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1. 동양문명 최고의 메시지
子曰: “素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숨어있는 오묘한 세계만을 찾아다니고 괴이한 것을 실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후세에 잘 돋보여서 그에 대해 기술되는 바가 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素, 按『漢書』當作索, 蓋字之誤也. 소(素)는 『한서』를 살펴보면 마땅히 ‘색(索)’으로 쓰여 있으니, 대개 글자의 오류이다. 索隱行怪, 言深求隱僻之理, 而過爲詭異之行也. 然以其足以欺世而盜名, 故後世或有稱述之者. 색은행괴(索隱行怪)는 숨겨진 궁벽한 이치를 깊숙이 구하고 괴이한 행동을 지나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훔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후세에 혹 칭술되는 것이다. 此知之過而不擇乎善, 行之過而不用其中, 不當强而强者也, 聖人豈爲之哉! 그러나 이것은 앎이 지나쳐 선을 택하지 못하고 행동이 지나쳐 중용을 잃은 것이니 마땅히 강하지 않아야 할 것에 강한 것이다. 그러니 성인이 어찌 그것을 하랴? |
“소(素)는 색(索, 찾다)의 오기(誤記)”라고 주주(朱註)에 쓰여 있습니다. 대개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이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사람이죠. 그러나 공자는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이것은 중용(中庸)의 대전제입니다. 역사에 비록 휘날릴 일이라도 그것이 희한한 기괴한 행동이라면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중용(中庸)은 일상성이죠. 역사에 기발한 행동으로 기억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울리는 공자의 경종(警鐘)입니다. 그 다음 봅시다.
君子遵道而行, 半途而廢, 吾弗能已矣. 군자라는 사람이 도(道)를 따라 행하면서도 중도에 그만두는데,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 遵道而行則能擇乎善矣. 半塗而廢則力之不足也. 此其知雖足以及之而行有不逮, 當强而不强者也. 도를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선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도에 그만 둔다는 것은 힘이 부족한 것이니, 이것은 그 앎이 미치기엔 넉넉하나 행동이 미치지 못함이니, 마땅히 강해야 할 곳에 강하지 않은 것이다. 已, 止也. 聖人於此, 非勉焉而不敢廢, 蓋至誠無息, 自有所不能止也. 已는 그친다는 뜻이다. 성인은 이에 억지로 힘써 감히 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대개 지성무식(至誠無息)하여 그칠 수 없다는 말이다. |
도올 서원에서 결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항상 모든 일에 꾸준해야 된단 말이죠. 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 시절에 4년 동안 단 하루 한 시간을 빼먹지 않고 완벽한 개근을 했습니다. 개근상은 없었지만 나는 내 마음의 개근상을 졸업 때 얻었지요. 이런 게 도올서원의 정신이예요. 1장에서, 잠시라도 떠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했죠?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그리고 이 말과 관련되는 맥락이 『논어(論語)』 「옹야(雍也)」 ‘옹야왈 비불설자지도 력부족야 자왈 력부족자 중도이폐 금여획(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에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能之.” 군자는 중용(中庸)에 의거하여 세상에 은둔하여 알려지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니, 오직 성자(聖者)만이 이것에 능할 뿐이다. |
견(見)은 수동형이므로 불견지(不見知)는 ‘알려지지 않는다’의 의미입니다.
‘둔세불견지이불회(遯世不見知而不悔)’라고 했는데, 이것은 은자의 사상이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동양사상은 은자의 철학이다”라고 오해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중용(中庸)을 지키기 때문에 드러나기 어렵다는 겁니다. 중용(中庸)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밋밋한 일상적인 행위에 깃드는 것이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1장에 ‘신기독야(愼其獨也)’라고 했죠? 신독하는 사람들은 ‘둔세불견지(遯世不見知)’하는 경향성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은 김용옥처럼 한문을 잘해서 유명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난 세상에 좀 알려진 편이지만, 난 참으로 둔세불견지(遯世不見知)의 신념이 있어요. 매일 주말에 새마을호에 올라타도 요즈음은 알아보고 알아주는 사람은 물론 한명도 없습니다. 그냥 그런 게 내 삶이에요. 매스컴에 나가길 하나 신문에 함부로 글을 쓰길 하나. 또, 그딴 것 해서 뭐해? 나와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공부하는 것, 누가 알아주기를 합니까, 누가 보도를 합니까? 진실한 노력이라고 독지가가 후원을 해줍니까? 이 세상에 돈 많은 자들은 모두 눈이 먼 것 같애요. 충무할매 김밥장사 같은 사람들도 그 공들여 모은 돈을 기껏해야 썩은 대학에 무의미하게 바쳐 버리고! 여러분과 나는 다 같은 심정예요. 항상 중용(中庸)을 지킨다는 것은 ‘둔세불견지(遯世不見知)’입니다. 도올 서원에 내가 들이는 공력을 이 시점에서 누가 알아줍니까? 그러나 결국 중용(中庸)을 지키는 사람들은 ‘둔세불견지(遯世不見知)’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다음을 보면, ‘이불회 유성자능지(而不悔 唯聖者能之)’ 이 얼마나 강렬한 메세지입니까! 이게 피눈물 나게 어려운 겁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짓을 하면서도 거기에 대해 아무런 부끄럼이 없고 후회가 없다! 참으로 경탄스러운 경지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리ㆍ전주에서 살고 있지만, 외로워도 외로워도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어요! (도올 선생님은 강의도중 이런 대목에서 자주 눈물이 글썽하셨다. 재생주) 『논어(論語)』의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공자의 말씀은 내 인생을 반추해보아도 솔직히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나도 항상 내속에 ‘타인이 알아주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참 부글부글 끓어오르거든요. 그리고 나와 경쟁상대라고 간주될 수 있는 사람들이 세인들이 알아주는 눈 부시는 일을 했다고 신문에 나면 샘이나요. 부끄러워지거든요. 그런데 요즈음 나이가 쉰이 되고 보니 그런 생각들이 갑자기 없어지더라구요. 갑자기 경쟁대상이라고 느낄만한 사람들이 없어져버리고 누구든 잘하면 기쁨뿐이에요. 잘했다고 격려해주고만 싶어져요. 아무도 몰라줘도 슬플 건덕지가 없어지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할일이 뚜렷이 생겨서 그런가 봐요. 세상 사람들이 알아준다 이것 참 허망한 것인데 이것하나 극복하기가 참으로 어려워요.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요즈음에나 깨닫게 되었어요.
나는 중국 고전을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이 『중용(中庸)』 일서(一書)를 뛰어넘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언젠가 『대장경(大藏經)』 만근이 『중용(中庸)』 한 근에 못 미친다고 했더니(『기옹은 이렇게 말했다』, 83쪽) 불교학 하는 학생들이 항의를 하는데, 내가 『대장경(大藏經)』을 무시해서 그런 비유를 든 게 아니라, 결국은 이 짧은 『중용(中庸)』의 메세지가 동양문명 최고의, 지고의, 더 이상 없는 클래식 중의 하나란 것을 강조해서 한 말일 뿐입니다. 인간이 문명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한은 이 ‘중용(中庸)’의 한 마디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제 점점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각론으로 접근해 들어가는데, 중용(中庸)이 단지 언어로써만 주저앉아 있을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반드시 삶 속에서 그걸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죽비).
11장 2. 사서는 서로 통한다
不爲索隱行怪, 則依乎中庸而已. 不能半塗而廢, 是以遯世不見知而不悔也. 此中庸之成德, 知之盡ㆍ仁之至ㆍ不賴勇而裕如者, 正吾夫子之事, 而猶不自居也. 故曰“唯聖者能之”而已. 右第十一章. 子思所引夫子之言, 以明首章之義者止此. 蓋此篇大旨, 以知ㆍ仁ㆍ勇三達德爲入道之門. 故於篇首, 卽以大舜ㆍ顔淵ㆍ子路之事明之. 舜, 知也; 顔淵, 仁也; 子路, 勇也. 三者廢其一則無以造道而成德矣. 餘見第二十章. 이상은 11장이다.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해서 1장의 뜻을 펼쳐 여기에서 끝냈다. 이 책의 큰 뜻은 지ㆍ인ㆍ용 세 가지 달덕(達德)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문을 삼았다. 그러므로 책머리에 요(舜)임금ㆍ안연ㆍ자로의 일을 예로 들어서 그 내용을 밝히셨으니, 순(舜)은 지(知)이고 안연은 인(仁)이고 자로는 용(勇)이니, 셋 중에서 하나라도 폐하면 도(道)에 이르러 덕(德)을 이루는 일을 할 수가 없다. |
지난 시간에 공부한 제 11장은, “자사소인부자지언이명수장지의자 지차(子思所引夫子之言以明首章之義者 止此)”라고 했습니다. 즉, 주자는 2장부터 11장까지를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해서 1장에 대한 주를 단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죠.
“蓋此篇大旨以知仁勇三達德 爲入道之門 故於篇首 卽以大舜顔淵子路之事 明之 舜 知也 顔淵 仁也 子路 勇也”(앞에 9장과 뒤에 20장에 나오는 知ㆍ仁ㆍ勇의 예를 이미 공부했다) 순(舜)은 지(知)에 속하고, 안연은 인(仁)에 속하고, 자로는 용(勇)에 속하니, “三者 廢其一則無以造道而成德矣” ‘조(造)’라는 말은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이른다, 다다르다는 뜻입니다. Reach에 해당되죠. 그러니까 도(道)에 이르러 덕(德)을 이루는 것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견제이십장(餘見第二十章)” 지난번에 이야기했지만, 20장이 지·인·용을 펼친 것이죠. 그래서 20장과 통한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11장 말미에 나오는, “군자 의호중용 둔세불견지이불회 유성자 능지(君子 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 能之)”라는 구절을 다시 한 번 상기 해 두세요. 이것이 무엇과 통하는지 아십니까? 『논어(論語)』의 제일 첫 마디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불온 불역군자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不慍 不亦君子乎)”인데, 세 번째 구절인 “인부지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不慍 不亦君子乎)” 이것하고 여기 11장의 구절과는 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서의 모든 사상들이 하나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중용(中庸)』에서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중용(中庸)』의 텍스트 크리틱(Text critic)에 대해 말했지만, 앞으로 사서 사이의 텍스트 크리틱은 좀 더 깊게 연구되어져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경학(經學)이라는 것은 거의 무방비상태입니다. 중국·일본도 마찬가지 예요. 중국은 20세기 석학들이 조금 건드렸을 뿐이고, 일본은 조금 좋은 학자들이 있었고. 그렇지만 한국에는 학자다운 학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정인보 선생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선 20세기의 유일한 한학자라고 볼 수 있겠지만, 경학으로 세계적인 경지에까지는 못 갔어요. 여러분들은 앞으로 사서를 무궁무진하게 탐구하십시오. 그러면 논문을 쓰더라도 새롭게 쓸 소재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11장 3. 샤넬과 의상혁명
한복과 츠앙파오(長袍)
나는 비닐 같은 것 또는 나이론 섬유 같은 것으로 한복의 동정을 만들어서 다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 동정은 목에 자꾸만 쓸려서 싫거든요. 그래서 오래 전부터 꼭 면에다가 종이를 대어서, 집에서 만든 것을 달아 입습니다. 한복과는 다른 스타일로 목둘레가 퍼져있는 형태의 옷으로는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츠앙파오(長袍)라는 것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두루마기를 별로 입지 않듯이, 실제로 중국에 가보면 입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요.
청나라 오랑캐를 이야기할 때 기(旗)자를 많이 쓰는데, 왜 그런가 하면 청(淸)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만주이고, 만주는 원래 중국이 아닙니다. 북방의 여진족들이 원래 사냥을 많이 하니까, 사냥할 때 깃발을 가지고 서로를 구분하는 습관 때문에, 이 기(旗)라는 말이 생겼어요. 그래서 만주 사람들을 기인(旗人)이라 하고, 그 옷을 치파오(旗袍)라고 합니다. 그 치파오가 중국 전역으로 퍼진 것이 츠앙파오죠. 츠앙파오를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여자들이 입는 옷도 중국옷이 아니라 만주 옷입니다. 만주 사람들, 특히 기마병들이 입던 옷이기 때문에 이런 옷은 아주 간편해요. 명나라 때 입던 옷들이 우리 한복하고 비슷하죠.
샤넬의 의상혁명
지난 수요일 강의를 끝낸 후에 브레머(bremer)에 오래 있었는데, 그때 감기가 들어 지금 심하게 고생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한복을 안 입고 츠앙파오를 입고 나왔는데 참 편합니다. 나는 한복을 좋아하긴 하는데 그래도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아요. 문제가 있죠. 특히 한복에는 동정이 문제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한복이라는 개념을 단일하게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조말까지 입던 옷들이 아주 다양합니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지금의 한복과는 아주 다르게 안쪽 섶을 안으로 깊이 넣고 허리끈으로 묶어서 입었거든요.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면 고구려 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모든 의상을 한 번 입어보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골고루 입어보는 과정에서 뭔가 새로운 의상혁명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이라는 것이 말이죠, 투피스로 쫙 잘라서 바지 형태로 입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20세기 의상혁명의 소산인데, 그 혁명의 주인공이 바로 샤넬입니다. 여러분들 샤넬 다 아시죠? 샤넬이라는 상표도 있는데, 의상혁명이 바로 샤넬혁명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지금 샤넬이 창안한 의상구조에 지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샤넬이라는 여자를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생각하는 의상이라는 것이 모두 샤넬의 구조라는 걸 생각할 때 그럴 수 없죠. 샤넬이라는 여자 시대 이전의 유럽 옷들은 샤넬혁명 이후와는 다릅니다. 현대 의상은 기본적으로 샤넬로부터 온 것입니다.
포스트 샤넬 의상혁명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샤넬권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어요. 지금 의상에도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의상이라는 게 굉장히 간편하고 우리의 생활과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사실은 지금 여러분이 앉는 형태나 이런 생활에는 바지나 스커트가 다 맞지 않습니다. 우선 샤넬이 디자인한 스트레이트 구조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바지를 입고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을 때를 생각해 보면, 작업복들은 괜찮지만 신사복들은 무릎팍이 툭 튀어나오게 되고 보기 싫게 되잖아요. 그런데 한복은 안 그렇죠. 한복은 앉아 있는 구조에 맞는 거란 말입니다. 여자 의상에서도 스커트를 입고 앉으려니까 불편하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실생활과 매우 안 맞는 의상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자꾸 옷을 사 입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근본적으로 안 맞으니까, 샤넬이 만든 구조 속에 여러분들의 습관이 완전히 들어가지를 않는 거죠. 자꾸만 옷이 불편하고. 불편하니까 갈아입게 되고. 지금 패션이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정말 딱 맞는 패션, 한국 사람의 생활에 맞는 현대의 간편한 바지의 형태는 ‘몸빼’라는 것 하나 밖에 없어요. 그 형태에서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까지가 전부 의상혁명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이 츠앙파오도 간략하면서 괜찮아요. 품위도 있고. 생활하기에도 한복보다는 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의 안 입는다는 거죠. 그래서 대만에 유학 갔을 때 이걸 입고 다니면, 대만 사람들이 나를 자기네 조상의 생활유습을 확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으로 알았을 정도니깐 말이예요. 현실적으로는 샤넬이 만든 20세기 의상혁명보다는 동양의 고전적 구조가 우리에게 맞긴 맞는데 일상적으로 착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맞는 구조를 가지고 새롭게 개변해서 의상혁명을 일으켜야지 그저 유행에 뒤좇아 다니는 그런 식으로는 곤란하단 말입니다. 의상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나에게 찾아오세요. 내가 힌트를 많이 줄 테니까. 앞으로 엄청난 떼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사장이 벌거벗고 나오는 광고를 때려대는 베네통을 위시하여 이태리 같은 나라는 아무 내용도 없으면서 디자인 하나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며 살지 않습니까? 우리는 디자인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전부 남의 것을 베끼는 식 밖에 없거든요. 의상의 발전은 샤넬혁명을 뒤엎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이 점을 깊게 새겨두시고, 의상에 관심 있는 사람은 샤넬의 인생뿐만 아니라 작품세계를 구조적으로 연구해서 샤넬이 어떤 여자인지를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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