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대궐 버들 푸르른데③
이튿날 권필은 혹독한 형벌로 인해 들것에 실려 동대문을 나섰다. 그는 평소 몸이 약했던 데다 상처가 심해 바로 발행하지 못하고 동대문 밖 민가에 머물고 있다가 벗들이 권하는 막걸리를 마시고 장독(杖毒)이 솟구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시참(詩讖)이 전해진다. 처음 민가에 머물 때 주인 집 문짝에 시가 한 수 써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三月將盡四月來 | 삼월도 다 가고 사월이 오려는데 |
桃花亂落如紅雨 | 복사꽃만 붉은 비인 양 어지러이 떠지네. |
勸君更進一盃酒 | 그대에게 한 잔 술 다시금 권하노라 |
酒不到劉伶墳上土 | 술도 유령(劉伶)의 무덤 위에는 이르지 못하리니. |
그런데 시를 써놓은 사람이 첫 구의 ‘권(勸)’을 ‘권(權)’으로, 2구의 ‘유(劉)’를 ‘유(柳)’로 각각 잘못 써 놓았다. 이렇게 바꿔 쓰고 보니 그 내용이 흡사 권필(權韠)이 유씨(柳氏)에게 한잔 술을 올리지만 그 술을 유(柳)가 받지 않는 꼴이 되었다. 이를 본 권필은 “이것은 시참이다. 내가 죽겠구나”하고 탄식하였다. 혹은 그가 술에 취해 이튿날 죽자, 주인 집 문짝을 뜯어 시상(尸床)으로 하였는데 그 문짝 위에 이 시가 쓰여 있었다고도 한다. 그때 마침 주인 집 담장 밖에 복사꽃이 반쯤 져서 시 속의 묘사와 방불했었다고 기록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원근이 기운이 잃었다”고 하였고, 광해 또한 “하룻밤 사이에 어찌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하면서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다. 이항복은 늘 한탄하며 “우리가 정승 자리에 있었으면서 한 사람 권필(權韠)을 능히 살리지 못하였으니, 선비 죽인 책임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하였다. 대개 이것이 권필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의 시말이다. 바른 말을 했다 하여 임금이 매질하여 한 시인의 목숨을 앗아갔던 이 일은 뒤에 인조반정의 한 빌미를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권필이 광해 앞에 끌려가기 며칠 전 「춘일우제(春日偶題)」란 시를 지었는데, 그 시의 내용이 또한 심상치 않았다.
老去仍多病 生涯任陸沈 | 늙어 가매 병만 늘어가는데 생애를 티끌 세상에 내맡겨두네. |
雲山千里夢 霜鬢百年心 | 천리 먼 꿈속엔 구름에 잠긴 산 백년의 마음은 서리 센 살적일레. |
曉雨鶯聲滑 春江柳色深 | 새벽 비에 꾀꼬리 소린 매끄러웁고 봄 강의 버들 빛은 깊어만 가네. |
如何艶陽節 悄悄動悲吟 | 이렇듯 아름답고 좋은 시절에 어찌하여 구슬피 읊조리는가. |
시의 정조로 보아 권필(權韠)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만 여겨진다. 이 시의 5ㆍ6구에서 그는 새벽 비에 씻겨 매끄러운 꾀꼬리의 소리와 봄날 강가에 휘 늘어진 짙은 버들 빛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는 봄날 약동하는 대지의 생기를 노래한 것으로 들리지 않고, 임숙영의 직척(直斥)과 자신의 풍유에도 불구하고 꾀꼬리, 즉 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황금의 난무는 더욱 기세가 드세져만 가고 버들 빛, 곧 류씨의 세도와 권세는 한층 도도해져만 가는 현실에 대한 암유(暗喩)로 읽힌다. 그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시인은 계절의 아름다움에 몰입하지 못하고 자꾸만 구슬픈 생각에 자조의 나락 속으로 한 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비명에 죽었다.
인용
7. 대궐 버들 푸르른데①
8. 대궐 버들 푸르른데②
9. 대궐 버들 푸르른데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