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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4장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 초대교회와 네로 박해의 실상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4장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 초대교회와 네로 박해의 실상

건방진방랑자 2022. 2. 2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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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와 네로 박해의 실상

 

 

초대교회의 역사는 실제적으로 시이저가 암살되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의 칭호를 획득한 이후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시대, 즉 제정 로마의 최전성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로마의 제정(帝政)은 제정이기는 하지만 공화정(共和政)의 축적된 전통의 기반 위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혹한 전제군주들이 아니었다. 초기기독교가 팍스 로마나의 평온한 분위기에서 세력을 팽창시켜 간 시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1~180 재위)에 이르는 5현제시대였다.

 

네로의 크리스챤 박해도 실상과는 달리 크게 부풀려진 이야기일 것이다. AD 64년의 대로마화재사건의 주범으로서 기독교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로마화재와 네로 황제는 실제적 관련이 없었다. 네로는 화재가 발생할 당시, 로마에서 56km나 외곽에 떨어진 안티움(Antium)의 빌라에 있었고, 로마의 방화를 사주할 하등의 로만틱한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우발적 화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17세에 로마 역사상 최초의 절대권력의 일인황제로 등극한 그가 화재발생 당시에는 크게 인기를 잃었고 따라서 민심이 그에게 화재의 원인을 돌리자, 황제 주변의 관료들이 당시 평판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던 기독교인들에게 그 화재의 원인을 덮어씌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없었다. 희생되었다면 유대인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1923년 동경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때 조선인이 희생당한 해프닝보다도 더 소규모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네로는 대중이 관람하는 무대 위에서 광대 노릇을 할 정도로 예술과 모험에 미친 사람이었고, 모든 이방인의 컬트에 심취했기 때문에, 특별히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탄압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인간이었다. 하여튼 네로는 로마사에서 애매하게 안티크리스트의 화신으로서의 누명을 뒤집어썼다.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공인되기 이전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박해를 받은 기간은 단 5년밖에 되지 않는다. 역병이 고대세계를 휩쓴 AD 250, 기독교인들에게 희생동물을 바치라고 명령한 데키우스 황제(Emperor Decius)의 치세 1년간, AD 257~259년 발레리아누스 치하에서, 그리고 AD 303~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박해가 되풀이되었지만 교회사의 과장된 기술처럼 그렇게 무자비한 대규모의 학살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기록에 의하면,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받아 순교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인의 숫자는 남자 10, 여자 7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의 로마는 시민법(jus civile)의 시대를 지나 만민법(jus gentium)의 보편주의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스토아철학사상과 결합한 자연법(jus naturale)은 보편이성이 부여하는 모든 인간이 구유할 수밖에 없는 본성상의 평등한 권리를 존중했다. 따라서 종교적 신념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 그렇게 함부로 인간을 다룰 수 있는 로마가 아니었다. 로마는 인간의 상식과 실제적 지혜를 존중하는 시민사회였고 법제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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