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의 분화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변증법의 법칙만이 아니다. 사대부(士大夫) 세력도 점점 수가 늘면서 더 이상 동질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더욱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공신들이 대거 인플레되는 탓에 이제 번듯한 사대부라면 누구나 공신 한 명쯤은 조상으로 두고 있을 정도다(공신의 부와 지위는 세습이 허용된다는 점을 상기하라), 특히 예종(睿宗)에 이어 성종에게도 딸을 시집 보내 2대 연속해서 임금의 장인이 된 한명회(韓明澮)의 기세는 자못 하늘을 찌를 듯하다【예종의 비는 장순왕후이고 성종의 비는 공혜왕후인데, 둘 다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그런데 예종과 성종은 삼촌-조카 사이니까 성종은 숙모의 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 격이다. 더구나 두 여자는 모두 후궁이 아니라 국왕의 정비(正妃)다. 유교적 예법을 고려한다면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결혼 관계지만, 왕실에서도 그런 관계가 용인될 정도였다면 조선 초기의 유학 이념이 어느 정도 실천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은 처음부터 유교왕국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출발한 왕조였으나 초기에는 유교적 예법이 그리 엄격하게 적용되지 못했다. 즉 유교 이념은 아직까지 정치 분야에서만 적용되었을뿐 실생활의 영역에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유교적 예법이 생활화되는 것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조선 중기부터의 일이다(따라서 조선 초기를 다룬 TV 사극에서 엄격한 유교적 예법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게다가 그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1등 공신이 된 이후 세조가 즉위했을 때, 남이의 사건이 진압되었을 때, 성종이 즉위했을 때도 공신에 올라 1등 공신만 네 차례나 차지한 베테랑 공신이다. 또한 비록 그만은 못해도 정창손, 홍윤성, 신숙주, 노사신 등 ‘공신 명예의 전당’에 득시글거리는 인물들은 모두 세조 때부터 공신의 지위와 권력을 누려온 자들이다. 이들 ‘공신 1기생’들이 이른바 훈구파(勳舊派)를 이룬다.
사대부(士大夫) 중에 특권층이 생겨났으니 그에 대립하는 층도 자연히 생겨난다. 그들은 이른바 사림파(士林派)를 이룬다【역사에 나오는 용어들이 대개 그렇듯이 훈구파나 사림파도 당대에 쓰던 용어가 아니라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래도 훈구파는 실체가 분명하지만 사림파는 훈구파에 반대하는 사대부 정치 세력을 편의상 일컫는 말일 뿐 훈구파만큼 동질적인 세력은 아니다. 쉽게 말해 훈구파는 신분상으로 제도권의 관료 세력이고 정치적으로 왕당파 사대부이며, 사림파는 재야 세력으로서 사대부의 독자적인 정치를 꿈꾼 사대부(士大夫)라고 보면 되겠다】. 훈구대신들에게 도전했던 인물이 바로 남이였고 당시 남이가 대변하고 있었던 세력이 곧 사림파였다. 사실 성종이 즉위한 뒤 정희왕후가 섭정을 맡았던 기간 동안 실제로 국정에 관한 전권을 움켜쥐고 국왕의 임무를 대신 수행한 것은 섭정이 아니라 훈구대신들이었다. 따라서 성종이 토지 문제가 해결된 것에 대해 정작으로 고마워할 대상도 실은 할머니보다 그들이었다. 실제로 관수관급제의 내용을 봐도 기득권층인 훈구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임은 금세 알 수 있다.
사실 세조가 죽기 직전에, 그러니까 정권이 바뀔 무렵에 훈구파는 새 정권하에서도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한 가지 장치를 해둔 바 있다. 1467년 그들은 훈구파의 원로 대신들이 원상(院相)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승정원 업무를 관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승정원이라면 왕의 비서실이니까 이곳을 장악한다면 사실상 국정 전반을 총지휘할 수 있다. 당시 세조는 아들 예종(睿宗)이 부실하다고 여긴 탓에 그 조치를 허락했지만, 그 때문에 사대부(士大夫) 세상이 앞당겨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원상은 성종이 친정을 펼치면서 폐지되지만 이미 훈구파는 얻을 걸 다 얻었다.
‘이대로 영원히!’라는 모토를 실현하기 위한 훈구파의 노력은 눈물 겨울 정도다. 우선 그들은 왕실과 각종 혼맥을 맺어 제도외적인 면에서도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는다. 또한 중앙정부만 손에 넣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지방에까지 손을 뻗친다. 사실 중앙에서는 권력을 얻을 뿐이고 정작 권력에서 나오는 단물‘은 지방을 장악해야만 빨아먹을 수 있다. 그래서 훈구파의 촉각은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에 집중된다【경재소란 지방 관청의 한양 연락소인데, 쉽게 말하면 한양에 파견된 각 지방의 유력자가 머물고 있는 거처다. 또한 유향소란 지방 유지들이 모인 곳으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성격과 기능이 그러한 만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경재소와 유향소는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 즉 경재소는 지방과 한양의 유력자 간에 뇌물을 주고받는 장소로 전락할 여지가 충분하고, 유향소는 지방 유지들이 수령을 손에 넣고 주무르는 곳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중앙권력의 자신감과 사회의 기강이 결정할 문제인데, 당시의 분위기상 어느 쪽일지는 짐작이 간다(중앙집권을 도모한 태종은 유향소를 독으로 보았기에 철폐했고 세종은 약으로 쓸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다시 부활시켰다)】. 그 결과 지방은 일부 지역 유지들과 중앙의 훈구대신들이 마음껏 수탈하는 사냥터가 되어 버린다. 지방의 세력자들은 모자라는 정치적 권력을 보충했고 중앙의 고관들은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니 서로 분업의 정신에 투철했다고 할까?
이쯤 되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게 고려 말의 상황이다. 중기 이후 토지제도가 무너지고 무신정권과 몽골 지배기에 중앙정치가 문란해지는 틈을 타서 온갖 탈법과 불법으로 재산을 증식하고 왕실과 혼맥을 구축해서 권력을 유지하던 자들이 바로 권문세족 아닌가? 훈구파는 바로 그들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려 말에 권문세족에게 대항해서 신진사대부가 등장했듯이 훈구파에 대항해서 사림파가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림파는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처럼 성리학적 이념으로 돌아가자고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도덕 정치를 구현하자는, 겉으로 드러난 모토의 배후에는 권력에서 소외된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
훈구파가 모든 것을 장악한 상황에서도 사림파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성종이 친정에 나선 덕분이다. 훈구파의 권력 독점을 심각하게 여긴(아울러 왕권에 대한 그들의 간섭을 피곤하게 여긴) 성종은 스무 살의 젊은이답지 않게 비제도권의 사림파를 훈구파의 대항 세력으로 키워 균형을 맞추는 노회한 전략을 구사한다. 마침 그의 치세에는 정변이라 할 만한 게 없어 공신 세력이 큰 힘을 쓰지 못했으므로 그 전략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누구나 말로는 부정할 수 없는 이념을 무기로 내건 덕분일까? 훈구파의 상대적인 약세를 틈타 사림파는 별다른 정치적 공로도 없이 손쉽게 훈구파의 맞수로 떠올랐다. 훈구파가 지방 통제의 전진기지로 유향소를 활용하자 사림파는 그에 맞서 사마소(司馬所)를 장악하고 지방행정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고자 한다. 사마소란 사마시(司馬試), 즉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한 지방의 젊은 유학자들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기구인데, 생원과 진사라면 과거에는 합격했으나 자리가 없어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자들이었으니 현실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이루지 못한 관리의 꿈을 지방 수령의 행정에 간섭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상받으려 한다. 하기야 그들은 과거에 합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역이 면제되었고 항촌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으니 달리 할 일도 없었다.(어떤 의미에서 이는 왕과 사대부의 이중 권력이 지배하는 중앙행정의 원리가 지방행정에까지 관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현실의 권력체와 상징의 권력체가 분리되는 특성은 두고두고 조선사회의 질곡으로 작용한다. 오늘날까지도!)
▲ 재야의 힘 ‘제도권’의 사대부들이 사대부(士大夫)의 본을 버리고 왕당파로 변질(?)되는 것에 재야의 사대부들은 분노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일단 지방에서 숨죽이며 후학들을 길러낸다. 사진은 성종 대에 지어진 강릉향교인데, 이런 향교들이 든든한 포석으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사대부들의 집권이 가능했다.
중앙에서는 성종의 간접 지원으로, 또 지방에서는 젊은 유림의 활약으로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여기에도 훈구파의 한명회(韓明澮)에 못지 않은 보스가 등장하게 된다. 한명회가 지위와 권력과 혼맥으로 보스의 자리를 꿰어찼다면 사림파의 보스는 재야 세력답게 학문과 실력으로 당당히 주변 인물들에게서 보스라는 인정을 받는다. 그는 바로 김종직(金宗直, 1431~92)이라는 학자다. 원래 그의 가문은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거두였던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 1353~1419)를 본받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으니 성리학적 이념에 대해서는 당연히 순도 높은 ‘진골’이다【여기서 눈여겨볼 게 하나 있다. 흔히 고려 말 고려 왕조에 절개를 지켰던 세 충신을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이색(李穡), 정몽주, 길재가 그들인데 그들의 호가 각각 목은(牧隱), 포은(圃隱), 야은(冶隱)이었던 데서 나온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종직의 가문에서 존경한 인물들 중에 삼은 가운데 유독 이색(李穡)만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이색만이 경상도 본관이 아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정몽주(鄭夢周)의 본관은 영일이고 길재의 본관은 해평으로 둘 다 경상도지만(해평은 경북 선산에 속한다), 이색(李穡)은 한산 이씨니까 충청도 사람이다. 그런데 김종직은 바로 선산 김씨다. 김종직이 자타가 공인하는 영남학파의 태두로 군림한 데는 처음부터 그런 지방색이 강하게 작용한 건 아닐까?】. 바야흐로 ‘사림의 봄’ 을 맞아 그는 본격적인 대여 비판 의 선두에 섰으며, 아울러 영향력 있는 제자들을 길러내서 사림파를 훈구파에 대적할 수 있는 수준으로 키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대부(士大夫)는 크게 두 파로 분화되었다. 엄밀히 말해 훈구파가 사대부의 부분집합이라면 사림파는 그 여집합에 해당하므로 대립 세력이라고 부르기는 적절치 않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 비교적 동질적이었던 사대부 세력은 이제 두 줄기로 나뉘었다. 그들은 표면상 서로 대립하고 있지만 공동의 이해관계도 있다. 그것은 바로 왕권에 맞서고 있다는 점이다(비록 훈구파는 왕당파 사대부이지만 왕을 단지 자기들 권력의 상징적 원천으로 삼고자 하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사대부의 분화는 사대부 세력의 약화를 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전반적으로 보면 크게 강화되었음을 뜻한다. 언제라도 왕권이 약해지거나 왕권에 허점이 보이면 그들은 조선이라는 ‘왕국’을 ‘사대부 국가’로 바꾸려 할 것이다. 그 순간은 그들의 예상보다 더 이르게 다가온다.
▲ 정치 지망생들의 명단 조선 사회 특유의 학자-관료 체제에서 학자‘란 순수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인이거나 정치 지망생이었다. 지방 유림 세력의 거점인 유향소도 일종의 재야 정치 집단이었다. 사진은 향촌을 지배하는 유향소 구성원들의 명단인 향안(鄕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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