 왜곡되지 않고 재경의 마음에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구멍을 비워야 바람을 맞아 그에 맞는 바람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바람 이야기의 가르침이 연상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재경의 ‘정심’은 ‘허심’이라고 표현해도 좋습니다. 타자를 투명하게 반영할 수 있는 고요한 마음과 타자를 담을 수 있는 빈 마음은 같은 상태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니까요.
청동거울은 한 번에 밝아지지 않습니다. 녹을 닦고 또 닦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잠시 손을 놓으면 녹은 스멀스멀 거울 표면에 다시 생겨납니다. 물도 한 번에 바로 고요해지지 않습니다. 바람도 막고 떨어진 잎사귀도 계속 제거해야 합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바람이 불고 다시 잎들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바람을 막으며 재경은 지속적으로 물 위에 떨어진 잎사귀들을 제거하고 자 합니다. 마음을 동요시키는 일체의 계기들을 제거하고 비워내는 겁니다. 물 위에 쌓인 나뭇잎들은 축축한 채로 켜켜이 층들을 이루고 있었나 봅니다. 3일 정도 마음과 나무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려는 작업 끝에, 제일 위의 젖은 나뭇잎들이 제거됩니다. 그건 군주나 주인이 내리는 “치하의 상이나 작록”에 대한 기대감이었습니다. 재경은 당근을 원하고 채찍을 피하려는 복종에의 욕망을 버린 겁니다. 이어 제거 작업 5일째가 되자, 두 번째 층의 나뭇잎들을 건져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건 주변 동료나 일반 사람들의 “비난과 칭찬, 그리고 숙련과 거침이라는 평가”였습니다. 이제 재경은 인정에의 욕망도 버리게 된 겁니다. 그러나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는 재경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7일째가 되자, 재경은 “문득 나 자신에게 사지와 몸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됩니다”. 사지와 몸을 잊었다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갈망마저 벗어 던졌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사지와 몸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누가 내 다리를 자르거나 내 목을 조르겠다고 협박할 수 있겠습니까? 생사관(生死關)을 통과한 재경에게는 이제 무서운 게 없는 겁니다.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하겠다는 맹목적 본능이 없다면 지배계급의 칭찬이나 일반 사람들의 평가에 목말라할 이유도 없다는 장자의 통찰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 층위에 깔려 있던 나뭇잎들이 제거되면서 재경은 허(虛)이자 망(忘)의 상태에 이른 겁니다. 이제 소통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셈입니다.
국가도 군주도 인정욕구도 조연으로
7일 동안 재경은 마음을 잊으려는 노력, 마음을 비우려는 노력,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는 노력을 집요하게 견지합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남은 건 재경 본인과 나무, 오직 ‘둘’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재경은 둘의 상태를 막았던 것들의 요체를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국가의 위세, 즉 “공조(公朝)”가 바로 그것입니다. “국가의 위세에 대한 두려운 생각이 마음에서 없어지게 되고 안으로는 마음이 전일해지고 밖으로는 방해요인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복종에의 욕망, 인정에의 욕망, 심지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갈망마저도 모두 국가가 만들었다는 날카로운 통찰이 없다면, 불가능한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랑(amour)은 둘(deux)의 사건에서 출발한다는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이야기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조건들 (Conditions)』에서 바디우는 말합니다. “사랑은 융합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대한 거부. 사랑은 구조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는 둘이 황홀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 황홀한 하나란 단지 다수를 제거함으로써만 둘 너머에 설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은 희생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대한 거부. 사랑은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이 결코 아니다. (…) 오히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後)사건적인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다 두 사람은 마주치고 그 마주침을 지속하려는 욕망을 갖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사건, 둘이 만들어지는 사건은 이렇게 발생합니다. 이성애를 예로 들면 두 남녀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되는 경험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둘이 탄생하는 순간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대통령, 회사 사장 등 다른 모든 사람들은 조연이 되고 국가나 자본마저도 배경이 되고 맙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둘이 된 사람이 그를 혹은 그녀를 쉽게 찾아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이 둘이 유지되어야 사랑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디우는 둘이 ‘하나’가 되어서 소멸하는 걸 극도로 경계합니다. ‘둘’이 유지되는 조건에서 두 사람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만들어가는 경험의 피륙, 그것이 사랑입니다. 바디우의 말대로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後)사건적인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기 때문이죠. 둘에서 중요한 것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라는 말에서 암시되듯 둘은 삶의 두 주인공, 즉 노예가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카페에서 다투는 연인을 떠올려보세요. 남자가 여자에게 주의를 줍니다. “야! 목소리 좀 낮춰! 옆 사람들이 보잖아.” 여자는 본능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를 겁니다. 옆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이제 자신은 옆 사람들 눈치나 보는 조연이 되라고 남자가 요구하니까요. 이제 남자가 여자를 조연으로 간주하는 셈이니, 이 연인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둘로 서게 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사이의 관계는 재경과 나무 사이의 관계에 엄청난 빛을 던져줍니다. 재경이 나무에 복종해서 ‘하나’가 되어서도, 나무가 재경 뜻대로 다루어져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재경도 주인공으로 나무도 주인공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재경과 나무가 두 주인공이 되는 근사한 영화가 상영될 수 있으니까요. 국가도 배경으로 물러나고 심지어 군주마저 조연이 되면서, 재경은 남자 주인공이 됩니다. 이제 이 남자 주인공은 산에 들어가 여자 주인공이 될 나무를 찾아 나섭니다. 마침내 “완성된 악기 받침대를 떠올리도록 만드는 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됩니다. 여자 주인공을 만난 셈이죠. 그와 동시에 산속의 나머지 나무들은 궁궐 대들보가 될 만한 근사한 나무나 배를 만들 수 있는 튼실한 나무조차 모두 조연으로 물러나고 맙니다.
남자 주인공 재경과 여자 주인공 나무는 스스로 주인공임을 유지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존중한 채, 사랑의 피륙을 짜기 시작합니다. 재경은 말합니다. “저의 역량과 나무의 역량이 부합된다[則以天合]”고 말이죠. 그 결과 “귀신이 만든 것과 같은 악기 받침대”가 탄생합니다. 당근을 원하고 채찍을 피하려는 복종에의 욕망도,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갈망도 일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군주도, 세상 사람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갈망마저 조연이 되어야 합니다. 재경과 나무가 주인공이 되어 근사한 아이를 잉태하고 생산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그래서 재경의 악기 받침대는 주인공의 품격을 고스란히 가지게 되고, 표절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독창성(originality)과 권위(authority)를 갖추게 됩니다. 진정한 권위는 앵무새가 아니라 작가(author)에서 온다는 윤편 이야기의 통찰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재경의 악기 받침대는 자유의 증거, 주인의 증거, 사랑의 증거였던 겁니다. 노나라 군주는 악기 받침대가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을 찬탄하고 경배합니다. 그런데 그는 알까요? 자신의 찬탄은 재경과 나무가 두 명의 주인공이 되는 것에 대한 긍정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유일한 주인을 자처하는 군주로서의 자기 부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나라 군주는 재경이라는 소인에게 자유를 인정하고 나무 각각의 고유성을 긍정할 수 있을까요? 아마 힘들 겁니다. 재경을 주인공으로 긍정하는 순간, 노 나라 군주는 더 이상 재경과 같은 피지배계급을 노예처럼 부릴 수 없을 테니까요. 여기서 노나라 군주는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재경의 악기 받침대를 찬탄해서도 안 되고, 찬탄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까요. 바로 이 대목이 장자의 재경 이야기가 빛나는 지점입니다. 이제야 장자가 장인들에 집중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둘의 경험입니다. 국가주의를 벗어나는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입니다.
인용
39. 죽음, 그 집요한 관념을 해체하며 / 41. 울타리의 유혹에 맞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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