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생(民生)에 대한 응시(凝視)와 핍진(逼眞)한 사생(寫生)
‘진시’의 대상은 산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그 산수 속 사람들의 삶 또한 시 속으로 깊이 끌어안았다. 성리학은 사민(四民) 가운데서 사(士)의 책무를 대단히 강조한다. 사대부는 위로는 임금이 성군(聖君)이 되도록 보좌하고 아래로는 왕화(王化)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계층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것은 벼슬살이의 여부와 상관없이 사대부라면 응당 해야 할 책무와 같은 것이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 또한 이러한 인식의 틀 위에서 백성을 사고하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민(民)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아래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田翁夢旐旟 夢後江雨盈 | 전옹(田翁)이 풍년 징조를 꿈에서 보았는데 깨고 나니 강가에 비 흠뻑 내렸네. |
起舞銚鎒去 靑疇水將平 | 일어나 춤을 추며 호미 괭이 들고 가니 푸른 들녘 물이 장차 펀펀하겠지. |
煕皥何時還 望遠憑虗楹 | 태평시절 어느 때에 다시 올까나 먼 곳을 바라보려 빈 난간에 기대보네. |
天民無善惡 雨露變其情 | 천민(天民)은 선과 악이 없건마는 비와 이슬이 그 마음을 변하게 하네. |
「반계(盤溪)에서의 감흥[盤溪感興]·9」, 金昌翕, 『三淵集』 권3
농사철에 시우(時雨)가 내린 기쁨과 백성에 대한 염려를 담은 시이다. ‘조여(旐旟)’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무양(無羊)」에 “소와 양 치는 사람이 꿈을 꾸니, 사람들이 물고기로 보이고, 작은 기가 큰 기로 보였도다. 태인이 이것을 점쳐 보니, 사람들이 물고기로 보인 것은 올해 풍년이 들 조짐이요, 작은 기가 큰 기로 보인 것은 집안이 번성할 조짐이라 하도다.[牧人乃夢, 衆維魚矣, 旐維旟矣, 大人占之, 衆維魚矣, 實維豐年, 旐維旟矣, 室家湊湊.]”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풍년의 조짐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김창흡은 농사비가 흠뻑 내린 들판에서 백성들이 기쁘게 노동하는 모습을 조망하다 깊은 생각에 잠긴다. 시우(時雨)에 기뻐하는 저 순박한 천민(天民)들을 어찌하면 태평성세의 백성으로 살게 할 것인가. 김창흡은 백성을 ‘천민(天民)’이라 인식한다. 그리고 천민이 선해지고 악해지는 것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 의한 것이라 인식에 도달한다.
천민(天民)은 범상한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出謂之天民者, 蓋謂不是尋常之人, 乃天之民耳. 天民之云, 亦猶曰‘天下之善士’云爾, 與‘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者又不同. -『朱子語類』 권46】. 정자(程子)는 자신을 천민(天民) 가운데 선각자라 하면서 백성을 깨우치는 일을 자임한 이윤(伊尹)의 말【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 知使先覺覺後覺也. 予, 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 覺斯民也, 非予覺之而誰也? -『孟子集註』 「萬章章句·上」】을 풀이하면서 “저들이 깨우침에 이른 것도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다. 모두가 저마다 스스로 이 리(理)를 가지고 있으니, 나는 다만 그것을 깨우쳐 주었을 뿐이다.”【程子曰: ‘予, 天民之先覺, 謂我乃天生此民中, 盡得民道, 而先覺者也. 旣爲先覺之民, 豈可不覺其未覺者? 及彼之覺, 亦非分我所有以予之也. 皆彼自有此理, 我但能覺之而已.’ -『孟子集註』 「萬章章句·上」】라고 하였다. 이 풀이 속에서 민(民)은 리(理)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주자와 정자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천민(天民)은 천리(天理)를 깨우친 민(民)을 의미하게 된다【民者無位之稱, 以其全盡天理, 乃天之民, 故謂之天民. -『孟子集註』 「盡心章句·上」】. 이렇듯 천민(天民)이란 용어는 성리학적 우주론이 반영된 개념어로 수양의 정도가 대단히 높은 인격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김창흡이 시에서 말한 ‘천민(天民)’은 주자학에서 논의된 천민(天民)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김창흡이 말한 ‘천민(天民)’은 아직 천리(天理)를 깨닫고 온전히 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그것을 깨닫고 온전히 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천민(天民)’이 될 수 있는 사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백성을 천민(天民)으로 인식하는 것은 백성을 순천(順天)한 세상 구현의 동반자로 인식한다는 의미로, 이런 인식 위에 서면 사(士)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이윤(伊尹)이 그러했듯 선각자로서 민(民)이 천민(天民)이 되도록 하는 역할이 사(士)에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백성의 삶을 대하는 두 가지 상황과 태도가 나오게 된다. 첫 번째는 민(民)이 천민(天民)이 되지 못하는 상황, 즉 천민(天民)이어야 할 백성이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고통 받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士)는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시정하기 위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른바 애민(愛民)이라는 입장이 여기서 마련된다. 맹자는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라도 요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들을 도랑에 밀어 넣은 것처럼 여겼으니 천하의 무거운 책임을 자임함이 이와 같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언급된 이윤의 마음이 곧 질곡 속의 백성을 대하는 입장이 된다. 두 번째는 민(民)의 천민(天民)으로서의 바탕을 확인하는 입장이다. 주자는 맹자에 인용된 이윤의 말을 풀이하면서 성현과 중인(衆人)은 모두 이 리(理)를 갖추고 있는데 중인은 스스로 그것을 깨달아 살피지 못할 뿐이라고 하였다【又曰: ‘伊尹說:「天之生斯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 予,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覺斯民也. 非予覺之而誰也?」 「思天下之民,匹夫匹婦有不與被堯舜之澤者,若己推而納之溝中, 其自任以天下之重如此!」 聖賢與衆人皆具此理, 衆人自不覺察耳.’ -『朱子語類』 권130】. 이러한 입장에 서면 백성에게 있는 순천리(順天理)한 모습, 즉 천민(天民)의 자질을 확인하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된다. 백성에게서 천민(天民)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백성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질박하고 순수한 면모, 참된 인간상의 모습을 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민생을 대하는 이 두 가지 태도는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민생을 형상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 기능하게 된다. 먼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형상화한 시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我過淸州境 觀風一喟然 | 내가 청주의 경계를 지나며 풍속을 살펴보니 탄식만 나오네. |
誰爲懶明府 民病涉寒川 | 누가 관가의 부름에 늑장피우랴? 백성은 병든 채로 찬 냇물을 건너네. |
斫脛傷仁酷 乘輿用惠偏 | 정강이 깨졌으니 인을 해침이 가혹하고 수레를 타는 일도 그 혜택이 치우쳤구나. |
行人能殿最 可畏豈非天 | 행인들도 행적을 평가할 줄 아니 어찌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
「작천에 다리가 없어[鵲川無梁]」, 金昌翕, 『三淵集』 권8
관가의 부역으로 정강이가 깨진 채 차디찬 시냇물을 건너야 하는 백성을 안쓰러워하며 관리들에게 일갈(一喝)하는 시이다. 김창흡은 무지몽매한 백성이라고 무시하는 관가의 처사에 백성들도 잘하고 잘못하는 줄 분명히 알고 있다며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호통을 치고 있다. 이 시 속에서 백성은 곧 하늘로, 민심은 곧 천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김창흡의 이 시는 현장에서 터져 나온 것이기에 사실적이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 주는데, 이는 백악시단이 민생(民生)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뚜렷한 특징이다. 백성을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는 모습은 권섭의 다음 시에서도 확인된다.
乞人如佛佛如人 | 걸인이 부처요, 부처가 걸인이니 |
易地均看是一身 | 처지를 바꾸어 공평히 보면 모두가 한 몸이라. |
佛下庭前人上揭 | 불상 아래 뜰 앞에서 사람들은 떠받드는데 |
乞人尊佛辨誰眞 | 걸인과 부처 중에 누가 진짜인 줄 알리오? |
「걸인이라고 멸시하지 마라[乞人不可慢視]」, 權燮, 『玉所稿』 「詩·13」
권섭은 걸인도 부처도 ‘균간(均看)’하면 모두 다 한 몸이라 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짜일 수도 있는 불상은 떠받들면서 눈앞의 진짜 부처는 걸인이라 멸시한다. 통념을 본원의 차원에서 전복하며 천한 거지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애민(愛民)’ 의식을 보여주었다. 권섭은 일찍이 “어린애라고 깔보지 마라. 어린 사람도 올바른 기준이 있다. 천한 사람이라고 쉽게 대하지 마라. 천한 사람도 기롱하는 줄 안다. 그런 즉 말을 하고 일을 할 때면 추호라도 대충 지나쳐서는 안 된다. 금수나 곤충 같은 부류도 모두 지각이 있으니, 사람이 어찌 그 곁에서 완전히 기탄없이 할 수 있겠는가?”【勿以小人而侮之, 小人亦有對頭; 勿以賤隸而易之, 賤隸亦知譏議, 則凡出言行事不可一毫放過矣. 禽獸昆蟲之類亦皆有知覺, 人豈可全無忌憚於其傍側乎? -權燮, 『玉所稿』 「散錄內篇·1」】라 한 적 있었는데, 약자는 물론이요 미물까지 염두에 둔 그의 인(仁)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권섭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관념적 사유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다 굶어 얼어죽기 직전의 사람을 구하고, “길에서 굶어죽었단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여러 중들 온힘 다해 불러 모았네. 들쳐 메고 온돌방에 편히 누였다, 호호 불며 죽을 쑨 뒤 일으켰다네[殣驚吾耳, 群僧盡力呼. 擔來臥溫室, 噓作粥糜扶. -權燮, 『玉所稿』 「詩·13」「救活凍丐」].”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가뭄으로 말라붙은 도랑에서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물고기를 손으로 건져 시내에 풀어주기도 하였다【余嘗行過旱溝, 見群魚喁喁待盡. 下馬而坐, 使傔人手掬而縱之傍溪. -權燮, 『玉所稿』 「散錄內篇·1」】.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마음으로 민생을 형상화한 시는 백성의 고통을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할수록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애민의식에서 창작된 시는 대개 장편 고시의 형식을 취한다. 다음에 살펴볼 두 작품은 공히 애민정신에 의해 창작된 것이지만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먼저 권섭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民之有役自古然 | [1]백성들 부역은 예부터 있었다지만 |
東面之民何偏苦 | 동면 백성들 어찌 그리 고달픈가! |
朝朝夜夜犬吠咽 | 아침으로 저녁으로 개들은 울부짖는데 |
春夏秋冬不按堵 |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안할 적 없구나. |
官牌渡江走如鼠 | 공문서 강 건너 오니 쥐처럼 도망가서 |
竄伏林間甘倚虎 | 숲 속에 숨어도 호랑이가 오히려 반갑다네. |
松明乾炭兩等納 | 관솔이며 마른 숯 둘을 함께 바치려니 |
四色之茸應結戶 | 갖가지 잡풀들로 문을 엮어 만들밖에. |
非再非三進上外 | 진상할 것 이 외에도 두세 가지 아닌데 |
日朔之共歸地主 | 하루 한 달 공출도 지주에게 돌아가네. |
使客軍馬嶺南䭾 | 사신의 군마는 영남으로 실어가고 |
不時策應無定數 | 불시의 원조도 정해진 수가 없네. |
夥然名目豈堪耐 | 허다한 명목을 어찌 감내하겠는가! |
八面皆同寧寃愬 | 모든 면이 다 같다면 어찌 원통함을 호소하랴! |
他村所無峽山資 | 다른 마을엔 없는 것을 산골짝에서 내어야 하고 |
徵督唯須官用裕 | 징수 감독 오직 관가의 쓰임만 넉넉히 하네. |
生稚訥魚不拘節 | 산 꿩과 눌치 잡기 계절을 안 가리고 |
(中略) | (중략) |
松脂杻骨杻皮令 | 송진 싸릿대 싸리껍질 채취 명령 |
白蠟五味山葡賦 | 밀랍 오미자 산포도 채취 부역 |
生鮮日次白土掘 | 하루걸러 생선 잡고 백토도 파야하는데 |
種種難酬別分付 | 들어주기 어려운 가지가지 다른 분부 |
輪差里正日奔走 | 돌아가며 맡은 이장 날마다 분주하고 |
五貫靑銅三朔斁 | 다섯 관 청동을 석 달 만에 마쳤다네. |
(中略) | (중략) |
書員監官踏驗苛 | [2]서원(書員), 감관(監官) 답험(踏驗)은 지독하고 |
及唱使令別差屢 | 급창(及唱), 사령(使令) 별도 차출은 빈번하구나. |
軍官何事劇咆哱 | 군관은 무슨 일로 저리 씩씩 화를 내나? |
約正風憲亦可怖 | 약정(約正)과 풍헌(風憲)도 협박하긴 매한가지. |
家家酒饌恣醉飽 | 집집마다 술과 음식 제멋대로 다 처먹고 |
剪髮何敢言貧窶 | 머리 잘라 사는 마당에 어찌 가난 말하리오? |
纔去卽來彼主人 | 가자마자 즉시 오는 저들의 주인은 |
以村爲家勸農互 | 권농과 작당하여 촌락을 제 집으로 삼네. |
殫心供接少佛意 | 대접하기 꺼려하여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
誣揑終爲獄中庾 | 무고하게 엮어서 끝내 옥에 처넣네. |
哀哀東面民何生 | [3]애달파라! 동면 백성 어찌하면 살 것인가? |
疾痛呼天又呼父 | 괴롭고 아파 하늘에 호소하고 부모에게 호소하네. |
我來凌江洞裏行 | 내가 능강에 와 마을 안을 다니면서 |
耳聆愁悶慘目睹 | 귀로는 근심 듣고 눈으로는 참상 보고 |
嗚嗚一嗚作歌詩 | 구슬픈 원망 노래 한번 지어서 |
願誦淸風深邃府 | 읊조려 저 깊숙한 청풍부에 알리려 하네. |
(後略) | (후략) |
「동면민가(東面民歌)」, 權燮, 『玉所稿』 「詩·1」
이 시는 권섭이 44세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청풍(淸風)에서 향촌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에 지어진 것이다. 모두 40구로 이루어진 장편 고시인데, 논의에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인용하였다. 이 시는 크게 보면 세 개의 의미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의미단락은 동면(東面) 백성들이 겪은 착취의 참상을 그린 부분이고 두 번째 의미단락은 이들의 고혈을 짜내는 양반과 아전의 횡포를 밝힌 부분이며 세 번째 의미단락은 새로 부임한 청풍부사에게 선정을 당부하는 부분이다.
백성들의 착취는 부역과 공물에서 이루어졌다. 시도 때도 없는 부역 징발에 짖던 개가 목이 쉬고, 차라리 호랑이를 만나게 될지라도 산으로 피하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관솔과 숯을 바쳐야 해서 대문까지 허는 지경인데 허다한 명목의 공출에 골짜기 맹지(盲地)까지도 세금을 거두었다. 꿩부터 야생 열매까지 시시로 바쳐야 하는데 들어주기 힘든 사적인 부탁까지 가중되었다.
이러한 착취는 관가의 아전과 수령, 그리고 향촌 사족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아전들은 실무에서 위세 떨고 협박하면서 사적 착취를 하고, 그 상전인 수령은 향촌의 권농(勸農)과 작당하여 마을 전체를 제집처럼 마음대로 주무르고, 혹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리면 없는 죄도 만들어서 감옥에 처넣고 말았다. 이러한 착취와 백성의 피폐상을 목도한 권섭은 스스로 발분하여 시를 지었다. 그리고 이 시를 새로 부임하는 부사에게 알려, 부사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선정을 베풀기를 부탁하였다【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吾歌易感又易激, 却恐忠言反逆忤. 淸風五載四遽代, 達城良侯來何暮. 其人其心眞士夫, 家世傳承自淸素. 分符百里亦非小, 一念吾民失呴哺. 曰爾吾之少小友, 曰民之隱爾悉布. 嗚乎一言我侯仁, 何不持心制喜怒. 我今築室凌江居, 益知東面事如縷. 諸般責出詎得已, 非此東面靡所措. 侯雖矯之又生疣, 莫如因之去蟊蠧. 蠲他徭斂簡出牌, 終歲唯專農爲務. 哀之愍之一存心, 逐事丁寧且撫護. 民非禽獸皆知侯, 後之還忘勤力努. 嗚乎我歌歌再闋, 願與東面民鼓舞. 歸來我侯色敷腴, 寒碧樓前一仰俯.”】.
이 시는 창작의 동기가 뚜렷하다. 권섭은 어린 시절 벗이었던 신임부사에게 자신이 목도한 부조리를 낱낱이 알려주어, 이러한 부조리를 시정하겠다는 의도로 이 시를 지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는 비위 사실을 고발하는 일종의 보고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벗이 부사로 부임해 오는 터라 부조리를 근절할 수 있다고 판단한 권섭은 작심한 듯 자신이 목도한 부조리를 시로 옮겼다. 그래서 이 시는 심미적 형상화를 고려하지 않고 사실에 기반 하여 현실 속 동면(東面)에 만연한 문제점들을 이성적으로 파헤쳤다. 이 시의 성취는 바로 이 사실성과 고발성에 있다. 이 시의 사실성은 착취상에 대한 구체적 제시에서 마련된다. 꿩, 눌치, 송진, 싸릿대, 사리껍질, 밀랍, 오미자, 산포도 등의 공출 목록과 서원(書員), 감관(監官), 급창(及唱), 사령(使令), 군관(軍官), 약정(約正), 풍헌(風憲), 권농(勸農) 등의 착취자 명단이 그 현저한 구체성의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아침으로 저녁으로 개가 울다 목이 쉬고”, “집집마다 술과 음식 제멋대로 다 처 먹고”, “머리 잘라 사는 마당에 어찌 가난 말하리오”, “권농과 작당하여 촌락을 제 집으로 삼네”, “무고하게 엮어서 옥에 처넣네” 등과 같은 직접적 서술을 통해 작가의 비판의식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요컨대 이 작품은 현실 고발을 통해 부조리를 근절하겠다는 권섭의 작시 의도에 맞게 자신의 의사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형상화 방법을 적절하게 구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이병연은 석이 채취민의 고달픈 삶의 모습을 극적으로 형상화하며 애민과 비판의식을 드러내었다.
萬丈之峯直上天 | 01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 곧바로 하늘로 솟고 |
全壁削成松不枳 | 02 깎아지른 벼랑이라 소나무도 못자라네. |
嵐蒸霧歊石色靑 | 03 산안개 자욱하여 돌 빛마저 푸른데 |
人言峯半産石耳 | 04 저 산 허리춤에 석이가 난다하네. |
楊州有氓趫而貪 | 05 양주고을 백성들 잽싸게 찾아다니니 |
白首輕身利於此 | 06 늙은이도 조심치 않고 석이 따서 재미 보네. |
山背微縫去因緣 | 07 산등성이 살짝 붙은 실 같은 길 기어서 |
旣臨其巔利在底 | 08 봉우리에 올라 보니 저 밑에 이물(利物)이 있네. |
齋香祭神訴貧窮 | 09 산신에게 향불 피워 빈궁함을 하소연하고 |
四顧彷徨拚一死 | 10 사방을 보고 서성이다 한번 죽기로 작심을 하네. |
絞麻百尺分兩端 | 11 삼으로 백 척 줄을 꼬아 양 갈래로 나누고선 |
纒在石角在腰裏 | 12 돌부리에 하나 묶고 허리춤에 하나 묶네. |
硬心用膽向虛空 | 13 굳세게 마음먹고 허공으로 몸을 날리더니 |
裊裊垂下稍安趾 | 14 흔들흔들 줄을 타고 절벽 아래 바위 끝에 발을 겨우 디디네. |
挑多擷深遍罅隙 | 15 깊은 틈새 두루 뒤져 있는 대로 따서 메니 |
日午肩重猶不止 | 16 한낮 되어 어깨가 묵직해도 그칠 줄 모르네. |
長繩時搖未見人 | 17 긴 줄만 이따금 흔들릴 뿐 사람은 뵈지 않으니 |
守繩危峭泣其子 | 18 가파른 곳에서 줄 지키던 아들놈 울음을 터뜨리네. |
子泣莫聞繩欲斷 | 19 아들놈 울음소리 안 들리는지 줄은 곧 끊어지려는데 |
凄風倒吹日黃紫 | 20 처량한 바람만 솟구치고 누런 해는 보랏빛으로. |
心動遺籃却上來 | 21 마음이 왈칵 불안했는지 바구니를 버리고 올라오니 |
翁孩向哭愁雲起 | 22 늙은이와 자식 서로 잡고 우는데 근심스런 구름이 피어오르네. |
溪南祖田水旱捐 | 23 “개울 남쪽 조상 밭은 홍수로 가뭄으로 버리고 |
負薪雪中空破屣 | 24 눈 속에 땔나무 졌지만 공연히 짚신만 망가뜨렸지요. |
一擔千錢且可資 | 25 한 번 메면 돈 천 닢 만질 수 있으니 |
只擬明朝向塲市 | 26 내일 아침 시장으로 가볼까 합니다.” |
亦知崖下有死骸 | 27 벼랑 아래 해골들 굴러다니는 줄도 알지만 |
苦爲百口忘一己 | 28 숱한 식솔 목구멍에 제 한 몸을 잊은 게지. |
嗚呼溺貨氓可罪 | 29 아! 재물에 빠진 백성이라 허물하랴! |
肉食諸公與有恥 | 30 호의호식 높은 님네 부끄럽긴 매한가지. |
性於耕鑿堯舜民 | 31 농사를 천성으로 알던 요순의 백성들을 |
誰遣知此石耳美 | 32 누가 이곳에 보내 석이의 맛을 알게 했는가? |
「석이 채취[石耳行]」, 李秉淵, 『槎川詩抄』 卷上
이 시는 석이버섯을 채취하며 사는 백성의 삶을 극적으로 그려내면서 이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작품은 내용을 중심으로 서사, 본사, 결사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석이버섯을 본격적으로 채취하는 과정과 석이 채취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형상화된 7~26행까지가 이 시의 본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면, 석이버섯이 자라는 곳과 석이를 따며 살아가는 양주민의 풍속을 언급한, 즉 석이채취와 관련된 주변적 상황이 언급된 1~6행이 서사가 되고, 석이채취의 과정을 형상화한 뒤 시인 자신의 주관적 의사를 드러낸 27~32행까지가 이 시의 결사가 된다.
먼저 1행과 2행에서는 석이가 자생하는 곳을 그렸다. 이병연은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에 깎아지른 벼랑이라 소나무도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표현으로 석이가 나는 곳의 험난함을 드러냈다. ‘높디높은’과 같은 직설보다 ‘소나무도 자랄 수 없는’ 장면의 제시가 그곳의 험난함을 더욱 효과적으로 직감(直感)하게 한다. 이어 3~6행에서는 석이를 채취하며 살아가는 양평 주민의 풍속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본사에 해당하는 7~26행에서는 시인이 석이채취의 현장에 동행하여 그곳에서 본 석이 채취의 과정을 핍진하게 그려내었다. ‘향불을 피워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런 뒤에도 한참 동안 사방을 서성거리다 한번 죽기로 작심을 한다[齋香祭神訴貧窮, 四顧彷徨拚一死]’는 표현은 석이를 따는 백성의 심리상태를 행동으로 보인 것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석이 채취가 ‘죽기를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임을 공감하게 한다. 아울러 이 부분을 통해 시 전편에 이어질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한 석이 채취 과정을 절묘하게 예비하였다.
11~22행에는 석이 채취 과정이 본격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시적 정황은 이렇다. 늙은 아비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석이를 따러 나선 길에 이병연은 관찰자로 참여하고 있다. 늙은 아비는 삼을 길게 꼬아 만든 줄을 한쪽은 바위에 묶고 한쪽은 자신의 허리춤에 묶은 뒤 굳은 결심을 하고 백 척 벼랑으로 내려간다. 흔들거리는 줄을 타고 절벽 가운데 발 디딜 곳을 간신히 찾은 뒤에는 바위 틈새를 두루 뒤져 망태기에 석이를 따 담는다. 정신없이 석이를 따다보니 얼마나 지났을까? 눈에 보이던 사람이 이제는 벼랑 아래로 고개를 빼고 봐도 보이지 않고 그저 줄만 흔들거린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어린 자식은 아버지를 불러보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고, 아비가 매달린 줄은 금세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데 처량한 바람만 허공을 솟구쳐 분다. 급기야 아버지의 생사가 걱정된 어린 자식은 울음을 터뜨리고 이에 아비도 마음이 동했는지 죽게 고생해서 딴 석이 바구니를 버리고 올라오게 된다. 금세라도 끊어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함을 아비도 느껴서일 것이다. 이에 무사히 올라온 아비와 자식은 서로 부둥켜안고 안도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게 된다.
23~26행에는 이처럼 위험천만한 일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백성의 처지가 백성의 목소리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들이 석이채취에 나서게 된 것은 자연재해로 얼마 안 되는 조상적 전답을 짓지 못하게 되자 나름 자구책으로 나무일도 해보았지만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고, 어차피 죽게 될 판이라면 석이채취가 돈이 된다니 그것에 목숨을 걸어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성을 동정하는 시선은 현실의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었다. 요순의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건 바로 석이버섯을 진미라며 탐하는 권귀(權貴)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는 서사적 기법을 활용하면서 석이채취 과정의 위험천만함을 실감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또한 석이를 채취하는 백성을 어리석거나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乘危却忘愁, 獲利翻自侈. 何如農圃翁, 安坐以卒齒. 哀哉世間人, 愚者多如彼. -李獻慶, 『艮翁集』 권9 「石耳-石耳, 玄色細皺, 品味淸淡, 蔬菜之良者也. 生於石崖嶄絶之上, 山民採者, 以長繩繫兜子, 乘之以上下如繘井然, 綆絶落崖而死者亦往往有之云. 噉之非如芻豢之味, 貨之不過錐刀之利, 而長吏責其供, 貧民要其直, 以危其性命, 悲夫!-」】 석이 채취민의 말을 직접 인용하여 그들의 처지를 십분 공감하게 한 뒤, 호사한 권귀(權貴)들에 대한 비판을 진행시킴으로써 애민이라는 주제의식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였다【이 부분은 졸고, 「애민시의 전통에서 본 석이행」, 『돈암어문학』24집, 2011을 요약한 것임.】.
권섭과 이병연의 작품은 백악시단이 고달픈 민생(民生)을 형상화한 시의 두 전형을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현장에 즉하여 생생한 사실주의 미학을 보이면서도 한 쪽에서는 문학적 형상화보다는 현실의 문제점을 이성적 시각으로 포착하여 고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장 심금을 울릴만한 특징적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현실 비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민생을 형상화한 백악시단의 ‘진시’는 대개 이 두 경향의 폭 안에서 애민과 비판정신을 구현해낸다. 아래 홍세태의 시를 보자.
大車彭彭服兩牛 | 수북이 쟁인 큰 수레를 두 마리 소가 끄는데 |
前牛後牛皆垂頭 | 앞 소며 뒤 소도 모두 머리를 늘어뜨리네. |
牛罷車重行不得 | 소가 멈추면 무거운 수레 갈 수 없는데 |
十步之內五步休 | 열 걸음 가는데 다섯 걸음 쉬는구나. |
借問車中載何物 | 묻노니 수레 안에 실은 것 무엇이더냐? |
官家鑄錢須銅鐵 | 관가에서 동전 만들 동철(銅鐵)이란다. |
此鐵由來出南蠻 | 이 철은 남만(南蠻)에서 나는 것인데 |
萊州大商緣其間 | 부산의 대상(大商)이 수입해 왔다네. |
滄溟萬舸簇蝟毛 | 너른 바다 수만 척 배 고슴도치 털처럼 빼곡히 모여 |
釜山掛帆來龍山 | 부산에서 돛을 달고 용산으로 옮겨왔다네. |
長安六月烘如火 | 도성은 유월이라 불같은 무더위인데 |
鐵車相連北山下 | 철 실은 수레는 북산(北山) 아래로 이어지누나. |
將軍幕府壓山谷 | 장군의 막부는 산골짝에 드높은데 |
萬夫槖籥張爐冶 | 만 명 일꾼 풀무질하여 가마에 녹이네. |
爐中一日得千萬 | 가마에서 하루에 천만 동전 만들어내면 |
鐵貨更與萊商販 | 동전은 다시 동래 상인에게 팔리네. |
萊商日富錢日賤 | 동래 상인은 날로 부자 되고 동전은 날로 싸지는데 |
九府何曾救人困 | 구부(九府)【돈을 주조하고 관리하던 기구.】에서 한 번이라도 백성 고통 구한 적 있나? |
還聞細民竊爲幣 | 듣자니 가난한 백성도 몰래 화폐를 만들어 |
往往私鑄干邦憲 | 이따금 동전을 위조하여 관리에게 바친다지. |
官家養牛亦有食 | 관가에서 기르는 소는 먹을 것이 있지만 |
車丁歲饑分牛飯 | 수레꾼은 흉년으로 소먹이를 나눠먹는다네. |
我謂車丁鞭莫疾 | 생각건대, 수레꾼이여 채찍을 서둘지 마오 |
牛蹄蹶兮車軸折 | 소가 자빠지면 수레 축이 부러지네. |
車軸折尙可 | 수레 축 부러지는 것이야 괜찮다마는 |
牛斃不可說 | 소까지 죽는 건 말도 안 되네. |
弓牛之角甲牛皮 | 소뿔로는 활 만들고 껍질로는 가죽 만들리니 |
官家鑄錢何時畢 | 관가의 동전 주조 어느 때나 끝나려나? |
「동철(銅鐵)을 실어 나르는 소[鐵車牛行]」, 洪世泰, 『柳下集』 권2
홍세태는 동전 주조용 철을 죽을힘을 다해 끌고 가는 소의 모습을 보면서 동전주조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시에 담았다. 홍세태는 동전의 주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동전을 주조해봐야 인플레이션으로 현물 가치만 높아져 상인들은 톡톡한 재미를 보지만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홍세태는 주전(鑄錢)의 남발이 가져온 폐단을 백성들이 돈을 위조하는 것으로 구체화하여 동전이 통화(通貨)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단적으로 보였다. 조선후기 동전 주조에 관한 조정의 의견은 분분하였다【『英祖實錄』 권14, 3년 11월 5일 2번째 기사. 이 기사에서 이조참판 윤순(尹淳)은 동전 주조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중시킨다며 동전 주조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고, 판윤 김동필(金東弼)은 현물통화의 폐단을 극복하려 시행된 동전을 다시 현물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였고, 병조판서 이태좌(李台佐)는 30년이나 주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동전이 귀해져 빈부의 격차가 커졌으니 주전(鑄錢)을 통해 돈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민생의 입장에서 볼 때 체계적이지 못한 통화정책은 현실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동전 주조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동전이 유통된 이래로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졌으니 주전(鑄錢)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좌참찬 오정위를 두고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며 ‘동취공경(銅臭公卿)’이라 불렀다는 실록의 기사【『肅宗實錄』 권8, 5년 1월 16일 1번째 기사.】는 동전 주조에 관한 민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홍세태는 이 같은 백성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후반부는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수레를 모는 백성에게 철을 실어다 줘봐야 백성들만 피폐하게 하는데 무얼 그리 서둘러 소에게 가혹한 채찍질을 하느냐며 소를 천천히 몰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이어 그렇게 가혹한 채찍질에 소가 죽으면 그 소는 뿔이 뽑히고 가죽까지 벗겨지는 수탈을 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시에 제시된 소의 형상은 질곡에 빠진 백성을 상징한다. 감당할 수 없는 각종 부역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백성의 모습은 목을 쭉 빼고 숨을 헐떡거리며 열 걸음에 다섯 걸음을 쉬어야 하는 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이렇듯 소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파악하고 나면 가혹한 채찍질을 멈추라는 홍세태의 당부가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을 알게 된다. 소가 불쌍하니 채찍질을 멈추라는 것은 표면적인 의미이고, 감춰진 의미는 결국 사람 잡을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홍세태의 당부는 이렇듯 소극적이나 저항할 것을 권유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홍세태의 당부를 그저 소에 대한 안타까움 정도로 이해하면 홍세태의 당부는 전체 주제와 시상 전개에서 이질적이고 동떨어진 것이 되고 만다.
홍세태의 이 시는 소라는 상징적 소재를 통해 주전(鑄錢)에 대한 비판적 자기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서사적 구성을 통한 극적 형상화를 배제하고 동철(銅鐵)의 산지로부터 동철의 유입과정, 주전(鑄錢)으로 인한 양극화 현상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상세하게 제시하였다. 이 작품은 홍세태 이전의 여항 시인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현실주의적 성취를 이루었는데【윤재민, 「조선후기 중인층 한문학의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153면; 강명관,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7, 256면 참조.】, 특히 후반부의 당부를 통해 소극적이나마 저항의 의미를 담은 점은 사대부들의 애민시가 자기 계급을 엄격히 비판하면서도 끝내 현실의 질곡을 자신들의 이상적인 -가령, 요순의 태평시대와 같은- 세계 속에 용해시키고 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세계인식과 미감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아래 정내교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赤日鋤禾霜天穫 | 땡볕 아래 김을 매고 서리 내릴 때 거뒀지만 |
水旱之餘能幾獲 | 물난리와 가뭄 끝에 건질 것 얼마더냐? |
燈下繅絲鷄鳴織 | 등불 아래 실을 켜고 닭 울음에 베 짜지만 |
戛戛終日纔數尺 | 종일토록 애를 써도 남는 것은 겨우 두어 자. |
稅布輸來身無褐 | 세포(稅布)로 실어가면 몸에는 걸칠 게 없고 |
官糴畢後缾無粟 | 관청 환자 갚고 나면 뒤주엔 쌀이 없다네. |
惡風捲茆山雪深 | 모진 바람 띠집 말아 올리고 산에 눈은 수북한데 |
糟糠不飽牛衣宿 | 지게미도 못 먹은 채 거적을 덮고 자네. |
두 번째(其二)
白骨之徵何慘毒 | 백골징포 어찌 그리 참혹하고 표독한지 |
同鄰一族橫罹厄 | 이웃 사는 한 집안이 횡액에 걸렸다네. |
鞭撻朝暮嚴科督 | 아침저녁 채찍질로 엄히 과세 독촉하니 |
前村走匿後村哭 | 앞마을 도망치고 뒷마을은 통곡하네. |
鷄狗賣盡償不足 | 닭과 개를 다 팔아도 갚기엔 턱없는데 |
悍吏索錢錢何得 | 독한 아전 돈 달라니 그 돈 어이 구할거나? |
父子兄弟不相保 | 부자와 형제도 서로 지키지 못하고 |
皮骨半死就凍獄 | 삐쩍 말라 반은 죽어 얼음 같은 옥에 갈 뿐. |
「농가의 탄식[農家歎]」, 鄭來僑, 『浣巖集』 권1
이 시는 정내교가 40세 되던 1720년에 지은 것으로 충청도 어느 마을에서 목도한 민생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고발한 작품이다. 첫 번째 수에는 수해와 한해로 수확이 줄었는데 먹을 양식은 환곡으로 모두 수탈당하고, 새벽까지 짠 베는 군포로 다 빼앗기고 말아 지게미, 쌀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한 채 거적을 덮고 자는 백성의 모습을 그렸다. 두 번째 수는 아침저녁으로 조세를 닦달하는 아전의 등살에 가족이 파탄 나고, 결국엔 피골이 상접한 채로 얼음장 같은 감옥에 갇히고 만 백성의 모습을 그렸다. 이 시는 형사만으로 백성들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전할 뿐 이러한 사태를 목도한 시인의 의식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내교는 왜 사실적 형사만으로 자신의 의식을 대신하려 했던 것인가?
그것은 홍세태의 경우처럼, 사대부와는 다른 중인층의 비판의식이 대단히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세태가 여항시단에서 비판적 사회시 창작을 열었다면, 정내교는 그 비판적 형상화를 한층 심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윤재민, 앞의 논문, 169면; 강명관, 앞의 책, 263면 참조.】. 사대부들의 사회시는 대개 작품의 후반에 자기 의사를 개진한다. 가령, 앞서 김창흡이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가?”라고 하면서 수령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고, 이병연이 “농사를 천성으로 알던 요순의 백성들을, 누가 이곳에 보내 석이의 맛을 알게 했는가?”라고 하면서 자기 계급에 반성을 촉구하며, 권섭이 위정자에게 선정을 당부하는 것들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들이 시에 위와 같은 자기 의사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사대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항인들은 그들의 신분 때문에 현실 정치를 담당하는 양반들을 직접 대고 비판할 수 없었다. 홍세태가 수레꾼에게 당부의 말을 하면서 중의적 수사를 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내교는 홍세태처럼 중의적 장치를 설치하지 않았다. 대신 정내교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농민의 입을 직접 빌리는 것이었다. 정내교의 시는 「농가의 탄식[農家歎]」이라는 제목처럼 전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농민의 탄식이 이쯤에 이르면 나올 수 있는 반응은 “이런 개 같은 세상” 내지는 “저런 쳐 죽일 놈들”과 같은 분노에 찬 과격한 언사가 될 것이다. 독자가 이 시를 읽으면서 가련한 농민들의 처지를 애달파 하면서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 정치에 공분하게 되는 것은 정내교가 의도한 바로서 이 시가 거둔 참여 시적 성취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신분적 제약에 의해 자신의 비판적 의론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여항인들은 시 창작에 있어 자신들의 불우한 세계인식을 불완전하고 모호하게 표출하기 보다는 부조리한 세상을 생생하고 실감나게 전달하는 형사에 몰두하게 되면서 사대부와는 다른 여항인 특유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상의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백악시단이 민생을 형상화한 시들은 모두 생생한 실상 전달에서 빼어난 성취를 보인다. 이러한 성취는 백성을 천민(天民)으로 여기며 그들의 생활현장에 밀착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창작 태도로 민생을 형상화한 백악시단의 작품들 가운데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시에 직접 노출시킨 작품들이 많다.
春動江湖新浪生 | 봄 막 되어 강에는 새 물결이 일렁이니 |
舟人鼓楫唱歌聲 | 뱃사람은 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가 |
自言販穀扶安去 | 혼잣말하길, “곡식 팔러 부안으로 떠나면 |
三月花開可上京 | 춘삼월 꽃이 펴야 상경할 수 있으려나.” |
「강가 마을에서 있었던 일[江村卽事]」, 洪世泰, 『柳下集』 권1
墟里烟沉夕 山空雪欲落 | 마을은 저녁연기로 어둑한데 산은 텅 비고 눈이 곧 떨어질 듯. |
村翁宵索綯 松火照茅屋 | 촌 늙은이 밤이 되자 새끼를 꼬고 관솔불로 초가를 밝혀두었네. |
村犬吠如豹 柴門吏夜過 | 촌집 개 표범처럼 사납게 짖어대고 사립문엔 밤늦게 아전이 다녀갔네. |
今年秋稍熟 租稅較前多 | “금년은 가을 작황 좋지 않은데 조세는 전년보다 훨씬 많네요.” |
「전가(田家)에서 밤에 읊다[田家夜吟]」, 趙正萬, 『寤齋集』 권1
父老相逢說 今年良苦哉 | 노인들과 만나서 말을 나누니 “올해는 참 죽을 맛입죠. |
籓籬多帍患 畎畝半虫災 | 울타리에는 호환(虎患)이 잦았고요, 논밭은 벌레가 반이나 먹었습죠.” |
官遠何能達 民艱實可哀 | 관청이 머니 어찌 능히 알리랴? 백성들의 고달픔 참으로 슬프구나! |
秋來又奔走 嶺上別星廻 | 가을 와서 또 다시 분주하건만 고개 마루 위에는 관리의 행차. |
「우계(羽溪)에서[羽溪]」, 李秉淵, 『槎川詩選批』 卷下
첫 번째로 인용된 홍세태의 시는 어느 강가 마을에서 뱃사람과 있었던 일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얼음이 녹아 넘실대는 강물과 노 박자에 맞춘 구성진 노랫가락, 그리고 뱃사람의 말을 간결하게 연결시켰다. ‘곡식 사러 지금 부안으로 떠나면, 삼월 꽃 필 때나 올라올지 모르겠다’는 뱃사람의 말은 생활인으로서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먹고살기 위해 오랜 기간 가족들과 떨어져 먼 곳을 오가야 하는 애달픈 처지를 보여준다. 덤덤했을 뱃사람의 어조가 오히려 애상감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로 인용된 조정만의 시는 저물녘 어느 농가에서 유숙했던 경험을 적은 것이다. 조정만은 저물녘부터 밤까지 있었을 많은 일들 가운데 아전이 다녀간 뒤 탄식하는 늙은 농부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세밀한 상황묘사를 배제하고 툭 던져놓은 늙은 농부의 말을 통해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통, 그것을 연민하는 작가의 마음, 불평한 조세 집행에 대한 비판의식 등을 담아내었다.
세 번째로 인용된 이병연의 시는 삼척의 어느 마을에서 노인과 있었던 일을 적은 것이다.
노인은 작황의 상황을 알리고 이병연은 그들의 처지를 연민하였다. 호환이며 병충해로 한 해 농사가 걱정인데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관리들의 행차를 병치시키며 백성의 고달픈 삶을 형상화하였다.
세 작품은 모두 백성의 목소리를 시에 직접 드러냄으로써 민생의 현주소를 사실적으로 사생하였다. 제시된 백성의 목소리는 민생의 고단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현장의 모습을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고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근체시에서 이렇듯 백성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구사하였다. 애민시 계열의 시가 장편 고시 형식을 활용함에 비하여 위 작품들은 백성의 비판적 목소리를 직접 보임으로써 짧은 시형으로도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는 백악시단의 애민시가 거둔 의미 있는 성취라 할 수 있다.
한편, 天民이 고통 속에 신음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의식은 천민을 사지로 내몬 주체, 즉 현실 기득권에 속하는 자기 계급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열일곱 번째(其十七)
前官載太重 後官庫無積 | 전임 관리 쓸어간 게 얼마나 심했던지 후임 관리 창고에는 남은 게 없네. |
不知重記時 能無面發赤 | 모르겠네, 인수인계 할 적에 낯바닥 붉어지지 않을 수 있을는지. |
「갈역잡영(葛驛雜詠)을 이어 또 짓다[又賦]·17」,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11
海州多石石無神 | 해주의 많은 빗돌, 허나 돌에 무슨 신명 있다고 |
力盡年年曳石民 | 해마다 죽을 힘 다해 빗돌 끄는 백성들. |
衰草夕陽多少碣 | 시든 풀섶 석양 아래 허다한 비석들 |
前名磨滅後名新 | 앞선 이름 갈아내고 뒷사람 이름 새로 팠네. |
「선정비(善政碑)」, 李秉淵, 『槎川詩選批』 卷下
사대부는 왕과 백성 사이에서 왕화(王化)를 보좌해야할 책무를 지닌 존재였다. 그렇기에 사대부는 부단한 학문탐구와 철저한 자기수양을 사회적 역할로 공인받았다. 그러나 김창흡의 눈에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대부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시키고 권력을 부지하기 위해 현실의 부조리를 생산하는 주범이었다. 삼대(三代)의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던 고원한 이상은 기득권 보존의 방패막이로 변질시킨 채 선비라는 자들이 사사로운 욕망을 위해 온갖 횡포를 자행하는 현실, 김창흡은 이러한 현실을 묵과할 수 없었다. 김창흡은 「갈역잡영」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한 면면을 가차 없이 고발하고 비판하였다.
첫 번째로 예시한 시는 김창흡의 「갈역잡영」 가운데 수령들의 비리를 폭로한 작품이다. 김창흡은 목민(牧民)해야 할 관리가 자기 욕심 채우기에 급급하여 염치마저 내던진 장면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전임 수령이 체임되면서 관아의 물건을 몽땅 쓸어가 후임 수령이 고을살이에 쓸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을 두고, 김창흡은 ‘그러고서도 낯바닥이 붉어지지 않을 수 있겠냐’며 비판하였다. 최소한의 염치마저도 나 몰라라 팽개치는 수령에 대해 김창흡이 가차 없이 조롱하고 야유한 것이다. 김창흡의 「갈역잡영」 가운데 현실세태를 비판한, 그 가운데서도 자기 계급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한 작품들은 위 작품처럼 시가 지녀야할 우아함 내지는 서정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오히려 추악한 현실을 여과 없이 노출시키고 자신의 비판적 사유를 직접 개진하는 방식을 통해 전에 없이 첨예한 미감을 창출한다. 김창흡의 「갈역잡영」이 보인 이러한 미감은 후대 서얼문인들의 호응을 받아 하나의 시풍으로 발전하였으나 보수적 문학관을 지닌 문인들에게는 비판을 사기도 하였다【정조는 김창흡의 시가 보인 세계인식에 대해 충화(沖和)하고 평담(平淡)한 기상이 전혀 없다며 후생들이 절대로 배워서는 안된다고 하였고, 심노숭은 김창흡의 시풍이 초림체(椒林體)의 연원이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Ⅴ장에서 상세히 논하였다.】.
두 번째로 예시한 작품은 이병연이 배천군수로 재임할 당시 지어진 것이다. 선정비(善政碑)는 목민관의 은혜와 교화를 감사하게 여기는 백성들이 그 덕치를 기려 자발적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정비 건립은 목민관에게 대단히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선정비는 개인적 영예를 탐하는 수령에 의해 백성을 위협하거나 자신의 재물을 들여 억지로 건립되는 예가 적지 않았다. 영조조에 박문수는 역대 평양감사들의 생사당(生祠堂)과 선정비(善政碑)가 부지기수로 건립되어 있는데 감사에게 아첨하기 위해 군민(軍民)을 동원하여 건립한 생사당과 선정비는 폐단이 크므로 선정비를 모두 대동강에 빠뜨리고 사당의 화상들을 철거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文秀曰: ‘臣過平壤時見之, 則前後監司之生祠堂、善政碑, 不知其數. 大抵監司之治不治, 姑舍之, 惟以媚悅爲習, 收斂軍民, 其費、其弊罔有紀極. 今之爲監司者必沈其碑於大同江, 且去其畫像, 然後民習方正矣.’ -『承政院日記』英祖 11년 1월 3일 入侍 기사】. 이병연의 작품 또한 선정비를 통해 기득권층의 탐욕을 비판하였다.
시의 전반부는 선정비로 사용될 돌을 나르느라 죽을 고생을 하는 백성들을 그렸다. 해주는 해주석(海州石)이라는 이름난 돌의 산지이다. 그런 까닭에 해주의 돌은 권세가들의 영예를 치장하기 위해 동원되기 일쑤였다. 해마다 무거운 빗돌을 옮기느라 죽을 고생을 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이러한 사정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러한 수탈상을 제시하면서 권세가들의 탐욕을 비판한다. 해주석이라는 이름을 좇아 백성들만 고달프게 하는 상황을 ‘돌이면 다 같은 돌이지 해주석이라고 특별한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라며 기득권층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시의 후반부에는 빗돌을 나르느라 죽을 고생을 하는 백성들의 모습 위로 빼곡히 늘어선 선정비의 모습을 포개었다. 이병연이 이러한 시상을 구성한 것은 선정비가 지닌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시인의 눈에 빼곡히 늘어선 선정비는 ‘선정(善政)’이란 명칭과는 상반되게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정(惡政)의 증거물들인 셈이다. 더구나 앞선 사람의 이름을 갈아내고 새로 자기 이름을 새긴 빗돌은 힘 있는 자들의 허위와 몰염치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이병연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장면을 겹쳐 보여주는 방식으로 신랄한 비판의식을 드러냈다. 이병연의 이 시는 관리들의 치적으로 자랑되는 선정비가 얼마나 허위에 찬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유사한 시편을 쉽사리 발견할 수 없다. 선정비라는 민감한 제재를 포착하여 선정비가 곧 악정비라는 도발적 비판의식을 드러낸 이 작품은 고달픈 민생의 현장에 밀착하지 않고서는, 또 부조리의 주범인 자기 계급에 대한 뼈저린 반성 없이는 쉽사리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양반 기득권층을 신랄하게 질타한 김창흡과 이병연의 시편은 애민정신의 연장선에서 시가 지녀야 할 사회적 역할과 시적 주체가 지녀야 할 현실인식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백악시단이 고통 받는 민생을 형상화한 작품을 살펴보았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을 천민(天民)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현장에 한 발 더 밀착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이 직면한 부조리한 현실을 보다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들의 시편 속에 그려진 백성들은 악부시의 전통을 빌린 ‘베 짜는 아낙’과 같은 관념적 백성이 아니었다. 당대 조선이라는 현실의 시공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실존적 백성들이었다. 정강이가 깨진 채 찬 물을 건너야 했고, 새끼줄 하나에 목숨을 건 채 천심절벽에 매달려야 했던 그런 백성들이었다. 이상의 시편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민생의 현장은 애민(愛民)해야 한다는 당위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장면들이다. 백성의 삶을 바라보는 진실하고도 따뜻한 시선, 이것이 당대 백성들의 삶을 시 속에 생생하게 재현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게 한 힘이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민생을 대하는 두 번째 태도는 백성들의 삶에서 천민(天民)의 자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들의 삶에서 순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참된 인간상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백성의 삶에서 참된 인간상을 그려낸 작품들은 이른바 전통적인 “애민시”와 비교할 때 민생을 대하는 인식의 변화를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선 시편들에서 살펴본 대로 애민시의 기본 구도는 백성을 현실의 질곡 속에서 좌절하고 눈물짓는 연약한 존재로, 작가는 그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하는 존재로 설정한다. 애민시의 이러한 구도는 백성들의 삶을 작품 전면에 부각시키지만, 정작 방점은 백성들의 삶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의식에 놓이게 한다. 즉, 애민시 속 백성의 삶은, 그것이 진지한 의식의 산물임에도, 여전히 사대부 자신들의 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존재한다.
반면, 두 번째 입장에서의 형상화는 그들이 백성들의 삶에서 발견한 참된 인간상을 현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사가 전면으로 노출될 필요가 없다. 다만 작가의 의식은 과연 어떤 모습에 참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형식으로 작품 외부에 존재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백성의 삶을 참된 인간의 삶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은 백성들을 수동적 경물이 아닌 능동적 주인공으로 부각시킨다. 이제 실제 작품을 통해 그 특징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이 만난 백성들을 따뜻한 인간애의 소유자로 형상화하였다.
有何嗤嗤叟 蒸薪卽山谷 | 어떤 어수룩한 늙은이 나무하러 산골짜기 찾아들어선 |
綢繆爲一束 拉雜松與栢 | 창창 감아 한 다발 만들었는데 꺾은 것은 잡다한 솔과 잣가지. |
來歸川上息 沈吟聊濯足 | 돌아오다 냇가에 잠시 쉬는데 흥얼흥얼 노래하며 발을 씻는다. |
濯足且徐徐 下見川魚躍 | 발을 씻다 또 천천히 뛰노는 고기를 굽어보다 |
捉鯉大如手 筐盛何濯濯 | 팔뚝만한 잉어를 잡으니 광주리에 한가득 얼마나 싱싱한가! |
有薪供釜鬵 歸共兒女食 | 땔감 있으니 가마솥에 불을 지펴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먹겠지. |
行路之好者 謝爾山澤樂 | 행로의 선한 사람이여 산택락(山澤樂) 보여 준 것 감사드리오. |
「땔감을 진 노인이 냇가에서 쉬다가 물고기를 잡아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見負薪叟息于川上捕魚而歸]」,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1
김창흡의 이 시는 땔나무 지게를 벗어둔 채 어떤 노인이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보고 쓴 시이다. 김창흡은 노인의 모습을 ‘치치(嗤嗤)’하다고 형용하였다. ‘치치(嗤嗤)’는 엉성해보고 우스워 보이는 모양새를 말한다. 그런 노인이 땔나무를 지고 오다 냇가를 만나자 지게를 벗고 발을 씻는다. 그러다가 물을 굽어보더니 이내 팔뚝만한 잉어를 낚아챈다. 김창흡이 본 모습은 여기까지이다. 김창흡은 이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연상을 이어간다. 땔감도 마련했고 물고기도 잡았으니 집에 가면 가마솥에 팔팔 끓여서 아내와 자식들과 별미를 즐기겠지. 그리고는 여행길에서 이렇게 순박한 삶을 살아가는 노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감사할 일이라며 시상을 마쳤다. 이 시는 노인을 어수룩해 보이지만 따뜻한 가족애를 지닌 인물로 형상하였다. 물론 가족과 함께 하는 장면은 김창흡의 상상이므로 이 노인이 실제 그렇게 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창흡이 이런 산수간 백성으로부터 참된 인간상을 떠올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창흡은 이 노인을 ‘길 가던 선한 사람[行路之好者]’이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들의 질박한 삶 속에서 참된 인간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백악시단 문인들의 눈에 비친 백성들은 넉넉하진 않지만 그래도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農家養牛堗 木落已可愛 | 농가의 쇠죽 끓이는 아궁이 잎을 떨군 나무지만 그래도 좋구나. |
主人留我宿 囑婦時向內 | 주인은 나를 잡아 하룻밤 묵게 하고는 아내를 재촉하며 자꾸 안을 쳐다보네. |
燈前送大梨 一擘淸火肺 | 등불 앞엔 보내온 커다란 배 한번 쪼개 베어 무니 불같던 속이 시원하구나. |
俄怪盤中珍 捕魚仍摘菜 | 이윽고 쟁반의 진미 무언가 했더니 막 잡은 물고기와 갓 뜯은 산나물. |
自從峽中行 往往看眞態 | 골짜기를 따라 여행한 이래 때로 이런 참된 모습 보게 되었지. |
鞍馬一宵稳 邂逅情可佩 | 편안히 하룻밤을 보내고 말에 오르니 해후의 정 간직할 만하네. |
拂曙還相辭 依依嶺月在 | 새벽에 일어나 서로 인사하는데 봉우리엔 희미한 달 남아 있구나. |
「창도역에서[昌道驛]」, 李秉淵, 『槎川詩抄』 卷上
이병연의 이 시는 창도역(昌道驛) 인근의 어느 농가에서 하루를 유숙하게 된 일을 형상화하였다. 이병연은 주인 내외를 다정다감한 인물로 형상화하였다. 늦었으니 하루 자고 가라고 만류하는 주인의 모습이며, 뭐라도 얼른 내오라는 남편의 재촉에 우선 급한 대로 배를 챙겨 보내고,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저녁을 준비한 아내의 모습은 참으로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모습들이다. 이병연은 이런 주인 내외의 모습을 ‘진태(眞態)’라고 하였다. 이하곤은 자신의 「동유기」에서 “저녁에 횡성읍에서 유숙하였다. 주인의 성명은 신인방인데 일찍부터 농촌에 살았다고 한다. 대접이 매우 정성스러웠다.”【夕宿橫城邑底, 主人姓名申仁方, 曾住農村云. 待之甚欵. -李夏坤, 『頭陀草』책14 「東遊錄」】라며 백성이 베풀어준 호의를 기록한 바 있는데, 이병연의 이 작품은 백성에게서 입은 호의를 시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길 위에서 만난 백성들의 호의를 깊이 감사했던 이병연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一鷄二鷄鳴 小星大星落 | 첫닭 울고 둘째 닭 울더니 작은 별, 큰 별 떨어진다. |
出門復入門 稍稍行人作 | 문을 들락거리며 조금씩 행인은 채비를 하네. |
客子乘曉行 主人不能遣 | 나그네 새벽 틈타 떠나렸더니 주인은 그냥 보내질 않네. |
持鞭謝主人 多愧煩鷄犬 | 채찍 쥐고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니 닭과 개만 괜스레 번거롭게 했구나! |
「일찍이 나서려다[早發]」, 李秉淵, 『槎川詩抄』卷上
이 시는 주인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몰래 길을 나서려다 닭 울음, 개소리에 주인이 깨고 말았다는 해프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백성의 호의에 진정 감사할 줄 아는 작가의 마음씨와 아직 잠도 덜 깼지만 그냥 가면 안 된다며 아침밥을 서두르는 백성의 온정이, ‘이럴 줄 알았으면 서둘지 말아 너희(닭, 개)들 잠이나 깨우지 말 걸’하는 우스개 속에 참으로 정겹게 그려진 작품이다. 이병연의 두 편의 시는 백성들을 따뜻한 온정을 지닌 진정한 교감의 대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권섭 또한 백성에게서 입은 호의를 장편의 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稷山見日出 水原見日沒 | 직산에서 일출을 보았는데 수원에서 일몰을 보게 됐네. |
悠悠百里間 盡日行不息 | 멀고 먼 백 리 길을 온종일 쉬지 않고 걸음 했는데 |
雲陰天欲雨 晩後風益急 | 구름은 어둑해져 금세 비가 올 듯하고 저문 뒤라 바람은 더욱 세차니 |
黃埃亂撲面 薄綿寒徹骨 | 누런 먼지 흩날리며 얼굴을 치고 얇은 옷에 한기(寒氣)가 뼛속까지 파고드네. |
停轡問宿處 躊躇衢路側 | 말을 멈추고 묵을 곳을 물을 양으로 큰 거리 곁에서 서성이는데 |
官童見我拜 奔走借隣屋 | 관가 동자 나를 보고 인사하고는 근처 집을 빌리려 분주하건만 |
柴門拒不啓 勃磎饒婦舌 | 거절하며 사립문 닫아건 채로 내뱉는 아낙의 혀는 불어난 냇물 같구나. |
童遂目主人 申申謂語曰 | 관동이 마침내 주인장을 보고는 거듭거듭 간청하며 하는 말이 |
此客君莫嗔 權侯是其叔 | “이 손을 아저씨 마다 마셔요. 권후께서 이 분의 숙부랍니다.” |
侯恩詎可忘 我生伊誰力 | “권후의 은혜를 어찌 잊으랴? 내가 이리 사는 게 누구 덕인데.” |
主人始解顔 趍來謝僕僕 | 주인은 비로소 안색을 풀고 허둥지둥 달려와 사과하고선 |
擁篲掃其室 慇懃請我入 | 비를 들고 묵을 방을 쓸어낸 뒤에 정성스레 내게 들라 청을 하누나. |
入此且少休 藉背宜溫突 | 방에 들어 잠시 쉬자니 등을 붙인 온돌은 뜨듯해지고 |
呼兒喂馬飽 喚孃烹鷄熟 | 사내아이 불러선 말 먹이라 시키고 여자아이 불러선 닭 삶으라 시키더니 |
持盤勸我餐 發瓮要我酌 | 소반을 직접 들고 잡수시라 권하고 술동이 꺼내어선 한 잔 올리겠다고 원하네. |
飢腸好醉飫 大寢頗穩適 | 주린 창자 호사롭게 취하도록 실컷 마시고 잠자리도 대침(大寢)처럼 편안 했으니 |
深情荷主人 頓忘行李惡 | 주인의 깊은 인정 덕분에 잠시나마 여행길 고생을 잊었다네. |
「수원에 도착하여[水原行]」, 權燮, 『玉所稿』 「詩·1」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 거리를 달려와 춥고 배고픈 권섭이 잘 곳을 찾고 있는데 화자를 알아보는 관동이 나타난다. 관동은 권섭을 대신하여 잘 곳을 알아보는데, 인근 집의 안주인은 냉정하게 거절하며 수다스럽게 불평을 늘어놓다. 말이 안 통해 곤혹해하던 관동은 집주인을 만나 권섭이 전 수원부사였던 권상유【권상유(權尙游)는 권섭의 숙부였다. 그는 1703년 수원부사가 되어 관리의 비행을 숙정(肅正)하는 치적을 남겼는데, 이에 대해 이의현은 “계미년(1703)에 금직(禁直)에서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발탁되었다. 막 부임하여 비리를 귀신처럼 적발하자 관리와 사람들이 놀라 움츠러들었고 도둑이 뿔뿔이 흩어져 경고(更鼓)를 치지 않아도 일체 잘 다스려졌으므로 정사의 명성이 크게 전파되었다[癸未, 自禁直擢拜水原府使. 始至, 發奸如神, 吏人讋伏, 盜賊散落, 桴鼓弗警, 一切治理, 政聲大播. -李宜顯, 『陶谷集』 권10 「吏曹判書權公神道碑銘」]라고 기록하였다.】의 조카임을 알린다. 권상유의 은혜를 잊지 않았던 집주인은 이내 사과를 하고 후한 대접을 베풀었다. 쌀쌀맞던 집주인이 전임 부사의 조카라는 말에 호의를 베푸는 장면은 시적이진 않지만, 그래서 더 사실적이다. 권섭은 손수 묵을 방을 청소하고 뜨듯하게 온돌을 데우며, 말을 먹이게 하고 닭을 삶게 하며, 손수 소반을 들고 들어가 술을 권하는 장면을 제시하여 집주인의 정성을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대침(大寢)’이란 시어를 통해 자신이 왕 같은 대접을 받았다며 깊은 감사를 표하였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시화(詩化)한다는 의식으로 인해 시상의 전개는 다소 매끄럽지 못하지만, 오히려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서의 사실성이 잘 발휘된 작품이다.
한편, 민생(民生)은 활기차고 풍요로운 것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秋田稻熟蟹如流 | 가을 들녘 벼가 익고 게들도 쏟아지니 |
生事江鄕百不憂 | 강가 마을 먹고 살 일 무엇 하나 걱정이 없네. |
上水女商爭操筏 | 물가의 아낙들은 다투어 뗏목 젓고 |
近湖童穉盡能游 | 강가의 아이들은 모두가 수영 선수. |
「두월정 옛터에 새로 연 주가(酒家)의 벽에 쓰다[題斗月亭舊墟新開酒家壁]」, 申靖夏, 『恕菴集』 권2
千燈截罾笱 入夜灘聲疎 | 등불 켜고 그물 통발 잘라 만드니 밤 되자 여울 소리 잦아드네. |
漁子喧相語 吾魚多爾魚 | 낚시꾼들 시끌벅적 서로 말하길 “내 고기가 네 것보단 훨씬 많지?” |
「원생을 위해 農菴에서의 여덟 가지 경치를 읊다[農菴八咏爲元生作]」 중 「광탄에서의 고기잡이 불[廣灘漁火]」, 權燮, 『玉所稿』 「詩·1」
潑潑靑魚龍島春 | 풀떡풀떡 청어 뛰는 용도(龍島)에 봄이 오니 |
巨網揮來擁萬鱗 | 큰 그물 내던져서 온갖 고기 끌어 잡네. |
伐鼓東歸覺船重 | 북 울리며 동쪽으로 가니 배가 묵직해짐 알았는지 |
兩村牛馬挾平津 | 두 마을 우마들이 평진(平津)을 둘러쌌네. |
「장삿배(商舶)」, 金時保, 『茅洲集』 권7)
세 작품 모두 백성들의 활기차고 풍요로운 삶을 형상화한 것이다. 신정하의 작품은 들판에 벼가 익고 강에는 게가 풍성하여 아낙들도 뗏목을 저어 게를 잡으러 가고 아이들은 헤엄을 치며 게를 줍는 모습을 그렸다. 아낙들이 다투어 뗏목을 젓는 장면과 능숙하게 헤엄을 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활기 넘치는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권섭의 작품 또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그렸다. 등불 아래서 통발을 만든 뒤에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았는데, 마지막 구에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잡았지?’하며 자랑을 하는 백성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한밤 통발낚시의 신바람을 느낄 수 있다. 김시보의 작품은 봄을 맞아 배들이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모습을 그렸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가는 포구에 물고기를 실어갈 우마들이 나루를 빙 두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풍요로운 분위기를 극대화화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포착한 백성들의 풍요롭고 활기찬 모습은 모두 수확의 기쁨과 관련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항산(恒産)에 대한 시적 해석이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민생에 대한 밀착된 시선은 생산 현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놀이문화 또한 시적 대상이 되었다.
橫馳直擣一場驚 | 가로 질러 바로 쳐서 한바탕 놀랐더니 |
急呼將軍大呌聲 | 재빠르게 “장이야” 큰 소리로 외치네. |
詭計奇謀千百道 | 위장 계책 기발한 꾀 천만 가지 방법으로 |
妙收殺處智何明 | 절묘하게 죽을 곳 피해가니 지략이 어찌 그리 환한고? |
何人安坐幾人驚 | 누구는 편히 앉고 몇 사람은 놀란 채로 |
逐坐隊分未大聲 | 자리 따라 편 나누고 숨을 죽이니 |
誰快勝乎張爾手 | 통쾌한 승리는 누구 것인가 “패를 까보게.” |
彼張手處此瞳明 | 저 쪽에서 패를 깔 적 이 쪽 눈동자 커지네. |
「아이들이 ‘경(驚)’자 운을 써서 바둑에 대해 읊었기에, 이 늙은이도 장난삼아 네 가지 잡기에 대한 시를 쓰다[兒輩用驚韻咏碁, 老夫亦戱題仍題雜技四詩]」, 權燮, 『玉所稿』 「詩·9」
권섭은 바둑, 쌍륙, 장기, 투전의 네 가지 놀이에 대해 시를 썼는데, 위에는 장기[博]와 투전(投錢)에 관한 시를 제시하였다. 장기를 형상화한 첫 번째 시는 공격과 방어가 일진일퇴하는 치열한 대국의 모습을 현장 중계하듯 그려냈다. 투전을 형상화한 두 번째 시는 승패를 가름하는 마지막 순간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다. 두 시 모두에서 화자의 위치는 놀이의 현장에 있다. 첫 번째 시에서 “장이야!”를 호기롭게 부르자, 절묘한 지략으로 장을 받아치는 장면이나, 두 번째 시에서 죽을 사람은 이미 다 죽어 둘만 남은 상황에서 상대가 패를 까자 눈동자가 커지는 장면은 현장의 분위기를 대단히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다. 권섭의 이 시가 주목되는 것은 네 수의 연작 어디에도 이런 놀이에 대한 훈계식 논설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백성들의 놀이문화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인식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놀이와 관련하여 아래 이병연의 시 또한 주목을 요한다.
丙戌端陽節 嘉陵郡府前 | 때는 병술년 단양절이요 곳은 가릉군 관아 앞이라. |
闢塲初爽塏 傾巷早喧闐 | 마당을 여니 툭 트여 상쾌한데 온 마을이 아침부터 시끌벅적. |
始事圍高柳 頻摩似昨年 | 먼저 주위의 높은 버들을 부지런히 문질러 작년처럼 만들고 |
緣柯推勇敢 擲索縛牢堅 | 가지를 타고 용감하게 올라서는 던진 줄을 가지에 튼튼하게 동여매네. |
取蕩承旁蔓 貪高壓上巓 | 널찍하게 덩굴풀까지 이어지게 하고 높다랗게 산꼭대기에 닿게 했네. |
雙攀堪自擧 一縱若無緣 | 두 줄 잡으면 저절로 올라가서 한 번 놓으면 걸릴 것 없다네. |
裊弱先登㥘 飄颻仰望懸 | 가늘어서 먼저 오르긴 겁이 나 바람 속에 흔들리는 그넷줄만 쳐다보네. |
始催村少試 俄嬲里娘牽 | 시골아이 재촉하여 타보게 하고 조금 있다 장난치며 동네 처녀 끌고 가네. |
慣此風流戱 看他結束便 | 이런 풍류 섞인 장난에 익숙하기에 저 결속의 편리함도 볼 수 있구나. |
穿裁衫不扡 短作袖仍褰 | 잘 지어 만든 치마 날리지 않는데 짧게 만든 소매는 연신 나풀거리네. |
(中略) | (중략) |
踏板纔軒舃 鳴繩乍響拳 | 구름판을 구르자 곧 추녀까지 신발이 오르는데 그넷줄 갑자기 찌걱대자 손을 꼭 쥐네. |
莫言人挽送 終見自騰騫 | 남들더러 밀지 말라 말을 하더니 마침내 스스로 높이 차고 오르네. |
急引腰微擺 中張手政弦 | 급하게 끌 적에는 허리가 조금 흔들리더니 중간에 풀 적에는 손이 꼭 활 같구나. |
忙奔劈風箭 勇退急流船 | 빠르게 차오를 땐 바람을 가르는 화살 같고 용감하게 뒤로 갈 땐 급류 속 배 같구나. |
蹴處如相賤 蹲時學屢躚 | 차는 곳에선 미워하는 듯하고 웅크릴 땐 춤사위를 배우는 듯 |
飜來疑自墮 却上若難旋 | 뒤집혀 올 적에는 떨어질까 싶더니 도리어 차고 오르니 돌리기 어려울 듯. |
(中略) | (중략) |
極態低昂裏 生姿引却邊 | 오르락내리락 모양이 지극하고 끌었다 놓았다 맵시가 생겨나네. |
兼飛抱成㝈 末勢坐猶翩 | 나란이 껴안고 날아오르니 마지막엔 앉아도 날아오르네. |
逞手頻挼葉 傾巾或抓烟 | 신이 난 손은 자주 나뭇잎을 스치고 기울어진 두건은 혹 연기를 움키네. |
屢驚非揷羽 還道暫登仙 | 날개가 달렸나 자주 놀라고 도리어 잠시 신선이 되었다고들 하네. |
自得應如此 傍人倍悵然 | 스스로 터득함이 이와 같지만 곁에 사람들 갑절이나 걱정하네. |
送眸咸寂默 匝立漸團圓 | 숨죽인 채 눈동자만 그네에 맞추고 여기저기 섰던 사람 점차 둥그렇게 모였네. |
欲落愁平地 回看渺舊躔 | 내리려니 평지가 근심스럽고 돌아보니 지난 궤적 아득하구나. |
(後略) | (후략) |
「그네뛰기 40운[鞦韆四十韻]」, 李秉淵, 『槎川詩抄』 卷上
이병연은 그네뛰기를 40운이나 되는 장편으로 형상화하였다. 때와 장소, 그네의 설치, 그네 뛸 처녀 선정, 그네 뛰는 장면 등을 대단히 사실적이면서도 심미적으로 그렸다. 그네뛰기를 이렇듯 상세하고 생동감 있게 그린 작품은 찾기 어렵다. 가령, 그네를 차고 오를 때 허리를 굽히며 힘을 쓰는 모습을 ‘요미파(腰微擺)’라고 표현하거나, 발을 구르려고 웅크린 모습을 춤사위를 배우는 듯하다고 표현한 것[蹲時學屢躚], 그네가 최절정에 올랐을 때의 아슬아슬함을 숨을 죽인 채 눈동자만 그네를 따라 움직이는 것[送眸咸寂默]과 이리저리 흩어졌던 사람들이 어느새 둥그렇게 그네 틀 주위로 모이는 것[匝立漸團圓]으로 형상화하는 것 등은 이 시가 보인 문학적 형상화의 예라 할 수 있다. 이병연은 이 그네뛰기 놀이를 좋은 때의 즐거운 놀이로 인식했다[良辰眞一樂]. 이병연 또한 권섭의 경우처럼 백성들에게 있어 놀이가 가지는 의의를 십분 공감했던 까닭에 그들이 즐기는 놀이의 하나를 이렇듯 생생한 시편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또한 민생에 밀착된 시선은 향촌민의 독특한 삶의 모습을 시로 형상화하게 하였다. 이해조는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로 파견되었을 당시 자신이 목도한 제주의 산천과 풍속을 60운의 장편시로 남겼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石垣仍板屋 照里雜鞦韆 | 돌담에 둘린 판자집 조리놀이 그네뛰기 놀이 |
土堀寒無堗 茅茨亂不編 | 토굴엔 추워도 온돌이 없고 띠집 지붕 흩어져도 묶지를 않네. |
黃柑常抵鵲 朱橘不論錢 | 황감(黃柑)은 늘 까치가 먹고 주귤(朱橘)은 돈값어치를 따지지 않네. |
負桶民風是 踏田土性然 | 나무통을 지는 건 민풍이 그래서요 밭을 밟는 건 땅의 성질이 그래서라. |
富無如雍伯 壽或近彭籛 | 재산은 옹백(雍伯)같은 이가 없는데 나이는 곧 팽조에 가깝네. |
擣臼杵歌苦 迎郞棹曲傳 | 절구 찧은 방아노래 구슬프고 낭군 맞는 뱃노래가 전해오네. |
黃童皆佩劍 華髮尙彎弦 | 어린 애도 모두 다 검을 차고 늙은이들 아직도 활시위를 당기네. |
重女輕生子 無科貴備貟 | 여자를 중시하여 아들 낳기 경시하고 과거가 없으니 아전이 영예라네. |
「60운으로 지어 섬의 산천과 풍속을 기록하다[賦六十韻記島中山川風俗]」, 李海朝, 『鳴巖集』 권3
인용한 부분은 제주 가옥의 특징과 민속놀이를 말한 대목이다. 이해조는 이 부분의 주석에서, “촌가는 돌을 주워 담을 만들고 진흙을 바르지 않는다. 팔월 보름이면 남녀들이 함께 모여 가무를 즐기는데 조리 놀이를 하기도 하고 그네를 뛰기도 한다[村家聚石築垣, 不塗泥. 八月望日, 男女共聚歌舞, 設照里戱, 又作鞦韆戱].”라고 하였다. 이어 토굴에는 온돌이 없고, 띠집 지붕은 묶지 않는 특징과 황감(黃柑)은 천시되고 주귤(朱橘)이 귀한 점, 나무로 만든 허벅을 지고 말과 소로 밭을 밝게 한 뒤 파종을 하는 등 제주민의 특징적인 삶의 모습을 담아냈다【이 부분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촌가는 토굴을 쌓는데 방돌(房堗)이 없고 띠를 덮긴 하지만 묶지는 않는다. 남녀는 모두 나무통을 지는데 머리에 이지는 않는다. 땅의 성질이 날리고 건조하여 우마를 몰아 밭을 밟게 한 다음 비로소 파종을 하는데 이를 ‘족답(足踏)’이라 한다[村家築土堀, 無房堗, 覆茅而不編結. 男女皆負木桶而不戴. 土性浮燥, 故驅牛馬踏田, 始播種謂之足踏].”】.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제주민의 특징을 말하였다. 큰 부자는 없어도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여성들의 노동요와 낭군맞이 노래에 대해 언급하였다【이 부분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섬사람들은 대개 수를 누리지만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는 없다. 노역하는 일은 항상 여인 네댓 명을 모아서 한다. 절구 하나를 함께 찧으면서 반드시 방아노래를 부르는데 음조가 대단히 처량하고 구슬프다. 촌의 여인은 베필 있는 사람이 드물다. 매해 삼월이면, 곱게 꾸미고 포구로 방군(防軍)을 맞이하러 갔다가 자기 집에 이르도록 낭군 맞이, 낭군 전송 노래를 지어 부른다[島人多壽, 而無素封者. 勞役之事, 皆使女四五作隊, 共擣一臼, 必發相杵之歌, 音調甚悽苦. 村女鮮有伉儷, 每歲三月, 盛粧迎赴防軍於浦上, 引至其家, 作迎郞送郞曲].”】. 그리고 다음 대목에서는 섬사람들의 상무적 특성과 여자 중시를 중시하는 습속, 그리고 과거가 없어 아전이 영예롭게 대접받는 상황에 대해 말하였다【이 부분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섬에서는 적을 응대하는 데 익숙하여 관속과 촌민, 어린이도 모두 검을 차며 머리 하얀 노인도 강한 활을 당길 수 있다. 섬사람은 고기잡이에 종사하는데 바다를 가까이 하기 때문에 대개 물에 빠져죽는다. 그런 까닭에 여자 낳는 것을 중하게 여긴다. 도성이 멀리 떨어져 있어 과거를 보아 벼슬하기가 어려워 모두 관아의 집사를 영예로 여긴다[島中習於應敵, 官屬、村民、未壯皆帶劍, 皤皤者能彎强弩. 島民事漁, 狎海多溺死, 故以生女爲重. 京城隔遠, 難於科宦, 皆以執事官衙爲榮].”】.
이 시는 이처럼 제주민의 특이한 생활상을 하나하나 시로 적고 시구마다 주석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붙였다. 이를 통해 독자는 시를 읽으면서 제주에 대한 풍속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이해조가 시와 산문을 결합하는 형상화 방식을 구사한 것은 제주의 풍속이 주석을 붙여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해조는 제주가 아닌 곳에서도 시와 산문을 결합하는 형상화 방식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상화 방식은 제주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관풍찰속해야 하는 어사의 직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해조가 보다 상세한 정보 전달이 가능한 산문 말고 시를 통한 형상화를 선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이해조가 시가 지닌 심미적 형상성에 대해 남다른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용된 시와 주석을 다시 읽어보자. 그러면 독자는 상세한 주석으로부터 풍부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하게 된다. 이런 재음미의 과정 속에서 특징만을 간략히 진술한 시구들은 하나의 이미지로 전화된다. 이해조는 바로 시가 지닌 간결하고 선명한 이미지 창출 능력을 이처럼 활용했던 것이다.
백성들의 풍속을 읊은 백악시단의 작품들은 이 밖에도 다수 확인된다. 가령, 이하곤은 「장난삼아 오체(吳體)로 본주[전주]의 풍속과 토산에 대해 쓰다[述本州風俗土産戱爲吳體]」라는 시에서 “전주의 풍요함은 팔도에서도 드물어, 토속과 민풍이 도성과는 다르네. 머리 노란 추녀는 큰 다리를 비스듬히 올리고, 얼굴 하얀 날라리는 색동옷을 빼입었네. 주민들은 평량자(平凉子)를 즐겨 쓰고, 늘어선 가게마다 하얀 산자【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권26 「설부(說部)·5」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백산자(白散子)는 속명이 박산(薄散)인데 오직 전주에서만 만든다[白散子, 俗名薄散, 唯全州造之].”라고 하였다.】를 진열해 두었네. 생강 뿌리 절임이 가장 맛이 좋으니, 서울 나그네 처음 맛보고선 돌아갈 맘 잊을 정도.”【全州饒富八道稀, 土俗民風異京師. 醜女髮黃偏大䯻, 狡童面白更鮮衣. 居人愛戴平凉子, 列肆都排薄散兒. 薑鬚作葅味㝡美, 北客新嘗頓忘歸. -李夏坤, 『頭陀草』책9 「述本州風俗土産戱爲吳體」】라면서 전주 사람들의 스타일과 유행, 먹거리 등을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스스로 오체(吳體)라 밝혔듯, 시속의 어휘를 사용해가며 시인의 눈에 비친 전주의 특이한 풍속을 경쾌하게 담아내었다. 이병연 또한 「옹천으로 들어가[入甕遷]」라는 시에서, “팔을 걷고 매를 고르는 백령도, 맨몸으로 전복 따는 대청연. 돛단배가 때때로 등주 내주의 나그네를 떨구니, 통상하여 돈 만진 건 근년의 일이라네[袒臂調鷹白翎島, 赤身探鰒大淸淵. 風帆時落登萊客, 挾貨通啇自近年. -李秉淵, 『槎川詩抄』 卷下 「入甕遷」의 경련과 미련.].”라며 매와 전복을 중국 상인들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황해도 옹진군 백성들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이렇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들이 본 백성들의 특이한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였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시로 쓴 풍토지(風土誌)라 할 만하다. 이병연은 자기 시의 이러한 특징을 두고, “여지승람 중수(重修)할 땐 나의 문집 봐야 하리, 얻은 대로 시 지을 뿐 다시 깎지 않았다네[重修輿地須吾集, 隨得隨題不復刪].”【李秉淵, 『槎川詩抄』卷上 「雜詠」의 미련.】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민생(民生)을 형상화한 백악시단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을 천민(天民)으로 인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천민이 고통 속에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러한 현실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러한 시들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고발하고 거기에 작가의 비판 정신을 표출하였다. 이들의 애민시는 실제 현장에서 마주한 것을 형상화했기 때문에 악부시 전통의 관습적 애민시와는 달리 당대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며 진지한 비판 정신을 담아낼 수 있었다. 한편, 백성들의 삶에서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태도는 민생(民生)이 지닌 질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시편으로 형상화하게 하였다. 그 결과 참된 인간상의 발견으로부터 그들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민생의 다양한 모습이 생동감 있게 현현될 수 있었다. 백악시단이 민생을 형상화한 작품들은 산수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상과의 진실하고 깊이 있는 소통에 의해 그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들과의 진실한 소통을 위해 그들의 삶의 현장에 한발 더 다가섰고, 백성들의 삶에 밀착할수록 그들 삶의 다단한 국면들을 생생하고도 참신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요컨대 백악시단이 민생을 형상화한 시에도 대상의 ‘진(眞)’을 중시하는 그들의 논리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용
Ⅰ. 서론
Ⅱ.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Ⅲ. 진시의 기저와 논리
Ⅳ. 진시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Ⅴ. 진시의 시사적 의의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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