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속언 활용의 제양상
1. 공식적 언어생활에의 활용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 별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이다.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는 시정기(時政記)와 사관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史草), 각사의 등록(謄錄) 그리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였고, 문집ㆍ일기ㆍ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 편찬 과정은 각방의 당상과 낭청(郎廳)이 자료를 분류하고 중요한 자료를 뽑아 작성하는 초초(初草), 그리고 도청에서 그 내용을 수정ㆍ보완하는 중초(中草), 마지막으로 총재관과 도청의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고 최종적으로 수정ㆍ첨삭을 하여 완성하는 정초(正草)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복잡하고 엄정한 절차로 만들어진 『실록』에 흥미롭게도 임금들의 속언 사용이 빈번히 보인다.
연산군실록의 속언
『연산군실록』에 기록된 속언은 모두 9건인데, 그것들은 모두 ‘쥐를 때려잡고 싶어도 그릇을 깰까 못한다[投鼠忌器]’라는 중국 기원의 속언을 사용한 것이었다. 또 4건이 기록된 세종도 ‘투서기기(投鼠忌器)’가 2회, ‘우리나라의 법은 삼일이면 없었던 것으로 된다[我國之法, 三日而廢]’는 속언이 1회, ‘임금은 항상 깊은 궁 안에 있으므로 바깥사람과 서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다. 만약 대낮에 밖에 나오면 그 나라에 흉한 일이 생긴다[人君長在深宮, 不令外人相見可矣. 若於白日出外, 則其國有凶.]’는 고언(古諺)이 1회 사용되었다.
영조의 파격적인 언어생활
조선의 임금 가운데 52년의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졌던 영조가 가장 많은 속언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됨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가 사용한 속언 가운데는 일국의 지존으로서 입에 담기 어려운 비속한 것, 예를 들어 ‘네 똥을 먹고 천 년을 사느냐[食汝糞而生千年乎]’와 같은 속언을 신하들 앞에서 사용한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니 똥 먹고 천년 사나 내 똥 먹고 만년 산다’가 원형이다. 그가 이 속언을 쓴 배경은, 당시의 사직(司直) 조영순(趙榮順)이 최석항(崔錫恒)ㆍ이광좌(李光佐) 등에게 관작을 회복시킨 일에 대하여 인의(引義)하고 스스로 고귀(告歸)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보던 영조가 조영순을 사판(仕版)에서 영원히 지우게 하자 신하들이 그를 옹호한 것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신하들이 물러가지 않고 탕제의 복용을 간청하자 영조가 위의 속언을 인용하며 불편한 심사와 노골적인 비아냥을 속언으로 표현한 것이었다【『承政院日記』, 영조 48년 11월 22일(癸丑) ; 영조실록 卷119, 48년(1772) 11월 19일(경술)3번째 기사 참조.】.
또 영조는 탕평정치가 주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붕당을 이루어 서로 파괴적인 비방과 무고를 일삼는 신하들에게 그러한 행태를 중지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종용할 때도 속언을 활용하였다.
붕당(朋黨)의 폐단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문(斯文)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더니, 지금에는 한편의 사람을 모조리 역당(逆黨)으로 몰고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도 역시 어진 사람과 불초한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어찌 한편 사람이라고 모두가 같을 리가 있겠는가? 각박하고 또 심각해져서 유배되었다가 다시 찬축(竄逐)되었으니, 그 가운데 어찌 억울한 사람이 없겠는가? 한 여자가 억울함을 품어도 5월에 서리가 내리는데, 더구나 한편의 여러 신하들을 모조리 제도(諸道)에 물리치는 일이겠는가?
朋黨之弊, 未有甚於近日. 初以斯文 起鬧, 今則一邊之人, 盡驅之於逆黨. 三人行亦有賢、不肖, 豈有一邊人同一套之理? 刻而又深, 流而復竄, 其中豈無抱冤之人乎? 一婦含冤, 五月飛霜. 況一邊諸臣, 盡逬於諸道者耶?
…… 피차가 서로를 공격하여 공언(公言)이 막히고 역당으로 지목하면 옥석이 구분되지 않을 것이니, 저들이 나를 공격하는 데 장차 가려서 하겠는가, 가리지 않고 하겠는가? 충직한 사람을 뒤섞어 거론하여 헤아릴 수 없는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은 그들이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는 나의 말이다. 이는 바로 속언에서 말하는 ‘입에서 나간 것이 귀로 돌아온다’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조정이 언제 안정되며 공의(公議)가 언제 들리겠는가?
…… 彼攻此擊, 公言枳塞, 目以逆黨, 玉石不辨, 彼所攻我, 其將擇乎? 不擇乎? 混擧忠直之人, 幷驅罔測之科, 非彼之創也, 是我之言也. 此正諺所謂‘出乎口, 反乎耳’者也. 如此而朝著何時乎定, 公議何時乎聞? -『英祖實錄』 卷3, 영조 1년(1725) 1월 3일(壬寅) 2번째 기사.
영조는 숙종조에 있었던 사문난적의 시비에서부터 당색에 따라 충역을 구분하는 당시의 상황으로 억울한 신하들의 희생이 뒤따르고 소모적인 당쟁의 폐해는 그것을 야기한 이들에게 결국 되돌아올 것이라는 훈계를 속언을 빌어 나타냈다.
속언으로 함경감사를 경계한 철종
철종도 함경감사 조득림(趙得林)이 하직 인사를 하자 그에게 “수령의 선악은 전적으로 방백(方伯)에게 달려 있다. 속언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이 흐리다.’ 했으니, 위에 있는 자가 정직하게 자신을 단속하면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고 하며 속언을 인용하여 감사로서 모범적인 처신을 하도록 일깨웠다【『國朝寶鑑』 卷90, 철종조 4】.
정조, 옥사를 심사하며 속언을 쓰다
정조는 살인에 관한 옥사를 심사하여 판부할 때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실제 증거를 가지고 도둑을 잡아서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훈계를 속언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노장이 재물을 잃어버리고는 김남원금(金南原金)을 의심하여 밧줄로 묶고 주리를 틀었는데, 김남원금의 어미 황녀인(黃女人)이 와서 구하다가 떠밀려 21일 만에 죽었다.
[상처] 왼쪽 늑골이 검고 굳었다.
[실인] 떠밀린 것이다. 을묘년(1795, 정조19) 9월에 옥사가 성립되었다.
[본도의 계사] 훔친 사실을 추궁하면서 몹시 노여워 혹 떠밀기는 했으나, 다 죽어가는 늙은이의 실낱같은 목숨이 저절로 다한 것이지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차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증도 명확하지 않으니 실정이나 자취로 볼 때 참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형조의 계사] 옥사의 실정은 실로 정상 참작하여 용서하는 것이 합당하니, 도신의 계사에서 이미 참작하여 처결하였다고 했습니다.
[판부] 함양의 죄수 노장과 성주(星州)의 죄수 강육손(姜六孫) 등은 도백이 이미 가벼운 쪽으로 처결하여 보낸다고 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억지로 트집을 잡아 말하겠는가마는, 노장의 행위는 죽여도 아깝지 않다고 말할 만하다. 속언에 ‘뒤에 짊어진 짐을 보고 도적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감히 분명하지도 않은 떠도는 말을 듣고 평민을 함부로 의심하여 몇 명의 장정을 모아 한밤중에 명화적(明火賊)이 여염집에 들이치듯 쳐들어갔으며 사사로이 악형(惡刑)을 시행하여 흉포하고 패악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다 죽어가는 노파가 이 일로 인해 죽고 말았다. …… 안타깝다! 도백과 수령은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한 도를 맡아 다스리라는 명을 받은 자로서 ‘살리는 사람이 도로 사람을 죽인다’는 의리를 완전히 소홀히 하여 도리어 절대로 살려 주어서는 안 될 옥사를 살려주는 쪽으로 처결하였으니, 이러한 도백과 수령을 어디에 쓰겠는가?
-『審理錄』 卷30, 정사년(1797) 3, 咸陽 盧嶂의 옥사.
정조는 『서경』에 나오는 성왕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정치적 재량권을 확대하고 국왕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왕은 ‘도덕적 모범자’이기보다는 정치와 외교는 물론 담력에 있어서도 비범한 정치가이자 적극적인 정치가였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정조는 “삼대 이후로 사도(師道)가 비록 땅에 떨어졌으나 예악과 형정은 군도(君道)가 비롯되는 바로서 다스리고 가르치는 뜻이 실로 같다. 그러니 오늘날 군사(君師)의 책임을 내가 감히 자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正祖, 『弘齋全書』 卷170, 日得錄 10.】”라고 하며 형정 역시 자신이 다스리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심리록의 판부에서도 그 역할을 다하고자 하였다【정순옥(2003), 정조의 법의식-심리록 판부를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21권, 호남사학회, 56~58면. 참조】. 신민을 일깨우는 군사를 자처한 그였기에 어려운 용사보다는 민간에서 쓰이는 속언을 활용하여 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그 의미를 일깨우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보고서에 속언을 사용한 허목
허목(許穆, 1595~1682)은 1650년에 정릉참봉으로 처음 출사하여 공조 정랑,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를 거쳐 장령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효종의 상사 때 복상(服喪)의 잘못을 거론하는 상소를 올려 1660년에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2년여에 걸친 그의 재직기간 동안 가장 큰 문제는 기근이었다. 본래 다른 지역보다 척박하던 삼척 지역이 연이어 큰 흉년을 만났는데 허목이 부임하던 해에 심한 한재(旱災)를 입어 모내기를 반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모내기를 한 곳도 이삭이 패지 않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백성들의 참혹한 실정을 목도한 허목은 지방세를 감면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민생구제에 힘을 기울였다【許穆, 記言 卷37, 乞山田免租狀 , 221면.】.
토지의 마땅함에 따라 생산되는 곡식이 같지 않으니, 예를 들면 중국의 청주(靑州)와 형주(荊州)에는 기장이 없고 기주(冀州) 북쪽에는 벼가 없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없는 것을 요구하여 천하에 비축해 두는 곡물을 똑같게 한다면,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에는 반드시 구주(九州)에서 생산되는 오곡을 기재해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이 두 곡물이 생산되지도 않으면서 백성의 병폐가 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매년 원곡 이외에 비모(費耗)는 해마다 늘어나 원곡의 두 배, 다섯 배로 늘어나고, 천 배, 만 배로 늘어날 것이니, 곡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폐해는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변통하지 않는다면 그 폐해는 백성으로 하여금 반드시 유리걸식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고 말 것입니다. 비축된 것으로 말하면, 속언에 “쭉정이가 만 섬 가득해도 알곡 백 섬이나 열 섬만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이 일이 바로 그 짝입니다.
土之所宜, 生穀不同, 如靑ㆍ荊無稷, 冀北無稻, 必責其所無以均天下之積儲, 則周官職方, 必不載九州五穀之所出, 今此二穀無產, 而爲民病者莫此之甚, 而年年元穀之外, 費耗歲增, 至於倍蓰, 至於千萬, 粟愈多而弊愈甚, 此不變通, 則其弊令民必至於流離, 以積儲言之, 諺曰: “虛殼滿萬, 不如實粒百十,” 與今日此事, 正相類也. -許穆, 記言 卷37, 陟州記事, 穄稷事申請粘移狀, 223면.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어 죽을 상황에서도 상평창에 비축된 기장을 대출받기를 꺼리는 이유에 대해 알곡이 적은 기장이 먹을 때는 실속이 없고 수확하여 갚을 때는 괴롭고 힘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관련 속언을 예시하여 효과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처럼 민생 구제를 위한 보고서에도 속언이 사용되었다.
▲ 정조가원조시절에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한글은 일반백성 뿐 아니라 임금에게도 좋은 소통의 도구였다.|국립한글박물관 소장
2. 한시의 소재로 활용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은 속언 중에서 절묘한 것들은 가락이 착착 들어맞는다는 김상숙(金相肅, 1717~1792)의 말을 인용하며 ‘蜻蛉蜻蛉, 往彼則死, 來此則生[잠자리야 잠자리야, 저리 가면 죽고 이리 오면 산다]’와 같은 속언은 아무런 이치가 담겨 있지는 않지만 가락에 맞는 협운의 특성을 지닌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三尺髥, 食令監[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영감이다]’, ‘看新月, 坐自夕[새벽달 보자고 저녁부터 기다린다.]’, ‘久坐雀, 必帶鏃[오래 앉은 참새 화살 맞는다.]’ 등의 속언도 운어를 이룬다고 하였다【成大中, 『靑城雜記』 卷4, 醒言. 金坯窩曰, 俚語之妙者, 無不合韻. 蜻蛉蜻蛉, 往彼則死, 來此 則生, 此直無理俚謠, 而亦諧於韻. 如所謂三尺髥食令監, 看新月坐自夕, 久坐雀必帶鏃, 皆成韻語, 似此類者甚多.】.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한시의 소재로 속언을 직접 사용하였다. 그는 연속언(演俗言)이라는 제목으로 4개의 속언과 그에 관한 풀이를 5언 혹은 7언의 한시 형식으로 풀어냈다. 그 가운데 두 수를 제시한다.
「가마 밑도 검고 솥 밑도 검어[釜底黑鼎底黑]」
鼎底雖黑釜未白 | 솥 밑이 검다지만 가마도 희진 않으니 |
釜底莫笑鼎底黑 | 가마 밑아 솥 밑이 검다고 웃지 말거라 |
由來此醜誰所取 | 이 더러운 것을 본디 누가 취하였는가 |
摠爲將軍不負腹 | 다 장군이 배를 저버리지 않은 격일세 |
「말 가는데 소도 가니[馬亦行牛亦行]」【朴世堂, 『西溪集』, 「石泉錄」 中, 演俗言 四首, 51면.】
牛行雖遲馬行速 | 소걸음이 느리고 말걸음이 빠르다 한들 |
馬行百里牛亦得 | 말이 가는 백리 길을 소도 갈 수 있다네 |
牛言我後君且先 | 소가 “내 뒤에 갈 테니 자네 앞서 가게 |
日暮期君店門前 | 저물녁 여관 문 앞에서 만나세나” 하네 |
위의 ‘부저흑정저흑(釜底黑鼎底黑)’, ‘마역행우역행(馬亦行牛亦行)’은 『열상방언(冽上方言)』외에도 여러 속언집에 수록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속언이다. 이 시는 가마가 솥과 마찬가지로 배가 불룩한 것 외에 내세울 것이 없는데도 솥의 밑이 검다고 비웃는 것을 통하여 자신도 내세울 것이 없으면서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내포한다. 특히 전구와 결구에서는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의 일화를 활용하여 이러한 경계의 가르침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중국 송나라의 대장군인 당진(黨進)이 어느 날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나는 너를 저버리지 않았다.”라고 말하자 주위의 사람들이, “장군은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이 배는 장군을 저버리고 약간의 지략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일화를 활용하여 공연히 다른 것을 거론하여 비난을 자초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祝穆, 『古今事文類聚』 後集卷20, 「腹負將軍」.】.
이처럼 널리 알려진 속언을 제목으로 먼저 제시하고 그 의미를 4구의 한시로 풀이한 이 작품은 속언을 소재로 활용하여 그 의미를 한시로 재미있게 풀이하였다는 의의 외에도 기층 대중의 삶에서 만들어진 속언을 상층 지식인의 문학 형식에 결합시키는 독특한 유형을 만들어냈다는 의의도 갖는다.
뿐만 아니라 박세당의 속언을 활용한 한시 작품은 권근(權近, 1352~1409)이 큰 비를 소재로 읊은 한시【權近, 『陽村集』 卷9, 「癸未正月二十三日大雨」, 107면. 今年正月異他年, 隔日陰晴雨雪連, 久訝玉 峯浮地上, 忽驚銀箭滿雲邊, 詩懷竟夕難排悶, 病耳通霄耿不眠, 俚諺比方娘手大, 誰將理數問蒼天.】에서 속언을 직접 노출하여 효과를 달성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효과를 거두고 있다.
3. 해학과 조롱의 수단
해학(諧謔)은 예교(禮敎)를 앞세운 조선 지식인들에게 금기시되는 단어 중의 하나였다. 조선전기에 긴장된 관료생활의 경직성을 해소하고 사대부의 심심파적으로 이용되던 골계류(滑稽類)의 찬집과 유행이 중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점차로 사라지게 된 것도 어쩌면 엄숙한 유교적 예교주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이와 같이 엄숙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방달한 삶의 방식을 택하였고 이단으로 취급되던 도불(道佛)에 경도되었으며 서얼과 통교하였다. 한편 고문가로 자처하면서 옛사람의 글을 본뜨지 말고 평이하면서도 유창한 자신만의 글쓰기를 강조하였다【許筠, 『惺所覆瓿稿』 卷12, 「文說」, 238면.】. 그의 방달불기한 이단적 성향과 고문 지향의 창작의식은 문학적으로 어떻게 융합될 것인가?
자네의 애첩은 매우 깜찍하고 지혜로워 젊음이 잠깐임을 반드시 알 것인데, 그녀가 비구니가 되어서 끝까지 절개를 지킬 것인가? 속언에 열 번 찍어 넘어지지 않을 나무가 없다고 했으니 잘해 보게나. 그녀가 비록 금빛 휘장과 맛좋은 고아주(羔兒酒)의 맛에 익었지만 눈 녹은 물에 끓인 차도 특별히 운치 있는 일이네.
君家文君甚警慧, 必知春色片時. 其肯爲沙吒利終守節乎? 諺曰, ‘十斫木無不顚,’ 君其圖之. 彼雖熟金帳羔兒之味, 雪水煎茶, 殊亦雅事.
만일 그녀가 나를 찾아온다면 반드시, 하마터면 인생을 헛되어 보낼 뻔했다고 말할 것이네. 자네가 그녀에게 나는 놈 위에 타는 놈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일 걸세.
使其過我, 必曰幾乎虛度此生也. 君語之曰, ‘飛者上有跨者’, 則必動於言矣. -許筠, 惺所覆瓿稿 卷21, 與李汝仁 戊申四月, 319면.
위의 편지는 허균이 1608년 4월에 절친한 벗인 이재영(李再榮, 1553~1623)에게 부친 편지인데, 애첩 때문에 애가 단 친구를 속언을 이용하여 놀리고 도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속언은 허균의 방달불기한 성향을 척독에 잘 융합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덕무는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당시의 인정물태를 잘 형용한 예로써 유명한 풍속화가인 조영석의 동국풍속도에 대하여 허필(許佖, 1709~1761)【許佖: 1735년(영조 1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과 시ㆍ서ㆍ화에 전념하여 당시에 三絶로 불렸다. 李用休가 쓴 허필의 誌銘에는 청빈하고 소탈한 성격과 文學과 古藝 術品을 사랑하는 태도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모든 書體에 능통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篆書와 隷書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仙槎唱酬錄과 烟客遺稿客가 있다.】 등이 시 형식으로 품평한 말을 수록하였다.
어떤 사람이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이 그린 동국풍속도(東國風俗圖)를 수집하여 그대로 그린 것이 70여 첩이 되었다.
연객(煙客) 허필(許佖)이 이언(俚諺)으로 평을 했는데, 세 여자가 재봉하는 그림에 쓴 것은, 한 계집은 가위질 하고[一女剪刀] 한 계집은 주머니 접고[一女貼囊] 한 계집은 치마 기우니[一女縫裳] 세 계집이라 간(姦)이 되어[三女爲姦] 접시를 뒤엎을 수 있겠군[可反沙碟]이라고 하였다.
有人輯摹趙觀我齋榮祏所畵東國風俗, 凡七十 餘帖. 許烟客泌, 以俚諺評, 其題三女裁縫曰, 一女剪刀, 一女貼囊, 一女縫裳, 三女爲姦, 可反沙碟.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2, 「耳目口心書」, 443면.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이 그림을 보면, 세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재봉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에 대하여 허필(許佖)은 앞의 세 구절에서 차분히 재봉에 열중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각각 묘사하다가 끝의 두 구절에서 난데없는 “여자가 셋 모이면 새 접시를 뒤집어 놓는다”는 속언을 활용하여, 그림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아낙들이 지닌 고유의 유쾌한 속성을 드러내는 해학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4. 속언을 변증 재료로 활용하다
이규경(李圭景)은 조부인 이덕무에서부터 부친 이광규로 이어져 온 박학과 실용의 학문 성향을 계승하여 명물도수(名物度數)와 박물학(博物學)을 중시하였다. 그의 학술의 집대성으로 평가되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완성에는 사물의 시말을 밝히려는 벽(癖)이라고 부를 정도의 열정적인 학문 자세와 박학다식을 열망하며 사소한 기록조차 소중히 간직하는 기록정신, 차기(箚記)와 변증(辨證)의 서술방식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한 예가 충주 지역의 형세를 변증하기 위한 재료로 속언을 활용한 것이다.
속언에 전하기를, “충주에는 삼다(三多)가 있으니 석다(石多)ㆍ인다(人多)ㆍ언다(言多)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충주는 고을에 돌무더기가 많고, 고을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른 고을에 비해 대단히 번성하다. 사람들이 많은 까닭에 허무맹랑한 말들이 만들어져 구설의 고장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니 속언이 근거 없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俗諺相傳曰, 忠邑有三多, 石多人多言多. 蓋邑中多磊磧, 村多人聚, 比他邑殷盛, 人多, 故作謊誕之說, 爲口舌場. 至今尙然, 則俗諺非誣傳矣.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天地篇, 地理類, 州郡 忠州形勝辨證說.
이규경은 ‘충주에는 삼다(三多)가 있다’는 속언을 이용하여 충주의 지리적 특성과 행정규모에 따른 인구의 다소를 차례로 짚어 가며 지세를 변증하였다. 이와 같은 속언 이용 방식은 다른 문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박물고증을 추구하는 이규경의 학문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4. 마무리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한문학에서의 이속(俚俗)의 수용 여부는 특정한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 개인의 문학관 내지 창작관의 영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비리하고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속언으로 제한하기는 하였지만, 조선 전기부터 작가들은 비리한 속언을 그들의 문학 작품 속에 수용하고 있으며 그 수용 의도 역시 실용성과 교훈성의 측면에서부터 유희적인 해학이나 조롱 그리고 문학의 효과적인 수사기교 그리고 대상을 직관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변증적 연구의 자료로서도 활용하고 있다.
이로 볼 때, 한문학에서의 ‘이속’의 수용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한문학의 특화된 양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전시기에 걸치는 한문학의 다양한 양상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인용
1. 문제의 제기
2. 조선조 제가의 속언 인식
3. 속언 활용의 제양상
1. 공식적 언어생활에의 활용
2. 문학 창작의 재료로 활용
1) 함축과 비유, 참신성의 조성
2) 한시의 소재로 활용
3) 해학과 조롱의 수단
4) 변증 재료에의 활용
4.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