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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XI. 의미와 자유 - 2. 자유란 무엇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순간 기존의 의미 체계는 변동된다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XI. 의미와 자유 - 2. 자유란 무엇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순간 기존의 의미 체계는 변동된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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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순간 기존의 의미 체계는 변동된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자유한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초자아에 의해 지배되어 있다면, 다른 말로 고정된 의미에 사로잡혀 있다면, 인간은 다른 일체의 외적인 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철저하게 자신의 순수한 실천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어떤 행위를 선택해서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란 전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이점에서 칸트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고정된 의미 체계를 그대로 둔 채 어떤 행동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존의 의미 체계와는 다른 의미 체계를 생산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기본의 의미 체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 형식을 벗어나서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복종하는 존재, 삼종지도를 따라야만 하는 존재라고 의미 부여하는 여성은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물론 어떤 여성은 칸트를 따라서 자신은 자유롭게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따라서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선택한 것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 선택도, 그 무엇도 아니며, 단지 고정된 의미를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자유란 그래서 새롭게 정의되어야만 한다.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서 한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은 홀로 남겨져서 이리저리 몽상에 빠지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미란 특정한 주체와 특정한 타자를 생산하는 선험적인 관계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미란 주체와 타자를 동시에 함축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주체 홀로 이러저러하게 새로운 의미를 구성할 수는 없다.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마르크스가 구체적인 노동자들 및 그들의 삶과 조우하지 않았다면 부잣집 아들 마르크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가 마르크스라는 인물로 변화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역으로 노동자들은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변화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노동자와 조우하면서 마르크스는 기존의 노동자에 부여된 의미로는 드러나지 않는 노동자의 타자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리고 이런 타자성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르크스 자신과 노동자들은 전혀 다르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체에게는 타자의 타자성이 의미의 공백, 또는 의미의 블랙홀처럼 현상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타자성은 기존의 어떤 의미부여도 빨아들이고 흡수해버리는 블랙홀인 것처럼 의미의 결여로서 현상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만났다고 하자. 처음에 그녀는 그에게 단지 회사 후배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날 회사 후배라는 의미로는 완전히 관계 맺을 수 없는 어떤 공백과 결여가 그녀에게서 나타났다. 이 남자는 이런 공백과 결여를 애써 잊으려고 할 수도 있고, 또 최근에 자신이 사귀던 애인과 이별했기 때문에 이 후배에게서 그런 이상한 감정이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나타나는 의미의 공백은 더욱더 커져만 간다. 결국 사랑이라는 의미를 그 공백에 부여해야만 이런 공백을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그 공백에 부여된 사랑이라는 의미는 결국 이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그 여자 후배는 사랑받는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처음에 나타난 공백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여자 후배에게 있었던가?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이 남자와 그 여자 후배 사이에, 그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타자의 공백 또는 의미의 부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순간 기존의 전체 의미 체계는 변동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자신을 타자와 더불어 부단히 변화시키는 자유로운 행위는, 새로운 의미 창조로서만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나아가 우리 인간의 자유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면서 자신을 새로운 주체로 만들 수 있다는 데서만 존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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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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