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큰 통일과 작은 통일
당의 식민지 총독부 격인 안동도호부가 랴오둥으로 옮겨간 것은 신라의 저항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의 정책 변화에도 이유가 있었다. 당시 신라는 당에 정면으로 대립할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만약 신라가 당에 저항하면서도 사대하는 양면 정책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당은 필경 한반도의 지도에서 신라마저 지워 버리는 계획을 추진했을 것이다. 이렇게 신라와 당이 서로에 대한 이중적인 노선을 취한 이면에는 중국 역대 제국의 전통적인 대한반도 정책이 반영되어 있다. 사실 이 정책은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단군과 고조선시대에까지 닿으며, 아래로 내려간다면 19세기 말까지도 이어진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성립과 발전에 중국의 대륙풍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은 앞서도 말한 바 있다. 단군시대에 미작 농경과 제사 관습 등 중국의 농경문명이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반도는 중원의 농경문명보다 중원 북부 몽골의 유목문명권이나 만주의 반농반목(半農半牧) 문명권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중국 문명을 받아들였을망정 한반도와 중국은 거리상으로 상당히 멀다. 더욱이 중국이 문명의 발생기를 지나 국가의 형성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문명의 중심은 중원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방향을 취했으므로 동북방의 랴오둥과 만주, 한반도는 영원한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랴오둥이나 만주와는 달리 한반도는 그 남쪽에 제법 마이너 문명권을 형성할 만한 넓이가 있었고 상당한 인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착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이렇듯 중국 문명권에 직접 편입되기에는 거리가 멀고 별도의 독자적인 문명권을 꾸리기에는 메이저 문명권에 너무 가깝다는 점, 바로 이러한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이 중국과 한반도의 전통적인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중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동은 늘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한나라가 몰락할 즈음(2세기) 그 공백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는 고대 삼국이 모양을 갖추었고 중국이 2차 분열기(남북조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한반도의 삼국은 중국의 화북과 강남에서 어지러이 발흥하는 여러 나라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동북아 국제사회를 형성했다(이때가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수평적인 국제질서가 발전했던 시대다). 그러나 중국의 지리적 여건에서 분열이란 애초부터 오래 지속될 수 없었고 결국에는 통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이 점에서 동아시아 문명은 유럽 문명과 성격이 크게 다르다. 유럽의 경우 남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문명의 중심은 북쪽으로 이동해서 중부 유럽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로마-게르만 문명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유럽 세계에서는 비록 제국의 명패는 존속하지만(서유럽의 신성로마 제국, 동유럽의 동로마 제국) 정치적 중심으로서의 제국은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되며, 각국이 국제사회를 이루어 분권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의 통일 이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는 1911년까지 내내 제국적 질서를 유지해 왔던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통일이 기본이고 가끔 분열기가 있었던 반면, 로마 제국 이후 정치적 구심점이 없었던 유럽의 역사에서는 분열이 기본이고 국지적인 통일이 양념으로 섞이는 역사가 전개 되었다. 이 점이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북위가 화북을 장악했던 5~6세기 150년 동안 중국과 한반도는 모처럼 균형을 맞추면서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나, 어차피 중국이 정치적으로 통일되면 한반도는 다시 변방의 지위로 돌아갈 처지였다. 과연 581년 통일제국 수나라가 들어서면서 예고된 변방 정리 사업에 착수했으며, 그 최종적인 결과가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 처음으로 단일 왕조시대가 개막된 것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역사적 변동의 마무리에 해당한다.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신라를 복속시킴으로써 ‘큰 통일’을 완성했고, 신라는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면서 한반도의 유일한 정권으로 새로 태어남으로써 ‘작은 통일’을 이룬 것이다.
이제 다시 중국과 한반도는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즉 한반도는 예전처럼 중국의 직접적인 영토는 아니면서도 중국의 간접적인 지배와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안동도호부가 랴오둥으로 물러난 것은 바로 그런 관계의 복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군정청’은 한반도에서 멀리 물러갔으나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옛 고구려의 영토, 즉 한반도 북부와 압록강 이북을 영토로 거느릴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것이 문무왕(文武王)과 당 고종 사이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항이다. 신라는 당에게서 최소한의 영토, 즉 백제의 옛 땅을 넘겨받았으니 만족이고, 당은 한반도의 단독정권이 된 신라에게서 사대를 보장받았으니 만족이다. 큰 통일과 작은 통일은 이 선에서 이해관계가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 애매한 관계는 또 다른 기묘한 결과를 낳는다.
신라는 반도 북부까지 영토화하겠다는 야망이나 의지를 품을 수 없는 처지이고, 당의 입장에서는 신라가 중국의 한 지방에 불과하므로 굳이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럼 당과 신라의 사이, 구체적으로 말해서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랴오양과 신라의 북방한계선인 대동강-원산만의 사이에 해당하는 지역은 어떻게 될까? 한반도 북부가 포함되는 이 지역은 자연히 당과 신라의 완충지대, 즉 힘의 공백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 넓은 지역이 마냥 백지로 남을 수는 없다. 그래서 고구려가 멸망한 지 불과 30년 뒤인 699년에 이곳에는 발해라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탄생의 동기부터 그랬기에 발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성격이 명확하지 못했고 내내 권력의 공백을 메우는 정도의 의미밖에 갖지 못했다(주체적인 민족사관을 중시하는 오늘날에는 발해의 의의를 사실 이상으로 부풀리는 경향이 있는데, 취지는 좋지만 위험한 발상이다). 발해사가 중국사의 일부인지, 한반도사의 일부인지조차 모를 만큼 애매한 왕조로 여겨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당연한 일이지만 신라 왕실은 신라만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도 독립 왕조로 여기지 않으려 했다. 두 나라에 관한 역사서를 남기지 않은 게 그 증거다. 중국의 경우 새 왕조가 들어서면 50~100년 이내에 전 왕조에 관한 역사서를 편찬하는 게 관례이며 전통이다(그것이 후대에 『25사二十五史』로 알려진 사서들이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는 물론 10세기 멸망할 때까지도 백제와 고구려 역사를 정리하지 않았다. 신라 스스로가 중국의 군현임을 받아들인 마당에 고구려와 백제를 독립 왕조로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신라의 관점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에 반기를 든 반란 세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삼국시대가 끝난 지 무려 500년이나 지난 12세기에 간행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삼국을 다룬 유일한 정식 역사서로 남게 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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