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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만나기까지, 2. 격변의 시기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만나기까지, 2. 격변의 시기

건방진방랑자 2022. 3. 1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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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타부터 통일왕국 마가다까지

 

 

전술한 바와 같이 붓다의 시대는 격변의 시대였다. 이 격변을 결정지운 가장 결정적 사건은 역시 철기의 보급이다. 웃따르 쁘라데쉬-비하르 주 지역은 강우량이 풍부한 대 평원이다. 이 지역은 본시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었으며 철제로 만들어진 연장이 없이는 개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리안족의 동진(東進)과 더불어 철기가 보급되면서 울창한 밀림은 비옥한 농토로 개간되기 시작한다. 간지스강 유역으로 거대한 농경지가 무제한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농경문화의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상공업ㆍ무역의 발달,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시장경제의 발달은 도시상인을 주류로 하는 바이샤(vaiya) 계급의 급성장을 야기시켰고, 잦은 전쟁을 통한 강력한 왕권의 출현은 크샤트리야(Kshatriya) 계급의 세력을 신장시켰다. 이 두 계급은 서로 제휴하여 브라흐만(Brahman) 계급의 제식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불교가 전통적인 카스트를 부정하고 브라흐마니즘의 제식주의를 거부하며, 연기(緣起)에 의거한 이성적 사유와, 카르마에 대한 개인적 실존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모두 새로 등장한 바이샤계급과 크샤트리야계급의 윤리의식과 상부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승단의 재정적 후원이 대체로 바이샤(불전에 장자’[長者]로 표현됨)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붓다의 전도를 안전하게 보호해준 사람들은 주로 크샤트리야(왕족)라는 사실이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도시국가의 성쇠에 따라, 역사의 대세는 혈연중심의 씨족공동체에서 지연중심의 부족국가로, 그리고 순수하게 영토중심의 대국가체제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붓다시대에 16개의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이들 국가들은 결국 코살라(Kosala), 밤사(Vaṃsa), 마가다 (Magadha), 아반띠(Avanti)4대국으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코살라를 정복한 마가다와 아반띠 두 나라의 대립상태로 유지되다가 최종적으로 마가다 통일왕조의 출현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가다 왕국이야말로 13세기 터키 이슬람의 침공으로 인도역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까지 북부인도 역사의 원형을 제공한 정치체제였다. 그것은 중국사에 있어서는 전국시대의 ()나라와 비슷한 성격의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마가다국은 왕권의 세습제(hereditary monarchy)를 시행하고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를 정비했으며, 조세의 체계적 징수체제를 만들었고, 상비정규군을 창설했다. 비옥하고 경작이 용이한 광범한 토지의 풍요로운 자연산물과, 필요한 건축목재를 무궁하게 제공하는 삼림을 확보했으며, 전쟁에는 대규모의 코끼리부대를 동원하였으며, 날카로운 무기와 농구를 만드는 양질의 철을 생산했다. 원시불전에 나오는 왕사성(王舍城), 즉 라자그리하(Rajagriha)는 바로 마가다국의 수도였고, 붓다는 이곳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 Veṇuvana-vihāra)를 빔비사라(頻婆姿羅, Bimbisāra)왕의 도움으로 건립하였던 것이다. 빔비사라왕의 아들 아자타샤트루(Ajātaśatru, 阿搯世)는 수도를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 현재의 파트나 부근)로 옮겼다.

 

 

 마가다왕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의 간지스 강변에서 바라본 대 평원, 후에는 마우리야왕조의 수도로 번창했다. 아쇼카도 여기서 대관식을 올렸고 여기서 그의 제국을 통치했다. 바라나시에서 더 동쪽, 벵갈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류쪽에 파탈리푸트라의 간지스 강이 위치하고 있다.

 

 

통일왕국 마가다부터 아쇼카까지

 

 

간지스강 유역에 산재한 도시국가들로부터 통일왕국인 마가다국이 출현하는 과정이나, 전국의 칠웅(七雄)으로부터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진시황의 진제국이 출현하는 과정이나, 아테네ㆍ스파르타 등의 도시국가가 쇠퇴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제가 대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가 하면, 또 로마가 도시 공화국(Republican Rome)의 형태를 벗어나 대제국(Imperial Rome)의 형태로 이행하는 과정은 모두 동시대에 이루어지는 인류사의 한 축이다. 인류문명들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상황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따라 자체적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보편사(Universal History)의 대세를 감지하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가는 사회의 내재적 보편성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마가다왕국의 쇠퇴는 알렉산더대제(Alexander the Great, 356~323 BC)의 인도정벌과 관련되고 있다. BC 323년 알렉산더대제가 바빌론에서 예기치 않은 객사를 당하게 되자, 그의 대제국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이면서 붕괴하고 말았다. 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마가다 왕국의 젊고 패기있는 왕자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야(Chandragupta Maurya, 치세 322~298 BC )가 펀잡지방을 침입하여 알렉산더가 회군하면서 남겨둔 그리스 군대를 격파하였고 BC 322년 스스로 마가다왕국의 제왕이 되었다. 이 찬드라굽타의 마가다왕국을 우리는 마우리야왕조라고 부르는데, 이 마우리야왕조(Maurya Dynasty, c. 322~180 BC)야말로 인도 최초의 통일대제국인 것이다. 찬드라굽타의 대제국은 북으로는 히말라야에서 남으로는 마이소르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인도를 하나의 통일국가로 만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지만, 그의 세력은 주로 북인도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Bindusara, 298~273 BC)는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제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이 시기의 마우리야 제국은 칼링가(Kalinga)왕국과 인도대륙의 최남단인 타밀(Tamil)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도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두 지역까지 완벽하게 장악하여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을 완성하는 작업은 빈두사라의 아들, 마우리야왕조의 셋째 대왕인 아쇼카의 몫이었다.

 

인도 역사에서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같이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사람은 세 사람이 있다. 그 첫 인물이 마우리야의 아쇼카요, 둘째가 무굴제국의 아크바르대제이며, 그 셋째가 근대인도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이다. 이 세 사람이 모두 비폭력과, 사상과 종교에 대한 관용, 계급을 초월하는 자비, 그리고 철저한 자기부정의 화신이었다.

 

전륜성왕이라는 전통적 이미지는 바로 통일제국을 향한 역사의 변혁과정에서 민중에게 깔린 어떤 메시아니즘의 표출이다. 고타마가 태어날 당시 아시타라는 선인이 그가 성장하여 현실세계에 머물면 전세계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위대한 각자(붓다)가 되리라고 예언했다 하는 것도 이러한 메시아니즘적 기대를 반영하는 설화인 것이다고익진 편역, 한글 아함경p.20. 大正3-463. 수행본기경에는 관상쟁이 수약야(隨若耶)가 하는 말로 나오고 있다.. 새 술은 새 푸대에! 크샤트리야나 바이샤, 그리고 수드라의 민중은 모두 브라흐마니즘의 제식주의에서 벗어난 새 술과 새 푸대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붓다의 꿈을 싯달타가 구현시켰다고 한다면, 세속적인 전륜성왕, 장자가 말하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꿈을 실현시킨 것은 바로 싯달타보다 두 세기 늦게 출현한 아쇼카였다.

 

 

파탈리푸트라의 현재 지명은 파트나(Patna)이며, 비하르주의 수도이다. 여기에는 인도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긴 다리라고 자랑하는 마하트마 간디 다리(the Mahatma Gandhi Seti)가 간지스를 가로 지르고 있다. 10km라고 해서 내가 재어보니 7.5km 정도였다. 그런데 이 길은 파키스탄 국경 가까이 있는 암릿차(Amritsar)에서 캘커타(Kolkata)에 이르는 대 동선으로서 보통 ‘GTR’(Grand Trunk Road)이라고 부른다. 무굴제국 초기에 잠깐 옹립되었던 수르왕조의 주인공 쉐르 샤(Sher Shah)가 만들기 시작하여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완성하였다. 오늘의 ‘GTR’동인도회사1838년에 공사를 마무리지은 것이다. 보수를 안해 여기저기 구멍이 파혀져 있고 트럭이 쓰러져 있다. 다리 통행세를 받는 것은 좋지만 시간이 너무 걸렸다.

 

 

아쇼카의 대각

 

 

인도최초의 전륜성왕인 아쇼카는 본시 잔인한 인물이었다. 웃자인(Ujjain)과 탁실라(Taxila, 옛 지명 Takṣaśila)지역에서 총독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그는 부왕 빈두사라의 신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 파탈리푸트라로 달려왔는데, 잔인하게도 99명의 형제들의 목아지를 피묻은 칼날에 휘날려야 했다. 그리고 늠름하게 대관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왕이 된 후에도 그는 마우리야 왕조의 통치를 거부하며 그 권위를 경멸하고 비양거리는 칼링가왕국의 무자비한 침략에 착수하였다. BC 261년의 일이었다(혹은 BC 258이라고도 한다). 칼링가왕국은 인도의 동쪽 벵갈만(Bay of Bengal)의 해안을 따라 있는 현재의 오리싸(Orissa) 주의 크지 않은 나라였는데 지금 가봐도 느끼지만 좀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칼링가왕국의 저항이 세면 셀수록 아쇼카의 잔인한 본성은 더욱 들끓어 올랐고, 그의 분노는 더욱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의 수모를 한꺼번에 다 갚으려는 듯 닥치는 대로 살육하였고 아쇼카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인혈이 거대한 강물을 이루었다. 이 처절한 상황을 아쇼카는 그의 비문에서 십만 명의 사람이 살해되고 십오만 명이 체포되었다고 쓰고 있는데, 십만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미의 통상적인 단어이며, 실제로 그 숫자는 십만을 넘을지도 모른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쇼카는 장쾌하게 희색을 만면에 띄우고 위대한 과업을 회고키 위해 적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전장터를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를 돌아다녔을까, 별안간 그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공포와 회한의 정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핏물이 강물을 이룬 사이로 팔다리 짤린 이, 창살에 가슴이 관통해 찡그리며 죽어간 이, 화살에 뚫린 목 사이로 펑펑 피를 쏟으며 신음하고 있는 이, 목과 사지, 몸통이 잘린 이들이 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쇼카는 번민 속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수그렸다.

 

 

보라! 이 비참한 주검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그들의 소중한 목숨을 바쳤는가? 정의? 진리? ? 과연 이런 것들이 그들의 목숨을 내던지게 만들었는가? 군인들은 그들의 의무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그러나 분노한 나의 병사들의 눈먼 칼과 창 끝에 이유 없이 목숨을 잃어버린 뭇 백성들은 과연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나 했겠는가? 그들의 눈에 비친 전쟁은 단지 위정자들의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이었으리! 정의와 법을 내세우는 모든 전쟁이 실제로는 소수 권력가들의 끝없는 욕망의 굴레일 뿐, 백성들은 오직 생존만이 목적이며 오직 그것을 위해 몸부림 칠 뿐이로다! ~ 끝없는 인간의 무지여!

 

 

 BC 3세기의 아쇼카 칙령(Ashoka edict)이 쓰여진 돌, 기원전 3세기 아쇼카 대왕의 생생한 기록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감격스러웠다. 프린스 어브 웨일즈 박물관(Prince of Wales Museum, Mumbai)

 

 

담마의 정치

 

 

불교사에서는 아쇼카를 싯달타의 수호자로서, 싯달타의 종교적 이상을 세속적으로 구현시킨 성왕으로서 그린다. 그러니까 붓다가 먼저고 최상이며, 붓다의 충실한 추종자, 불법의 구현자로서의 종속적인 이미지로서만 아쇼카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이해방식이다.

 

내가 생각키에 싯달타나 아쇼카나 모두 인도역사에 등장한 각자(覺者)들이다. 깨달음의 방식과 위대함의 영역이 다를 뿐, 그들은 동등한 깨달음에 도달한 인도의 청년들이었다. 싯달타라는 청년은 보리수 밑에서의 정좌 속에서 냉철한 사유로써 깨달음을 얻었고, 아쇼카라는 청년은 피비린내 나는 인간욕망의 극한적 상황에서 몸서리치는 떨림의 체험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 양자는 모두 자신의 깨달음의 실천에 충실했다. 그러니까 결코 아쇼카는 싯달타의 추종자로서 이해될 수는 없다김형준 엮음, 이야기 인도사(서울 : 청아출판사, 2000), pp.157~160, 인도의 역사에 관하여 기초적인 지식을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상기의 책을 권한다. 비교적 간결하고 명료하게 잘 서술하였다..

 

 

칼링가를 정복하면서 나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들의 영토가 수많은 시체로 덮인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나의 가슴은 온통 찢어지고 말았다. 이유없이 죽거나 부상당해 고통받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의 가슴에는 온통 후회와 슬픔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비록 칼링가가 정복되면서 살해당하고 부상당했던 사람들의 백분의 일, 아니 천분의 일만이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 할지라도 나의 가슴은 무거운 슬픔으로 짓눌릴 것이다. 앞으로 나는 오직 진리에 맞는 법만을 실천하고 가르칠 것이다. 신들에게 헌신하는 나는 진리의 법에 의한 승리만이 최상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아쇼카는 힘에 의한 지배를 포기하고 법에 의한 정치를 표방했다. 여기 법이라는 것은 담마(팔리어, dhamma) 즉 다르마(산스크리트어, dharma)라는 것인데, 희랍어로 쓰여진 칸다하르(Kandahar)의 아쇼카 비문에는 유세베이아(eusebeia, εσέβεια)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신이나 부모에 대한 경건한 마음, 라틴어의 피에타스(pietas), 영어의 파이어티(piety)에 해당되는 말이며, 유가에서 말하는 ’()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존재하는 생명에 대하여 경건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 책임이나, 관용, 비폭력의 의미를 포함한다. ‘담마의 정치라는 아쇼카의 슬로건 때문에 불자들은 이것을 곧 불법을 구현하는 정치로 표현하지만, 아쇼카가 표방한 담마의 정치는 결코 특정적으로 불교적인 다르마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륜성왕이라는 이상 자체가 불교를 초월하는 것이며, 불교에서 생겨난 개념이 아닌 것이다.

 

아쇼카의 담마는 불타의 시대로부터 출발한 어떤 새로운 차이트 가이스트(Zeitgeist), 즉 근본적 사회변동이 가져온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치적 표현인 것이다. 붓다의 담마나 아쇼카의 담마나 모두 이 같은 차이트 가이스트의 다른 표현이다. 아쇼카는 담마를 구현하는 특별한 관료(dhamma-mahāmatta) 제도를 따로 신설했으며 이들을 황제의 직할로서 지방관들의 우위에 두었다. 이들은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신념과 다양한 관념들을 포용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카스트와 무관하게 자비를 베풀었다. 여기서 말하는 자비란 요즈음 말로는 사회복지(social welfare)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쇼카는 동물의 희생을 금지했으며 채식주의를 장려했으며, 불필요한 제식이나 브라흐만(Brahman) 계급의 우월 의식을 거부했다.

 

 

위의 사진은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양의 하나로서 끼르띠무카(kirtimukha or kirttimurti)라고 한다. 사원 입구의 문 꼭대기에 있으면서 잡귀를 쫓는다. 우리나라 귀면기와 문양의 프로토타입을 보는 듯하다. 지금 이것은 비석의 꼭대기에 있는 것이다. Prince of Wales Museum. 아래의 사진은 우리나라 통일신라 귀면기와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비슈누의 영원한 잠(Vishnu on Sesha). 7세기, 웨일즈 박물관, 불교의 도전으로 힌두교가 조직화되어 가면서 다채로운 베다의 신들도 브라흐만(Brahman), 비슈누, 시바의 삼신(the Hindu Triad)체제로 정비된다. 브라흐만은 우주의 창조를, 비슈누는 유지를, 시바는 파괴를 담당한다. 비슈누는 우주의 현재를 유지하기 때문에 걱정없이 편안히 잠을 잔다. 우주를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의 손은 4개며 칭칭 휘감은 뱀(Sesha)을 침대삼아 물위에 떠서 잠을 잔다. 공포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헌신과 평화의 상징이다. 부인 락슈미(Lakshmi)도 행운의 여신.

 

 

시바의 결혼식(Uma-Imahesvara), 7세기. 웨일즈 박물관, 인도인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신은 시바다. 후대로 내려오면 시바는 결국 브라흐만과 비슈누를 누르고 최고의 신으로 격상된다. 이 부조는 시바와 그의 부인 파르바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바는 항상 바람을 피우며 부인에게 무관심하다. 파르바티는 뾰루퉁 항상 앙탈을 부린다. 이 둘의 관계는 모든 남녀관계의 한 아키타입을 나타내고 있다. 시바의 한손에 잘룩한 허리가 휘감긴 파르바티의 애교넘치는 요염한 자세는 가관이다. 시바 옆에는 그가 항상 타고 다니는 황소 난디가 무덤덤하게 지켜보고 있다.

 

 

불교의 세계 종교화

 

 

오늘날 인도에서 소가 숭배되고 식용으로 도살되지 않는 이유는 당대 인도의 비옥한 농도의 개발을 위하여 소가 무한정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소의 번식은 당대의 당위였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이러한 평화로운 가치관에 부합되는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대했을 뿐이며, 불교는 이러한 계기를 통해 크게 세력을 신장했을 뿐이다. 아쇼카 자신이 불법의 수호자라는 것을 공언하긴 했지만, 그의 담마(팔리어, dhamma)는 반드시 불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교에 대한 특칭적인 언급이 그의 칙령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의 담마는 불교와는 달리 가족주의적 성격을 매우 강하게 띠고 있다. 부모에 대한 복종, 형제 간의 우애, 노예와 하인에 대한 자비로운 대우, 그리고 가축과 새들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자비를 베풀 것을 촉구했다. 그는 유가사상처럼 가족 간의 사랑이 근간이 되어 사회전체가 행복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자비행의 목적이 해탈(解脫, mokṣa)이나 열반(涅槃, nirvāṇa)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군주였다.

 

아쇼카는 그의 담마 사상에 불교가 가장 포괄적인 위대한 정신체계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연히 그의 시대에 불교가 타종교들보다 우대를 받는 국교(the state religion)의 모습을 띠게 되는 양상은 도처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아쇼카는 불교를 미얀마(Burma)와 스리랑카(Sri Lanka)에 전파하여 남방불교의 전통을 수립했다. 그리고 많은 포교사들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의 여러 왕들에 보냈다. 그리고 그는 왕도인 파탈리푸트라에서 불전의 제3차결집이 이루어지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3차결집 때 비로소 아비달마 논서들이 생겨났고, 이로써 팔리어장경의 삼장(三藏, Tipiṭaka)체제가 갖추어지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는 이제 힌두이즘의 한 섹트로서의 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계종교(a world religion)로서의 캐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라나시의 번잡한 시장 한복판에 드러누워 잠자는 황소들. 그 황소들을 보초서는 개도 늘어지게 자고 있다. 개들은 소들을 잘 따러다닌다. 뒤따라 다니면서 국물을 좀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카주라호 비슈바나트(Vishvanath)사원을 바라보고 있는 황소 난디상, 비슈바나트사원은 찬델라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단가(Dhanga)1002년에 완성했다고 전하여지며, 이 비슈바나트사원의 5단구조 설계는 조금 후에 지어진 칸다리야 마하데바(1025~1050)사원의 조형에 해당된다. 단가는 노예왕조가 성립하기 직전의 이슬람 약탈자 가즈니의 마흐무드(Mathmud of Ghazni)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시바의 상징이 성적 에너지, 링감(Lingam)이라면 시바가 타고 다니는 황소 또한 농경문화의 생산성(fertility)을 상징한다. 난디는 항상 시바의 성기, 링감을 응시하는 포오즈를 취하고 있다. 난디는 원래 시바의 변신이었는데 쿠샨 왕조 때부터 시바의 탈것으로 변모하였다고 한다. 이 난디상은 통돌조각이며, 천정은 원형 피라밋드식의 적석이며 12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이 황소의 모습은 매우 충직스럽고 주인 시바를 기다리는 간절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오래되지 않은 사진을 살펴보면 그 다리 꿇은 모습이 매우 역동적으로 표현된 걸작이었는데 웬 이유에서인지 그 부분이 최근 잘려나가고 없다. 인도의 유적들은 방치된 속에서 계속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비슈바나트의 여신상들은 특별히 매혹적이다.

 

 

비슈누에게 바쳐진 락슈마나(Lakshmana)사원을 바라보고 있는 이 멧돼지상은 바로 비슈누의 화신, 바라하(Varaha)이다. 비슈누가 멧돼지로 변신하여 악마에게 저 어두운 심해 속으로 끌려 들어간 땅을 다시 물 위로 끌어 올렸다는 땅의 구원의 신화와 관련되어 있다. 674개의 정세한 신과 여신상으로 휘덮여 있으며 그 다리 사이로 뱀이 꿈틀거리고 있다. 전체가 하나의 통돌조각인데, 그 저돌적 자세의 정교한 표현은 추종을 불허하는 걸작이다.

 

 

아쇼카와 진시황

 

 

아쇼카가 지배한 인도는 현실적으로 당대의 세계에 있어서 가장 강성한 군주국가였다. 그리고 인도역사에 있어서 최초이자 최후의 완벽한 통일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담마(팔리어, dhamma)의 정치는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담마의 이상을 통해 다양한 인도대륙의 이질적 요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새로운 정신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진보적 생각은 브라흐만(Brahman) 사제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인도대륙의 지배자일 뿐 아니라, 전 인류를 포용하는 정신적 담마제국의 수장으로서 자신을 인식했다. 아쇼카에 대하여 엇갈리는 기술도 적지 않지만 그가 참다운 사랑과 자비에 헌신한 성군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쇼카는 중국의 진시황에 비유될 수 있다. 둘 다 인도와 중국이라는 대륙에 통일적 아이덴티티를 최초로 형성시킨 제국의 수장들이었으며, 공교롭게도, 한 세대 정도의 시간차이는 있으나, 동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너무도 다르다. 이 양자를 가름짓는 결정적 사건은 만리장성의 유무다. 아쇼카는 만리장성을 세우지 않았고 추상적 담마의 가치만을 전파했다. 진시황은 레알 폴리티크(Realpolitik)의 상징이라면, 아쇼카는 이데알 폴리티크(Idealpolitik)의 상징이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이라는 물리적 사실을 통해 중국이라는 한민족의 하나됨을 후세에 물려주었다.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도량형의 통일문자의 통일이었다. 즉 중국문명에 불변하는 어법의 확실한 우선체계를 확립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아쇼카는 진시황이 수립한 그러한 구체적 통일성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아쇼카의 추상적 담마는 인도문명을 또 다시 공백상태로 방치시켰다. 그의 사후 50년이 지나자 마우리야왕조는 거품처럼 사라졌다. 마우리야를 대체한 승가왕조(The Śuṅga dynasty)의 창시자, 푸샤미트라(Puṣyamitra)는 정통 브라흐만(Brahman)이었다.

 

 

 

 

히란냐바티강의 사라나무

붓다의 육신과 진리

 

 

남전 대반열반경5송품(第五誦品)에 보면, 붓다는 히란냐바티강(凞連禪河) 맞은편 언덕 쿠시나가르 외곽의 사라나무숲으로 가서 침상을 준비하고 죽음의 채비를 차린다. 이때 한쌍의 사라(沙羅)나무가 아직 꽃필 때가 아닌데도 갑작스럽게 온통 꽃을 피워 여래의 전신 위로 하늘하늘 흩날리며 내려와 여래를 공양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호곡하는 아난다. 쿠시나가르 열반상 하단 조각.

 

 

이때 아난다가 슬픈 눈빛으로 숨을 거두려하는 붓다를 쳐다본다. 그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아난다여! 절대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이런 일만이 여래를 경애하는 일은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색과 우바이 이들은 반드시 진리를 몸에 지니고 진리에 따라 진리에 바르게 이르고,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여래를 깊게 경애하는 것이 되느니라!”

 

붓다의 이 유명한 설법은 제자들에게 인간 싯달타라고 하는 육신의 유무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가 설법한 진리에 따라 행동하며 또 그 진리를 구현하는 길만이 싯달타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일임을 역설한 것이다. 스러져가는 자신의 육신에 집착치 말라는 하나의 위로의 말이었다.

 

 

나는 히란냐바티 강가에서 죽음의 침상을 마련하는 싯달타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여기 히란냐바티 강을 건너는 두 어린남매의 머리 위로 사라나무의 꽃잎이 흩날리고 있는 듯하다. 내가 카메라를 대니까 공포스러운 듯 도망가고 있었다. 아가야! 나는 너희를 아난이 싯달타를 사랑하듯이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단다!

 

 

그러나 아난다는 세존께서 어이하여 이리도 급히 열반(涅槃, nirvāṇa)에 드시나이까, 원만한 분께서 무슨 까닭에 이리도 빨리 모습을 감추려하시나이까, 하고 비탄해 한다. 그러면서 세존께서 입멸하시면 배울 스승이 없어지고 또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지기에 너무도 허무해진다고 말한다. 그러한 것이 너무도 서글프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에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타이른다【『남전(南傳)7-1205. 강기희 역, 대반열반경(서울 : 민족사, 1994), pp.121~7. 최봉수 옮김, 팔리경전이 들려주는 고타마 붓다(서울 : 불광출판부, 1996), pp.228~233. 강기희의 번역은 일역 남전(南傳)본에서 중역한 것이고, 최봉수의 번역은 팔리어장경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최봉수의 번역을 기초로 해서 강기희역본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최봉수의 상기서에도 대반열반경의 완역이 포함되어 있다..

 

 

아난다여! 그다지 슬퍼할 것 없느니라. 나의 사후에도 신앙심이 두터운 양가의 자제들은 다음과 같이 여래를 기념할 만한 네 곳을 보면서,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면서 종교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라. 그것은 어떤 장소이겠는가?

아난다여! 여래의 탄생지에서……… 여래께서 정각을 얻은 땅에서……… 여래의 최초의 설법지에서 ……… 그리고 여래의 입멸지에서…… 신앙심이 돈독한 양가의 아들들은 이곳을 보면서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면서 깊은 종교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아난다여! 이미 불제자가 된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색ㆍ우바이들도 또한 이곳에서 여래께서 태어나셨다.’ ‘이곳에서 여래께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셨다.’ ‘이곳에서 여래께서 위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셨다.’ ‘이곳에서 여래는 남김없는 완전한 열반의 세계에 드셨다등등으로 말하면서 이들 지방을 찾아올 것이니라.

 

 

뒤에서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승과 대승을 미술사적으로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이 되는 것은 등신불(等身佛)의 존재유무이다.

 

 

히란냐바티 강에서 싯달타의 육신은 이렇게 스러져 갔다. 바로 싯달타의 육신이 스러진 그 자리에 서있는 대반열반사(Mahaparinirvana Temple)! 그 속에 안치되어 있는 이 열반상은 참으로 평온하게 영원한 잠자리에 드는 한 인간의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한 걸작품이었다. ‘만들어진 것은 모두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오직 게으름 없이 살았기에 나는 여기에 이르렀다. 열심히 정진해다오.’ 이것이 그의 최후의 말이었다.

 

 

여기서 등신불이라는 것은 붓다를 인간의 형상으로서 시각화하는 것을 말한다. 소승불교에는 이러한 등신불의 시각성(anthropomorphic visualization)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아이콘적인 구체형상이 없다. 즉 사람의 형상으로서 붓다를 기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붓다를 사람의 형상으로서 시각화할 때 그것은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의 근본취지에 어긋날 뿐 아니라, 붓다를 하나의 실체로서 신격화하고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크다. 그러기 때문에 붓다는 그의 제자들이 진리만에 의거하여 살 것이며, 자기라는 인간의 형상에는 집착치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따라서 원시불교에는 일체의 등신불의 형상이 허용되질 않았다. 불상이라고 하는 것은 AD 1세기 말경부터, 대승운동이 태동되면서부터 생겨나게 된 것이며 불교운동사에 있어서 그것은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붓다의 열반을 그토록 슬퍼했던 아난다의 무덤, 이렇게 생긴 것이 스투파다. 그는 싯달타와 같은 고향의 사람이었다. 쿠시나가르 부처님 무덤 곁에 묻혀있다. 25년 동안 붓다를 가까이서 모셨던 그는 죽어서도 그를 시봉하고 있는 것이다. 왕사성 제1결집 때 아난다의 암송이 부처님 말씀의 전승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4성지의 탄생

 

 

상기대반열반경의 붓다와 아난다 사이의 대화는 바로 이러한 원시불교의 성격을 정확하게 규정하여 주는 경전의 근거인 것이다. 붓다는 자기의 신체적 죽음을 감지하며 이와 같이 말했다.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다. 변해가는 것을 어찌 머물도록 하겠는가?”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오직 진리에만 의존하여 진리에 도달하고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삶을 살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이때 진리란 법()이며 앞서 말한 담마(팔리어, dhamma)라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이 말하는 따오(Tao), 즉 도()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담마라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물증이 없다. 담마의 구현체로서 붓다라는 실존인물이 항상 곁에 있을 때는 좋았다. 그런데 이런 구현체가 갑자기 사라지면 과연 우리는 그 추상적인 담마를 실천하고 살 수 있을까?

 

제자들은 붓다의 죽음을 앞두고 갑자기 허망하고 허무해졌다. 스승이시여! 우리에게 무엇인가 당신을 기념할 수 있는, 당신의 존재를 상기해낼 수 있는, 그래서 당신이 가르치신 담마를 기억해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이때, 붓다는 자기를 느낄 수 있는 네 개의 장소를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해결방식이다. 내가 태어났고, 내가 정각을 얻었고, 내가 최초로 설법했고, 내가 열반에 든 이 네 군데를 와서 보면 나라는 사람과 내가 남긴 진리, 내가 평생을 추구했던 담마의 역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걱정하지 말지어다!

 

불교의 4성지는 이와 같이 해서 탄생된 것이다. 그것은 원시불교시대로부터 이미 경전의 근거를 가지고 그 의미가 부여된 것이었다. 탄생지는 룸비니(Lumbini), 대각지는 보드가야(Bodhgaya), 초전설법지는 사르나트(Sarnath), 입멸지는 쿠시나가르(Kushinagar). 따라서 이 4성지는 불타의 입멸직후부터 이미 승단에서 정확한 의식을 가지고 기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붓다의 인간적 형상을 만드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면 무엇으로 기념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제기하는 문제는 우리나라 불자들의 상식에 깔려있는 왜곡된 이해방식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상술하겠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첫째는 탄생지 룸비니에 우뚝 선 아쇼카 석주, 둘째는 대각지 보드가야, 셋째는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녹야원의 스투파 유적, 넷째는 입멸지 쿠시나가르의 부처님 무덤(Ramabhar Stupa)인데 이곳이 바로 부처님의 시신을 화장한 곳으로 우리나라 신라왕릉 같이 생겼는데 벽돌을 쌓아올린 것이다.

 

 

빈과 장, 화장과 매장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고래의 전통적 습관에 화장(cremation)이라는 것이 없고, 매장(interment)만 있다고 생각하며, 화장은 불교를 통해서 들어온 매우 독특한 인도의 풍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념 속에 화장은 시신이 아무 것도 남지 않고 타버려 한줌의 재가 되는 것이요, 또 봉분이라든가 무덤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화장과 매장의 가장 큰 차이는 무덤의 유ㆍ무로써 판가름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화장습관(modern cremations)에서 온 인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고대의 장례습속(funeral rites)으로서 화장과 매장은 일견 구분되는 것이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인류문명의 모든 장례는 분리의 제식(Rites of Separation)과 융합의 제식(Rites of Integration)이라는 이중장례(the Double Funeral)를 그 심층구조로 하고 있다. 분리의 제식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다시 죽이는 제식이다. 다시 말해서 사자가 이 세계에 남긴 찌꺼기를 무화(無化)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이 무화의 과정은 자연상태에서는 결국 부식(decomposition)을 통한 무기질화 과정(mineralization)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 동안에는 사자의 가족은 사자가 속했던 삶의 공간으로부터 분리되거나 구분되며 따라서 고독한 애도ㆍ복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 분리의 제식은 문화의 양태와 신분의 차이에 따라 몇 일, 수 주, 몇 달,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이 분리의 제식이 끝나면 이제 융합의 제식이 이루어진다. 융합의 제식 때 성대한 마지막 장례가 치루어지고, 사자의 가족은 고독한 애도와 복상의 시간을 완료하고 다시 그들이 속한 삶의 공간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초분의 경우에 쉽게 알 수 있듯이, 먼저 시신을 가랑잎이나 지푸라기로 덮어 썩히는 시간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곧 분리의 제식에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빈례(殯禮)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빈소를 차린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분리의 제식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시체가 다 썩고 나면 뼉다귀를 추려서 모든 동네사람들이 모여 비로소 성대한 예식을 치루는데, 이것이 장례(葬禮)인 것이다. 물론 이때 다시 이 뼉다귀를 가지고 봉분을 만든다. 이로서 사자의 새로운 운명이 결정되고, 그의 산 사람들의 컴뮤니티 속에서의 위상이 정리되고, 사자의 가족들은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융합되게 되는 것이다. ()과 장(), 이것은 고대의 모든 죽음의 예식의 기본 스트럭쳐였으며 이중장례구조였다.

 

 

 나는 쿠시나가르 싯달타의 무덤을 돌면서 자신의 열반을 감지하는 듯 묵상에 잠겨있는 스리랑카의 한 노스님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와 말을 통하지 않았지만 스님은 나에게 무언가 깊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를 해주었다. 뒤에 보이는 것이 적전(積塼)의 봉분.

 

 

인류 보편의 장례예식인 화장

 

 

고대로부터 이 화장이라고 하는 풍습은 인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기원전 1천여 년경부터 희랍인들은 정교한 화장의 예식을 개발시켰다. 일리아드에 보면 아킬레스에게 죽은 아들 헥터의 시신을 성대하게 화장하기 위해, 황금을 가득 실은 마차를 몰고 와서 아킬레스에게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이야기 등, 화장과 관련된 갖가지 이야기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이 지상의 최대의 영웅 헤라클레스도, 켄타우로스의 속임수에 남편을 곤경에 빠트린 부인 데이아네이라가 자결하자, 헤라의 간계에 12가지 고난을 견디어냈어야만 했던 험준한 생애를 화장의 장작더미 위에서 스스로 마감해 버린다.

 

 

 대반열반사 주변의 휴지를 줍고 있을 때였다. 한 스리랑카의 스님이 나에게 말없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자기가 입고 있던 법복을 벗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았다.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지금 이 법복은 나의 무정재 장농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그때 이름과 주소라도 물어보았을 것을…

 

 

화장이라는 습관은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의 세계로부터, 로마, 희랍, 인도, 라오스, 발리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는 매우 보편적인 죽음의 예식이었다. 그런데 화장이라는 제식을 잘 살펴보면 그것은 기실 매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것 역시 분리의 제식과 융합의 제식의 이중장례라는 기본스트럭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화장은 매장보다 분리의 제식과 융합의 제식의 시간적 간격을 좁혔을 뿐이다. 부식과 소각은 시신의 미네랄화 과정이라는 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부식은 흙 속에서 박테리아의 분해작용에 의존하기 때문에 시각을 돌이켜 생각하면 매우 불결할 뿐아니라 비천한 존재들에게 멕힌다고 하는 부정의 의미마저 부여된다. 이 세계의 토속문화로서 광범하게 존재하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 죽은 사람의 시신을 먹는 장례제식)의 경우도 사랑하는 사람을 흙 속에 썩게 놓아둔다는 것은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 부식의 과정, 분리의 제식과정을 소중한 사람의 위장 관속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소장ㆍ대장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곧 미네랄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여튼 시신을 땅에 묻든, 사람뱃속에 묻든, 불속에 묻든 모두 동일한 제식의 다른 양태일 뿐이다.

 

그리고 요즈음의 간편해진 기름ㆍ전기 보일라화장 때문에, 화장은 매장보다 간편하며, 돈이 적게 들고,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옛날에는 화장이야말로 매장보다 훨씬 더 돈이 많이 들고, 훨씬 더 복잡하며, 고귀한 특권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었던 공적인 특수제식이었다. 화장을 하던 시대에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매장을 했던 것이다. 서구에서 화장이 자취를 감춘 것은 순전히 기독교의 영향이다. 기독교가 서구사회를 지배하면서 재림의 미신사상이 휩쓸게 되었고, 최후의 심판의 날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 시체를 땅속에 그대로 묻어둔다는 터무니 없는 종말론적 믿음 때문에 화장의 습속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화장의 습속은 이라고 하는 어떤 신적인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불은 정화의 의미가 있으며 해방의 의미가 있다. 시신을 불태움으로써 불과 함께 그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도록 도웁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현세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도, 화장의 장작더미가 불타오르면서 소진되는 것은 인간 어머니 알크메네에서 받은 육신이었다. 아버지 제우스에게 받은 영원한 신성은 조금도 손상을 받지 않은 채 새 생명으로 불길을 벗어나온다. 제우스는 그를 구름으로 감싼 다음 네마리 말이 끄는 마차로 저하늘로 데려간다. 이러한 연유로 발리의 습속에 의하면, 화장의 최선의 결과는 시신이 남김없이 불에 타야하는 것이다. 시신이 완벽하게 불에 탈수록 사자의 불결성(impurity)이 제거되는 것이다. 시신이 완벽하게 타지 않으면 사자의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으며 환생의 길이 막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두르가(Durga), 두르가도 시바의 부인이다. 브라흐만ㆍ비슈누ㆍ시바의 입에서 내뿜는 화염 속에서 태어난 두르가는 손이 열개나 되며 호랑이나 사자를 타고 있다. 자태는 청순한 소녀의 모습이지만 모든 악마를 제압할 수 있는 무적의 사나운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잡귀를 쫓는데는 제일로 여겨져 민중의 사랑을 받는다. 구ㆍ시월에 큰 두르가 축제가 열린다.

 

 

사리의 환상

 

 

우리나라 불자들간에 성행하는 묘한 습속이 하나 있는데, 다비식에서 사리를 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리가 많이 나올수록 그 스님의 도력이 컸다는 증표라는 것이다. 사리가 많을수록 죽어서도 고승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정말 부끄러운 요습(妖習)이다. 다비의 본래적 의미는 시체를 완벽하게 무화(無化)시키는 데 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사리에 대한 개념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사리라는 것은 뻑다귀까지 완벽하게 소진시키고 난 다음에 남은 어떤 미네랄의 결정체를 말하는 것인데, 사람의 몸이란 이러한 결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고승의 증표가 아니라, 살아서 병약했거나 울결이 심했거나 비평형의 치우친 상태가 심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대개 고승이라고 하는 자들이 용맹정진한다면서, 동일한 자세를 오래 취하고 불건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아 결석이 심해지면 그런 것들이 모두 사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경에서 말하는 사리는 이러한 고열에서 생겨난 광물성의 결정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비장의 잿더미서 사리라는 것을 찾기 위해 뒤척이는 것을 보면, 소백정이 우황청심환의 재료가 되는 우황을 찾고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우황이나 인황이나 사리나 다 똑같은 것이다. 모두 발리의 습속이나 헤라클레스의 화장의 예처럼, 환생이나 열반에 방해가 되는 육신의 찌꺼기일 뿐이다. 고승일수록 이 사바에 자취를 남기지 말고 스러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리란 무엇인가?

 

사리(舍利)란 산스크리트어의 샤리라’(śarīra, 設利羅)를 단순히 음사(音寫)한 것이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골조(骨組), 구성요소(스트럭쳐), 신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것이 복수형으로 샤리라니’(śarīrāṇi)가 되면 유골(遺骨), 특히 성자나 각자의 유골을 의미한다. 사리는 광물결정체가 아닌 평범한 사람의 빽다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독자들은 앞서 내가 말한 바, 화장이나 매장이나, 분리와 융합의 이중장례구조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고 한 것을 되새겨야 한다. 옛날의 화장은 매장과 마찬가지로 무덤도 있었고 봉분도 있었던 것이다. 화장의 습속은 일리아드가 잘 기술하고 있듯이 원래 고대 사회의 전쟁터에서 생겨난 것이다.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죽은 장수를 위하여 그 자리에서 화장의 영예로운 제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과 근육이 타는 동안에 적들에게서 뺏은 전리품들을 같이 태우기도 하며 그것들이 다 타고 뼈가 삭아들어가기 직전에 적들이나 동물들의 피를 부어 불을 끄고 뼈를 건져 술로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 담아 고국으로 가지고 가서 다시 친지들과 더불어 장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다비식을 향해가는 장례행렬.

 

 

사리 8분 종족

 

 

인간 싯달타의 화장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거행되었을까? 대반열반경에 묘사되고 있는 싯달타의 시신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南傳7-157~8. 강기희 역 대반열반경, p.167.

 

 

마하카사파 존자와 5백명의 비구들이 모두 세존의 유해에 예배하니, 세존의 유해를 안치한 화장나무는 저절로 불이 피어나 타올랐다.

이렇게 해서 세존의 유해를 다비했는데, 불가사의한 일은 유해의 겉살ㆍ속살근육ㆍ힘줄ㆍ관절즙이 모두 재나 그을음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하게 타버리고 단지 유골만 남았던 것이다.

마치 버터나 참기름이 타고 난 다음 재나 그을음이 남지 않는 것처럼, 세존의 유해를 다비했을 때도 겉살ㆍ속살ㆍ근육ㆍ힘줄ㆍ관절즙 등이 재나 그을음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타버리고 오로지 유골만 남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존의 유해가 뼈만 남긴 채 모두 타버리자,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고, 땅에서는 물기둥이 솟아올라 세존의 유해를 안치했던 화장나무의 불을 껐다. 또 쿠시나가라의 말라족도 여러 가지 향수를 뿌려 불끄는 것을 도왔다.

다비가 끝나자 쿠시나가라의 말라족은 세존의 유골을 집회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주변을 창과 화살을 꽂아 임시 울타리를 만들어 둘러쌌다. 이렇게 한 쿠시나가라의 말라족은 세존의 유골(=사리)을 이레 동안 음악과 춤, 찬란한 꽃과 향으로 존경하고 경애하고 숭배하면서 계속 공양 올렸다.

 

 

우리나라 진도의 시킴굿이 연상되는 이 싯달타의 다비장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스님들의 다비장과는 달리 뼈를 안 태우고 불을 껐다는 것이다. 살과 근육, 힘줄, 관절즙이 모조리 깨끗이 타버리고 해골만 옹고로시 남긴 것이다. 해부학적으로 뼈를 연결하는 힘줄이 다 타버리면 중추성 골격 74개와 부속성 골격 126, 이소골 6개 도합 206개의 빽다귀가 남는다. 싯달타의 다비는 싯달타의 206개 뼉다귀를 얻기 위한 불의 제식이었던 것이다.

 

206개의 뼉다귀는 8등분 되어 석가족과 깊은 관련을 나타내는 당대의 종족사회집단에 분배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정확한 원시자료이므로 그 종족명을 소개한다남전(南傳)7-162. 강기희 역 대반열반경, pp.172~3. 이 사리팔분(舍利八分)의 종족(種族)문제는 원시불교의 시대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이다. 이 출처는 팔리장경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nta) 외로도 산스크리트본 대반열반경(Mahāparinirvāṇa-Sūtra), 그리고 장아함경(長阿含經)소수(所收)유행경(遊行經)(大正1-29~30), 般泥洹經(大正1-190)에 각기 유사한 기사가 있다. 이 팔분종족(八分種族)에 관한 연구로서 매우 중요한 논문은 미야사까 유우소우(宮坂宥勝)불교의 기원(佛敎起源)(東京 : 山喜房, 1987), 第二章 殘存種族, 第一節 原始佛敎殘存種族, 第二節 舍利八分種族的意義를 보라. 엥겔스(Frederick Engels)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에서 지적한 바 자유인과 노예의 분열,’ 그리고 루벤(W. Ruben)이 불교흥기의 시대적 특징으로 규정한 종족과 국가의 대립’(Der Gegensatz von Staam und Staat)이라는 중요한 논점을 차용하면서 싯달타시대의 종족사회의 여러 가지 측면을 분석한 본 논문은 인도의 대석학 단게(S, A. Dange)의 시대분석을 기초로 깔면서 매우 계발적인 언급을 치밀하게 전개하고 있다..

1) 마가다(Magadha)국왕 아자타삿투(Ajātasattu)

2) 베살리(Vesāli)의 릿챠비족(Licchavi)

3) 카필라바투(Kapilavatthu)의 샤캬족(Śākya)

4) 알라카파(Allakappa)의 부리족(Buli)

5) 라마마을(Rāmagāma)의 콜리야족(Koḷiya)

6) 베타디파(Veṭhadīpa)의 브라흐만들(Brāhmaṇa)

7) 파바(Pāvā)의 말라족(Malla)

8) 쿠시나가라(Kusinārā)의 말라족(Malla)

9) 도나(Doṇa)의 브라흐만들(Brāhmaṇa)은 세존의 사리를 넣었던 항아리를 얻었고,

10) 핍팔리바나(Pipphalivana)의 모리야 족(Moliya)은 세존의 시신을 다비한 재를 얻었다.

 

이 싯달타의 백다귀를 8등분하여 얻은 사람들은 이것으로 무엇을 했는가? 이들은 바로 백다귀를 집어넣은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무덤을 우리가 스투파(stūpa)라고 일컫는 것이다. 스투파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통상 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탑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자아! 이제 우리는 통상적으로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마는 이러한 어려운 문제들의 본질을 격파해버려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대반열반경이 기술하고 있는, 릿챠비족이 가져간 싯달타의 뼈가 모셔진 역사적 현장이다. 왼쪽의 돌구덩이가 이 돔 안에 있는, 진신사리가 모셔진 스투파의 핵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사리탑의 직경은 8.07m, 사리 8분의 문헌적 기술이 역사적으로 실증된다는 것은 놀라운 고고학적 성과이다. 바이샬리무드 스투파(Mud Stūpa), 동네 꼬마들이 릿챠비종족다웁게 내가 쓰고 있던 볼펜을 달라고 졸랐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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