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
‘사건’, ‘마주침’ 그리고 ‘기호’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낯선 것입니다. 이런 낯섦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이런 낯섦의 의미를 찾는 것을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가 ‘기호의 해석’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기호를 해석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너무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홍조 띤 얼굴, 화장실에서의 콧노래, 남편에게 보내는 미소 등의 기호는 남편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편이 이런 기호를 해석하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어쩔 수 없는 의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각’이란 것은 낯섦과 불편함을 친숙함과 편안함으로 바꾸려는 자기 배려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 즉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아마도 ‘죽음’이란 사건일 것입니다. 이제 ‘죽음’이란 테마를 놓고, 낯섦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심화시켜보도록 하죠.
과학적으로 보면 ‘죽음’은 어떤 생명체의 생물학적인 기능이 정지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지평에서 죽음은 그렇게 중성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죠. 이 경우 우리는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내 친구도 이제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게 되었어”라고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내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나서 이제 나의 생물학적 기능은 정지될 거야”라고 무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스쳐 지나가는 무덤덤한 죽음도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 해상에서 유람선이 좌초하여 수백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그런 것입니다. 안됐다고 연민을 갖지만, 우리는 돌아서는 그 순간 그들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아니고,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갖는 느낌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가 되는 죽음이 우리에게 진정 낯선 것인가 아니면 친숙한 것인가라는 문제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죽음은 크게 세 종류로 우리에게 경험됩니다. 첫째는 ‘1인칭적 죽음’으로서, 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2인칭적 죽음’으로서, 너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3인칭적 죽음’으로서, 익명적인 그들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집니까? 즉 어느 죽음이 가장 여러분에게 고통을 줍니까?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뉴스에서 접하는 죽음은 우리에게 별로 큰 고통을 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뉴스를 보고 슬픔에 잠기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대부분 “아! 많이 죽었구나. 안됐구나”라고 반응할 뿐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가 ‘3인칭적 죽음’, 즉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그들의 죽음이죠.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개만 남은 셈이군요.
1인칭적 죽음 | 나의 죽음 |
2인칭적 죽음 | 너의 죽음 |
3인칭적 죽음 | 익명적인 그들의 죽음 |
‘1인칭적 죽음’과 ‘2인칭적 죽음’ 중 어느 죽음이 우리를 더 고통에 빠뜨릴까요? 서양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270)【에피쿠로스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그리스가 멸망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현실의 무질서와 허무를 경험하면서 그는 진리, 자연,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그는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BC 306년에 그가 아테네 북서쪽에 정원을 구입하여 자신의 학파이자 생활공동체였던 에피쿠로스학파를 창설하였던 것은 중요하다고 하겠다】는 ‘나의 죽음’, 즉 ‘1인칭적 죽음’은 우리에게 전혀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놀라운 주장을 폅니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을 때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죽게 된다는 예상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헛소리를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 고통스럽지 않은 데도 죽을 것을 예상해서 미리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헛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Menoeceus)」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는 백번 옳은 말입니다. 내가 죽어서 생물학적 기능이 정지된다면, 나는 내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체를 때리고 불에 태워도 시체는 아파하거나 뜨거워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아파하거나 뜨거워한다면, 그 시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해야겠죠. 그래서 예전 야만적인 시대에는 사형수를 죽일 때도 바로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죽이면 고통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도 이 때문에 화형이라는 처형 제도를 고안하게 된 것입니다. 화형 제도는 사형수에게 아주 느리게 살이 타는 고통을 안겨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동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능지처참(陵遲處斬)이라는 처형 제도를 들어보았지요? 이것은 사형수의 사지, 즉 두 팔과 두 다리를 소나 말에 묶어서 서서히 찢고 난 후 나중에 목을 치는 잔혹한 형벌입니다. 여기서 능지(陵遲)라는 말은 ‘언덕이 천천히 깎여서 평탄해진다’는 뜻이니까, 결국 쉽게 죽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척 강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는 매우 훌륭했지만, 그가 아직 몰랐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1인칭적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2인칭적 죽음’이 남아 있으니까요. ‘2인칭적 죽음’이란 우리가 ‘당신’이나 ‘너’ 혹은 ‘자기’라고 부르며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3인칭적 죽음’과는 달리 ‘2인칭적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혹한 고통과 슬픔을 안겨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친숙함이 사라지고 낯섦이 도래하는 가장 강력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우리는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끼고 때로 기절을 하기도 합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심지어 기절을 하기도 하는 이유는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생각해보아도, 이 고통스런 사건의 의미를 정당하게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남들은 모두 무사한데 너만 죽어야 해?’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을 거라면,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사랑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죽음의 의미를 찾다가 과열되어 지쳐버립니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기절이라는 무감각한 상태,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상태, 넋이 빠진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게 되는 가장 낯선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과 마주치면 우리는 고인의 삶 전체가 하나의 불가사의한 ‘기호’로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강가에 같이 앉아 나의 머리를 어루만졌던 것’, ‘내게 보르헤스(J. L. Borges, 1899~1986)의 소설을 건네주었던 것’, ‘나의 키스를 거부했던 것’, ‘아무 말 없이 내 앞에서 울었던 것’, ‘보라색 옷을 자주 입었던 것’, 이런 모든 기호가 이제 고인의 삶과 더불어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제 고인이 된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가에 앉으면, 그냥 무심결에 지나쳤던 모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려는 듯 새록새록 뇌리를 스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이런 생각은 너무나 때늦게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이라는 완전히 낯선 사건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말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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