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통의 깊이와 진정(眞情)의 울림
사람은 누구나 일상 속에서 허다한 사태에 직면하고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며 살아간다. 이번에 살필 작품들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에서 발생한 다양한 감정들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에서 촉발된 감정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그 특징적인 면모를 살펴보고 ‘진시’의 측면에서 그 의미를 탐색하고 한다. 앞서 본 시편들이 일상 속 경물들과의 교감에서 나온 시편이었다면, 이번 살필 작품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통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먼저 살펴볼 작품은 가족이나 벗을 잃은 슬픔을 형상화한 시편들이다. 죽음은 인간의 유한한 숙명이 충격적으로 돌출되는 일상사의 비극이다. 인위적인 노력으로는 도무지 어찌 할 수 없는 시원적 단절을 경험하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숙연해진다. 더구나 그 대상이 자신의 지친인 경우에 그 슬픔은 더욱 지극한 것이 된다. 이 순간에 발생하는 슬픔은 진실과 허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따라서 지친의 죽음을 형상화한 백악시단의 시편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감정의 진실성 여부가 아니라 그 진실한 슬픔을 어떻게 형상화하였기에 문학적 감동을 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먼저 김창흡의 시를 보자.
再哭黔陽春 終疑若人去 | 봄날 검산에서 다시 곡하니 끝내 이 사람 정말 가버렸나! |
一往苟不返 三年便千古 | 한번 가서는 영영 오지 않으니 삼년이 곧 천년 같구나. |
纍纍母將子 春草生同土 | 수척해진【‘류류(纍纍)’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수척하게 야윈 모습을 의미한다. 『禮記』 「玉藻」: “喪容纍纍.” 鄭玄注: “羸憊貌也.” 孔穎達疏: “‘喪容纍纍’者, 謂容貌瘦瘠纍纍然.”(『漢語大詞典』)】 어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봄풀은 늘 그렇듯 같은 땅에서 자라났구나. |
暝息依松栢 微月一何苦 | 저물녘 송백에 기대있자니 희미한 저 달은 어찌 그리 서글픈가! |
嬋媛存營魄 眄睞忽無覩 | 누이여! 혼백은 잘 있는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질 않네. |
每歸若相棄 胡寧不延佇 | 돌아갈 때마다 매번 버리고 가는 듯하니 어찌 우두커니 서있지 않겠느냐! |
上馬淚如綆 黔山正飛雨 | 말에 오르니 눈물은 두레박줄 같은데 때마침 검산엔 빗방울이 흩날린다. |
「검산(黔山)에서 곡하다[哭黔山]」, 金昌翕, 『三淵集』 권1
이 시는 김창흡이 29세 되던 1681년 어느 봄날 누이동생의 무덤을 찾아지은 시이다. 김창흡은 고인에게 아팠을 적 돌봐주지도 못하고 임종도 못한 각별한 미안함이 있었다. 김창흡은 누이의 제문에서 그 사실을 써두었다.
유독 나는 또 다른 형제보다 열 배도 넘는 정이 있었으니 아! 슬프다. 아버지께서 서울로 들어가셨음에도, 나는 철원 산골에 남아 장차 돌밭이나 일구려하여, 오고가며 부모님께 안부 여쭙기를 한 달에 한 번도 채 못했다. 너는 내가 오면 반드시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며 매번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라고 묻고 나는 “세밑에”라고 대답했었다. 그러면 너는 근심스럽게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마셔요”라고 했었다. 팔월에 왔을 때, 처음 네게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 이른 걸 의심하며서도 나도 모르게 걱정했단다. 그러나 이미 어찌 할 방도가 없어 속으로 몇 개월을 헤아리면서 섣달 말이나 올봄 초에는 올 수 있으니 섣달 열흘 전에는 반드시 와서 너를 간호하리라 마음먹었단다. 그리고 입산한 뒤에는 매번 손꼽아 그 날을 기다렸단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그 때를 못 미쳐 네가 결국 그 사이에 죽고 말 줄을.
獨吾則又有兼情於他兄弟不啻倍蓰. 嗚呼! 我家之大入於洛也, 余則滯在東峽, 盖將有事於石田, 往來省視, 率不過一月一過. 汝見我來, 必嘻笑而迎, 輒問‘其罷歸之期’, 余答以‘卒歲焉’, 則汝悒然不樂曰‘毋久淹也’. 八月之來, 始聞汝有身, 訝其早也, 不覺然有驚, 旣已不可奈何. 則默計彌月之期, 度可在臘月之末、今春之初, 於其前臘月旬間, 必來護汝. 入山之後, 每嘗屈指而待也. 豈知未及其期而汝遂奄忽於其間乎?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5 「祭亡妹文」
누이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여긴 김창흡이었기에 인용된 시편에는 죽은 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절절이 배어난다. 이 시가 독자로 하여금 함께 눈물짓게 하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끝내 가고 말았냐’는 탄식을 시작으로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감정구들은 아직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김창흡의 상태를 여실히 전해준다. 특히 ‘돌아갈 때마다 매번 너만 버리고 가는 것 같다’는 시구에는 진실한 마음이 이끌어낸 끝없는 울림이 배어난다. 김창흡의 이 시는 가식 없는 슬픔의 토로가 독자를 함께 울게 하는 작품이다. 아래 홍세태의 시 또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소리를 형상화함으로써 시적 감동을 준다.
첫 번째(其一)
自我罹窮阨 生趣若枯木 | 나는 궁액(窮阨)에 빠진 뒤로 생의 흥취는 말라 죽은 나무 같았지만 |
賴爾得開口 聊以慰心曲 | 그래도 네가 있어 입을 열었고 늘 서글픈 마음을 위로 받았다. |
嗟汝今已矣 令我日幽獨 | 아! 네가 떠나간 지금 나의 하루하루는 더욱 고독해져 |
入室如有聞 出門如有矚 | 집에 들면 어디선가 네 목소리 들리는 듯 문 나서면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너를 찾게 된다. |
觸物每抽思 如繭絲在腹 | 무엇을 마주해도 늘 뽑혀 나오는 네 생각 마치 뱃속 가득 채워진 고치실 같은데 |
哀彼一抔土 魂骨寄山足 | 서글퍼라! 저 한 줌의 흙으로 네 넋과 뼈를 산발치에 묻었구나. |
平生不我遠 今夜與誰宿 | 평생에 나를 멀리 떠난 적 없었는데 오늘 밤은 누구랑 함께 자느냐? |
空留絶筆書 婉孌當面目 | 부질없이 절필(絶筆)의 글 남겼는데 예쁜 네 얼굴이며 눈동자가 아른거리네. |
開箱不忍視 但有淚相續 | 상자를 열어도 차마 볼 수가 없어 다만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지만 |
冥漠九原下 爾豈聞我哭 | 까마득한 저 구원(九原)의 아래에서 네 어찌 내 곡소리 들을 수 있으랴! |
「슬픔[述哀]」, 洪世泰, 『柳下集』 권2
昔與隣兒戲 隣兒今獨來 | 얼마 전엔 이웃 아이와 함께 놀았는데 오늘은 이웃 아이만 홀로 왔구나. |
東風芳草色 忽復滿池臺 | 봄바람이 곱디고운 풀빛으로 어느새 못가 누대 뒤덮었는데. |
「또 슬퍼져서[有感]」, 洪世泰, 『柳下集』 권2
첫 번째 시는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목 놓아 슬픔을 토로한 시이다. 홍세태의 이 시는 김창흡의 시처럼 격한 탄식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이를 묻고 난 뒤 자꾸만 떠오르는 아이의 모습에 차곡차곡 차오르는 슬픔을 담았다. 궁액(窮厄)에 빠진 작가의 삶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자식. 그런 자식을 한 줌 차디찬 흙 속에 묻고 돌아온 아비는 아직 자식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작가는 ‘어디선가 도란도란 아이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문을 열고 나가면 골목 어디선가 아이들과 뛰어놀고 있을 것만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수사적 형상화를 위한 어떤 의식도 개입되지 않은 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정만이 시행을 채우고 있다. 또한 ‘평생에 나를 멀리 떠난 적 없었는데, 오늘 밤은 누구랑 함께 자느냐?’와 ‘예쁜 네 얼굴과 눈동자가 아른 거린다’, 그리고 두 번째 수의 “집사람은 내 슬픔 알고서, 다독이려다 먼저 목이 메네. 서로 보며 소매로 눈물만 훔칠 뿐[家人知我戚, 將喩語先塞. 相顧但掩袂].”과 같은 표현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써낸 것인데 독자로 하여금 지극한 슬픔을 공감하게 한다. 진정(眞情)이야말로 가장 감동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예들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는 홍세태의 문집에 첫 번째 인용 시 다음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이 시 또한 죽은 아이를 떠올리며 그 슬픔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오언절구의 단형시로 장편 고시에 못지않은 절절한 비애감을 담아내고 있어 주목된다. 진정의 형상화의 측면에서 좋은 참고가 되는 작품이다. 이 시의 표면적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얼핏 보면 봄날의 한 장면을 그린 풍경시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시를 음미해보면 작품 안에 녹아있는 절절한 슬픔이 독자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가 목도한 장면은 지극히 간단하다. 집을 나서보니 연못에 봄풀이 싱그럽고 이웃집 아이가 나와서 놀고 있다. 홍세태는 그 장면을 있는 그대로 형상화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한없는 눈물이 읽히는 것은 그 연못에 우리 아이가 없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이웃집 아이와 그렇게 즐겁게 뛰놀던 연못에 지금은 이웃집 아이와 봄풀만 찾아왔다. 죽은 아이의 부재가 이웃 아이를 통해 더욱 크게 느껴지면서 이 시는 슬픔을 직접 토로한 앞의 시보다 더한 슬픔을 전해준다. 홍세태의 시재(詩才)를 논하기 앞서 꾸밈없는 감정[眞情]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한편, 백악시단은 망자 생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반추하며 망자에 대한 슬픔을 극대화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其二)
作人如汝者 今世鮮其匹 | 사람이 되어 너 같은 이 금세엔 짝할 이 드물었단다. |
眉眸細如畵 肌肉瑩勝雪 | 얼굴은 그린 듯이 예쁘고 피부는 눈보다 더 뽀얬는데 |
學語又學步 婉孌戱我膝 | 말을 배우고 걸음을 배워서는 내 무릎에 앉아 얌전히 노니 |
見者無不愛 如睹瑞世物 | 보는 이마다 다들 사랑스럽다면서 이 세상 보물처럼 보았단다. |
珊珊步出來 手弄床頭筆 | 아장아장 걸어 나와 책상 위 붓들을 만지작거리다 |
時復散棊子 或又亂書帙 | 때로는 또 바둑돌을 흩어버리고 이따금 또 책들을 어지럽혀도 |
愛極任爾爲 不忍少嗔喝 | 얼마나 예쁘던지 네 하는 대로 둘 뿐 차마 성내며 꾸짖을 수 없었단다. |
今焉那復得 如寶手中失 | 이제 어찌하면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마치 손에 있던 보물을 잃은 것만 같아 |
勿使眼中物 依舊置我室 | 눈앞의 물건들마저 전처럼 두지 못하겠구나. |
「묵아(墨兒)를 곡하며[哭墨兒]」, 洪重聖, 『芸窩集』 권2
이 시는 홍중성이 세 살 난 어린 자식을 잃고 쓴 시이다. 눈처럼 뽀얀 피부를 가진 예쁜 아이는 둘도 없이 귀했다. 늘그막에 얻은 귀한 아이였기 때문이다【홍중성은 첫 번째 수에서 “네 형은 아우가 생겼다고, 네 어미는 아이가 생겼다고 기뻐했단다. 늘그막에 두 아들을 두어, 내게 위안이 되리라 생각했단다[爾兄謂有弟, 爾母謂有兒. 衰年有兩兒, 持以慰我思].”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고 말았다. 이 시의 첫 번째 수에서 홍중성은 자신의 슬픔을 가감 없이 토로하였다. “너를 이렇게 데려갈 것이었다면, 하늘은 어찌 너를 낳게 했던가[苟令汝至此, 天胡生汝爲]?”라며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용된 두 번째 수에 와서 홍중성은 생전 아이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홍중성에게 가장 슬프게 떠오른 모습은 말썽부리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장아장 걸어 나와 책상 위의 붓을 만지작거리고, 때로는 바둑돌을 흩어버리기도 하고, 책을 어지럽게 쏟기도 하는 아이의 말썽을 보고도 홍중성은 차마 성낼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홍중성은 아이의 행위를 상세하게 그림으로써 이제는 그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비애감을 더욱 크게 하였다. 그래서 아이가 만지작거리고 가지고 놀던 물건들을 전처럼 두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 같은 진정이 토로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죽은 아이의 생전 모습을 눈에 선하게 그림으로써 아이를 잃은 슬픔을 한층 더 공감할 수 있게 한 작품이다. 다음 권섭의 작품은 손주를 잃은 슬픔을 그린 것이다.
是老終何命 奇孫箇箇埋 | 이 늙은이 끝내 무슨 운명인가? 기특한 자손들을 하나하나 묻었으니 |
寒風未死淚 揮酒夕陽階 | 찬바람 맞으며 죽지 못한 이 눈물을 노을 지는 섬돌에서 흩뿌린다네. |
병자년 12월 27일, 어린 손자 신응(信應)의 아들 구동(九同)이 병도 없이 죽었으니 참담하고 애통한지고. 아이가 태어남에 풍모(豊貌)는 준위(雋偉)하고 영재(英才)는 경절(警絶)하여 말도 하기 전에 글자를 알았고, 다박머리 늘어져선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서는 붓을 멈추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송독을 그치지 않았다. 엉엉 울다가도 부르면 곧 순응하고 밥상을 차릴 때면 물러나 앉아 내려주길 기다렸으며 이따금 시좌(侍坐)하는 곁으로 와서는 명이 없으면 물러가지 않았다. 나의 각별한 사랑이 여타 자손과는 달랐건만, 지금 그 아이가 죽었도다. 아! 나약한 뭇 손들로는 한 구석도 채울 수 없구나. 유독 네 명의 손이 있어 기대가 적지 않았는데 임신년에 시응(時應)이가 스물두 살로 죽었고 계유년엔 을경(乙慶)이가 열아홉 살로, 현남(玄男)이가 아홉 살로 죽었으며 지금 구동(九同)이가 다섯 살로 죽었다. 이 모두가 나의 액운이 아손(兒孫)들에 미쳐 이리 된 것 아니겠는가! 다만 이 몸뚱이 진즉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원통함을 멈출 수 없어 이에 시 한 수를 쓴다.
丙子臘月卄七日, 小孫信應之子九同不病而死, 慘矣痛惜. 兒之生, 豊貌雋偉, 英才警絶, 未語而知書字, 垂髫而喜讀書, 手不停筆, 口不離誦. 啼哭時, 呼之則卽應; 設飯時, 退坐而待賜. 時時出來侍坐傍側, 不命則不退. 我甚愛憐異於他孫, 今其死矣. 嗚呼! 衆孱不足以滿隅. 獨有四孫, 期待不少, 壬申時應二十二而死, 癸酉乙慶十九而死, 玄男初九而死, 今又九同初五而死. 此皆我厄運移及於兒孫如此耶! 只怨此身之未卽死. 寃呼不已, 題此一詩. -權燮, 『玉所稿』 「詩·13」
이 시는 86세의 권섭이 다섯 살 난 손자 구동(九同)이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지은 시이다. 긴 제목을 통해 시적 정황을 알 수 있다. 유난히 영특하고 자질이 빼어났던 손주의 죽음 앞에 86세의 권섭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더구나 오래 산 탓에 손주 넷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은 권섭은 자신의 장수가 손주의 壽를 빼앗았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전구의 ‘죽지 못한 이 눈물[未死淚]’이라는 표현 속에 권섭의 애절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상에서 본 작품들은 형제와 자식 같은 혈육의 죽음을 슬퍼한 시들이었다. 이들 시편들은 하나같이 혈육을 잃은 슬픔을 느껴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토로하였는데, 그것은 진실한 마음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들 시편에는 일체의 수사나 절묘한 시상 전개 등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감정을 그려냄으로써 더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혈육의 죽음이 아닌 경우에는 어떠했을까?
族厚家仍近 我冠君髮垂 | 친척이라 친했고 집도 가까웠는데 내 관례 할 때 자네는 소년이었지 |
初猶撫頂愛 終復比肩隨 | 처음에는 머리 쓰다듬으며 귀여워하다가 끝내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따르게 되었지 |
良驥方觀步 奇花易墮枝 | 천리마 같은 걸음을 보려 하였는데 기이한 꽃처럼 가지에서 떨어져 버렸구나. |
乃翁賢且屈 胡不保佳兒 | 자네 아버지는 어질고 겸손하였는데 어찌 착한 아들 지키지 못하였나! |
두 번째
如何三載內 哭弟又悲兄 | 어떠하겠나, 삼년 동안 동생을 곡하고 또 형을 슬퍼함이 |
詞翰大家子 銘旌太學生 | 문장에 뛰어난 명문의 자제가 태학의 학생으로 죽었다네 |
人應無夭相 天豈惜才名 | 사람은 본디 요절할 상이 없건마는 하늘은 어찌 재주와 명성을 아끼는가 |
舊贈華牋在 呑聲寫苦情 | 예전에 주었던 꽃무늬 종이 남아 있으니 울음을 삼키고 슬픈 심정을 쓴다. |
「심옥을 애도하며[悼沈鈺]」, 朴泰觀, 『凝齋遺稿』卷上
이 시는 박태관이 요절한 친척 심옥(沈鈺)의 죽음을 애도한 시이다. 이 시 뒤에는 『응재유고(凝齋遺稿)』를 초선(初選)했던 김창흡의 평이 붙어있다. 김창흡은 “글자마다 느꺼워 눈물을 흘리게 하니, 두 편이 모두 그러하다. 고금의 만시 중에 이러한 작품은 손꼽을 정도이다[字字情淚, 兩篇皆然, 古今挽詩中如此作, 指不多屈].”라고 하였다. 대단한 고평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김창흡을 감동시켰는지 살펴보자.
애도의 대상은 세상에 재능을 막 펴려다 요절하고만 인물이라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더구나 박태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친척이었다. 그래서 박태관은 심옥을 애도하면서 어린 시절의 모습과 성장해서의 모습을 그렸다. 처음에는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던 아이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장성하였다.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행간에는 심옥이 성장하면서 함께 했던 추억들을 반추하는 작가의 심정이 담겨있다. 그런 친밀함이 있었기에 작가는 그의 재능도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수의 경련은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요절하고만 고인에 대한 상실감이 잘 드러나 있다. 첫 번째 수의 백미는 미련이다. 내용은 하늘을 원망하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여느 만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표현이다. 자네 아버지처럼 어진 사람도 자식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며 탄식하였는데, 이를 통해 박태관은 심옥을 애도하는 동시에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까지 담아냈다. 언급된 인물들의 관계, 사람됨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김창흡에게 박태관의 애도시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상화된 모습들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창흡은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한 것이다. 두 번째 수 또한 가문의 연이은 상사(喪事)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고 고인의 요절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리고 미련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주었던 화전지에 애도시를 쓰는 작가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슬픔을 극대화하였다. 함께 시교를 나누자고 선물했을 화전지가 작가의 슬픔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구체적 소재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고인의 인품을 그리며 슬픔을 표현하는 만시 일반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생전 고인과의 친분을 구체적 모습과 소재를 통해 그려냄으로써 범상한 만시가 줄 수 없는 감동을 줄 수 있었다.
백악시단이 요절한 인물을 애도한 시들은 요절이 주는 안타까움 때문에 대체로 감성적 슬픔이 지배적 정조를 이룬다. 그러나 일정한 수(壽)를 누리다 고인이 된 경우에는 고인의 사람됨을 우선적으로 기리는 만시 일반의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이들의 만시는 예의(禮義) 차원의 형식적 만시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병연의 만시를 살펴보자.
첫 번째
君得李一源 我得張弼文 | 그대는 이일원(李一源)을 얻고 나는 장필문(張弼文)을 얻었지. |
相得而相失 于玆三紀云 | 서로 얻고 서로 잃은 지 지금껏 삼십 육년 되었지. |
네 번째
詩成何所寄 顔面不復論 | 이제 시 지으면 어디로 부치지? 다시는 얼굴 보며 말을 할 수 없게 됐네. |
地下張弼文 地上李一源 | 장필문(張弼文)은 지하에 이일원(李一源)은 지상에 있으니. |
다섯 번째
載大之文學 道長之詩學 | 재대(載大)의 문장 도장(道長)의 시 |
呼汝參其間 弼文之字學 | 그대 불러 그 사이에 참여시키면 필문(弼文)의 자학(字學). |
일곱 번째
昔嘯蓬萊頂 鞭鵉君不慵 | 지난 날 봉래산 정상에서 읊었는데 그대는 난새 타고 채찍질을 게을리 않았지. |
海雲擎富士 嗟我未之從 | 바닷가 구름 위로 우뚝 솟은 부사산은 아! 나는 미처 따라가지 못한 곳. |
아홉 번째
冥漠焉知悲 朋親爲痛楚 | 저승에서 어찌 슬픔을 알리! 벗은 이렇게 아프고 쓰린데. |
堂上九十親 室中二十女 | 집에는 구십 세의 노친 방에는 스무 살의 딸. |
「장응두(張應斗)를 애도하는 만시[張弼文輓]」,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이병연의 이 시는 모두 10수로 되어있다. 이 시에서 우선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언절구 연작시라는 점이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오언절구로 지어진 만시는 편수가 많지 않은데 백악시단이 활동했던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면 연작 오언절구 만시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고 한다【장유승, 「17세기 고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2, 72~73면 참조.】. 실제로 백악시단의 경우 위의 시를 비롯하여 김창흡의 「애족손건행(哀族孫健行)」 10수, 『삼연집(三淵集)』 권7, 「박사빈만(朴士賓挽)」 11수, 『삼연집(三淵集)』 권16, 홍세태의 「조교관녀만(趙敎官女挽)」 9수, 『유하집(柳下集)』 권14, 「박사빈만(朴士賓挽)」 4수, 『유하집(柳下集)』 권7, 김시민의 「박사빈만(朴士賓挽)」 11수, 『동포집(東圃集)』 권2, 「삼연선생만(三淵先生挽)」 4수, 『동포집(東圃集)』 권3 등 다수의 연작 만시들이 존재한다. 위의 작품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만시를 창작하면서 왜 연작의 방식을 애호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전대 만시의 경우, 애도의 분량이 많을 경우 주로 애용했던 것은 장편 고시였다. 그런데 이병연은 가장 짧은 시형인 오언절구를 10수 연작하는 방식으로 고인을 애도하였다. 인용된 첫 번째 수는 서장의 성격으로 고인과의 우정이 오래되었음을 말하였고, 네 번째 수는 고인의 시재와 고인의 부재로 인한 슬픔을, 다섯 번째 수는 고인의 장처였던 자학(字學)을, 일곱 번째 수는 고인의 통신사행을, 아홉 번째 수는 유족을 보는 작가의 슬픔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각 수의 주제를 추려보면 이병연이 연작의 방식을 선택한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고인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기에 가장 용이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만시의 목적을 애도 대상인 고인의 생애를 기리는 데 두었기 때문에 그런 목적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형식을 택한 것이다. 또한 고인에 대한 기림을 최우선적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이병연은 자신의 비감을 누르고 일체의 수사를 배제한 채 사실에 입각하여 고인의 삶을 조명하였다. 장편의 만시가 작가의 슬픔 표출이 강하게 드러나는 주정적 성격을 보인다면, 이병연의 위 시는 작가의 감정이 극도로 제한된 이지적 면모가 강하다.
이 시에서 발견되는 또 한 가지 특징은 ‘이일원(李一源)’, ‘장필문(張弼文)’과 같은 인명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병연이 자신과 망우의 이름을 빈번하게 교차시켜 구사한 것은 슬픔을 형용하는 시어를 통해 비애감을 드러내기 보다는 한 인간의 총체성을 담고 있는 이름을 가져다 두 사람의 깊은 사귐을 직접적이고 압축적으로 드려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에는 관습적 눈물이나 과잉된 비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작가가 눈물을 참고 있어서 더 큰 슬픔을 느끼게 한다. 특히 아홉 번째 수에서 여전히 고인의 보살핌이 필요한 노친과 어린 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속에는 언표 되지 않은 눈물이 맺혀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과잉된 비감 표출을 배제하고 고인의 삶을 담담한 듯 형상화하면서도 작품 전체를 읽다보면 고인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하는 작가의 진정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이병연의 높은 시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편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시는 망우(亡友)와의 깊고도 진실한 사귐을 토대로 자기의 주관적 비애보다는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는 데 치중한 작품으로, 작품 표면에서 관습적 눈물을 거두고 단형시의 연작 방식을 통해 고인의 특징적 면모를 다각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만시의 의례성과 상투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풍의 만시를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이병연이 새롭게 개척한 만시는 후대 문인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인용된 이병연의 「장필문만(張弼文輓)」은 만시로는 특이한 오언절구 10수 연작시 형식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 감상적 비감을 배제한 채 고인의 특징적 면모를 다면적으로 부각하는 점, 그래서 만시의 의례성과 상투성을 참신하게 극복했다는 점 등에서 18세기 중후반 첨신한 시풍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용휴(1708~1782)의 「이우상만(李虞裳挽)」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이병연은 정치적으로는 노론이었지만 남인 문사들과의 교유가 일정하게 확인된다. 권만(權萬, 1688~1749)은 삼척부사였던 이병연을 찾아 함께 시교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이며(『江左集』 권2 「次陟伯李一源秉淵韻」) 5장에서 후술한 김이만(金履萬) 또한 이병연을 대시인으로 추앙하였다. 이병연의 만시가 이용휴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대 이병연의 시명과 남인 문사들과의 교유를 감안하면 이용휴가 남인 선배문인들을 통해 이병연의 작품을 보았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고찰이 요구된다.】.
이상에서 보았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지친(至親)이나 벗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편들은 기본적으로 망자와의 진실한 관계, 대상에 대한 깊은 인간애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러한 진실한 인간애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이들의 만시는 의례적 만시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백악시단의 만시가 주는 감동은 바로 진실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소중함을 깊이 있게 인식하였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의 시편들 가운데는 가족들, 벗들과의 돈독한 사랑과 우정을 진솔하게 그린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먼저 돈독한 가족애를 진솔하게 그린 작품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此老從今至樂存 | “이 늙은이 이제부턴 지극한 즐거움만 남았구려.” |
回頭爲向室人言 | 고개 돌려 아내에게 말을 건넸네. |
家無甔石休愁歎 | 집안에 양식 없어도 시름겨운 한숨소리 그치게 된 건 |
膝右男孫左女孫 | 오른 무릎엔 손자가, 왼 무릎엔 손녀가 있어서라네. |
「늦게 본 손주들이 행주로부터 왔기에 앞의 운자를 써서 짓다[晩孫自幸州來用前韻]」, 金時敏, 『東圃集』 권4
詩書生活復琴樽 | 시서(詩書)로 사시면서 거문고와 술잔을 또 두어 |
一二親朋唱和言 | 두어 명 친한 벗과 수창하고 담론하시네. |
老境他無人事擾 | 노경에 별다른 인사(人事)의 동요 없으니 |
閒居是亦聖朝恩 | 한가로이 거처함도 성조의 은혜로다. |
春風洞外時騎馬 | 봄바람 불면 골짜기 밖으로 때로 말에 오르시고 |
雨雪墻東久閉門 | 눈비 내리면 담장 동쪽 오래도록 문을 닫으셨지. |
龜縮過冬還有味 | 거북처럼 움츠린 채 겨울 나면서도 특별한 맛이 있으신 게지 |
夜從燈下弄孩孫 | 밤 되면 등불 아래 어린 손자들의 재롱 받겠지. |
「사천의 운자를 따라 짓다[次韻槎川]」, 金時敏, 『東圃集』 권6
김시민의 작품 두 수를 보였다. 첫 번째 시는 노년의 삶 가운데 맞은 소소한 행복을 읊고 있다. 노년의 김시민에게 이런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은 느지막이 본 손주들의 방문이었다. 양 무릎에 손자 손녀를 앉히고서 곁에 있는 늙은 아내와 흐뭇하게 웃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구나 겪는 일상적인 장면이지만 시인은 이것을 의미 있다고 여겨 시적 형상화를 하였다. 김시민은 이러한 장면을 형상화하면서 특별한 수사나 기교를 동원하지 않았다. 대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질박하게 그려냄으로써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심미적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두 번째 시는 노년의 이병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시서와 거문고, 그리고 술. 늙은 이병연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들이다. 무엇 하나 걸릴 것 없는 순조로운 노년의 삶. 그런데 한참 동안 소식이 없다. 이 시의 묘미는 미련에 있다. 김시민은 이병연으로부터 시 짓자는 소식이 통 없자 시와 술과 벗보다 좋은 게 있을 것이라 상상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 손자들의 재롱을 받는 것이었다.
두 편의 시 모두 일상의 소소한 장면에 의미를 부여한 작품들이다. 시 속에 그려진 김시민과 이병연은 친근하고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이다. 독자는 이 다감한 모습에 의해 시를 읽는 동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가식 없는 진정(眞情)이 불러온 잔잔한 울림이라 할 수 있다.
不有田家雨 行人得久淹 | 농가에 비가 내리지 않았던들 갈 사람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었겠나. |
喜逢子孫醉 睡過卯時甘 | 자식 만나서 기뻐 취하고 묘시가 넘도록 달게 잤더니 |
川漾萍棲埭 風廻花撲簾 | 냇물 불어 개구리밥 보에까지 붙고 바람 불어 꽃잎은 주렴을 치는구나. |
吾詩殊未就 莫謾整歸驂 | 내 시가 아직 안 되었다 자꾸만 타고 갈 말 챙기지 말렴. |
「빗속에 큰 딸아이 가는 길을 만류하며[雨中挽長女行]」, 金時保, 『茅洲集』 권8
風急天將黑 山寒路自斜 | 바람 거세고 날도 어둑해지려는데 산은 춥고 길은 자꾸만 오르막이라. |
來時愁雪片 歸日對梅花 | 올 적엔 눈송이를 걱정했는데 돌아가면 매화를 마주하겠네. |
臘盡還爲客 年衰漸戀家 | 섣달이 다 되도록 아직도 나그네 신세인데 나이가 들어가니 점점 집 생각이 간절하네. |
遙憐少兒子 新學喚爺爺 | 저 멀리서 어여쁜 우리 꼬맹이 새로 배워 ‘아빠 아빠’ 불러대겠지. |
「집 생각[思家]」, 李夏坤, 『頭陀草』책8
첫 번째 시는 김시보의 작품이다. 비가 내렸다. 이 비는 김시보에겐 참 반가운 비다. 비가 내리는 통에 떠나려던 딸자식이 좀 더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뜻밖의 비로 딸을 더 볼 수 있게 된 김시보는 기쁜 마음에 술도 취할 만큼 마시고 늦도록 잠도 잤다. 그랬더니 비가 상당히 내려 보에 물이 가득 차고 바람도 거세져 꽃잎이 주렴을 친다. 그러자 딸아이는 가겠다고 서두른다. 아마도 챙겨야할 본댁 식구들 생각이 앞섰나보다. 그러나 김시보는 자꾸만 붙잡는다. 시가 아직 안 되었다며. 기실 김시보는 시를 못 짓는 것이 아니라 안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두고 보고 싶은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진솔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두 번째 시는 이하곤의 작품이다. 시의 내용을 볼 때 작가는 먼 길을 나섰던 듯하다. 이하곤은 수련에서 궂은 날씨와 험난한 여정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현재 상황을 대신하였다. 그런데 시인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계절이 바뀌도록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시인은 경련에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였다. 나이가 드니 오랜 출타에 집 생각이 간절해진다고. 그리고 미련에서는 어린 자식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집을 생각하면서 어린 아이를 먼저 떠올린 것 역시 이하곤의 진실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 아이는 지금쯤이면 아빠란 말을 배워서 내가 가면 ‘아빠 아빠’ 불러줄 텐데, 길은 아직도 멀다.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험난한 여정을 달래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고도 진솔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다음은 이병연의 시이다.
不多蘭玉尙孫行 | “자식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손자는 행실이 있고 |
麤有官啣郞郡章 | 볼품없는 벼슬이지만 남편은 수령 인장 차고 있으니 |
把此足成今日醉 | 이것이면 족히 오늘 한번 취할 만하지 않겠소?“ |
一盃聊勸老糟糠 | 곡진하게 한 잔 술을 늙은 조강지처에게 권해보네. |
「집사람의 생일날 장난삼아 짓다[室人生朝戱賦]」, 李秉淵, 『槎川詩抄』卷下
官栢蒼蒼裏 伊誰上任新 | 관가의 잣나무 짙푸른 속에 저 누가 새로이 부임 하였나? |
吾家小娘子 今日縣夫人 | 우리 집 어린 낭자가 오늘은 현감부인(縣監夫人) 되었구나. |
兒女携來飽 屛筵左右陳 | 아녀자들 데리고 와 음식을 준비하고 좌우엔 병풍과 자리 펼쳐 두었네. |
見余言欵欵 多及昔年貧 | 나를 보며 곡진하게 말을 하는데 자주 지난날의 가난함을 언급하네. |
「누이동생을 만나[見舍妹]」,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첫 번째 시는 이병연이 삼척부사로 재임할 당시 지은 시이다【이병연이 삼척부사로 부임한 것은 1732년, 그의 나이 62세 때였다. 이병연은 65세 되던 1735년까지 삼척부사로 재임했는데, 아마도 이 시는 삼척부사로 재임할 당시 이병연보다 4살 어렸던 아내 조씨 부인의 회갑일에 지은 시로 보인다.】. 「집사람의 생일날 장난삼아 짓다」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제목에 붙인 ‘戱’자에는 수줍어하면서도 늙은 아내를 위해 시를 바치는 노시인의 다정다감함이 묻어있다. 시의 내용도 그러하다. 이병연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은 일찍이 청상(靑孀)이 되었고【이병연의 사위는 광산인(光山人) 김상덕(金相德)이었다. 김상덕은 영조 말년 14년간이나 정승을 지내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김상복(金相福)과 ‘직하체(稷下體)’로 이름을 날린 김상숙(金相肅)의 맏형이다. 안중관의 「서한산이공일원곡망서문후(書韓山李公一源哭亡婿文後)」, 『회와집(悔窩集)』 권4에 의하면 이병연은 김상덕의 재주를 아껴 배천군수 시절, 배천 관아에서 함께 강학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친손자가 하나 있었으나 1729년 세상을 떠나 아우 이병성의 맏손자 이현영(李顯永)을 양손으로 들였다. 자손들이 많았더라면 잔치자리가 북적대며 더욱 흥성해졌을 것이나 시 속 잔치자리는 대단히 조촐하다. 시의 첫 구는 이병의 가계를 염두에 두면 처연해지기까지 한다. 많은 자손들이 늘어서서 하례의 인사를 올리고, 수복(壽福)의 술잔을 올렸다면야 더없이 흥겨운 자리였겠지만, 그렇지 못한 까닭에 시인은 아내를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넨 뒤, ‘오늘은 좋은 날이니 슬픔은 다 잊고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하며 시상을 마무리하였다. 늙은 아내를 다독이는 늙은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두 번째 시는 누이동생을 만났던 일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수련부터 경련까지의 내용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어렸을 적 가난하게 자란 여동생이 오늘 현감부인이 되었다. 동생은 초대한 손님 대접하느라 분주하다. 음식도 차리고 자리도 마련하고. 이런 모습을 보는 작가의 마음은 참으로 흐뭇하고 대견했을 것이다. 이병연의 마음을 이렇게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은 미련 때문이다. 이 시의 백미는 미련이다. 여동생이 오빠를 보며 곡진히 하는 말, “오라버니, 그 땐 참 배고팠지요.”라는 말로 인해 앞의 시구들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동생의 진솔한 말 한마디가 시 한 편을 만든 셈인데, 이는 이병연의 시재이기도 하지만, 이런 소소한 말 한 마디를 참되다고 여길 줄 아는 이병연의 사람됨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돈독한 가족애를 형상화한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시편들이 ‘진시’일 수 있는 것은 김창협의 말대로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각 시편을 통해 작가들의 다정하고 따뜻한 인간상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관계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거기서 발현된 감정을 진솔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사실 손주들의 방문, 딸아이의 친정 방문, 아내의 생일 등등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심상한 장면으로 쉽게 간과할 수도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상한 일들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따뜻한 시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의미 있게 볼 줄 알았던, 다시 말하면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던 그들의 진정어린 마음 때문이었다.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벗들과의 사귐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우정을 매개로 형상화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웃음을 형상화한 시편들이다. 웃음이란 감정 상태는 종래의 한시가 선호하던 미감이 아니었다. 설사 웃음이 묻어나는 형상화가 이루어졌더라도 그것은 대개 상대를 풍자하거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공격적이고 모난 감정이었다. 그러나 백악시단의 문인들, 특히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벗들과의 깊은 우정을 드러내는 데 이 웃음이란 감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들이 활용한 웃음은 상대를 배려하고 따뜻하게 끌어안는 온유(溫柔)한 감정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의 ‘사귐[友道]’에 대한 인식을 살필 필요가 있다.
마음은 하나의 리(理)이다. 사람은 모두 이 리(理)를 얻어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 어린 아이도 부모를 사랑하며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저 사물의 선악과 일의 시비에 대한 경중, 장단에 이르기까지 만수(萬殊)의 저울로 삼으니, 같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모두 같게 된다. 애초부터 귀천의 차이가 없으며, 중화(中華)라고 유독 밝혀지고, 이적(夷狄)이라고 유독 가려지지 않으며, 천만 리 먼 거리와 수천 명의 무리들이 같지 않음이 없다. …(中略)…
아! 지금 사람들이 그 마음을 쓰는 것 또한 비루하다. 수십 년 이래로 여항의 사대부들이 서로 보며 마음으로 삼은 것은 오직 과거에서 요행이 합격의 영광을 누리거나 벼슬아치가 되어 이익을 쟁탈하는 것에 급급할 따름이다. 이미 염치(廉恥)와 명검(名檢)이 땅을 쓸어버린 듯 사라졌어도 뻔뻔하게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다시는 조석으로 실천해야 할 이치에 대해 서로 난숙하게 강론하고 정밀하게 확정하여 고유(固有)한 상덕(常德)에 합치되도록 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안동(安東) 권조원(權調元, 權燮]과 오천(烏川) 정재문(鄭載文, 鄭龍河)라는 두 선비가 있다. 조원의 부친은 간신(諫臣)으로서 앞선 조정에서 현달하였고, 재문의 선조는 세상에서 송강 상국이라고 부르는 분이다. 두 군자는 오히려 그 고고하고 과합(寡合)한 자질이 비슷하고 또 모두 선생과 장자의 가문에서 나와서 세속의 병폐와 우도(友道)의 더러워짐을 깊이 알았다. 각자 이향(異鄕)에 살아서 열여섯이 되도록 서로 보지 못했고 서로 보지 못한 즉 두 사람 다 타인과는 계합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 서로를 얻게 되어서는 하루라도 서로 버릴 수 없다면서 경사에서 종유하고 또 마을에서 만나며 일상의 허다한 일들을 함께 하였다. 무릇 사친(事親)하고 봉양(奉養)하는 도리와 처신하고 남을 대하는 방법과 사위(事爲), 수응(酬應)의 작은 것과 어묵(語嘿), 동정(動靜)의 은미한 것에 이르기까지 가족이나 형제도 미칠 수 없는 것을 두 군자는 서로 미쳤다. 혹 떨어지게 되어 즉시 알리지 못하게 되면 그 둘은 반드시 “내 벗을 기다릴 따름이다”라고 하고 또 반드시 “내 벗의 마음도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훗날 서로 그 일을 알리면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요컨대 그들이 귀숙한 것은 고유(固有)한 상덕(常德)에 합치되기를 힘쓰는 것이었지 비루하게 과거나 벼슬을 쫓는 것이 아니었다.
또 그렇게 17년이 지나 재문이 죽었고, 재문이 죽자 조원은 또 처음처럼 벗이 없는 듯하였다. 의심나는 일이 있고 막히는 일이 있으면 전에 재문에게 물어본 것처럼 남에게 한번 물어봐도 그 마음에 합당한 바가 없었다. 그래서 평상시 묵묵히 생각하다 스스로 얻지 못하면 말을 타고 성문을 나갔다 쓸쓸하게 돌아오곤 하였고 이따금 재문의 남은 문장을 꺼내 읽다 통곡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서로 왕복하며 수응(酬應), 화답(和答)한 것들을 하나로 묶고는 ‘이인동심편(二人同心編)’이라 제목을 붙였다. 그 뜻은 대개 재문이 죽어 다시 재문은 없지만 이 마음의 밝음을 함께하는 것은 지상에는 조원이, 지하에는 재문뿐이라는 것이다.
心卽一理也. 人莫不得此理而爲心, 故孩提之童知愛親而敬長, 至夫輕重、長短於物之善惡、事之是非, 以爲萬殊之權度者不期同而皆同, 初無尊卑貴賤之別, 而不獨明於中華, 不獨蔽於夷狄, 千萬里之遠、千百人之衆無所往而不同也. …中略… 嗚呼! 今人之用其心亦卑矣. 自數十年來, 閭巷士大夫相視而爲心者, 唯汲汲乎科擧僥倖之榮、仕宦傾奪之利, 而已廉恥名檢蕩
然掃地, 恬不爲恠, 無復相熟講精確於朝夕蹈踐之理, 以合其固有之常德也. 有二士, 曰安東權調元、烏川鄭載文. 調元大父以諫臣顯先朝, 直聲聳士林, 載文先祖又世所稱松江相國也. 二子者尙類其孤介寡合之資, 而又皆出於先生長者之門, 深知世俗之病而友道之汚也. 各處異鄕, 共生十六年而不相見, 不相見則兩無所合於人. 旣而相得, 謂不可一日相捨, 旣從於京師, 又聚於里閈, 起居飮食之與同. 凡事親奉養之道、處己待人之方、事爲酬應之纖、語嘿動靜之微, 所不及於家人兄弟, 而二子交相及焉. 或會睽異, 未卽使知, 其必曰‘待我友而已’, 又必曰‘我友之心必若此’, 及後相告, 未嘗不然. 要其歸則務合乎其所固有之常德, 而不卑卑爲科擧仕宦之趨也. 盖又十七年而載文死, 載文死而調元又如其始之無友矣. 事之有疑也, 行之有窒也, 試以曾叩於載文者而叩於人, 無所當於其心. 平居黙黙不自得, 騎馬出門悒悒以歸, 時或出載文遺文章, 讀而哭之, 遂裹其相與往復酬答爲一集, 題曰二人同心編. 其意盖曰載文死而更無載文, 共此心之耿耿者, 地上而調元, 地下而載文而已也. -權燮, 『玉所稿』 「筆札錄·1」「書二人同心編」[李秉淵]
이 글은 이병연이 39세 되던 1709년에 쓴 글이다. 이 시점은 권섭을 비롯한 후기 백악시단의 심봉의, 김상리 등이 10년 동안의 시 학습을 통해 깊은 사귐을 이어가던 때였다【小只讀唐音五七言·李杜五七言而已, 又略看東方詩集而已. 與李一源·李子平·沈聖韶·金莘 老, 十年酬唱, 而隨興湧寫而已. -權燮, 『玉所集』 권1 「詩自序」】. 권섭은 이 해에 망우(亡友) 정룡하(鄭龍河)와 주고받은 시문들을 정리하여【『이인동심편(二人同心編)』에 실린 시문들은 의리의 득실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은 것, 의문이 나면 서로 질정하던 것, 산수 유람과 향후의 계획 등등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調元一日, 收得故紙中與載文往還文字, 爲一册子, 持示於余. 其書雖不甚多, 而多論義理得失, 遇事而輒叩質之, 有過差而相䂓誡之, 以至山水之觀、棲息之計, 父兄家人之所未及言者, 必披寫無餘, 情悃藹然. -李秉成, 『順菴集』 권5 「題二人同心篇後」”】 단촐하나마 『이인동심편(二人同心編)』이란 책으로 묶고, 이병연에게 그 서문을 부탁하였다. 정용하의 졸년이 1702년이니 『이인동심편(二人同心編)』은 8년 뒤에 책으로 묶인 것이다. 이병연은 이처럼 10년 가까운 세월에도 정용하를 잊지 못하는 권섭을 위해 두 사람의 우도(友道)가 얼마나 깊고 진실한 것인지를 밝히는 글을 써주었다.
이병연은 우도(友道)에 대한 입론을 마음[心]과 리(理)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천리(天理)의 소재처로서 천리의 주관을 받기 때문에 인륜은 물론 선악과 시비에 대한 지각이 가능하다면서 귀천과 화이를 가리지 않는 천리(天理)의 공평무사함에 대해 말하였다. 우도(友道)의 대전제로 天理와 마음을 논한 것이다. 생략한 부분에서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포초(鮑焦)와 화각(華角),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등 마음을 함께 나누었던 역대의 인물들을 예시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사람들이 용심(用心)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개진하였다. 이병연은 천리(天理)의 마음을 한낱 개인적인 영예나 이익을 구하는데 쓰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속사(俗士)와는 달랐던 권섭과 정용하의 사귐을 부각하였다. 권섭과 정용하의 사귐은 고유(固有)의 상덕(常德)을 추구한 것이었지 과거나 벼슬 등의 현실적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둘은 사친봉양(事親奉養)의 도리에서부터 어묵동정(語嘿動靜)의 은미한 것까지 마음을 함께 하였고, 그 결과 두 사람이지만 한 사람의 마음과 같은 상합(相合)을 이룰 수 있었다.
우도(友道)에 대한 각별한 의미부여는 백악시단의 문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김창흡은 사도(師道)와 우도(友道)가 사라진 시대를 말세라 개탄하면서 인(仁)을 구하는 사귐을 강조하였고【末世都無師友眞, 何曾授受在求仁. 仲尼顔子知何樂, 弄月吟風自有人. -金昌翕, 『三淵集』 권14 「葛驛雜詠」 27수】, 진정한 사귐은 사라지고 시정의 사귐만 남은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으며【詩亡谷風, 友道久圮. 及今衰末, 市交而已. -金昌翕, 『三淵集』 권32 「祭李子東文」】, 시정의 사귐을 대신하여 정주(程朱)의 학문하는 관계를 그 모범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無友無師此道孤, 從誰磋切躡程朱. 洪溟巨嶽吾函丈, 老矣今將負勝區. -金昌翕, 『三淵集』 권14 「葛驛雜詠」 102수】. 안중관 또한 “무릇 붕우의 도리는 진실로 하늘이 펼친 상도(常道)에서 나오는 것으로, 대개 서로 더불어 인(仁)을 도와주고, 과오를 물리치도록 하여 각기 그 덕을 이루도록 해주는 것이다[夫朋友之爲道, 固自於天叙之常, 而盖相與輔仁而攻過, 以成其德者也. -安重觀, 『悔窩集』 권7 「求友說」].”라며 사귐을 통한 보인(輔仁)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벗과의 사귐을 동심(同心), 회심(會心)의 동지적 측면과 보인(輔仁)의 학문적, 수양적 측면에서【이상주, 『담헌 이하곤 문학의 연구』, 이화문화출판사, 2003, 332~333면 참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웃음을 형상화한 시편들은 바로 이와 같은 각별한 사귐에 기초해 있다.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벗에 대한 깊은 신뢰 위에 웃음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벗 사이의 넉넉한 웃음을 하나의 풍류로 인식하였다. 이병연은 송준길(宋浚吉)을 전송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한 이단하(李端夏)가 김수항(金壽恒)의 자(字)를 부르려 하자, 김수항 또한 취하여 “공께서 능히 나의 자를 부를 수는 있지만 형양의 포구에 기러기 소리가 끊겨야만 가할 것이오.”라고 재치 있게 응수하여 송준길을 비롯한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 당시엔 사림의 기상이 볼 만하였는데 지금은 그 같은 기상을 다시 얻을 수 없다.”고 술회하였다【又言: ‘同春老爺嘗南還傾朝送之, 江上文谷相公已入閣, 畏齋醉後欲呼字, 文谷亦醉曰:「公能呼我字, 聲斷衡陽之浦可矣.」春爺爲之一笑.’ 其時士林氣像可觀, 而今不可復得矣. -金富賢, 『巷東稿』附錄 「巷東小傳[李秉淵]」” ‘포구에 기러기 소리가 끊긴다[聲斷衡陽之浦]’라는 표현은 절교를 의미한다. 김수항은 ‘너나들이 하는 건 좋은데 그러면 당신하곤 절교야!’라는 의미를 붙였기에 좌중을 웃길 수 있었다. 한없이 근엄할 것만 같은 노학자의 모습 대신 인간내음 나는 진솔한 모습을 소개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병연이 이러한 일화를 소개한 것은 바로 웃음이야말로 진솔하고도 깊은 사귐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웃음을 비근한 감정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풍류로 여긴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웃음기 넘치는 진솔한 사귐을 보였다. 일례만 들어보면, 권섭은 왼쪽 다리에 담이 들어 거동할 수 없다는 이병연의 편지에【詩去詩來, 此非百年吾輩耶? 聖莘殊無古意, 柰何? 憑審好好花枝間, 餘不必問. 弟痰入左脚, 今則全無運動, 海山如夢中. 兄讀和去者, 必大笑. -權燮, 『玉所稿』 「問答·2」이병연의 편지】 왼쪽 다리에 담이 들어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이가 없어 고기를 못 씹는 것에 비하면 더 낫다며【書辭簡當可喜 詩語何其太艱窘耶? 生日詩何不和來? 韶莘之無古意, 是本色. 韶則日昨有來詩矣. 弟好好花枝間, 餘不必言. 一夜凉颷洗滌, 一夏敲赩. 一源起居能適宜否? 左脚又痰入, 則一身將全動不得, 然視弟全不嚙肉, 差勝. 笑. -같은 글, 권섭의 답장】 가벼운 웃음으로 벗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웃음을 매개로 한 진솔한 사귐은 이병연이 소장했던 정선의 그림을 두고 난만하게 펼쳐졌다.
[1-1] 내가 이 첩을 살펴보니 그 용필(用筆)이 지극히 속되지 않으니 마침내 보장(寶藏)이 되기에 마땅하다. 일원이 그림을 모르는 것으로 보자면 이 첩을 갖기에 합당하지 않으나 다만 일원시(一源詩)의 절묘함은 이 그림과 짝할 만하다.
余觀此帖, 其用筆極不俗, 遂當爲寶藏. 以一源之不知畫, 不合有此帖, 特以其詩之妙, 堪配此畫耳. -申靖夏, 『恕菴集』 권12 「李一源所藏鄭生敾輞川十二景圖帖跋」
[1-2] 정보[신정하]의 발문 가운데 ‘일원이 그림을 모르면서 이 화권을 가지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한 말은 극히 절묘하다. 나와 정보는 그림을 잘 아는데도 그림을 모르는 자가 가지고 있으니 정말 어진 사람은 부유하지 않다는 말 그대로이다. 일원이 이 글을 보면 아마도 다시 포복절도할 것이다.
正甫跋中‘一源不知畫, 不合有此卷’, 一語極妙. 吾與正甫能知而不知有, 正類仁者不富也. 一源見此, 想更絶倒. -李夏坤, 『頭陀草』책12 「題李一源所藏鄭㪨元伯輞川渚啚後」
[2-1] 나는 재대[이하곤]의 ‘어진 자는 가난하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글씨와 그림에 있어 진실로 가난한 자이다. 만약 재대가 갈무리한 것처럼 했다면 어찌 일찍이 부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재대가 진천으로 물러날 때에 우마로 끄는 수레에 서화(書畵)를 실은 것이 길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이지 않았다. 도적들이 재화로 여겨 그것을 탈취할까 싶어 밤새도록 서로 지키느라 잠을 못 이루는 지경에 이르자, 집안사람들이 짜증을 내며 ‘이게 대체 무슨 물건이라고 아무 이익도 없는데 이처럼 나를 괴롭게 하는가?’하며 밥 짓는 불에 던지려 하자 재대가 고생고생 다투어 겨우 불쏘시개를 면하였으니 이 일은 성대하게 낙하(洛下)에 전해졌다. 그런데도 지금 이 화권에 대해 남몰래 얻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부자가 더욱 탐낸다는 것으로 스스로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일원이 언젠가 이 화권에 대해 애인(愛人)하는 마음을 낸다면 진실로 나처럼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하지 경솔히 재대에게 허여하여 그 부유함을 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처럼 해야 바야흐로 어진 사람의 일이 될 것이다. 일원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정보가 다시 쓰다.
余於載大‘仁者不富’之語, 不覺捧腹. 余於書畫, 固貧儉者. 如載大所藏弆, 何嘗不富哉? 當其撤還常山也, 牛馬之輦載書畫者, 尾相續不絶於路, 盜以爲貨也, 而欲取之, 至相守連夜不得寐. 家人輩恚罵曰‘ 何物, 無益而怖我如此’, 欲投之爨火, 載大苦爭僅得免. 此事盛爲洛下所傳. 而今於斯卷, 闖然有欲得之意, 此眞富而益貪者, 不類於所自道矣. 一源它日於此卷愛衷, 固宜施與如我貧儉者, 不當輕許載大以繼其富, 如此方是仁者事. 未知一源以爲如何. 正甫又書 -이하곤, 같은 글에 붙은 신정하의 편지
[2-2] 나의 집 완위각(宛委閣)에는 다만 수십 점의 옛 그림이 있을 뿐이요, 가령 요사이 여러 사람들의 작품은 가진 것이 전혀 없으니 나의 그림 수집이 그다지 많지 않고 또한 그림을 취함에 욕심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정보는 지금 가진 그림이 많은데 더욱 탐을 내어 나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또한 일원의 애이(愛弛)함을 기대하며 어부처럼 싹쓸이 하고자 하지만 일원이 삼척동자도 아닌데 어찌 정보의 작전에 빠지겠는가? 정보는 묵은 병이 과연 도질 것이다. 하하! 재대가 다시 쓰다.
余家宛委閣, 只有數十幀古縑. 如近日諸人筆絶無存者, 可知余蓄畫無多, 且廉於取畫也. 正甫今以富而益貪啁我, 又冀一源愛弛, 欲全收漁人之. 一源非三尺童子, 焉能墮其雲霧中? 正甫則宿恙果發矣. 一笑. 載大又書 -이하곤, 같은 글
인용된 네 편의 글은 이병연이 소장했던 정선 작(作) 「망천십이경도첩(輞川十二景圖帖)」과 관련한 것들이다. [1-1]은 「망천십이경도첩(輞川十二景圖帖)」에 붙인 신정하의 발문이다. 신정하는 그림에 대한 고평을 간단히 붙인 후 그림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림을 잘 모르는 이병연보다는 그림을 잘 아는 자신이 갖은 게 더 합당하다고 했는데, 신정하의 이 발언이 사단이 되었다. [1-2]는 신정하의 발문을 보고 난 뒤에 이하곤의 쓴 발문이다. 이하곤은 신정하가 발문에서 이병연의 감식안을 언급한 부분에 대한 적극 동의를 표하고는 ‘어진 사람은 가난하다’라는 비유를 들며 자기와 신정하는 그림을 잘 아는데도 이런 명화(名畵)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하곤 역시 그림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2-1]은 신정하가 뒤이어 쓴 이하곤의 발문을 보고 다시 붙인 글이다. 신정하는 ‘어진 사람은 가난하다’는 이하곤의 말에 배를 잡고 웃었다며 동의를 표하면서도 이하곤이 진천으로 이사할 때의 모습을 재미나게 소개하며 진짜 어진[가난한] 사람은 자신이니 이병연에게 혹 누군가에게 그림을 준다면 자기에게 주어야 한다며 그림에 대한 욕심을 노골화하였다. [2-2]는 신정하의 진짜 어진 사람 논란에 이하곤이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하곤은 자신의 그림 소장이 별 것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은 그림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신정하가 그림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조롱하며 이병연이 신정하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며 다시 농담을 건넸다.
인용된 글들은 모두 이병연의 그림에 대한 욕심을 문면에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욕심이 물질에 대한 추악한 탐욕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바로 웃음 때문이다. 웃음 없이 이러한 글들을 주고받았다면 그야말로 큰 싸움으로 번졌을 것이다. 그러나 웃음을 매개하는 순간 신정하와 이하곤의 욕심은 맑은[淸] 욕심으로 변모하고 이들의 장난기 어린 탐욕은 하나의 풍류가 된다. 왜냐하면 당대 최고의 서화 감식안이었던 이하곤과 신정하가 장난스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림을 탐하면 탐할수록 이병연이 소장한 그림은 가치가 그만큼 상승하게 되기 때문이다. 신정하와 이하곤이 이런 글을 주고받은 것도 실제로 그림을 탐해서가 아니라 이병연이 소장한 그림이 그만큼 훌륭하다고 포장해주기 위한 것이다. 즉, 이병연과 각별한 우정을 맺었던 두 사람이 이처럼 장난기 가득한 농으로 자신들의 개인적 욕심을 문면에 드러낸 것은 바로 반어적 칭송의 효과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웃음을 풍류 넘치는 사귐으로 인식했던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웃음이 묻어나는 시편들을 통해 사귐의 깊이를 드러내었다.
搖落山家逼歲寒 | 요락한 산집에 추위가 닥쳐와서 |
數叢盆菊半摧殘 | 몇 떨기 화분 국화 거반이 떨어졌네요. |
却將詩札煩相囑 | 장차 번거롭게 부탁하는 시찰을 물리치시려면 |
倘許親朋數日看 | 친붕이 며칠 간 보도록 허락해 주시지요? |
「일원에게 화분 국화 좀 빌려달라며[要借一源盆菊]」, 金令行, 『弼雲稿』책1
이 시는 김영행이 이병연에게 화분 국화를 빌려달라며 쓴 시이다. 시상의 전개는 매우 단출하다. 갑작스런 추위에 국화가 다 떨어져버렸으니 국화 좀 빌려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묘미는 그런 요구를 절묘하게 표현하여 웃음을 유발한다는 데 있다. 전구와 결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요구를 거부하면 계속 시찰을 보내 답장하게 만들 테니 번거롭기 싫으시면 얼른 빌려주세요. 협박 비슷하게 으른 것이지만, 원하는 대상이 국화이고, 그것을 재치 있게 표현함으로써 김영행의 국화 욕심은 웃음이 묻어나는 청한한 풍류로 거듭나게 되었다. 시를 받고 빙그레 웃었을 이병연의 모습이 함께 연상되면서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다음은 이병연의 시를 보자.
我是全癡君半癡 | 나는 완전 바보 그대는 반절 바보 |
五更呼喚句成時 | 오경에도 시를 지어 그댈 부르네. |
待君不至重尋夢 | 기다려도 오지 않아 꿈에까지 찾았건만 |
君到吟詩我不知 | 그대 와서 읊조릴 적 나는 알지 못했노라. |
「차운하여 반치옹에게 용서를 구하다[次謝半癡翁]」,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君到門時我已眠 | 그대가 문 앞에 왔을 때 나는 자고 있었는데 |
君呼我起二更天 | 그대는 이경(二更)에 나를 불러 깨우네. |
携來明月留牕外 | 데리고 온 밝은 달은 창밖에 남겨두고 |
自唱長歌坐燭前 | 스스로 긴 노래를 부르며 촛불 앞에 앉네. |
「이수초가 한밤에 찾아와서[李遂初夜訪]」,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첫 번째 시는 이태명(李台明)에게 보낸 시이다. ‘반치(半癡)’라는 호를 가졌던 이태명은 전주 이씨로 이병연의 부친인 이속(李涑)에게 수학하면서 이병연과 사귀게 되었다. 시도 잘 하고 노래도 잘 불렀던 인물로 이병성은 그의 사람됨을 ‘호상강개(豪爽慷慨)’하다 하였다【先君子嘗閒居好客, 不肖兄弟喜爲詩, 日侍傍招呼爲文會, 是以士之抱藝落拓者多歸之. 李君台明子三往來最久, 久而不懈, 及先君子之喪, 奔走勞苦, 不避風雨, 其氣義如此. 君於物無所嗜, 獨喜爲詩, 然不甚師古, 亦不肯自命作文人, 只其胸中磊塊崛峍, 詩故豪逸. 中歲自隴西鄕居, 來寓京口, 諸豪傑公子慕與之交. 君素善歌, 人或來要之, 亦不遴, 時時過我, 酒酣氣振, 誦其所爲詩, 聲調若出金石, 余輒驚之. …(中略)… 然君豈一詩人哉! 爲人豪爽慷慨, 顧嘗有馳騁四方之志, 今老矣, 世無愛才者, 如區區無力可以尉薦. -李秉成, 『順菴集』 권5 「題李子三西遊錄後」】. 이병연은 이태명의 독특한 호를 활용하여 웃음을 유발하였다. 1구에서 자기는 ‘완전 바보(全癡)’이고 이태명(李台明)은 ‘반절 바보(半癡)’라 한 뒤 그 이유를 나머지 부분에 보였다. 함께 시를 짓자고 사람을 보내 이태명(李台明)을 불렀는데 이태명(李台明)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병연(李秉淵)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고, 이태명(李台明)의 꿈까지 꾸었는데, 이병연이 쿨쿨 자는 사이에 이태명(李台明)이 찾아와 시를 읊은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는 이수초(李遂初)라는 사람이 밤에 느닷없이 찾아온 이야기를 담은 시이다. 밤중에 느닷없이 찾아와 곤히 잠든 이병연을 깨운뒤 홀로 긴 노래를 부르는 이수초의 모습은 분명 예술적 흥을 어쩌지 못하는 예술가의 광기, 그것이다.
두 시의 공통점은 예술가적 일탈을 보인 인물을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수에서 이태명이 사람까지 보냈는데도 안 오다가 이병연이 잘 때서야 찾은 것은 사람을 보냈을 적엔 시흥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태명은 갑자기 시흥이 일자 상식적 시간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쿨쿨 자는 이병연을 앞에 두고 시를 읊었다. 잠이 덜 깬 이병연은 안중에 없이 시를 읊조리며 자기의 흥취를 발산하는 이수초의 모습도 상식에 구애되지 않는 일탈적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런 예술가들 앞에 있는 이병연은 어떻게 그려졌는가? 하나는 온 줄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고, 하나는 촛불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병연은 왜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수록 벗들의 예술가적 청광(淸狂)이 더 빛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병연의 자기 형상화는 한층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그림으로써 상대방을 더욱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으로 인해 자신 또한 예술가적 일탈마저 포용하는 또 다른 예술가의 초상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예술혼을 중심으로 상식의 구속을 떨쳐낸 사귐의 깊이가 풍류 넘치게 형상화된 작품이다.
이병연이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백악시단의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김부현의 작품을 보자.
袒褐隨秋色 蕭然白髮長 | 웃통을 벗은 채 가을빛을 따라나서니 엉성한 백발이 흩날리는데 |
看雲歌且笑 行路謂余狂 | 구름 보고 노래하다 웃음 지으니 가던 사람 나를 보고 미쳤다 하네. |
「북촌 길거리에서[北村路上]」, 金富賢, 『巷東稿』
웃통을 벗고 백발을 휘날리며 하늘 보고 노래하다 배시시 웃는 모습은 작가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필경 미쳤다고 할 모습이다. 김부현의 노래와 웃음은 한편으론 예술가적 발산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여항인의 비애가 담긴 서글픈 웃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형상화하였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독백처럼 그려진 이 시는 세상에서 소외된 자신의 처지와 시인으로서의 일흥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일종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상대방의 불우함을 웃음으로 넉넉하게 위로하는 시편도 백악시단의 문인들에게서 발견된다.
一宵淸興反爲災 | 하룻밤 청흥이 도리어 재앙이 되었으니 |
馬蹶前橋儘可咍 | 말에서 자빠져 다리 밑에 떨어진 건 우스워 죽겠구나. |
汚服先愁驕婦讁 | 옷 버리고 마나님의 꾸지람이 걱정되어 |
抱頭潛訪僻村來 | 머리를 감싸 안고 남몰래 후미진 마을로 왔구나. |
泥痕水暈猶霑袖 | 진흙 자국 번진 것은 그래도 빨면 되지만 |
石觜沙稜暗印腮 | 돌부리 모래 둔덕이 뺨에 도장을 찍었구나! |
爭似山翁沉醉後 | 그래도 낫구나! 산옹(山翁)이 술에 취해 |
接䍦欹着倒輿迴 | 모자를 거꾸로 쓰고 수레를 거꾸로 타고 온 것 보다는. |
「청류(淸流)의 모임에서 의중(毅仲)이 연거푸 다섯 잔을 기울이고는 흥을 내니 참으로 청광(淸狂)이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말이 빨리 달리자 진흙 구덩이에 빠져 옷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고 말아 앞길로는 감히 가지 못하고 몸을 숨긴 채 남몰래 돌아왔다. 내가 술을 얻어 그 일을 위로하였는데 지금 그것에 감사하는 시가 있어서 재빨리 차운하여 그것을 조롱하다[淸流之會, 毅仲連倒五盞, 發興甚淸狂. 而歸路馬逸, 墮於泥濘, 衣盡汚濕, 不敢由前路, 匿身竄歸. 余得酒慰之, 今有謝詩, 故走次嘲之].」 -李海朝, 『鳴巖集』 권2
이 시는 조유수(趙裕壽)와 있었던 사건을 재미나게 표현한 작품이다. 시적 정황은 긴 제목에 상세하다. 더러워진 옷이 부끄러워 남몰래 온 것을 부인의 꾸지람이 무서워서 그런 것으로 바꾸고, 옷이야 빨면 되지만 얼굴에 난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짓궂음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리고 미련에서는 진(晉) 산간(山簡)의 일화를 이용하여 비화로 감춰져야할 일을 하나의 풍류로 전환시켰다. 산간(山簡)은 경치 좋은 곳에서 술에 흠뻑 취해 백접리(白接䍦)를 거꾸로 쓰고 말을 거꾸로 타고 오는 등 풍류 넘치는 기화(奇話)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시인은 풍류사로 인식되는 산간의 행위를 들며 조유수에게 재치 넘치는 위로를 건넸다. 인물과 시적 정황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으며, 웃음을 깊은 사귐을 드러내는 일종의 풍류로 여기는 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상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백악시단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웃음이란 근엄한 사대부와 어울리지 않는 비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그 웃음을 시로 형상화하였다. 그들이 웃음을 시로 끌어들인 것은 진솔한 삶을 가식하지 않겠다는 의식의 소산이다. 그래서 이들이 웃음을 형상화한 시는 인간의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는 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백악시단이 형상화한 웃음의 성격이다. 앞서 본 작품들에서 확인하였듯, 백악시단의 웃음은 인간에 대한 배려와 온정어린 인간미, 다시 말하면 소통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들의 웃음은 대상을 희화화시켜 가면서 우월한 위치에 내려다보는 웃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랄한 풍자를 통해 대상을 통쾌하게 파괴하는 그런 웃음도 아니다. 민중들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웃음도 아니며 우매한 백성들을 교화하는 가르침의 웃음도 아니다. 그들의 웃음은 그간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는 이유로 소외되어 온 대상들을 따뜻하게 끌어 앉고 자신도 함께 하는 웃음이다. 바로 이 점에서 백악시단의 ‘웃기는’ 시는 주체의 진(眞)이 주체의 수양된 인격과 연결되는 백악시단의 ‘진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또한 평담(平淡)·한아(閒雅)한 일상을 추구하던 주체의 진정(眞情)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백악시단 ‘진시’의 폭을 넓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의 다양한 정감을 형상화한 작품들은 ‘관계’에 대한 원숙한 인식과 깊은 소통을 바탕으로 한다. ‘관계’란 자아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이다. 로빈슨크로스처럼 무인도에서 고립되어 살아가지 않는 한 모든 현실 속 인간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자신을 규정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관계’는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백악시단이 진정(眞情)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관계’에 대한 원숙한 통찰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관계’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단한 사건과 정감들을 사소하거나 평범하다고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관계’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관계’ 그 자체를 가식(假飾)하지 않았다. 지친의 죽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늘 마주하기에 친소(親疎)의 감각마저도 무뎌질 수 있는 가족 간의 소소한 일들도 그들의 눈을 거치면 푸근한 사랑으로 거듭났다. 벗들과의 사귐에서도 ‘나’가 아니라 ‘너’를 중심에 두었기에 관계의 돈독함은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벗들 간에 웃음을 매개로한 시편들은 바로 이 돈독함의 정점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백악시단은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계’ 속 타인들과의 깊은 소통을 바탕으로 사소하고 비근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일상의 장면과 정감들을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진실한 공감의 시료(詩料)들로 재탄생시킬 수 있었다.
인용
Ⅰ. 서론
Ⅱ.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Ⅲ. 진시의 기저와 논리
Ⅳ. 진시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Ⅴ. 진시의 시사적 의의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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