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중화세계의 완성이다. 따라서 중화 질서의 변방인 신라는 중국이 붕괴하면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중화의 질서가 정점에 달한 8세기 초반에 잠시 번영을 누렸던 신라는 중국이 당말오대의 위기에 빠지자 극심한 혼란기로 접어든다. 발해가 포기한 랴오둥을 무대로 거란이 비중화세계의 대표주자로 성장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단독정권은 고려에게로 넘어간다.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큰 통일과 작은 통일
당의 식민지 총독부 격인 안동도호부가 랴오둥으로 옮겨간 것은 신라의 저항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의 정책 변화에도 이유가 있었다. 당시 신라는 당에 정면으로 대립할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만약 신라가 당에 저항하면서도 사대하는 양면 정책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당은 필경 한반도의 지도에서 신라마저 지워 버리는 계획을 추진했을 것이다. 이렇게 신라와 당이 서로에 대한 이중적인 노선을 취한 이면에는 중국 역대 제국의 전통적인 대한반도 정책이 반영되어 있다. 사실 이 정책은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단군과 고조선시대에까지 닿으며, 아래로 내려간다면 19세기 말까지도 이어진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성립과 발전에 중국의 대륙풍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은 앞서도 말한 바 있다. 단군시대에 미작 농경과 제사 관습 등 중국의 농경문명이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반도는 중원의 농경문명보다 중원 북부 몽골의 유목문명권이나 만주의 반농반목(半農半牧) 문명권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중국 문명을 받아들였을망정 한반도와 중국은 거리상으로 상당히 멀다. 더욱이 중국이 문명의 발생기를 지나 국가의 형성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문명의 중심은 중원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방향을 취했으므로 동북방의 랴오둥과 만주, 한반도는 영원한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랴오둥이나 만주와는 달리 한반도는 그 남쪽에 제법 마이너 문명권을 형성할 만한 넓이가 있었고 상당한 인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착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이렇듯 중국 문명권에 직접 편입되기에는 거리가 멀고 별도의 독자적인 문명권을 꾸리기에는 메이저 문명권에 너무 가깝다는 점, 바로 이러한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이 중국과 한반도의 전통적인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중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동은 늘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한나라가 몰락할 즈음(2세기) 그 공백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는 고대 삼국이 모양을 갖추었고 중국이 2차 분열기(남북조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한반도의 삼국은 중국의 화북과 강남에서 어지러이 발흥하는 여러 나라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동북아 국제사회를 형성했다(이때가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수평적인 국제질서가 발전했던 시대다). 그러나 중국의 지리적 여건에서 분열이란 애초부터 오래 지속될 수 없었고 결국에는 통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이 점에서 동아시아 문명은 유럽 문명과 성격이 크게 다르다. 유럽의 경우 남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문명의 중심은 북쪽으로 이동해서 중부 유럽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로마-게르만 문명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유럽 세계에서는 비록 제국의 명패는 존속하지만(서유럽의 신성로마 제국, 동유럽의 동로마 제국) 정치적 중심으로서의 제국은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되며, 각국이 국제사회를 이루어 분권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의 통일 이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는 1911년까지 내내 제국적 질서를 유지해 왔던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통일이 기본이고 가끔 분열기가 있었던 반면, 로마 제국 이후 정치적 구심점이 없었던 유럽의 역사에서는 분열이 기본이고 국지적인 통일이 양념으로 섞이는 역사가 전개 되었다. 이 점이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북위가 화북을 장악했던 5~6세기 150년 동안 중국과 한반도는 모처럼 균형을 맞추면서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나, 어차피 중국이 정치적으로 통일되면 한반도는 다시 변방의 지위로 돌아갈 처지였다. 과연 581년 통일제국 수나라가 들어서면서 예고된 변방 정리 사업에 착수했으며, 그 최종적인 결과가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 처음으로 단일 왕조시대가 개막된 것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역사적 변동의 마무리에 해당한다.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신라를 복속시킴으로써 ‘큰 통일’을 완성했고, 신라는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면서 한반도의 유일한 정권으로 새로 태어남으로써 ‘작은 통일’을 이룬 것이다.
이제 다시 중국과 한반도는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즉 한반도는 예전처럼 중국의 직접적인 영토는 아니면서도 중국의 간접적인 지배와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안동도호부가 랴오둥으로 물러난 것은 바로 그런 관계의 복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군정청’은 한반도에서 멀리 물러갔으나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옛 고구려의 영토, 즉 한반도 북부와 압록강 이북을 영토로 거느릴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것이 문무왕(文武王)과 당 고종 사이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항이다. 신라는 당에게서 최소한의 영토, 즉 백제의 옛 땅을 넘겨받았으니 만족이고, 당은 한반도의 단독정권이 된 신라에게서 사대를 보장받았으니 만족이다. 큰 통일과 작은 통일은 이 선에서 이해관계가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 애매한 관계는 또 다른 기묘한 결과를 낳는다.
신라는 반도 북부까지 영토화하겠다는 야망이나 의지를 품을 수 없는 처지이고, 당의 입장에서는 신라가 중국의 한 지방에 불과하므로 굳이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럼 당과 신라의 사이, 구체적으로 말해서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랴오양과 신라의 북방한계선인 대동강-원산만의 사이에 해당하는 지역은 어떻게 될까? 한반도 북부가 포함되는 이 지역은 자연히 당과 신라의 완충지대, 즉 힘의 공백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 넓은 지역이 마냥 백지로 남을 수는 없다. 그래서 고구려가 멸망한 지 불과 30년 뒤인 699년에 이곳에는 발해라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탄생의 동기부터 그랬기에 발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성격이 명확하지 못했고 내내 권력의 공백을 메우는 정도의 의미밖에 갖지 못했다(주체적인 민족사관을 중시하는 오늘날에는 발해의 의의를 사실 이상으로 부풀리는 경향이 있는데, 취지는 좋지만 위험한 발상이다). 발해사가 중국사의 일부인지, 한반도사의 일부인지조차 모를 만큼 애매한 왕조로 여겨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당연한 일이지만 신라 왕실은 신라만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도 독립 왕조로 여기지 않으려 했다. 두 나라에 관한 역사서를 남기지 않은 게 그 증거다. 중국의 경우 새 왕조가 들어서면 50~100년 이내에 전 왕조에 관한 역사서를 편찬하는 게 관례이며 전통이다(그것이 후대에 『25사二十五史』로 알려진 사서들이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는 물론 10세기 멸망할 때까지도 백제와 고구려 역사를 정리하지 않았다. 신라 스스로가 중국의 군현임을 받아들인 마당에 고구려와 백제를 독립 왕조로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신라의 관점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에 반기를 든 반란 세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삼국시대가 끝난 지 무려 500년이나 지난 12세기에 간행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삼국을 다룬 유일한 정식 역사서로 남게 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지방정권의 한계
문무를 겸비했던 삼국통일의 주역 문무왕(文武王)은 681년에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을 따로 쓰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라는 특이한 유언을 남긴다. 불교가 융성하던 때였으니 화장이 이상할 건 없으나 일국의 왕이 무덤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가 걱정한 것은 왜구의 침략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아내겠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라의 동해안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던 왜구지만 백제, 고구려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시기에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신라의 큰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 이제 삼국통일을 이루고 신라가 건국된 이래 처음으로 정치적 안정을 찾았으니 문무왕은 그 ‘사소한 문제’나마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묘는 경주 앞바다의 대왕암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은 그 바닷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지어 아버지의 뜻을 기렸다(대부분의 우리 문화재가 그렇듯이 감은사도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그러나 사실 왜구의 침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최선책은 물론 왜구를 정벌하는 것이다. 후대에 왜구는 일본 본토에서도 나오지만 당시까지는 쓰시마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으니까 쓰시마를 공략하면 된다. 하지만 수군이 없는 신라로서는 쓰시마까지 가는 현해탄의 험한 뱃길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설사 군대를 보내 정복한다 해도 독자적 정권의 토대가 튼튼한 쓰시마를 영구적으로 복속시키긴 어려웠다(당시 쓰시마는 일본 본토와 무관한 독립국이었다). 오히려 거리상으로 더 먼 제주도를 662년에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쓰시마와 달리 제주도는 토착 정권의 힘이 약해 5세기부터 이미 백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쓰시마 정벌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다. 알다시피 왜구가 신라의 남쪽을 침략하지 않고 동해안으로 우회해 쳐들어 오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 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있기 때문이다(물론 당시에는 서라벌이었고 경주라는 이름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지만 편의상 경주로 통일하자), 그러므로 수도를 좀더 내륙으로 옮긴다면 왜구의 침략을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왜구는 한반도에 붙박이로 살 목적이 아니라 해안 지방의 약탈을 노리는 자들이니까 바닷가만 피하면 큰 국가적 우환거리는 되지 못한다(나중에 보겠지만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조선시대 초기에 조선 정부는 섬과 해안 지방을 비우는 이른바 ‘공도空島’ 정책을 쓰게 된다), 더구나 신라는 어엿한 한반도의 단독정권이 됐으니 행정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굳이 반도 동남부 구석에 위치한 경주를 도읍으로 유지할 이유는 없다.
▲ 용과 절 살아 생전에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文武王)은 용이 되어 조국의 마지막 숙원인 왜구를 물리치겠다면서 동해 바다에 자신의 묘를 정했고,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그 묘가 바라다보이는 바닷가에 감은사를 지었다. 위의 사진이 대왕암이고 아래 사진이 지금은 터만 남은 감은사다. 재건국의 분위기를 타고 당시 신라 왕실에는 우국지사들이 우글거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신라 정부는 그런 차선책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사정에 따라 수도를 몇 차례나 옮긴 백제나 고구려의 역사를 보더라도, 수도를 옮기는 일은 비록 까다로운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신라는 1천 년에 가까운 사직을 유지하는 동안 도읍을 옮긴 적이 한 번도 없다. 삼국 분립기에는 사정상 그랬다 치더라도 삼국통일을 이룬 뒤에도 신라가 경주를 고집한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이유는 앞서 말한 신라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알기 쉽다. 신라는 비록 한반도의 중부까지 영토로 거느리고 있었지만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본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장수왕(長壽王) 시대에 고구려도 역시 북위에 조공을 보내고 국왕이 북위 황제의 책봉을 받는 처지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서열과 절차상으로 중국의 우위를 인정하는 동아시아적 외교관계의 한 부분이었을 뿐이고 내용적으로 중국의 규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그랬기에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쓸 수 있었고, 천도도 마음대로 계획할 만큼 내치에서는 완전한 자치를 누렸다).
그러나 신라는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를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중국의 간접 지배를 인정했으므로 중국의 정식 군으로 편입된 처지다. 독립국이 아니라 제국의 한 군(郡)이라면 그 중심지가 반드시 군의 지리적 중심일 필요는 없다. 독립국의 수도라면 국토 전역에 행정의 신경망을 고루 뻗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겠지만, 군청 소재지라면 설사 군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따라서 신라의 입장에서 천도는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아마 천도를 계획했다 해도 당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둘째 이유는 첫째 이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라는 당의 한 군이므로 신라의 영토 역시 한 나라의 국토가 아니라 중국의 변방 영토에 속한다. 그러므로 경주에 있는 신라 왕실은 비록 신라의 영토 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체이기는 하지만 그 지역을 중앙집권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지위는 되지 못한다. 즉 신라의 왕은 한반도를 완전히 독재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원래 왕은 독재자다) 단지 ‘서열 1위의 권력자’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서 삼국통일 이후에도 신라의 옛 강역이 아니었던 지역에서는 지방 귀족(호족)들이 여전히 자기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경주의 신라 왕과 귀족들이 굳이 도읍을 옮겨서 스스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허무는 바보짓을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앞서 보았듯이 6세기에 백제 성왕(聖王)은 기존의 권력 기반을 해체하고 새로이 왕권 강화를 위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바 있는데, 그건 최소한 새 도읍지에서도 국왕으로서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국으로부터 위임받은 대리 권력 이외에 전국적인 카리스마가 없는 신라의 왕실과 귀족으로서는, 천도란 곧 기존의 권한과 권력이 사라지거나 약화될지 모르는 큰 모험이었던 것이다(그래서 『삼국사기』에도 이후 신라의 역사는 왕실과 경주 귀족들의 역사만 소개되어 있다)【만약 당시에 신라 왕실이 천도를 계획했더라면 그 후보지는 어디였을까? 우선 호남 지역은 백제의 전통이 살아 있으므로 배제되었을 테고 지금의 서울은 ‘북방 한계선’에 너무 가까워 위험하다. 그렇다면 후보지는 단연 충주가 될 것이다. 충주는 삼국이 쟁패하던 시절부터 요충지였으므로 도시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고, 한강을 통한 뱃길의 요지인 데다 지리적으로도 전국의 중심에 해당하며, 철광산이 많아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강원도 일대에 가끔 출몰하는 말갈의 침입만 제외한다면 최적의 도읍터다. 따라서 왜구가 아니었다 해도 신라가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정권이었다면 당연히 충주로 수도를 옮겼어야 했다. 그러나 경주 세력만을 권력의 기반으로 하는 한계로 인해 신라 왕실은 끝내 천도를 계획하지 못했다. 단 한 차례 689년 신문왕(神文王)은 경주 서쪽의 대구(달구벌)로 천도를 계획했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는데, 아마 그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의 지방자치제였다고 할까? 통일신라시대 신라 중앙정부의 힘은 경주 부근, 넓게 잡아 옛 신라의 영토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 이 점은 신라의 토지제도인 녹읍제(祿邑制)에서도 확인된다. 통일을 이룬 뒤 중앙정부는 중국의 균전제(均田制)를 모방해서 토지를 분급하는데, 관리들에게 분배한 토지를 녹읍(祿邑)이라 부른다. 그런데 고을[邑]을 봉급[祿]으로 준다는 뜻이니 녹읍은 단순히 경작지만이 아니라 한 지역이나 촌락 전체를 의미한다. 즉 녹읍을 받은 관리는 그 지역의 토지 생산물은 물론이고 주민들에 대해서도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한 중앙정부는 녹습제가 실시되면서 더욱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녹읍 내에서는 녹읍의 임자가 사실상의 왕이었으니까.
물론 신라 왕실에서도 중앙정부의 힘이 전국적으로 행사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내놓은 대책이 상수리(上守吏)라는 제도였다. 지방의 향리[吏]를 중앙에 파견한다[上守]는 것이니, 말하자면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볼모를 잡아두는 방식이다. 아마 이런 제도를 고안한 데는 예전에 고구려와 일본에 왕족을 볼모로 보냈던 경험이 참조가 되었겠지만, 호족의 자제도 아니고 향리 정도를 경주에 잡아두는 정도로는 중앙집권화에 별로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렇듯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서도 중국의 한 지방정권이라는 취약성을 벗어 버리지 못했다. 그 대외적인 약점은 대내적으로도 이어져 경주 정권은 형식적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어 있는 한반도 내에서도 강력한 중앙집권력을 지니지 못하며, 이는 곧 각지에서 호족들이 사실상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통일신라시대 내내 권력의 응집력이 미약했던 현상은 그 때문이며, 이는 결국 말기에 가서 호족들이 흥기하면서 다시금 분열시대를 낳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남북국시대?
신라가 당의 지방정권 노릇을 자임함으로써 적어도 한반도는 완전한 중국의 영향권 내에 들었지만, 새로운 동아시아의 질서가 탄생하는 과정은 중국이 바라는 만큼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문제는 랴오둥이다. 한족 왕조인 당의 입장에서 볼 때 친소(親陳)의 스펙트럼은 확연하다. 우선 중원 북방 몽골 초원의 오랑캐들은 전통적으로 노골적인 적이므로 초지일관 적대시하면 된다. 또한 한반도의 오랑캐들은 늘 자발적으로 중국의 한족 왕조에 접근해 왔으므로 특별대우만 해주며 다독거리면 만사 오케이다. 그러나 그 스펙트럼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랴오둥 ― 압록강 이북 지역은 언제나 중국에 양면적인 태도, 중국의 힘이 강하면 사대하고 약하면 저항하는 태도 ― 를 취해왔으므로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태도 역시 늘 미지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고구려처럼 이 지역을 관할하는 확실한 임자가 있을 때는 차라리 속편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임자가 고구려처럼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당은 고구려를 제거한 것이지만 어차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당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랴오둥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구사해서 랴오둥에 특정한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그것은 불가피하게 이 지역에 힘의 공백을 만들어냈다. 비록 안동도호부라는 지배 기구가 있다지만 제국 정부의 힘은 장성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한다. 결국 그 공백은 이 지역에 또 다른 정치적 변동을 유발한다. 그 신호탄은 696년에 이진충이 이끄는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듬해 이들은 장성 바로 안쪽의 베이징까지 공략했다가 당의 사주를 받은 돌궐에 의해 진압되지만, 이제 이곳에 국지적 질서를 유지할 만한 중심 세력이 없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쉽게 말해 랴오둥은 무주공산이 된 것이다.
주인 없는 땅은 먼저 깃발을 꽂는 자가 임자다. 혼란을 기회로 여긴 고구려의 유민 대조영(大祚榮, ?~719)은 말갈의 족장인 걸사비우와 함께 봉기를 일으킨다【발해에 관한 사료가 부족한 것은 건국자에서부터 알 수 있다. 중국 측 사서인 『신당서(新唐書)』에는 건국자가 대조영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고 되어 있다. 이 이름을 두고 역사학자들 간에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실은 대조영과 걸걸중상은 동일인이다. 거지를 뜻하는 걸(乞)을 이름자에 쓸 사람은 없으니 그 이름은 명백한 이두문이다. 대조영의 성인 대(大)는 알다시피 ‘크다’는 뜻이며, ‘클’과 ‘걸’은 발음이 비슷하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그의 성을 뜻으로 옮겨 ‘대’라고 했을 것이다(아마 ‘중상’이라는 이름도 고대 중국어에서는 ‘조영祚榮’과 비슷하게 발음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조영이라는 이름은 당시 실제 그의 이름과 전혀 상관없는 발음이 되는데, 문자가 없었던 탓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앞서 거란의 반란이 실패한 이유는 그도 잘 알고 있다. 거란은 랴오둥에 깃발을 꽂으려 했기에 제국 정부가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조영(大祚榮)은 랴오둥을 버리고 동쪽으로 이동해야 살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사실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 판단은 옳았다. 당은 랴오둥에서 봉기한 그들 무리가 멀리 만주 방면으로 도망치려 했는데도 추격군을 보낼 정도였으니까. 추격군과의 교전에서 걸사비우가 전사하자 대조영은 그의 휘하에 있던 말갈족까지 이끌고 추격군을 물리치면서 동쪽으로 계속 이동한다. 엑소더스는 모세만 한 게 아니다. 바다를 갈라 길을 터준 야훼의 도움 같은 것도 없이 대조영은 파라오 람세스의 군대보다 더 끈덕지게 추격해오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군대와 싸워가며 모세보다 더 먼 길을 도망쳐 와서 마침내 ‘가나안’까지 오는 데 성공한다. 그곳이 바로 동모산(현재 지린성의 둔화 부근)이다. 그는 이 새 터전에서 새 나라를 세우는데, 그것이 후대에 발해라고 알려지게 되는 진국(震國)이다.
▲ 만주의 가나안 대조영은 차오양에서 거의 1천 킬로미터나 당군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동쪽으로 행군해서 발해를 세웠는데, 사진에 보이는 한가운데 산이 바로 그가 첫 도읍으로 정한 동모산이다(백두산 북쪽 15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엄청난 대장정이지만 랴오둥을 버리고 동만주에 둥지를 튼 것은 향후 발해가 동아시아 질서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불과 20여 년 전에 한반도 정벌의 대역사를 치른 당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제국의 영향권 바깥인 만주로 도망친 반란 세력까지 진압할 여력은 없다. 아마 추격군의 임무는 대조영(大祚榮)의 반란 무리를 랴오둥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다시는 랴오둥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설사 만주까지 추격할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추격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거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돌궐이 오히려 랴오시에 둥지를 틀어 버리는 바람에 당은 랴오둥으로 가는 교통로마저 여의치 않아진 것이다. 그래서 당은 대조영이 진국을 세우고 천통(天統)이라는 독자적 연호마저 정하는데도 달래고 어르는 정책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705년에 당의 황제 중종(中宗)은 대조영에게 화해의 사신을 보냈고 다음 예종(睿宗)은 713년에 그를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고구려의 부활일까?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걸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심정적으로는 누구나 그렇게 보고 싶을 것이다. 역사가들도 대부분 그렇게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발해가 존재하던 시기를 가리켜 신라와 발해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고도 주장한다. 실제로 727년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당당하게 밝힌 바 있고, 무덤의 양식에서도 고구려의 전통을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다는 게 확인된다. 그러나 풍습에서 고구려의 것을 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것은 실상 신생국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는 외교적 제스처에 불과하다.
말이야 무엇이든 못하랴? 중요한 것은 발해가 실제로 고구려를 계승했느냐는 것인데, 이 점에서 발해는 대외적인 주장과는 달리 고구려와는 거의 무관해 보인다. 우선 영토적인 면을 봐도 그렇다. 알다시피 고구려의 영토적 중심은 늘 랴오둥과 한반도 북서부였다. 하지만 발해는 처음부터 랴오둥을 포기했으며, 한반도 북서부에도 전혀 세력을 뻗치지 못했다. 한 번도 옛 고구려의 핵심부를 차지한 적이 없는데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좋게 말해서 발해의 외교적 제스처이고 나쁘게 말하면 발해가 고구려의 이름을 팔아먹은 격이다. 또한 주민의 구성으로 봐도 발해는 옛 고구려 유민들보다는 말갈을 비롯한 만주 거주 민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일단 국가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영토와 주민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가 될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것이다.
▲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 이 국서는 왼쪽의 ‘함화(咸和) 11년(842년)’이라는 문구로 연대를 알 수 있다. 이때는 이미 ‘진국’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발해’를 사용했다(오른쪽 맨 위).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발해가 처음부터 스스로 당에게 복속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발해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면서 신라와의 차별성을 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적극적인 대중국 사대 노선을 취했다. 여기에는 대외적인 위신을 강화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적어도 계속 ‘반란 세력’으로 남아 당의 집중 타깃이 되는 일만큼은 피해야겠다는 의도도 있다. 발해는 애초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새 질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조영(大祚榮)이 ‘발해국왕’도 아닌 발해군왕이라는 직책에 만족한 것은(이때부터 진국 대신 발해渤海라는 국명을 수용하게 되지만, 발해란 고유명사도 아니고 당시 보하이만渤海灣 주변의 지역을 중국 정부에서 총칭하던 일반명사였으니 명백한 후퇴다) 새로 자리잡은 동아시아의 질서에 기꺼이 따르겠다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신라의 왕은 그보다 한 급 높은 ‘신라국왕’이었다)【오늘날 한국사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보려는 입장이 힘을 얻은 이유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특히 『발해고(渤海考)』를 쓴 유득공(柳得恭)은 “고려가 발해사를 쓰려 했다면, 고려로 망명온 발해 유민 십여만 명을 통해서 능히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발해사가 제때에 기록되지 못한 것을 대단히 아쉬워했다(사료가 부족한 탓으로 그는 자기 책에 『발해사』라는 제목도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과거 왕조의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재단하려는 생각은 무모할뿐더러 위험하기도 하다. 무모한 이유는, 7세기에 성립된 발해는 18세기의 조선과 아무 상관도 없으며, 21세기의 대한민국과는 더욱 무관하기 때문이다. 또 위험한 이유는, 과거 역사를 현대의 국가적 틀에 꿰어 맞추려 하면 자칫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해사는 ‘한국사’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둘 게 아니라 중국사와 한반도사를 아우르는 ‘지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옳다. 실제로 발해사는 중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 당나라로서는 한반도의 신라라면 몰라도 멀리 만주 동부에 자리잡은 발해를 어떻게 해볼 만한 여력은 없었다. 따라서 당이 반란 세력에서 출발한 발해를 한 지역의 주인으로 잽싸게 공인한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과 발해의 관계가 정립된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동아시아 지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적 체제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7세기 후반 중국의 한반도 정벌로 비롯된 약 50년에 걸친 진통은 새로운 질서를 낳았고, 바야흐로 동아시아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았다.
중국화의 물결
국제정세가 안정되자 신라로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대내적 정비다. 비록 중국의 지방정권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단독정권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행정제도와 관제를 대폭 손봐야 한다. 그래서 신문왕(神文王)은 우선 수도가 영토의 동남부에 치우친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충주와 남원에 각각 소경(小京)을 두고 주민들까지 강제 이주시켰으며, 전국을 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관직도 신설했다【이 무렵의 신라는 사실상 신생국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왕권의 힘이 후대에 비해 오히려 강력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신문왕(神文王)은 689년에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관리의 봉급제도를 바꾸는 개혁을 실시한다. 녹음제에서는 관리들이 토지 생산물과 주민들을 모두 소유했으나 이제부터는 토지 생산물의 일부만을 봉급으로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니 그 차이는 대단히 크다. 이 제도가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신라 왕실은 전국적인 중앙집권화를 추진할 수 있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귀족들은 집요하게 반발해서 결국 경덕왕(景德王) 때인 757년에 녹습제를 복원시켰다】.
나아가 신문왕은 김씨 시조인 미추왕을 비롯하여 자신의 4대 조상들에게 성대한 제사를 올려 새 나라와 새 질서를 자축한다. 다섯 조상에게 제사를 올린 것은 ‘천자는 7묘에, 제후는 5묘에 제사를 지낸다’는 예기(禮記)에 따른 절차다(중국의 천자는 조상들 외에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드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라 왕은 제후의 신분이었으므로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추왕이야 당연하겠지만 흥미로운 것은 나머지 조상들이다. 그는 아버지 김법민(문무왕), 할아버지 김춘추(태종무열왕), 증조 문흥왕, 고조 진지왕의 4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중에는 전대의 왕이 아니었던 인물이 하나 끼여 있다. 문흥왕이라면 누굴까? 그는 바로 진지왕의 이들이자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이다. 비록 죽고 난 뒤 갈문왕으로 추대되어 왕호를 얻기는 했지만, 갈문왕이 국가 대사 중 으뜸인 왕실 제사에 올랐다면 이미 신라는 사실상 새 왕조를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다(이후 신라의 왕들은 모두 그 전통을 따라 미추왕과 자신의 4대조를 ‘5묘’로 삼고 제사를 지내게 된다). 그렇다면 물론 그 건국자는 김춘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골로서 최초로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선진적’ 사대관계로써 한반도의 단독정권으로 가는 길을 열었으니까.
어쨌든 그러한 예비 단계를 거친 뒤 새 질서가 완전히 자리잡은 8세기 초에 신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번영기를 맞게 된다. 형인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일찍 죽는 바람에 왕위를 잇게 된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은 왕위만이 아니라 번영의 토대까지도 물려받았으니, 이후의 역사까지 포함하여 신라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왕이다. 재위 기간 중 그는 당나라에 착실하게 조공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일을 한 게 없는데, 실은 그게 신라로서는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였다. 그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덕분에 어느 누구보다도 나라를 잘 이끈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셈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가 즉위한 직후인 703년에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수교를 맺었다는 점이다. 신라와의 첫 대면에 걸맞게 당시 일본에서는 무려 204명의 대규모 사신단이 파견되었다. 불과 40년 전 백제를 도와 당군과 싸웠던 일본이 신라를 외교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말할 것도 없이 그 일본과 이 일본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더 엄밀히 말한다면 ‘이 일본이 진짜 일본’이다).
한반도에 대규모 전란의 구름이 드리워 있던 645년 일본에서는 당시의 집권자였던 소가(蘇我)씨 세력이 타도되고 천황 세력이 집권하는 다이카(大化) 개혁이 일어난다(다이카란 일본이 최초로 제정한 연호다). 그러나 671년에 개혁 주도자인 덴지 천황이 죽자 다시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한반도의 백제가 멸망한 직후였으므로 그 투쟁에는 백제계 유민과 원래부터 있던 신라계 도래인도 한몫 거들게 되는데, 한반도에서처럼 신라계가 지원한 오아마가 승리하면서 덴무 천황으로 즉위한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맞아 덴무는 적극적으로 당의 제도를 수입하여 권력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키우는 데 주력한다. 701년에 그는 다이호(大寶) 율령을 제정하는데, 이것으로 사실상 일본이라는 고대국가가 건국된 셈이다(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율령을 쓰다 김춘추가 즉위하면서 독자적인 율령을 포기하고 당의 율령을 쓰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본이라는 국명도 이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니 진짜 일본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고대에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 중국 문명을 전해받았으므로 한반도에 비해 늘 뒤처졌던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일본은 적어도 7세기 이후로는 한반도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문명을 구축했다. 비록 지리적으로는 선진 문명권에서 멀었으나 일본은 한반도의 1.5배에 이르는 면적에다 인구도 훨씬 많았으므로 출발에서 뒤진 것을 어렵지 않게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신라처럼 당의 속국이 아니었으므로 신라보다 훨씬 독자적인 역사를 꾸릴 수 있었다. 한 가지 예로, 일본의 경우 고대 인물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7세기 인물인 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생몰연도가 기록에 전하지만 신라의 경우 10세기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까지도 출생연도가 전해지지 않는다】.
▲ 일본의 기민함 당나라가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자 일본은 즉각 당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모방하기 시작했다(여기에는 그때까지 주요 수입 루트였던 백제가 멸망했다는 게 크게 작용했으니, 말하자면 일본은 신라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림은 일본이 당나라에 열 차례 이상 보냈던 견당선의 상상도다. 그러나 일본은 당이 쇠락의 기미를 보이자, 함께 몰락한 신라와는 달리 재빠르게 ‘국풍’으로 전환하는 기민함을 보인다.
703년의 수교는 바로 이 진짜 일본과 한반도의 단독정권 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아시아의 평화, 팍스 아시아나(Pax Asiana)는 완전히 무르익었다. 과연 중국은 모든 질서의 중심이었다. 중국이 안정되면서 동아시아 전체가 평화를 되찾았으니까. 신라와 일본은 동아시아 평화와 문명의 중심인 당나라에 앞다투어 견당사(遣唐使)를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당을 모방하기 시작했다(심지어 일본은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해서 계획도시를 새 수도로 꾸며 천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그런 운동이 당풍(唐風)이라는 정식 명칭까지 얻었지만, 신라는 일본과 달리 당의 일부나 다름없었으므로 ‘모국화’라고나 해야 할까?
모국화 드라이브는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치세 때 절정에 달한다. 우선 그는 전통적인 신라식 이름으로 불리던 행정구역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이를테면 삽량주, 한산주, 웅천주, 무진주처럼 토속적인 지명을 양주, 한주, 웅주, 무주로 바꾼 것이다(그 가운데 상주와 전주는 오늘날까지도 시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당시까지 전해지던 옛 지명들은 원래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에서 나온 이름을 음역 또는 훈역으로 한자화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웅천은 원래 ‘곰나루’였는데, 백제의 수도가 되었을 때 그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어 웅진(雄은 곰이고 津은 나루다)이 되었고 신문왕(神文王)이 그것을 다시 웅천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웅주가 되었으니 이미 지명의 기원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곧이어 경덕왕은 율령박사를 두어 중국식 율령을 시행하는 데 더욱 만전을 기했으며, 당의 중앙제도를 본받아 시랑과 낭중 등의 관제를 도입하고 당의 6부에 해당하는 기관을 설치했다.
경덕왕이 자신있고 소신있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신라의 최전성기였기 때문이다. 마치 소나기가 휩쓸고 간 뒤 새순이 돋는 것처럼 오랜 전란의 시대가 끝난 뒤 신라는 꿀맛 같은 휴식과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신라적인 문화가 꽃피운 것도 이 시기다. 원효(元曉, 617~686)의 아들 설총(薛聰)이 이두를 총정리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게 무형문화재에 해당한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오늘날까지도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유형문화재다. 이 작품들을 기획한 김대성(金大城, ?~774)은 지금의 부총리급인 이찬까지 오른 인물로서, 공직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751년에 대규모 국책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그가 죽을 때까지 완공되지 못하고 이후에 국가에서 완성했는데, 만약 그가 더 살았더라면 오히려 불국사는 오늘날 수학여행지로 애용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신라 최대의 사찰은 단연 황룡사, 아마 김대성은 불국사를 황룡사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 신라의 대표적 사찰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을 것이다. 200년 전인 진흥왕(眞興王) 시절에 당시의 기술로 16년 만에 완성한 황룡사보다 더 긴 기간을 공사하고도 불국사의 완공을 보지 못한 게 그 증거다. 그러나 불국사의 운명을 위해서는 그게 다행이었다. 황룡사는 최대 사찰이었기 때문에 13세기 몽골 침략 때 불타 없어졌으니까【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데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 그는 전생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품삯일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흥륜사 스님에게서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게 밭을 절에 시주하자고 권한다. 그러나 그 뒤 그는 곧 죽었고 그의 벤처투자는 후생에 빛을 본다. 그 덕분에 김대성은 김문량이라는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토함산의 동서 양편에 자리잡은 불국사와 석굴암의 위치로 미루어 다른 해석도 있다. 석굴암에서 굽어보는 바로 앞바다는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왜구가 경주를 침략하는 주요 노선인 탓으로 신라 왕실에서 불력으로 방어하기 위해 절을 많이 지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정신적인 왜구 방어기지였던 셈이다】.
▲ 두 사찰의 엇갈린 운명 위는 불국사의 전경이고, 아래는 황룡사 목탑지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만 해도 황룡사는 동양 최대의 목탑을 자랑하며 웅장하게 서 있었겠지만 500년 뒤 몽골 침략 때 불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아마 김대성이 더 오래 살아 불국사를 직접 완공했더라면 황룡사보다 더 크게 짓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랬다면 몽골군의 타깃이 되었을 테니 오히려 지금에는 불국사가 사라지고 황룡사만 남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덕분에 경덕왕(景德王)은 신라의 달밤에 불국사의 종소리를 고즈넉이 들을 수 있었지만, 가장 신라적인 문화가 만개한 시기가 바로 가장 적극적으로 중국화 노선을 추진한 시기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중국화의 마무리는 788년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이 처음으로 시행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장식한다. 이것은 일종의 과거제(科擧制)라 할 수 있지만, 중국의 과거제와는 다르다. 과거제는 수 문제가 처음 만들었고 뒤이은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지명이나 관직명은 중국의 것을 가져다 써도 내용적으로는 크게 달라질 게 없겠지만 과거제(科擧制)는 다르다. 과거제는 관리 임용제도이므로 신라의 여건에 맞지 않는다면 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앞서 말했듯 중국의 과거제는 한나라 때 유학을 공인하고 나서도 수백 년이나 지난 뒤에야 비로소 시행될 수 있었던 제도인데, 유학 자체가 막 도입되기 시작한 신라 사회에서 그런 관리 임용제도가 통할 리 만무하다.
신라의 관리들이라면 누군가? 비록 성골이라는 피라미드의 맨꼭대기가 사라지고 없다지만 아직 신라에는 골품제의 입김이 강력하게 남아 있다. 신문왕(神文王)과 경덕왕(景德王)이 관제를 정비하고 관직을 신설했다 해도 아직 신라에서는 정상적인 관료제가 성립하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에게는 권력이 있다. 따라서 기존의 것이든 새로 생긴 것이든 모든 관직은 당연히 귀족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다. 독서삼품과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으니, 말하자면 선진적인 과거제와 전통적인 귀족제를 화해시키려는 시도다.
성공했다면 독서삼품과는 과거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집권자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의 수준이다. 시험이라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관리를 선발하겠다는 원성왕의 의도는 현실적인 여건 앞에서 좌초한다. 골(성골, 진골)에 속하는 왕족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원하는 직책을 맡을 수 있었고 품에 속하는 귀족들, 그 중에서도 최상층 세력인 6두품은 독서삼품과에 응시하느니 차라리 중국에 유학을 가는 게 관직 임용에서나, 학문적으로나 더 낫다고 생각한다. 결국 독서삼품과는 이후 우리 역사를 얼룩지게 만드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 즉 ‘시험’과 ‘국가고시’가 최우선시되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오명만 남기고 퇴장한다.
인용
'역사&절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횡무진 한국사 -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0) | 2021.06.14 |
---|---|
종횡무진 한국사 -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0) | 2021.06.14 |
종횡무진 한국사 - 3부 통일의 바람, 3장 통일의 무대 (0) | 2021.06.13 |
종횡무진 한국사 - 3부 통일의 바람, 2장 통일 시나리오 (0) | 2021.06.13 |
종횡무진 한국사 - 3부 통일의 바람, 1장 역전되는 역사 (0) | 2021.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