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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3. 공서적과 원헌의 행동방식 차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3. 공서적과 원헌의 행동방식 차이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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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공서적과 원헌의 행동방식 차이

 

 

6-3A. 자화(子華: 공서화의 자)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였다. 염자(冉子)가 자화의 홀로 남을 어미를 위하여 곡식을 청하였다.
6-3A. 子華使於齊, 冉子爲其母請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한 말이나 주려무나.”
子曰: “與之釜.”
 
더 많이 청하자, 말씀하시었다: “그럼 한 가마 정도 주렴.” 그런데 염자는 곡식 다섯 섬을 주고 말았다.
請益. : “與之庾.” 冉子與之粟五秉.
 
공자께서 내심 불쾌히 여겨 말씀하시었다: “(: 공서화의 이름)이 제나라로 가는데, 살찐 말수레를 타고 가볍고 호사한 가죽옷을 입고 가는구나. 나는 들었지. 군자는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어도 부유한 사람을 보태주는 짓을 하지 않는다고.”
子曰: “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 吾聞之也, 君子周急不繼富.”

 

여기 자화(子華)는 성이 공서(公西), ()이 적(), 자화는 그의 자() 이다. 공자보다 42세 연하인 비교적 어린 그룹에 속하는 제자이다. 외교적 수완이나 전례에 밝은 인물로서 이미 공야장(公冶長)7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이 장에 관한 한, 고주ㆍ신주를 막론하고 별로 신통한 해석이 없다. 다산소라이(荻生徂徠)도 근본적으로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는 데 모두 실패하고 있다. 우선 주자가 자화사어제(子華使於齊)’를 공자의 심부름을 떠난 사건으로 못박아 해석하는 바람에 그 이후의 모든 해석이 희의 권위에 눌려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해보자! 그토록 지겨웁게 14년 방랑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온 공자가 무엇 때문에 제나라에 그 많은 비용을 물어가면서 심부름을 보내야 할 일이 있겠는가? 공자는 제나라에 사신을 보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시ㆍ서ㆍ예ㆍ악을 편찬하고 제자를 지도하기에만도 바쁜 공자가, 오랜만에 정치를 떠나 근원적으로 사문의 전통을 수립하기에 바쁜 공자가, 근원적으로 인류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었던 공자가, 도대체 왜 어린 제자를 제나라에 심부름 보내느라고 그 에미까지 걱정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실제로 한번 출사(出使)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공서와 자신의 비용을 엄마를 핑계대어 청구한 것이라는 둥, 소라이는 무근거한 추측을 해댄다. 다산조차도 영리한 사람인데 이 사건 이 공자가 대사구 시절에 일어난 일이라는 둥, 초점이 안 맞는 이야기를 한다. 다산 말대로, 공자가 대사구였고 염구가 공자의 가신으로서 공자의 재물과 곡식을 관리하던 시절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면, 공서화는 불과 나이 열 살밖에 되지 않았다. 열 살 먹은 어린아이를 제나라로 사신 보낸다는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도대체 수리에 밝은 다산의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해결된 것일까? 이 모두가 실제 정황을 면밀히 검토해보지 않고 주희의 별 생각 없는 단정 때문에 해석적 사고의 틀이 묶여 오류의 쳇바퀴만 맴돌고 있는 결과라 할 것이다.

 

공서화는 공자 말년에 학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가 노나 라에서 공자의 문하에 들어온 것은 공자의 귀로 직전의 사건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공자에게는 귀로 후의 만년제자였다. 독자들은 공야장(公冶長)21, 공자가 진()나라에서 발한 귀여(歸與)’의 탄성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기 5년 전, BC 489년경의 일로 추정된다. 그때 공자는 공지어(公之魚)의 방해공작으로 귀로의 꿈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신 재주 []가 많고 탁월한 실무관료형 인간인 염구(冉求)염유(冉有)라고도 부른다를 계강자(季康子)의 가신으로 보낸다. 그리고 결국 공자는 염구의 의리로 인하여 5년 후에나 귀로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염구가 바로 본 장의 실제 주 인공인 염자(冉子)염구의 문인들이 그를 높여 부른 말이다. 실제로 이 장은 염구학파에서 채록된 기록일 것이다이다. 염자 즉 염구는 이 장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계강자의 총재(冢宰)였다. 다산 말대로, 염구는 공자의 재속(財粟)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계강자의 재속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강자는 당시 명실공히 노나라의 집정(執政)으로서 최고의 실권자였다. 공서화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것은 공자가 아니라 계강자였다. 공서화는 공자의 사적 심부름을 간 것이 아니라 노나라의 사신으로서 제나라에 간 것이다. 공자는 귀로 후에 일체 노나라의 실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누구를 보내고 말고, 누구에게 돈을 주고 말고는 공자의 소관이 아니었다. 따라서 공서화의 비용은 어차피 공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씨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 비용지출의 실권을 쥐고있는 사람은 공자가 아니라 염구였다. 소라이(荻生徂徠)의 말대로 공서화 자신의 비용을 높이기 위해 엄마를 끌어들였는지는, 전혀 논의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하여튼 공서화는 염구에게 자기가 없는 동안에 엄마가 쓸 비용을 청구한 것이다. 공서화든 염구든 다 공자의 제자이고, 공자는 당시 노나라의 국부 (國父)로서 추앙을 받는 정신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염구가 공서화 비용문제를 공자에게 상의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 부(), (), ()이라는 도량형 단위에 관한 논의는 부질없는 짓이다소라이 설, 釜爲五升七合五勺弱, 庾爲一斗四升三合七勺微强, 五秉爲七石一斗八升五合九勺有奇, 소라이 당대의 일본도량형 기준. 어차피 도량형의 정밀한 재구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공자가 ‘1(한 말 정도)나 주어라고 한 것은, 공서화가 공무로 제나라를 가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도리를 하는 것이고 그의 어미에게 따로 지급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안 주어도 되는데 형식상 한 말 정도만 주면 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더구나 공서화는 노나라 곡부사람이라서 공자는 그 집안사정을 잘 알았을 것이다. 공서화는 결코 곤궁한 집의 아들이 아니었다. 꽤 부유한 집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무관료인 염유(염구, 염자)의 입장에서는 이왕 줄 것이면 조금 넉넉히 주는 것이 여러모로 뒤끝이 깨끗한 사정이 있었던 모 양이다. 어차피 이 돈은 염구 돈도 아니었다. 공무지출인 바에는 명분이 있는 지출에는 정확히 쓰자는 것이 실무관료로서의 염구의 입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의 입장에서는 누구 돈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국비이며, 나라의 공무 비용을 줄이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 생각했다. 물론 공자에게는 짠 노인의 심정이 있었겠지만, 그의 보수성은 너무도 정당한 도덕감에서 우러나오는 보수성이었다. 염유가 졸라대자, ‘그럼 한 가마나 주려무나라고 말한다. 공자로서는 최대의 배려였다. 그런데 염유는 덜커덩 그 수십 배를 지출하고 만다. 지자체의원들이나 국회의원들이 해외여행을 가는데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는 것도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공자와 같은 생각이 아니 들 수 없다.

 

그러나 공자는 염유의 결정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 있는 하등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질 않았다. 만약 공자의 결정권 내에 있었던 일이라면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공서화네는 부자였다. 후에 공자의 귀에 들려온다. 공서화는 살찐 토실토실한 말이 끄는 고급수레를 타고승비마(乘肥馬)라 했지만 당시는 말을 직접 타는 법이 없었다. 모두 수레였다. 그러니까 고급 승용차를 탔다는 이야기가 된다, 화사하고 가벼운 쎄무가죽의 고급신사복을 차려입고 제나라에 나들이를 했다. 공자는 혼자 투덜거렸을 것이다: “원 세상에 이런 법도 다 있나! 풍요로운 부자에게 돈을 더 보태주다니! 공공비용이라지만 그 돈을 아껴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의 환난을 도와줄 것이지!” 공자의 인의 사상이란 이렇게 상식적이고, 이렇게 일상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혼자 투덜거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진실은 만고의 새벽종이 되어 우리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使)’()’가 모두 거성이다. 자화(子華)’는 공서적(公西赤, 꽁시 츠으, Gong-xi Chi)이다. ‘(使)’는 공자를 위하여 심부름가는 것이다. ‘()’6() 4승이고, ‘()’16()이며, ‘()’16()이다.

使, , 並去聲. 子華, 公西赤也. 使, 爲孔子使也. , 六斗四升. , 十六斗. , 十六斛.

 

 

주석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주희의 도량형이 부정확하다고 지적하나 주 희는 전통적 주석을 따른 것일 뿐이다. 부와 유는 같은 두()를 매개로 하고 있어 이해가 쉽다. 5병이면 80()이 되는데, 이 곡과 두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의례(儀禮)』 「빙례(聘禮)의 기()‘10두 가 1곡이고, 16두가 1수이고, 10수가 1병이다[十斗曰斛, 十六斗曰藪, 十藪日秉]’라고 되어있다. 1곡이 10두임을 알 수 있다. 1병은 160, 5병은 800두이다. 공자가 애초에 생각한 64승이 800두로 늘어났으니 참으로 막대한 분량의 증가이다. 나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리말의 상식적 감각에 따라 번역하였다.

 

여기 주희가 (使), 위공자사야(爲孔子使也)’라고 단정한 주석 때문에 다산, 소라이(荻生徂徠) 등 모든 주석이 빠그러지게 되었다. 황소(皇疏)만 해도 노군(魯君)의 공적 사신인지 공자의 사적 심부름인지 잘 모르겠다고 유보상태로 남겨두었던 것이다[赤有容儀, 故爲使往齊國也. 但不知時爲魯君之使, 爲孔子之使耳]. 주희는 본 장의 전체적 상황을 잘못 이해하였다. 더 이상 논의를 요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속유(俗儒)들이 주희의 권위에 눌려 공무로 가는 使로 읽고, 사무로 가는 使로 읽는다는 터무니없는 낭설을 펴서 서당에 오는 학생들에게 발음을 강요하고 있으나, 전혀 음성학적 근거(phonological foundation)가 없다. 비루(鄙陋)한 유생들의 단견일 뿐이다.

 

 

()’는 거성이다. 승비마(乘肥馬)’ ‘의경구(衣輕裘)’는 그 부유함을 말한 것이다. ‘()’은 궁색하고 절박한 것이다. ‘()’라는 것은 부족함을 보태는 것이요, ‘()’라는 것은 남아돌아가는데도 계속 퍼주는 것이다.

, 去聲. 乘肥馬, 衣輕裘, 言其富也. , 窮迫也. 周者, 補不足. 繼者, 續有餘.

 

 

우리나라 현금의 정치가 보부족(補不足)’의 정치경제가 아닌 속유여(續有餘)’의 정치경제라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속유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자들을 더 잘살게 해주어야 콩고물이 밑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이고[적하효과(滴下效果) 운운], 그것이 오히려 효율적인 경제성장의 법칙이라는 이야기인데, 이 모두가 생각이 모자라는 낭설일 뿐이다. 자고로 부는 더 큰 부를 지향할 뿐 분배를 고려하지 않는다. 돈의 생리를 제어할 수 있는 인간의 윤리를 부자에게서 기대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요즈음은 부자들의 시장은 국제화되어 있어 국내의 서민과 별 관련이 없다. 오로지 제도적으로 보부족(補不足)’을 통하여 속유여(續有餘)’의 결과를 이룩하는 것이 위정(爲政)의 정도(正道)이다. 공자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6-3B. 원사(原思)가 공자의 가재(家宰)가 되었다. 공자께서 그에게 곡식 900말의 봉록을 주려 하자, 그가 사양하였다.
6-3B. 原思爲之宰, 與之粟九百, .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양치 말라! 그것을 너의 이웃과 향당에 나누어주려무나.”
子曰: “! 以與爾鄰里鄕黨乎!”

 

원래 제3장은 서로 상관없는 두 개의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두 장으로 분장(分章)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이 두 파편을 연접시켜 놓은 편집자의 의도를 고려하여 주희가 한 장으로 묶은 것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희는 언어연출 감각이 있다. 이 두 파편을 한 장으로 묶으면 대비되는 두 파편이 상생효과를 발휘하여 공자의 째즈적 정신세계를 돋보이게 만든다. 째즈는 본시 불협화음을 불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불협은 불협이 아니라 왕성한 교섭이라 생각한다. 불협화음들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새로운 텐션의 화성을 만들 어가는 것이 째즈의 역사라 할 것이다.

 

여기 공자의 말은 외면적으로 보기에는 모순이요, 불협이다. 한 사람에게는 돈을 주지 말라고 투덜거리고, 한 사람에게는 많은 돈을 사양치 말라고 권고한다. 이 두 파편이 모두 인간이 살아가면서 봉착하게 되는, 재물의 사용방법에 관한 정도(正道)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고정된 사유를 거부한다. 고정된 상황과 고정된 판단과 고정된 신념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속에 의로움이나 인()함의 주제는 면면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 원사(原思)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 청렴, 청빈의 평생을 고결하게 산 인물로서 기억되는 훌륭한 인물이다. 논어』 「헌문편의 헌()이 바로 원헌, 즉 원사를 가리킨다. 성이 원()이요, 이름이 헌()이다. 자를 자사(子思)라 했다. 그래서 원사(原思)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장은 원헌을 자()로 칭하고 있는 것이다. 원사를 노나라사람(정현), 송나라사람(가어), 제나라사람으로 보는 제설이 있으나, 내가 생각에 그는 노나라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또 공자보다 36세 연하라고 공자가어가 기록하고 있으나 36세는 26세의 오기(誤記)일 것이다. 그는 분명 자공보다 나이가 위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사는 분명 공자가 대사구였던 시절을 배경으로 해야만 그 전후맥락이 맞아 떨어진다.

 

공자가 대사구가 된 때를 공자 52세로 잡는다면 36세 연하라고 한다면 16세의 나이밖에는 되지 않는다. 26세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32는 한자에 있어서는 작대기 하나 더 긋고 덜 긋고의 차이인지라 오기가 많을 수 있다. 헌문1에서도 원헌이 공자에게 수치의 문제를 물었다는 것이 그의 청빈한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기(史記)』 「열전에 공자 사후의 일로, 원헌과 자공이 만난 이벤트가 기록되어 있는데 매우 감동적이다. 원사의 인품을 다 말해주는 아름다운 고사다. 공자가어에는 원사가 공자가 세상을 뜬 후 자신도 세상을 사직하고 고요히 은둔하면서 위()나라에 거하였다고 쓰여 있는데[孔子卒後, 原憲退隱, 居于衛] 열전의 기록과 잘 맞아떨어진다.

 

 

공자가 세상을 뜬 후, 원헌은 사람 없는 수풀이 우거진 못가에 은거하며 살았다. 자공은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어느 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그 뒤를 따라 호위하는 기병들과 함께 명아주 갈대 수풀의 늪을 헤치고 궁색한 초가집 흙담 문을 들어섰다. 그리고 지나가다 실례를 했노라고 원헌을 찾았다. 원헌은 다 낡아빠진 옷과 허름한 관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자공을 맞이하였다. 자공이 오랜만에 만나보니 너무 누추하고 행색이 초라하다 생각되었다. 그래서 말했다: “부자께서 어찌 이렇게 병이 드셨나이까?” 원헌이 대답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재물이 없이 사는 사람을 가난하다 일컫고, 도를 배워 그 도를 실천하지 않는 자를 병들었다 일컫습니다. 저 헌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가난하기는 해도 병이 들어본 적이 없나이다.” 자공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물러났다. 자공은 종신토록 원헌을 만났을 때의 말실수를 부끄럽게 여기었 다장자(莊子)』 「양왕9편에도 이 고사가 실려있다. 사마천은 이 고사를 가미하여 열전에 편입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孔子卒, 原憲途亡在草澤中. 子貢相衛, 而結駟連騎, 排藜藿入窮閻, 過謝原憲. 憲攝敝衣冠見子貢. 子貢恥之, : “夫子豈病乎?” 原憲曰: “吾聞之, 無財者謂之貧, 學道而不能行者謂之病. 若憲, 貧也, 非病也.” 子貢慙, 不懌而去, 終身恥其言之過也.

 

 

장면 설정도 리얼하고 오간 대화의 격조나 제자들의 심정도 묘사가 잘되어 있다. 공자의 사후에도, 공자의 인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이있는 영향을 주었나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원헌의 말도 아름답고, 자기의 말실수를 종신토록 부끄럽게 여기었다는 자공의 태도 또한 깊이가 있다. 원헌은 그토록 깊이가 있는 인물이었다.

 

고주는 다음과 같다.

 

포씨는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원사는 공자의 제자 원헌이다. ()는 자이다. 공자가 노나라 사구가 되었을 때, 원헌을 공자의 집 읍재로 삼았다[苞氏曰: “弟子原憲也. , 字也. 孔子爲魯司寇, 以原憲爲家邑宰也.”]”

 

 

원사(原思)’는 공자의 제자이며 명이 헌()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가 되었을 때에 원사를 가재(家宰)로 삼았다가재나 읍재나 다 통용되는 말이나 읍재는 지역성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은 가재의 봉록이다. ‘구백(九百)’은 그 양단위를 밝히지 않았으니, 실제로 얼마큼인지 알 수가 없다.

原思, 孔子弟子, 名憲. 孔子爲魯司寇時, 以思爲宰. , 宰之祿也. 九百不言其量, 不可考.

 

 

당대의 봉록제도는 상세히 알 수가 없다. 월급을 받았는지, 연봉을 받 았는지, 땅의 소작료를 받았는지 디테일한 것은 아무도 잘 모른다. ‘구백은 양사(量詞)가 안 붙어 실제로 그 규모를 알 수가 없다고 하는 주희의 주석은 매우 정직하고 명료하다. 나는 공안국의 고주가 구백은 구백 말이다[구백(九百). 구백두야(九百斗也)]’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그냥 ‘9백 말이라고 번역하였다.

 

 

()’는 금지의 말이다. 5가를 린()이라 하고, 25가를 리()라 하고, 12,500가를 향()이라 하고, 500가를 당()이라 한다. 떳떳한 봉록은 마땅히 사양치 말 것을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남는다면 스스로 그것을 나누어 빈핍한 이웃을 구제하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대저 린ㆍ리ㆍ향ㆍ당에서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의로운 습속이 있다.

, 禁止辭. 五家爲鄰, 二十五家爲里, 萬二千五百家爲鄕, 五百家爲黨. 言常祿不當辭, 有餘自可推之以周貧乏, 蓋鄰黨有相周之義.

 

 

린ㆍ리ㆍ향ㆍ당에 관한 주자의 주는 정현의 주를 그대로 베낀 것인데, 조금 그 숫자가 불안한 느낌이 있다. 고주라 해서 그 단위가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주례』 「대사도(大司徒)에는 ‘5()가 비()가 되고, 5비가 려()가 되고, 4려가 족()이 되고, 5족이 당()이 되고, 5당이 주()가 되고, 5주가 향()이 된다라고 되어있다. 황소(皇疏)는 린ㆍ리를 백리지외(百里之外)로 보고, 향ㆍ당을 백리지내(百里之內)로 보았다. 그렇게 되면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가까운 백 리 안의 지역이 향당이 되고, 그 밖의 지역이 린리가 된다. 개념이 다르다.

 

 

정이천이 말하였다: “부자께서 자화를 심부름 보낸 것과 자화가 부자를 위해 심부름 간 것은 너무도 마땅한 의()인데, 염유가 자화를 위해 곡식을 달라고 청하니, 성인은 본시 관용한 분이라서 대놓고 거절은 못하시는 고로 조금만 주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실제로는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표시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더 달라고 조르니 또한 조금만 더 주어라 하신 것은, 실제로는 더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표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멍청한 염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와장창 주고 말았으니 이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이를 그르다고 하신 것이다. 만일 공서적이 지극히 궁핍하였다면 부자께서는 반드시 그를 구휼해주셨을 것이요, 염구가 요청하는 것도 기다리지 않 으셨을 것이다. ‘원사(原思)’는 공자의 가재가 되었으니 떳떳한 봉록이 있다. 그런데 청빈함을 원칙으로 삼고 살아가는 원사는 그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어 사양하였다. 그러므로 또 이웃집과 마을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가르쳐 주셨으니 이 역시 의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程子曰: “夫子之使子華, 子華之爲夫子使, 義也. 而冉子乃爲之請, 聖人寬容, 不欲直拒人. 故與之少, 所以示不當與也. 請益而與之亦少, 所以示不當益也. 求未達而自與之多, 則己過矣, 故夫子非之. 蓋赤苟至乏, 則夫子必自周之, 不待請矣. 原思爲宰, 則有常祿. 思辭其多, 故又敎以分諸鄰里之貧者, 蓋亦莫非義也.”

 

장횡거가 말하였다: “이 두 가지에서 우리는 성인의 재물 쓰심을 볼 수 있다.”

張子曰: “於斯二者, 可見聖人之用財矣.”

 

 

정당한 돈은 벌수록 좋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이다. 유교는 결코 청빈을 조장하지 않는다. 웨버의 유교비판은 틀린 것이다. 공자의 째즈 연주는 듣지 못하고 고정 악보 한 곡만을 들은 것이다.

 

본문의 마지막 구문은 무()를 붙여서 읽기도 한다: ‘왜 그것으로 너의 린리향당에 나누어주지 않니[毋以與爾鄰里鄕黨乎]?’ ‘()’를 거절하다는 동사로 보아 무()에 붙여 해석하는 청유의 독법도 있다: ‘거절하지 말라. 너의 린리향당에 주어라[毋以, 與爾鄰里鄕黨乎].”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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