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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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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방랑자 2022. 2. 2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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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니마와 아니무스

남자 속에 여자가 있고, 여자 속에 남자가 있다

 

 

도마복음은 상징적 언어로 가득차 있다. 이 상징체계를 푸는 데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알고있는 기독교라는 가치체계의 상념의 탈을 여지없이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대중화되면 될수록 다면적인 데서 일면적으로, 포섭적인 데서 단선적으로 흐르기 쉽다. 오늘의 기독교는 그 원래의 원융적이고 자각적인 고차원의 세계관을 획일적이고 의타적인 세계관으로 저급화시킨 결과의 산물이다.

 

 

4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1Jesus said, “The man ol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small child seven days old about the place of life, and that person will live.

2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3and will become a single one.”

 

 

도마복음서를 파헤치고 들어가보면 볼수록 미궁에 빠짐과 동시에 엄청난 은유와 비유와 상징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러다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발견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 도마복음서는 우리의 합리적 사유로 분석되는 정연한 논리체계가 아니요, 살아있는 예수와 직접 실존의 체험으로 맞부닥쳐야만 하는 추구와 발견의 과정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상징언어들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우리가 기독교나 서양철학이나 서양논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선입견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도마복음이 그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세계관, 그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도마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새삼 확인하는 사실은, 그것은 결코 외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정경화 되어있는 4복음서나, 4복음서의 더미 속에서 발견한 큐복음서보다도 확연히 더 오리지날한 느낌을 주는 웅혼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오리지날하다는 의미는 시대적으로도 앞선다는 의미를 내포할 뿐 아니라 사고의 정합성(整合性)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정합성이란 평면적 논리의 일관성이 아니다. 다면적ㆍ중층적ㆍ복합적 논리의 직관적 통일성이다. 그 통일성은 원융(圓融)한 혼돈(混沌)의 세계를 포섭하고 있다. 3장의 주석에서 나는 이미 전관(全觀)’의 방법을 갈파하였다. 4장에서는 혼돈(混沌)과 융합(融合)이라는 근원적인 가치관이 설파되지 않으면, 본장을 구성하는 언어들이 이해될 길이 없다. 이러한 혼돈성과 융합성은 4장뿐 아니라 도마복음 전체를 일관하고 있다.

 

인간의 사유가 고차원적인 데서 저차원적인 데로, 다면적인 데서 일면적인 데로, 포섭적인 데서 단선적인 데로, 고매한 데서 유치한 데로, 자각의 권면에서 믿음의 강요로 흐르기는 쉽지만, 그 역방향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일반적인 엔트로피증가의 방향성에 비추어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도마복음서와 큐복음서, 그리고 그에 기초한 내러티브 복음서들의 언어를 비교해보면 이러한 AD 1세기 초기기독교 역사의 진행방향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도마복음서를 포함한 나그함마디 성문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진리복음서가 들어있는 1코우덱스를 소유하기까지 했던 20세기의 대표적 심리학자 융(C. G. Jung, 1875~1961)은 우리의 심층의식의 아키타입의 한 유형으로서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라는 재미있는 개념을 제시한다(융의 아키타입이론은 이미 제18~19편에서 상술), 그것은 이 장 마지막 절의 하나된 자(a single one)’의 해석과 관련된다.

 

 

예수 생전에 이미 기독교를 수용한 에데사(오스로외네) 왕국의 수도 우르파(Urfa), 도마는 예수 사후에 그 우르파로 갔다. 우르파는 현재 터키 동부 내륙, 유프라테스강 상류지역에 있다. 우르파는 도마기독교의 본산이며, 에데사왕국은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최초로 국교로서 승인한 곳이다. 1637오스만제국이 이곳을 지배하면서부터 기독교의 자취는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가 바로 이곳 우르파라는 이슬람교도들의 신념 때문에, 이곳은 현재 아브라함의 탄생 동굴이 보존되어 있는 이슬람성지가 되어있다. 나는 우르파 박물관(Sanliurfa Museum)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결합을 상징하는 조각을 발견했다. 초기기독교 왕국의 예술적 표현은 너무도 발랄한 것이었다.

 

 

아니마란 남자의 여자 이미지고, 아니무스란 여자의 남자 이미지다. 그러니까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얽혀있다. 인간세상이 대체로 남성중심사회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니무스보다는 아니마가 더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된다. 융도 남성이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아니마에 더 명료하게 초점을 맞춘다. 아니마가 아니무스보다는 더 쉽게 기술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유대교전통에서 지혜가 여성의 이미지를 지니는 것이나, 동양의 도가철학에서 말하는 도()가 음()적인 이미지를 지니는 것도, 모두 남성중심사회에서 파생된 아니마적 아키타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모두 어떤 개인적 의식의 구체적 현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집단적(collective)인 것이다. 한 인간의 체험의 세계에서 아니마는 엄마의 이미지로 출발할 것이고, 사춘기의 아니마는 한 남자의 에로틱한 충동이 형상화된 어떤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니마도 시대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다른 아키타입적 이미지를 지닐 것이다.

 

a그러나 더 근원적 사실은 아니마야말로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어떤 고리로서 묘사된다는 것이다. 융은 그것을 인간의 심층적 무의식의 인격화(a personification of the unconscious)로 간주하기도 한다. 인간의 섹스라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나 자신에 내재하는 아니마의 발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섹스라는 것은 인간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매우 특수한 체험이다. 성교는 본시 동물의 세계에서는 종족번식의 수단으로 본능화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와 같은 고도의 상징적 의식이 발달한, 인간이라는 동물에게서는 성교는 종족번식의 수단을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교란 단순히 성기접촉의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쾌락이 단순히 종족번식의 효율성을 유도하기 위한 몸의 장치만도 아니다. 인간은 에로틱한 체험을 통하여 에로틱한 충동을 넘어서는 심오한 느낌(Feeling)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성을 통하여 성을 넘어서는 우주를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으로 성적 체험을 통하여 성장하며, 그것을 우주적 이해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성적인 체험을 결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파토스의 세계와 그와 결부된 가치의 세계로부터 격절되어 있다. 성적인 체험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 그 자체와 결부되어 있는 것도 성이라는 복합적 열정이 너무도 많은 느낌의 세계에 대한 열쇠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도마복음의 언어가 드러내고 있는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합일(合一)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방편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그것이 실체화되어 나타날 때 인간에게 병리적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결코 긍정적인 의미맥락을 지니지 않는다. 도마에는 그러한 부정적인 맥락이 전혀 없다. 그리고 도마가 말하는 합일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분별이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아니마는 남성 속에 있는 여성성이며, 아니무스는 여성 속에 있는 남성성이다. 이것은 곧 나라는 존재 안에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공재(共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는 존재는 궁극적으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결합에서만 가능해지는 하나된 자이기 때문이다. 아니마를 음()이라 하고, 아니무스를 양()이라 한다면, 결국 나라는 존재는 음양의 합일인 것이다. 남자 속에는 여자(아니마)가 들어 있고, 여자 속에는 남자(아니무스)가 들어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성교란 결국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합일되는 체험이라 말할 수 있다. 남성 속에도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있으며 여성 속에도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있다. 이성지합이란 서로가 서로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발견하는 것이다. 밀교에서는 오르가즘의 극치에서 체험되는 신비경을 합체불(合體佛)이라 표현했고, 주역은 이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 표현한 것이다. 도마는 무소유 방랑자의 원초적 고독속에서 성적 체험을 뛰어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합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에데사왕국의 수도였던 우르파이다. 우르파의 왕 아브가르 우카마(Abgar Ukkama)는 피부병으로 심하게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팔레스타인을 들락거리는 상인들로부터 이적을 행하는 예수의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예수를 초청한다. 예수는 팔레스타인의 사역을 포기할 수 없어 가지는 못하겠으나, 자기를 보지도 않고 믿고 초청하는 에데사의 왕을 축복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 예수가 직접 쓴 편지가 유세비우스교회사에 발굴된 골동문서로서 실려있다. 예수는 편지와 함께 자기의 얼굴이 그려진 손수건에 땀을 닦아 보낸다. 그 손수건으로 상처를 어루만지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또 이곳 우르파는 아브라함이 탄생한 곳이다. 바빌로니아의 왕 니므롯(Nimrod)이 아브라함이 태어날 때 유일신을 퍼뜨릴 아이가 탄생하리라는 현몽의 예언을 듣고 아기 밴 여자와 아기를 다 죽이게 한다. 아브라함의 엄마는 임신을 숨겼고 몰래 동굴에서 아브라함을 낳았다. 헤롯 영아살해의 옛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장성하여 니므롯이 숭배하는 우상들을 파괴한다. 그러자 니므롯이 아브라함을 우르파 성에서 체포하여 성벽 밑에 타오르는 거대한 불구덩이로 그를 던진다. 이때 하나님이 불구덩이를 연못으로 변하게 했고 장작들을 잉어로 변하게 했다. 더 멋있는 버전에 의하면 아브라함을 사모하는 니므롯의 딸이 자기 몸을 성벽에서 던졌다고 한다.

 

 

 자웅동체의 시간관

묵시를 완성치 말고 낙원을 회복하라

 

 

도마복음서의 상징체계는 난해하다. 그러나 그 상징체계가 소기하고 있는 가치관을 이해하면 쉽게 풀려나간다. 놀라웁게도 그 상징언어들은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웅동체일 수는 없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자웅동체라는 상징을 인간이 지향해야 할 웅혼한 이상으로서 계속 제시한다. 그 상징성은 우리의 통념적 시간관을 역전시킬 때만이 료해(了解)된다. 그것은 기묘한 신화가 아니라 우리 삶에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다.

 

 

4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1Jesus said, “The man ol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small child seven days old about the place of life, and that person will live.

2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3and will become a single one.”

 

 

성교(性交)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합일이요, 합일의 오르가즘을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사라지는 합체불(合體佛)의 체험이며, ()과 양()이 끊임없이 왕래하고 소통되는 도()의 경지다. 도는 음만으로, 또는 양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음이 되었다가(一陰), 양이 되곤(一陽) 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성교가 단지 생산성의 컬트(cult)일 뿐 아니라, 죽음과 부활, 그리고 모든 성스러운 제식의 심볼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은 성교가 개인적 욕망의 분출이라기보다는 어떤 코스믹한 차원의 의미체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후대의 기독교가 성교라는 행위를 단순히 인간 몸의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로 보고, 사망의 죄악의 주체로 파악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의 모습이 도마복음서에는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마복음이 성교행위나 그와 관련된 컬트를 장려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여기서 논의하는 것은 단순히 상징적 표현에 관한 것이다. 도마복음은 종말론적 기독론(eschatological Christology)이 지배하기 이전의 원시기독교(proto-Christianity)의 다양한 운동의 실상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나는 원시기독교라는 말을 초대기독교(primitive Christianity)’ 이전의, 예수 사후 다양하게 발전한 예수운동들을 총괄하여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사춘기 때, 주로 남성에게서 이러한 에로틱 판타지가 나타나겠지만, 자기 몸이 자웅동체(androgyne)였으면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성욕은 분출되고 메이팅의 짝은 구해지지 않고 . 그러나 이러한 에로틱 판타지는 신화의 세계에서는 코스믹 아키타입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창세기로 돌아가보자! 사실 창세기는 유대민족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빌로니아로부터 페니키아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지역의 신화적 세계관의 한 전형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 연못이고 아직도 잉어가 우글거린다. 이 잉어들은 성물이라서 잡을 수 없다. 아마도 이곳은 에데사왕국 시절에는 도마기독교의 본산이었을 수도 있다. 이곳 우르파와 도마복음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후에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만들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사람이라는 생명체를 만들었다(2:7). 그 사람이 곧 진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담아(’adamah)’에서 유래된 아담이다. 원래 아담이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일반명사이며, 특정한 개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담, 즉 사람은 자웅동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훼 하나님은 본시 자웅동체인 사람 즉 아담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웅동체인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심심해 보이므로(2:18), 그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든 것이다(2:21~22). 그러니까 여자는 독자적인 존재로서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분화된 것이다. 즉 아담(사람)에 내재하는 여성성이 객화된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여자의 분화야말로 인간의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고 역사의 시원이었다.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태극의 양면으로서 태초로부터 동등하게 존재하였다. ()은 밭[]과 보습[]의 상형자를 합친 회의자(會意字)로서, 쟁기로 밭을 가는 힘센 일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남성성인 아니무스의 모든 속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는 하늘하늘 굽이굽이 날씬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글자라 하기도 하고, 무릎 꿇고 애기 낳는 생산의 모습의 상형이라고도 풀이된다. ()라는 글자에 젖을 강조하면 두 젖꼭지가 나타나는 모()라는 글자가 된다. 하여튼 이것도 인류의 아니마 관념을 상징하는 총체적인 한 아키타입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말을 보면, 창세기적 세계관이 영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남자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man)’이란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man)은 곧 남자(man)이고, 남자는 곧 사람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여자는 우맨 (woman)’일 뿐이다. ‘우맨이란, ()와 남()이 독자적인 음·양의 구현체로서 엄존하는 것과는 달리, ‘에 종속되는 개념이다. ‘우맨(woman)’위프맨(wifman)’이라는 고대영어(OE)에서 왔는데, 위프(wif)와 맨(man)의 합성어이다. ‘우맨은 맨의 배우자로서, 즉 성교의 짝으로서 분화된 종속적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맨은 맨의 불완전한 형태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여성은 어떠한 속성의 결여이며, 그 결여 덕택에 여성은 여성이 될 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도 바울에게도 명료하게 나타나고 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남자는 머리에 베일을 덮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하여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므로 머리를 가려야 한다. 남자는 원래 여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여자가 바로 남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여자야말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고전 11:3~9).

 

 

오늘날 인권운동가나 여성운동가가 접하면 격분해야 할 이러한 바울의 메일 쇼비니즘(male chauvinism, 남성우월주의)은 사실 유대인 남자의 평범한 상식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초기기독교운동은 과연 이러한 쇼비니스틱한 바울의 수준에서 전개된 부활 신화운동이었을까?

 

그러나 놀라웁게도 도마복음서는 우리에게 원시기독교의 사상이 결코 이렇게 유치한, 메일 쇼비니즘의 권위주의를 표방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도마공동체 사람들은 남자 속에 하나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공재한다면 여자 속에도 똑같이 하나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공재한다고 믿었다. 맨에서 우맨이 분화된 것은 불완전한 상태이므로 다시 원래의 아담, 원래의 맨, 원래의 사람으로 회복될 때만이 우리 인간의 몸은 온전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 온전한 자웅동체, 즉 합체불(合體佛), 즉 고양된 인간의 의식 속에서 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합일되는 엑스타시야말로 온전한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믿었다. 도마복음서 22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과 남성을 하나된 자(a single one)로 만들어라. 그리하여 남성이 남성이 되지 않고, 여성이 여성이 되지 않게 할지어다.

 

 

여기 22장에서 말하는 하나된 자와 본장 즉 43절의 하나된 자는 동일한 어휘를 사용한 동일한 표현이다. 바로 이 하나된 자라는 말을 바르게 해석할 때만이 제4장의 수수께끼들이 술술 풀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크로쌍은 말한다: “마태와 누가복음에 이미 들어있는 텍스트인 큐복음서만 해도 종말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이 종료된 이후의 완벽한 세계를 미래에 투사시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그 반대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도마는 온전한 시작(a perfect beginning)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묵시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낙원을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이 현재 세계의 정상적 틀 속에서 창조의 여명으로(the dawn of creation) 되돌아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Unearthing the Lost words of Jesus 96), 적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도마기독교의 성지 우르파의 전경, 에데사(Edessa)라는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고향 마케도니아에 있는 지명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것이다. 내가 서있는 곳은 아브라함이 살해될 뻔한 니므롯성채인데, 니므롯왕의 전설은 창세기 10:8~12에도 나온다. 니므롯왕이 이 두 기둥 사이에서 대관식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현존하는 성채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오랜 시간의 누적을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사료된다. 기둥은 코린트양식, 예수를 초청한 아브가르 우카마왕도 이곳에서 우리의 주인공 도마를 접견했다.

 

 

 어른과 아이

아기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질 않는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었다. 여기 칠일 갓난 작은 아이는 안식일의 아이다. 그 아이는 창조된 천지의 모든 것을 구유(具有)한 생명이지만 어른의 탐욕과 권세와 강성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원초성이다. ‘어른아이는 객관화되는 개체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Self)에 내재하는 일종의 아키타입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어른쪽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 항상 아이쪽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1Jesus said, “The man ol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small child seven days old about the place of life, and that person will live.

2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3and will become a single one.”

 

 

3절의 하나된 자에 관한 올바른 해석을 내리게 되면, 우리는 이제 4장의 전체적 의미를 해독하는 결정적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많은 주석가들이 영지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는 틀에 따라 타출전과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세부적으로 구문들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고전의 해석이란 어디까지나 보편적 인간(Universal Man)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시대적 가치관이나 특수한 상징성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소기하고 있는 보편적 인간의 삶의 의미를 우리는 끊임없이 캐물어야 한다. 그들은 도대체 왜 이러한 언어를 구성하여 타인에게, 후대에게 전달하려 했을까? 여기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이 먹은 어른(the man old in days)’칠일 갓난 작은 아이(a small child seven days old)’의 대비이다.

 

나이 먹은 어른이란 많은 날을 산 사람이다(old in days). 우리 통념의 세계에서는 나이 먹은 어른이란 지혜롭고, 인생의 길에 관하여 어린이보다 더 경험이 풍부하고 통찰력이 있다고 전제된다. 그리하여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란, 어린이는 어른에 의하여 인도되어야 하며, 어린이는 어른에게 인생의 지혜에 관하여 가르침을 얻어야 하며, 묻기만 하고 함부로 말대꾸를 해서는 아니 된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복종하고 잘 따르기만 하면 착하다 칭함을 얻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의 위대성이란 바로 이러한 우리의 통념적 가치관을 전도(轉倒, Inversion)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전도가 없으면 발견은 일어나지 않는다. 추구와 발견의 대상은 천국(나라)이다.

 

 

니므롯 성채에 앉아있는 쌍둥이(디두모), 아버지는 산리우르파의 청년 메흐메트 알리(Mehmet Alli), 아이티 산업에 종사한다고 했다. 나보고 자기집에 가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조른다. 그들은 아직도 이토록 풍요로운 인심 속에서 살고있는 것이다.

 

 

천국이란 바로 우리의 일상적 가치를 전도시키는 데서 등장하는 신천지인 것이다. 노자55을 한번 펼쳐보자! 놀라웁게도 우리는 도마복음 제4장의 다른 버전을 발견하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덕을 머금음이 도타운 것은 갓난아기에 비유될 수 있다. 含德之厚, 比於赤子.
벌이나 뱀도 그를 쏘지 않고 蠆虺蛇不螫,
맹수도 그에게 덤비지 않고 猛獸不據,
날새도 그를 채지 않는다. 攫鳥不搏.

 

뼈가 여리고 근이 하늘한데도 꼭 움켜쥐면 빼기 어려우며, 骨弱筋柔而握固,
암수의 교합을 알 까닭이 없는데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로지게 꼴린다. 未知牝牡之合而全作,
정기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精之至也.
매일 하루가 다 하도록 울어 제키는데 그 목이 쉬질 않는다. 終日號而不嗄,
조화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和之至也.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항상성이라 하고, 知和曰常,
항상성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 知常曰明,
삶에 늙음을 덧붙이는 것을 요상함이라고 한다. 益生曰祥,
마음이 몸의 기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心使氣曰强.
사물은 강장하면 곧 늙어버리는 것이니, 物壯則老,
이를 일컬어 도()답지 않다고 한다. 謂之不道,
도답지 않으면 일찍 사라질 뿐이다. 不道早已.

 

 

여기 칠일 갓난 작은 아이라는 표현은 그냥 갓난 애기라는 사실적 사태가 아니다. 카를 융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내 몸속에 내재하는 아키타입으로서 말했듯이, 여기 어른아이또한 내 몸속에 내재하는 이러한 아키타입을 지칭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의 모든 언어는 상징체계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생후 제8일에 할례를 받는다(17:12), 따라서 칠일 갓난 아이는 할례라는 문명관습체계에 편입되기 이전의 순결한 혼돈상태를 상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유대인의 습관 속에서 나온 이미지는 아닐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야훼 하나님은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었다. 창조가 6일만에 완성된 것이다. 여기 칠일 갓난 작은 아이라는 것은 안식일의 아이(a child of the sabbath). 즉 천지의 온전한 모습이 다 구유된, 다 완성된 아이인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정기의 지극함[精之至]과 조화의 지극함[和之至]이 구유된 존재인 것이다. 나는 의과대학에서 소아과학(pediatrics)을 공부할 때 교과서 첫 페이지를 펴보고 거기에 쓰여져 있는 첫 문장에 충격을 받았다: “어린 아이는 어른의 작은 형태가 아니다(A child is not a small adult).”

 

도마복음의 살아있는 예수 말씀의 가장 신랄한 메시지는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the place of life)에 관하여 묻는 것을 주저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삶의 자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동일한 표현이 도마복음서 내에도, 또 다른 출전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맥락상 그 의미는 절로 명백해진다.

 

도마복음 58에 이런 예수의 말씀이 있다: “수고하는 자는 복되도다! 그는 삶을 발견했기 때문이로다.” 여기 수고함이란, ‘추구하고 발견하는고통스러운 과정을 말한다. 실제로 육체적 노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는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삶의 길, 즉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노력 없이 생명은 얻어지지 않는다.

 

삶의 자리란 곧 삶이 이루어지는 마당이다. 그러나 그 마당은 항상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인생의 역정이란 삶의 자리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다. 우리가 어디를 간다는 것도 결국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삶의 자리를 어른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삶의 자리를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의 자리 그 자체를 항상 어린이다웁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했다. 삶에 늙음을 덧붙이는 것은 요상함이다. 마음이 몸의 기를 부리는 것은 강함이다. 그러나 사물은 강하면 곧 늙어버리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도답지 않다고 한다. 도답지 않다, 즉 부도(不道)란 예수에게 있어서는, 천국의 도래를 거부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공자(孔子)도 항상 제자 안회(顔回)가 자기를 계발시킨다고 기뻐했다. 공자도 삶의 자리를 항상 어린이다웁게 만들어 간 사람이었던 것이다.

 

 

2008729일부터 831일까지 새문안길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좋은 전시가 열렸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 서안(西安) 비림(碑林)의 장대한 비석(탁본)들이 전시되었다. 돌처럼 정확하게 역사를 전하는 문화매체는 없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중앙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다. ‘대진이란 로마제국이다. ‘경교란 기독교를 가리킨다. 로마제국의 기독교가 중국에 유행한 것을 기념하는 비라는 뜻인데 당나라 건중 2(781)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이미 우리나라 통일신라 불국사가 완성되었을 즈음 중원에서 유행하고 있었고 비의 내용으로 보아 당나라 때 신약성서 27 서가 이미 한문으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교431년 에베소 공회에서 파문당한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일파의 기독교인데 그는 예수의 인성을 100%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아리우스의 부활로서 오인된 것이다. 경교는 도마복음서의 전통을 보지(保持)하고 있던 에데사왕국에서 보호를 받고 페르시아를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온 것이다. 당태종은 황당한 기적이나 십자가 죽음이나 부활을 말하지 않는 기독교를 현묘무위(玄妙無爲)하고 제물리인(濟物利人)하므로 천하에 행하여질 만하다고 하였다. 한국사람이라면 이런 전시를 더 선호해야 하지 않을까? 시원찮은 루브르박물관 부스러기보다는 우리에게 더 의미있는 전시가 아닐까? 오른쪽 탁본은 당현종 친필 효경, 왼쪽은 왕필 주 주역개성석경, 사진 속 관람 어린이, 지윤과 재찬.

 

 

 시간의 반역

봄비에 솟아오르는 연두잎 같은 노인이 되라

 

 

어른과 아이는 객체화된 개체들의 모습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Self)의 측면들이다. 나 속에 내재하는 아키타입들인 것이다. 어른이란 노자가 말하는 죽음의 무리며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하향(下向)이다. 아이란 삶의 무리며 상향(上向)이다. 아이가 어른을 따를수록 죽음의 무리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며, 어른이 아이를 따를수록 삶의 무리가 생명을 향해 상향의 길을 더듬는다. 천국이란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아이로 역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다. 천국은 가치의 전도이며 시간의 반역이다.

 

 

4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1Jesus said, “The man ol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small child seven days old about the place of life, and that person will live.

2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3and will become a single one.”

 

 

20세기 철학자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형이상학적 우주론의 체계를 구축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가 쓴 명저,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을 펼치면 그 서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는 사건의 과정 속에서 두 개의 주간(主幹)이 되는 경향을 노출시킨다. 그 한 경향은 물질적 성질을 가진 것들의 매우 완만한 해체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눈에 뜨이지 않는 필연성 속에서 그 물리적인 것들에게는 에너지의 저하현상이 있다. 그 활동의 근원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래로 아래로 하향(下向, downward) 하고 있다. 그들의 물질 자체가 소모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경향은 매년 봄마다 반복되고 있는 자연의 싹틈에서 구현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 진화의 상향(上向, upward)적 과정에서 예증되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하향(下向)은 도마복음서에서 말하는 어른이다. 그리고 상향(上向)아이이다. 나의 몸속에서도 물리적 소모와 부패와 해체의 경향과, 생명적 합성과 쇄신과 구성의 경향은 공존한다. 전자를 엔트로피의 증가라 하고 후자를 엔트로피의 감소라 규정하여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죽음을 향한 길에도, 그 길의 역방향인 생명의 상향(上向)이 있다. 도마복음이 자웅동체를 이야기하고 칠일 갓난 작은 아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이 상향(上向)과 관련이 있다.

 

 

() 경교비의 최상단 부분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아래) 경교비의 하단 부분에는 예수가 썼던 아람어계통의 시리아어가 쓰여져 있다. 이 시리아문자는 나중에 몽고 파스파문자의 생성까지 자극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한글을 만드는 집현전 학자들의 중요한 참고 문자가 되었다.

 

 

사람이 늙는다고 하는 것은 시간의 추이와 더불어 제일적(齊一的)으로 늙는 것이 아니요, 항상 하향과 상향이 길항관계에 있으면서 늙어가는 것이다. 하향과 상향의 긴장 속에서, 결국 하향이 상향보다 더 진행되는 만큼 인간은 노화(Aging)하는 것이다. 아이와 어른은 내 몸속에 공존하는 긴장관계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길은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요, 하향이다. 어른이 아이가 되면 될수록 생명적 상향의 가능성이 확대된다.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다는 것은, 아이를 객체로 하여 질문을 던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어른이 아이가 되는 상향(上向), 즉 엔트로피의 증가에 역행하는 생명의 반역을 성취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반역의 역전, 일상적 가치의 전도가 곧 천국,’ 나라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이라는 조건절에 대하여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라는 주절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콥트어 본문은 그 사람은 살 것이다(that person will live)’로 되어있다. 그 의미맥락을 살려 여기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로 의역한 것이다. ‘그 사람은 살 것이다는 물론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와 대구를 이루는 표현이다. 갓난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하는 사람, 그 사람은 죽지않고 산다는 것이다. 죽음의 길을 걷지 않고 삶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도덕경76에도 유사한 언급이 있다.

 

 

사람의 생명은 부드럽고 약하며, 사람의 죽음은 단단하고 강하다. 만물 초목의 경우에도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한데, 죽으면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말하노라. 딱딱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여기서 말하는 죽음의 무리[死之徒]’는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하향이요, ‘삶의 무리[生之徒]’상향이다. 도마복음에서 생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곧 삶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늙으면 지혜로울 것 같지만, 부드러움을 잃고 딱딱하게 될 뿐이요, 약함을 잃고 강하게 될 뿐이다. 변혁과 신생(新生)을 거부하고, 기득의 지위와 권세와 명예와 부화(富華)에 집착한다. 늙으면 한결같이 정치적으로도 보수가 되고, ‘빨갱이를 몰아내야 한다고만 외친다. 자신이 곧, 빨갱이라고 규정되는 가치관의 산물이라는 것을 자각하거나 반성할 추호의 기미도 없다. 그냥 자신의 잣대로 타인을 응징해야 한다고만 외친다. 노자가 말하는 대로 마르고 딱딱해져만 가는 것이다. 고정된 관념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일시적 체험 하나로, 그 체험의 전후 역사적 맥락을 전혀 반추하지 않은 채, 그 체험을 하나의 고정된 관념으로 만들고 전설로 만들어 모든 궐후(厥後)의 자기 주변상황에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일상적 가치관에서 가장 염려되는 것은, 이러한 고집불통이요, 자기들이 주관적으로 구성한 일관된 관념의 횡포를 하나님(예수님)의 명령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따위 일관된 관념을 인간에게 강요한 적이 없다.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추구하고 스스로 발견하도록 촉매 역할만 했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른과 아이의 주제는 현재 우리사회의 제문제를 고려해볼 때 너무도 중요한 과제상황을 제기한다. ‘아이어른이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나의 존재의 측면들이다. 아이가 어른을 따를수록 죽음의 무리들이 죽음을 향하여 질주하고, 어른이 아이를 따를수록 삶의 무리들이 생명을 향하여 어려운 상향의 길을 더듬는다. 어린 아이 속에도 고착된 늙은이가 들어 앉아 있을 수 있고, 늙은이 속에도 유연한 청춘의 열기가 가득차 있을 수 있다. 바울은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바울은 여기서 어린 아이를 유치한 사유를 대변하는 부정적인 가치의 상징으로 예시하고 있다.

 

물론 바울의 논의가 근본적으로 맥락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과 도마 양자를 곧바로 대비하여 포펌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의 발상과 도마의 발상은 다르다. 바울은 보다 권위주의적 기독교를 만드는 데 더 기여한 것이다. 내가 오직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 촉촉한 봄비에 솟아오르는 연두잎 새싹 같이 부드러운 노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뜨이기를 . 예수는 당대 율법의 규율 속에 쩔어버린 노인 랍비나 서기관, 제사장, 장로들의 견강(堅强)함에 신물이 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무덤 사이에서 나온 사람들의 귀신을 쫓아내어 돼지로 들여보내니, 돼지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로 처박혀 몰사하는 장면이 있다(8:28~34).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 속의 그곳이 어떻게 생긴 곳일까 궁금해 했다. 마태에는 가다라지방’, 누가ㆍ마가에는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8:26)으로 나온다. 나는 지금 감격 속에 바로 그곳을 걷고 있는 것이다. 내 앞에 보이는 언덕 비탈길이 바로 돼지폐가 우루루 내리달은 곳이다. 희미하게 갈릴리 바다. 최남단이 보이고 내 뒤쪽으로 희미하게 솟은 땅이 골란고원이다. 현재 이곳은 요르단에 속해있으며 움 케이스(Umm Qais, 古名 Gadara)로 불리운다. 이곳은 참으로 아름다운 희랍 로마도시의 전형을 과시하고 있는데 데카폴리스(데가볼리) 중의 하나였다.

 

 

 첫째와 꼴찌

어린이는 도덕적 순결의 상징 아닌 웅혼한 원초성

 

 

큐복음서나 공관복음서의 공통자료들은 이미 기독론이나 종말론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큐에서 도마로 거슬러 올라가 볼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거대하고 웅혼한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동·서가 회통된 원초적 혼돈이었다.

 

 

4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1Jesus said, “The man ol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small child seven days old about the place of life, and that person will live.

2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3and will become a single one.”

 

 

누가복음 10에는 어린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다른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 큐복음서에 속하는데, 마태보다는 누가 텍스트가 더 오리지날에 가깝다.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이들과 또 이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하시더라. (10:21~22, 032).

 

 

여기서 이미 우리는 도마복음자료가 큐복음서자료로 변형되어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도마에서는, 어린 아이가 자각적 추구의 대상이며 나의 존재의 측면으로서 나타난다. 추구(seeking)와 발견(finding)의 실존적 결단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존재의 웅혼한 원초성의 기저이다.

 

큐복음서는 바울이 어린이를 무지함과 유치함과 분열된 어두운 상태로 비하하는 것(고전 3:1, 13:11~12)과는 달리, 도마의 갓난 아이의 긍정적 이미지를 계승하였다. 어린 아이를 지혜와 슬기보다도 상위의 개념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가 언급된 맥락은 이미 하나님의 일방적 계시의 대상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방적 계시를 수용할 수 있는 순결함정도의 의미맥락인 것이다. 이러한 큐복음서의 맥락은 22절의 아버지가 아들을 안다.’ 그리고 아들과 아들이 선택하여 계시를 받은 자들만이 아버지를 안다고 하는 호상적 앎으로 연결되고 있다. 어린이의 순결함이 결국 초월적 아버지에 대한 앎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미 초대교회의 가치를 대변하는 기독론적 변형이 일어났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기노스케이, ginōskei)라고 하는 것은 그노시스, 영지주의의 영향이라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마가자료에 속하는 또 하나의 파편을 살펴보자! 마가를 변형시킨 마태의 텍스트를 인용하겠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마태 18:1~5, cf. 9:33~37, 9:46~48).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도마의 원형의 자취를 읽을 수 있다. ‘돌이킨다는 표현 속에 어떤 원초성으로의 복귀, 상향이라는 역방향이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누가)에서는 제자들끼리 누가 더 위대하냐 식의 유치한 분별심의 경쟁을 하는 전체 맥락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마태에서는 천국입장이라는 초대교회의 종말론ㆍ재림사상의 맥락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이미지가 자기를 낮춤이라는 겸손과 복종의 도덕적 가치로 전락되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신학도들이 이 구절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이상적인 어린이의 덕성의 맥락에서만 해석하고 있다. 순결(innocence), 무구(purity), 무조건적 신앙(unconditioned faith), 겸손(humility),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unconcern for social status) 이러한 도덕적 개념이 어린이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도마의 내면적, 원초적, 본질적 웅혼함의 맥락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자잘한 도덕관념들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영접함이 곧 나를 영접함이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교조화된 기독론의 전제가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너무 외재화되어 있다.

 

도마복음의 본장은 1절의 갓난 아이,’ ‘삶의 자리,’ ‘생명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대전제로 깔면서 2절의 첫찌꼴찌의 논의를 통하여 3절의 하나된 자에서 클라이막스에 오르는 장쾌한 논리적 구조를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 첫째와 꼴찌의 논의는 큐복음서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다.

 

 

지금 꼴찌된 자들이 첫째가 되고, 지금 첫째 된 자들이 꼴찌가 되리라.(265, p 20:16, 13:30).

 

 

그런데 여기서는 분명 꼴찌가 나쁜 것이고 첫째가 좋은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현세에서는 별볼일없는, 꼴찌된 자가 천국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고, 현세에서 잘나가고 부귀권세를 누리는, 첫째된 자가 천국에서는 오히려 꼴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가 현세적 가치의 전도와 천국의 실존적 의미를 결합시키는 메타포로서 사용될 때는 탁월한 표현이 되지만, 예수의 재림이나 최후의 심판이라는 역사적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전후상황을 말한 것으로 해석하면 치졸하기 그지없는 메시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최후의 심판 전까지는 별볼일없는 꼴찌로 살아도, 예수만 잘 믿으면 최후의 심판 후에는 첫째가 될 수 있다는 종말론적 신앙이 이 구절을 해석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는 맥락상 첫째라고 하는 것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어른의 무리요, 죽음의 무리요, 하향의 무리다. 오히려 꼴찌가 되는 것이 갓난 아이쪽으로 가깝게 가는 것이요, 생명의 무리요, 상향의 무리다. 첫째의 모두(all of the first)가 꼴찌가 되는 것이 아니요, 첫째의 일부만 선택되어 꼴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첫찌의 많은 자들(many of the first)’이라는 표현에 우리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과 동일한 표현이 그 의미 맥락은 같지 않지만, 마태 19:30마가 10:31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꼴찌를 가치적으로 긍정하는 맥락이 마가 9:35에도 나타나고 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꼴찌가 되어야 하며

 

도마복음 콥트어 텍스트에는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말만 있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옥시린쿠스사본에는 후자가 병기되어 있다: “첫째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같은 하나가 될 것이다(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and the last first and will become one and the same).” 희랍어 텍스트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것이, 결국은 첫째와 꼴찌가 하나로 융합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모든 분별이 사라져버린 웅혼한 원초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콥트어 사본의 하나된 자(a single one)’나 희랍어 사본의 같은 하나(one and the seme)’는 결국 어른과 아이, 죽음과 생명, 첫째와 꼴찌의 융합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웅동체의 원초성(androgynous primordiality)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상향의 동경을 가지고 하향의 길을 걸어간다. 아이에게 물어가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발랄함을 지니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상향과 하향, 아이와 어른, 생명과 죽음이 결국 하나의 혼돈(Chaos)이라는 것을 도마복음의 예수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가다라(Gadara)알렉산더대왕 사후 프톨레미왕조 군사기지로 개발되어 셀레우코스왕조 지배하에 번성하였다. BC 30년 옥타비아누스는 이곳을 헤롯 대왕에게 귀속시켰다. 예수시대에는 로마제국 시리아령에 속한 자치폴리스였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예수가 걸었다. 예수는 갈릴리 시골사람이 아니라 이러한 최첨단 문명을 흡수한 방랑하는 카리스마(wandering charismatics)였다.

예수시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신약성서 밖에 없을까? 20세기 신학의 놀라운 발전은 신약성서 이외로 성서의 배경을 알 수 있는 많은 역사자료와 고고학자료와 새로운 문헌자료를 발견하고 해석했다는데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서가 예수와 동시대를 산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c.100)의 저술들이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멸망 이전의 갈릴리전투를 이끈 유대인 장수였는데 투항하여 로마황제의 비호를 받았다. 로마에서 로마인으로 살면서 유대인의 당대사를 썼다. 이 요세푸스의 역사서에는 예수라는 역사적 캐릭터는 실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리얼한 역사적 인물로서 중후하게 취급되고 있다.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은 바로 세례요한이 처형된 마캐루스 성채의 헤롯궁전이다. 사해의 동편에 있다. BC 100년에 지어졌는데 BC 30년에 헤롯대왕이 증축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살로메는 요염한 춤을 춘 것이다. 이 마캐루스 성채의 동쪽 절벽기슭에 세례요한이 갇혀 있었던 동굴감옥도 스산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석양에 성채를 오르는데 강풍이 휘몰아 쳤다. 리차드 스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중의 일곱 망사의 춤의 선율이 내 귓전에 흐른다. 동굴감옥을 들여다 보는 순간 2천년 세월의 동록에 숨겨진 섬뜩한 그 무엇이 나를 엄습한다. 그리고 쟁반에 올려진 세례요한의 머리가 퍼뜩 떠오른다. 이 인류의 광포(狂暴)한 역사가 과연 우리 실존에 무엇을 말하려는가? 숙고하고 또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용

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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