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집안에 연거푸 상이 났(歲且荐喪)”다고 했는데, 이는 1759년 연암의 모친 함평 이씨가 59세로 세상을 하직하고 이듬해인 1760년 조부 박필균이 76세로 별세한 일을 말한다. 공인 이씨가 시어머니 상을 당한 것은 그 36세 때였다. 시집온 지 20년 째 되던 해다. 이때부터 공인 이씨는 연암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주부主婦’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부’란 오늘날의 ‘가정주부’라는 말과 다소 의미가 다르다. 당시 주부에게는 한 집안의 살림에 대한 책임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온갖 제사에 대해 준비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말하자면 한 집안의 경제와 제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공인 이씨가 이 역할을 맡기 전에는 시어머니 함평 이씨가 이 역할을 수행했을 터이다. 하지만 이제 함평 이씨가 죽음으로써 맏며느리인 공인 이씨가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공인 이씨가 주부가 된 것은 그녀의 고난이 이전과는 사뭇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그녀는 주부로서 두 해 동안 연달아 초상을 치러야 했다. 예전의 초상은 지금처럼 병원 영안실에 3일간 빈소를 마련한 후 곧바로 장례를 치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복잡한 상례喪禮에 따라 한 달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더구나 시어머니상은 삼년상이다. 게다가 공인 이씨는 주부의 위치에 있었으니 이것저것 챙기고 신경 쓸 일과 해야 할 일이 좀 많았겠는가. 그러므로 공인 이씨는 이 두 초상을 치르면서 몸이 더욱 더 상하게 되었을 게 틀림없다.
이 단락에는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접대함에 대가의 법도를 잃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奉祭接賓, 恥失大家規度, 綢繆補苴)”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당시 사대부가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은 ‘접빈객 봉제사接賓客 奉祭祀’, 즉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집에 친지나 일가친척이 자주 찾아왔다. 한번 찾아오면 짧으면 며칠, 길면 보름이나 달포씩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때 밥을 잘 지어 대접해야 함은 물론, 그 옷까지 빨아주어야 했다. 그리고 떠날 때는 얼마간의 노잣돈을 손에 쥐어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사대부 집안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1년에 적어도 열 몇 번 정도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제수祭需 비용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따라서 가난한 집안의 경우 접빈객 봉제사를 하느라 빚을 내기 일쑤였다.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綢繆補苴)”라는 말은 이런 사정을 말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 전문
인용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11.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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