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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형수님 묘지명 - 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본문

책/한문(漢文)

형수님 묘지명 - 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건방진방랑자 2020. 4. 1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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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집안에 연거푸 상이 났(歲且荐喪)”다고 했는데, 이는 1759년 연암의 모친 함평 이씨가 59세로 세상을 하직하고 이듬해인 1760년 조부 박필균이 76세로 별세한 일을 말한다. 공인 이씨가 시어머니 상을 당한 것은 그 36세 때였다. 시집온 지 20년 째 되던 해다. 이때부터 공인 이씨는 연암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주부主婦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부란 오늘날의 가정주부라는 말과 다소 의미가 다르다. 당시 주부에게는 한 집안의 살림에 대한 책임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온갖 제사에 대해 준비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말하자면 한 집안의 경제와 제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공인 이씨가 이 역할을 맡기 전에는 시어머니 함평 이씨가 이 역할을 수행했을 터이다. 하지만 이제 함평 이씨가 죽음으로써 맏며느리인 공인 이씨가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공인 이씨가 주부가 된 것은 그녀의 고난이 이전과는 사뭇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그녀는 주부로서 두 해 동안 연달아 초상을 치러야 했다. 예전의 초상은 지금처럼 병원 영안실에 3일간 빈소를 마련한 후 곧바로 장례를 치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복잡한 상례喪禮에 따라 한 달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더구나 시어머니상은 삼년상이다. 게다가 공인 이씨는 주부의 위치에 있었으니 이것저것 챙기고 신경 쓸 일과 해야 할 일이 좀 많았겠는가. 그러므로 공인 이씨는 이 두 초상을 치르면서 몸이 더욱 더 상하게 되었을 게 틀림없다.

 

이 단락에는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접대함에 대가의 법도를 잃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奉祭接賓, 恥失大家規度, 綢繆補苴)”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당시 사대부가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은 접빈객 봉제사接賓客 奉祭祀’, 즉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집에 친지나 일가친척이 자주 찾아왔다. 한번 찾아오면 짧으면 며칠, 길면 보름이나 달포씩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때 밥을 잘 지어 대접해야 함은 물론, 그 옷까지 빨아주어야 했다. 그리고 떠날 때는 얼마간의 노잣돈을 손에 쥐어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사대부 집안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1년에 적어도 열 몇 번 정도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제수祭需 비용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따라서 가난한 집안의 경우 접빈객 봉제사를 하느라 빚을 내기 일쑤였다.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綢繆補苴)”라는 말은 이런 사정을 말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2. 생활고에 병에 걸린 형수님을 부모처럼 모시다

3. 청빈의 가풍 때문에 엄청 고생한 큰 형수

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5. 가난 때문에 병들어 죽어간 형수를 그려내다

6.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가정살림을 돌보다

7. 에피소드를 삽입시켜 글에 생기를 불어넣다

8. 형수를 위로하려 연암협을 미화하다

9. 형수님은 연암협에 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네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11.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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