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두 명의 장자와 조릉에서의 깨달음
1. 장주(莊周)와 장자(莊子)
장자는 관직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느 때 태어나서 어느 때 죽었는지, 혹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장자』에는 장자에 대한 많은 우화들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우화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접적으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우화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두 명의 장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명은 장자(莊子)라고 불리는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장주(莊周)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장주는 바로 우리가 다루려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철학자의 실명을 지칭하고 있다. 반면 장자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장 선생님이라는 경칭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장자』에는 두 가지 상이한 관점으로부터 이루어진 장자에 대한 우화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자로 쓰여져 있는 우화들은 장자 후학들이 자신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면, 장주로 쓰여져 있는 우화들은 이와는 달리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장자학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장 선생님이라고 쓰여져 있는 우화를 한 편 읽어보도록 하자. 「소요유」 편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얘기가 나온다.
혜시(惠施) 선생님이 장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가죽나무라 하네. 그 큰 줄기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을 칠 수가 없고, 작은 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자를 댈 수 없을 정도라네. 그래서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다네. 지금 자네의 말도 이처럼 크기만 하고 쓸모 없어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걸세.”
그러자 장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너구리나 살쾡이를 본 적이 없는가? 몸을 낮추고 엎드려 먹이를 노리다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높이 뛰고 낮게 뛰다 결국 그물이나 덫에 걸려 죽고 마네. 이제 저 들소를 보게. 그 크기가 하늘에 뜬구름처럼 크지만 쥐 한 마리도 못 잡네. 이제 자네는 그 큰 나무가 쓸모 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그것을 ‘어디에도 없는 마을[無何有之鄕]’ 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無爲] 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게. 도끼에 찍힐 일도, 달리 해치는 자도 없을 걸세. 쓸모 없다고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지 않은가?”
惠子謂莊子曰: “吾有大樹, 人謂之樗. 其大本擁腫而不中繩墨, 其小枝卷曲而不中規矩. 立之塗, 匠者不顧. 今子之言, 大而無用, 衆所同去也.” 莊子曰: “子獨不見狸狌乎? 卑身而伏, 以候敖者; 東西跳梁, 不避高下; 中於機辟, 死於罔罟. 今夫斄牛, 其大若垂天之雲. 此能爲大矣, 而不能執鼠. 今子有大樹, 患其無用, 何不樹之於無何有之鄕, 廣莫之野, 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不夭斤斧, 物無害者, 無所可用, 安所困苦哉!”
장자 후학들에게 있어 장 선생님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장 선생님은 이미 신성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아니 정확히 말해 기억했으면 하고 바라는 장자는 이미 평범한 인간의 냄새가 사라지고 마치 달통한 성인인 것처럼 등장하고 있다. 사상적으로 혜시는 장자에게 언어와 논리의 엄밀함과 정치 현실의 냉혹함을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혜시는 오히려 식견이 보잘 것 없는 일상인을 상징하고 있다. 쓸모 없는 나무에서 쓸모를 찾는 장자와는 대조적으로, 혜시는 일상적 통념으로 쓸모 없는 나무는 쓸모 없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반면 장자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이라는 이분법을 비판하면서 쓸모 없음도 쓸모 있도록 하는 자유로움을 찾아야 한다고 점잖게 혜시를 가르치고 있다. 결국 이 우화를 쓴 장자 후학들에게는 자신의 스승 장 선생님의 위대함만이 보이고, 대정치가이자 논리학자였던 혜시의 위대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주로 쓰여진 우화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장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우화로는 「외물(外物)」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장주(莊周)의 집은 가난해서, 그는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려고 갔다.
그 제후가 말했다.
“좋다. 나는 곧 내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얻게 되는데, 너에게 삼백
금을 빌려주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그러자 장주는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어제 이곳으로 올 때, 길 중간에서 소리치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제가 마차바퀴 자국을 돌아다보니, 거기에는 잉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잉어에게 ‘잉어 아닌가! 너는 무엇하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잉어는 ‘저는 동해의 왕국에서 파도를 담당하는 신하인데, 당신은 한 국자의 물로 나를 살릴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좋다. 나는 지금 남쪽으로 오나라와 월나라의 왕에게 유세하러 가는 중이니, 서강의 물길을 네가 있는 곳으로 향하도록 하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그러자 그 잉어는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없으면 살 수 없는 그런 것을 잃었습니다. 제게는 살 수 있는 곳이 지금 없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나를 살릴 수 있는 한 국자의 물입니다. 만일 그것이 당신이 말할 수 있는 전부라면, 당신은 건어물 진열대에서 저를 찾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莊周家貧, 故往貸粟於監河侯. 監河侯曰: “諾. 我將得邑金, 將貸子三百金, 可乎?”
莊周忿然作色曰: “周昨來, 有中道而呼者, 周顧視車轍, 中有鮒魚焉. 周問之曰: ‘鮒魚來, 子何爲者耶?’ 對曰: ‘我, 東海之波臣也. 君豈有斗升之水而活我哉!’ 周曰: ‘諾! 我且南游吳越之王, 激西江之水而迎子, 可乎?’ 鮒魚忿然作色曰: ‘吾失我常與, 我無所處. 我得斗升之水, 然活耳. 君乃言此, 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
이 이야기 속의 장주는 재화와 관직에 초연했던, 나아가 스스로의 즐거움에 만족했던 장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다. 한 국자의 물이 없어 사경을 헤매는 잉어처럼, 그는 약간의 곡식을 빌리러 제후에게 갔다. 그러나 그 제후는 나중에 자신의 고을에서 세금을 걷게 되면 그때서야 삼백 금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장자의 그런 딱한 사정을 모르고 있었거나, 알면서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자 장자는 자신의 딱한 처지를 잉어에 비유하면서 그 제후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아마도 이 사건은 장자가 칠원(漆園)이라는 정원의 관리직을 내던진 후에 생긴 사건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칠원의 관리자라는 벼슬이 장자에게 유일한 관직이었다. 그는 이후에 어떤 관직에도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지식인으로서 장자가 그 알량한 벼슬이나마 버리자마자 얼마나 궁핍하게 생활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우화를 보면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옷이나 이불을 수선하면서 번 돈으로 근근이 생활했었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는 권력과 부의 중심부에 있었던 나머지 다른 동시대 지식인들과는 달리 삶이 얼마나 수고로운지를 여실히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고난의 삶은 그가 우화의 소재로 삼고 있는 인물들의 면면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선천적인 불구자, 후천적으로 형벌을 받아 다리를 잘린 사람, 광인(狂人), 목수, 백정 따위다. 재미있는 것은 장자가 자신의 우화에 등장시킨 이들이 결코 불행한 삶을 영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오히려 이들은 정치가들이나 지식인들과는 달리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삶의 달인들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이런 우화들을 통해 장자는 한편으로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조롱하려고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애정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장 선생님(장자)보다는 장주로 기록되어 있는 우화들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장주로 기록된 우화들은 그가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고민했던 철학자였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장주(莊周) | 장자(莊子) |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철학자 | 후학들이 스승을 높여 부른 명칭 |
일상인이자 사람냄새가 남 | 이상화된 달통한 철학자 |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 기록 | 장자학파에 속한 존경심에 의한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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