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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선진 제십일 - 11. 자로, 귀신을 섬기는 것과 죽음에 대해 묻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선진 제십일 - 11. 자로, 귀신을 섬기는 것과 죽음에 대해 묻다

건방진방랑자 2022. 12. 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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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자로, 귀신을 섬기는 것과 죽음에 대해 묻다

 

 

11-11. 계로(季路: 자로)가 귀신(鬼神)을 섬기는 것에 관하여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직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단 말인가?”
11-11.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이에 우직한 계로가 다시 여쭈었다: “그럼 이번에는 감히 죽음에 관하여 여쭙고자 하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직 삶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敢問死. : “未知生, 焉知死?”

 

논어전체를 통관하는 일관된 주제가 반복되면서 우리의 가슴을 파고 든다. 유교는 반종교적인 철학이 아니라, 지극히 종교적인 철학이다. 유교를 피상적인 규범적 윤리체계(the system of normative ethics)로 보았던 우리의 선입견을 불식해야 할 것이다. 유교는 모든 종교의 가능성을 포섭하는 진정한 종교다. 그것은 21세기부터 다시 개벽된 인류의 새로운 종교적 가능성으로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는 본시 인귀(人鬼)의 맥락에서 쓰이고, ‘()’천신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나지신(地神)은 기()라는 개념으로 나타냄, ‘귀신하면 이미 초자연적 신의 세계를 총칭하는 막연한 개념으로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신론적 관념은 인류사의 현실태 속에서는 항상 다신론적 토양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하느님의 관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유일신론의 유일한 가능성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가 말하는 신즉실체즉자연(Deus sive substantia sive natura)’이라는 범신론적 철학의 가능성밖에는 없다.

 

헬레니즘시대에 융성한 사조로서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것이 있었다. 영지주의에 대한 편견에 가득찬 정의는 근원적으로 재고되어야 하며 그것은 뚜렷한 운동으로서의 실체는 아니라고 최근의 신학은 주장하지만, 하여튼 영지주의라고 규정되는 어떤 막연한 흐름, 사상동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요한복음도 영지주의의 영향권에 태어난 복음서이며(불만), 바울의 신학도 기본적으로 헬레니즘문화권에 팽배되어 있던 영지주의적 사유의 틀을 마음껏 활용한 결과였다. 그런데 영지주의는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단어에 부정사 ‘a’를 첨가하면 아그노스티시즘(Agnosticism)’이 된다. 아그노스티시즘이란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고 번역된다. 즉 그노스티시즘(영지주의)은 가지론(可知論)인 것이다. 무엇을 알 수 있다는 것인가? 천상의 일, 사후(死後)의 세계, 영생하는 영혼의 운명,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삶을 그노시스(Gnosis) 즉 영지(靈知)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아그노스티시즘(Agnosticism)
가지론(可知論) 불가지론(不可知論)
영지주의 칸트의 입장
사후세계
초자연적 세계
알 수 있다 사후세계
초자연적 세계
알 수 없다

 

최근에 새로 발견된 유다복음서는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의 대표적 서물이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돈 몇 푼에 몰래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예수는 다시 하나님의 나라, 즉 빛의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유다를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유다는 타 제자에 비하여 훨씬 더 영민하고 차원이 높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가롯 유다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는 없다. 결국 예수와 유다는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한 것이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는 수고를 한 것은 예수로부터 하늘나라로 가기 위한 영지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팔려 넘겨가기 직전에 유다를 만나 하늘나라의 모든 신비에 관해 이야기해주는 대화가 유다복음서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하여튼 이렇게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는 발상이 바울의 비젼을 만들었고 요한복음파라클레토스(Parakletos, 보혜사)를 만들었고, 요한계시록의 화려한 환상을 만들었고, 몬타니즘(Montanism) 이래의 모든 휴거파의 광란을 만들었다.

 

이에 대하여 임마누엘 칸트는 아예 그러한 물자체(Ding-an-sich)나 초자연적 세계에 대해 그것은 순수이성의 권역 밖이므로 오직 그것은 불가지론의 대상일 뿐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모든 종교는 이성, 즉 순수이성과 실천이상의 한 계 내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적 과제는 이성적 약속이 되고 만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신이나 영혼불멸이나 자유를 논리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179410, 칸트는 프러시아의 왕으로부터 직접 편지를 받았다: ‘교계의 가장 높은 사람이 그대가 얼마나 그대의 철학을 활용하여 성경과 기독교의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이론들의 근거를 궤멸시키고 천박하게 만드는지, 대단히 불쾌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관찰하여 왔노라우리의 불쾌를 제거할 수 있는 성실하고도 양심적인 대답을 즉각 요구하노라. 그대의 신하된 의무에 합치하여 그대의 재능과 권능을 우리의 자비로운 목적이 성취될 수 있도록 활용키를 바라노라. 계속 저항한다면 가장 불쾌한 결과가 그대 자신에게 초래되리라는 것을 그대 자신이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칸트는 즉각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민으로서 이에 엄숙히 선서하노이다. 자연종교이든 계시종교이든, 종교에 관한 모든 공적 언급을 강의나 저작 속에서 삼가겠나이다.’ 그는 이 약속을 왕이 죽을 때까지만 지켰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사후에 발견된 비망록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 다: ‘자기의 내면의 심오한 신념을 철회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야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침묵은 신민의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친구에게 쓴 편지 속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불성실한 마음의 의식으로부터 생겨난 자존의 상실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악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양심을 어기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자는 칸트와 같이 압력을 받을 일이 없었다는 것이 천행이기는 했지만, 여기 자로가 제기한 귀신의 문제나 죽음의 문제에 관하여 일단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한다. 자로가 질문을 던진 것은, 물론 상하문맥의 논리적 필연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편집자의 의도 속에서는 안회의 장례를 치르면서 느낀 어떤 허무감이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 같은 것이 그를 엄습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이 죽은 후엔 어떻게 될까? 안회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감히 죽음에 관하여 여쭙겠나이다.’

 

이러한 자로의 충직한 질문에 공자는 강펀치를 정면으로 날려 버린다: “이 녀석아!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 그 삶에 대해서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 죽음을 논할 필요조차 있겠느냐?” 여기 공자의 대답의 위대함은 불가지론을 취하면서도 그 불가지의 대상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귀신이나 죽음에 대한 관심을 인간과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시키고 있을 뿐이다.

 

인간[] 귀신(鬼神)
[] 죽음[]
이것도 아직 다 모른다 말해 무엇하리요?

 

귀신과 죽음에 대한 관심 속에서 평생을 지내면서 묵시의 환상을 키울 것인가? 인간과 삶의 현장 속에서 땀흘리고 살면서 생명의 희열을 느낄 것인가? 앞으로 오는 이 땅의 학동들이여! 스스로 결정할지어다.

 

감문사(敢問死)’ 앞에 있는 ()’은 영락대전본 및 타 집주본에는 없다. 그러나 완본(阮本)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정평간본(正平刊本) 등 집해고본에는 모두 이 있다. 집주에 이 없는 것은 단순한 오탈(誤脫)로 간주되고 있다(완원阮元 교감기).

 

 

은 어건(於虔) 반이다. 귀신을 섬김에 대하여 물은 것은 제사를 받드는 바의 뜻을 구한 것이다沃案, 동방인들에게는 이것이 역사의 의미와 상통한다. 그리고 ()’라는 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절실한 질문이다. 그러나 성()과 경()이 사람을 섬기는 데 충분하지 아니 하면, 반드시 하느님을 섬길 수도 없는 것이다. 근원을 캐어 삶의 문제를 온전하게 알지 못하면 종()으로 돌아가() 죽게 되는 이치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沃案, 원시(原始)와 반종(反終)이 하나의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 대저 유(: 어두움)ㆍ명(: 밝음)과 시(: 시작, )ㆍ종(: , 죽음)이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아니다. 단지 배움에 차서가 있어 함부로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이와 같이 말씀해주신 것이다.

, 於虔反. 問事鬼神, 蓋求所以奉祭祀之意. 而死者人之所必有, 不可不知, 皆切問也. 然非誠敬足以事人, 則必不能事神; 非原始而知所以生, 則必不能反終而知所以死. 蓋幽明始終, 初無二理, 但學之有序, 不可躐等, 故夫子告之如此.

 

 

동방인의 유()와 명()의 사상은, 요한복음의 빛과 어둠과 동일한 사상이다. 단지 중동문명권ㆍ헬레니즘문명권에서는 어둠과 빛을 단절적으로 생각하였고, 황하문명권에서는 어둠과 빛을 연속적으로 생각하였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세계가 어둠이고 하늘나라가 빛인데, 동방인의 세계관에서는 이 세계가 빛이고 하늘나라가 어둠이다.

 

 

정이천이 말하였다: “낮과 밤은, 삶과 죽음의 도()이다. 삶의 도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의 도를 안다. 사람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면 반드시 신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게 된다. 죽음과 삶, 인간과 하느님은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부자께서 자로에게 충분하게 말해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야말로, 가장 깊게 이러한 문제를 일러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程子曰: “晝夜者, 死生之道也. 知生之道, 則知死之道; 盡事人之道, 則盡事鬼之道. 死生人鬼, 一而二, 二而一者也. 或言夫子不告子路, 不知此乃所以深告之也.”

 

 

오랜만에 정이천의 주석이 요령을 얻고 있다. 주야(晝夜)가 곧 사생(死 生)의 도()라는 이 한마디는 20세기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심층심리학적 아키타입(archetype)이론이나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의 종교사학적 아키타입이론의 선구를 이루는 명언이라 할 수 있다. 삶이나 죽음이나, 낮이나 밤이나, 빛이나 어둠이나, (, )이나 귀(, ), 천국이나 세상이나,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반복되는 패턴이며, 양식이며, 심층의식의 구조인 것이다. 우리의 체험을 신화화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화를 체험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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