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②
노새에게 덧붙여진 짐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이런 시가 실려 전한다. 한 사나이가 길을 가다가 나귀를 타고 가는 미인을 만났다. 선녀가 적강(謫降)한 듯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그만 발길이 얼어붙었다. 연정의 불길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즉석에서 시를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
心逐紅粧去 身空獨倚門 | 마음은 미인 따라 가고 있는데 이 몸은 부질없이 문 기대 섰소. |
넋은 이미 그대에게 빼앗겨 버리고 나는 빈 몸뚱이만 남아 문에 기대 섰노라는 애교 섞인 푸념이었다. 그녀가 답장을 보내왔다.
驢嗔車載重 却添一人魂 | 노새는 짐 무겁다 투덜대는데 그대 마음 그 위에 또 얹었으니. |
그녀의 대답은 도무지 뚱딴지같다. 당신이 내 마음을 온통 다 가져 가 버렸으니 책임지라는 말에 그녀는 나귀 걱정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늙은 나귀는 등에 태운 미인도 무겁다고 연신 가뿐 숨을 씩씩대며 몰아쉬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사람의 넋을 더 얹었으니 나귀만 더 죽어나게 생겼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마음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사나이의 발길을 묶어 꼼짝도 못하고 서게 만들었으니 대단한 무게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이 답장은 기실, ‘나를 향한 그대의 마음을 내 마음속에 접수했노라’는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눈길에 내 마음도 철렁 내려앉았고, 그 내려앉은 무게만큼 노새만 더 괴롭겠다는 멋들어진 응수이다. 일상적인 예상을 빗겨가는 이러한 비약에는 참으로 사람을 미혹케 하는 예술적 매력이 넘쳐흐른다. 글자는 스무 자에 지나지 않는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감정과 씩씩대는 나귀의 숨소리, 그와 함께 커져 가는 두 사람의 맥박 소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지 않은가.
두 마리 개를 통해 감정을 극대화시키다
靑裙女出木花田 | 푸른 치마 아가씨 목화 따러 나왔다가 |
見客回身立路邊 | 길손과 마주 치자 길가로 돌아섰네. |
白犬遠隨黃犬去 | 흰둥인 누렁이의 뒤를 따라 달리더니 |
雙還却走主人前 | 주인 아씨 앞으로 짝 지어 돌아오네. |
신광수(申光洙)의 「협구소견(峽口所見)」이란 시이다. 푸른 치마 아가씨가 목화밭에 목화 따러 나왔다. 목화 바구니를 들고 가다가 저만치서 오는 낯선 남정네를 본 그녀는 부끄러워 내외를 하느라 길 가로 다소곳이 몸을 돌리고 서 있다. 그때 그녀가 함께 데리고 나온 누렁이란 녀석이 컹컹 짖으며 앞으로 달려 나오고, 흰둥이란 녀석도 질세라 누렁이를 뒤쫓아 간다. 그리고는 두 놈이 어우러져 뒹굴며 장난치다가 깜빡 생각났다는 듯이 주인 아가씨 앞으로 짝을 지어 달려들고 있다.
1.2구에는 푸른 치마와 흰 목화밭, 부끄러워 돌아선 그녀의 붉은 홍조가 빚어내는 색채의 선명한 대비 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시인이 만일 ‘너무나 수줍은 아름다운 그 모습,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네’와 같이 표현했다면, 이것은 시가 아니라 유행가의 가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돌연하게도 두 마리의 개를 등장시켰다. 멀리 떨어져 있던 누렁이를 흰둥이가 쫓아가서는 어느새 어우러져 이 보란 듯이 제 주인에게 돌아오듯, 멀리서 조금씩 가까워지며 설레어버린 마음을, 그 아가씨와 다정히 앉아 정겨운 대화라도 나누고픈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녀는 흰둥이와 누렁이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나그네에게 들켜 버린 것만 같아 부끄러워 얼굴이 더욱 붉어졌을 테고, 가슴은 두방망이질 쳤을 게다. 2구와 3구 사이에 생긴 시상의 단절과 비약, 이 의도적인 의미의 단절과 암시적 결합 속에 바로 이 시의 참 묘미가 있다.
인용
1. 그리지 않고 그리기①
2. 그리지 않고 그리기②
3. 그리지 않고 그리기③
4. 말하지 않고 말하기①
5. 말하지 않고 말하기②
6. 말하지 않고 말하기③
9. 정오의 고양이 눈①
10. 정오의 고양이 눈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