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와 공자전기문학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결국 이 질문은 공자의 삶에 관한 질문이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나? 그런데 삶(Life)이란 행위나 사건, 느낌들의 복합적 연속체인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결국 이러한 역사적 공자의 삶의 행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공자의 삶을 전달하는 가장 권위있고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정보의 집약 체계로서 우리는 사마천(司馬遷, 쓰마 치엔, Sima Qian, BC 145~c.86)의 『사기(史記)』 속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꼽는다. 사실 공자의 삶에 대한 한우충동(汗牛充棟)하는 헤아릴 수 없는 기술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천언만언(千言萬言)의 잡설(雜說)보다 「공자세가(孔子世家)」 한 편의 문장을 꿰뚫는 것이 공자의 삶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첩경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들에게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史記卷四十七, 世家第十七)의 일독을 권할지언정, 그 내용을 번잡스럽게 여기 부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기(史記)』는 위대한 책이다. 서구에서는 18세기 말엽에나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로마제국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가 달성한 히스토리오그라피의 수준을 사마천은 그보다 무려 18세기를 앞선 기원전 1세기 초엽 한무제 정화(征和) 연간(BC 92-89)에 달성하였던 것이다. 본기(本紀)ㆍ표(表)ㆍ서(書)ㆍ세가(世家)ㆍ열전(列傳)이라는 다섯 개의 다른 기술형식을 빌어 기전체(紀傳體)【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대표적인 형식으로 간주하여 축약한 말】의 전형을 수립한 사마천의 히스토리오그라피는 방대한 사료의 정밀한 편집이 과시하는 놀라운 실증사학의 정신과 함께 그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또 자유롭고 비판적인가를 말해준다. 사마천은 역사에 대하여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는데 하등의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주관적 포폄을 가하기까지 얼마나 세심한 객관적 사료의 제시를 선행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찬탄의 혀를 차게 만든다.
본기(本紀)는 제왕(帝王)의 역사다. 세가(世家)는 제왕(帝王)이라는 액시스(axis)【곡(轂): 정확하게는 축이 박히는 바퀴통】를 둘러싸고 굴러가는 제후(諸侯)라는 바퀴살[轂]들의 전개사다. 세가가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이러한 세계인식의 모델을 가정케 한다. 『노자(老子)』 11장의 ‘30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축을 공유한다[三十輻共一轂]’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리고 최근 진시황 무덤에서 나온 동거마(銅車馬)가 정확하게 30개 바퀴살의 바퀴모양을 과시하고 있듯이, 사마천의 세가가 정확히 30권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의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공자는 제후가 아니다. 국군(國君)의 위치는 커녕 대부(大夫)의 지위에도 가본 적이 없는 일개 포의(布衣)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마천은 공자를 제후의 대열인 세가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당대 이미 공자의 위치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공자묘소에 참배한 이래 제왕들은 자기들의 도덕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키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거로서 공자를 존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무제(漢武帝)가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파출백가(罷黜百家)하고 독존유술(獨尊儒術)하여 유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의 사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마천 자신이 공자를 ‘지성(至聖)’으로 존숭하고 공자가 전개한 역사가 결코 일개 제후가 전개한 역사에 조금도 뒤지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공자를 열전(列傳)에 집어넣지 않고 세가(世家)에 집어넣은 그의 과감한 역사인식은 바로 한낱 원한에 사무친 품팔이 농사꾼[傭耕]에 지나지 않았던 진섭(陳涉, 츠언 서, Chen She, 또는 츠언 성陳勝, 섭涉은 자字)의 경우 더욱 극렬하게 표출된다.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혁명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들을 모을 수 있는 덕망이나 가문의 배경이 전무한, 그야말로 일개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던 진승이었다. 사마천 자신이 그 찬란한 위용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신흥 진제국(秦帝國)이 허무하게 무너져가버린 그 붕괴의 기폭제가 된 농민반란을 주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승을 세가에 올려놓은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숙연하게 사마천의 역사의식을 느끼게 된다. 사마천은 귀천을 막론하고 ‘세계사적 개인’의 역사적 의미를 물을 줄 알았던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세가(孔子世家)」라고 하는 공자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내가 가본 그 곡부(曲阜)의 구석구석을 직접 답사하였다. 내가 본 곡부의 모습보다는, 더 원형에 가까운 공자의 체취가 서린 광경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생생한 구전자료들을 채록하였을 것이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말한다:
나는 노나라로 직접 가보았다. 그래서 중니(仲尼)의 사당과 살던 집, 그리고 그가 탔던 수레, 입던 옷, 그리고 예(禮)에 썼던 그릇들을 다 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유생들이 그 집에 모여 때에 맞추어 예를 배우고 있는 모습도 관람하였다. 나는 공자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와 머뭇거리며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適魯, 觀仲尼廟堂車服禮器, 諸生以時習禮其家, 余祗迴留之不能去云
「공자세가」야말로 권력의 희생양으로 불알발린[宮刑] 사마천이 분세(憤世)의 그 마음속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권력을 흠모했다가 결국 권력 그 자체를 부정했던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경애감으로 집필한 역작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센티멘탈(sentimental)한 공감이 공자의 삶에 관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평심(平心)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사마천이 공자의 정통적 전기를 집필한 것이 공자가 죽고 난 후 꼬박 400년 후의 사건이다.
생각해보자! 섬서(陝西, 산시, Shan-xi) 하양(夏陽, 시아양, Xia-yang)의 사람이 400년 전의 산동(山東, 산동, Shan-dong) 곡부(曲阜)의 어느 따한(大漢, 키 큰 사람)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집필한다고 하자! 어떠한 사료에 어떻게 근거하든지 간에 4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편년체로 세밀하게 기록한다는 것이 사실 그 자체일 수는 없다. 불과 몇십 년 전에 비명에 간 박정희 대통령의 전기문학도 집필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번 되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마천에게 주어진 사료들은 이미 해석되어진 사료들이다. 그리고 그 해석되어진 사료들을 사마천이 또다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마천이 해석한 사료들을 또 다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의 자료일 뿐인 것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과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최술(崔述, 췌이 수, Cui Shu, 호는 동벽東壁, 1740~1816)의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이 낱낱이 밝힌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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