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관중은 그릇이 작다
3-2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관중(管仲)의 그릇이 작구나!” 3-22. 子曰: “管仲之器小哉!” 그러자 어떤 이가 말했다: “관중은 검소했습니까?” 或曰: “管仲儉乎?”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관씨는 부인을 셋을 거느렸고, 관의 사무를 부하들에게 겸임시키는 일이 없었으니 어찌 검소했다 말할 수 있겠는가?”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그래도 관중은 예는 아는 사람이었지 않았겠습니까?” “然則管仲知禮乎?”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라의 임금이래야 나무를 심어 문안을 가릴 수 있거늘 관씨 또한 나무를 심어 문안을 가렸고, 나라의 임금이래야 두 임금이 만나는 의전 절차를 위해 대청에 술잔받침대를 두었거늘 관씨 또한 술잔받침대를 두었으니, 관씨가 예를 안다고 한다면 누가 예를 알지 못한다 하겠는가?” 曰: “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
관중(管仲, 꾸안 쫑, Guan Zhong, ?~BC 654) 이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으로 친숙한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의 친구 포숙아(鮑叔牙)의 헌신적인 천거로 제환공(齊桓公)을 보좌하여, 환공을 천하의 패자로 만든 대지략가이다. 사마천의 「관안열전」 3은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이 죽은 후에도 제나라는 그 정책노선을 계속 준수하여 항상 다른 제 후국들보다 강성하였다. 관중사후 100여 년이 지나 안자가 출현하였다.
管仲卒, 齊國遵其政, 常彊於諸侯. 後百餘年而有晏子焉.
안자, 즉 안영(晏嬰)은 공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공자가 제나라에서 벼슬하려 했던 챈스를 막아버린 사람이다. 그러니까 관자는 공자보다 약 두 세기 앞선 사람으로 이미 공자의 시대에는 신화로 남아있었다. 그의 신화는 패업(覇業)이었다. 이 위대한 정치가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헌문」 18에서는 공자는 관중에 대한 세속의 부정적 평가를 역전시키면서 그를 옹호한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룩하여 천하(天下)를 바로잡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도 그의 문화적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그의 패업 을 찬양한다. 이것은 아마도 『논어』의 흐름상, 오랑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헌문」이 편찬되었을 시기에는 오랑캐(흉노)의 침략이 빈번하여 그들에 대하여 새롭게 생겨난 적개심이 이 「헌문」의 파편에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헌문」은 전국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간주되므로(맹자의 말년시기 정도) 역시 공자의 관중에 대한 생각은 이 「팔일(八佾)」편에 나타나는 구조가 더 리얼한 공자의 느낌에 접근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관중에 대한 엇갈린 평가들은 어느 것이 더 맞느냐 틀리냐의 문제일 수는 없다. 공자의 평론은 맥락에 따라 방편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노(魯)나라에게 있어서 제(齊) 나라는 강압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공자에게 있어서 관중은 라이벌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패자였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관중의 현실정치론은 액면 그대로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실 이 장의 공자의 멘트 그 자체가 이미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라는 맹자류의 이원적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상정할 수도 있겠지만, 1장의 계씨의 패도를 비판하는 기온자료와 유기적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앞의 두 장과도(20, 21) 예악의 본질에 관한 내면적 주제가 상통한다는 점에서 역시 공자 당대의 언급이 직전 제자를 통하여 전송되어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안정성이 있는 가설이다. 최근 간백자료의 발견은 막연한 의고풍(擬古風)에 일대 타격을 가했으며 여태까지 우리가 후대의 관념으로 조작된 외경이라고 간주했던 많은 서물들, 예를 들면 『관자(管子)』, 『문자」, 「안자춘추(晏子春秋)』 등의 문헌들이 최소한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성립한 확고한 선진문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이 문헌의 주인공들이 픽션의 존재가 아니라 확고한 역사적 실체성을 가지는 인물들이며, 그 인물들이 단지 설화적 존재일 뿐 아니라 어떤 체계적 사상을 소유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선진사상은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사상가들의 역동적 교감의 장에서 성립한 것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관자(管子)』가 물론 관중 본인의 저작일 수는 없다 해도 우리는 관자』를 통하여 관중이라는 역사적 실체로 접근할 수 있는 보다 확고한 문헌적ㆍ사상적 기반을 얻게 된다. 따라서 공자 이전에 존재했던 역사적 관중도 이미 공자시대에 확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공자의 평론도 후대의 조작으로만 치부해버릴 수 없게 된다.
‘관중의 그릇이 작구나!’라는 탄식은, 시백(施伯)이라는 인물이 『관자(管子)』 「소광(小匡)」 2편에서 관중을 평하여 “천하(天下)의 현인(賢人)이로다, 큰 그릇이로다[管仲者, 天下之賢人也, 大器也]!”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 속설(俗說), 즉 당대의 통념에 대한 공자의 반박일 수도 있다. 이것은 청나라의 고증학자 혜동(惠棟, 후에이 똥, Hui Dong, 1697~1758)의 설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러한 공자의 부정적 멘트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묻는다. 관중은 최소한 검약의 미덕 은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겠지요? 이 질문은 곧 관중이 대정치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은 몹시 검소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소문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통념으로서 깔려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통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 그놈 말이야 여러모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구! 여기 ‘삼귀(三歸)’라는 것의 가장 보편적 해석은 ‘세 부인’을 두었다는 것이다. 『시경』에는 ‘지자우귀(之子于歸)’라는 말이 매우 자주 반복되는 이디엄으로 출현하는데 이것은 곧 ‘이 처자 시집가네’의 뜻이다. ‘관씨유삼귀(管氏有三歸)’는 곧 관중은 부인을 셋이나 거느렸다는 뜻이다. 양백준(楊伯峻)은 기존의 많은 설들을 불식하고 ‘삼귀’를 ‘민중에게 부과한 30%의 시조(市租)’의 의미로 해석했다【『관자(管子)』 「산지수(山至數)」에 ‘民之三 有歸於上矣’라는 문장에 의거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30%의 세금이 아니라, 민에게 남아있던 30%의 양곡까지 국가가 회수해버린다는 뜻으로 악랄한 환수법을 의미한다】. 즉 관중은 개혁정치를 단행하면서 자기 자신이 엄청난 세금을 갈취했다는 뜻으로 풀었다. 그러나 역시 통설이 가장 무난하다.
‘관사불섭(官事不攝)’은 하나의 부하직원이 여러 일을 담당케 해야 낭비를 줄일 수 있고 또 일의 능률을 올릴 수도 있다. 그런데 관중은 한 사람에게 겸직을 시킴이 없이 꼭 한 가지 일만을 시키는 매우 사치스러운 방식으로 사람들을 부렸다는 것이다. 어찌 이러한 인물을 검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은 또 다시 질문한다. 관중이라는 현실적 정치가는 최소한 예는 아는 사람이었겠지요? 이 사람의 질문의 배경에는 관중이 설사 그러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할지라도 그러한 사치는 예(禮)의 원칙을 정확히 지키려고 노력한 데서 생겨난 실수에 불과한 것이라는 옹호의 염두(念頭)가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유보남(劉寶楠)의 설이다.
공자의 대답은 끝까지 부정적이다. 관중을 보고 예를 아는 놈이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예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管氏而知禮, 孰不知禮?]? 예로부터 대문을 열면 바로 그 마당 안쪽이 훤하게 내다보이는 것은 좋질 않다. 그래서 대문을 열면 바로 나무를 심어 병풍을 만들어 내정(內庭)이 곧바로 안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나무가 관리하기 구찮고 보기도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나즈막한 담을 대문폭 보다 약간 길게 쌓아 내정을 가리는 건축법이 고대중국에는 있었다. 후대의 중국 건축에서는 흔히 관찰되는 것인데 조벽(照壁), 조장(照牆), 영벽(影壁)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고가도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색문(樹塞門)’의 건축법은 관중 당대에는 오직 방군(邦君)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그런데 관중의 자기 사저에 이러한 ‘수색문(樹塞門)’을 만들었다. 이것은 완벽한 참월이다. 그 다음에 ‘반점(反坫)’이라는 것은 손님을 접대할 때 수작례에서 쓰는 것이다. 대청에서 술을 주고받을 때 서로 마주 앉은 자리에서 옆의 받침대에 술잔을 올려놓으면 그 술잔을 시종이 씻어 다시 술을 부어 상대방의 받침대에 갖다 놓는다. 그러면 다시 그 술잔을 받아 마시고 다시 받침대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러한 받침대를 반점(反坫)이라고 하는데 글씨 모양으로 보아 옛날에는 흙으로 돋아 만들었던 것인데 나중에는 석재나 목재로 아름답게 만든 받침을 아예 고정적으로 대청의 동서에 설치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점의 설치도 물론 방군(邦君)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두 임금이 만나 우호적인 수작을 할 때만이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관중은 집에 이러한 반점을 두고 살았다. 역시 참월이다. 어찌 그를 예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관중(管仲)’은 제나라의 대부이며 이름이 이오(夷吾, 이우, Yi-wu)이다. 제나라 환공(桓公, 후안꽁, Huan Gong)을 도와 제후를 제압하여 패자가 되게 하였다. ‘기소(器小)’라는 것은 관중이 성현 큰 배움의 길을 알지 못하고 국량(局量)이 편천(褊淺)하고 규모(規模)가 비협(卑狹)하여, 몸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음으로써 임금으로 하여금 왕도에 이르도록 하지 못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管仲, 齊大夫, 名夷吾, 相桓公霸諸侯. 器小, 言其不知聖賢大學之道, 故局量褊淺, 規模卑狹, 不能正身修德以致主於王道.
‘어(焉)’은 어건(於虔) 반이다. ○ 그 어떤 사람이 공자께서 ‘기소(器小)’라 말씀하신 것이 오히려 검소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삼귀(三歸)’는 대(臺)의 이름인데, 이에 관한 사건의 전말은 『설원(說苑)』에 보인다. ‘섭(攝)’은 사무를 겸하는 것이다. 가신(家臣)은 본시 관(官)을 다 구비해서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이 통상 여러 가지 직책을 겸임한다. 관중은 그러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모두 사치함을 지적한 것이다.
焉, 於虔反. ○ 或人蓋疑器小之爲儉. 三歸, 臺名. 事見『說苑』. 攝, 兼也. 家臣不能具官, 一人常兼數事. 管仲不然, 皆言其侈.
『설원(說苑)』은 한대의 유학자 유향(劉向, BC 77~BC 6)이 중국 고대로부터 당대(當代)에 이르기까지의 고사를 모은 일종의 설화집이다. 물론 고귀한 역사 자료임에 틀림이 없으나 『설원』의 기사에 의하여 『논어』의 뜻을 확정짓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되는 구절은 『설원』의 「선설(善說)」 4에 들어있는데, 관중의 과감한 정치와 독단이 환공의 지위를 무색케 만드는데 이르렀다고 중신들에게 책임추궁을 당하자, 관중은 삼귀의 대를 쌓아 스스로 백성들에게 원망받을 짓을 했다[管仲故築三歸之臺, 以自傷於民]고 쓰여져 있다. 일종의 고육계라 할 것이나 그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호(好)’는 거성이다. ‘坫’은 정념(丁念) 반이다. ○ 그 어떤 사람은 관중이 검소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예를 아는 것이 아닐까 하고 또 의심한 것이다. 병풍 가리개를 ‘수(樹)’라고도 한다. ‘색(塞)’은 가리는 것이다. 문 안에 병풍 담을 설치하여 안과 밖을 가리는 것이다. ‘호(好)’는 우호의 모임이다. ‘점(坫)’은 두 기둥 사이에 있는데, 술잔을 주고받아 마시기를 필(畢)하면, 술잔을 그 위에 되돌려 놓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제후의 예에 속하는 것인데 관중이 참(僭)했으니, 그는 예를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好, 去聲. 坫, 丁念反. ○ 或人又疑不儉爲知禮. 屛謂之樹. 塞, 猶蔽也. 設屛於門, 以蔽內外也. 好, 謂好會. 坫, 在兩楹之間, 獻酬飮畢, 則反爵於其上. 此皆諸侯之禮, 而管仲僭之, 不知禮也.
○ 나 주희는 말한다. 공자께서 관중의 기량이 작다고 꾸짖으신 것은 그 뜻이 실로 깊다. 흑인이 공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오히려 검소함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으니, 공자께서는 그 사치스러움을 드러내어 배척하심으로써 관중이 결코 검소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그런데 혹인은 또 그가 오히려 예를 알았지 않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그 참월하는 모습을 드러내어 배척하심으로써 관중이 결코 예를 알지 못했음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대저 그 그릇이 작음의 소이연(所以然)을 또 다시 명백히 말씀하시지는 않았어도 관중의 그릇이 왜 작은가를 여기서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자(이천)가 말하기를, “사치하고 예를 범(犯)하였으니 그 기량이 작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참으로 기량이 크다면 스스로 예를 알아 이런 실수는 범하지 않았어야 했다”라고 했으니, 이 말씀이야말로 마땅히 깊게 음미할 만하다.
○ 愚謂孔子譏管仲之器小, 其旨深矣. 或人不知而疑其儉, 故斥其奢以明其非儉. 或又疑其知禮, 故又斥其僭, 以明其不知禮. 蓋雖不復明言小器之所以然, 而其所以小者, 於此亦可見矣. 故程子曰: “奢而犯禮, 其器之小可知. 蓋器大, 則自知禮而無此失矣.” 此言當深味也.
소씨가 말하였다: “자기 몸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까지 미치면, 그 근본이 깊고 그 미치는 바가 심원하니 이것을 일컬어 큰 그릇(大器)이라 하는 것이다. 양웅(揚雄, 양 시옹, Yang Xiong, BC 53~AD 18)이 말한 바 큰 그릇이라는 것은 규(콤파스)ㆍ구(곡척)ㆍ준(수준기)ㆍ승 (먹줄)과도 같은 것이다. 먼저 자신을 다스린 후에 남을 다스린다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관중은 삼귀와 반점을 두었고, 환공은 내밀한 폐첩(嬖妾) 계집만 여섯 명이나 두면서 천하에 패자가 되었으니, 그 근본이 본시 얕은 것이다. 관중이 죽고 환공이 훙거(薨去)하니 천하는 다시 제나라를 종주로 삼지 않았다.’
蘇氏曰: “自修身正家以及於國, 則其本深, 其及者遠, 是謂大器. 揚雄所謂‘大器猶規矩準繩’, 先自治而後治人者是也. 管仲三歸ㆍ反坫, 桓公內嬖六人, 而霸天下, 其本固已淺矣. 管仲死, 桓公薨, 天下不復宗齊.”
여기서 말하는 소씨는 그 유명한 동파(東坡) 소식(蘇軾, 쑤 스, Su Shi, 1036~1101)이다. 우리는 소동파 하면 사(詞)의 대가요, 문장가, 서도가, 문인화의 달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소동파야말로 소위 근세유학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한 사상가이다. 그는 경사(經史)에 박통하였고, 『주역(周易)』에 정통하였으며, 『장자(莊子)』를 사랑하였다. 선학(禪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버지 순(洵), 동생 철(轍)과 함께 촉학(蜀學)을 형성하여 정씨의 낙학(洛學)과 대립하였다.
자(字)는 자첨(瞻), 사천성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이다. 가우(嘉祐) 2년(1057)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동파는 분명 활달한 사상가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의 정치적 입장은 매우 보수적이며 여기서 인용된 주석을 보아도 매우 도덕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구법당의 거물로서 왕안석(王安石)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인간의 본성에 관해 그는 성(性)의 본체에는 선ㆍ악의 구분이 없다고 말하였고, 궁극적으로 성의 본체에 관해서 인간이 언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을 잘 안다고 하면서 성에 관해 언급하는 모든 언설이 사이비라고 비판하였다. 노장과 선미(禪味)가 짙게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양중립이 말하였다: “부자께서는 관중(管仲)의 공로를 크게 평가하시면서도 그 그릇됨이 작다고 여기신 것은, 대저 왕을 보좌할 수 있는 재량이 되지 못하면 비록 제후를 규합하여 천하를 다스린다 해도 그 그릇이 칭송할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도학(道學)이 밝지 못하며 왕도와 패도의 구분이 혼효되어 한 길로 삼았으니, 관중의 그릇이 작다고 한탄하는 공자의 말씀을 듣고도 그가 검소하다고 생각하고, 검소하지 않은 것을 말해주어도 또 그가 예를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저 세상이 바야흐로 부정한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함을 공으로 여겨 무엇이 정도의 규범인가를 모르게 되었으니 관중의 그릇이 작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楊氏曰: “夫子大管仲之功而小其器. 蓋非王佐之才, 雖能合諸侯, 正天下, 其器不足稱也. 道學不明, 而王ㆍ霸之略, 混爲一途. 故聞管仲之器小, 則疑其爲儉, 以不儉告之, 則又疑其知禮. 蓋世方以詭遇爲功, 而不知爲之範, 則不悟其小宜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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