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시(眞詩)의 제창(提唱)과 복고파(復古派)·공안파(公安派)의 비판적 수용
일반적으로 한국 한시사에서 조선후기는 전대 복고파 문인들이 노정한 폐단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안대회, 앞의 책, 37면 참조.】. 임란을 전후하여 조선에 들어 온 명대 복고파의 문학이론은 창작물의 질적 고양을 갈망하던 조선 문인들에게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모범이 되는 전범[文必秦漢, 詩必盛唐]을 설정하고 그것을 학습함으로써 전범에 버금가는 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논리는 일견 개연성이 높은 매력적인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전범으로 삼은 텍스트의 구속은 역기능을 초래하였다. 시공간의 격차가 큰 텍스트는 그 시대의 어휘 사용, 표현 방법, 정서의 습득에 매몰되게 하였고, 그 결과 정작 추구하고자 했던 질박함과 진실함은 난삽하여 알기 어려운 질박함과 진실함이 되고 말았다. 전범 학습을 통한 창작의 결과가 이렇게 귀결되어가자 이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하였는데, 반성의 중심에는 바로 ‘가짜 시’가 아닌 ‘진짜 시’란 무엇인가 하는 창작의 본질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절에서는 백악시단의 문예담론을 중심으로 그들이 비판하고자 했던 복고파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이고 그러한 비판이 ‘진시(眞詩)’론(論)의 정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아래 김창협의 목릉(穆陵) 시단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상에서는 우리 조선의 시가 선조(宣祖) 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시도(詩道)가 쇠한 것이 실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선조 이전에는 시를 짓는 이들이 대체로 다 송(宋)나라의 시를 배웠기 때문에 격조가 대부분 전아하지 못하였으며 음률도 간혹 조화롭지 못하였지만 요컨대 또한 질박하고 진실하며 중후하고 노련하면서도 힘이 있었기에 겉치장을 하거나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서 각자 일가(一家)의 언(言)을 이루었다. 선조 때에 와서 문사(文士)가 많이 나오고 당나라의 글을 배우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으며 중국의 왕세정(王世貞), 이반룡(李攀龍)의 시도 차츰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비로소 모방하여 단련하고 정교하게 가공하게 되었으니 그 이후로는 문사들이 따르는 작법이 한결같고 음조가 서로 비슷해져서 천질(天質)이 더 이상 보존되지 못하였다. 이때 문에 선조 이전의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나 선조 이후의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좀처럼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시도(詩道)의 성쇠가 나뉘는 지점이다【世稱本朝詩莫盛於穆廟之世, 余謂詩道之衰實自此始. 蓋穆廟以前爲詩者, 大抵皆學宋, 故格調多不雅馴, 音律或未諧適. 而要亦疎鹵質實, 沈厚老健, 不爲塗澤艶冶, 而各自成其爲一家言. 至穆廟之世, 文士蔚興, 學唐者寢多, 中朝王ㆍ李之詩又稍稍東來. 人始希慕倣效, 鍛鍊精工, 自是以後, 軌轍如一, 音調相似, 而天質不復存矣. 是以讀穆廟以前詩, 則其人猶可見, 而讀穆廟以後詩, 其人殆不可見, 此詩道盛衰之辨也. -金昌協, 『農巖集』권34「雜識·外篇」】.
김창협은 당대(當代)의 통념을 반박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생각을 개진한다.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로 일컬어지는 시기는 조선조 한문학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시기로 언급될 만큼 빼어난 작가들이 배출되어 문학적 성가(聲價)를 드높인 때이다. 그러나 김창협은 이때부터 시도(詩道)가 쇠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진단의 핵심은 이 시기의 시들이 천질(天質)을 상실하여 시를 읽으면 작가의 사람됨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맹자의 상우론(尙友論)【誦其詩, 讀其書, 不知其人可乎?】에 근거한 이 발언은 작품과 작가, 독자를 아우르는 유가 전통의 문학론이기도 한 바, 김창협이 지향한 문학의 대체를 볼 수 있다.
김창협은 작가의 진면목을 작품에 진실하게 투영하는 문제를 창작의 요체로 인식하였다. 그 진실함이 전제되어 있을 때라야, 독자는 작품을 통해 작가의 진면목을 마주할 수 있고, 그런 시라야 참된 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선조대 작가들은 ‘격조가 전아하지 못하고, 음률도 조화롭지 못한’ 선조 이전의 작가들만 못한 반면, 선조 이전의 작가들은 형상화의 수준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문학이 지녀야 할 근본문제, 즉 문학의 진실성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조대 작가들보다 우위에 놓인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김창협의 문학적 지향이 문보다는 질, 표현이나 형상화보다는 작품에 녹아있는 작가의 높은 정신성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김창협은 단련(鍛鍊)하고 정공(精工)하느라 작가의 영롱한 정신을 다채롭게 드러내지 못한 채, 오히려 그 외면적 분식(粉飾)이 작가의 바탕[정신]을 가려버려서 모든 작품이 몰개성의 폐단[軌轍如一, 音 調相似]에 빠진 상황을 선조조 시단의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한시사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김창흡에게서도 확인된다. 김창흡은 선조대 이전의 시인들은 교졸(巧拙)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각각 자기의 ‘진태(眞態)’를 드러냈는데 선조대 시인들은 외형적 답습에 치중하다 결국 법(法)에 얽매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백가(百家)가 일격(一格)인 몰개성의 시를 창작하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我東爲詩, 淵源旣淺, 無復憲章之可論, 而獨其詳於忌諱, 狃於仍襲, 實爲三百年痼弊. 然而宣廟以前, 雖有巧拙, 猶爲各呈其眞態, 以後漸就都雅, 則磨礱粉澤之日勝, 而忌諱愈詳, 仍襲愈熟, 非古之爲法而終爲法拘也. 故命物之, 必依彙部; 使事之, 要有來歷, 蹙蹙圈套之中, 不敢傍 走一步, 遂使眞機ㆍ活用括而不行, 豈復有截斷中流超津筏而上者乎? 蓋合而論之, 百家一格, 卽夫一人之作, 而境事雷同, 情致混倂, 又是千篇一律, 無可揀別矣. 噫! ‘詩可以觀’, 豈欲其如 是哉! 余於靑丘之詩, 所病其拘於法者如此. -金昌翕, 『三淵集』권23 「何山集序」】. 특히, 김창흡은 목릉 시단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이안눌(李安訥)과 차천로(車天輅)의 시에 대해 혹평하면서 전대 시단의 성취를 부정하였다.
김창흡은 32세 되던 1684년에 조성기(趙聖期)와 시도(詩道)에 대한 서한논쟁(書翰論爭)을 벌였다. 아우 김창집(金昌緝)이 조성기와 시에 관해 담론하던 중 김창집이 홍세태의 시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안눌과 차천로의 시를 폄하하자, 조성기가 이에 반대하는 의사를 개진하였고, 이러한 일이 김창흡에게 알려지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김창흡은 논쟁을 통해 전대 시단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시란 무엇이며,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좋은 시를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의 시학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였다【김창흡과 조성기의 시도논쟁(詩道論爭)에 관해서는 이종호, 「三淵 金昌翕의 詩論에 關한 硏究」,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참조.】. 물론 김창흡의 이 시기 시론은 법고(法古)를 지향하던 초기의 시론이고, 이러한 시론은 시도(詩道) 논쟁을 거친 뒤 일정하게 변모되어 갔음【김창흡 시론(詩論)의 변이와 시세계의 변모 양상은 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참조.】을 염두에 두면, 이 시기의 견해는 긴요하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논쟁 속에는 김창흡이 평생을 시학에 전념하며 시도(詩道)를 궁구하게 된 중요한 단초들이 드러나 있다. 전대 시단에 대한 비판 또한 그의 일생을 통해 유지되었고, 시도(詩道) 진작을 위한 의식적 노력은 김창흡이 종신토록 시의 본질적인 측면을 궁구하며 다채로운 한시 창작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긴요한 고찰을 요한다.
(시가 어디에서 왔고 시를 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동악(東岳, 李安訥)은 특히 심한 사람이요 오산(五山, 車天輅) 또한 그것에 휩쓸린 사람일 뿐입니다. 일찍이 그들이 지은 시에 나아가 찾아보고 또 찾아보기를 또한 부지런히 해봤습니다. 그러나 보고 또 봐도 공허하기가 마치 광요천(光耀天)의 있지 않음을 바라보는 것과 같아서 종일토록 보아도 시라고 이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격법(格法)으로 말하면 퇴폐하고, 음조(音調)로 말하면 벙어리이고, 의치(意致)로 말하자면 썩은 껍 데기이고, 정사(情思)로 말하자면 천박하고, 원기(元氣)로 말하자면 시들하고, 묘리(妙理)로 말하자면 까마득합니다. 그들 시에 精화(華)가 없는 것으로 썩은 나무와 견주면 썩은 나무보다 오히려 삐쩍 말랐고, 그들 시에 풍운(風韻)이 없는 것으로 단단한 돌에 견주면 돌보다도 오히려 단단하며, 그들 시에 진색(眞色)이 없는 것으로 진흙에 견주면 진흙보다 오히려 미끈거리고, 그들 시에 신태(新態)가 없는 것으로 먼지에 견주면 먼지보다 오히려 펄펄 날립니다. 끝내 견줄 바가 없으니 결국 시가 없는 것입니다. 아! 멀어졌구나! 온유돈후(溫柔敦厚)한 시여!
於其中, 東岳特其甚者也, 五山抑靡者耳. 嘗試卽其所述, 搜而尋之, 盖亦勤矣. 看來看去, 枵然若光耀之視無有, 終日視而無所謂詩者. 以言乎格法則頹也, 以言乎音調則啞也, 以言乎意 致則腐膚也, 以言乎情思則淺穉也, 以言乎元氣則薾然也, 以言乎妙理則邈如也. 以其無精華而比於朽木, 則猶且瘦勁也; 以其無風韻而比於完石, 則猶且牢礭也; 以其無眞色而比於泥塗, 則猶且滋潤也; 以其無新態而比於塵垢, 則猶且升揚也. 終之無所比焉, 則終果無詩焉矣. 嗚呼逖矣! 溫柔敦厚之物也! -金昌翕, 『三淵集拾遺』권15 「與拙修齋趙公」 첫 번째 편지
이안눌과 차천로의 시에 대한 김창흡의 평가는 참으로 혹독하다. 조성기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창흡은 격법(格法), 음조(音調), 의치(意致), 정사(情思), 원기(元氣), 묘리(妙理) 어느 면에서도 이안눌과 차천로의 시는 볼 것이 없으며 썩은 나무, 돌덩어리, 진흙, 먼지만도 못하다고 하면서 이안눌, 차천로의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시교가 더욱 멀어진 개탄할 상황이라 하였다. 다소 감정적으로까지 읽히는 김창흡의 강변(强辯)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 조선 시도(詩道)의 전통에 대해서는 더욱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하 수 백 년 간에 또한 어찌 총명함과 재혜(才慧)가 시의 본색에 다가간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도(詩道)가 행해지지 않은 것은 늘 옛 자취를 밝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 익히기 시작하여 늙어 익숙하게 된 것은 대저 과체시를 익히고 남은 힘을 가져다가 오직 급한 일에 부응하고 세속에 아첨하는 것을 좋다고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험운(險韻)을 잘하면 “상품(上品)”이라 하고, 경어(硬語)를 적절히 하면 “능품(能品)”이라 하고, 해미(諧謎)를 잘하면 “묘품(妙品)”이라 하고, 류렬(纍列)을 상세히 하면 “홍품(洪品)”이라 하고, 응대가 신속하면 “신품(神品)”이라 하고, 많은 편수를 다투면 “웅품(雄品)”이라 하고, 잘 꾸미면 “가품(佳品)”이라 하고, 화려하게 안배하면 “괴품(瓌品)”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수창이나 하면서 서로 잘난 체 한 것이 이와 같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시라는 것이 본래 어디에서 왔는지는 전혀 모르고 또한 자기가 업으로 삼은 것이 과연 어떤 일인지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시다, 시다”라고 말하니 시가 재앙에 든 것은 여기서 더 할 수 없습니다.
若在我朝詩道之統, 盖難言哉. 雖然上下數百年, 亦豈無聡明才慧近於本色者? 而道之不行, 常由於不明故跡. 其童習而老熟之者, 大抵撝其科習之餘力, 惟副急媚俗之爲快, 故拗險韻者謂之‘上品’, 妥硬語者謂之‘能品’, 善諧謎者謂之‘妙品’, 詳纍列者謂之‘洪品’, 應速者謂之‘神品’, 鬪多者謂之‘雄品’, 粉餙者謂之‘佳品’, 飣餖者謂之‘瓌品’, 所以鼔唱而相誇詡, 如斯而已. 忽不知詩之爲物本自何來, 亦不知己之爲業亦果何事, 而然且曰‘詩而詩而’, 詩之運厄於是乎極矣. -金昌翕, 같은 글
위 인용문은 이안눌과 차천로의 시에 대한 혹평에 바로 앞서 나오는 내용이 다. 김창흡은 조선에 시도(詩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개탄하고 있다. 총명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시의 본색에 다가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타고난 재주에 의한 것일 뿐, 시의 본질과 원류를 궁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시도(詩道)가 행해지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도 문인들은 시의 본질에 대해서는 궁구하려 하지 않고 수창할 즈음에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는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재주나 자랑하려고 지은 시는 진정한 시가 아닌데도 자꾸만 사람들은 그게 시라고 믿고 그렇게 창작하고 있으니 김창흡은 참으로 개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눌과 차천로의 시를 “무시(無詩)”라고 혹평한 것은 이안눌과 차천로의 시가 바로 재주나 드러내는 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김창협의 문인이었던 이의현(李宜顯)의 「운양만록(雲陽漫錄)」에는 이안눌과 정두경이 자기를 과시하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東岳李公詩雖擅名一世, 而文非所長. 人或求序跋, 輒以詩應之, 平生未 嘗作文. 然每自誇曰‘吾之文實勝於詩, 而世罕知之, 可歎’. 淸陰先生聞而笑曰‘如是, 何不作一首文也’. 鄭東溟亦詩勝於文, 筆雖有奇氣, 無師法, 隨意放筆, 終是不能書也. 而常自言‘吾筆爲第一, 文次之, 詩又次之’, 亦與東岳之語一般. 文人每事不欲屈於人, 習氣然也. -李宜顯, 『陶谷集』권27 「雲陽漫錄」” 누구로부터 들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들 김창협, 김창흡의 문인들에게 이안눌과 정두경은 상당히 부박(浮薄)한 사람으로 이미지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창흡의 이같은 평가가 얼마나 객관적인지를 따지는 것은 이 자리에서는 부차적인 것이다. 오히려 긴요한 것은 김창흡이 이들 전대 시인을 비판하면서 어떤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김창흡에게 시란 여기(餘技)나 교양물이 아니었다. 김창흡의 생각에, 시란 것은 성인께서 밝혔듯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시교를 바탕으로 성정을 음영하고 도덕을 함창(涵暢)하여 선을 베풀고 사악함을 막는 도구였다【夫詩之爲道, 可一言以盡之, 曰‘溫柔敦厚’, 而其爲軆則優游諷諭而已矣. 當初聖人之以是勸民者, 一使足以吟咏情性, 涵暢道德, 于以爲陳善閉邪之具. -金昌翕, 같은 글】. 이 시기의 김창흡은 올바른 전범을 설정하고 이를 학습하여 법(法)을 깨우치겠다는 복고파의 논리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낙송루시사를 통해 한위성당(漢魏盛唐)의 고시와 시경시를 따라 지으면서 당대 시문의 병폐를 시정하려 하였다【김남기, 앞의 논문, 25~26면 참조】. 이러한 실천의 과정은 김창흡 또한 명대 복고파의 영향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창흡의 복고 논리는 명대 복고 파와는 사상의 측면에서 달랐다. 앞서도 살펴보았듯 김창흡은 시도(詩道)를 밝혀야 할 궁극적인 이유로 공자 이래의 전통적인 유가의 시학을 들고 있으며 시도(詩道)를 반정(反正)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자의 이른바 ‘시삼변설(詩三變說)’과 ‘정변설(政變論)’에 기대고 있다【且以朱子之大, 而其勸人以作詩之法, 三百篇外, 輒以楚辭ㆍ漢古爲無上準範, 參以阮ㆍ郭之深婉, 要以陶ㆍ柳之蕭散, 而猶恐其變之不善ㆍ法之或廢也. 盖於病翁箏詩, 三致其意焉. 後之學詩者, 欲覔其門逕源流之歸, 誠不可捨是而他求. -金昌翕, 같은 글】. 김창흡은 이후 보다 현실적인 전범을 설정하고【장유승, 「17세기 고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2, 48~54면 참조.】, 나아가 전범의 확장을 통해 전범 자체를 무화(無化)시키는 방향으로 시론을 전환하였지만, 『시경』과 주자(朱子)는 김창흡 평생 시학(詩學)의 근간이었다【낙론계 문인들이 주자(朱子)의 시론을 자기 시론의 토대로 삼은 것은 일반적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余素昧詩學, 猶知‘溫柔敦厚’四字爲言詩之妙諦, 而朱夫子與鞏仲至書爲至論. -李宜顯, 『陶谷集』권26 「歷代律選跋」”; “參以朱夫子古今三變說, 則公之詩, 豈在姚合韓偓 之後? 而泛覽陳陸, 特出於以詩爲戱. 農巖嘗居石郊, 與余循荷沼鯈梁之上, 誦公詩數篇曰: ‘高華硏精, 老益深造.’ 三淵之稱道公亦如此. -金時保, 『茅洲集』권9 「老稼齋集跋」”】. 그렇기에 김창흡은 “송나라 사람들은 법(法)으로써 구하지 않았으니 연목구어(緣木求魚)의 류(類)라고 하겠고 명나라 사람들은 바로잡긴 했지 만 그 참됨을 잃어버렸으니 격수과산(激水過山)의 류(類)라고 할 것입니다[宋人求之不以法, 則緣木求魚之類也; 明人矯而失其眞, 則激水過山之類也. -金昌翕, 같은 글].”라고 하면서 명인(明人)들의 복고 주장에 대해서 긍정하면서도 그들이 보인 복고의 실제에 대해서는 ‘실기진(失其眞)’하였다며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김창흡과 명대 복고파가 공히 한위고시를 추종하였지만 복고를 통해 도달하고자 한 경계는 서로 달랐던 것이다. 성리학자들은 유가 정통 시론인 성정론에 입각하여 복고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이종묵, 「조선중기 詩風의 변화 양상」,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493면 참조.】.
명대 복고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비판은 김창협에게서 나타난다. 앞서 살펴보았듯, 김창협은 선조조 시단의 폐단을 명대 복고파 문학이론의 유입과 연결시키며 명대 복고파 시론을 좇아 전범을 모방하고 외형적 수사에만 치중하여 시가 지니고 있어야 할 천질(天質)이 사라졌다고 보았다. 김창협은 명대 복고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그의 저술 곳곳에서 드러냈는데, 김창협의 명대 복고파 비판은 학시(學詩)를 통해 무엇을 체득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표출되었다.
헌길(獻吉, 李夢陽)은 사람들에게 당나라 이후의 글을 읽지 말도록 권하였으니, 이는 실로 너무나 편협하고 비루한 견해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법을 배운다는 측면에서 말하였으니 괜찮다. 이우린(李于鱗, 李攀龍)의 무리는 시를 지을 때 전고를 사용함에 있어 당나라 이후의 말은 쓰지 말도록 금지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가소롭다. 시를 짓는 데 중요한 것은 성정을 풀어내고 사물을 다 포괄하는 데 있으니 생각과 느낌이 닿는 것마다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의 정조(精粗)와 말의 아속(雅俗)도 가려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고금을 구별한단 말인가. 이우린의 무리는 옛것을 배움에 있어 애당초 신묘한 해오(解悟)가 없이 그저 언어를 본뜰 뿐이었다. 그래서 당나라의 시를 배우려고 하면 당나라 사람의 시어를 사용해야 하고 한나라의 문장을 배우려고 하면 한나라 사람의 문자를 사용해야 했으니, 만약 당나라 이후의 전고를 사용한다면 그 말이 당나라의 시어와 같지 않다고 의심했다. 그 때문에 서로 이처럼 경계하고 금지한 것이니, 이들에게 어찌 진정한 문장이 있겠는가!
獻吉勸人不讀唐以後書, 固甚狹陋. 然此猶以師法言可也. 至李于鱗輩, 作詩使事, 禁不用唐以後語, 則此大可笑. 夫詩之作, 貴在抒寫性情ㆍ牢籠事物, 隨所感觸, 無乎不可. 事之精粗ㆍ言之雅俗, 猶不當揀擇, 況於古今之別乎? 于鱗輩學古, 初無神解妙悟, 而徒以言語摸擬, 故欲學唐詩, 須用唐人語; 欲學漢文, 須用漢人字. 若用唐以後事, 則疑其語之不似唐, 故相與戒禁如此, 此豈復有眞文章哉! -金昌協, 『農巖集』권34「雜識·外篇」
나는 일찍이 “당시(唐詩)처럼 창작하기가 어려운 것은 기준상랑(奇俊爽朗)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종용한아(從容閒雅)함이 어렵고, 고화수려(高華秀麗)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온후연담(溫厚淵澹)함이 어려우며, 갱장향량(鏗鏘響亮)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화평유원(和平悠遠)함이 어렵다.”라고 생각했는데, 명나라 사람들은 당시를 배울 적에 오직 기준상랑(奇俊爽朗)함만 배우고 종용한아(從容閒雅)함은 터득하지 못하였으며, 오직 고화수려(高華秀麗)함만 배우고 온후연담(溫厚淵澹)함은 터득하지 못하였으며, 오직 갱장향량(鏗鏘響亮)함만 배우고 화평유원(和平悠遠)함은 터득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완전히 딴판이 된 것이다.
余嘗謂‘唐詩之難, 不難於奇俊爽朗而難於從容閒雅, 不難於高華秀麗而難於溫厚淵澹, 不難於鏗鏘響亮而難於和平悠遠’, 明人之學唐也, 只學其奇俊爽朗, 而不得其從容閒雅; 只學其高華 秀麗, 而不得其溫厚淵澹; 只學其鏗鏘響亮, 而不得其和平悠遠, 所以便成千里也. -金昌協, 『農巖集』권34 「雜識·外篇」
첫 번째 인용문에서 김창협은 명대 전칠자와 후칠자를 대표하는 이몽양(李夢陽)과 이반룡(李攀龍)의 시론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몽양의 경우, 주장의 편협함을 비판하였지만, 그래도 성당(盛唐)의 시적 성취를 본받으려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래도 법(法)을 배운다’는 측면에서 일부 인정을 하였다. 이는 앞서 김창흡이 명대 문인들의 복고를 법의 측면에서 일부 긍정하면서도 방법상의 문제를 비판했던 입장과 동일하다. 하지만 이반룡에 이르러서는 성당시의 성취가 시어를 모의하는 방식으로 추구되었다며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주지하듯 명대 복고파는 전후칠자를 중심으로 근체시로부터, 가행(歌行), 육조(六朝), 진위(晉魏), 소부(騷賦), 고가(古歌), 시경체(詩經體)로 소급해가면서 시학상의 보다 완전한 전범을 설정하고, 그러한 전범의 학습을 통해 자연지음(自然之音)을 이룬 ‘진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젠진쑹(簡錦松), 『명대문학비평연구(明代文學批評硏究)』, 學生書局, 1989, 206~208면 참조.】. 그러나 이들의 ‘진시’ 추구는 표현과 형상화의 문제에 치중되었고, 결국엔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 방법론을 세우지 못함으로써 어휘나 구법의 모의를 통해 외형적 유사함을 구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 결과 그들의 복고정신에 의해 창작된 작품들은 고루한 모조품을 면하지 못하였다는 후대의 혹독한 평가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창협의 생각에 당시를 작시의 모범으로 삼는 것은 법(法)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그 모범에서 취해야 할 것은 “언어모의(言語模擬)”가 아니라 “신해묘오(神解妙悟)”였다. “신해묘오(神解妙悟)”란 대상 작품에 융해되어 있는 시인의 높은 정신적 경지를 체득하는 것으로 학시(學詩)에 있어서 김창협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바였다.
두 번째 글은 학당(學唐)의 요체(要諦)를 밝힌 글이다. 이 글에서 김창협은 당시의 성취를 기준상량(奇俊爽朗):종용한아(從容閒雅), 고화수려(高華秀麗):온후연담(溫厚淵澹), 갱장향량(鏗鏘響亮):화평유원(和平悠遠)으로 대비하면서 당시를 통해 기발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시상, 화려하기보다는 온후하고 담박한 표현, 겉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내면에서 평원(平遠)하게 울리는 음악성을 체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김창협이 인식한 당시의 성취인 셈인데, 김창협은 한결같이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창협은 당시의 성취를 음악성이나 형상화 능력 등에서 구하지 않고 성정(性情)과 천기(天機)에 기반한 자연스러움에서 찾기도 하였다【詩者, 性情之發而天機之動也. 唐人詩有得於此, 故無論初ㆍ盛ㆍ中ㆍ晩, 大抵皆近自然. -金昌協, 『農巖集』권34「雜識·外篇」】. 시인의 사람됨이 진실하게 드러나는 참된 시를 쓰기 위해 이미 성취가 인정된 모범적인 작품을 배우되, 좋은 작품이기에 내재해 있을 시인의 높은 정신적 경지를 체인(體認)하라는 것, 이것이 바로 김창협이 주장한 학시(學詩)의 요체이다.
고인의 작품 속에 내재한 정신을 체득하고 언어차원의 모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의식은 김창흡에게로 이어졌다. 김창흡의 아래 글은 학시(學詩)의 문제와 연관하여 창작상의 언어구사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한퇴지(韓退之, 韓愈)가 말한 진언(陳言)은 육조시대 사람들이 인용한 고사와 육조시대 사람들이 따라 쓴 전인들의 언어였으니, 가령 ‘문정(問鼎)’, ‘진양갑(晉陽甲)’, ‘역책(易簀)’, ‘망금(亡琴)’과 같은 것이 진언(陳言)이다. 퇴지가 진언(陳言)을 애써 제거하려 힘쓴 것은 반드시 자기에게서 나오게 하고자 해서였으니 맹자, 장자, 반고, 사마천의 글이라 하더라도 한 마디의 말도 훔쳐 쓰지 않았다. (소식의) 이른바 ‘팔대(八代)의 쇠미함을 일으켰다’는 평가는 바로 이 점에 의의를 둔 것이었다. 그런데 모곤(茅坤)의 무리는 진언(陳言)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평상의 속어로 풀어썼으니 이러한 시도는 곧 한퇴지가 애써 하고자 한 바를 결국 규호(虬戶)나 선계(銑溪)와 같은 난삽한 어휘를 구사하는 부류로 귀결시킨 것이다. 어찌 그릇되지 않았겠는가!
퇴지의 문 가운데는 실로 평상어가 많다. 가령 ‘불행히도 두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不幸兩目不見物]’고 한 것이나 ‘촌보(寸步)도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寸步不能自致]’고 한 것에 어찌 일찍이 글자를 바꿀 뜻이 있었겠는가? 만약 엄주(弇州, 王世貞)의 무리로 하여금 이러한 뜻을 표현하게 하였다면 ‘양목(兩目)’이라 말하지 않고 반드시 ‘금비(金篦)’를 썼을 것이요, ‘촌보(寸步)’라고 말하지 않고 반드시 ‘분지(賁趾)’라고 썼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없애야 할 진언(陳言)인 것이다.
退之所謂陳言, 如六朝人之引用古事與踵襲前人言語, 如問鼎ㆍ晉陽甲ㆍ易簀ㆍ亡琴之類是已. 退之之戛戛務去, 蓋欲必自己出, 雖孟ㆍ莊ㆍ班ㆍ馬之文, 未嘗勦襲一語. 所謂‘起八代之衰’者, 正爾在此. 茅坤輩不知陳言之爲何, 解作平常俗語, 若是則退之之所務, 終歸於虬戶ㆍ銑溪之類, 豈不誤哉! 退之文中, 實多平常語, 如曰‘不幸兩目不見物’ㆍ‘寸步不能自致’, 曷嘗有換字之意乎? 若使弇州輩當此, 則不言‘兩目’而必用‘金篦’, 不言‘寸步’而必用‘賁趾’, 此正陳言之可去者也. -金昌翕, 『三淵集』 권36 「漫錄」
시어를 구사함에 있어 김창흡이 중시한 것은 자기언어의 발출 여부였다. 김창흡이 보기에 한유는 자기언어를 구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으로 맹자, 장자, 반고, 사마천 등의 전범에서 한 마디의 말도 표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식으로부터 문풍을 흥기한 공을 인정받았던 문인이었다. 그런데 당송파(唐宋派)인 모곤(茅坤) 등은 한유가 생각했던 진언(陳言)의 핵심, 즉 표절과 자기언어간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한유가 부정한 진언(陳言)을 일상어로 바꾸어 버렸다. 이에 대해 김창흡은 오류라고 비판하였다. 그 이유는 모곤 등의 변개가 결국 후대의 독서인들로 하여금 한유를 난삽한 언어를 일부러 사용하는 사람으로 여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한유의 문장정신을 왜곡시켰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창작상의 언어구사에 대한 김창흡의 핵심적 의사가 놓여있다. 창작에 있어 중요한 것은 곧 구사된 언어의 난이(難易), 고금(古今)이 아니라 진실한 자기언어의 문제였다【모곤을 비롯한 당순지, 왕신중, 귀유광 등의 당송파는 자득(自得), 본색(本色)을 강조하며 복고파의 논리를 비판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백악시단 문인들의 문학론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독서를 통해 그들의 문학이론을 수용한 것으로 판단하게 한다. 그러나 이때의 수용을 일방적인 것으로 보는 것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백악시단 문인들의 문예론에 자주 등장하는 본색(本色), 자득(自得) 등의 비평어들은 당송파 이전의 문인들도 많이 사용해왔던 것으로 그것을 반드시 당송파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작가의 참다운 정신과 견해가 문장에 녹아 있어야만 (本色을 지닌) 좋은 작품이라는 견해는 당순지가 아닌 맹자의 ‘誦其詩, 讀其書, 不知其人可乎’에서도 인출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살핀 인용문에서 김창협은 좋은 시의 조건으로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시’를 내세웠고, 이병연은 「제응재유고(題凝齋遺稿)」라는 글에서 직접적으로 맹자의 글귀를 맨 처음에 제시한 뒤, 박태관의 시문이 대체로 당시에 가깝지만 반드시 박태관 자신의 시였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讀其書, 不知其人可乎? 知其人, 則其書亦可知也……其平日氣像規模發見其間, 無不在焉, 卽必非他人之詩, 而士賓之詩也]. 또한 당송파 독창의 언어로 여겨지던 ‘흉중유출(胸中流出)’이란 비평어도 주자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자는 구양수의 글을 고평하면서 “사표(謝表) 가운데 자서(自敍)한 한 단락은 단지 흉중에서 유출되어 다시 조금도 막힘이 없으니 이것이 문장의 묘(妙)이다[謝表中自敍一段, 只是自胷中流出更 無些窒礙, 此文章之妙也. -『朱子語類』권139]”라고 한 바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백악시단의 반의고 이론이 당송파의 문학이론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수용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영향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다. 오히려 복고파의 의고 폐단을 비판적으로 인식했던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자신들과 유사한 논리로 복고파를 비판하는 당송파의 저작 들을 접하고는 그들의 문학론에 공감하고 그들의 비평어들을 이질감 없이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으로 여겨진다.】. 모곤 무리의 실착(失錯)이 ‘자기언어’인가의 문제를 따지지 않고 알기 쉬운 언어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작가의 정신을 상실시킨 데 있었다면, 반대로 복고파였던 왕세정의 무리는 한유의 평이한 문장을 예스럽지 못하다고 여겨 한유의 문장정신과는 상반되게 난삽한 고어로 변개하는 우를 범할 것이라 하였다. 이는 김창흡이 복고 파의 자구모의(字句模擬)를 비판한 것인데, 비판의 핵심은 자구를 모의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언어구사가 작가의 정신[自己]를 드러내는 것과 하등의 관련이 없고, 나아가 오히려 작가의 뜻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 있다. 김창흡 이 구체적인 예를 든 것은 이러한 언어구사에 어떤 폐가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김창흡이 제시한 예를 따라 한유의 ‘불행스럽게도 두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不幸兩目不見物]’를 ‘불행금비불견물(不幸金篦不見物)’으로 바꾸고, ‘촌보도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寸步不能自致]’를 ‘분지불능자치(賁趾不能自致)’로 바꾸어 보면 해당 문장은 ‘금비(金篦)’와 ‘분지(賁趾)’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금비(金篦)’는 고대(古代)에 눈병을 치료하던 도구이고 ‘분지(賁趾)’는 『주역(周易)』 「분괘(賁卦)」 초구(初九)에 “그 발을 꾸 밈이니 수레를 버리고 도보로 걷는다.[賁其趾, 舍車而徒]”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광태, 「삼연만록역주(三淵漫錄譯註)」,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2009, 56~57면 참조.】. 글쓰기의 목적이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변개된 문장은 문장의 본래적 기능이 현저히 약화된 문장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금비(金篦)’와 ‘분지(賁趾)’의 의미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한들, ‘두 눈[兩目]’ 대신 구사된 ‘금비(金篦)’와 ‘짧은 거리[寸步]’ 대신 구사된 ‘분지(賁趾)’가 난해함에 상응하는 별도의 효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김창흡이 보기에 이러한 언어구사는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는 데도 문장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도 효과적이지 못한 것이요, 다만 격조를 치장하고 예스러움을 인위적으로 조성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그렇기에 김창흡은 이러한 표현을 제거해야 할 진언(陳言)이라 하였다. 요컨대, 진언(陳言)은 표현주체의 반성적 의식이 들어 있지 않은 외면적이고 관습적인 언어구사일 뿐이며, 그래서 참되지 않고 가식적인 것이다. 시문에 작가의 내면 의식[정신]을 오롯이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창흡이 언어 모의를 복고의 방법으로 여긴 복고파를 비판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학시와 창작에서 학습 대상과 창작 주체의 정신적 측면을 중시했던 김창협, 김창흡의 시론은 그들 제자들에게로 이어졌다. 먼저 신정하의 글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전체를 지금 또한 상세히 논할 수 없지만 대저 재정(才情)이 넉넉하고 감정을 풀어내는 데에 특장이 있습니다. 다만, 기격(氣格)의 경우 때로 지치고 번뇌하여 흥기되지 못한 곳이 있으며, 시구와 시어의 경우는 사이사이 유이(遊移)하여 불안(不安)한 곳이 많습니다. 또한 고인을 모의한 흔적이 지나치게 남아있습니다. 제 생각에 형께서는 우선 성조와 격률 등은 버려두시고 고인의 큰 줄기와 큰 잎이 될 만한 문장을 다독(多讀)하여 그 원력(元力)을 유여(裕餘)하게 하시고 어구(語句)를 타당(妥當)하게 하신 연후에 당송 명가(名家)들의 작품을 취하여 경발(警拔)한 생각을 펼쳐내셔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궁극의 경지가 될 듯합니다. 형께선 이 말을 어찌 생각하는지요?
其全體, 今亦未暇細論, 大抵饒於才情而長於輸寫. 但氣格則時有疲惱不起處, 句字則間多遊移不安處, 且其摸擬古人, 太有痕迹. 鄙意欲兄姑且放下聲調格律, 多讀古人麁枝大葉之文, 使其元力有餘而語句妥當, 然後取唐宋名家, 以發其警拔之思, 乃爲此事究竟處, 未知兄以此言爲如何? -申靖夏, 『恕菴集』권9 「答金汝翼鎭商」
김진상(金鎭商, 1684~1755)의 시를 평가한 글이다. 신정하는 먼저 김진상이 감정을 전달하는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장점을 거론한 뒤, 개선할 점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먼저 지적한 것은 작품에 내재된 기상과 품격인데, 지나치게 고심하여 흥기(興起)되지 못한 점을 들었다. 다음으로 시구와 시어가 들쭉날쭉하여 순조롭지 못하다는 점과 모의한 흔적이 지나치게 남아있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신정하가 지적한 문제들은 사실 하나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신정하의 평가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김진상은 세련된 시적 표현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현상의 완성도를 높이려다 보니 시어 선택에 공을 들여 고인들의 시어를 모의하였고, 모의한 시어들이 원숙하게 구사되지 못한 까닭에 전체 시상 속에서 들쭉날쭉 순조롭지 못하게 되었으며, 세련된 표현을 위한 이 같은 고심과 번뇌가 작품 속에 노출되어 전체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하고 막힌 듯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정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성조와 격률 등은 버려두시고 고인의 큰 줄기와 큰 잎이 될 만한 문장을 다독하여 근원적인 힘을 넉넉히 만들”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 제안은 곧 표현 기교에 매몰되지 말고 먼저 고인의 정신과 기상을 체득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고인의 문장에 담긴 정신을 체득한 뒤에는 자기 내면에 원숙하게 체화(體化)된 시어와 발군(拔群)의 자기 사유를 펼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앞서 본 자득의 학문자세가 문학론으로 이 어진 것으로 창작주체의 내면적 경지를 창작의 핵심적 요소로 여기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하곤 또한 창작주체의 내면적 경지를 중시하면서 식견(識見)을 정밀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약 혹시라도 (문장의 성취가) 여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구어(句語)와 성률과 같은 말단에서 구한다면, 이것은 내가 말하는 문(文)이 아닙니다. 무릇 문(文)은 열매에 있어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열매가 안에서 길러진 것이 이미 큰 물처럼 심후(深厚)하다면 그 문장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반드시 환하 게 빛날 것입니다. 대저 실(實)이라는 것은 인의(仁義), 효제(孝弟), 충신(忠信), 예악(禮樂)의 도(道)일뿐이요, 문(文)이라는 것은 천하 후세에 그 도를 밝혀 언어로 형용하고 책에 기록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차한 설이 아니니 반드시 높은 식견이 있은 뒤라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학자(學者)는 근학(勤學)과 고식(高識) 두 가지에서 하나라도 빠트려선 안 되는데 그 가운데 식견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족하를 위해 그것을 비유해 보겠습니다. 지금 적을 정벌하러 가는 자가, 앞 에는 정예의 기마병이 있고 뒤에는 유격대가 있으며, 창칼은 모두 예리하고 깃발은 모두 멋진데, 혹 기미를 결단하여 승리를 거둘 방책에 어둡다면 결국 반드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고 맙니다. 지금 학식이 풍부한데다 오거서(五車書)를 읽고 재기가 넉넉한데다 수천의 말을 붓으로 옮기며, 구어(句語)는 이미 모두 다 공교로우면서 화려하고 성률(聲律)은 이미 모두 다 조화롭지만, 혹 성인의 대도(大道)에 어둡다면 또한 반드시 쓸 데가 없어 그만 둘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문장을 짓는 도에서 식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족하께선 나이가 아주 젊고 재주가 몹시 뛰어나며 뜻한 바도 대단히 훌륭합니다. 제가 또 군산(君山, 金崇謙)을 통해 족하의 시 여러 편을 얻어 보았는데 청려(淸麗)함이 좋아할 만하였습니다. 족하께선 지금의 성취만으로도 이미 동류들보다 몇 배나 뛰어나니 족하의 재주와 족하의 뜻으로 무엇을 한들 이루지 못하며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습니까? 오직 원하는 것은 족하께서 배움을 널 리 하시고 식견을 정밀하게 하시어 그 실질에 힘쓴 다음 화려함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신다면 이른바 ‘고인’도 어렵지 않게 도달하실 것이니, 어찌 구어(句語)와 성률 사이에서 세월을 허비하고 정신을 소모해서야 되겠습니까?
苟或不知出此, 而但求之句語ㆍ聲律之末, 則非吾所謂文也. 夫文者, 實之華也. 其實之蓄於中者, 旣奫然深厚, 則其文之著於外者, 必炳然暐燁矣. 夫謂之實者, 不過仁義孝弟忠信禮樂之道, 而謂之文者, 亦不過明其道於天下後世而形之於言語, 著之於簡冊者也. 然此非苟說而已, 必有高識而後可也. 故曰: ‘學者於勤學ㆍ高識二者, 不可闕一, 而尤以識爲重.’
請爲足下喩之. 今夫征敵者, 精騎在前, 游擊居後, 刀槊旣皆精利矣, 羽旄旣皆飾美矣, 或昧於决機制勝之方, 終必無功而敀矣; 夫學富而讀盡五車, 才贍而筆輸千言, 句語旣皆工麗矣, 聲律旣皆諧叶矣, 或暗於聖人之大道, 亦必無用而止矣.
由是觀之, 爲文之道, 豈不以識爲重乎? 足下年甚富才甚奇, 志意亦甚不凡. 僕又從君山得見足下詩數篇, 淸麗可愛. 足下今之成就已出流輩數倍, 以足下之才ㆍ足下之志, 何爲而不成? 何求而不得也? 唯願足下博於學而精於識, 務其實而俟其華. 則夫所謂古人者, 不難至焉耳, 豈可忨歲月弊精神於句語聲律間邪? -李夏坤, 『頭陀草』책12 「與趙 季禹書」
이하곤의 이 편지는 창작의 요체로서 식견[識]을 주장하며 식견의 핵심적 내용에 대해 견해를 밝힌 것이다. 이하곤은 문장의 성취를 구어(句語)나 성률과 같은 표현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자신이 말하는 문(文)이 아니라고 하였다【제시한 편지글 앞부분에서 이하곤은 작문이란 대단히 어려운 것임을 전제한 뒤, 빼어난 재주와 깊은 사유를 겸비하기 위해서 ‘근학(勤學)’을 강조하고, 훌륭한 작문을 위해 배워야 할 것으로 ①천지(天地), 일월(日月)로부터 조수(鳥獸), 곤충(昆虫)에 이르기까지의 만물의 이치와 변화, ②생민(生民) 이래 요순(堯舜)으로부터 공자(孔子)에 이르기까지의 인의(仁義), 효제(孝弟), 충신(忠信), 예악(禮樂)의 도(道), ③나아가 유가(儒家) 외에도 불가, 도가, 음양(陰陽), 점술, 천문의 제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박학(博學)과 근학(勤學)을 이룬 뒤라야 재주와 사유가 균형을 이루고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하여 고인 수준의 작문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然爲文甚難. 雖有䧺俊瓌奇之才, 非湛深超詣之思, 則無以皷鑄吾才之所受; 雖有湛深 超詣之思, 非䧺俊瓌奇之才, 則又無以闡發吾意之所存, 故二者互相爲用, 然猶有所待者必勤學而後可也. 是故將善爲文者, 於天地ㆍ日月ㆍ列星ㆍ鬼神ㆍ幽恠ㆍ山川ㆍ草木ㆍ花實ㆍ鳥獸ㆍ昆虫之物, 無不覈其理而參其變; 自生民以來, 二帝ㆍ三王ㆍ周公ㆍ孔子所論仁義ㆍ孝弟ㆍ忠 信ㆍ禮樂之道, 無不究其旨而捴其要; 至於儒釋ㆍ道敎ㆍ陰陽ㆍ卜筮ㆍ醫藥ㆍ星曆之說, 無不探 其源而溯其流, 夫如是然後才與思相衡, 心與手相應, 凡發諸言語文詞者浩浩乎若决江河而注之 海, 方可與古作者齊駈焉耳矣. -같은 글”】. 그리 고는 실(實)과 화(華)의 관계를 통해 실(實)이 중요하다는 논리를 펴며 ‘실(實)이라는 것은 인의(仁義), 효제(孝弟), 충신(忠信), 예악(禮樂)의 도(道)일 뿐이요, 문(文)이라는 것은 천하 후세에 그 도를 밝혀 언어로 형용하고 책에 기록한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실(實)의 내용으로 제시한 것들은 정통 유가가 지향하는 근본적 가치로서 이하곤이 지향한 창작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이하곤은 타고난 재주와 풍부한 학식, 그리고 빼어난 문장력을 갖추고 있어도 성인의 대도(大道)을 알지 못한다면 재주와 학식, 문장력을 펼칠 곳이 없다면서 조문명이 이미 재주가 뛰어나고 지향하는 바가 높으니 그 재주와 뜻을 구어(句語)나 성률(聲律)의 빼어남을 구하는 데 허비하지 말고 식견을 정밀히 하고 실질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이병연 또한 「항동소전(巷東小傳)」, 『巷東稿』「附錄」에서 시작(詩作)에 있어서의 학문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古人云: ‘詩有別趣, 非關理也; 詩有別才, 非關學也.’ 今觀翁之詩, 一出於天眞, 蕭 閑簡澹, 蘊幽古之旨, 發寂廖之趣, 其至者往往入唐人佳境. 凡世之尋聲響矜色澤以爲名者, 則初不知有此焉. 翁誠多讀書, 胸中浩汗, 理該學博, 固能爲世之詞林大家, 恐不能於此, 詩增得天分. 惟深於詩道者知之也.” 이병연은 엄우(嚴羽)의 말을 인용한 뒤, 김부현의 시가 다독(多讀)을 통해 리(理)와 학(學)이 모두 해박(該博)해져서 시가 더욱 천분(天分)을 얻게 되었다며 엄우의 묘오론(妙悟論)를 비판하였다. 그리고는 타고난 시재와 학문 간의 관계는 시도(詩道)에 깊은 자만이 알 것이라 하였다.】.
이상에서 보았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학시(學詩)와 창작(創作)에 있어 모두 작가의 정신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이 점은 후술하겠지만, 명대 복고파의 ‘진시’론과 공안파의 ‘진시’론과 비교했을 때 백악시단의 ‘진시’론이 보이는 가장 특징적인 면모이다. 창작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창작주체의 수양된 인격과 높은 학식을 설정한 것은 이들의 성리학적 사유가 문학론에 접목된 결과인데, 이는 곧 이들의 시론이 유가 정통의 성정론을 충실하게 잇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시’에 대한 이같은 입장은 다음 김창협의 글에 명징하게 드러난다.
내 생각에 시란 성정(性情)의 산물이다. 따라서 오직 천기(天機)를 깊이 체득한 사람만이 잘할 수 있다. 만약 악착같고 사리에 어두운 사람이 한갓 성병(聲病)과 격률(格律)에 얽매인 채 억지로 생각을 짜내고 수사를 가하여 솜씨를 내보이면서 스스로 시인입네 한다면 그 어찌 다시 ‘진시(眞詩)’가 있겠는가? (尤菴의) 서문에 이르기를, “젊어서부터 사방 각처를 돌며 수령을 지냈는데, 가는 고장마다 그곳의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길 좋아하였다. 중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날마다 쌍청당(雙淸堂)을 쓸고 닦은 뒤 고요하게 청좌(淸坐)하는 모습이 마치 신선 같았으니 8, 90세를 사는 동안 미간을 찌푸리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진정한 시인[眞詩人]이 된 까닭이다. 그리고 또 “어떤 경물을 접하게 되면 반드시 그 감회를 시로 읊조렸고,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술자리를 마련하고 벗을 불러 담소를 나누며 즐긴 것이 모두 시로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진시(眞詩)’를 짓게 된 걸 까닭이다. 이렇게 볼 때, (尤菴의) 서문은 비록 시에 관해 논한 말이 한마디도 없음에도 또한 한마디도 시에 대해 논하지 않은 말이 없으니, 독자는 시를 보지 않고서도 그 시가 필시 아름다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만일 노(魯)나라 계찰(季札)이 음악을 관찰했던 것처럼 시를 잘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또 이 시집을 읽고 누구의 작품인지 묻지 않고서도 필시 ‘이 시인은 세속을 초월한 풍류 군자일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余謂詩者, 性情之物也, 惟深於天機者能之. 苟以齷齪顚冥之夫而徒區區於聲病ㆍ格律, 搯擢胃賢, 雕鎪見工, 而自命以詩人, 此豈復有眞詩也哉? 序稱‘公自少游宦四方, 輒喜游佳山水. 中歲倦而歸鄕, 日灑掃雙淸堂, 蕭然淸坐若神仙, 蓋生歲八九十, 未嘗有皺眉之事’, 此公之爲眞詩人也. ‘遇境觸物, 必發於吟詠, 佳辰美景, 治酌命儔, 談讌嬉怡, 無非詩者’, 此公之所以爲眞詩也. 以此而言, 則序雖無一語論詩, 而亦無一語非論詩, 讀者亦不待見其詩而知詩之必佳矣. 然世苟有善觀詩如季札之觀樂者, 則其讀是集, 又不問誰氏之作, 而則必曰‘是風流澹蕩愷悌人也’. -金昌協, 『農巖集』권25 「松潭集跋」
김창협이 46세 되던 1696년에 쓴 「송담집발(松潭集跋)」이다. 이 글은 선조 때 문신 송남수(宋枏壽)의 시집에 쓴 글인데 시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 없이 시를 논하고 있는 점 이 인상적이다. 김창협은 우선 시란 성정(性情)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시가 성정의 산물이라는 것은 성리학자들의 전통적 시론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른바 ‘천기론(天機論)’을 보태었는데, 김창협은 천기(天機)를 깊이 체득한 사람만이 시를 잘 쓸 수 있다고 하였다. 김창협은 이렇게 성정론과 천기론을 긴밀하게 연결시킨 뒤, 다음 부분에서 ‘진시(眞詩)’를 언급하였는데, 시를 잘 쓰려고 시에 수사적 조탁을 가하는 것은 ‘진시(眞詩)’와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이어서 송시열(宋時烈)의 서문을 인용하며 ‘진시인(眞詩人)’과 ‘진시(眞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먼저 김창협이 진시인(眞詩人)의 풍모라고 판단한 부분을 살펴보자. 송시열에 따르면 송남수는 젊어서 산수를 유람하고 중년 이후에는 날마다 쌍청당(雙淸堂)을 정갈히 한 뒤 고요히 앉아 지내며 90세가 되도록 언짢아하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송시 열을 통해 그려진 송남수의 모습은 ‘진시’ 이해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이 된다. 젊은 시절의 산수 유람을 언급한 것은 산수 유람을 통해 속된 마음을 바루고 산수의 도움을 통해 시작(詩作)의 질적 제고가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어 매 일같이 고요하게 청좌(淸坐)하는 모습을 언급하였는데, 청좌는 바로 선비가 만유의 이치를 체인하는 철리적(哲理的) 관조의 모습이요, 천리의 묘용(妙用)을 조우(遭遇)하는 미적(美的) 관조의 모습이자, 심성수양의 모습이기도 하다【청좌(淸坐)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시들이 참조가 된다. “淸坐一心如大虛, 何曾欠少更嬴 餘. -李穡, 『牧隱詩藁』권30 「淸坐」”; “海岸平沙夜月籠, 超然淸坐四更中. 陰陽樞紐妙乎妙, 人物情形同不同. -宋時烈, 『宋子大全』권4 「次疇孫籠字韻」”; “暮色蒼茫自遠來, 小齋淸坐 思悠哉. 閑中轉覺交游闊, 病裏都忘歲月催. 廢井鳴蛙經雨歇, 暝林棲鳥破煙廻. 餘生偃仰蓬蒿底, 斤斧何曾到散材. -張維, 『谿谷集』권30 「暮色」”】. 그와 같은 수양의 과정을 거치면서 송남수의 삶은 절로 법도에 맞는 삶으로 고양되었다. 90세에 이르도록 눈썹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내외 일체의 상황에 중절(中節)하는 고도의 수양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창협은 이처럼 높은 수준의 인 격 수양을 진시인(眞詩人)의 요건으로 들고 있다.
다음으로 김창협이 송남수의 시를 ‘진시’라고 판단한 부분을 살펴보자. “어떤 경물을 접하게 되면 반드시 그 감회를 시로 읊조렸고”라고 한 것은, ‘청좌(淸坐)’를 통해 대상과 하나가 되는 미적 체험을 하게 되면 그 조화로운 흥취를 시로 옮겼다는 것이다.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술자리를 마련하고 벗을 불러 담소를 나누며 즐긴 것이 모두 시로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은 대상과의 교융 속에서 얻어진 흥취를 벗들과의 아교(雅交)로 확장시켰음을 말한다. 이때 담소를 나누며 함께 즐기는 벗은 당연히 진시인(眞詩人)과 짝할 만한 높은 수준의 인격체로 상정된다. 시회를 통해 아교를 쌓아가며 얻은 흥취, 이것을 모두 시로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다. 김창협이 우암의 기록을 통해 제시한 ‘진시’의 두 양상, 즉 ‘관조를 통해 대상과 하나 되는 미적 체험’과 ‘지기와의 아교에서 나오는 흥’은 모두 정(靜)과 동(動)에 있어 화평하고 조화로운 세계인식과 연관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백악시단 문인들이 생각한 ‘진시’의 상(像)을 만날 수 있다. ‘진시’란 바로 수양된 인격을 지닌 진시인(眞詩人)이 만유-인간을 포함한-와의 관계 속에 조화롭게 참여하며 얻은 흥취를 자연스럽게 형상화한 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창협은 송남수의 시를 보면 송남수의 인격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제창(提唱)한 ‘진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진시’는 백악시단만이 내세운 시론이 아니었다. 백악시단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명대 복고파 또한 ‘진시’를 내세웠다. 전칠자의 이몽양은 복고와 ‘진시’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조현(曹縣)에 왕숙무(王叔武, 王崇文)라는 사람이 사는데 그가 말하길, “대저 시란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소리이다. 지금 길가에서 듣는 소리나 촌구석에서 듣는 노래는 괴롭게 신음하거나 평안하게 읊조리거나 한 사람이 부르면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니 그 노래는 참된 것이요, 이것을 일러 풍(風)이라 한다. 공자께서 ‘예(禮)를 잃거든 촌에서 구하라’고 하셨는데, 지금 ‘진시(眞詩)’는 바로 민간에 있다. 그런데도 문인이나 학자들은 왕왕 리듬 있는 말을 일러 시라 한다. 대저 맹자께서 ‘시가 사라진 후 춘추를 지었다’라고 말씀한 것은 아(雅)에 해당할 따름이다. 그러나 風 또한 마침내 버려져 악관에 의해 채집되고 정리되지 못했으니 슬프도다!”라고 하였다. 이자(李子)가 말하였다. “아! 이상하군요. 정말 그런가요? 내가 전에 민간의 노래를 들어봤었는데 노래의 곡조는 야만[오랑캐]스럽고, 노래에 담긴 생각은 음란했으며, 노래의 소리는 구슬프고, 노래의 가사는 하잘 것 없었으니 바로 금나라, 원나라의 음악이었습니다. 어찌 그것이 참되겠습니까?”
왕자(王子)가 대답하였다. “참되다[眞]는 것은 소리가 발하매 감정이 샘솟는 것입니다. 옛날부터도 나라의 풍이 달라지면 곧 달라진 풍속이 소리로 이루어지곤 했는데, 지금의 풍속은 이미 오랑캐의 통치를 거쳤으니 그 곡조가 어찌 야만[오랑캐]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참되다[眞]는 것은 소리가 발하매 감정이 샘솟는 것이라 하는 것이니 우아하고 비속함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대가 그 노래를 들으셨다니 그 가락과 소리에 저절로 따라 흥얼거리고 울컥하여 감화되는 것이 없었습니까?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모르지만 길고 짧고 빠르고 느린 속에 조화롭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을 누가 시켜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이자(李子)가 그 말을 듣고는 갑작스레 신이 나서 “훌륭하십니다. 한나라 이래로 이런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자(王子)는 이어 말하였다. “시에는 육의(六義)가 있으니 비(比)와 흥(興)이 그 요체입니다. 무릇 저 문인 학자는 비(比)와 흥(興)이 적고 대번에 말하는 것이 많으니 어째서일까요? 정(情)에서 나온 것이 적고 말에 공교로움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길거리의 저 아둔한 사내들은 지식이란 전혀 없지만 그들이 노래하고 소리 지르고 신음하고 읊조리기를 가거나 앉거나 노래 부르고 먹거나 자거나 돌연 감탄하며 이 사람이 부르면 저 사람이 함께 부르는데 비(比)와 흥(興)이 아닌 것이 없고 그 정(情)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것으로 족히 그 뜻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는 천지자연의 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中略)…
이에 당나라 근체시들을 폐기하고 이백과 두보의 가행(歌行)을 따라 지으니 왕자(王子)는 “이는 말을 달리기 위한 기술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자(李子)가 이에 육조(六朝)의 시를 따라 짓자 왕자(王子)는 “이는 화려한 기교의 나머지입니다”라고 하였고, 이에 위진(魏晉)의 시를 따라 짓자 왕자(王子)는 “시어를 견주며 뜻을 엮었으니 이는 유의함이 있다고 할 만합니다”라고 하였고, 이에 이소부(離騷賦)를 따라 짓자 왕자(王子)는 “뜻은 다르지만 그 말을 본받았으니 이것은 첩경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이에 금조(琴操)의 옛 노래를 따라짓자 왕자(王子)는 “비슷하지만 이는 정수(精髓)가 아닙니다[糟粕]”라고 하였고, 이에 사언시(四言詩)를 지어 풍(風)에 들어가고 아(雅)에서 나오자 왕자(王子)는 “거의 가깝습니다. 하지만 소용될 바가 없으니 그대는 이제 그만 두시오”라고 말하였다.
曹縣盖有王叔武云, 其言曰: ‘夫詩者, 天地自然之音也. 今途咢而巷謳, 勞呻而康吟, 一唱 而羣和者, 其眞也, 斯之謂風也. 孔子曰「禮失而求之野」, 今眞詩乃在民間, 而文人學子顧往往爲韻言, 謂之詩. 夫孟子謂「詩亡然後春秋作」者, 雅也. 而風者亦遂棄而不采不列之樂官, 悲夫!’ 李子曰: ‘嗟! 異哉! 有是乎? 予嘗聆民間音矣, 其曲胡, 其思淫, 其聲哀, 其詞靡靡, 是金元之樂也. 奚其眞?’
王子曰: ‘眞者, 音之發而情之原也. 古者, 國異風即其俗成聲, 今之俗既歷 胡, 乃其曲烏得而不胡也? 故眞者, 音之發而情之原也, 非雅俗之辨也. 且子之聆之也, 亦其譜 而聲者也. 不有率然而謠, 勃然而訛者乎? 莫知所從来而長短疾徐無弗諧焉, 斯誰使之也?’
李子聞之, 矍然而興曰: ‘大哉! 漢以来, 不復聞此矣.’
王子曰: ‘詩有六義, 比興要焉. 夫文人學子 比興寡而直率多, 何也? 出於情寡, 而工於詞多也. 夫途巷蠢蠢之夫, 固無文也, 乃其謳也, 咢也, 呻也, 吟也, 行呫而坐歌, 食咄而寤嗟, 此唱而彼和, 無不有比焉興焉, 無非其情焉, 斯足以觀義矣. 故曰「詩者, 天地自然之音也」.’ …(中略)…
于是廢唐近體諸篇, 而爲李杜歌行, 王子曰: ‘斯馳騁之技也.’ 李子於是爲六朝詩, 王子曰: ‘斯綺麗之餘也.’; 於是詩爲晉魏, 曰: ‘比辭而屬義, 斯謂有意.’; 于是爲賦騷, 曰: ‘異其意而襲其言, 斯謂有蹊.’; 于是爲琴操古歌詩, 曰: ‘似矣, 然糟粕也.’; 于是爲四言入風出雅, 曰: ‘近之矣, 然無所用之矣. 子其休矣.’ -李夢陽, 「詩集 自序」
이몽양은 참된 시란 무엇인가에 관한 왕숭문의 깨우침과 그것을 통해 계도(啓導) 받은 바를 실천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술회하였다. 왕숭문은 운율을 지닌 언어구조물을 시로 여기는 문인, 학자들의 통념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참된 시[眞詩]를 내세웠는데, 왕숭문이 생각한 ‘진시’는 천지자연의 소리를 담고 있는 민간의 노래였다. 이몽양이 이에 민간의 노래가 지닌 야만성, 음란성, 조야함 등을 들어 이견을 표하자, 왕숙문은 진(眞)이란 비속함과 우아함에 상관없이 저절로 나오는 감정[情]으로 그 자연한 속성으로 감동을 유발하는 것인데, 문인 학자들의 시는 정(情)을 표출하는 비(比)와 흥(興)이 적고 이치(理致)를 드러내기 위한 공교로움이 승하여 천지자연의 소리가 주는 감동이 없다고 하였다. 왕숭문의 깨우침에 계도(啓導)된 이몽양은 이 ‘진시’를 구현하기 위해 20여 년간 시업(詩業)에 매진하였는데, 이몽양이 선택한 것은 시간을 소급하여 가는 복고의 방법이었다. 이몽양은 왕숭문을 만나기 전에 추구했던 당나라 근체시를 버리고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가행(歌行)→육조(六朝)의 고시(古詩)→위진(魏晉)의 고시(古詩)→초사(楚辭)→고시가(古詩歌)→『시경(詩經)』 사언시(四言詩)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소급해가는 복고(復古)의 과정을 통해 민간 노래에 보존되어 있는 ‘진시’의 원형을 찾고자 하였다.
윗글에 제시된 ‘진시’에 대한 왕숭문의 견해는 정치적 질곡(桎梏)으로 도탄(塗炭)에 빠진 현실을 도외시한 채, 관습적으로 태평을 노래하던 사대부 문학의 매너리즘을 민간의 노래를 통해 쇄신하려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들이 찾고자 했던 ‘진(眞)’은 그들이 구속으로 여겼던 사상을 떼어버린 결과【명대 복고파의 문학적 지향은 순수문학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 명대 복고파는 주자학이 문학을 억압한다고 여기고 문학에서 사상의 그늘을 걷어내는 데 주력했다. 명대 복고파의 성리학에 대한 반발과 송시 배척에 대해서는 陳國球, 『明代復古派唐詩論硏究』, 北京大學 出版社, 2007, 37~49면; 박석,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문학을 어떻게 보았는가』, 역락, 2005, 230~236면 참조.】, 담고 있는 내용이 공허해졌다. 그들의 ‘진시’론은 민간의 노래에 자연의 소리가 있으니, 그러한 원형이 많이 남아있는 작품을 배우자는 것을 넘어서지 못하였고, 작시의 주체인 작가와 작시의 객체인 대상의 문제 등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마련하지 못한 채, 시의 형식적인 측면에 편중되는 모습을 보였으며【王運熙·顧易生 主編, 『中國文學批評通史5·明代』, 149~151면 참조.】 그런 편중이 가속화될수록 그들이 추구하던 ‘진시’는 애초의 지향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명대 복고파의 이 같은 복고 논리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이들의 복고가 정신적 가치 차원이 아니라 문학적 수사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몽양은 복고를 통해 획득해야 할 법(法)에 대해 원을 그리고 네모를 그릴 때 규(規)와 구(矩)가 사용되듯 고인의 법을 조금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고【“古之工如倕如班, 堂非不殊, 戸非同也, 至其爲方也圓也, 弗能舎規矩, 何也? 規矩者, 法也. 僕之尺尺而寸寸之者, 固法也.”; “古人之作, 其法雖多端, 大抵前疎者後必密, 半濶者半必細, 一實者必一虛, 疊景者意必二, 此予之所謂法, 圓規而方矩者也. -李夢陽, 『空同集』권62 「再 與何氏書」”】 후칠자의 영수였던 이반룡은 당송파의 이몽양 비판에 대해서 당송파 문인들이 이몽양만한 글을 쓸 능력이 없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라 폄하하였으며【以余觀於文章, 國朝作者無慮數十家稱於世, 即北地李獻吉輩, 其人也. 視古修辭, 寕失諸 理? 今之文章如晉江[王愼中]ㆍ毘陵[唐順之]二三君子, 豈不亦家傳户誦? 而持論太過, 動傷氣 格, 憚於修辭, 理勝相掩.…(中略)…今之作者, 論不與李獻吉輩者, 知其無能爲已. -李攀龍, 『滄溟集』권16 「送王元美序」】 지금 작가들은 학문도 부족하고 재주도 모자라서 고어(古語)를 쓰지 않기 때문에 시의 우아함이 병들었다고 개탄하기도 하였다【譬之車, 韻者, 歌詩之輪也. 失之一語遂玷, 成篇有所不行. 職此其故, 盖古者字少, 寕假借必 諧聲韻 無弗雅者. 書不同文, 俚始亂雅, 不知古字旣已足用, 患不博古耳, 博則吾能徴之矣. 今 之作者限於其學之所不精, 苟而之俚焉; 屈於其才之所不健, 掉而之險焉, 而雅道遂病. -李攀龍, 『滄溟集』권15 「三韻類押序」】. 이처럼 명대 복고파의 복고가 모의로 귀결되었다고 판단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명대 복고파의 복고는 진짜 복고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복고를 통해 고의 정신, 전범에 녹아있는 정신을 배우고자 했던 백악시단은 명대 복고파와는 달리 법(法)의 문제를 상대화시킬 수 있었다. 수사 원리로서의 법(法)을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시의 도(道)는 법(法)이 없어서도 안 되지만 법(法)에 구속되어서도 안 된다. 나는 일찍이 주자께서 시를 논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풍아(風雅)의 정(正)과 변(變)을 구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단호하셨지만 어떤 사람의 질문에 답하면서는 “관관저구(關關雎鳩) 노래가 어디에서 나왔겠는가?”라고 하셨으니 명쾌하도다, 그 말씀이여! 천고(千古)의 고착된 견해를 깨뜨릴 만하니 족히 성병(聲病)에 빠진 자를 살려낼 수 있는 말씀이다. 대저 시란 무엇인가? 성령에 근원하고 물상을 빌리며 파랗고 노란 색 을 섞어 무늬를 만들고, 궁(宮)과 상(商)의 소리를 번갈아 가락을 만드는 것이니 불변의 법칙[典要]을 세우는 것은 불가하고 오직 변화하는 대로 따를 뿐이다. 정신은 정해진 방향이 없고 역(易)은 정해진 형체가 없으니 시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물상에 전변(轉變)한 바 있으면 눈 속의 파초 그림도 가할 것이요, 경지에 빠진 바 있으면 겨자씨 속에 수미산도 가하다. 이것이 어찌 안배(安排)와 구체(拘滯)로써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詩之爲道, 不可無法, 不可爲法所拘也. 不佞嘗聞朱子之論詩矣. 其於風雅正變之別, 非不截然, 至答或人之問, 則曰: ‘關關雎鳩, 出自何處?’ 快哉斯言! 可以破千古膠固之見, 而足爲聲病 家活句矣. 夫詩何爲者也? 原於性靈, 假於物象, 靑黃之錯爲文, 宮商之旋爲律, 不可爲典要, 惟變所適. 神無方而易無體, 詩亦如之. 故象有所轉, 雪中芭蕉可也; 境有所奪, 芥裏須彌可也. 是豈可以安排ㆍ拘滯爲哉? -金昌翕, 『三淵集』권23 「何山集序」
김창흡의 이 글은 18세기 시풍의 변화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게 거론되는 글이다【안대회, 앞의 책, 69~70면; 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1, 28면 참조.】. 김창흡은 시 창작에 있어 ‘법(法)이 없어서도 안 되지만 법(法)에 구속되어서도 안 된다’고 단언하며 글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최고의 전범인 『시경』의 「관저(關雎)」 노래는 다른 전범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전범이 되었음【강명관,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소명출판, 2007, 155면 참조.】을 암시하는 주자의 견해를 빌려 전범과 법의 문제를 환기시켰다. 이어 시를 정의하면서 시는 성령에 근원한 것으로 물상에 가탁하는 형상화와 시각적, 음악적 수사가 더 해진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천고에 변치 않는 창작 원리[法]란 존재하지 않고 변화하는 법(法)이 있을 따름이라며 명대 복고파에게는 불변의 창작 원리로 여겨졌던 법(法)을 가변적인 것으로 상대화시켰다.
김창흡의 시에 대한 정의는 일정한 단계를 밟고 있는데 첫 번째는 창작 주체의 성령, 두 번째는 창작 대상인 물상, 세 번째는 창작 기법인 수사이다. 이 세 가지 단계는 본말(本末)의 구도를 이루면서 김창흡이 창작에 있어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백악시단은 창작 주체의 내면적 경지를 중시하였는데, 그러한 입장이 김창흡에게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김창흡의 이어지는 서술 들은 이러한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시란 작가의 자유로운 정신이 천태만상의 대상과 조우하고 거기서 발현된 정감을 형상화하는 것인데, A라는 상황에서는 a를, B라는 상황에서는 b를 써야한다는 법은 자유롭고 창조적인 작가정신을 구속하게 된다. 인용된 ‘눈 속의 파초그림’와 ‘겨자씨 속의 수미산’은 작가의 정신이 도달한 심오한 경지로서 김창협의 언어를 빌리자면 “신해묘오(神解妙悟)”의 경지인 것이다. 김창흡은 이러한 경지는 수사 차원의 안배나 법을 따르는 것으로 절대 도달할 수 없다며 법(法)을 절대시하는 입장을 반대하였다. 이처럼 김창흡은 작가의 자유롭고 오묘한 정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수사 원리로서의 법(法)에 얽매이지 말자는 주장을 세울 수 있었다. 수사 원리로서의 법을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백악시단은 법(法) 대신에 창작 주체의 인격적 조건을 중시하였다. 앞서 본 김창협의 글에서 송남수의 인격과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 시를 ‘진시’라 규정했던 사실을 상기하면, 백악시단의 ‘진시’는 감정의 솔직함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한 감정이되, 그것은 부단한 학문과 수양을 통해 천부의 상태로 정화된 감정이었다.
그렇다면 백악시단과 명대 복고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무엇에서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문학과 사상과의 관계 설정에서 기인한다. 명대 복고파는 문학에서 성리학의 구속을 배제하려 한 반면, 백악시단은 주자학을 토대로 자신들의 시론을 정립하였다. 도(道)와 문(文)은 하나여야 한다는 입장을 지녔던 백악시단은 명대 복고파가 시에서 사상성을 떼어버리고 표현미만을 추구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김창협의 편지글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참조가 된다.
악아(嶽兒)가 아무개의 글을 소매에 담아왔기에 두세 번 읽어보았네. 진실로 앞선 편지에서 평한 바와 같았으니 주자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의사(意思)를 훙기감발(興起感發) 시키지 못한다.”는 것이었네. 한낱 수사법만을 숭상하고 실다운 이치[實理]에는 근거하지 않았으니 그 폐단이 진실로 이와 같을 수밖에 없네. 가령 식암(息庵, 金錫冑)의 글은 수사법을 숭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정신의 관건(關鍵) 또한 스스로 굳세고 분명하니, 섬세하고 화려하기만 하여 뼈대가 없는 글과는 같지 않다네.
嶽兒袖來某人文字, 再三讀之, 誠如前書所評正, 朱子所謂‘不能起發人意思’者. 徒尙辭法, 不靠實理, 其弊固應如此. 如息菴文字, 非不尙辭, 而然其精神關鍵亦自悍緊切確, 不如是綿靡 少骨也. -金昌協, 『農巖集』권11 「與子益」
김창협은 창작의 핵심으로 ‘실리(實理)’를 들고, ‘실리(實理)’에 근거하여 형상화된 시라야 ‘사람의 의사(意思)를 흥기 감발시킬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면서 주자의 발언을 인용 하였다. 주자는 모범적인 작문이란 실재에 근거하여 조리(條理)를 갖추어야 한다고 전제한 뒤, 실재에 근거하여 조리를 갖춘 문장으로는 구양수와 소동파의 작품을, ‘허구[架空]’로 지어진 문장으로는 진관(秦觀, 1049~1100)의 「용정기(龍井記)」를 대비시키며 「용정기(龍井記)」는 ‘허구[架空]’로 지어진 탓에 ‘사람의 의사를 흥기 감발시키지 못한다’고 한 바 있다【因論文曰: ‘作文字須是靠實,說得有條理乃好,不可架空細巧. 大率要七分實,只二三分文. 如歐公文字好者,只是靠實而有條理, 如張承業及宦者等傳自然好. 東坡如靈壁張氏園亭記最好,亦是靠實. 秦少游龍井記之類,全是架空說去,殊不起發人意思.’ -『朱子語類』권139】. 김창협은 작문에 관한 주자의 견해를 인용하며 아무개 의 글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이는 김창협의 비평에 있어 주자의 작문 관이 얼마나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김창협은 주자가 언급했던 ‘실(實)’과 ‘가공세교(架空細巧)’를, ‘실리(實理)’와 ‘사법(辭法)’으로 전환하여 논리를 전개했는데, ‘실(實)’을 ‘실리(實理)’의 의미로 심화시킨 점은 주목을 요한다. 주자의 발언 속의 ‘실(實)’은 ‘실재’ 혹은 ‘사실’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김창협은 주자가 말한 ‘실(實)’에 ‘리(理)’를 더해 사변적 색채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 그런 까닭에 주자는 창작에 있어 ‘허구[架空]’와 ‘지나친 기교[細巧]’를 경계하는 데 그친 반면, 김창협은 문장의 성취를 ‘정신관건(精神關鍵)’과 같은 고도의 정신성에서 구하게 되었다【시문 창작이 ‘실리(實理)에 근거해야 한다’는 김창협의 의식은 자신의 철학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김창협은 자기 학통의 연원이 되는 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설(說)을 계승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여겨질 수 있는 리(理)에 대해, 온통 탁기(濁氣) 뿐인 사람도 리(理)의 순선한 단초를 지니고 있다는 ‘이기승부(理氣勝負)’론(論)을 통해 리(理)의 실재성을 강조한 바 있다. (“或疑‘如此則善情宜無時無處而不發矣, 今不能然者, 何也?’ 此無他. 天理有本然輕重之差, 濁 氣有分數多少之異, 而二者迭爲勝負焉耳. 今且以仁言之. 親親重於仁民, 仁民重於愛物. 而就親親而言, 父母之愛重於兄弟, 兄弟之愛重於餘親, 此天理輕重之差也. 自中人以下, 其氣有四五分濁者, 有六七分濁者, 有八九分濁者, 至於十分而極焉, 此濁氣多少之異也. 氣之濁者四五 分, 則其情之發於愛物者已少, 而發於親親仁民者尙多也. 又降而氣之濁者六七分, 則其情之發於仁民者亦少, 而發於親親者尙多也. 又降而氣之濁者八九分至於十分, 則其情之發於親親者幾希, 而亦不能不發於父子之親, 如向所云者. 此蓋理氣相勝負之大畧也. -金昌協, 『農巖續集』 卷下 「四端七情說」” 이같은 ‘리(理)의 실재성’에 대한 강조는 시문 창작에 있어서도 대상에 내재한 이치를 포착하고 그것을 체인하는, 고도의 정신적 감수과정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창협과 그의 사우들이 리(理)의 실재성을 강조하는 사유를 바탕 으로 낙론(洛論)을 형성해 갔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성산의 『조선후기 낙론계 학풍의 형성과 전개』, 지식산업사, 2007, 이천승의 『농암 김창협의 철학사상연구』, 학술학술정보, 2006, 문석윤의 『호락논쟁(湖洛論爭) 형성과 전개』, 동과 서, 2006 등에 자세하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학시(學詩)에 있어서는 전범에 온축된 고인의 정신을, 창작에 있어서는 대상과 주체간의 정신적 감수를 중시하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자신들의 시론을 개진하면서 일관되게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도(道)와 문(文)의 관계를 불가분으로 여겼던 유가 전통의 문학관, 특히 그것을 정식화한 송대 성리학의 문학관에 근원을 두고 있다. 특히 사상은 물론이요, 시문 창작에도 수준 높은 성취를 보였던 주자의 견해는 백악시단의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백악시단을 위시한 조선후기의 문인들은 주자학과 문학을 대척적으로 사고하지 않았다. 김창흡은 시에 대한 주자의 안목과 관련하여 “주자는 젊어 선체(選體, 文選)를 학습하면서 유병옹(劉病翁, 劉子翬), 황자후(黃子厚, 黃銖)와 서로 연마한 까닭에 풍아의 원류에 대한 안목이 자별하였으니, 그의 시평은 구양수와 소식 등 여러 사람보다 월등하게 뛰어나다. 호담암(胡澹菴, 胡銓)이 일찍이 시에 능한 선비를 천거할 적에 주자가 거기에 들어있었다. 주자를 기리기를 도학으로 하지 않고 시로써 하였으니 비록 비루하고 조야한 듯하지만, 또한 시가(詩家)의 지음이라 이를 만하다[朱子少學選體, 與劉病翁ㆍ黃子厚上下磨礱, 故其於風雅源流眼目自別, 其所評詩大勝歐ㆍ蘇諸子. 胡澹菴嘗薦能詩之士, 而朱子與焉. 稱譽朱子, 不以道學而以詩, 雖似陋野, 亦可謂詩家賞音矣. -金昌翕, 『三淵集』권36「漫錄」]”라 하면서 주자가 도학뿐만 아니라 시학에 있어서도 대단한 경지에 있었음을 특기하였다. 특히, ‘주자가 풍아(風雅)의 원류에 대한 안목이 자별하였다’는 발언은 풍아의 원류를 궁구하여 시도(詩道)를 세우겠다던 김창흡 자신의 지향과 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또한 홍한주(洪翰周)는 “문장은 유자의 말사이며 시는 또 문장의 말사이다. …(中略)… 이 때문에 염락(濂洛)의 문하에서는 아무도 시를 공 교롭게 잘 짓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자(朱子)에 이르러서는 시를 잘 지어 천거하기까지 하였다. 뒤에 주자가 늘 시를 지은 것을 회한하였으나, 만년에 이르기까지 더욱더 정밀해지고 작품 수도 많아졌으니, 시가 과연 주자에게 무슨 누가 되었겠는가? 우리나라 제현(諸賢)들은 주자를 본받은 바가 많아서, 퇴계와 율곡과 우암도 모두 시를 지었다. 만약 고정(考亭)이 정숙자(程叔子, 程頤)처럼 시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제현(諸賢)들도 반드시 한 구절의 한가한 말도 짓지 않았을 것이다. -洪翰周, 『智水拈筆』; 이현일, 「紫霞詩硏究」,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73면에서 재인용.”라며 주자의 시재는 도학에 누가 되지 않았고 그런 까닭의 조선의 제현들도 시 창작을 몰가치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시 창작과 비평에서도 높은 안목을 지녔던 주자의 위상은 조선의 문인들로 하여금 재도(載道)의 방편으로 시 창작에 적극 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시도(詩道)를 재건하겠다는 포부를 지녔던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시학을 단순한 기예의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주자학의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들과 일맥상통하는 시론을 정립하는 데 자신들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천기론(天機論)’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상론하기로 한다.】.
주자는 도와 문은 근본과 지엽의 차이는 있지만 문(文)은 도(道)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문과 도는 하나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道者, 文之根本; 文者, 道之枝葉. 惟其根本乎道, 所以發之於文, 皆道也. 三代聖賢文章皆 從此心寫出, 文便是道. 今東坡之言曰‘吾所謂文, 必與道俱’, 則是文自文而 道自道, 待作文 時旋去討箇 道來入放裏面, 此是他大病處. -『朱子語類』권139】. 그렇기 때문에 문이란 감 정대로 망언을 늘어놓거나【夫文與道果同耶異耶? 若道外有物, 則爲文者可以肆意妄言而無害於道. 惟夫道外無物, 則言而一有不合於道者, 則於道爲有害, 但其害有緩急深淺耳. 屈宋ㆍ唐景之文, 熹舊亦嘗好之矣, 旣而思之, 其言雖侈然, 其實不過悲愁放曠二端而已. 日誦此言, 與之俱化, 豈不大爲心害? 於是屛絶不敢復觀. -『晦庵集』권33 「答吕伯恭」】 기교나 뽐내는 것이 아니었다. 주자의 문학론에서 창작과 비평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바로 ‘정신’에 있었다. 주자가 학고(學古)의 자세로 고인의 문자를 자세히 음미하여 고인의 경지를 이해할 것을 제시하고【“夜來鄭文振問:‘西漢文章與韓退之諸公文章如何?’ 某說: ‘而今難說. 便與公說某人優, 某人劣,公亦未必信得及. 須是自看得這一人文字某處好,某處有病,識得破了,卻看那一人文字,便見優劣如何. 若看這一人文字未破,如何定得優劣! 便說與公優劣,公亦如何便見 其優劣處? 但子細自看,自識得破. 而今人所以 識古人文字不破,只是不 曾子細看. 又兼是先將自家意思橫在胸次,所以見從那偏處去,說出來也都是橫說.’-『朱子語類』권137”; “因改謝表,曰: ‘作文自有穩字. 古之能文者,纔用便用着這樣 字,如今不免去搜索修改.’ 又 言: ‘歐公爲蔣穎叔輩所誣,旣得辨明,謝表中自敘一段,只是自胸中流出,更無些窒礙 ,此文章之妙也.’ -『朱子語類』권139”】, 금인(今人)의 작문 태도를 수사나 기교의 측면에서 비판하며 창작에 있어 ‘식(識)’과 ‘덕(德)’을 강조한 것【“前輩文字有氣骨, 故其文壯浪. 歐公ㆍ東坡亦皆於經術本領上用功. 今人只是於枝葉上粉澤爾,如舞訝鼓然. 其間男子ㆍ婦人ㆍ僧ㆍ道ㆍ雜色,無所不有, 但都是假底. 舊見徐端立 言,石林嘗云: ‘今世安得文章! 只有箇減字ㆍ換字法爾. 如言『湖州』, 必須去『州』字, 只稱『湖』, 此減字法也;不然則稱『霅上』, 此換字法也.’ -『朱子語類』권139”; “今人作文,皆 不足爲文. 大抵專務節字,更易新好生面辭語, 至說義理處,又不肯分曉. 觀前輩歐ㆍ蘇諸公作 文,何嘗如此? 聖人之言坦易明白,因言以明道,正欲使天下後世由此求之. 使聖人立言要敎 人難曉,聖人之經定不作矣. 若其義理精奧處,人所未曉,自是其所見未到耳. 學者須玩味深 思,久之自可見. 何嘗如今人 欲說又不敢分曉說 ! 不知是甚所見, 畢竟是自家所見不明,所以 不敢深言,且鶻突說在裏. -『朱子語類』권139”】 등은 모두 도문학(道問學)을 통해 완성된 인격체를 지향하는 주자학 일반의 논리가 문학에도 일관된 결과였다. 아래 인용문 또한 주자 문학론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제가 듣기로 시는 지(志)가 가는 것이니 마음에 있으면 지(志)의 상태요, 언어로 발출되면 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시라는 것에 어찌 또 공졸(工拙)이 있겠습니까? 또한 그 지(志)가 향하는 바의 고하를 볼 따름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군자는 덕이 충만해야 구했으니 그 지(志)는 반드시 고명(高明)하고 순일(純一)한 곳에서 나오게 되었고 시 창작을 배우지 않고도 능히 할 수 있었습니다. 격률의 정조(精粗)나 용운(用韻)·속대(屬對)·비사(比事)·견사(遣辭)의 잘잘못과 같은 문제에 있어 지금 위진 이전의 여러 현인들의 작품을 보건대 대개 그런 문제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고시(古詩)에 있어서겠습니까? 근세의 작자들에 이르러 비로소 이런 문제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에 공졸(工拙)의 논의가 있게 되었고 그러면서 화려한 표현이 승하고 언지(言志)의 공은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熹聞詩者志之所之, 在心爲志, 發言爲詩. 然則詩者豈復有工拙哉? 亦視其志之所向者高下如何耳. 是以古之君子, 德足以求, 其志必出於高明純一之地, 其於詩固不學而能之. 至於格律之精粗ㆍ用韻·屬對·比事·遣辭之善否, 今以魏晉以前諸賢之作考之, 盖未有用意於其間者, 而況於古詩之流乎? 近世作者乃始留情於此, 故詩有工拙之論, 而葩藻之詞勝, 言志之功隱矣. -『晦菴集』권39 「答楊宋卿」
주자는 중국 고래의 ‘시언지(詩言志)’설에 입각하여 창작 주체가 갖추어야 할 요건과 수사의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주자는 시의 성취는 시에 담긴 작가의 지(志)가 어떠한지에 달려있다고 전제한 뒤, 지(志)가 향하는 바가 고명하고 순일해질 수 있는 바탕으로 작가의 인격적 측면, 즉 ‘덕(德)’을 내세웠다. 이는 주자가 작가의 수양된 내면 경지를 창작과 비평의 관건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편지 하단에서는 근세 작자들이 시문을 수사적 측면으로 만 접근하는 문제에 대해 비판과 우려를 표하였는데 이는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주자의 인식을 분명히 보인 것이다. 주자는 다른 언설을 통해 당 대 작가들이 수사에 경도되는 문제를 거듭 비판하였는데, 경술(經術)의 본령상(本領上)에서 시문 창작을 사고하지 않고, 지엽적인 수사에만 골몰하는 당대의 작품들을 두고 ‘가짜’라 비판하기도 하였다【前輩文字有氣骨, 故其文壯浪. 歐公ㆍ東坡亦皆於經術本領上用功. 今人只是於枝葉上粉澤爾, 如舞訝鼓然. 其間男子ㆍ婦人ㆍ僧ㆍ道ㆍ雜色, 無所不有, 但都是假底. 舊見徐端立言, 石林嘗云: ‘今世安得文章! 只有箇減字ㆍ換字法爾. 如言『湖州』, 必須去『州』字, 只稱『湖』, 此減字法也;不然則稱『霅上』, 此換字法也.’ -『朱子語類』권139】.
양란 후의 재건과정에서 주자학의 강화를 사상적 방편으로 삼았던 조선 사상계의 형편【조선후기의 사상계가 정주학(程朱學)과 육왕학(陸王學)을 정학(正學)과 이단(異端)으로 철저하게 대립시키며 정학(正學)의 수호를 세도(世道)의 책임으로 여겼던 데에는 조선후기 집권층의 세계인식이 담겨있다. 그들은 명나라 멸망의 원인을 주자학의 쇠퇴, 양명학의 득세 때문이라고 진단하고[“上曰: ‘陽明之 學自陸九淵爲始乎?’ 光益曰: ‘陸九淵與朱子同時, 朱子則用力於章句, 九淵則專主尊德性, 而其學偏枯, 殊不知朱子兼尊德性ㆍ道問學而用工矣.’ 壽期曰: ‘朱子之意, 蓋謂道問學然後, 可以尊德性, 非是專主道問學矣.’ 光益曰: ‘朱子嘗言「陸學之害, 甚於洪水猛獸矣」, 至明時, 陽明尊尙陸學, 故其學遂大行矣.’ -『承政院日記』英祖 3년 10월 18일”; “上曰: ‘尊德性而不爲 道問學, 則此陸ㆍ王之學也.’ 晩曰: ‘王陽明亦有用者也.’ 鍾正曰: ‘王守仁, 將相之才, 故謂之有用者. 而其學則借吾儒而明佛老之說, 末流之害, 浸漬瀰漫, 馴致夷狄之亂華, 則皇明之用㭬, 未必非陽明學之崇也.’ -『承政院日記』 英祖 34년 7월 2일”], 아울러 병자호란 당시 청(淸)이 조선을 병탄하지 못한 것은 주자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기도 했다[上曰: ‘漢宋則以仁厚立國, 蓋與我朝略似矣.’ 顯重曰: ‘然矣.’ 上曰: ‘彼人見我國之冠制, 往往撫之而發嘆云, 安知其尙今如此耶? 我國則尙思皇朝, 皆知尊周, 此所謂夷狄之有君, 不如 諸夏之無者也. 匪風下泉之思, 不在於中國, 而獨存於偏邦, 我國之明於義理, 於此可知矣.’ 顯 重曰: ‘我國之土地ㆍ兵力, 非有可恃, 而只是節義有足以動人, 丙子淸人之不 敢生竝呑之心, 非不爲也, 乃不能也.’ -『承政院日記』英祖 3년 10월 18일]. 이들에게 주자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왕조 자체를 유지시키는 현실 그 자체였으며 하나의 헤게모니였던 것이다.】과 주자학 강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노론의 정치적 입장을 염두에 두면,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주자의 사상을 자신들의 가치체계로 신념화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자득’의 학문자세를 견지한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주자의 일언일자(一言一字)를 묵수(墨守)하지 않았음은 앞서 살핀 바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시한 자득은 학문적 내실을 기하기 위한 방편이었지 주자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교조화되던 주자학자들을 비판하며 주자학의 ‘여전한’ 현실 대응력을 천명하기 위해 자신들의 학문을 심화시켜 나갔다【김창협과 김창흡을 위시한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양명 심학(心學)를 비판하며 주자 심학(心學)을 자기 철학의 전면에 내세웠던 점은 이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낙론의 사상적 특징을 낙론의 심학화(心學化) 과정 내지는 낙론의 심학풍(心學風)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재고될 여지가 있다.】.
백악시단의 ‘진시’는 그 토대를 주자학에 두고 있다. 김창협이 ‘언어모의’가 아니라 ‘신해묘오(神解妙悟)’를 내세우고, 김창흡이 시어 선택의 문제를 자기 의사[정신]의 발출과 연결시키며, 신정하가 성조나 격률보다는 고인의 문장에서 고인의 정신을 체득할 것을 주장하고, 이하곤이 도문합일(道文合一)의 관점에서 창작의 근본 원리로 ‘식(識)’을 내세운 것 등은 모두 앞서 본 주자의 문학론과 상통한다. 특히 정신적 가치를 소홀히 하고 수사에 치중하는 것을 ‘가짜’라고 본 주자의 견해는 백악시단이 주장하는 ‘진시’의 핵심논리와 통한다. 이러한 관점에 서 있던 백악시단에게 명대 복고파의 복고 논리는 ‘가짜’일 수밖에 없었다. 참된 인성(人性)을 살필 수 있는 시가 ‘진시’인데, 자꾸만 남[古人]의 말을 가져다 자기를 분식(粉飾)해버린 까닭에 작가의 참모습을 볼 수 없는 시, 백악시단의 눈에 복고파의 시는 ‘가짜 시’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명대 복고파의 문예론이 일방적으로 매도된 것은 아니었다.
명대 복고파가 민간의 노래에서 ‘진’을 주목한 것은 조선의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백악시단의 선배 문인이었던 김만중(金萬重)은 주지하듯 “여항의 나무꾼과 물 긷는 아낙네들이 어이 어이 하며 서로 주고받는 것은 비록 비리(鄙俚)하다 하더라도 참과 거짓으로 판정한다면 참으로 학사 대부의 이른바 시부(詩賦)와 같은 수준에서 말할 수 없다[閭巷間樵童汲婦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同日而論. -金萬重, 『松江全集』「題諺騷後」].”고 하면서 민간문학의 가치를 적극 인정하였는데, 이는 김만중이 주자의 복고적 문학론 위에서 명대 복고파의 논리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안대회, 「17세기 비평사의 시각에서 본 김만중의 복고주의문학론」, 『민족문학사연구』 20, 2002, 22~25면 참조.】. 김창흡 또한 민간가요의 가치를 아래와 같이 옹호하였다.
정자와 주자의 설은 모두 아(雅)가 풍(風)보다 낫다고 하니 그 말이 모두 정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천진(天眞)이 드러남에는 안배를 용납하지 않으니 거리의 아이들이나 마을의 부녀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많다. 저 노성한 사대부들은 붓에 먹물을 묻히고 초고를 쓴 뒤 어떤 경우에는 여러 차례 자구(字句)를 고쳐 쓰는 데, 그렇게 하면 말은 비록 정당하게 되지만 점점 천기(天機)와 간격이 있게 된다. 이런 까닭에 동요는 근거가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대개 영험함이 많으니 신명이 내려와서 안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程朱之說, 皆云雅勝乎風, 以其語皆正當. 而竊謂天眞呈露, 不容安排, 多在於街童巷女之口氣. 若老成士大夫濡毫起草, 容或有累次點竄, 則命辭雖當, 而稍與天機有間矣. 以是之故, 童謠沒巴鼻者, 槩多靈驗, 以其神來而不安排也. -金昌翕, 『三淵集』권35 「日錄 庚子」 3월 12일
이 글은 김창흡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720년에 쓴 글이다. 민간의 노래가 자구를 다듬는 노성한 사대부의 시보다 낫다는 논리를 폈는데, 이는 명대 복고파, 그리고 선배 김만중의 논리와 흡사하다. 다만 김창흡은 민간의 노래를 진가(眞假)의 문제를 넘어 천기(天機)와 영험(靈驗)의 문제로까지 확장하였다. 천기(天機)대로 나오는 노래이므로 그것이 참됨은 물론인데 여기에 ‘신(神)’이라는 특성을 더하여 ‘정신의 발출’이라는 측면에서 민간가요의 의의를 조명하였다.
아울러 명대 복고파가 시의 문예성을 중시한 것 또한 백악시단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이몽양은 송시를 비판하면서, “송인들은 이치를 앞세웠기 때문에 이치가 담긴 말을 만들었다. 이에 바람, 구름, 달, 이슬 등의 시어를 얕게 보아 일체를 없애고 쓰지 않았다. 또 시화(詩話)를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시를 알 수 없게 하였다. 시라고 어찌 일찍이 이치가 없겠는가? 만약 이치가 담긴 말만 오로지 쓸 것이면 어째서 산문을 짓지 않고 시로 쓰단 말인가[宋人主理, 作理語. 於是薄風ㆍ雲ㆍ月ㆍ露, 一切剷去不爲. 又作詩話, 教人人不復知詩矣. 詩何嘗無理? 若專作理語, 何不作文而詩爲邪? -李夢陽, 『空同集』권52 「缶音序」]?”라고 한 바 있는데, 이몽양의 발언은 송시에 대한 비판을 겸하여 시에 대한 장르적 특징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백악시단 가운데 이병연은 주제의식을 직출하는 경향을 지양하고 장면을 툭툭 던져놓은 듯한 형상화로 시적 함축미를 높였는데, 이는 이병연 시의 특징이자 스승 김창흡의 시와 가장 구분되는 점이다. 김창흡의 시가 말하기 위주의 형상화를 통해 송시적 특징을 보인다면, 이병연의 시는 보여주기 위주의 형상화를 통해 당시적 특징을 보인다. 이병연 시의 이러한 면모는 시에 있어서 의론성을 거부하고 문예성을 중시한 명대 복고파의 입장과 유사한 면이 있다【안중관(安重觀)은 그의 시 「만출강상차동파률(晩出江上次東坡律)」의 미련에서 “一尊寒食近, 佳句憶于鱗.”이라 한 뒤 “于鱗, 擬李槎川”이란 주석을 통해 이병연을 이반룡에 비의(比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병연은 지명이나 인명과 같은 고유명사를 시어로 자주 애용하였는데, 가령 “仲秋已過重陽近, 奈此李翁携李君. 白酒酤來金老軀, 黃花乞取趙將軍. -『槎川詩選批』 卷下 「屬半癡」”같은 경우는 기구(起句)를 제외하고는 모든 구에 인명을 활용한 시어를 쓰고 있다. 안대회는 이러한 경향을 당시를 배우던 명대 시인들의 작풍이라 하였다. -안대회, 앞의 책, 121~122면 참조.】. 물론 이러한 특징은 영향 관계로 논할 것이 못 된다. 다만, 명대 복고파의 문예 중심적 시론은 백악시단의 문인들, 특히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에게 시의 장르적 본질에 대해 사고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병연을 위시한 후기 백악시단의 작가들은 작품에 내재해야 할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그것을 설교식으로 직출하기보다는 고도의 함축을 통해 작품 안에 온축시키는 형상화 방식을 애호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시의 문예성에 대한 관심은 전범의 학습과정에서 형상화의 측면을 주목하게 하였다.
시 창작은 시 안에 갇혀서 시의 부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만약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실재와) 방불(彷佛)하면 어의(語意)는 절로 그 안에 담기게 된다. 고인은 명비(明妃, 王昭君)에 대해 읊으면서 단지 “되놈 땅엔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를 않구나. 저절로 허리띠가 헐렁해진 것 뿐, 가는 허리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라고만 하였는데, 후인(後人)이 지었다면 반드시 명비가 문을 닫은 채 홀로 앉아 연신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흘리며 원통해 하는 모습을 남김없이 표현했을 것 이다. 또 고인은 노승(老僧)에 대해 읊으면서는 단지 “산승이 홀로 산중에서 늙어가 니, 오직 저 찬 솔만이 소년시절 보았으리.”라고 하였는데, 후인이 지었다면 반드시 노승의 어깨가 솟고 눈썹은 길며 무릎이 귀를 지나도록 쭈그려 앉아 비 쩍 말라 흉한 모습을 형용하였을 것이다. 간재(簡齋, 陳與義)는 버들개지를 읊으면서 “미친 듯이 홀연 천 길 높이로 솟았다가, 바람이 잔잔해지자 평온하게 내려온다.”라고 하였으니 절묘하도다! 또 묵매(墨梅)를 읊으면서는 “함장전 처마 아래에서 봄바람을 맞는다.”고 하여 대상이 매화인 것만 알게 할 뿐 그림 매화인지 진짜 매화인지는 모르게 하고, 이어서 “조물주 같은 솜씨는 가을 토끼 모필(毛筆)로 이루어졌네.”라고 하여 대상이 그림 매화인 것까지만 알게 할 뿐 채색 매화인지 묵매인지는 모르게 하고, 이어서 “뜻은 족히 비슷한 모양새를 구하지 않았으니, 전생에 아마 말을 감별하던 구방고였나 보다.”라고 하여 비로소 대상이 묵매였음을 알게 했다. 이처럼 공교로움과 절묘함이 그림자와 메아리 속에 절로 있으니, 풍격과 격조가 한(漢)과 당(唐)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한 배울 수 있으며, 배우면 또한 미칠 수도 있다.
詩不可坐在詩中, 以身爲詩之使, 只以影響彷佛, 則語意自在其中矣. 古人咏明妃, 只曰‘胡地 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後人則必曲盡其閉戶獨坐累唏長歎涕泣哀怨之狀; 咏老僧, 只曰‘山僧獨在山中老, 唯有寒松見少年’, 後人則必形容其肩高眉長膝過於耳癃尫 醜弊之態. 簡齋咏柳絮曰‘顚狂忽作高千丈, 風力微時穩下來’, 妙矣! 咏墨梅曰‘含章簷下春風面’, 則知其爲梅而不知其畵與眞矣; 又曰‘造化功成秋兔毫’, 則知其爲畵而不知其粉與墨矣; 又曰‘意 足不求顔色似, 前身相馬九方皐’, 則始乃知其爲墨梅矣. 如此巧妙自在於影響之中, 風調雖不及 於漢唐, 亦可學也, 學之又能及也. -權燮, 『玉所稿』「文·3」「書贈秀才趙鎭憲」
이 글은 권섭이 71세 되던 1741년, 후배 문인이었던 조진헌(趙鎭憲)에게 시문 창작의 요결을 전하는 장문의 글 가운데 일부이다. 이 글 전체의 전제는, 작문(作文)은 시대마다 각기 고하가 있고 재주에 장단이 있어 억지로 할 수 없으니 다만 다독하여 스스로 익숙하게 할 따름이고, 작시(作詩)는 천기의 유동과 관련이 있어 인력으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각자가 처한 시대, 재주 등의 주어진 조건에 충실하여 각자 일가를 이루면 된다는 것이다【爲文章, 代各高下, 才有長短, 不可强而爲之, 但多讀則自馴熟耳.…(中略)…至於詩, 則自有天機流動者, 非人力所可及.…(中略)…大抵各因其才而充其分, 各自成家可也. 殿屋ㆍ草窩, 貧富不等, 而體段則皆具之矣. 彼稍勝於此, 則輒笑之, 陋矣! 不自知其又有勝於己者又已笑己矣. 上古之於漢ㆍ唐ㆍ宋ㆍ明, 其低而低, 又幾等也. -權燮, 같은 글】. 그런 전제 위에서 권섭은 시 창작의 요결로 ‘시 안에 갇혀서 시의 부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내세웠다. 시의 부림은 받는다는 것은 곧 시를 쓰기 위해 익지도 않은 생각을 억지로 짜내는,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창작을 의미한다. 권섭은 부자연스러운 창작을 지양하며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실재와) 방불하게 되면, 어의(語意)는 절로 그 안에 담기게 된다.”고 하였다. 그림자와 메아리의 속성이 실재를 있는 대로 반영하는 것임을 상기하면, 이 말은 곧 시 창작에 있어 대상을 왜곡 없이 형상화해야 한다는, ‘참됨[眞]’의 문제를 염두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대상을 실재대로 형 상화하면 작가의 뜻이 절로 작품 속에 온축된다고 하였다.
이는 작가와 시적 대상의 관계를 밝힌 발언으로 볼 수 있는데, 권섭이 창작에 있어 시적 대상의 비중을 상대적으로 높게 설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를 자아화하는 서정 장르의 특질상【조동일, 『한국문학통사·1』, 제4판, 지식산업사, 2011, 29면 참조.】, 시는 작시 주체의 주관적 정감이 우선시된다. 그러나 백악시단은 시적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에서 시적 주체의 주관적 정감이 대상을 종속시켜 대상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경계한다. 대상을 진실하게 형상화하면 작가의 뜻이 절로 담기게 된다는 권섭의 발언은 창작에 있어 시적 대상을 중시하는 백악시단의 인식 일반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 창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압축적으로 제시한 권섭은 이어지는 부분에서 모범적 형상화의 예를 제시한다.
제시된 작품과 이에 대한 권섭의 평설은 진실하면서도 문예적인 형상화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시이다. 당나라 동방규(東方虬)의 「소군원(昭君怨)」과 유장경(劉長卿)의 「심성선사난야(尋盛禪師蘭若)」은 대상의 특징적 면모만을 형상화하여 절제미와 함축미를 거둔 작품들이다. 권섭은 「소군원(昭君怨)」과 「심성선사난야(尋盛禪師蘭若)」의 시구를 제시하면서 후인들의 작시 경향을 대비적으로 가정하였는데, 모두 대상을 직접적이고 설명적으로 묘사하는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 후인들이 왕소군(王昭君)의 적막함, 서글픔, 원통함에 대해 남김없이 형상화할 것이라는 가정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고, 후인들이 노승의 늙고 괴이한 모습을 형용하는 데 치중할 것이라는 가정은 대상에 대한 설명적 표현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모범으로 제시된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대상의 특징적 면모만을 제시 함으로써 독자가 형상화된 대상을 통해 작가의 정신을 음미하게 하는 특징을 보인다. 남송(南宋) 진여의(陳與義)의 「유서(柳絮)」 또한 이러한 시적 성취가 두드러진 작품으로 예시되었다. 한편, 진여의의 「화장구신수묵매오절(和張矩臣水墨梅五絶)」을 통해서는 반개반합(半開半合)하며 감춤과 드러냄의 미적 성취를 보였다. 이 또한 작가가 자신의 의사를 대번에 직설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정신을 탐색하고 음미하는 과정을 밟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권섭의 이 글은 ‘진시’ 창작에 있어 시가 지녀야할 문예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문예성은 일견 ‘참됨’을 중시하는 ‘진시’와 모순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앞서 보았듯 창작 주체의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진시’는 시어의 조탁이나 안배와 같은 수사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섭이 주목하는 문예성은 시어를 조탁하거나 시상을 공교롭게 꾸며 얻게 되는 표피적인 성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가 자신의 말을 아끼고 대상을 매개시킴으로써 작가와 독자가 대상을 통해 만나게 되는 미적 경지, 정신적 쾌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 권섭이 제시한 형상화의 문제는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진시’론의 연장선에 있다 할 것이다. 아울러 권섭이 시 창작에 있어 작가 의사의 직출을 경계하고 문예적 형상화에 주목하는 것은 시 장르가 다른 장르의 문학과 변별되는 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이치만 말할 것이면 산문을 짓지 무엇 때문에 시를 짓느냐는 이몽양의 시 인식과 일정 부분 통하는 면이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백악시단이 복고파의 문학론을 비판하며 자신들의 ‘진시’론 을 정립해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백악시단은 복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문제로 삼은 것은 복고파들이 제시한 복고의 방법이었다. 명대 복고파는 순수문학의 가치를 옹호하며 문학에서 사상, 특히 성리학의 구속을 배제하려 하였다. 그런데 창작에서 사상성을 배제하면서 그들의 복고 주장은 수사적 차원을 넘어설 수 없었다. 반면,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도와 문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학시와 창작, 비평의 전 분야에서 정신성을 핵심적 가치로 삼는 주자의 문학론을 바탕으로 복고의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수양된 인격과 높은 식견을 지닌 창작주체가 시적 대상과의 교융을 통해 얻게 된 내면의 상태를 진실하게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창작의 목표를 정신적 가치의 구현에 두었던 까닭에 백악시단은 복고파가 절대적 준칙으로 여겼던 법의 문제를 상대화할 수 있었고 성률이나 수사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한편, 백악시단은 복고파의 복고 방법을 비판하였지만 복고파가 부각시킨 민간 가요의 가치나 문학 본질에 대한 문제제기에 있어서는 충분히 공감하고 자신들의 ‘진시’론에 수용하였다. 요컨대, 백악시단은 성리학적 문학관을 바탕으로 명대 복고파의 문학론을 장단취사하며 자신들의 시론을 세워나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악시단은 만명(晩明) 시기 공안파(公安派)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있 었을까? 주지하듯 공안파는 성령설(性靈說)을 내세워 전범에 대한 학습을 통해 전범이 이룬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던 복고파의 논리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공안파의 복고파 비판은 형식적 복고가 표절과 도습(蹈襲)으로 이어지면서 노정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핵심에 또한 창작상의 ‘진(眞)’의 문제가 놓여있었다【王運熙·顧易生 主編, 『中國文學批評通史』, 上海古籍出版社, 2007, 450면 참조.】.
세상에서 시를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당시(唐詩)를 말하고, 당시를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초당(初唐)이나 성당(盛唐)을 말한다. 그러나 중랑(中郞, 袁宏道)만은 그렇지 않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가 어찌 꼭 당시여야 하며, 또 어찌 꼭 초당과 성당의 시여야겠는가? 요컨대 성령(性靈)으로부터 나온 것을 ‘진시(眞詩)’로 여길 따름이다. 성령이란 마음속에 깊이 있다가 경물에 깃든다. 경물에 감촉한 바에 대해 마음은 그것을 통섭할 수 있고, 마음이 토하고 싶은 바에 대해 팔뚝은 그것을 운용할 수 있다. 마음이 경물을 통섭할 수 있다면 땅강아지, 개미, 벌, 전갈이 모두 흥을 기탁하기에 족하니 반드시 저구(雎鳩)와 추우(騶虞)일 필요가 없다. 팔이 마음을 운용할 수 있다면 해사(諧詞)와 학어(謔語)도 모두 보고 느낄 것이니 반드시 반듯한 말, 엄숙한 시 일 필요가 없다. 마음으로 경물을 통섭하고, 팔로 마음을 운용하면 성령이 모두 표현될 것이니 이런 시를 ‘진시(眞詩)’라 한다. 어찌 꼭 당시여야 하며, 또 어찌 꼭 초당과 성당의 시만을 고집하겠는가!”
世之稱詩者, 必曰唐; 稱唐詩者, 必曰初曰盛. 唯中郞不然, 曰: ‘詩何必唐, 又何必初與盛? 要以出自性靈者爲眞詩爾. 夫性靈竅于心, 寓于境. 境所偶觸, 心能攝之; 心所欲吐, 腕能運之. 心能攝境, 卽螻螘蜂蠆皆足寄興, 不必雎鳩ㆍ騶虞矣; 腕能運心, 即諧詞謔語皆是觀感, 不必法 言莊什矣. 以心攝境, 以腕運心, 則性靈無不畢達, 是之謂眞詩, 而何必唐, 又何必初與盛之爲沾沾!’ -錢伯城 箋校, 『袁宏道集箋校』「附錄·3」「敝篋集敍[江盈科]」
강영과(江盈科, 1555~1605)가 전하는 원굉도의 발언은 공안파의 성령설이 결국 ‘진시’를 창작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진시’를 창작함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시적 대상과 창작 주체간의 감통이며, 그러한 감 통은 창작 주체의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공안파는 당시를 절대적 전범으로 삼아 격조 높은 시를 써야한다는 복고파의 논리가 창작 주체의 성령을 구속, 왜곡하고 소재와 정감의 폭을 가식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 마는 폐해로 이어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고(古)와 금(今)은 우열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고, 창작 상의 법(法)이란 것도 자유로운 성령을 구속할 뿐이니, 모방과 표절을 복고로 여기는 ‘가짜’ 창작을 그만 두고 ‘지금’ 목전(目前)에서 마주하는 허다한 경물과 거기에서 발현되는 도저한 감정들을 진솔하게 형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요컨대, 공안파는 ‘가짜 시’가 아닌 ‘진짜 시[眞詩]’ 창작을 위해 복고파 시론을 전복했던 것이다.
백악시단의 ‘진시’론은 여러모로 공안파의 시론과 닮아있다. 복고의 논리를 근저에서 뒤흔든 고금에 대한 상대적 인식이나, 그것으로부터 발출된 진가(眞假)의 문제의식, 그리고 ‘진(眞)’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창작주체의 정신을 왜곡 없이 드러낼 것을 주장하는 것 등은 백악시단이나 공안파나 모두 자기 시론의 핵심으로 삼는 부분인데, 백악시단과 공안파는 이런 핵심 사항에 있어 매우 흡사해 보이는 견해들을 피력하고 있다. 이 점은 백악시단의 ‘진시’론이 공안파 문학론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공안파 문인들의 저작이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폭넓게 읽혔고【조선후기 문인들의 공안파 시론에 대한 독서와 그 영향에 대해서는 강명관,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소명출판, 2007에 상세하다.】, 백악시단의 문인들 또한 독서를 통해 공안파의 문학론과 작품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정황을 감안하면, 이들이 독서를 통해 공안파의 혁명적 문학론을 취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대단히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높은 개연성에만 주목하여 공안파와 백악시단의 영향관계만을 주목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을뿐더러【독서를 통해 참신한 사유를 접하고, 그 사유를 자기 사유의 참조물로 활용하는 것은 대단히 상식적인 일이다. 그런데 문학론에 표출된 부분적 유사성을 주목하여 특정 유파와의 영향관계를 부각시킨다면, 백악시단의 시론은 명대의 주요한 유파, 즉 복고파, 당송파, 공안파, 경릉파는 물론이요, 신운설(神韻說), 기리설(肌理說) 등 청대의 주요 시론과도 모두 일정한 영향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악시단의 ‘진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누구로부터 어떤 점을 영향 받았는지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백악시단이 다양한 외부적 영향을 어떻게 수용하며 자기화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실상과도 어긋난 측면이 있다. 이제 일견 유사해 보이는 논리 속에 어떠한 차이가 내재해 있으며, 그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먼저 공안파를 대표하는 원굉도의 고금(古今)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대저 물(物)은 참되면 귀합니다. 참되면 내 얼굴이 그대의 얼굴과 같을 수 없으니 하물며 고인의 모습이겠습니까? 당(唐)에는 당의 시가 있으니 반드시 문선(文選)의 체(體)일 필요는 없습니다.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에는 각자의 시가 있으니 반드시 초당, 성당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잠삼(岑參), 전기(錢起), 유우석(劉禹錫), 그리고 아래로는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 노동(盧仝), 정전(鄭畋)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시가 있으니 반드시 이백과 두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송나라 또한 그러합니다. 진사도(陳師道), 구양수(歐陽脩),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 등 여러 사람이 한 자라도 당시를 따라한 것이 있던가요? 또 한 자라도 서로서로 따라한 것이 있던가요? 그들이 당시(唐詩)와 같이 될 수 없었던 것은 기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당시가 문선(文選)의 시가 될 수 없고, 문선의 시가 한위(漢魏)의 시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군자들은 천하를 눌러 당시 일색으로 만들고자 하여 당시와 다르다는 이유로 송시를 흠 잡습니다. 당시와 다르다고 송시를 흠잡는다면 어찌 문선의 시와 다르다고 당 시를 흠잡지 않으며, 한위의 시와 다르다고 문선의 시를 흠잡지 않으며, 『시경(詩經)』의 시와 다르다고 한나라 시를 흠잡지 않으며, 원시 문자와 다르다고 시경의 시를 흠잡지 않는단 말입니까? …(중략)… 무릇 시의 기(氣)는 세대를 따라 줄어들기 때문에 옛날은 두텁고 지금은 얇습니다. 시의 기이하고 교묘하며 공교로운 것은 끝이 없기 때문에 옛날에도 다하지 못한 정이 있고, 지금도 그리지 않은 경치가 없습니다. 그런 즉 옛날이라고 어찌 꼭 높다 하며, 지금이라고 어찌 꼭 낮다 하겠습니까?
大抵物眞則貴, 眞則我面不能同君面, 而況古人之面貌乎? 唐自有詩也, 不必選體也; 初盛中 晩自有詩也, 不必初盛也; 李杜王岑錢劉, 下迨元白盧鄭, 各自有詩也, 不必李杜也. 趙宋亦然. 陳歐蘇黃諸人, 有一字襲唐者乎? 又有一字相襲者乎? 至其不能爲唐, 殆是氣運使然, 猶唐之不能爲選, 選之不能爲漢魏耳. 今之君子, 乃欲槪天下而唐之, 又且以不唐病宋. 夫旣以不唐病宋矣, 何不以不選病唐, 不漢魏病選, 不三百篇病漢, 不結繩鳥跡病三百篇耶? …(中略)… 夫詩之氣, 一代減一代, 故古也厚今也薄. 詩之奇之妙之工之無所不極, 一代盛一代, 故古有不盡之情, 今無不寫之景. 然則古何必高, 今何必卑哉? -袁宏道, 『解脫集』권4 「尺牘」 「丘長孺」, 『袁宏道集箋校·上』, 上海古籍出版社, 1981, 283~285면
원굉도의 이 편지글은 고금(古今)의 상대적 인식을 통해 복고파의 복고 당위성을 불식시키고 있다. 원굉도는 고금을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하는 근거로 ‘진(眞)’을 들면서 진실한 창작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창작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전제 아래, 당시(唐詩)를 우위에 두고 송시(宋詩)를 폄하하는 논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시대마다의 고유한 문학적 성취는 우열의 문제로 접근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 까닭에 전범에 대한 모의를 통해 전범 수준의 문학적 성취를 이루려 했던 복고파 말류의 폐단은 ‘진실’한 창작을 저버린 ‘거짓’으로 비판받았다.
고금 문학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원굉도의 인식은 고금이 각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넘어 오히려 ‘지금’의 문학에 발전적 속성을 부여하는 인식으로 극대화되기도 하였다. 원굉도는 동인이었던 강영과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대에 따른 변화를 ‘발전’의 측면에서 조명하면서 사적 발전의 결과인 현재의 문학이 과거의 문학으로 퇴행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도 하였다【夫物始繁者終必簡, 始晦者終必明, 始亂者終必整, 始艱者終必流麗痛快. 其繁也ㆍ晦也ㆍ亂也ㆍ艱也, 文之始也. 如衣之繁複ㆍ禮之周折ㆍ樂之古質ㆍ封建井田之紛紛擾擾是也. 古之不能爲今者也, 勢也. 其簡也ㆍ明也ㆍ整也ㆍ流麗痛快也, 文之變也. 夫豈不能爲繁爲亂爲艱爲 晦, 然已簡安用繁? 已整安用亂? 已明安用晦? 已流麗痛快, 安用聱牙之語艱深之辭? …(中略)… 世道旣變, 文亦因之, 今之不必摹古者也, 亦勢也. …(中略)… 然賦體日變, 賦心益工, 古不可優, 後不可劣. 若使今日執筆, 機軸尤爲不同, 何也? 人事物態, 有時而更; 鄕語方言, 有時而易. 事今日之事, 卽亦文今日之文而已矣. -袁宏道, 『解脫集』권4「尺牘」「江進之」, 『袁宏道集箋校·上』, 上海古籍出版社, 1981, 515~516면】.
이처럼 고금에 대한 상대적 인식은 창작상의 진가(眞假)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복고파의 논리를 해체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로 기능했는데, 원굉도에게 있어 고금(古今)의 작품은 비교가 불가한 고유한 가치를 지닌 것이거나 ‘지금’의 문학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고(古)와 금(今)을 인식함에 있어 어떤 특징을 보이는가?
지금 사람의 산문과 시는 공교롭게 하려 할수록 더욱 참됨[眞]을 잃어버리고 담박하게 하려 할수록 더욱 무미(無味)하게 된다. 이전(二典)과 삼모(三謨)를 보면 간결하면서도 타당하고 참되면서도 적확하여 군더더기 구절이나 쓸데없는 글자가 없는데도 글을 읽으면 연파(烟波)가 있으니 그 문장은 쉽게 푼 것임에도 몽매한 후학은 이 점을 모른다. 그래서 후인들은 반드시 글자를 줄여버리거나 또한 구두를 괴이하게 떼면서도 “내가 이전(二典)과 삼모(三謨)를 배워보니 아래로는 오직 사마천(司馬遷)의 화식전과 태사공(太史公)의 서만이 그 전형(典型)과 기축(機軸)을 잃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광대놀음이더라.”라고 한다. 이남과 여러 국풍을 보면 풍부한 뜻이 넘치고 표현이 빼어나서 한 글자를 거듭 반복하고 다만 몇 글자만 바꾸어 운자로 삼았는데도 읽어보면 조화로움이 있으니 그 표현은 절로 생각을 담고 있건만 편협한 후학은 여기에 현혹된다. 그래서 후인들도 반드시 장을 잇고 말을 반복하지만 새롭고 기이한 뜻은 없다. 그러면서도 “내가 국풍을 배워보니 아래로는 문선(文選)의 시만 남아 정아(正雅)의 음을 잃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벌레 우는 소리더라.”라고 한다. 대저 지금 사람이 고인을 어찌 배울 수 있겠는가? 구석진 나라의 풍기(風氣)가 중국과 다르고 말세의 인품이 상고시대보다 못하니 억지로 그 수준에 이르기를 바라더라도 어찌 모습이 비슷해질 수 있겠는가? 각자 그 분의(分義)를 충실히 하면 성취의 고하는 논할 것 없이 각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 따름이다. 동국(東國)에서 본 것이 명(明)과 같겠는가? 명은 송(宋)과 같겠는가? 당(唐)은 한(漢)과 같겠는가? 한은 삼대(三代)와 같겠는가?
今之人作文ㆍ作詩, 愈欲巧而愈失眞, 愈欲淡而愈無味. 看乎二典ㆍ三謨也, 簡當眞的, 無剩 句ㆍ冗字, 而讀之有烟波, 其文則自易解, 而蒙學昧焉. 後人必去之於字而又詭作句切, 曰: ‘吾 學典ㆍ謨, 下而唯司馬遷之貨殖傳ㆍ太史公序, 不失其典刑ㆍ機軸, 餘外皆是倡優.’ 看乎二南ㆍ列風也, 淫佚唱歎, 一語申復, 只換數字爲韻, 而讀之有風調, 其辭則自有思, 而拘學眩焉. 後人 必連章重言而無新奇意致, 曰‘吾學國風, 下而有選詩, 不失正雅之音, 餘外皆是啁啾’. 大抵今人何可學古人? 偏邦風氣異於中土, 季世人品下於上古, 强欲企及, 何能形似? 各自充其分, 則勿 論高下, 各自成章耳. 其見於東國, 其如明乎? 明如宋乎? 宋如唐乎? 唐如漢乎? 漢如三代 乎? -權燮, 『玉所稿』「文·3」「書贈秀才趙鎭憲」
권섭은 인용문을 통해 학시(學詩)에 있어 ‘진(眞)’의 문제를 연결시키고 잘못된 복고를 비판적으로 예시한 뒤 전범의 재현을 통해서는 전범의 성취에 이를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이는 앞서 원굉도가 시대별 왕조의 문학을 연쇄시키며 ‘진(眞)’의 차원에서 복고의 불가함을 주장한 것과 일견 대단히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권섭의 이 글을 상세히 검토해보면, 일견 유사해 보이는 논리 속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질적인 차이는 고(古)와 금(今)에 대한 인식이 다. 권섭은 지금 사람이 고인을 배울 수 없는 이유를 ‘구석진 나라의 풍기(風氣)가 중국과 다르고 말세의 인품이 상고시대보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원굉도가 시대별 왕조의 문학을 연쇄시키면서 강조한 것은 각 시대 문학의 ‘다름’이었다. 그런데 권섭이 제시한 ‘다름’은 ‘우열 관념이 개재된 다름’이라는 점 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섭은 고금(古今)의 불가학적(不可學的) 격차를 인정하면서 ‘각자 그 분의(分義)’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권섭의 생각은, 작가가 시대와 상황, 인품과 학식의 수준에 맞게 ― 억지로 꾸미지 말고 ― 진실하게 창작하면 작품의 성취는 전범에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각자성장(各自成章)’할 수 있으니, 그것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권섭의 논리 속에는 원굉도와는 상반되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의식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안파의 문학논리와 유사한 듯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차이를 보이는 경우를 김창협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는 진실로 당시를 배워야 하지만, 또한 당시와 같아질 필요는 없다. 당나라 사람의 시는 성정의 흥기에 주안점을 두었고 고실(故實)과 의론(議論)을 일삼지 않았으니 법 삼을 만하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이다. 서로 시간적 거리가 천백 년이나 되는데 그 성음(聲音)과 기조(氣調)를 완전히 같게 하고자 한다면, 이는 이치로나 형세로나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 비슷하게 하고자 한다면, 또한 그것은 사람을 본뜬 목각인형이나 진흙 토우와 같을 따름이다. 그 모습이 엄연할지라도 그 ‘천(天)’은 진실로 그 안에 없다. 어찌 족히 귀하게 여기겠는가?
詩固當學唐, 亦不必似唐. 唐人之詩主於性情興寄, 而不事故實議論, 此其可法也. 然唐人自唐人, 今人自今人, 相去千百載之間, 而欲其聲音ㆍ氣調無一不同, 此理勢之所必無也. 强而欲似之, 則亦木偶泥塑之象人而已, 其形雖儼然, 其天者固不在也. 又何足貴哉? -金昌協, 『農巖 集』권34「雜識·外篇」
이 글은 김창협 시론의 혁신성을 대표하는 자료로 자주 언급되었던 것으로, 그의 혁신적 논리가 공안파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의 예시로도 활용 된 바 있다.【강명관,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소명출판, 2007, 123~124면. 강명관 교수는 김창협의 이 글을 두고 농암의 시간 상대주의가 공안파에서 유래했지만 이론을 복사하면서 그 자취를 지운 것이라고 하였다.(강명관, 『농암잡지평석』, 소명출판, 2007, 110~111면.) 개연성 높은 추론이기는 하나 면밀하게 따져 봐야 할 점이 있다. 공안파에 대한 독서의 흔적과 표현의 유사성이 곧바로 공안파 논리를 차용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 다. 김창협은 스스로 “오늘날에 살면서 옛 시를 본받아 시를 지으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네. 이는 내가 지난날 체험했던 것을 족하에게 말해주는 것이니, 족하가 한번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찾아본다면 그 잘잘못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네.[未有難於居今而學 古者也. 此僕之所嘗經歷, 而聊爲足下言之, 足下試以此自求之, 則得失居可見矣. -金昌協, 『農巖集』권18 「答崔昌大」]”라고 한 바 있다. 김창협의 이 발언은 주자 이래의 상고적(尙古的) 세계관이 체화(體化)된 성리학자가 복고(復古)를 통해 ‘고(古)’의 가치를 현실에 구현하려 애쓰다 한계에 부딪히고만 자기 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창협의 이 고백은 개별적 경험을 통해서도 비슷한 논리가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설사 독서를 통해 그 논리를 차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도달했던 결론과 유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질감 없이 가져다 쓸 수 있었던 것이지, 양명 좌파에 기댄 불온한 원굉도였기 때문에 논리를 복사해 놓고 그 자취를 없앤 것은 아니다. 김창협의 전체적인 삶과 학문을 염두에 둘 때, 시를 학문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던 김창협이 혁신적 비평에 대한 독자성을 탐하여 그런 구차함을 무릅썼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과연 김창협의 이 글은 반의고의 핵심 논리를 고금(古今)의 ‘다름’에서 마련하고 있으며 그것을 문학작품의 ‘진(眞)’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앞서 본 원굉도의 논리와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김창협이 ‘고(古)’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문제이다. 김창협은 당시(唐詩)를 성정을 흥기시킨다는 점과 시의 장르적 특질이 제대로 구현되었다는 측면에서 법으로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당나라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수사적 복고의 불가능성과 불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된 말이다. 시간의 격차로 인해 소리도 달라지고 창작의 정황도 달라졌는데 당시(唐詩)의 음악성과 분위기를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김창협의 인식이다.
그렇다고 당시(唐詩)가 이룬 ‘성정을 흥기시키는’ 성취마저 폐기할 것인가? 물론 아니다. 김창협의 이 글은 제대로 된 복고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김창협의 인식 속에 제대로 된 복고란 고인의 정신, 즉 참됨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창협은, 당시에서 배워야 할 점을 먼저 서술하고 이어 경계해야 할 점을 서술한 뒤 다시 정신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서술구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서술구도 속에서 ‘당나라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이라는 김창협의 발언은 시간의 격차에 의해 발생하는 현실적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앞선 원굉도의 글이 당(唐)에는 당의 시가 있으니 반드시 『문선(文選)』의 체(體)일 필요 없다며 각 시대 문학의 고유한 성취를 주장하는 것과는 인식의 지향에 있어 본질적으로 다르다. 원굉도의 논리는 각 시대의 문학은 각 시대의 고유한 성취가 있으므로 지금의 문학 또한 긍정될 수 있는 개방적 논리임에 비해, 김창협의 논리는 여전히 고금을 대비적으로 인식하며 ‘고(古)’를 회복해야할 경지로 상정하는 상고적(尙古的) 성향이 강하다. 고금에 대한 김창협의 대비적 인식은 아래 글에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옛사람은 글을 지을 적에 오직 자신의 뜻에 근거하여 일에 따라 직서(直書)하여 말뜻이 절로 충분하였네. 그래서 후세의 사람이 그것을 읽으면 진실하여 맛이 있음을 알 수 있네. 요즘 사람들은 걸핏하면 고문(古文)을 인용하면서 가차(假借)하고 꾸며 장대(張大)하게 만들려고 힘쓰다 보니 결국 그저 하나의 투식어가 되고 마네. 그래서 독자들도 상투적으로 예를 갖춘 말이라 여기고 실제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네. 이것이 바로 고금의 문장이 득실이 나뉘게 된 까닭이니, 잘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네.
蓋古人爲文, 只據己意, 隨事直書, 而語意自足, 故後人讀之, 亦覺眞實有味. 今人動喜引用古文, 假借粧點, 務爲張大, 而畢竟只成一副套語, 故讀者亦認作備禮說話而不以爲實錄. 此正古今文字得失之分, 不可以不察也. -金昌協, 『農巖集』권18 「答權燮」
인용문은 김창협이 권섭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김창협은 고금 문학의 본질적 차이를 ‘진(眞)’에서 구하고 있다. 고인의 문장은 작가가 대상에 따라 일어나는 자신의 의사를 직서(直書)하였기 때문에 진실하다. 그러나 금인(今人)의 문장은 대상과 교감하여 얻은 작가의 정신 대신 고문을 인용한 그럴싸한 표현만이 우세하기 때문에 거짓이다. 고금(古今)의 문장에 대한 김창협의 인식은 이처럼 분명하다.
고금(古今)의 가치를 대비적으로 인식하며 古를 준거로 삼는 시각은 백악시단 문인들에게 허다하게 발견된다. 일례를 들어보면, 김창흡은 송하적(宋夏績)에게 준 시에서 “이레 동안 암학(巖壑)에서 함께 노닐다 보니, 그대의 회포가 고인(古人)과 같음을 보게 되었지.[七日同遊巖壑中, 看君襟抱古人同.]”【金昌翕, 『三淵集』권8 「甁泉贈宋伯成夏績」】라며 고매한 인품의 기준을 고인에 비하고, 이희조(李喜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영애(令愛)의 묘지문을 간신히 얽어 드리오나 끝내 좋지 못합니다. 대개 감정에 슬퍼함이 지극하여 도리어 세세함이 싫어할 만하니 고인(古人)의 문체와 비교해보면 간이(簡易)하고 침중(沈重)한 데서 대단히 부끄럽습니다[令愛誌文, 艱辛構呈, 終是不好. 蓋情所惻至, 却覺覼縷可厭持, 較夫古人文體, 大愧簡重. -金昌翕, 『三淵集』권18 「與李同甫」].”라며 자기 글의 비평 기준으로 고인의 문체를 들었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고금에 관하여 상고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고금의 현실적 ‘차이’를 반의고의 핵심 논리로 삼은 점은 백악시단이나 공안파나 매한가지다. 고금의 차이를 통해 수사적 복고가 가짜임을 밝힌 것 또한 같다. 그러나 공안파의 경우 그 ‘차이’는 당대(當代) 시문의 의의를 확보하기 위한 포석에서 주목되고 개발된 것이다. 반면, 백악시단의 경우 그 ‘차이’는 당대 시문의 의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복고[眞復古]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지향점의 차이는 공안파, 백악시단 시론의 핵심인 ‘진(眞)’을 규정하는 데 서 더욱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원굉도가 내세운 ‘진시’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 시문은) 대부분 홀로 성령을 펼쳐내어 격투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자기의 흉억(胸臆)에서 유출된 것이 아니면 붓으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때때로 정(情)과 경(境)이 부합하면 경각(頃刻)에 천 마디 말을 마치 물이 동쪽으로 쏟아지듯 써내려 갔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혼이 달아나게 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훌륭한 곳도 있고 또 하자도 있는데, 훌륭한 곳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하자가 있는 곳도 역시 본색(本色)이요 독조(獨造)의 말이다. 하지만 나로 말하면 그 하자 있는 곳을 극히 좋아한다. …(中略)…
그러므로 나는 지금의 시문은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혹 지금 여염의 부인이나 어린애들이 부르는 「벽파옥(擘破玉)」이나 「타초간(打草竿)」의 부류이다. 이것들은 오히려 견문도 없고 지식도 없는 ‘진인(眞人)’이 지은 것으로 ‘진성(眞聲)’이 많아서 한위(漢魏)를 효빈(效顰)하지 않고 성당(盛唐)을 학보(學步)하지 않고서 본성에 내맡겨 발하여[任性而發] 도리어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과 기호정욕(嗜好情欲)에 통하니, 이것은 즐길 만하다. …(中略)…
대개 감정이 지극한 말은 저절로 남을 감동시킬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진시(眞詩)’로서 전할 만하다. 그런데 혹자는 오히려 너무 노골적임을 병통으로 여기는데,’̇ 감정이 경우에 따라 변하며 글자가 쫓아가면서 감정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표현되지 않을까 염려될 따름이지 무슨 노골적인 병통이 있겠는가? 더구나 『이소(離騷)』라는 경(經)은 분노하고 원망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당인(黨人)이 기회를 엿보아 즐기고 뭇 여인이 노래하고 헐뜯어서 군주가 속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참언(讒言)을 믿어 노여움을 내었으므로 타매(唾罵)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른바 ‘원망하되 상하지 않는다[怨而不傷]’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지극한 시름을 겪을 때에는 통곡하여 눈물을 흘리고 거꾸러지고 뒤집고 하여 음을 선택할 겨를이 없거늘, 원망한다고 할 때 어찌 애상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大都獨抒性靈, 不拘格套, 非自己胸臆流出, 不肯下筆. 有時情與境會, 頃刻千言, 如水東注, 令人奪魄. 其間有佳處, 亦有疵處, 佳處自不必言, 卽疵處亦多本色獨造語. 然予則極喜其疵處.…(中略)…
故吾謂今之詩文不傳矣. 其萬一傳者, 或今閭閻婦人孺子所唱「擘破玉」ㆍ「打草竿」之類, 猶是無聞無識眞人所作, 故多眞聲, 不效顰於漢魏, 不學步於盛唐, 任性而發, 尙能通 于人之喜怒哀樂ㆍ嗜好情欲, 是可喜也.…(中略)…
大槪情至之語, 自能感人, 是謂眞詩, 可傳也. 而或者猶以太露病之, 曾不知情隨境變, 字逐情生, 但恐不達, 何露之有? 此離騷一經, 忿懟之極, 黨人偸樂, 衆女謠諑, 不揆中情, 信讒齎怒, 皆明示唾罵, 安在所謂怨而不傷者乎? 窮愁之時, 痛哭流涕, 顚倒反覆, 不可擇音, 怨矣, 寧有不傷者? -袁宏道, 『錦帆集』권2 「敍小修詩」, 『袁宏道集箋校·上』, 上海古籍出版社, 1981, 187~188면
인용문은 원굉도가 아우 袁中道의 시를 비평한 글의 일부이다. 원굉도는 첫 번째 부분에서 원중도의 시문이 진실한 감정을 격투(格套)에 얽매이지 않고 표출하다 보니 잘된 부분도 있고 흠이 있는 부분도 있지만, 하자 있는 부분도 원중도의 거짓 없는 본색이요 그런 본색이 반영된 개성적인 시인 까닭에 원굉도 자신은 남들이 흠이 있다고 여기는 그 부분을 더 좋아한다고 하였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모의(模擬)의 풍조에 휩쓸린 지금의 시문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한 뒤, 후세에도 전해질 ‘참된 시문[眞詩]’에 대해 언급하였다. 원굉도는 ‘진시’의 예로 당대 민간의 시가를 들면서 견식이 없는 여염집 부인이나 어린아이를 ‘진인(眞人)’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진성(眞聲)’이라 하였다. 주목할 것은 원굉도가 ‘진인(眞人)’이 ‘진성(眞聲)’으로 창작한 시를 어떤 점에서 긍정하고 있는가이다. 원굉도는 민간의 노래가 본성대로 발하여[任性而發] 인간의 도저한 감정들을 가식 없이 표출한다는 점을 들어 ‘진시’라고 평가하였다. 원굉도가 제시한 ‘성(性)’은 성리학의 ‘성(性)’과는 달리 도덕적 관념이 배제된 ‘본성’의 의미를 지닌다【원굉도가 사용하고 있는 ‘성(性)’의 개념은 성리학에서 보면 ‘정(情)’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용문의 ‘임성이발(任性而發)’도 ‘임정이발(任情而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원굉도가 ‘성(性)’을 굳이 사용한 것은 ‘성(性)이라 하면 으레 성리학적 순선(純善)의 개념을 떠올리는 일반적 통념을 전복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성(性)’에 대한 함의를 확장시키면서 ‘성즉리(性卽理)’의 테제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기면의 『원굉도의 문학사상』, 한국학술정보, 2007, 220~221면 참조.】. 원굉도는 ‘성(性)’의 함의를 정(情)까지 포괄한 본능적 감정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문 속에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담을 수 있다고 보았다. 원굉도가 긍정한 감정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은 물론 기호(嗜好)와 욕망까지도 아우르는 것이었다. 특히 인용문에 제시된 ‘정욕(情欲)’은 ‘정욕(情慾)’이 아님에도 정욕(性慾)과 같은 본능적 욕구까지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원굉도는 「난정기(蘭亭記)」라는 글에서 “소명태자는 문인 가운데 썩은 자이니 그가 (도연명의) 「한정부(閒情賦)」를 옥의 티라고 여긴 것을 보면 그의 고루함을 알 수 있다. 대저 세계에 과연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만약 과연 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니부(尼父)도 역시 색을 비유로 끌어다가 불기(不欺)를 밝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昭明, 文人之腐者, 觀其以閑情賦爲白璧微瑕, 其陋可知. 夫世界有不好色之人哉? 若果有不好色之人, 尼父亦不必借之以明不欺矣. -袁宏道, 『解脫集』권3 「游記·雜著」「蘭亭記」, 『袁宏道集箋校·上』, 上海古籍出版社, 1981, 444면].”라고 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굉도의 ‘진시’는 감정의 ‘임정종욕(任情從慾)’함을 배제하지 않는다. 나아가 원굉도가 ‘임정종욕(任情從慾)’함을 강하게 긍정하는 이면에는 도덕이란 기준으로 인간의 감정 을 구속한다고 여겼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도사리고 있다. 「난정기」에서 소명태자를 가식적 학자로 평가한 것도 그렇거니와, 특히 공자의 “나는 덕 있는 이를 좋아하기를 호색(好色)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論語』 「子罕」】라는 말을 공자도 호색(好色)했기 때문에 이런 비유적 언설을 남긴 것이라고 연 결시키는 데서는 공격적 의사가 더욱 분명해진다.
아래 세 번째 부분에서 주목되는 것은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2에서 “국풍(國風)은 색을 좋아하되 음란하지 않고 소아(小雅)는 원망하되 혼란스럽지 않은데 『이소』는 그 둘을 겸하였다고 할 수 있다.[國風好色而不淫, 小雅怨誹而不亂, 若離騷者, 可謂兼之矣.]”고 한 사마천(司馬遷)의 비평을 부정한 대목이다. ‘진시’의 한 조건으로 ‘정이 지극한 말[情至之語]’를 제시한 원굉도는 정(情)이 지극한 시는 지나치게 노골적일 수 있다는 혹자의 우려에 대해 마음에 담긴 감정을 다 전달하지 못할까 걱정해야지 노골적인 것은 병통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발언의 근거로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들고는 『이소(離騷)』를 굴원(屈原)이 자신의 원망하는 마음을 담아 실컷 침 뱉고 욕한 작품으로 보았다. 논의의 맥락을 따르면 후세에까지 전해진 『이소(離騷)』야말로 ‘진시’인데 그것이 ‘진시’인 까닭은 원망의 감정이 지극하여 감동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원굉도의 언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원굉도가 제시한 ‘진시’의 상(像)을 만날 수 있다. 원굉도가 제시한 ‘진시’는 곧 작가 흉중의 도저한 감정-인간의 본능적 욕망까지를 포괄한-들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지극하게 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안파의 ‘진시’론은 고금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논리 위에서 수사적 복고를 거부하고, 인간 마음에 대한 절대적 신뢰[心卽理]를 바탕으로 시적 대상의 확대는 물론 인간의 도저한 감정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전에 없는 인식상의 변화를 선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백악시단의 문인들 또한 공안파의 작품과 시론에 대해 긍정할 것은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공안파가 양명좌파의 사상에 입각하여 성리학의 근간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김창협은 원굉도의 문집을 읽고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지금 중랑의 문집을 읽어보니 한편으로는 선(禪)을 말하고 불(佛)을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술을 탐하고 여색을 그리워하니, 이것은 소 잡고 술 파는 자가 불경을 외는 격이니 참으로 가소롭다. 그러나 석씨(釋氏)는 욕망을 이치라 여겼기 때문에 세상에서 방종함을 좋아하고 검속함을 싫어하는 자들이 모두 이것에 의탁하여 소굴로 삼았으니 그 형세가 당연하다. 명나라 때의 학자들 중에 여요(餘姚, 王守仁)로부터 맥이 흘러 우강(旴江, 羅汝芳) 일파에 이르러서는 그 언설이 더욱 미친 듯하여 더 이상 꺼려하는 바가 없었다. 소위 유학자란 자들이 이와 같았으니, 문사들이야 실로 말할 것도 없다.
今讀中郞集, 一邊說禪談佛, 一邊耽酒戀色, 此如屠沽兒誦經, 直是可笑. 然釋氏本認欲作理, 故世之樂放縱而惡拘檢者, 皆託此以爲窠窟, 亦其勢然耳. 明時學者, 自餘姚而流爲旴江一派, 其說益猖狂, 無復忌憚. 所謂儒學者, 蓋已如此, 文士固不足道也. -金昌協, 『農巖集』권34 「雜識·外篇」
원굉도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욕망을 이치라 여겨 검속함이 없다는 것이다. 김창협은 원굉도의 문집이 이 같은 양상을 띠게 된 것을 양명학에서 발원한 양명좌파의 사상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김창협의 진단은 나여방(羅汝芳)-이지(李贄)-원굉도(袁宏道)로 이어지는【이지는 왕간(王艮)의 아들인 왕벽(王襞)을 사사하였고, 여러 차례 왕간의 재전 제자인 나여방(羅汝芳)과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楊國榮 著, 宋河璟 譯, 『陽明學通論』, 박영사, 1994, 244면 참조. 또한 원종도(袁宗道), 원굉도(袁宏道), 원중도(袁中道) 삼형제는 초횡(焦竑)의 권유를 받고 1590년에 공안현(公安縣)에 머물던 이지를 만나 학문과 문학의 계도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이기면의 앞의 책 33~34면 참조.】계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나온 것이다. 이지는 태주학파(泰州學派)의 사상을 이으면서도 「동심설(童心說)」을 통해 봉건적 규범을 내용으로 하는 천리(天理)를 제거하고 자아의 사심(私心)을 하늘이 부여한 본래적 마음이라 주장하였고【楊國榮 著, 宋河璟 譯, 『陽明學通論』(박영사, 1994), 249~251면 참조.】 공안파는 이지의 사상을 문학에 적용하여 성령설(性靈說)을 주창하였다. 김창협이 이지의 사상까지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욕망을 이치라 주장했던 양명좌파의 사상을 인지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설령 양명좌파에 대한 세밀한 인지가 없었더라도 김창협을 비롯한 백악시단의 이론가들은 양명학의 “심즉리(心卽理)” 자체가 대단히 위험 한 사유라고 여겼다. “심즉리”가 위험한 것은 바로 그 ‘심(心)’이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욕망을 이치로 만들었다[欲作理]”는 말은 ‘심(心)’의 주관화가 극단화되어 표출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듯 공안파의 ‘진시’와 백악시단의 ‘진시’는 토대가 된 사상에 의해 결정적으로 다른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주지하듯 양명좌파의 심학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공안파는 리(理)인 심(心)에 준거하여 일체의 사유를 전개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발현된 모든 감정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감정에 대해 열린 자세로 사유하고 시론(詩論)으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악시단의 ‘진시’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는 성리학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心)의 영명(靈明)함을 인정하면서도 기(氣)인 심(心)이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경계하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심(心)을 대단히 특별한 존재로 여겼다. 이들이 심(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천리(天理)를 체인(體認)할 수 있는 영명(靈明)한 지각(知覺) 능력이 심(心)에 내재되어 있으며, 나아가 성과 정을 매개하여 순선(純善)의 경지로 회복할 수 있는 단초가 심(心)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심(心)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부 단히 검속하고 수양해야 할 대상이었다. 앞서 김창협이 송남수(宋枏壽)의 시를 ‘진시’라 하고 송남수를 ‘진시인’이라 하면서 그의 수양된 인품을 드러낸 것이나, 김창흡이 하산(何山) 최효건(崔孝騫)의 시를 전에 없는 독창으로 특필하면서 서문 말미에 그의 충애(忠愛)한 인간됨을 부각시킨 것【余於靑丘之詩, 所病其拘於法者如此. 晩得何山詩而讀之, 是眞能脫略忌諱, 而不安於仍襲者也. 看其體格, 不唐不宋, 可知無所師承, 而聲調爽亮, 氣機橫活. 往往突如其來, 造險出奇, 忽如冷水之澆背ㆍ迅雷之燁眼, 殆令人膽掉神奪. 及其徐繹, 而種種諸境之該, 百態具呈, 可愕可喜, 不覺解頤而撫掌久矣. 無此詩, 雖謂之百年創格可也. 公姓崔, 名孝騫, 何山其號也. 蓋嘗决科盛際, 而官不大遂, 晩亦慍于羣小, 佗傺居多. 獨其曠懷沖襟, 雖有朝虀暮鹽之時, 而夷然以窮爲戱. 至於忠愛之悃拳拳於希泰願豐者, 殆子美之‘每飯不忘’. 凡此皆於詩上見之, 其亦可慕也哉! 竊怪夫一時所追遊, 槩多哲匠名流, 而未聞有藉吹噓而假羽毛者, 甚矣! 賞音之難也. -金昌翕,『三淵集』권23 「何山集序」 등은 시적 성취를 창작 주체의 사람됨과 연결시켜 양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백악시단 ‘진시’의 지향점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백악시단이 중시한 창작 주체의 ‘진(眞)’은 공안파의 그것과는 달리 학문과 수양을 통해 천리(天理)의 순선(純善)함을 회복한 ‘진(眞)’이었다.
토대로 삼은 사상의 차이로 인해 공안파와 백악시단의 ‘진시’는 지향하는 모습이 판연히 달라졌지만,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공안파의 사상이 이단이라 하여 공안파의 문학 전체를 이단으로 매도하지는 않았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원굉도의 산수유기가 이룩한 문학적 성취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창협은 중국에서 출판된 역대 산수유기 모음집인 『명산승개기(名山勝槪記)』 가운데서 139편의 유기를 선발하여 『문취(文趣)』를 엮었는데, 이 가운데 원굉도의 유기가 7편이 선발되어 있다. 후한(後漢) 중장통(仲長統)으로부터 명(明) 종성(鍾惺)에 이르기까지 78인의 작가 가운데 원굉도의 선발 편수는 소식(蘇軾)의 12편에 이어 두 번째이다. 백거이가 6편, 구양수가 5편, 한유와 유종원이 4편, 주희가 3편인 것과 견주어 보면 김창협이 원굉도 유기의 성취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던가를 알 수 있다【김창협의 『문취(文趣)』에 관해서는 김영진, 「스승의 뜻이 담긴 책, 『문취(文趣)』」, 『문헌과 해석』24, 2003, 101면 참조.】. 이하곤은 1705년 보문암(普門庵)을 유람하고 쓴 「유보문암기(遊普門庵記)」에서 소식의 필력과 원굉도의 재민(才敏)함으로 보문암의 기관(奇觀)을 기록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면서【是平生第一奇觀, 恨無蘓子瞻筆力、袁中郞才敏以記之耳. -李夏坤,『頭陀草』책11 「遊普門庵記」】 원굉도의 유기를 고평하였다. 신정하 또한 신무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사이 자신의 득의처가 원굉도가 쓴 산수유기에 있다며 대단히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弟近日得意處, 全在中郞記述. 凡於此老經行探歷之勝, 種種在目, 不勞一步, 不命一僕, 東南數萬里靈境, 皆自坐而得之, 弟方且躍然心喜, 始歎賞音之晩也. -申靖夏, 『恕菴集』 권8 「與愼敬所兄」” 한편, 신정하는 원굉도의 편지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신정하는 편지글을 간략하여 여운을 주는 구양수, 소식의 문예적 편지글과 정밀하게 의리를 밝히는 주자의 의론적 편지글로 나눈 뒤 원굉도의 편지글에 대해 ‘요(夭)’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大抵簡牘之爲體, 簡而後方有味, 不當多作冗長語. 但至於論義理處, 不可不密, 此所以考亭之爲書, 盛水不漏. 今姪以爲: ‘道情素語山水, 則不可不用歐蘇之簡; 論說義理, 不可不用考亭之密.’ 未知如何. 曾見袁中郞短簡否? 靈心慧竅, 雖非王、李之比, 而大抵是爲文之妖, 易被浸染, 不宜令近眼如有竹, 欲巧而反拙, 尤無足開眼者爾. -申靖夏, 『恕菴集』 권8 「答柳默守」]. 이처럼 원굉도의 산문에 대한 신정하의 평가는 작품의 성취 여부에 의거하여 객관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다.】.
또한 공안파가 당과 송의 고문을 객관적으로 재평가한 점에 대해서도 동의를 표하였다. 신정하는 「여신경소형(與愼敬所兄)」에서 “이 노인이 유독 제 평가에 들어온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결코 칠자(七子)의 근각(根脚)을 따르지 않고 구양수와 소동파 등 여러 분들을 존중할 알기 때문입니다[此老之獨於弟相入者無他, 絶不隨七子之脚跟, 而知歐蘇諸公之可尊故也. -申靖夏, 『恕菴集』권8 「與愼敬所兄」].”라고 하면서, 복고파와는 달리 당송고문의 의의를 인정한 원굉도의 인식에 동의를 표하였다. 원중도 문학의 특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이하곤은 원중도의 문집을 강화도 내각(內閣)에서 빌려 읽고는 손수 70여 편을 초록하여 책으로 묶은 뒤 원중도의 글에 대해 “소수(小修)의 문장은 기교첨신(奇巧尖新)함은 비록 그 형 중랑(中郞)만 못하지만 담박하고 넉넉함은 자못 중랑을 넘어섰다. 또한 (중랑처럼) 기생을 끼고 놀고 야한 태가 없으니, 좋아할 만하다. 그러나 문기(文氣)가 조금 나약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번잡한 곳도 있다[少修之文奇巧尖新, 雖遜於其兄中郞, 淡蕩紆餘殆過之, 亦無狹邪艷冶之態, 可喜. 然文氣稍苶弱, 時有太冗處耳. -李夏坤, 『頭陀草』책12 「珂雪齋文抄跋」].”라고 평가하였다. 이하곤은 원중도의 글이 원굉도의 글에 비해 담박하고 넉넉하며 염정적이지 않은 점을 들었다. 실제로 원중도는 형 원굉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시론이나 창작에 있어 원굉도와는 다소 다른 지향을 보였다. 원중도는 중년 이후, 젊은 시절 감정이 시키는 대로 거리낌 없이 발산하던 자신의 행동과 창작을 참회하고 맑고 고요하며 담박한 삶을 성령(性靈)의 귀숙처로 삼았다. 원중도의 『가설재집(珂雪齋集)』은 중년 이후의 변화된 문학관이 반영된 것으로 공안파 후기의 비평적 관점을 보여준다.(이에 대해서는 王運熙·顧易生 主編, 『中國文學批評通史5·明代』 468〜469면 참조.) 이하곤은 이처럼 원굉도와 원중도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하곤의 공안파 이해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하곤은 “문장을 짓는 도리는 항상 유의(有意), 무의(無意) 사이에 있어야만 공교함을 기약하지 않아도 공교해진다.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천하의 진문(眞文)이 되는 것이다. 원소수(袁小修, 袁中道)가 말하기를, ‘구공(歐公)의 『귀전록(歸田錄)』, 동파(東坡)의 『지림(志林)』, 방옹(放翁)의 『입촉기(入蜀記)』는 모두 공교한 데 뜻을 두지 않고도 공교해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천하의 진문(眞文)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미덥지 않겠는가[故作文之道, 常在有意無意之間, 不期工而自工, 然後方可爲天下之眞文也. 袁少修曰: ‘歐公之歸田錄、東坡之志林、放翁之入蜀記, 皆無意於工而工者, 此所以爲天下之眞文也.’ 其言豈不信哉? -李夏坤, 『頭陀草』 책18 「南行記序」]”라며 자신의 ‘진문(眞文)’에 대한 견해를 원중도(袁中道)의 발언을 통해 뒷받침하기도 하였다.
백악시단은 폭넓은 독서를 통해 명말청초 문단의 동향을 통효(通曉)하고 있었고 각 유파의 문학론을 장단취사하면서 자신들의 ‘진시’론을 세워나갔다. 그런데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명대 문학사의 흐름을 통효할 수 있었던 데는 전겸익(錢謙益)의 『열조시집(列朝詩集)』이 큰 역할을 하였다. 전겸익은 당송파의 복고파 비판이 후칠자에 의해 묻히자 후칠자의 복고주의를 다시 비판하며 문단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전겸익은 복고파에 대해서는 모의(模擬)로, 경릉파에 대해서는 협착(狹窄)으로, 공안파에 대해서는 부천(膚淺)으로 비판하며 참되고 지극한 정[情眞, 情至]과 학식[才學]의 겸비를 주장하였고, 당시(唐詩)는 물론이고 송시(宋詩)의 장점까지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전겸익의 문학론에 호의를 보냈다. 김창협은 전겸익의 협기(俠氣), 야정(冶情), 중후하고 법도에 맞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도 전겸익을 명말의 대가라고 인정하였다【明之文弊始於李、何, 深於王、李, 轉變於鍾、譚而極矣. 近看錢牧齋文字, 論此最詳. 其推究源委、鍼砭膏肓語多切覈, 諸人見之, 亦當首肯. 〇 近觀牧齋有學集, 亦明季一大家也. 其取法不一, 而大抵出於歐、蘇. 其信手寫去、不窘邊幅, 頗類蘇長公; 俯仰感慨、風神生色, 又似乎歐公. 但豪逸駘宕之過, 時有俠氣, 亦時有冶情, 少典厚嚴重之致, 又頗雜神怪不經之說, 殊爲大雅累. 然余猶喜其超脫自在, 無砌湊綑縛, 不似弇州、太函輩一味勦襲耳. -金昌協, 『農巖集』 권34 「雜識·外篇」】. 김창협의 전겸익에 대한 인정은 백악시단의 후배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홍중성은 전겸익의 운자를 따라 시를 지었고【洪重聖, 『芸窩集』 권3 「用錢牧齋韻共賦」】, 신정하의 형이었던 신성하(申聖夏)는 전겸익의 문집을 읽고 독후감을 시로 지었으며【申聖夏, 『和菴集』 권1 「讀牧齋集有感, 仍用其韻」】, 이하곤은 「차사부증별운기시(次士復贈別韵寄示)」라는 시의 주석에서 이희지(李喜之)가 전겸익의 시론을 시가의 요지(要旨)로 삼았다고 밝히기도 하였고【詩道從君細討論, 嚴劉繩尺幸猶存. 評來萬古誰能絶, 話出深心不肎呑. 手眼另將生死判, 魔狐終不路歧昏. 悠悠江海還孤卧, 回首終南月在門.【近代評詩之善者, 莫過嚴羽卿、劉辰翁, 詩家家有生話死話者, 自元裕之創說, 至明錢牧菴尤相述此論, 士復深以牧齋所論, 爲詩家之要旨.】 -李夏坤, 『頭陀草』 책2 「次士復贈別韵寄示」】, 김시민은 전겸익의 문집을 정밀하게 읽은 뒤, 그의 글 가운데 서(序)와 기(記)는 탕사(蕩詞), 야정(冶情)의 폐가 있지만 묘표(墓表), 지명(誌銘), 서사(叙事), 의론(議論) 등의 글은 구양수와 흡사하여 왕세정(王世貞)이나 왕도곤(汪道昆)과 같은 복고파는 감히 견줄 수도 없다고 하였으며, 『초학집』과 『유학집』의 장단에 대해 평가하기도 하였다【錢牧齋明季文章一大家也. 其文自謂根乎經, 而余不知其經也, 盖子、史是其祖宗也. 取法不一, 䂓模不嚴, 其序記可觀者絶少, 雖或有之, 蕩詞冶情如時花美女, 使人可悅而不可敬. 獨墓表、誌銘、叙事、議論淋漓綜錯, 究極人情, 描寫景色, 有時俯仰感慨, 風神氣調, 恰似乎歐公,弇州、太函輩安敢窺其藩籬哉? 世謂有學集勝初學集, 而余則謂不必然也. 大抵文章, 氣爲之主, 氣餒則非文章也. 初學集, 氣自好, 筆勢遒邁, 藻彩隨生, 千載之下, 可像想其人. 雖以墓誌言之, 王季木宋比玉兩表, 是有學集中所無者, 有學集流離困頓, 其氣欲索然矣. 精芒銷落, 色澤憔悴, 惟其意趣較長, 低佪婉㜻, 曲折往復, 其深處刺骨, 沒半分餘憾. 是則初學集之所未及, 而顧安可得初學集好箇豪逸氣來耶? 然味有學之趣, 從可局得初學之氣也. -金時敏,『東圃集』 권7 「題錢牧齋集後」】. 전겸익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그가 높이 평가했던 육유(陸游)의 시를 열독하고 창작의 모범으로 삼기도 했다【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육유를 열독하게 된 데는 전겸익과 같은 문학비평가들의 재평가가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육유에 대한 주자의 추존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주자는 육유와 도의(道義)로 상허(相許)하는 돈독한 사귐을 맺었는데 육유를 일러 ‘당대 일류(一流)의 작가’(“放翁老筆尤健, 在今當推爲第一流. -『晦菴集』 권64 「答鞏仲至」”)라고 평하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주자가 일찍이 육유를 고평한 사실을 토대로 전겸익의 육유에 대한 평가를 한층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정하는 “근래 방옹집의 서문을 보니 중국 근세인이 쓴 것이었다. 그 가운데 ‘흉중리두(胸中李杜)’, ‘지상리두(紙上李杜)’라는 말이 있었는데 시를 잘 논한 것이라 할 수 있다[近看放翁集序, 乃中州近歲人所爲也. 有‘胸中李杜’、‘紙上李杜’之語, 可謂善論詩者. -申靖夏, 『恕菴集』 권16 「評詩文」].”고 한 바 있었다. 그런데 신정하가 인용한 ‘흉중리두(胸中李杜)’와 ‘지상리두(紙上李杜)’는 청나라 문인 양대학(楊大鶴)이 간행한 『검남시초(劒南詩抄)』【1685년 간행된 『검남시초(劒南詩抄)』는 조선후기 문인들의 육유 열독을 보여주는 서적이다. 김창업의 연행록에도 중국에서 구입한 서책 가운데 『검남시초(劒南詩抄)』가 확인되며, 김창협의 문인이었던 이의현(李宜顯) 역시 명대 복고파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검남시초(劒南詩抄)』를 간행한 양대학의 서문을 인용하고 있다.[又楊大鶴者, 亦康煕時人, 序陸放翁詩抄而曰: ‘詩者, 性情之物, 源源本本, 神明變化, 不可以時代求, 不可從他人貸者也. 必拘拘焉規摹體格, 較量分寸, 以是爲推高一代, 擅名一家之具, 何其隘而自小也? 自李滄溟不讀唐以下, 王弇州韙其說後, 遂無敢談宋詩者. 南渡以後, 又勿論云云.’ 吳序顯斥王、李之論, 不遺餘力; 楊序語雖婉, 亦斥王、李者也, 其所論儘有見矣. [李宜顯, 『陶谷集』 권28 「陶峽叢說」] 현재 『검남시초(劒南詩抄)』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롯하여 다수의 대학 도서관에 전하고 있다.】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었다. 김창협을 따랐던 김춘택(金春澤)은 「동문문답(東文問答)」이라는 글에서 신정하가 본 서문이 양대학(楊大鶴)의 서문임을 밝히고, 청나라에 보낼 조선의 시는 양대학이 서문에서 언급한 ‘흉중리두(胸中李杜)’, ‘지상리두(紙上李杜)’를 기준으로 선발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살아있을지도 모를 양대학의 비평을 보면서 김춘택은 당시 청나라 문단은 전겸익의 영향 하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겸익이 중시했던 흉중에서 우러나온 시를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明之詩文莫盛於弇州、滄溟, 亦莫弊於弇州、滄溟, 其禍如洪水滔天, 殆甚於陸學之彌滿, 而然旣有厭之者, 又遂能矯之矣. 今只詳文事, 而詩亦可知. 盖文始有潛溪、遜志而矯之, 則爲弇州、滄溟, 百年之間, 雖有荊川、遵巖、震川輩, 而無以救焉. 晩而矯之, 則爲牧齋, 牧齋之文, 固非至者, 而其勝於王、李則遠甚. 且其論詩, 亦有實見, 而于鱗之姦情醜態, 悉發無餘矣. 抑嘗見楊大鶴者劍南詩序, 其文卽甲子年間所作, 其人今或尙在矣. 觀其所論, ‘胸中李杜’、‘紙上李杜’之語, 亦豈不爲矯王李之弊者耶? 竊意方今彼中爲文章者, 多是牧齋之餘, 而其以詩之出於胸中爲貴, 又必如大鶴之論矣. -金春澤, 『北軒集』 권18 「東文問答」】.
신정하와 김춘택이 언급한 ‘흉중리두(胸中李杜)’는 마음으로 자득(自得)한 이백과 두보이고, ‘지상리두(紙上李杜)’는 모의(模擬)한 이백과 두보를 가리키는 말인데, ‘흉중리두(胸中李杜)’와 ‘지상리두(紙上李杜)’를 대척적으로 변별하는 의식은 백악시단의 ‘진시’론과 매우 유사하다. 백악시단이 복고파를 비판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전범에 녹아있는 작가의 정신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흉중리두(胸中李杜)’는 바로 그 점을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이다【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명대 복고파와 공안파는 물론 당대 최신의 문학론까지도 통효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진시’론과 부합하는 비평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원용하였다.】. 아래 이병연의 시 또한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前略) | (前略) |
論公之文譬相馬 | 공의 문장 상마(相馬)에 비유하여 논해보면 |
牝牡驪黃在所置 | 암컷 수컷 검정 노랑 내버려두고 |
若滅若沒見天機 | 없는 듯 숨은 듯 천기(天機)를 보게 되니 |
是爲纖離與綠駬 | 섬리(纖離)와 녹이(綠駬)같은 명마로다. |
(中略) | (中略) |
嗚呼公與數公死 | 아! 공과 몇 공들께서 돌아가심에 |
子長一氣今則亡 | 자장(子長, 司馬遷)의 한 기(氣)가 이제는 사라졌네. |
群兒直坐不讀書 | 뭇 아이들 다만 앉아 독서하지 않으니 |
古之班馬猶在紙 | 옛날의 반마(班馬)가 다만 종이에만 남아있네. |
紙上班馬空塵埃 | 종이 위의 반마(班馬)는 공연히 티끌만 쌓여 |
東施往往工小嚬 | 동시(東施)가 이따금 따라 하길 공교롭게 해도 |
崑崙一脊日破碎 | 곤륜산 한 줄기가 날마다 부서지고 |
江海淸瀾絶浸漬 | 강해(江海)의 맑은 물이 끊겨 스미지 않는 격. |
文章與道相昇降 | 문장은 도와 더불어 서로 오르내리니 |
缺陷界中興歎咜 | 결함투성이 세계에서 탄식만 터져 나올 뿐. |
讀公之詩續以詩 | 공의 시를 읽고서 시로 엮어서 |
以諗有志古文者 | 고문에 뜻을 둔 자에게 고하노라. |
「운곡(芸谷)선생의 유고(遺稿)를 읽고 뒤에 쓰다[讀芸谷先生遺稿題後]」,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인용된 시는 이평(李坪, 1648 1703)【이평은 자(字)가 대산(對山) 혹은 재산(載山), 호(號)가 운재(芸齋)이며 덕수인(德水人)이다. 조부는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지낸 이조(李稠)이며, 부친은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지낸 이희상(李喜相)이다. 어머니 청송(靑松) 심씨(沈氏)는 승지(承旨)를 지낸 심지한(沈之漢)의 따님이다. 168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후 태릉참봉(泰陵參奉, 1688),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701), 형조좌랑(刑曹佐郞, 1702), 하양현감(河陽縣監, 1702) 등을 역임하였다. 1703년 56세의 나이로 임지인 하양(河陽)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평은 『사기(史記)』 열독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고병(高棅)의 『당시품휘(唐詩品彙)』와 이민구(李敏求)의『당률광선(唐律廣選)』의 장단점을 보완하여 『당률정선(唐律精選)』을 편차할 만큼 시에 대한 조예도 높았다. 『사기』 열독과 『당률정선(唐律精選)』이 보여주듯 이평은 복고주의 문학론을 견지한 인물이다. 문집 『운재유고(芸齋遺稿)』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평의 복고적 문학 경향에 대해, 홍중성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公於文, 酷嗜莊馬, 讀幾數千遍, 發以爲文, 源遠流洪. 其奇譎恣肆, 得之漆園翁; 雅健遒逸, 得之太史公. 而宋明以下, 不屑爲也. …(中略)… 已於聲病有苦癖, 上泝李唐, 下沿趙宋, 以至北地之雄、弇園之大、濟南之高華, 靡不包括吐呑, 以擷英而咀華. 故其爲詩, 專尙格律風神, 以酷肖開天正宗爲主. 不知者或訾以澁拗, 而知者亦淺之爲知公詩, 然其知不知何傷? 自有後世揚子雲, 朝暮遇耳. -洪重聖, 『芸窩集』권5 「芸谷家乘後序」”】의 유고에 붙인 것으로, 시로 쓴 일종의 발문이라 할 수 있다【이평의 『운재유고(芸齋遺稿)』에는 이병연(李秉淵), 홍중성(洪重聖), 이덕수(李德壽), 박추(朴樞), 한배조(韓配祖), 송요경(宋堯卿) 등이 문인으로 거론되어 있다. 이병연은 이평에게서 「화식전(貨殖傳)」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芸齋遺稿』 「附錄」「遺事[朴樞]」) 이병연은 이런 인연으로 이평의 문집에 제시(題詩)를 남기게 되었다. 이평의 복고주의 문학론은 초기 이병연과 홍중성으로 하여금 참된 복고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론에 대한 언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병연에게 7언 54구로 된 이 장편시는 이병연의 시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이병연은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창작동기를 분명히 하였는데, 그것은 고문(古文)에 뜻을 둔 자들에게 제대로 된 복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계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략(前略)된 부분에서 이병연은 문(文)이란 기(氣)에서 나오는데 문기(文氣)는 사마천의 『사기』에 있다고 전제한 뒤, 이평의 『사기』 열독을 정두경(鄭斗卿)이나 김득신(金得臣)보다 더한 것으로 소개하였다【我聞文者出於氣, 氣烏乎在在馬史. 馬史之癖有前輩, 東溟栢谷專於此. 君平㝡嗜范睢傳, 子公尤耽伯夷傳. 芸谷先生自少時, 涵於是書有過焉. 公之所好在何處, 七十傳記蒭豢然. 但聞時到神會處, 手舞足蹈失巾裳. 室中兒女皆竊誦, 一部前漢耳洋洋. -같은 시 앞부분】.
주목할 점은 사기를 대하는 이평의 자세를 언급한 부분이다. 이병연은 정두경은 범휴전(范睢傳)을 좋아하고 김득신은 백이전(伯夷傳)을 탐독했다고 한 뒤, “공께서 좋아하신 건 어디였던가? 칠십 권 열전을 추환(芻豢)처럼 즐기셨네[公之所好在何處, 七十傳記蒭豢然].”라고 하였다. 추환(芻豢)은 맹자가 “의리가 내 마음을 기쁘게 함이 추환이 내 입을 즐겁게 함과 같다[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孟子』 「告子·上」】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추환(芻豢)은 사람들이 대단히 즐기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의리지학(義理之學), 즉 도학(道學)과 연결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병연의 “칠십 권 열전을 추환(芻豢)처럼 즐기셨네”라는 시구는 이평의 사기 열독이 정두경, 김득신보다 더욱 포괄적이며 동시에 학문적 견지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차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병연은 이평 시문의 성취를 구방고(九方皐)의 상마(相馬)에 비유하여 평하였는데, 천기(天機)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고평하였다. 주지하듯 구방고의 상마(相馬) 능력은 말의 천기(天機)를 읽는 데 있었다【穆公見之, 使行求馬. 三月而反報曰: ‘已得之矣. 在沙邱.’ 穆公曰: ‘何馬也?’ 對曰: ‘牝而黃.’ 使人往取之, 牡而驪. 穆公不說, 召伯樂而謂之曰: ‘敗矣. 子所使求馬者, 色物牝牡, 尙弗能知, 又何馬之能知也?’ 伯樂喟然太息曰: ‘一至於此乎? 是乃其所以千萬臣而無數者也. 若臯之所觀, 天機也. 得其精而忘其麤, 在其內而忘其外, 見其所見, 不見其所不見, 視其所視而遺其所不視, 若臯之相馬, 乃有貴乎馬者也. -『列子』 권8】. 이때의 천기란 말의 암수, 털빛과 같은 외형적인 요소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천부의 자질을 의미한다. 이를 이병연의 평가와 연결시켜보면, 이평 시문의 성취는 외면적 수사가 아닌 작가의 내면적 경지, 즉 높은 정신성에서 인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이병연이 보기에 이평의 시문은 학문과 정신의 두 측면에서 『사기(史記)』에 녹아있는 정수를 자득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시의 후반부에 더욱 강조된다. 이병연이 진단한 후학들의 문제는 제대로 된 전범 학습을 하지 않는 데 있었다. 독서를 하지 않으니 반고와 사마천은 종이에 갇힌 채 먼지나 쓰고 있고, 동시(東施) 같은 후인들은 지상(紙上)의 반마(班馬)를 효빈(效顰)할 따름이다. 설사 동시(東施)가 어쩌다가 효빈하기를 공교롭게 했더라도, 즉 후인이 모의의 흔적을 감춘 창작을 했더라도 이병연이 보기에 그것은 정신의 측면에서 여전히 함량 미달이었다. 곤륜산의 줄기가 파쇄(破碎)되고, 강해(江海)의 맑은 물이 끊겼듯 체득해야 할 고인[전범]의 정신이 단절된 것이기 때문이다. 양대학의 언어를 빌리자면 곧 흉중(胸中)의 반마(班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이병연에게 있어 고인[전범]의 정신은 곧 도(道)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문장이 도와 더불어 승강(昇降)한다’는 말은 문과 도를 하나로 보는 성리학적 문학관에서 나온 것으로, 특히 주자가 문장을 치세지문(治世之文), 쇠세지문(衰世之文), 난세지문(亂世之文)으로 나누어 본 것【有治世之文, 有衰世之文, 有亂世之文, 六經, 治世之文也; 如國語委靡繁絮, 眞衰世之文耳. 是時語言議論如此, 宜乎周之不能振起也. 至於亂世之文, 則戰國是也. 然有英偉氣, 非衰世國語之文之比也. -『朱子語類』권139「論文·上」】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이병연은 당금의 문장을 도(道)가 끊긴 쇠세지문(衰世之文)으로 여기고, “결함계중흥탄타(缺陷界中興歎咜)”라고 탄식했던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론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이병연 또한 ‘진시’ 창작과 학습에 있어 성리학적 문학관을 바탕으로 ‘정신’을 핵심적 가치로 내세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에서 백악시단 ‘진시’론의 내용과 특징을 명대 복고파와 공안파의 문학론에 견주어 살펴보았다. 백악시단의 ‘진시’론은 창작에 있어 사상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명대 복고파의 ‘진시’론과 달랐다. 공안파와는 입각한 사상의 차이로 인해 ‘진시’의 내용과 지향이 달라졌다. 백악시단의 ‘진시’는 학시나 창작에 있어 고도의 정신성을 요구하고 표현기법이나 음악성 등과 같은 수사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경시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사변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는 백악시단의 ‘진시’론이 주자의 ‘도문합일(道文合一)’적(的) 문학관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질적 특질을 간과한 채 논리상의 유사성, 비평어의 유사성 만을 기준으로 일방적 영향관계를 논하는 것은 백악시단 ‘진시’의 실상과 상당히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본고가 선행 연구들과 달리 주자 문학론과의 연관성을 주목하는 이유 또한 ‘진시’의 실상 때문이다. 명대 복고파 문인들의 시는 과연 그들의 시론대로 전범의 언어를 창작에 원용하는 양상을 보이고, 공안파 문인들의 시는 과연 그들의 시론대로 염정적이고 향락적인 창작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백악시단의 ‘진시’는 어떠한가? 공안파의 논리를 차용했다는 백악시단의 ‘진시’가 과연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긍정하며 그것을 꾸밈없이 시로 형상화하였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백악시단의 ‘진시’는 시론과 창작이 괴리된 허위였던가?
기존 연구들이 백악시단의 문학론을 공안파의 문학론, 혹은 명청대의 새로운 비평론과 연결시키려 한 것은 즉자적으로 발견되는 논리나 표현의 유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보다 근본적으로는 발전적 역사인식을 토대로 중세와 근대 사이에 배정한 조선후기 문학에 탈중세적 특징을 부여하려는 의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조선후기 ‘탈중세’의 표지를 ‘탈주자학’에서 구하다보니 백악시단 문인들의 시론을 검토하면서 종래의 성리학적 문학론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고, 대신 명대 문학유파의 문학론이 주요하게 부상했던 것이다. 물론 명대 문학유파의 문학론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영향은 앞서 살펴본 대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그러한 영향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가장 강력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은 성리학적 문학론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백악시단 ‘진시’의 핵심 시론인 천기론(天機論)을 검토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인용
Ⅰ. 서론
Ⅱ.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Ⅲ. 진시의 기저와 논리
Ⅳ. 진시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Ⅴ. 진시의 시사적 의의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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