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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지방정권의 한계(신문왕, 상수리제도)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지방정권의 한계(신문왕, 상수리제도)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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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정권의 한계

 

 

문무를 겸비했던 삼국통일의 주역 문무왕(文武王)681년에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을 따로 쓰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라는 특이한 유언을 남긴다. 불교가 융성하던 때였으니 화장이 이상할 건 없으나 일국의 왕이 무덤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가 걱정한 것은 왜구의 침략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아내겠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라의 동해안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던 왜구지만 백제, 고구려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시기에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신라의 큰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 이제 삼국통일을 이루고 신라가 건국된 이래 처음으로 정치적 안정을 찾았으니 문무왕은 그 사소한 문제나마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묘는 경주 앞바다의 대왕암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은 그 바닷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지어 아버지의 뜻을 기렸다(대부분의 우리 문화재가 그렇듯이 감은사도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그러나 사실 왜구의 침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최선책은 물론 왜구를 정벌하는 것이다. 후대에 왜구는 일본 본토에서도 나오지만 당시까지는 쓰시마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으니까 쓰시마를 공략하면 된다. 하지만 수군이 없는 신라로서는 쓰시마까지 가는 현해탄의 험한 뱃길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설사 군대를 보내 정복한다 해도 독자적 정권의 토대가 튼튼한 쓰시마를 영구적으로 복속시키긴 어려웠다(당시 쓰시마는 일본 본토와 무관한 독립국이었다). 오히려 거리상으로 더 먼 제주도를 662년에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쓰시마와 달리 제주도는 토착 정권의 힘이 약해 5세기부터 이미 백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쓰시마 정벌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다. 알다시피 왜구가 신라의 남쪽을 침략하지 않고 동해안으로 우회해 쳐들어 오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 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있기 때문이다(물론 당시에는 서라벌이었고 경주라는 이름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지만 편의상 경주로 통일하자), 그러므로 수도를 좀더 내륙으로 옮긴다면 왜구의 침략을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왜구는 한반도에 붙박이로 살 목적이 아니라 해안 지방의 약탈을 노리는 자들이니까 바닷가만 피하면 큰 국가적 우환거리는 되지 못한다(나중에 보겠지만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조선시대 초기에 조선 정부는 섬과 해안 지방을 비우는 이른바 공도空島정책을 쓰게 된다), 더구나 신라는 어엿한 한반도의 단독정권이 됐으니 행정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굳이 반도 동남부 구석에 위치한 경주를 도읍으로 유지할 이유는 없다.

 

 

용과 절 살아 생전에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文武王)은 용이 되어 조국의 마지막 숙원인 왜구를 물리치겠다면서 동해 바다에 자신의 묘를 정했고,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그 묘가 바라다보이는 바닷가에 감은사를 지었다. 위의 사진이 대왕암이고 아래 사진이 지금은 터만 남은 감은사다. 재건국의 분위기를 타고 당시 신라 왕실에는 우국지사들이 우글거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신라 정부는 그런 차선책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사정에 따라 수도를 몇 차례나 옮긴 백제나 고구려의 역사를 보더라도, 수도를 옮기는 일은 비록 까다로운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신라는 1천 년에 가까운 사직을 유지하는 동안 도읍을 옮긴 적이 한 번도 없다. 삼국 분립기에는 사정상 그랬다 치더라도 삼국통일을 이룬 뒤에도 신라가 경주를 고집한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이유는 앞서 말한 신라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알기 쉽다. 신라는 비록 한반도의 중부까지 영토로 거느리고 있었지만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본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장수왕(長壽王) 시대에 고구려도 역시 북위에 조공을 보내고 국왕이 북위 황제의 책봉을 받는 처지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서열과 절차상으로 중국의 우위를 인정하는 동아시아적 외교관계의 한 부분이었을 뿐이고 내용적으로 중국의 규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그랬기에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쓸 수 있었고, 천도도 마음대로 계획할 만큼 내치에서는 완전한 자치를 누렸다).

 

그러나 신라는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를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중국의 간접 지배를 인정했으므로 중국의 정식 군으로 편입된 처지다. 독립국이 아니라 제국의 한 군()이라면 그 중심지가 반드시 군의 지리적 중심일 필요는 없다. 독립국의 수도라면 국토 전역에 행정의 신경망을 고루 뻗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겠지만, 군청 소재지라면 설사 군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따라서 신라의 입장에서 천도는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아마 천도를 계획했다 해도 당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둘째 이유는 첫째 이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라는 당의 한 군이므로 신라의 영토 역시 한 나라의 국토가 아니라 중국의 변방 영토에 속한다. 그러므로 경주에 있는 신라 왕실은 비록 신라의 영토 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체이기는 하지만 그 지역을 중앙집권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지위는 되지 못한다. 즉 신라의 왕은 한반도를 완전히 독재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원래 왕은 독재자다) 단지 서열 1위의 권력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서 삼국통일 이후에도 신라의 옛 강역이 아니었던 지역에서는 지방 귀족(호족)들이 여전히 자기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경주의 신라 왕과 귀족들이 굳이 도읍을 옮겨서 스스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허무는 바보짓을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앞서 보았듯이 6세기에 백제 성왕(聖王)은 기존의 권력 기반을 해체하고 새로이 왕권 강화를 위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바 있는데, 그건 최소한 새 도읍지에서도 국왕으로서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국으로부터 위임받은 대리 권력 이외에 전국적인 카리스마가 없는 신라의 왕실과 귀족으로서는, 천도란 곧 기존의 권한과 권력이 사라지거나 약화될지 모르는 큰 모험이었던 것이다(그래서 삼국사기에도 이후 신라의 역사는 왕실과 경주 귀족들의 역사만 소개되어 있다)만약 당시에 신라 왕실이 천도를 계획했더라면 그 후보지는 어디였을까? 우선 호남 지역은 백제의 전통이 살아 있으므로 배제되었을 테고 지금의 서울은 북방 한계선에 너무 가까워 위험하다. 그렇다면 후보지는 단연 충주가 될 것이다. 충주는 삼국이 쟁패하던 시절부터 요충지였으므로 도시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고, 한강을 통한 뱃길의 요지인 데다 지리적으로도 전국의 중심에 해당하며, 철광산이 많아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강원도 일대에 가끔 출몰하는 말갈의 침입만 제외한다면 최적의 도읍터다. 따라서 왜구가 아니었다 해도 신라가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정권이었다면 당연히 충주로 수도를 옮겼어야 했다. 그러나 경주 세력만을 권력의 기반으로 하는 한계로 인해 신라 왕실은 끝내 천도를 계획하지 못했다. 단 한 차례 689년 신문왕(神文王)은 경주 서쪽의 대구(달구벌)로 천도를 계획했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는데, 아마 그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의 지방자치제였다고 할까? 통일신라시대 신라 중앙정부의 힘은 경주 부근, 넓게 잡아 옛 신라의 영토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 이 점은 신라의 토지제도인 녹읍제(祿邑制)에서도 확인된다. 통일을 이룬 뒤 중앙정부는 중국의 균전제(均田制)를 모방해서 토지를 분급하는데, 관리들에게 분배한 토지를 녹읍(祿邑)이라 부른다. 그런데 고을[]을 봉급[祿]으로 준다는 뜻이니 녹읍은 단순히 경작지만이 아니라 한 지역이나 촌락 전체를 의미한다. 즉 녹읍을 받은 관리는 그 지역의 토지 생산물은 물론이고 주민들에 대해서도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한 중앙정부는 녹습제가 실시되면서 더욱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녹읍 내에서는 녹읍의 임자가 사실상의 왕이었으니까.

 

물론 신라 왕실에서도 중앙정부의 힘이 전국적으로 행사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내놓은 대책이 상수리(上守吏)라는 제도였다. 지방의 향리[]를 중앙에 파견한다[上守]는 것이니, 말하자면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볼모를 잡아두는 방식이다. 아마 이런 제도를 고안한 데는 예전에 고구려와 일본에 왕족을 볼모로 보냈던 경험이 참조가 되었겠지만, 호족의 자제도 아니고 향리 정도를 경주에 잡아두는 정도로는 중앙집권화에 별로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렇듯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서도 중국의 한 지방정권이라는 취약성을 벗어 버리지 못했다. 그 대외적인 약점은 대내적으로도 이어져 경주 정권은 형식적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어 있는 한반도 내에서도 강력한 중앙집권력을 지니지 못하며, 이는 곧 각지에서 호족들이 사실상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통일신라시대 내내 권력의 응집력이 미약했던 현상은 그 때문이며, 이는 결국 말기에 가서 호족들이 흥기하면서 다시금 분열시대를 낳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큰 통일과 작은 통일

지방정권의 한계

남북국시대?

중국화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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