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활고에 병에 걸린 형수님을 부모처럼 모시다
한편, 연암의 아들인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도 연암의 형수에 대한 언급이 두 군데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당신의 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섬기셨다. 친척과 친구들은 이런 아버지를 저 옛날 사마온공司馬溫公(북송의 학자)이 그 형 백강伯康을 섬긴 데 견주었다. 형수 이공인李恭人은 하도 가난을 많이 겪은지라 몸이 대단히 수척했으며 때로 우울함을 풀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과 좋은 말로써 그 마음을 위로해드렸다. 매양 무얼 얻으면 그것이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당신 방으로 가져가지 않고 반드시 형수께 공손히 바쳤다.(1권 20번)
王考喪後, 先君事伯兄及嫂氏如父母. 親戚知友間, 多擧溫公之事伯康以況之. 嫂氏李恭人, 飽經貧寒, 鞠瘁已甚, 有時躁鬱不能遣. 先君一以和顏好語慰藉之. 每有所得, 雖甚微細, 必不入私室, 敬納於嫂氏.
아버지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젊을 때 쓰고 남은 돈 스무 냥이 있었더니라. 네 어머니의 의복이 해진 것을 생각하고 그 돈을 보자기에 싸서 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구나.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형님(연암의 형수)은 늘 가난하고 쪼들리십니다. 이 돈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 내가 그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 말이 잊히지 않는구나.”
큰어머니는 성품이 현숙했으며, 시동생인 어린 우리 아버지를 길러주셨다. 그래서 큰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우애가 깊었다. 큰어머니는 오랫동안 가난을 겪은 탓으로 만년에 결핵을 앓아 말씀을 하시는 도중에 기침을 하며 괴로움을 참지 못하곤 했다. (1권 46번)
先君嘗言: “吾少時, 嘗有用餘錢二千, 念淑人衣具缺用, 齎衣襆以遺之. 淑人言: ‘伯嫂中饋常艱乏, 何乃以此入私室乎?’ 吾時甚慚其言, 至今不能忘也.”
伯母性度賢淑, 養育先君. 先妣友愛篤至. 而久經貧困, 晚來病在痰火, 言語之間, 或有不能忍煩者.
이 인용문을 통해서도 연암이 형수를 어머니처럼 섬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인용문은 형수 이씨가 만년에 결핵에 걸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마도 집안을 꾸려 나가기 위해 불철주야 힘에 부친 일을 하면서 제대로 못 먹고 쉬지 못해 이런 병에 걸린 것이리라. 그리고 이 인용문 중에 “때때로 우울함을 풀지 못하였다(有時躁鬱不能遣)”라는 말이 보이는데, 이씨는 당시 너무 벅찬 생활고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 전문
인용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11. 총평
- 금상今上: 이 글을 쓴 시점의 임금은 정조正祖(1752~1800)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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