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권력에 눈 먼 이들에게
다시 서두의 논의로 돌아가면, 그에게 있어 이용과 후생은 정덕을 위한 교량이다. 정덕(正德)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건 삶의 지혜이다. 이것이 뒷받침되지 않는 부와 편리함이란 무의미하다. 그런 점에서 연암이 추구한 문명론을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문명론은 물질과 부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근대적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한다. 따라서 이용후생학자로서 연암을 다룰 때, 반드시 그가 ‘삶의 지혜’를 설파하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장대기(將臺記)」와 「황금대기(黃金臺記)」가 좋은 텍스트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이 얼마나 큰지 모를 것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不見萬里長城 不識中國之大 不見山海關 不識中國之制度 不見關外將臺 不識將帥之威尊矣].” 「장대기(將臺記)」의 서두이다. 장대가 얼마나 높은 탑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암은 일행들과 꼭대기에 올랐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장성은 북으로 내달리고 창해는 남으로 흐르고, 동쪽으론 큰 벌판이 펼쳐 있으며 서쪽으로는 산해관 안이 내려다 보였다. 오, 이 대(臺)만큼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도 다시 없으리라[長城北走 滄溟南盈 東臨大野 西瞰關裏 周覽之雄 無如此臺]”. 그러나 막상 내려오려하니 문득 사람들이 ‘고소공포증’에 기가 질린다. “벽돌 쌓은 층계가 높고 가팔라 내려다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다. 하인들이 부축하려고 해도 몸을 돌릴 곳조차 없어 몹시 허둥지둥하였다[甎級岌嶪 俯視莫不戰掉 下隷扶擁 無回旋之地 勢甚良貝].” 연암은 “서쪽 층계로 먼저 간신히 내려와서 대 위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니, 모두 벌벌 떨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余從西級下立於地 仰視臺上諸人 皆兢兢莫知所爲].”
올라갈 땐 멀쩡하다 갑자기 왜? 연암의 설명은 이렇다. “올라갈 때엔 앞만 보고 층계 하나하나를 밟고 오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걸 몰랐는데, 내려오려고 눈을 들어 아래를 굽어보니 현기증이 절로 일어난다. 그 허물은 다름 아닌 눈에 있는 것이다[蓋上臺時 拾級而登 故不知其危 欲還下 則一擧目而臨不測 所以生眩 其崇在目也].” 눈, 곧 시각이 분별심을 일으키고, 그 순간 두려움에 그달리게 된다. 그가 보기에 인생살이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벼슬살이도 이와 같아서, 위로 올라갈 때엔 한 계단 반 계단이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더러는 남의 등을 떠밀며 앞을 다투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높은 자리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땐 외롭고 위태로워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뒤로 물러서자니 천 길 낭떠러지라 더위잡고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 이는 오랜 세월 두루 미치는 이치다.
仕宦者 亦若是也 方其推遷也 一階半級 恐後於人 或擠排爭先 及致身崇高 懾心孤危 進無一步 退有千仞 望絶攀援 欲下不能 千古皆然
맞다! 이 심오한 인생철학은 시대를 가로질러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특히 부와 명성을 향해 질주하는 눈먼 현대인들에겐 더더욱.
‘황금대(黃金臺)’는 “조양문(朝陽門)을 나서 못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가면 두어 길 되는 허물어진 둔덕[出朝陽門 循壕而南 有數丈頹阜]”을 말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연나라 소왕이 여기에다 궁전을 지은 뒤, 축대 위에 천금을 쌓아놓고는 천하의 어진 선비들을 맞이하여 당시 최고의 강대국인 제나라에 맞서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燕昭王築宮 置千金于臺上 招延天下之士 以報强齊].” 연암은 이 유서깊은 장소에서 황금에 대한 인간의 탐욕, 그 참혹한 유래를 곰곰이 되짚어본다. 중간에 삽입된 세 도적 이야기는 일종의 ‘엽기드라마’다. 무덤 하나를 파서 금을 도적질했는데, 서로 욕심을 내다 모두 죽어버렸다. 사연인즉, 한 명이 독약이 든 술을 사왔는데 나머지 두 명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둘은 술을 먹다 죽었다는 것이다. “이 금은 반드시 길가에 굴러다니다가 또 다시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우연히 그 금을 얻은 자는 가만히 하늘에 감사를 드렸으리라. 그렇지만 이 금이 남의 무덤에서 훔친 물건인지, 독약을 먹은 자들의 유물인지, 또 이 금 때문에 몇 천 몇 백명이 독살되었는지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是金也必將宛轉于道左 而必將有人拾而得之也 其拾而得之者 亦必將默謝于天 而殊不識是金者 乃塚中之發而鴆毒之餘 而由前由後 又未知毒殺幾千百人].”
문득 이 대목에서 나는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를 묻히고 출현한다’는 맑스의 전언이 떠올랐다. 연암이 보기에도, 돈이란 원초적으로 피투성이를 한 유령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부에 대한 연암의 메시지는 이렇다.
원컨대, 천하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 하여 꼭 기뻐할 일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굴러올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며,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 오싹하며 뒤로 물러서야 할 터이다.
我願天下之人 有之不必喜 無之不必悲 無故而忽然至前 驚若雷霆 嚴若鬼神 行遇草蛇 未有不髮竦而卻立者也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복권이나 증권으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운을 부러워하기 바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결코 행복이 아니다. 가정파탄에 섹스와 마약, 거의 모두 이 코스를 밟아나간다. 그것은 바로 자본 자체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연암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느닷없이 돈이 굴러올 때는 뱀을 만난 듯이 조심하라. 가히 부귀를 달관한 자만이 설파할 수 있는 ‘잠언’이 아닌가.
▲ 천하제일관, 산해관
요동벌판이 끝나고 중원이 시작되는 곳. 험준한 산세가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토록 견고한 장성을 쌓았건만, 유목민 오랑캐의 준동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참, 역설적이다. 이 관을 보고 제국의 위엄에 압도당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수시로 여기를 넘어 중원의 지축을 뒤흔든 유목민의 위력에 탄복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는 점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