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송시학(宋詩學)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1. 송시학(宋詩學)의 수용
한 시대(時代)에 한 문장(文章)이란 말은, 문장(文章)의 소상(所尙)이 시대(時代)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말여초(羅末麗初)의 200년(年) 동안 문학유교(文學儒敎)에 힘입어 사장학(詞章學)이 크게 떨쳤으며 소단(騷壇)은 유미(柔靡) 경조(輕佻)한 만당풍(晩唐風)이 속상(俗尙)이 되어 버렸지만, 고려중기에 이르러 이러한 풍상(風尙)은 시대(時代)의 추이(趨移)에 따라 커다란 변혁(變革)의 국면(局面)을 맞이하게 된다. 산문(散文)에 있어서는, 표전장주(表箋章奏) 등이 이때까지도 사대문자(事大文字)로서 중요시(重要視)되고 있었으므로 변려문(騈儷文)의 전통(傳統)이 그대로 지속되었지만 운문(韻文)에 있어서는 전시대(前時代)의 속상(俗尙)에 대하여 소단내부(騷壇內部)에서 이미 거부반응(拒否反應)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소식(蘇軾)으로 대표(代表)되는 송시학(宋詩學)의 유입(流入)으로 결정적인 국면(局面)이 전개(展開)된다. 김종직(金宗直)이 그의 『청구풍아(靑丘風雅)』 서문(序文)에서 지적한 ‘고려의 중엽엔 오로지 동파만을 배웠다[麗之中葉, 專學東坡].’가 바로 그것이다.
소단(騷壇)의 속상(俗尙)에 대하여 직접 그 폐해(廢害)를 토로(吐露)하고 나선 것은 임춘(林春)이 가장 심하다. 임춘(林春)은 그의 「여조역락서(與趙亦樂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가서 이른바 장옥(場屋)의 글이라는 것을 칭하여 읽어 보니 공교하기는 공교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며 진실로 배우(俳優)들의 말과 같으니 스스로 생각컨대 이렇게 하고도 글을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비록 갑과(甲科)ㆍ을과(乙科)라도 가히 팔꿈치를 굽히고서도 차지하겠다.
故出而迺取時所謂塲屋之文者讀之, 工則工矣, 非有所謂甚難者, 誠類俳優者之說, 因自計曰如是, 而以爲文乎, 則雖甲乙, 可曲肱而有也.
당시의 과문(科文)이 부화(浮華)한 사장(詞章)을 위주(爲主)로 하기 때문에 마치 배우(俳優)들의 작희(作戱)와 다를 것이 없다고 불평(不平)하고 있다.
그는 또 조통(趙通)에게 주는 글에서, 근세(近世)의 과시(科試)가 성률(聲律)에 구애(拘碍)받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장(文章)의 쇠퇴(衰退)함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으니 그대들 서너 사람이 서로 바꾸어 가며 창화(唱和)하여 진흥(振興)시킨다면 그 공(功)이 어찌 적으리오?
文章之衰, 未有甚於今日, 當賴足下輩三四人, 迭唱更和, 而振起之, 則其功豈細也哉?
새로운 문풍(文風)의 진작(振作)에 기대(期待)를 걸고 있다.
이에 앞서 최자(崔滋)의 증조부(曾祖父)인 최륜(崔崙)도 예종(叡宗)이 경박(輕薄)한 사신(詞臣)들과 더불어 풍월(風月)에만 힘쓰고 있는 현실(現實)을 간(諫)하다가 다른 사신(詞臣)의 항변(抗辯)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춘주부사(春州副使)로 좌천(左遷)되기까지 한 사실이 『보한집(補閑集)』 권상 18에 전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인 임춘(林春)의 글은 일단 과거제도(科擧制度)의 폐해(弊害)를 논(論)한 것이다. 두번이나 과거(科擧)에 실패(失敗)하고도 백발(白髮)이 된 몸으로 다시 과거(科擧)에 도전(挑戰)해야만 했던 자신의 불평(不平)한 심사(心事)를 토로(吐露)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과거(科擧)에 실패(失敗)한 원인(原因)을 전적으로 부화(浮華)한 사장(詞章)으로 시취(試取)하는 제도(制度)의 잘못에 돌리고 있을 뿐 정작 그의 문장(文章)에 대해서는 대단한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른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끝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황보항(皇甫沆)에게 술회(述懷)한 글 가운데서도 그에게 질박(質朴)한 서한(西漢)의 문장(文章)을 일으켜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여황보약수서(與皇甫若水書)」가 그 글이다.
내 대강 보니 오늘날의 사대부로서 위대한 데 뜻을 둔 자는 매우 적고 다만 과거(科擧)를 부귀의 밑천으로 삼고 있을 뿐이니, 굳세게 그리고 힘차게 횡행(橫行)하여 저술(著述)의 마당에 크게 눈 떠 가히 서한(西漢)의 문장(文章)을 일으킬 사람이 그대를 두고 누구이겠는가?
僕略觀當世士大夫, 志於遠且大者甚少, 但以科第爲富貴之資而已. 其遒然霈然, 橫行闊視於綴述之場, 可以興西漢之文章者, 捨足下誰耶?
이는 박학(博學)과 문장(文章)을 겸유(兼有)해야 하는 유자(儒者)의 기본자세(基本姿勢)를 천명(闡明)한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는 새로운 시대(時代)의 문장(文章)으로 유행(流行)하는 동파(東坡)의 글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肯定的)인 반응(反應)을 보인다. 일찍이 그 글을 읽은 일은 없었지만, 구법(句法)에서 이미 서로 비슷하여 암암리에 부합하고 있음을 이인로(李仁老)에게 말하고 있다. 「여미수논동파문서(與眉叟論東坡文書)」가 그것이다.
내가 근세(近世)를 보니, 동파(東坡)의 글이 시대(時代)에 크게 행(行)하고 있다. 배우는 자 그 누가 마음속에 간직하여 몸살을 앓지 않으리오마는 그러나 한갓 그 글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다만 그 국량(局量)에 따라 편안한 대로 하면 그만이다. 반드시 억지로 본을 떠서 그 천질(天質)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점이다. 나와 그대는 일찍이 그 글을 읽은 일은 없지만 왕왕 구법(句法)이 이미 서로 비슷하니 어찌 마음 가운데서 얻은 것이 암암리에 서로 합치(合致)한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지은 몇 편이 자못 체(體)를 갖추었기로 오늘 부쳐 보내노니 받아 보고 가르침을 내려주면 다행이겠나이다. 이만 줄입니다.
僕觀近世, 東坡之文大行於時, 學者誰不伏膺呻吟? 然徒翫其文而已, 就令有撏撦竄竊, 自得其風骨者, 不亦遠乎. 然則學者但當隨其量以就所安而已. 不必牽強橫寫, 失其天質, 亦一要也. 唯僕與吾子雖未嘗讀其文, 往往句法已略相似矣, 豈非得於其中者闇與之合耶. 近有數篇, 頗爲其體, 今寄去, 幸觀之以賜指敎, 不具
이에 대하여 이인로(李仁老)가 직접 회시(回示)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파한집(破閑集)』 권하 3의 다음 글에서 보면 임춘(林春)이 동파(東坡)의 시세계를 추수(追隨)하고 있었음은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난다.
시인(詩人)들이 시(詩)를 지을 때 고사(故事)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점귀부(點鬼簿)라 한다. 이상은(李商隱)이 고사(故事)를 쓰는 것이 험벽(險僻)하여 이를 서곤체(西崑體)라 하거니와 이것들은 다 문장(文章)의 한 병폐(病幣)다. 근래에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이 우뚝하게 나타나 그 법(法)을 좇아서 숭상하고 있지만 말 만드는 것이 더욱 공교하고 조금도 도끼질한 흔적이 없으니 가히 출람(出藍)이라 할 만하다…내 친구 임춘(林春)이 또한 그 묘리(妙理)를 얻었다.
詩家作詩多使事, 謂之點鬼薄. 李商隱用事險僻, 號西崑軆, 此皆文章一病. 近者蘇黃崛起, 雖追尙其法, 而造語益工, 了無斧鑿之痕, 可謂靑於藍矣 … 吾友耆之亦得其妙 …
『파한집(破閑集)』 권하 3번의 글은 물론 시작법(詩作法)에 있어서 용사(用事)의 묘(妙)를 말하는 데서부터 비롯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 시사(示唆)하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이상은(李商隱)을 계승한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의 시(詩)의 오묘(奧妙)한 경지(境地)를 임춘(林春)이 이미 체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 송시학(宋詩學)이 급속도(急速度)로 밀려 들어온 것은 전적으로 동파(東坡)의 영향(影響)이 그렇게 한 것이다. 소식(蘇軾)이 생존(生存)하고 있을 때 이미 그를 사모(思慕)하여 김부식(金富軾) 형제(兄弟)가 소식(蘇軾)ㆍ소철(蘇轍) 형제(兄弟)의 명자(名字)를 따서 그들의 이름으로 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거니와, 소식(蘇軾)이 죽은 지 불과(不過) 수십 년에 임춘(林春)이 동파시(東坡詩)의 묘법(妙法)을 터득하였다면 그것은 분명히 동파시(東坡詩)의 위세(威勢)가 고려중기(高麗中期)의 소단(騷壇)에 크게 떨치고 있었던 것을 증거(證據)해 준다.
이인로(李仁老)도 처음에는 두보(杜甫)의 시(詩)에 깊은 관심(關心)을 보이어 그의 『파한집(破閑集)』 권중(卷中) 3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풍아(風雅)가 사라지고부터 시인(詩人)들 모두 두보(杜甫)를 독보(獨步)라 추어 올렸지만 어찌 오직 말 만드는 것이 정밀하고 굳세어 천지의 정화(精華)를 다 긁어내는 데서 그쳤겠는가? 비록 밥 한 그릇을 두고서도 일찍이 임금을 잊은 적이 없어, 의연히 충의(忠義)의 절개가 마음 속에 뿌리를 박아 밖으로 나타나니 구구(句句)마다 후직(后稷)과 설(契)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
自雅缺風亡, 詩人皆推杜子美爲獨步, 豈唯立語精硬, 括盡天地菁華而已? 雖在一飯, 未嘗忘君, 毅然忠義之節, 根於中而發於外, 句句無非稷契口中流出.
이처럼 칭예(稱譽)하고 있다.
하지만 『파한집(破閑集)』 권상(卷上) 21번을 보면 점차 소황(蘇黃)에 경도(傾倒)하여 두보(杜甫)와 소황(蘇黃)을 동렬(同列))에 올려 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시구(詩句)를 조탁하는 법(法)은 오직 두보(杜甫) 홀로 그 묘리(妙理)를 다 얻었지만 …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에 이르러서는 고사(故事)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정밀하고 빼어난 기운이 마구 쏟아져 나와 시구(詩句)를 조탁하는 묘법(妙法)에 있어서는 두보(杜甫)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琢句之法, 唯少陵獨盡其妙 … 及至蘇黃, 則使事益精, 逸氣橫出, 琢句之妙, 可以與少陵幷駕.
뿐만 아니라 최자(崔滋)는 이인로(李仁老)의 말을 직접 인용(引用)하여 이인로(李仁老)가 소황(蘇黃)의 시세계에 깊이 빠져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인로(李仁老)가 말하기를 “두문불출하고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의 두 문집(文集)을 읽은 뒤라야 말이 힘차고 성운(聲韻)이 쇠소리를 내어 작시(作詩)의 삼매경(三昧境)을 얻어낸다” 하였다.
李學士眉叟曰: “杜門讀蘇黃兩集, 然後語迺然韻鏘然得作詩三昧.”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소황(蘇黃)의 문집(文集)을 읽어 삼매경(三昧境)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의 시(詩)는 7자(字) 5자(字)도 모두 동파집(東坡集)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이인로(李仁老)의 시작(詩作)이 그대로 동파(東坡)를 모방(模倣)하고 있음을 단정적(斷定的)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동파시(東坡詩)를 배우고 익히던 초기(初期)의 사정을 당시의 대표적(代表的)인 시인(詩人)인 임춘(林春)과 이인로(李仁老)의 경우를 예로써 보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뒤에 있어서도 기호(氣豪) 해박(該博)한 동파시(東坡詩)는 시수업(詩修業)의 필수교양(必須敎養)일 뿐 아니라 과제(科第)에서도 위세(威勢)를 떨쳤다. 이규보(李奎報)가 그의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처음엔 과문(科文)을 익히느라고 풍월(風月)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시(詩)짓기를 배우며 더욱이 동파시(東坡詩)를 좋아하게 되어 매년 방이 나붙고 나면 사람들은 금년에도 30명의 동파(東坡)가 나왔다고들 한다.
世之學者, 初習場屋科擧之文, 不暇事風月, 及得科第然後, 方學爲詩, 則尤嗜讀東坡詩, 故每歲牓出之後, 人人以爲今年又三十東坡出矣.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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