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백악시단(白嶽詩壇)과 진시운동(眞詩運動)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왕산(仁旺山)과 북악산(北嶽山) 사이의 산록(山麓, 壯洞)에 시단(詩壇)을 만들고,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다짐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모여 들면서, 조선후기 시단에 새로운 기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백악시단(白嶽詩壇)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새로운 시세계의 지향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시운동(詩運動)’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형제가 중심이 되고, 이들의 문하에서 이병연(李秉淵)ㆍ이하곤(李夏坤)ㆍ김시민(金時敏)ㆍ김시보(金時保)ㆍ유척기(兪拓基)ㆍ홍세태(洪世泰) 등이 호응하여 조선후기 소단(騷壇)에 참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화단(畵壇)에서도 겸재(謙齋) 정선(鄭敾)ㆍ관아재(觀我齋) 조영우(趙榮祐)과 같은 화가들이 이들과 교유(交遊)하면서 진경화(眞境畵)의 세계를 구축하여 조선후기 화단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된다.
성정(性情)의 발로에 따라 시를 써야 한다는 유가(儒家)의 상식을 뛰어 넘어 이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자연, 인물, 풍속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대상 그 자체가 중요할 뿐, 계획된 의도나 꾸밈과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았으며 형(形)과 신(神)이 하나로 어울어지는 시세계를 이상적인 경지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진시(眞詩)’, ‘성정(性情)’의 시(詩), ‘천기(天機)’ 등을 강조하면서 당시(當時)의 풍상(風尙)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주장과 실천은 결과적으로 조선중기의 당시풍(唐詩風)이후 송시(宋詩)의 세계에 복귀 또는 근접(近接)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노력은 이때까지의 속상(俗尙)을 거부하고 진정한 조선시(朝鮮詩)가 어떤 것인가를 훌륭하게 실험하고 있었으므로 그 성과 역시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김창협(金昌協, 1651 효종 1 ~1708 숙종4, 자 仲和, 호 農巖)은 경술(經術)과 문학(文章)이 양미(兩美)하기로 퇴계(退溪) 이후 처음이라 꼽히는 문인이다.
그의 학문은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이으면서 다음 시대 서울 중심의 노론계(老論系) 문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북학사상(北學思想)을 앞에서 창도하였다. 그는 고문(古文)에 특히 뛰어난 솜씨를 보여 전아(典雅)한 그의 문장과 박지원(朴趾源)의 웅혼(雄渾)한 문장이 일시(一時)에 쌍벽(雙壁)을 이루었으며, 소단(騷壇)에서도 그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대두된 진시운동(眞詩運動)에 단초를 열었으며, 특히 그가 개진한 천기론적(天氣論的) 시론(詩論)은 그의 아우 김창흡(金昌翕), 그리고 그의 문하(門下)와 위항시인(委巷詩人)들에게까지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전아(典雅)한 문장에 걸맞게 그의 시편도 말이 맑고 격이 높다는 것이 정평(定評)이다. 대체로 사장(詞章)은 허실(虛實)이 상반(相半)되기 일쑤여서, 학문이 높은 학자들은 이를 여기(餘技)의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 농암(農巖)의 경우도 물론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시문이 전아하다든가 웅혼하다고 하는 것은 작자의 개성(個性)에 따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농암(農巖)의 문장이 전아하다던가 시의 말이 맑다고 하는 것은 그의 학자적인 체질과 무관하지 않다. 전아(典雅)는 법도(法度)를 소중히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허구가 거세되어야 하는 학자들의 문학세계에서 ‘웅혼(雄渾)’이란 사실상 기대할 수 없다.
그의 대표각으로 꼽히는 「종성객관(鍾城客館)」과 「강행(江行)」을 보면 그 해답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김창협(金昌協)의 「종성객관(鍾城客館)」이다.
愁州城外野茫茫 | 수주성 밖 들판은 아득하기만 하고, |
磧草連天落日黃 | 모래벌 풀 하늘에 닿는 곳 붉게 노을이 진다. |
客路已臨胡地盡 | 나그네길 이미 오랑캐땅에서 끝나니 |
鄕心直共暮雲長 | 고향생각은 저물녘 구름과 함께 길어진다. |
烽傳遠火明孤戍 | 봉화불 저 먼 데까지 외로운 성을 비추고 |
江湧寒波下大荒 | 강에는 찬물결 넘실넘실 큰 벌판으로 흘러내린다. |
不恨樓笳侵曉夢 | 누대의 젓대소리 새벽 꿈 깨우는 것 탓하지 않나니 |
歸魂元自阻關梁 |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원래 관문에서 막히는 것을. |
어는 종성의 고호(古號)다. 종성은 북변(北邊) 가운데서도 우리나라가 끝나는 곳이다. 이 작품은 그가 35세 되던 해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나갔을 때 쓴 것으로 보인다. 종성의 경물(景物)과, 우리나라 취북단(最北端)에 와 있는 나그네의 심회를 꾸밈없이 그려낸 작품이다. 변방의 경물과 고향 그리는 정회가 반복 교차되고 있지만 이야말로 실경(實景)과 진정(眞情) 그대로다.
다음에 보이는 김창협(金昌協)의 「강행(江行)」 역시 그러하다.
蒹葭片片露華盈 | 갈대잎 마디마다 이슬꽃이 맺혔는데 |
蓬屋秋風一夜生 | 초옥(草屋)에 가을바람 온 밤 내 분다. |
臥遡淸江三千里 | 누운 채 맑은 강 삼천리를 거슬러 오르노라니 |
月明柔櫓夢中聲 | 달 아래 은은한 노젓는 소리 꿈결에 들린다. |
가을 밤, 배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정경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흥치(興致)가 쉽게 개입함직한 분위기이지만 강행(江行)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작자 자신의 시작(詩作)답지 않다. 오히려 멀리서 바라본 관망자의 노래로 착각케 한다.
『대동시선(大東詩選)』 권5 『농암집(農巖集)』에는 「팔월십오나주소강범행수십리내박안야이과반의(八月十五拏舟溯江凡行數十里乃泊岸夜已過半矣)」 제2수로 되어 있고 ‘편편(片片)’이 ‘안안(岸岸)’으로, ‘蓬’이 ‘篷으’로, ‘천리(千里)’가 ‘십리(十里)’로 되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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