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량이 한나라 삼걸이 된 이유와 배움의 조건
도올 선생이 쓴 『교육입국론』이란 책은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파랑을 격파하며 나아간다(讀萬卷書, 破萬里浪).”란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구도의 길을 찾아 장도를 떠난 신라의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단 여덟 글자로 포착해낸 명구다.
▲ 도올 선생님의 교육자들에 대한 조언이 담긴 책.
배우러 떠나니 신나기도 해라
구도求道의 길을 찾아 파랑을 격파하며 천축天竺으로 떠나는 스님들의 발걸음은 가벼웠을 것이고 감정은 두렵기보다 설렜을 것이다.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토록 새로운 세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구법승들에 비할 바 아니지만 2018년에 갑자기 임용을 준비하기로 맘을 먹고 전주로 내려올 때의 내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두렵기보단 설렜고 비관적이기보다 낙관적이었으며 막막하기보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예전에 다섯 번이나 도전하며 한 번도 1차 합격의 벽조차 넘지 못하고 끝을 냈으니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자 도전인 셈이었지만 이렇게 다시 한문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게 마냥 좋기만 했다. 단재학교에서 보낸 6년이란 시기를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하나하나 알아간다는 것, 그에 따라 여러 방면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단재학교는 나에게 ‘공부의 재미와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역동성을 체득하도록 만든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6년 간의 서울 생활을 마무리 하고 전주로 돌아왔다. 한문공부의 실패를 맛본 곳에서 다시 시작.
장량을 통해 본 배움의 조건
2016년에 박동섭 교수의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박동섭 교수는 ‘배움은 무엇인가?’라는 매우 난해하면서도 우리 사회엔 이미 답이 주어져 있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줬었다. 하지만 이때 들은 이야기는 여태껏 알고 있던 내용을 하나하나 무너뜨려줬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좋은 점수를 맞기 위해 배운다’, ‘교육과정에 명시된 것이니 배운다’, ‘모르는 바보 취급당하기 싫으니 배운다’라는 답안이 이미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지금껏 배워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박동섭 교수는 세 사람의 일화를 통해 그런 식으로 왜곡된 배움의 의미를 바로 잡으려 했었다.
▲ 트위스트 교육학을 듣던 때의 모습. 저녁에 학교수업을 마친 교사들이 하나둘씩 모여 강의를 들었다.
처음에 인용한 사람은 바로 장량이란 사람이다. 중국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량이란 이름에 관해선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장량은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을 도운 인물로 소하ㆍ한신과 ‘한나라 삼걸’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런 업적을 이룬 인물은 과연 어떻게 배웠으며, 무엇을 배운 것일까? 바로 우리의 물음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으로 치자면 대통령을 만든 ‘킹메이커’인 셈이니, 그들은 어려서부터 강남 3구에 살며 유명한 대치동 학원가를 전전하며 실력을 쌓았을 것이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초특급 과외선생님들을 붙여 부족한 부분이 없도록 철저하게 보강했을 것이다. 그 결과 소위 명문대를 나와 주요 정치인들과 연줄을 맺게 됐을 것이며 그에 따라 자연스레 킹메이커의 역할 또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성공신화를 따라 장량의 배움에 대해 상상하게 되지만, 장량의 배움은 이런 식의 루트를 완벽하게 거부한다. 거기엔 바로 그의 스승인 황석공이란 비범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황석공이 장량을 가르친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장량이 어릴 때 흙다리 위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됐는데, 황석공은 다짜고짜 신발을 던져 놓고서 “어린놈아 신발 좀 주워 와라.”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미친 사람’이려니 생각하며 가던 길 계속 가던지, 112로 경찰에 신고를 하던지, 그도 아니면 주먹부터 날리고 볼 것이다. 하지만 장량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순간 일어났던 분노를 가라앉히고 신발을 주워다 줬다. 그러자 황석공은 그를 기특하게 여기며 5일 후에 이곳에서 다시 보자고 말을 한다.
5일 후에 그 장소로 장량은 나갔는데 먼저 도착해 있던 황석공은 “어린놈이 어른보다 늦는 구나.”라고 다짜고짜 화를 내며 5일 후에 다시 오라고 말을 하며 휙 가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리고 자꾸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자신을 몰아넣는 저 늙은이가 얼마나 짜증났을까. 그런데도 5일 후에 장량은 괜한 트집이라도 잡히지 않으려 새벽에 그곳으로 갔고 그제야 노인은 흡족해하며 『태공병법太公兵法』이란 책을 줬다.
▲ 무작정 신발을 떨어뜨린 황석공과 그의 말을 충실히 따르던 장량.
겸손함과 배움
여기서 배움의 첫 번째 속성을 알게 된다. 배움의 고갱이는 절대로 『태공병법太公兵法』이란 책에 있지 않고 그 책을 받기까지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장량은 부유한 집에서 자라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맘껏 할 수 있어 삶에 간절함 따위는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그는 황석공을 만나기 전까지 최상의 교육환경 속에서 자라왔을 게 뻔하고 그에 따라 늘 인정만 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기고만장한 마음이 있을 때 배우고 싶다는 마음은 피어나지 않는다. 배움은 간절한 마음, 그러면서도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자기 인식에서부터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겸손할수록, 모르는 게 많으니 알고 싶은 게 많다고 생각할수록 배우고자 하는 욕망은 커져가게 마련이다. 황석공이 장량에게 신발을 던진 것이나 늦게 왔다고 트집을 잡은 것은 바로 장량의 기고만장한 마음,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 거만한 마음을 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황석공의 교육법은 장량이 ‘미친 노인네네.’라고 거부했다면 성립되지 않는 교육법이다. 그만큼 황석공은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장량의 그릇을 보고 싶었던 것이고, 장량 또한 잘 참고 묵묵히 그의 가르침을 따라간 덕에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이런 과정을 통해 장량은 한나라 삼걸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그처럼 다시 임용을 준비하며 장량처럼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싶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좀 어폐가 있다. 솔직히 7년이나 한문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 나의 경우엔 거만할 만한 꺼리조차 없었으니 겸손한 마음으로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이미 충족되어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래서 2018년에 전주로 내려와 오랜만에 한문공부를 하며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이유로 절로 겸손하게 배울 수 있었다.
이때 나에게도 황석공 같은 한문공부의 열정을 맘껏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김형술 교수다. 운 좋게도 그 당시 김형술 교수는 불특정 다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소화시평 스터디를 진행 중이었고 ‘한문공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막막해하기만 하던 나는 그 스터디에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다. 나이는 나이대로 먹고 한문 실력은 개뿔 없는 나를 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만은, 그런 내색은 전혀 없이 하나하나 제대로 알려줬고 발표까지 준비하게 하며 이끌어줬다. 그에 따라 금방 한문 공부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었고 알아가는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김형술 교수는 일반적으로 한문만 공부했던 사람들과는 생각의 결을 달리한다. 그래서 “한문을 공부하며 미술관이나 콘서트 장에도 가보세요.”라고 말하기도 하고 사모님께서 만든 패치워크patchwork라는 예술작품을 보여주며 ‘고민했던 시간만큼, 열중했던 순간만큼 그만큼 값어치 있는 작품이 나온다며’ 예술작품과 한문공부의 공통점을 말하기도 하며 크라잉넛 콘서트장에 가죽재킷을 입고 온갖 장신구들을 차고 가서 신나게 놀고 온다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과 세상과의 소통을 강조하기도 한다. 황석공의 교수법은 장량의 거만함을 제거하고 올바른 배움의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해줬듯이, 김형술 교수의 그와 같은 인생관과 학문관도 나에게 많은 상상력을 안겨주며 한문공부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이끌어줬다.
▲ 방학인데도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다들 열정이 보통이 아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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