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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안연 제십이 - 10. 덕을 숭상하는 법과 미혹됨을 분별하는 법을 말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안연 제십이 - 10. 덕을 숭상하는 법과 미혹됨을 분별하는 법을 말하다

건방진방랑자 2022. 12. 6.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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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덕을 숭상하는 법과 미혹됨을 분별하는 법을 말하다

 

 

12-10. 자장이 덕()을 높이고 미혹됨[]을 분변하는 방법에 관해 여쭈었다.
12-10. 子張問崇德, 辨惑.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과 신()을 내 가슴속의 원칙으로 삼고, ()를 보면 곧바로 의를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덕을 높이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좋아하면 그것이 잘되기를 바라고, 싫어하면 그것이 못되기를 바란다. 이미 잘되기를 바라면서 또 못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모순된 감정, 그것이 바로 미혹[] 이니라. 이런 노래가 있지 않니? ‘진실로 내면의 풍요로움을 구하지 아니 하고 단지 외면의 색다름만 구해 떠도는 너 인간이여!’ 인간의 미혹된 모습이로다.”
子曰: “主忠信, 徙義, 崇德也. 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旣欲其生, 又欲其死, 是惑也. 誠不以富, 亦祗以異.”

 

문제가 많은 장이나 나는 문의(文義)에 즉하여 창조적으로 번역하였다. 여기 자장의 질문 중에 제기된 숭덕(崇德), 변호(辨惑)은 자장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예부터 내려오는 격언이나 금언 속의 말이었을 것이다. ‘()’()’이 운을 밟고 있으며, 같은 편 12-21에는 번지의 질문으로 숭덕(崇德), 수특(脩慝), 변혹(辨惑)이 또 나오고 있는데, 거기서도 ()’()’()’은 어김없이 각운(脚韻)을 밟고 있다.

 

여기 ()’이란 것은 인간이 무자각적으로 범하게 되는 모순적 상황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인간은 미혹하게 되는 것이다. 자장은 미혹의 분변(分辨)을 질문했지만 공자는 미혹 그 자체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으로써 미혹의 분변을 대신한다. 역시 공자다운 훌륭한 화법이다. ‘주충신(主忠信)’1-8, 9-24에 이미 나왔다. 그런데 고주계열에서는 이것을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을 따른다고 해석한다. ‘()’따른다는 뜻으로 보고, ‘충신(忠信)’을 나의 내면의 충신이 아니라 타인의 덕성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고주를 따르지 않고 신주를 따랐다. ‘사의(徙義)’7-3에 매우 명료한 용례가 있다.

 

다음에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 오지욕기사(惡之欲其死)’를 누구든지 사랑하면 그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면 그가 죽기를 바란다고 번역하는데, ()ㆍ오()의 감정의 대상으로서 생()과 사()를 물리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권모와 술수의 조정의 이야기는 될 수 있어도 보편적 논리가 될 수 없다. 선진철학에 있어서 생()과 사()라는 것은 밤과 낮처럼 흔하게 쓰이는 메타포이며 여기서도 애오의 감정과 함께 쓰인 추상적 함의가 짙다. ‘견강자사지도(堅強者死之徒, 유약자생지도(柔弱者生之徒)’라는 노자의 말(76)대로 생과 사를 과정적 함의로서 해석함이 옳다. ‘욕기생(欲其生)’잘되기를 바란다’, ‘욕기사(欲其死)’ 못되기를 바란다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나의 새로운 해석이다. ‘이미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못되기를 바란다[欲其生, 又欲其死]’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감정일 수도 있고, 다수의 대상에 대한 다른 감정일 수도 있다. 결국 나의 내면에서는 다 이율배반적 감정이다. 결국 인간의 미혹이란 인간의 감정의 호오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문제의식이 선진경전에도 함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최근 발굴되는 죽간문헌에 나타나는 성정설(性情說)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문제가 이미 전국 초기로부터 얼마나 심도있게 다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은 어떤 본질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호오의 정()에 포섭되는 문제일 뿐이다.

 

마지막의 성불이부(誠不以富), 역지이이(亦祗以異)’시경소아(小雅)에 나오는 아행기야(我行其野)라는 노래의 마지막 두 구절인데, 소박맞은 여인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 남자에 대한 원망을 읊은 시이다. 마지막 네 구절은 이와 같다.

 

不思舊姻 옛 혼인사랑 생각지 않고
求爾新特 새 여자를 구해다니는 그대
成不以富 진실로 돈 때문도 아니요
亦祗以異 단지 색다른 여인의 맛 때문이지

 

정이천은 이 마지막 두 구절이 착간일 뿐이며 계씨12 제경공유마천사(齊景公有馬千駟)’ 장의 기사지위여(其斯之謂與)’ 앞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토록 송유를 저주하는 소라이(荻生徂徠)조차 그 주장이 정당하다고 시인했다[今從之]. 그러나 나는 노래라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것이고, 꼭 그것이 착간으로서 16-12로 편입되어야만 할 필연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여 여기 문의에 맞게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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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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