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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2. 백악시단과 진시운동(김창흡)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2. 백악시단과 진시운동(김창흡)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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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흡(金昌翕, 1653 효종4~1722 경종2, 子益, 三淵)은 문보다는 시에 뛰어나 형 김창협(金昌協)의 문장과 병칭되기도 한다. 홍만종(洪萬宗)시평보유(詩評補遺)하편(下篇)에서 삼연 김창흡은 과거시험 공부를 일삼지 않고 시재로 세상에 이름이 나 이따금 흥을 붙여 지은 작품이 격조가 높고 마음이 깊어 남들이 도달할 수 없다[金昌翕三淵, 不事科業, 以詩名於世, 時時寓興之作, 格高心玄, 人莫能及].”라 한 그대로, 삼연(三淵)의 일생은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삼연(三淵)은 새로운 이론과 창작의 실천을 통하여 18세기 시단에 활력과 변화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삼연(三淵)을 지지하는 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이후 그는 이 시기 시단의 맹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삼연(三淵)이 문호를 따로 열어 조선에 새로운 분위기가 일어났다[三淵別門戶, 左海新鼓吹. 洪愼猷, 白華子哀朴矩軒).”고 한 홍신유(洪愼猷)의 지적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다.

 

특히 그의 시에 대해서는 정약용(丁若鏞)붓을 휘둘러 천만언을 지으니, 산수(山水)의 기운이 지면(紙面)에 떨어지네[縱筆千萬言, 煙霞落紙面. 與猶堂全書2, 古詩二十四首) 11].”라고 읊었듯이 산수기행시가 압권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산수시(山水詩)에의 몰입(沒入)은 중년 이후의 일이며 젊은 시절의 삼연(三淵)시경(詩經)ㆍ초사(楚辭)를 비롯하여 한위(漢魏)ㆍ당송(唐宋)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격조 높은 당시(唐詩)를 즐기는 여유도 보이었다.

 

김창흡(金昌翕)16732월에 어머니의 강권으로 진사시에 급제한 뒤 과업에 뜻을 끊고 시업(詩業)에 진력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속리산(俗離山)ㆍ백마강(白馬江)ㆍ영보정(永保亭) 등을 유람하면서 정감(情感)이 넘치는 시편(詩篇)들을 남기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속리산(俗離山)도 이때에 쓰여진 작품 가운데 하나다. 다음이 그것이다.

 

江南遊子不知還 강남 간 나그네 돌아올 줄 모르는데
古寺秋風杖屨閒 가을바람 부는 옛절엔 찾는 사람 한가롭다.
笑別鷄龍餘興在 웃으며 계룡산을 떠날 때 그 홍 아직 남아 있는데
馬前猶有俗離山 말 앞에는 오히려 속리산이 버티고 있네. 三淵集拾遺1.

 

계룡산을 나서자 눈 앞에 속리산이 펼쳐지는 공간이동의 처리 수법은 핍진한 경물의 묘사를 넘어선 흥취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김창흡(金昌翕)41세 되던 해 벽계(檗溪)로 이거(移居)하면서 그의 시세계는 중요한 국면의 전환을 보인다.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부친 문곡(文谷)이 후명(後命)을 받게 되자 그는 철저하게 정치현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결복(闋服) 후 마침내 몸과 마음이 함께 서울을 떠나 설악산 산수 사이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시세계는 지금까지의 담산평수(談山評水)를 일삼던 유상(遊賞)에서 빠져나와 그의 안광(眼光)에 들어오는 경물(景物)을 통하여 그는 사물(事物)의 물성(物性)을 말하고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시적(詩的) 소재(素材)도 심상한 사물, 풍속 및 제도, 역사 등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취하고 있으면서도 이것들을 통하여 그는 세태를 비판하고 사물의 본질과 삶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가 애써 형사(形似)와 신정(神情)의 융합(融合)을 강조한 신정(神情)’의 본색이 무엇을 말하려 함인지 짐작이 간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같이 일생(一生)을 두고 시업(詩業)을 전주(專主)로 한 그였지만, 이에 이르러 그도 학자로서의 기본체질은 어찌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창흡(金昌翕)의 시작(詩作) 중에는 만영(漫詠), 잡영(雜詠) 등의 이름으로 된 연작시가 많지만, 특히 그의 만년(晩年)에 제작된 벽계잡영(檗溪雜詠)갈역잡영(葛驛雜詠)은 형신(形神)의 합일(合一)을 앞세운 그의 시세계가 바로 이를 두고 이름임을 알게 해주는 작품으로 차 있다. 일정한 주제도 없이 간결한 연작형식으로 된 벽계잡영(檗溪雜詠)갈역잡영(葛驛雜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그려내고 있으면서도 완숙해진 그의 삶과 문학의 정채(精彩)를 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벽계잡영(檗溪雜詠)부터 먼저 보인다.

 

浹旬連霧雨 稀少見星時 열흘동안 계속하여 안개비 내려 별을 볼 시간도 드물어졌네.
院溽蒼苔産 籬欹雜卉支 기름진 뜨락에 푸른 이끼 돋아나고 기울어진 울타리는 잡초가 받쳐주네.
蛇驕探雀鷇 燕弱挂蛛絲 교만한 뱀은 참새 새끼 찾고 약한 제비는 거미줄에 걸려 있네.
物態供孤笑 詩成半俚辭 사물은 한바탕 외로운 웃음거리인데, 시가 이루어지니 태반이 속말이라네. 三淵集12.

 

벽계잡영(檗溪雜詠)은 그의 벽계 이거(移居)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작되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 가운데서도 그가 62세 되던 해(1714)에 쓴 43수 중 제17수다제목 아래 갑오(甲午)’라고 창작연대를 밝히고 있다. 삶의 주변에 널려 있는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경물(景物)을 바라보며 형식에 구애받거나 기정(奇情)을 붙이는 일도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이른바 진경(眞境)과 신정(神情)은 바로 이 평범 속에서 비로소 그 면모가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진정한 조선시(朝鮮詩)로서의 한시(漢詩)가 곧 이런 시작(詩作)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 작품이다.

 

 

다음에 보이는 김창흡(金昌翕)갈역잡영(葛驛雜詠)2수는 만년(晩年)에 그의 삶을 가장 자연스럽게 그려 보인 것들이다.

 

尋常飯後出荊扉 보통 때처럼 밥먹고 사립문 나서니
輒有相隨粉蝶飛 문득 범나비 나를 따라 나네.
穿過麻田迤麥壟 삼밭 뚫고 보리밭둑 어정어정 걸어가니
草花芒刺易罥衣 풀꽃과 가시가 쉬이 옷에 걸리네. 三淵集14, 1.

 

이 작품은 갈역잡영(葛驛雜詠)392수 가운데 첫수다. 한시에서 지켜야 할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원리도 돌보지 않고 따로 의경(意境)을 설정한 일도 없이 일상적인 삶의 부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주변 경물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애써 드러내려 하고 있지 않지만, 산수간(山水間)에서 살고 있는 작자(作者)의 삶의 모습을 가장 진솔하게 꾸밈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이다. 한시의 기본틀만 빌리고 있을 뿐 조선인(朝鮮人)이 제작한 조선의 한시임을 보이고 있다.

 

다음의 시편은 조선시가 어떤 것인가를 보다 확연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人方掩幽戶 雲亦返高岑 사람이 지겟문 걸어 잠그니 구름도 높은 산으로 돌아오는도다.
鷦鷯飛不息 何樂在叢林 갈가마귀 높이 날아 그치지 않나니 숲 속에 무슨 즐거움이 있어서일까. 三淵集15, 6.

 

오언시(五言詩)23의 조직으로 이루어져 제 2자에 술어가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시는 제1구와 제2구에서 각각 제2자인 ()’()’이 독립부사어로 쓰이고 있어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는 격률(格律)이나 형식미(形式美)는 아예 마음 쓰는 일 없이 주변에 있는 자연물과의 교섭을 통하여 자신의 삶의 모습을 반문(反問)해 본다. 흔히 우리나라의 민속(民俗), 역사, 속담 등에서 취재(取材)한 작품들을 일러 조선시(朝鮮詩)라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시로서의 진정한 조선시는 위에서 보인 이들 시작(詩作)과 같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연스럽게 읊어낼 때 이것이 우리의 시, 곧 조선의 한시가 될 것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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