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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4. 거울을 닦듯이 우리는 장자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 논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거울은 나무 앞에 있으면 나무를 비춘다. 이 거울이 사람 앞에 있으면 사람을 비춘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러워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거울은 항상 무언가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이 거울이 사람을 비출 때, 이 전에 비추던 나무의 상을 지니고 있으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혹은 이 거울이 항상 사람만을 비추려는 거울이면 어떻게 될까? 장자가 거울의 비유로 마음을 설명하려는 논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장자에게 거울은 때가 끼었든 맑든 항상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의 거울은 우리 인간의 삶과 마음이 세계-내적임 또는 타자와 소통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비유다. 그러므로 거울의 ..
3. 사진 같은 마음과 거울 같은 마음 문제는 자신의 도가 가진 태생적 제약성을 망각하고, 우리가 자신의 도를 보편적이라고 자임하는 데 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소통의 흔적으로서의 도는 절대적 기준이자 원리로 추상화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길을 걷고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걸었던 길에는 발자국이 남게 되고, 바로 그것이 길[道]이 된다. 애초에 정해진 어떤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모든 길은 이런 식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길은 뒷사람들에게는 안전한 길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어느 사이엔가 이 길은 절대적인 길로 변해버린다. 절대적인 길은 이제 모든 인간들에게는 결코 회의될 수 없는 절대적..
2. 도란 타자와의 소통 흔적이다 행(行)이라는 글자를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 글자는 인격적으로는 ‘걸어간다’, ‘다닌다’, ‘움직인다’의 의미로 쓰이고, 비인격적으로는 ‘작용된다’, ‘운행된다’, ‘흐른다’의 의미로 쓰인다. 우선 비인격적인 예를 먼저 들어보자. ‘물이 흘러간다’고 해보자. 물은 어떻게 흐르는가? 물은 기본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결국 물이 흘러간다는 것은 차이(difference)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사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아니 정확하게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곳과 차이나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예를 들어 보부상이 사과를 메고 장사를 하러 갈 때 그는 어느 곳으로 가겠는가? 사과가 많이 나는 곳으로..
2. “길은 걸어다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道行之而成)” 1. 걸어갔기에 완성된 길 이제 직접 발제 원문을 읽어보자. 발제 원문의 핵심은 하단부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발제 원문의 하단부는 너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 구조는 마치 새끼를 꼬듯이 도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과 언어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이 교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편의상 이 구조를 풀어헤칠 필요가 있다. 원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도는 작은 것의 이룸으로 가리어지고,..
3. 도란 실천적 함축과 실행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비록 장자 후학들이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실천적 진리로서의 도의 의미, 즉 기술, 방법, 길이라는 본래적인 도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유명한 ‘윤편(輪扁)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천도(天道)」편에 실려 있다. 환공(桓公)이 회당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당 낮은 곳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무망치와 끌을 밀쳐두고 올라와서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윤편은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라..
2. 공자가 ‘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한 이유 최소한 공자에게 있어 도란 용어는 길, 방법, 기술 등과 같이 실천적인 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수영을 잘 하는 방법’을 듣고 ‘아! 이제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직 그 방법을 가지고 직접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해보고, 그 방법을 몸에 익혔을 때에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결국 공자가 들은 도는 실천적 진리였던 것이다. 실천적 진리는 이론적 진리와는 차이가 난다. 가령 ‘물은 액체다’라는 이론적 진리는 우리가 물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지, 혹은 우리가 물에 대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반면 ‘물에서는 손을 이렇게 휘젓고 발은 이렇게 놀려야 한다’는 실천적 진리는 직..
1. 중국 철학에서 도(道)의 의미 1. 도는 실천적 진리 성급한 연구자들은 장자가 언어를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장자를 노자와 동일한 사유를 전개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긴 선입견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제1장을 보면,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항상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구절이 나온다. 왕필(王弼)과 같은 역대의 주석가들과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구절이 언어적으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나아가 우리의 사유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는 결코 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이들에 따르면 도..
Ⅳ. 말과 길 말하기는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하기에는 말하려는 것(= 의미)이 있다. 夫言非吹也, 言者有言. 말하기의 의미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실재로 말을 한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만일 우리가 말한다는 것이 새들의 지저귐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구별의 증거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其所言者特未定也. 果有言耶? 其未嘗有言耶? 其以爲異於鷇音, 亦有辯乎? 其無辯乎?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는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
3. 고착된 자의식의 폭력성 이제 발제 원문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노나라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너무 사랑해서, 마치 큰 나라에서 온 사신인 것처럼 응접하였다. 술도 권하고, 맛있는 고기도 주었고, 음악도 들려주면서 그는 극진하게 자신의 애정을 아낌없이 그 새에게 쏟았다. 그러나 새는 슬퍼하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발제 원문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노나라 임금이 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새라는 타자를 자기의 고착된 자의식 또는 내면에 근거한 외면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새는 새가 아니라 사람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새를 대접했으니 어떻게 그 새가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
2. 소통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장자가 권고하는 타자와의 소통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대화와 토론, 그리고 그 결과로 달성되는 동의와 일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장자가 문제삼고 있는 소통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心]의 역량에 존재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사소통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활동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은 이미 합리적 이성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해지는 소통이다. 그러나 합리적 이성은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단지 서구적 이성일 뿐이다. 결국 의사소통의 논의에는 사전에 이미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독창적인 예술가들, 어린아이들, 환자들, 새들, 꽃들..
3.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1. 임시적 자의식과 고착된 자의식 여기서 우리는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표현과 임시적 자의식이라는 표현을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물[水]의 비유를 통해서 임시적 자의식과 고착된 자의식 사이의 차이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유동적인 물이 있다고 하자. 이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나게 드러나고, 세모난 그릇에 담기면 세모나게 드러난다. 여기서 유동적인 물 자체가 비인칭적인 마음[虛心]을 상징한다면, 상이한 그릇을 만나서 규정된 모양을 띠는 세모난 물과 네모난 물 등은 임시적 자의식을 상징한다. 반면 세모난 그릇에 담긴 물이 얼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릇으로부터 이 세모난 얼음을 빼어내도 이 얼음은 세모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세모난 얼음은 고착된 자의식을 상징한다..
3. 삶의 문맥에서 도래하는 부득이함 장자가 문제삼고 제거하려는 것은 성심 자체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작동시키는 성심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사태’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장자는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성심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즉 임시적 자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성심은 인간의 유한성에 존립하는 자연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심은 된 자의식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지만,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도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의식에는 고착된 자의식과 아울러 임시적 자의식도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결코 임시적 자의식과 관련된 성..
2. 구성된 마음[成心]을 장자가 부정하지 않은 이유 장자에 따르면 몸을 가지고 사는 우리 인간은 항상 어떤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는 존재다. 이 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며, 또 그 문맥과의 소통에 근거하는 구성된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완성된 사람[至人]이나 평범한 사람[愚人]이나 모두 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때가 낀 거울이나 맑은 거울이나 항상 무언가를 비추고 있듯이 말이다. 단지 완성된 사람은 타자와 얽히는 특정한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을 다른 삶의 문맥에 폭력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삶의 문맥에서도 타자와 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허심(虛心)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독특할 뿐이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의 마음 상태..
2. 구성된 마음[成心]의 철학적 함축 1. 성심이 있기에 고착된 자의식이 작동한다 이제 성심에 대한 장자의 진단을 직접 읽어보도록 하자. 「제물론(齊物論)」 편에서 장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대저 구성된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자만이 구성된 마음이 있겠는가? 우매한 보통 사람들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구성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직 마음에서 구성된 것이 없는 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과 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奚必知代而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
3. 다시 구성되는 주체 보통 우리는 선입견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 선입견이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선입견의 불가피성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없다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면 『러브스토리』라는 영화를 보아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선입견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선이해이자 선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송나라 사람도 만약 이런 선입견이 없었다면 월나라로 장사하러 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철학적 해석학의 대표주자인 가다머(Gadamer)와 같은 사람은 선입견을 철학적으로 긍정했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에 따르면 선입견은 구체적인 현재의..
2. 송나라의 삶의 문맥을 가지고 월나라에 간 사내 논의의 편의상 먼저 「소요유」편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읽어보자.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章甫)’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宋人資章甫而適越, 越人斷髮文身, 無所用之].” 이 송나라 사람이 살았던 삶의 문맥을 송이라고 하고, 그가 모자를 팔려고 갔지만 모자를 쓸 필요가 없었던 월나라의 삶의 문맥을 월이라고 해보자. 삶의 문맥이 지닌 구체성과 고유성은 우리의 삶이 몸을 통해 타자의 삶과 얽히게 되는 데서 기인한다. 특정 삶의 문맥 송에서 살았던 이 인물이 다른 삶의 문맥 월로 장사하러 가게 된 메카니즘을 재구성해 ..
1. 구성된 마음[成心] 또는 선입견의 의미 1. 성심이 초자아가 될 때의 위험성 발제 원문의 함의를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구성된 마음으로 번역되는 성심(成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통 연구자들은 성심을 선입견이나 편견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심과 관련된 장자의 진단은 이렇게 간단히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약 장자가 일체의 모든 성심을 부정하였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관점이나 입장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장자가 성심을 문제삼고 있는 이유는 성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성심이 모든 사태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데 절대적인 기준, 즉 초자아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데 있다. 예를..
Ⅲ.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且女獨不聞耶?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於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인용 목차 장자 원문 트위스트 교육학 철학 삶을 만나다 카자흐스탄 여행기 장자에게 듣는 ..
3. ‘나는 이런 사람이다’란 자의식이 확고해지는 두 가지 상황 장자의 탁월한 점은 충효라는 유가적 이념이 비록 꿈과 같이 근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특정 공동체에서는 현실적인 물리력을 갖는다는 것을 그가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데 있다. 충효가 삶의 규칙인 공동체에서 충효를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의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고 심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만약 그 공동체의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공동체로 떠나야 한다. 그러나 새로 도착한 공동체도 그 나름대로의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는 존재다. 그러나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지 않을까? 산 속에서 혼자 사는 방법을 우리는 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
2. 타자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속한 공동체가 드러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서는 물이나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도 의식하지 않지만, 물 바깥에 나와서는 물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물고기라는 것을 의식한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다른 공동체와 조우해야만 한다. 문제는 다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에 병적으로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데 있다. 우스갯소리로 외국에 가봐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애국자가 다른 나라에 대해 배타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간과하고 있다. 사실 애국자와 다른 나라를 미워하는 것은 동시적..
3. 공동체에서의 삶 1. 비합리적으로 보이던 타공동체의 풍속들 공동체들은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상이한 가치체계들을 가지고 유지되어 왔다. 봉건시대에서 여자가 재혼하는 것은 악으로 그리고 여자가 정절을 지키는 것은 선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의 재혼을 권장하는 것이 선이고, 여자의 재혼을 금지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상이한 규정들과는 달리 모든 공동체들이 기본적으로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공유하고, 이 구조에서 자신들이 선이라고 부르던 내용을 절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모든 공동체들의 규칙은 내용은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그 구조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보면 모든 공동체의 선/악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 ..
3.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아이가 더 자라게 되면, 이제 이유식을 떼고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김치 등의 음식은 얼마나 자극적이고 불쾌하겠는가? 그럼에도 그 아이는 먹게 된다. 왜냐하면 김치를 먹는 자신을 어머니는 “우리 아기 이쁘구나, 김치도 잘 먹고!”하면서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어머니라는 타자를 통해 그 타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공부 잘하는 자신을 욕망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공부 잘하는 자신으로 만들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부모가 원하는 것을 억지로하지 않는 것도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한 극단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자가 욕망한다고 상상한 것에..
2.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최초의 초자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의 규칙을 초자아로 내면화하게 되었을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쉽게 그것이 우리에게 가해진 공동체의 폭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우리는 주체로서 탄생하기 위해서 공동체적 규칙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우리는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선악의 규칙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과연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초자아를 기존의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한 인간이란 동물의 자기 배려라고 이해해야 한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가 아니면 삶..
2. 나는 누구인가? 1. 주체란 초자아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존재한다 어느 여성이 화장을 하려고 거울을 본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립스틱을 바른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모습이라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거울 안에 비친 얼굴이 내 얼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자신의 얼굴인지를 알게 되었을까? ‘거울 속의 모습=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거울 속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제3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으로 ..
5. 장자의 회의주의는 합리적 철학의 허구성을 비판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장자는 근본적 회의주의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표면적 평가는, ‘깨어난 후에야 자신의 인식이 꿈이었다는 것을 안다’는 장자의 말에서, 여지없이 부서진다. 장자는 깨어남[覺]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자기충족적인 언어와 인식의 닫힌 체계로부터,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단서와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장자가 권고하는 깨어난 상태는 맑은 연못[淸淵]과도 같은 마음, ‘나는 나다’는 생각을 제거한 비인칭적인 마음의 상태다. 그렇다면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장자의 회의주의는 하나의 학설로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치료적(therapeutic)인 기능을 수행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
4. 반성적 인식의 한계 다음으로 반성적 인식과 근본적 회의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장자의 입장을 알아보기 위해서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다른 두 번째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꿈속에서 잔치를 연 사람이 새벽에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새벽에 (즐겁게) 사냥을 하러 나간다. 꿈을 꿀 때,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꿈꾸고 있으면서 꿈속에서 꾼 어떤 꿈을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는 깨어나서야 자신이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단지 완전히 깨어날 때에만, 우리는 이것이 완전한 꿈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매우 자세하게 인식하고 있는 척하며 ‘왕이시여!’ ‘하인들아!’라고 말하는데, ..
3. 객관적인 옳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제물론(齊物論)」 편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재구성한다면, 우리는 그의 입장을 좀더 구체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어보자.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거주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毛嬙)이나 서시(西施)는 남자들..
2. 세 가지 인식론을 비판하다 합리적 철학에 대한 장자의 비판이 가장 분명하게 전개되어 있는 편이 바로 「제물론(齊物論)」편이다. 그가 얼마나 합리적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는지 보여주고 있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설결(齧缺)이 스승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同是]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齧缺問乎王倪曰: “子知物之所同是乎?”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曰: “吾惡乎知之!”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子知子之所不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曰: “吾惡乎知之!” “그러면 사물이란 알 수는 없는 것입니까?” “然則物無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
1. 보편적 앎에 대한 장자의 비판 1. 나를 대상화하는 문제점 철학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 하나가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설명(explanation)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런 보편성과 합리성을 회의하면서 실존적 사태에 주어진 것만을 기술(description)하려는 철학이다. 앞으로 편의상 전자를 합리적 철학이라고 부르고, 후자는 기술적 철학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물론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주어진 세계와 인간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합리적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합리적 철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야만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도래해야만 할 합리적 체계를 모색하고 이것을 도달해야..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우리의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아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이다. 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선을 행해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악을 행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로 행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공양할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인용 목차 장자 원문
3. ‘조릉에서의 깨달음’이란 길라잡이 우리는 조릉에서 장자가 터득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개별자들의 삶은 타자와 밀접하게 관계될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타자와의 적절한 관계맺음은 맑은 연못과 같은 맑은 마음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 앞의 깨달음은 인간 삶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한성에 대한 통찰이다. 유한에 대한 자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바깥에 외부가 있다는, 즉 자신의 외부에 타자가 존재한다는 자각과 동시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뒤의 깨달음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자신으로 환원불가능한 타자와의 소통이 우리 마음에서 가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장자에게 혼탁한 물[濁水]로 비유되는 마음과 맑은 연못[淸淵]으로 비유되는 마음의 차이는 중요하다. 전자..
2. 삶에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를 사유하다 장주로 기록된 우화들 가운데 장자철학이 지닌 문제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조릉(雕陵)이라는 사냥터에서 장자가 경험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산목(山水)」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다. 장주(莊周)가 조릉의 울타리 안에서 노닐고 있을 때, 그는 남쪽에서 온, 날개의 폭이 일곱 자이고 눈의 크기가 한 치나 되는 이상한 까치를 보았다. 그 까치는 장주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 밤나무 숲에 앉았다. 莊周游於雕陵之樊, 睹一異鵲自南方來者. 翼廣七尺, 目大運寸, 感周之顙, 而集於栗林. 장주는 말했다. “이 새는 무슨 새인가? 그렇게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도 못하는구나..
3. 두 명의 장자와 조릉에서의 깨달음 1. 장주(莊周)와 장자(莊子) 장자는 관직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느 때 태어나서 어느 때 죽었는지, 혹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장자』에는 장자에 대한 많은 우화들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우화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접적으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우화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두 명의 장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명은 장자(莊子)라고 불리는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장주(莊周)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장주는 바로 우리가 다루려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철학자의 실명을 지칭하고 있다. 반면 장자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장 선생님이라는 경칭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
3. 장자에 대한 선입견을 뚫을 때 장자와 만나게 된다 통용되는 33편의 곽상의 판본은 선집임에도 불구하고, 「내편」 7편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곽상의 판본에 실린 「내편」 7편이 『장자』를 최초로 편찬한 한대의 고본 『장자』의 「내편」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곽상 당시에 아직도 이 고본 『장자』와 최소한 세 종류의 선집본 『장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함부로 자신이 선집한 『장자』에 자신의 글을 삽입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이런 추론은 『장자』라는 책의 진위문제를 제기한 소식(蘇軾, 1037~1101) 이래로 주장되었던 지금까지의 많은 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과 일치한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내편」에는 기원전 4세기 말에 살았..
2. 황로학파가 고본 『장자』를 편찬했다 「내편」 7편의 편명이 세 글자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52편의 장자, 고본의 편찬자가 누구인지를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한대(漢代)의 위서(緯書)의 편명이 지닌 특징, 즉 세 글자로 편명이 구성된다는 특징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장자』 고본은 늦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학자들은 이 고본의 편찬자들을 곽상 판본의 「외ㆍ잡편」 중 천(天)으로 시작되는 편들인 「천지(天地)」, 「천도(天道)」, 「천운(天運)」, 「천하(天下)」와 「각의(刻意)」를 지은 사람들로 추정하고 있고, 이들을 황로파(黃老派)라고 부른다. 황로(黃老)라는 표현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당시 제자백가(諸子百家)들에게..
2. 『장자』라는 책의 구성과 편찬자 1. 장자가 남기고 싶었던 진정한 가르침 통행되는 『장자』의 판본은 곽상(郭象: 252~312)이 편집한 것으로,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3편은 「내편」, 「외편」, 그리고 「잡편」으로 묶여 있는데, 「내편」은 7편, 「외편」은 15편, 그리고 「잡편」은 11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서기 1세기 경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를 보면, 『장자』는 전체 52편으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서 장자는 10여만 언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통용되는 곽상의 판본에 따르면 『장자』는 6만 4606자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곽상이 편집한 것은 사마천과..
5. 우화로 글을 쓴 이유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타자와 조우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유한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와 조우할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 하나는 차이보다 동일성을 긍정하는 경우다. 우리는 조우한 타자로부터 발생하는 차이를 억압하고 지배하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를 삶의 짝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장자처럼 동일성보다 차이를 긍정하는 경우다. 이것은 우리가 타자를 삶의 짝으로 긍정하고 타자에 맞게 자신의 동일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경우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자』라는 고전도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독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우리가 기존의 선입견, 예를 들면 ‘장..
4. 차이를 통할 때만 새로운 나로 생성된다 어떤 사람을 새롭게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사전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언젠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 사람과 자주 만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외적인 행동과 그 사람의 내면 사이의 연관관계를 파악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타자를 알게 되는 진정한 이유는 내가 이미 그 사람과 삶의 수준에서 조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우한 타자에 맞추어 무의식적인 삶의 수준에서 자신을 조절하게 된다. 그래서 첫 만남의 설레임 속에서 가능했던 “그(혹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경험은 아..
3. 사유의 한계에서만 타자를 경험할 수 있다 장자철학의 고유성은 바로 자신의 철학체계에 타자를 도입했다는 데 있다. 타자는 사유라는 사변적 공간에서가 아니라 항상 삶이라는 실천적 공간에서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타자가 사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자는 내가 ‘그것은 이러저러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 좌절될 때, 즉 사유가 스스로 부적절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실 타자는 우리의 사유를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와 직면하는 오직 그 경우에만 ‘그것은 이러저러할 거야’라고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이 말은 타자란 항상 사유의 한계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어떤 것임을 말해준다. 사유라는 더듬이로 ..
2. community가 아닌 society에 살려 했던 사람 왜 21세기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중국이라는 다른 공동체의 전통에 속하는 사상가, 그것도 2000여 년 전에 살았던 장자를 다루려고 하는 것일까? 장자가 성인(聖人)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중국 철학사에서 공인된 그의 중요성 때문인가? 한 마디로 왜 지금 우리는 장자와 대화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장자의 삶과 그의 사상이 주는 고유성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장자가 중국이란 하나의 통일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지 회고적으로(retrospectively) 재구성될 경우에만 그는 중국이라는 단일 공동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사실 그는 많은 나라들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복수적..
1. 『장자』를 읽는 이유와 그 의미 1. 고전과 조우하여 전혀 다르게 생성되기 위해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책만큼 시간과 생성이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없다. 지금 내 앞에 방금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 있다고 해보자. 이 책은 우리에게는 미래의 시간이자, 나를 이러저러하게 다르게 생성시킬 수 있는 잠재성이다. 이 책의 20페이지를 읽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이미 읽은 19페이지들이라는 과거와 지금 펼쳐져 있는 20페이지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그 많은 미래가 생성된다. 그러나 사실 이미 읽었다는 이 19페이지들도 흘러간 과거라기보다는 어느 때이든 미래로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읽었던 앞 페이지들도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철학 해설과 비판 총서를 발간하며 오랫동안 중국 한자 문명권의 영향 속에서 살았던 우리에게 중국 철학은 우리 삶과 사유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아련한 추억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세계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서양문명권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왜 우리는 지금도 중국의 많은 철학자들과 만나야만 하는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이제 우리에게 충분히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낯설음과 거리감은 중국문명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삶과 사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철학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지 못했었다. 반면 지금 ..
10. 막야검이 되겠다는 쇠와 죽길 거부하는 인간 俄而子來有病, 喘喘然將死, 其妻子環而泣之. 子犂往問之, 曰: “叱! 避! 無怛化!” 倚其戶與之語曰: “偉哉造化! 又將奚以汝爲? 將奚以汝適? 以汝爲鼠肝乎? 以汝爲蟲臂乎?” 子來曰: “父母於子, 東西南北, 唯命之從. 陰陽於人, 不翅於父母. 彼近吾死而我不聽, 我則悍矣, 彼何罪焉? 夫大塊以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 今大冶鑄金, 金踴躍曰: ‘我且必爲鏌鎁!’ 大冶必以爲不祥之金. 今一犯人之形而曰: ‘人耳! 人耳!’ 夫造化者必以爲不祥之人. 今一以天地爲大罏, 以造化爲大冶, 惡乎往而不可哉! 成然寐, 蘧然覺.” 해석俄而子來有病, 喘喘然將死, 잠시 후 자래(子來)가 병이 나서 헐떡이며 장차 죽으려 하니 其妻子環而泣之. 아내와 자식이..
진책(秦策) 일(一) 1. 衛鞅亡魏入秦, 孝公以爲相, 封之於商, 號曰 “商君”. 商君治秦, 法令至行, 公平無私, 罰不諱强大, 賞不私親近, 法及太子, 黥劓其傅. 期年之後, 道不拾遺, 民不妄取, 兵革大强, 諸侯畏懼. 然刻深寡恩, 特以强服之耳. 孝公行之八年, 疾且不起, 欲傳商君, 辭不受. 孝公已死, 惠王代後, 莅政有頃, 商君告歸. 人說惠王曰: “大臣太重者國危, 左右太親者身危. 今秦婦人嬰兒, 皆言商君之法, 莫言大王之法. 是商君反爲主, 大王更爲臣也. 且夫商君固大王仇讎也, 願大王圖之.” 商君歸還. 惠王車裂之, 而秦人不憐. 2. 공부하려면 이들처럼 懸頭刺股 蘇秦始將連橫說秦惠王曰: “大王之國西有巴ㆍ蜀ㆍ漢中之利, 北有胡ㆍ貉ㆍ代ㆍ馬之用, 南有巫山ㆍ黔中之限, 東有肴ㆍ函之固. 田肥美, 民殷富, 戰車萬乘, 奮擊百萬, 沃野千里,..
1. 곤(鯤)이란 물고기와 붕(鵬)이란 새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于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해석北冥有魚, 其名爲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곤의 크기는 몇 천리인지 모른다. 化而爲鳥, 其名爲鵬. 변하면 새가 되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 모른다.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불끈 날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다. 是鳥也, 海運則將徙于南冥. 이 새는 천지가 뒤바뀔 적【해운..
10. 양행(兩行)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확보하다조삼모사(朝三暮四) 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何謂朝三? 狙公賦芧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爲用, 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해석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也, 정신과 마음을 통일하려 애쓰면서도, 모든 것이 같음을 모르는 것을 謂之朝三. ‘조삼(朝三)’이라 말한다. 何謂朝三? 어떤 것을 ‘조삼(朝三)’이라 하는가? 狙公賦芧曰: “朝三而暮四.” 잔나비 사육자가 도토리를 주며 “아침엔 3개 저녁엔 4개 주마.”라고 말하니, 衆狙皆怒; 뭇 잔나비들이 모두 화를 냈다.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사육자가 “그러하다면 아침엔 4개 저녁엔 3개 주마.”라고 하니 뭇 잔나비들이 기뻐..
2. 큰 바다 같은 사람이 되길 北海若曰: “井蛙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夏蟲不可以語於冰者, 篤於時也; 曲士不可以語於道者, 束於敎也. 今爾出於崖涘, 觀於大海, 乃知爾丑, 爾將可與語大理矣. 天下之水, 莫大於海, 萬川歸之, 不知何時止而不盈; 尾閭洩之, 不知何時已而不虛, 春秋不變, 水旱不知. 此其過江河之流, 不可爲量數. 而吾未嘗以此自多者, 自以比形於天地, 而受氣於陰陽, 吾在於天地之間, 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 方存乎見少, 又奚以自多! 計四海之在天地之間也, 不似礧空之在大澤乎? 計中國之在海內, 不似稊米之在太倉乎? 號物之數謂之萬, 人處一焉; 人卒九州, 穀食之所生, 舟車之所通, 人處一焉. 此其比萬物也, 不似豪末之在於馬體乎? 五帝之所連, 三王之所爭, 仁人之所憂, 任士之所勞, 盡此矣! 伯夷辭之以爲名, 仲尼語之以爲博. 此其..
12. 우물 안 개구리 같던 공손룡을 가르친 위모 公孫龍問於魏牟曰: “龍少學先王之道, 長而明仁義之行, 合同異, 離堅白, 然不然, 可不可, 困百家之知, 窮衆口之辯. 吾自以爲至達已. 今吾聞莊子之言, 茫然異之. 不知論之不及與? 知之弗若與? 今吾無所開吾喙, 敢問其方.” 公子牟隱機大息, 仰天而笑曰: “子獨不聞夫埳井之䵷乎? 謂東海之鱉曰: ‘吾樂與! 出跳梁乎井干之上, 入休乎缺甃之崖. 赴水則接腋持頤, 蹶泥則沒足滅跗. 還虷蟹與科斗, 莫吾能若也. 且夫擅一壑之水, 而跨跱埳井之樂, 此亦至矣. 夫子奚不時來入觀乎?’ 東海之鱉左足未入, 而右膝已縶矣. 於是逡巡而卻, 告之海曰: ‘夫千里之遠, 不足以擧其大; 千仞之高, 不足以極其深. 禹之時, 十年九潦, 而水弗爲加益; 湯之時, 八年七旱, 而崖不爲加損. 夫不爲頃久推移, 不以多少進退者, 此亦..
1. 秋水時至, 百川灌河. 涇流之大, 兩涘渚崖之間, 不辯牛馬. 於是焉河伯欣然自喜, 以天下之美爲盡在己. 順流而東行, 至於北海, 東面而視, 不見水端. 於是焉河伯始旋其面目, 望洋向若而嘆曰: “野語有之曰: ‘聞道百, 以爲莫己若者.’ 我之謂也. 且夫我嘗聞少仲尼之聞而輕伯夷之義者, 始吾弗信. 今我睹子之難窮也, 吾非至於子之門則殆矣, 吾長見笑於大方之家.”
칙양(則陽) 第二十五 1 則陽游於楚, 夷節言之於王, 王未之見. 夷節歸. 彭陽見王果曰: “夫子何不譚我於王?” 王果曰: “我不若公閱休.” 彭陽曰: “公閱休奚爲者耶?” 曰: “冬則戳鱉於江, 夏則休乎山樊. 有過而問者, 曰: ‘此予宅也.’ 夫夷節已不能, 而况我乎! 吾又不若夷節. 夫夷節之爲人也, 無德而有知, 不自許, 以之神其交, 固顚冥乎富貴之地. 非相助以德, 相助消也. 夫凍者假衣於春, 暍者反冬乎冷風. 夫楚王之爲人也, 形尊而嚴. 其於罪也, 無赦如虎. 非夫佞人正德, 其孰能橈焉. 故聖人其窮也, 使家人忘其貧; 其達也, 使王公忘爵祿而化卑; 其於物也, 與之爲娛矣; 其於人也, 樂物之通而保己焉. 故或不言而飮人以和, 與人幷立而使人化, 父子之宜. 彼其乎歸居, 而一閑其所施. 其於人心者, 若是其遠也. 故曰 ‘待公閱休’.” 2 聖人達綢繆..
13. 少知曰: “季眞之莫爲, 接子之或使. 二家之議, 孰正於其情, 孰偏於其理?” 大公調曰: “雞鳴狗吠, 是人之所知. 雖有大知, 不能以言讀其所自化, 又不能以意其所將爲. 斯而析之, 精至於無倫, 大至於不可圍. 或之使, 莫之爲, 未免於物而終以爲過. 或使則實, 莫爲則虛. 有名有實, 是物之居; 無名無實, 在物之虛. 可言可意, 言而愈疏. 未生不可忌, 已死不可阻. 死生非遠也, 理不可睹. 或之使, 莫之爲, 疑之所假. 吾觀之本, 其往無窮; 吾求之末, 其來無止. 無窮無止, 言之無也, 與物同理. 或使莫爲, 言之本也. 與物終始. 道不可有, 有不可無. 道之爲名, 所假而行. 或使莫爲, 在物一曲, 夫胡爲於大方! 言而足, 則終日言而盡道; 言而不足, 則終日言而盡物. 道, 物之極, 言黙不足以載. 非言非黙, 議有所極.”
12. 少知曰: “四方之內, 六合之里, 萬物之所生惡起?” 大公調曰: “陰陽相照相蓋相治, 四時相代相生相殺. 欲惡去就, 於是橋起. 雌雄片合, 於是庸有. 安危相易, 禍福相生, 緩急相摩, 聚散以成. 此名實之可紀, 精之可志也. 隨序之相理, 橋運之相使, 窮則反, 終則始, 此物之所有. 言之所盡, 知之所至, 極物而已. 睹道之人, 不隨其所廢, 不原其所起, 此議之所止.”
7 栢矩學於老聃, 曰: “請之天下游.” 老聃曰: “已矣! 天下猶是也.” 又請之, 老聃曰: “汝將何始?” 曰: “始於齊.” 至齊, 見辜人焉, 推而强之, 解朝服而幕之, 號天而哭之, 曰: “子乎! 子乎! 天下有大菑, 子獨先離之. 曰 ‘莫爲盜, 莫爲殺人’. 榮辱立然後睹所病, 貨財聚然後睹所爭. 今立人之所病, 聚人之所爭, 窮困人之身, 使無休時. 欲無至此得乎? 古之君人者, 以得爲在民, 以失爲在己; 以正爲在民, 以枉爲在己. 故一形有失其形者, 退而自責. 今則不然, 匿爲物而愚不識, 大爲難而罪不敢, 重爲任而罰不勝, 遠其塗而誅不至. 民知力竭, 則以僞繼之. 日出多僞, 士民安取不僞. 夫力不足則僞, 知不足則欺, 財不足則盜. 盜竊之行, 於誰責而可乎?”
2 聖人達綢繆, 周盡一體矣, 而不知其然, 性也. 復命搖作而以天爲師, 人則從而命之也. 憂乎知, 而所行恆無幾時, 其有止也, 若之何! 生而美者, 人與之鑒, 不告則不知其美於人也. 若知之, 若不知之, 若聞之, 若不聞之, 其可喜也終無已, 人之好之亦無已, 性也. 聖人之愛人也, 人與之名, 不告則不知其愛人也. 若知之, 若不知之, 若聞之, 若不聞之, 其愛人也終無已, 人之安之亦無已, 性也. 舊國舊都, 望之暢然. 雖使丘陵草木之緡入之者十九, 猶之暢然, 况見見聞聞者也, 以十仞之台縣衆間者也.
서무귀(徐無鬼) 第二十四 1 徐無鬼因女商見魏武侯, 武侯勞之曰: “先生病矣, 苦於山林之勞, 故乃肯見於寡人.” 徐無鬼曰: “我則勞於君, 君有何勞於我! 君將盈耆欲, 長好惡, 則性命之情病矣; 君將黜耆欲, 牽好惡, 則耳目病矣. 我將勞君, 君有何勞於我!” 武侯超然不對. 少焉, 徐無鬼曰: “嘗語君吾相狗也: 下之質, 執飽而止, 是狸德也; 中之質, 若視日; 上之質, 若亡其一. 吾相狗又不若吾相馬也. 吾相馬: 直者中繩, 曲者中鉤, 方者中矩, 圓者中規. 是國馬也, 而未若天下馬也. 天下馬有成材, 若恤若失, 若喪其一. 若是者, 超軼絶塵, 不知其所.” 武侯大悅而笑. 2 徐無鬼出, 女商曰: “先生獨何以說吾君乎? 吾所以說吾君者, 橫說之則以『詩』·『書』·『禮』·『樂』, 從說則以『金板』·『六韜』, 奉事而大有功者不可爲數, 而吾君未嘗啓齒. ..
16. 故足之於地也踐, 雖踐, 恃其所不蹍而後善博也; 人之知也少, 雖少, 恃其所不知而後知天之所謂也. 知大一, 知大陰, 知大目, 知大均, 知大方, 知大信, 知大定, 至矣! 大一通之, 大陰解之, 大目視之, 大均緣之, 大方體之, 大信稽之, 大定持之. 盡有天, 循有照, 冥有樞, 始有彼. 則其解之也似不解之者, 其知之也似不知之也, 不知而後知之. 其問之也, 不可以有崖, 而不可以無崖. 頡滑有實, 古今不代, 而不可以虧, 則可不謂有大揚搉乎! 闔不亦問是已, 奚惑然爲! 以不惑解惑, 復於不惑, 是尙大不惑.
15. 得之也生, 失之也死; 得之也死, 失之也生: 藥也. 其實堇也, 桔梗也, 雞壅也, 豕零也, 是時爲帝者也, 何可勝言! 句踐也以甲楯三千棲於會稽, 唯種也能知亡之所以存, 唯種也不知其身之所以愁. 故曰: 鴟目有所適, 鶴脛有所節, 解之也悲. 故曰: 風之過, 河也有損焉; 日之過, 河也有損焉; 請只風與日相與守河, 而河以爲未始其攖也, 恃源而往者也. 故水之守土也審, 影之守人也審, 物之守物也審. 故目之於明也殆, 耳之於聰也殆, 心之於殉也殆, 凡能其於府也殆, 殆之成也不給改. 禍之長也茲萃, 其反也緣功, 其果也待久. 而人以爲己寶, 不亦悲乎! 故有亡國戮民無已, 不知問是也.
10. 南伯子綦隱几而坐, 仰天而噓. 顔成子入見曰: “夫子, 物之尤也. 形固可使若槁骸, 心固可使若死灰乎?” 曰: “吾嘗居山穴之中矣. 當是時也, 田禾一睹我而齊國之衆三賀之. 我必先之, 彼故知之; 我必賣之, 彼故鬻之. 若我而不有之, 彼惡得而知之? 若我而不賣之, 彼惡得而鬻之? 嗟乎! 我悲人之自喪者; 吾又悲夫悲人者; 吾又悲夫悲人之悲者; 其後而日遠矣!”
8. 管仲有病, 桓公問之曰: “仲父之病病矣, 可不諱云, 至於大病, 則寡人惡乎屬國而可?” 管仲曰: “公誰欲與?” 公曰: “鮑叔牙.” 曰: “不可. 其爲人潔廉, 善士也; 其於不己若者不比之; 又一聞人之過, 終身不忘. 使之治國, 上且鉤乎君, 下且逆乎民. 其得罪於君也將弗久矣!” 公曰: “然則孰可?” 對曰: “勿已則隰朋可. 其爲人也, 上忘而下畔, 愧不若黃帝, 而哀不己若者. 以德分人謂之聖; 以財分人謂之賢. 以賢臨人, 未有得人者也; 以賢下人, 未有不得人者也. 其於國有不聞也, 其於家有不見也. 勿已則隰朋可.”
5. 知士無思慮之變則不樂; 辯士無談說之序則不樂; 察士無凌誶之事則不樂: 皆囿於物者也. 招世之士興朝; 中民之士榮官; 筋國之士矜雅; 勇敢之士奮患; 兵革之士樂戰; 枯槁之士宿名; 法律之士廣治; 禮樂之士敬容; 仁義之士貴際. 農夫無草萊之事則不比; 商賈無市井之事則不比; 庶人有旦暮之業則勸; 百工有器械之巧則壯. 錢財不積則貪者憂, 權勢不尤則夸者悲, 勢物之徒樂變. 遭時有所用, 不能無爲也, 此皆順比於歲, 不物於易者也. 馳其形性, 潛之萬物, 終身不反, 悲夫!
1 徐無鬼因女商見魏武侯, 武侯勞之曰: “先生病矣, 苦於山林之勞, 故乃肯見於寡人.” 徐無鬼曰: “我則勞於君, 君有何勞於我! 君將盈耆欲, 長好惡, 則性命之情病矣; 君將黜耆欲, 牽好惡, 則耳目病矣. 我將勞君, 君有何勞於我!” 武侯超然不對. 少焉, 徐無鬼曰: “嘗語君吾相狗也: 下之質, 執飽而止, 是狸德也; 中之質, 若視日; 上之質, 若亡其一. 吾相狗又不若吾相馬也. 吾相馬: 直者中繩, 曲者中鉤, 方者中矩, 圓者中規. 是國馬也, 而未若天下馬也. 天下馬有成材, 若恤若失, 若喪其一. 若是者, 超軼絶塵, 不知其所.” 武侯大悅而笑.
지북유(知北游) 第二十二 1 知北游於玄水之上, 登隱弅之丘, 而適遭無爲謂焉. 知謂無爲謂曰: “予欲有問乎若: 何思何慮則知道? 何處何服則安道? 何從何道則得道?” 三問而無爲謂不答也. 非不答, 不知答也. 知不得問, 反於白水之南, 登狐闋之上, 而睹狂屈焉. 知以之言也問乎狂屈. 狂屈曰: “唉! 予知之, 將語若.” 中欲言而忘其所欲言. 知不得問, 反於帝宮, 見黃帝而問焉. 黃帝曰: “無思無慮始知道, 無處無服始安道, 無從無道始得道.” 知問黃帝曰: “我與若知之, 彼與彼不知也, 其孰是耶?” 黃帝曰: “彼無爲謂眞是也, 狂屈似之, 我與汝終不近也. 夫知者不言, 言者不知, 故聖人行不言之敎. 2. 道不可致, 德不可至. 仁可爲也, 義可虧也, 禮相僞也. 故曰: ‘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禮者, 道之華而亂之首也. 故..
16. 冉求問於仲尼曰: “未有天地可知耶?” 仲尼曰: “可. 古猶今也.” 冉求失問而退. 明日復見, 曰: “昔者吾問 ‘未有天地可知乎?’ 夫子曰: ‘可. 古猶今也.’ 昔日吾昭然, 今日吾昧然. 敢問何謂也?” 仲尼曰: “昔之昭然也, 神者先受之; 今之昧然也, 且又爲不神者求邪! 無古無今, 無始無終. 未有子孫而有孫子可乎?” 冉求未對. 仲尼曰: “已矣, 末應矣! 不以生生死, 不以死死生. 死生有待耶? 皆有所一體. 有先天地生者物耶? 物物者非物, 物出不得先物也, 猶其有物也. 猶其有物也無已! 聖人之愛人也終無已者, 亦乃取於是者也.”
13. 於是泰淸問乎無窮, 曰: “子知道乎?” 無窮曰: “吾不知.” 又問乎無爲, 無爲曰: “吾知道.” 曰: “子之知道, 亦有數乎?” 曰: “有.” 曰: “其數若何?” 無爲曰: “吾知道之可以貴·可以賤·可以約·可以散, 此吾所以知道之數也.” 泰淸以之言也問乎無始, 曰: “若是, 則無窮之弗知與無爲之知, 孰是而孰非乎?” 無始曰: “不知深矣, 知之淺矣; 弗知內矣, 知之外矣.” 於是泰淸仰而嘆曰: “弗知乃知乎, 知乃不知乎! 孰知不知之知?” 無始曰: “道不可聞, 聞而非也; 道不可見, 見而非也; 道不可言, 言而非也! 知形形之不形乎! 道不當名.” 無始曰: “有問道而應之者, 不知道也; 雖問道者, 亦未聞道. 道無問, 問無應. 無問問之, 是問窮也; 無應應之, 是無內也. 以無內待問窮, 若是者, 外不觀乎宇宙, 內不知乎大初. 是以不過乎昆..
9. 且夫博之不必知, 辯之不必慧, 聖人以斷之矣! 若夫益之而不加益, 損之而不加損者, 聖人之所保也. 淵淵乎其若海, 魏魏乎其終則復始也. 運量萬物而不匱. 則君子之道, 彼其外與! 萬物皆往資焉而不匱. 此其道與!
8. 孔子問於老聃曰: “今日晏閑, 敢問至道.” 老聃曰: “汝齊戒, 疏瀹而心, 澡雪而精神, 掊擊而知. 夫道, 窅然難言哉! 將爲汝言其崖略: 夫昭昭生於冥冥, 有倫生於無形, 精神生於道, 形本生於精, 而萬物以形相生. 故九竅者胎生, 八竅者卵生. 其來無迹, 其往無崖, 無門無房, 四達之皇皇也. 邀於此者, 四肢强, 思慮恂達, 耳目聰明. 其用心不勞, 其應物無方, 天不得不高, 地不得不廣, 日月不得不行, 萬物不得不昌, 此其道與!
5. 天地有大美而不言, 四時有明法而不議, 萬物有成理而不說. 聖人者, 原天地之美而達萬物之理. 是故至人無爲, 大聖不作, 觀於天地之謂也. 今彼神明至精, 與彼百化. 物已死生方圓, 莫知其根也. 扁然而萬物, 自古以固存. 六合爲巨, 未離其內; 秋豪爲小, 待之成體; 天下莫不沈浮, 終身不故; 陰陽四時運行, 各得其序; 惛然若亡而存; 油然不形而神; 萬物畜而不知: 此之謂本根, 可以觀於天矣!
4. 知謂黃帝曰: “吾問無爲謂, 無爲謂不應我, 非不我應, 不知應我也; 吾問狂屈, 狂屈中欲告我而不我告, 非不我告, 中欲告而忘之也; 今予問乎若, 若知之, 奚故不近?” 黃帝曰: “彼其眞是也, 以其不知也; 此其似之也, 以其忘之也; 予與若終不近也, 以其知之也.” 狂屈聞之, 以黃帝爲知言.
3. 生也死之徒, 死也生之始, 孰知其紀!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若死生爲徒, 吾又何患! 故萬物一也. 是其所美者爲神奇, 其所惡者爲臭腐. 臭腐復化爲神奇, 神奇復化爲臭腐. 故曰: ‘通天下一氣耳.’ 聖人故貴一.”
2. 道不可致, 德不可至. 仁可爲也, 義可虧也, 禮相僞也. 故曰: ‘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禮者, 道之華而亂之首也. 故曰: ‘爲道者日損, 損之又損之,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也.’ 今已爲物也, 欲復歸根, 不亦難乎! 其易也其唯大人乎!
전자방(田子方) 第二十一 1 田子方侍坐於魏文侯, 數稱谿工. 文侯曰: “谿工, 子之師耶?” 子方曰: “非也, 無擇之里人也. 稱道數當故無擇稱之.” 文侯曰: “然則子無師耶?” 子方曰: “有.” 曰: “子之師誰耶?” 子方曰: “東郭順子.” 文侯曰: “然則夫子何故未嘗稱之?” 子方曰: “其爲人也眞. 人貌而天虛, 緣而葆眞, 淸而容物. 物無道, 正容以悟之, 使人之意也消. 無擇何足以稱之!” 子方出, 文侯儻然, 終日不言. 召前立臣而語之曰: “遠矣, 全德之君子! 始吾以聖知之言·仁義之行爲至矣. 吾聞子方之師, 吾形解而不欲動, 口鉗而不欲言. 吾所學者, 直土埂耳! 夫魏眞爲我累耳!” 2 溫伯雪子適齊, 舍於魯. 魯人有請見之者, 溫伯雪子曰: “不可. 吾聞中國之君子, 明乎禮義而陋於知人心. 吾不欲見也.” 至於齊, 反舍於魯, 是人也又請見. ..
산목(山木) 第二十 1 莊子行於山中, 見大木, 枝葉盛茂. 伐木者止其旁而不取也. 問其故, 曰: “無所可用.” 莊子曰: “此木以不材得終其天年.” 夫子出於山, 舍於故人之家. 故人喜, 命豎子殺雁而烹之. 豎子請曰: “其一能鳴, 其一不能鳴, 請奚殺?” 主人曰: “殺不能鳴者.” 明日, 弟子問於莊子曰: “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天年; 今主人之雁,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莊子笑曰: “周將處乎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若夫乘道德而浮游則不然, 無譽無訾, 一龍一蛇, 與時俱化, 而無肯專爲. 一上一下, 以和爲量, 浮游乎萬物之祖. 物物而不物於物, 則胡可得而累邪! 此神農·黃帝之法則也. 若夫萬物之情, 人倫之傳則不然: 合則離, 成則毁, 廉則挫, 尊則議, 有爲則虧, 賢則謀, 不肖則欺. 胡可得而必乎哉! 悲夫,..
달생(達生) 第十九 1. 達生之情者, 不務生之所無以爲; 達命之情者, 不務知之所無奈何. 養形必先之以物, 物有余而形不養者有之矣. 有生必先無離形, 形不離而生亡者有之矣. 生之來不能卻, 其去不能止. 悲夫! 世之人以爲養形足以存生, 而養形果不足以存生, 則世奚足爲哉! 雖不足爲而不可不爲者, 其爲不免矣! 夫欲免爲形者, 莫如棄世. 棄世則無累, 無累則正平, 正平則與彼更生, 更生則幾矣! 事奚足遺棄而生奚足遺? 棄事則形不勞, 遺生則精不虧. 夫形全精復, 與天爲一. 天地者, 萬物之父母也. 合則成體, 散則成始. 形精不虧, 是謂能移. 精而又精, 反以相天. 2. 子列子問關尹曰: “至人潛行不窒, 蹈火不熱, 行乎萬物之上而不栗. 請問何以至於此?” 關尹曰: “是純氣之守也, 非知巧果敢之列. 居, 予語女. 凡有貌象聲色者, 皆物也, 物與物何以相遠! 夫..
지락(至樂) 第十八 1 天下有至樂無有哉? 有可以活身者無有哉? 今奚爲奚據? 奚避奚處? 奚就奚去? 奚樂奚惡? 夫天下之所尊者, 富貴壽善也; 所樂者, 身安厚味美服好色音聲也; 所下者, 貧賤夭惡也; 所苦者, 身不得安逸, 口不得厚味, 形不得美服, 目不得好色, 耳不得音聲. 若不得者, 則大憂以懼, 其爲形也亦愚哉! 夫富者, 苦身疾作, 多積財而不得盡用, 其爲形也亦外矣! 夫貴者, 夜以繼日, 思慮善否, 其爲形也亦疏矣! 人之生也, 與憂俱生. 壽者惛惛, 久憂不死, 何之苦也! 其爲形也亦遠矣! 烈士爲天下見善矣, 未足以活身. 吾未知善之誠善耶? 誠不善耶? 若以爲善矣, 不足活身; 以爲不善矣, 足以活人. 故曰: “忠諫不聽, 蹲循勿爭.” 故夫子胥爭之, 以殘其形; 不爭, 名亦不成. 誠有善無有哉? 2. 今俗之所爲與其所樂, 吾又未知樂之果樂耶? 果不..
2. 今俗之所爲與其所樂, 吾又未知樂之果樂耶? 果不樂耶? 吾觀夫俗之所樂, 擧群趣者, 誙誙然如將不得已, 而皆曰樂者, 吾未之樂也, 亦未之不樂也. 果有樂無有哉? 吾以無爲誠樂矣, 又俗之所大苦也. 故曰: “至樂無樂, 至譽無譽.” 天下是非果未可定也. 雖然, 無爲可以定是非. 至樂活身, 唯無爲幾存. 請嘗試言之: 天無爲以之淸, 地無爲以之寧. 故兩無爲相合, 萬物皆化生. 芒乎芴乎, 而無從出乎! 芴乎芒乎, 而無有象乎! 萬物職職, 皆從無爲殖. 故曰: “天地無爲也而無不爲也.” 人也孰能得無爲哉!
천도(天道) 第十三 1 天道運而無所積, 故萬物成; 帝道運而無所積, 故天下歸; 聖道運而無所積, 故海內服. 明於天, 通於聖, 六通四辟於帝王之德者, 其自爲也, 昧然無不靜者矣! 聖人之靜也, 非曰靜也善, 故靜也. 萬物無足以鐃心者, 故靜也. 水靜則明燭須眉, 平中准, 大匠取法焉. 水靜猶明, 而况精神! 聖人之心靜乎! 天地之鑒也, 萬物之鏡也. 2. 夫虛靜恬淡寂漠無爲者, 天地之平而道德之至也. 故帝王聖人休焉. 休則虛, 虛則實, 實則倫矣. 虛則靜, 靜則動, 動則得矣. 靜則無爲, 無爲也, 則任事者責矣. 無爲則兪兪. 兪兪者, 憂患不能處, 年壽長矣. 夫虛靜恬淡寂漠無爲者, 萬物之本也. 明此以南鄕,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以此處上, 帝王天子之德也; 以此處下, 玄聖素王之道也. 以此退居而閑游, 江海山林之士服; 以此進爲而撫世..
7. 故書曰: “有形有名.” 形名者, 古人有之, 而非所以先也. 古之語大道者, 五變而形名可擧, 九變而賞罰可言也. 驟而語形名, 不知其本也; 驟而語賞罰, 不知其始也. 倒道而言, 迕道而說者, 人之所治也, 安能治人! 驟而語形名賞罰, 此有知治之具, 非知治之道. 可用於天下, 不足以用天下. 此之謂辯士, 一曲之人也. 禮法數度, 形名比詳, 古人有之. 此下之所以事上, 非上之所以畜下也.
6. 君先而臣從, 父先而子從, 兄先而弟從, 長先而少從, 男先而女從, 夫先而婦從. 夫尊卑先後, 天地之行也, 故聖人取象焉. 天尊地卑, 神明之位也; 春夏先, 秋冬後, 四時之序也; 萬物化作, 萌區有狀, 盛衰之殺, 變化之流也. 夫天地至神矣, 而有尊卑先後之序, 而况人道乎! 宗廟尙親, 朝廷尙尊, 鄕黨尙齒, 行事尙賢, 大道之序也. 語道而非其序者, 非其道也. 語道而非其道者, 安取道哉! 是故古之明大道者, 先明天而道德次之, 道德已明而仁義次之, 仁義已明而分守次之, 分守已明而形名次之, 形名已明而因任次之, 因任已明而原省次之, 原省已明而是非次之, 是非已明而賞罰次之, 賞罰已明而愚知處宜, 貴賤履位, 仁賢不肖襲情. 必分其能, 必由其名. 以此事上, 以此畜下, 以此治物, 以此修身, 知謀不用, 必歸其天. 此之謂大平, 治之至也.
5. 故古之王天下者, 知雖落天地, 不自慮也; 辯雖雕萬物, 不自說也; 能雖窮海內, 不自爲也. 天不産而萬物化, 地不長而萬物育, 帝王無爲而天下功. 故曰: 莫神於天, 莫富於地, 莫大於帝王. 故曰: 帝王之德配天地. 此乘天地, 馳萬物, 而用人群之道也. 本在於上, 末在於下; 要在於主, 詳在於臣. 三軍五兵之運, 德之末也; 賞罰利害, 五刑之辟, 敎之末也; 禮法度數, 刑名比詳, 治之末也; 鍾鼓之音, 羽旄之容, 樂之末也; 哭泣衰絰, 隆殺之服, 哀之末也. 此五末者, 須精神之運, 心術之動, 然後從之者也. 末學者, 古人有之, 而非所以先也.
2. 夫虛靜恬淡寂漠無爲者, 天地之平而道德之至也. 故帝王聖人休焉. 休則虛, 虛則實, 實則倫矣. 虛則靜, 靜則動, 動則得矣. 靜則無爲, 無爲也, 則任事者責矣. 無爲則兪兪. 兪兪者, 憂患不能處, 年壽長矣. 夫虛靜恬淡寂漠無爲者, 萬物之本也. 明此以南鄕,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以此處上, 帝王天子之德也; 以此處下, 玄聖素王之道也. 以此退居而閑游, 江海山林之士服; 以此進爲而撫世, 則功大名顯而天下一也. 靜而聖, 動而王, 無爲也而尊, 朴素而天下莫能與之爭美.
천지(天地) 第十二 1 天地雖大, 其化均也; 萬物雖多, 其治一也; 人卒雖衆, 其主君也. 君原於德而成於天. 故曰: 玄古之君天下, 無爲也, 天德而已矣. 以道觀言而天下之君正; 以道觀分而君臣之義明; 以道觀能而天下之官治; 以道泛觀而萬物之應備. 故通於天地者, 德也; 行於萬物者, 道也; 上治人者, 事也; 能有所藝者, 技也. 技兼於事, 事兼於義, 義兼於德, 德兼於道, 道兼於天. 故曰: 古之畜天下者, 無欲而天下足, 無爲而萬物化, 淵靜而百姓定. 『記』曰: “通於一而萬事畢, 無心得而鬼神服.” 2 夫子曰: “夫道, 覆載萬物者也, 洋洋乎大哉! 君子不可以不刳心焉. 無爲爲之之謂天, 無爲言之之謂德, 愛人利物之謂仁, 不同同之之謂大, 行不崖異之謂寬, 有萬不同之謂富. 故執德之謂紀, 德成之謂立, 循於道之謂備, 不以物挫志之謂完. 君子明於此十..
2. 지금 당장 죽을 지경인데 먼 훗날의 희망만 말하네 莊周家貧, 故往貸粟於監河侯. 監河侯曰: “諾. 我將得邑金, 將貸子三百金, 可乎?” 莊周忿然作色曰: “周昨來, 有中道而呼者, 周顧視車轍, 中有鮒魚焉. 周問之曰: ‘鮒魚來, 子何爲者耶?’ 對曰: ‘我, 東海之波臣也. 君豈有斗升之水而活我哉!’ 周曰: ‘諾! 我且南游吳越之王, 激西江之水而迎子, 可乎?’ 鮒魚忿然作色曰: ‘吾失我常與, 我無所處. 我得斗升之水, 然活耳. 君乃言此, 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 해석莊周家貧, 故往貸粟於監河侯. 장주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監河侯曰: “諾. 감하후가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我將得邑金, 將貸子三百金, 내가 장차 읍의 돈을 받으면 장차 그대에게 300금을 빌려주겠네. 可乎..
외물(外物) 第二十六 1 外物不可必, 故龍逢誅, 比干戮, 箕子狂, 惡來死, 桀·紂亡. 人主莫不欲其臣之忠, 而忠未必信, 故伍員流於江, 萇弘死於蜀, 藏其血, 三年而化爲碧. 人親莫不欲其子之孝, 而孝未必愛, 故孝己憂而曾參悲. 木與木相摩則然, 金與火相守則流, 陰陽錯行, 則天地大絯, 於是乎有雷有霆, 水中有火, 乃焚大槐. 有甚憂兩陷而無所逃. 螴蜳不得成, 心若縣於天地之間, 慰暋沈屯, 利害相摩, 生火甚多, 衆人焚和, 月固不勝火, 於是乎有僓然而道盡. 2 莊周家貧, 故往貸粟於監河侯. 監河侯曰: “諾. 我將得邑金, 將貸子三百金, 可乎?” 莊周忿然作色曰: “周昨來, 有中道而呼者, 周顧視車轍, 中有鮒魚焉. 周問之曰: ‘鮒魚來, 子何爲者耶?’ 對曰: ‘我, 東海之波臣也. 君豈有斗升之水而活我哉!’ 周曰: ‘諾, 我且南游吳越之王, 激..
9. 目徹爲明, 耳徹爲聰, 鼻徹爲顫, 口徹爲甘, 心徹爲知, 知徹爲德. 凡道不欲壅, 壅則哽, 哽而不止則跈, 跈則衆害生. 物之有知者恃息. 其不殷, 非天之罪. 天之穿之, 日夜無降, 人則顧塞其竇. 胞有重閬, 心有天游. 室無空虛, 則婦姑勃谿; 心無天游, 則六鑿相攘. 大林丘山之善於人也, 亦神者不勝.
8 莊子曰: “人有能游, 且得不游乎! 人而不能游, 且得游乎! 夫流遁之志, 決絶之行, 噫, 其非至知厚德之任與! 覆墜而不反, 火馳而不顧. 雖相與爲君臣, 時也. 易世而無以相賤. 故曰: 至人不留行焉. 夫尊古而卑今, 學者之流也. 且以狶韋氏之流觀今之世, 夫孰能不波! 唯至人乃能游於世而不僻, 順人而不失己. 彼敎不學, 承意不彼.
재유(在宥) 第十一 1 聞在宥天下, 不聞治天下也. 在之也者, 恐天下之淫其性也; 宥之也者, 恐天下之遷其德也. 天下不淫其性, 不遷其德, 有治天下者哉? 昔堯之治天下也, 使天下欣欣焉人樂其性, 是不恬也; 桀之治天下也, 使天下瘁瘁焉人苦其性, 是不愉也. 夫不恬不愉. 非德也; 非德也而可長久者, 天下無之. 人大喜邪, 毗於陽; 大怒邪, 毗於陰. 陰陽幷毗, 四時不至, 寒暑之和不成, 其反傷人之形乎! 使人喜怒失位, 居處無常, 思慮不自得, 中道不成章. 於是乎天下始喬詰卓鷙, 而後有盜跖·曾·史之行. 故擧天下以賞其善者不足, 擧天下以罰其惡者不給. 故天下之大不足以賞罰. 自三代以下者, 匈匈焉終以賞罰爲事, 彼何暇安其性命之情哉! 而且說明邪, 是淫於色也; 說聰邪, 是淫於聲也; 說仁邪, 是亂於德也; 說義邪, 是悖於理也; 說禮邪, 是相於技也; 說樂..
8. 大人之敎, 若形之於影, 聲之於響, 有問而應之, 盡其所懷, 爲天下配. 處乎無響. 行乎無方. 挈汝適復之, 撓撓以游無端, 出入無旁, 與日無始. 頌論形軀, 合乎大同. 大同而無己. 無己, 惡乎得有有. 睹有者, 昔之君子; 睹無者, 天地之友.
4. 昔者黃帝始以仁義攖人之心, 堯·舜於是乎股無胈, 脛無毛, 以養天下之形. 愁其五藏以爲仁義, 矜其血氣以規法度. 然猶有不勝也. 堯於是放讙兜於崇山, 投三苗於三峗, 流共工於幽都, 此不勝天下也. 夫施及三王而天下大駭矣. 下有桀·跖, 上有曾·史, 而儒墨畢起. 於是乎喜怒相疑, 愚知相欺, 善否相非, 誕信相譏, 而天下衰矣; 大德不同, 而性命爛漫矣; 天下好知, 而百姓求竭矣. 於是乎釿鋸制焉, 繩墨殺焉, 椎鑿決焉. 天下脊脊大亂, 罪在攖人心. 故賢者伏處大山嵁巖之下, 而萬乘之君憂栗乎廟堂之上. 今世殊死者相枕也, 桁楊者相推也, 形戮者相望也, 而儒墨乃始離跂攘臂乎桎梏之間. 意, 甚矣哉! 其無愧而不知恥也甚矣! 吾未知聖知之不爲桁楊椄槢也, 仁義之不爲桎梏鑿枘也, 焉知曾·史之不爲桀·跖嚆矢也! 故曰: 絶聖棄知, 而天下大治.
2. 故君子不得已而臨蒞天下, 莫若無爲. 無爲也, 而後安其性命之情. 故貴以身於爲天下, 則可以托天下; 愛以身於爲天下, 則可以寄天下. 故君子苟能無解其五藏, 無擢其聰明, 屍居而龍見, 淵黙而雷聲, 神動而天隨, 從容無爲而萬物炊累焉. 吾又何暇治天下哉!
응제왕(應帝王) 第七 1 齧缺問於王倪, 四問而四不知. 齧缺因躍而大喜, 行以告蒲衣子. 蒲衣子曰: “而乃今知之乎? 有虞氏不及泰氏. 有虞氏其猶藏仁以要人, 亦得人矣, 而未始出於非人. 泰氏其臥徐徐, 其覺於於. 一以己爲馬, 一以己爲牛. 其知情信, 其德甚眞, 而未始入於非人.” 2 肩吾見狂接輿. 狂接輿曰: “日中始何以語女?” 肩吾曰: “告我: 君人者以己出經式義度, 人孰敢不聽而化諸!” 狂接輿曰: “是欺德也. 其於治天下也, 猶涉海鑿河而使蚊負山也. 夫聖人之治也, 治外夫? 正而後行, 確乎能其事者而已矣. 且鳥高飛以避矰弋之害, 鼷鼠深穴乎神丘之下以避熏鑿之患, 而曾二蟲之無知?” 3 天根游於殷陽, 至蓼水之上, 適遭無名人而問焉, 曰: “請問爲天下.” 無名人曰: “去! 汝鄙人也, 何問之不豫也! 予方將與造物者爲人, 厭則又乘夫莽眇之鳥, 以出..
7. 南海之帝爲儵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渾沌. 儵與忽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之甚善. 儵與忽謀報渾沌之德, 曰: “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
대종사(大宗師) 第六 1. 知天之所爲, 知人之所爲者, 至矣! 知天之所爲者, 天而生也; 知人之所爲者, 以其知之所知以養其知之所不知, 終其天年而不中道夭者, 是知之盛也. 雖然, 有患: 夫知有所待而後當, 其所待者特未定也. 庸詎知吾所謂天之非人乎? 所謂人之非天乎? 2. 且有眞人而後有眞知. 何謂眞人? 古之眞人, 不逆寡, 不雄成, 不謨士. 若然者, 過而弗悔, 當而不自得也. 若然者, 登高不栗, 入水不濡, 入火不熱, 是知之能登假於道者也若此. 古之眞人, 其寢不夢, 其覺無憂, 其食不甘, 其息深深. 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 屈服者, 其嗌言若哇. 其嗜欲深者, 其天機淺. 古之眞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受而喜之, 忘而復之. 是之謂不以心捐道, 不以人助天, 是..
15. 顔回曰: “回益矣.” 仲尼曰: “何謂也?” 曰: “回忘仁義矣.” 曰: “可矣, 猶未也.” 他日復見, 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忘禮樂矣!” 曰: “可矣, 猶未也.” 他日復見, 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坐忘矣.” 仲尼蹴然曰: “何謂坐忘?” 顔回曰: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仲尼曰: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而果其賢乎! 丘也請從而後也.”
5. 死生, 命也; 其有夜旦之常, 天也. 人之有所不得與, 皆物之情也. 彼特以天爲父, 而身猶愛之, 而况其卓乎! 人特以有君爲愈乎己, 而身猶死之, 而况其眞乎! 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 與其譽堯而非桀也, 不如兩忘而化其道.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
4. 古之眞人, 其狀義而不朋, 若不足而不承; 與乎其觚而不堅也, 張乎其虛而不華也; 邴邴乎其似喜也, 崔崔乎其不得已也, 滀乎進我色也, 與乎止我德也, 厲乎其似世也, 謷乎其未可制也, 連乎其似好閉也, 悅乎忘其言也. 以刑爲體, 以禮爲翼, 以知爲時, 以德爲循. 以刑爲體者, 綽乎其殺也; 以禮爲翼者, 所以行於世也; 以知爲時者, 不得已於事也; 以德爲循者, 言其與有足者至於丘也, 而人眞以爲勤行者也. 故其好之也一, 其弗好之也一. 其一也一, 其不一也一. 其一與天爲徒, 其不一與人爲徒, 天與人不相勝也, 是之謂眞人.
3. 若然者, 其心志, 其容寂, 其顙頯. 淒然似秋, 暖然似春, 喜怒通四時, 與物有宜而莫知其極. 故聖人之用兵也, 亡國而不失人心. 利澤施乎萬世, 不爲愛人. 故樂通物, 非聖人也; 有親, 非仁也; 天時, 非賢也; 利害不通, 非君子也; 行名失己, 非士也; 亡身不眞, 非役人也. 若狐不偕·務光·伯夷·叔齊·箕子·胥余·紀他·申徒狄, 是役人之役, 適人之適, 而不自適其適者也.
2. 且有眞人而後有眞知. 何謂眞人? 古之眞人, 不逆寡, 不雄成, 不謨士. 若然者, 過而弗悔, 當而不自得也. 若然者, 登高不栗, 入水不濡, 入火不熱, 是知之能登假於道者也若此. 古之眞人, 其寢不夢, 其覺無憂, 其食不甘, 其息深深. 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 屈服者, 其嗌言若哇. 其嗜欲深者, 其天機淺. 古之眞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受而喜之, 忘而復之. 是之謂不以心捐道, 不以人助天, 是之謂眞人.
덕충부(德充符) 第五 1 魯有兀者王駘, 從之游者與仲尼相若. 常季問於仲尼曰: “王駘, 兀者也, 從之游者與夫子中分魯. 立不敎, 坐不議. 虛而往, 實而歸. 固有不言之敎, 無形而心成者耶? 是何人也?” 仲尼曰: “夫子, 聖人也, 丘也直後而未往耳! 丘將以爲師, 而况不若丘者乎! 奚假魯國, 丘將引天下而與從之.” 常季曰: “彼兀者也, 而王先生, 其與庸亦遠矣. 若然者, 其用心也, 獨若之何?” 仲尼曰: “死生亦大矣, 而不得與之變; 雖天地覆墜, 亦將不與之遺; 審乎無假而不與物遷, 命物之化而守其宗也.” 2. 常季曰: “何謂也?” 仲尼曰: “自其異者視之, 肝膽楚越也; 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 夫若然者, 且不知耳目之所宜, 而游心乎德之和. 物視其所一而不見其所喪, 視喪其足猶遺土也.” 常季曰: “彼爲己, 以其知得其心, 以其心得其常心. ..
8 惠子謂莊子曰: “人故無情乎?” 莊子曰: “然.” 惠子曰: “人而無情, 何以謂之人?” 莊子曰: “道與之貌, 天與之形, 惡得不謂之人?” 惠子曰: “旣謂之人, 惡得無情?” 莊子曰: “是非吾所謂情也. 吾所謂無情者, 言人之不以好惡內傷其身, 常因自然而不益生也.” 惠子曰: “不益生, 何以有其身?” 莊子曰: “道與之貌, 天與之形, 無以好惡內傷其身. 今子外乎子之神, 勞乎子之精, 倚樹而吟, 據槁梧而瞑. 天選子之形, 子以堅白鳴.”
2. 常季曰: “何謂也?” 仲尼曰: “自其異者視之, 肝膽楚越也; 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 夫若然者, 且不知耳目之所宜, 而游心乎德之和. 物視其所一而不見其所喪, 視喪其足猶遺土也.” 常季曰: “彼爲己, 以其知得其心, 以其心得其常心. 物何爲最之哉?” 仲尼曰: “人莫鑒於流水而鑒於止水. 唯止能止衆止. 受命於地, 唯松柏獨也正, 在冬夏靑靑; 受命於天, 唯堯·舜獨也正, 在萬物之首. 幸能正生, 以正衆生. 夫保始之徵, 不懼之實, 勇士一人, 雄入於九軍. 將求名而能自要者而猶若是, 而况官天地·府萬物·直寓六骸·象耳目·一知之所知而心未嘗死者乎! 彼且擇日而登假, 人則從是也. 彼且何肯以物爲事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