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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6. 후사가와 죽지사(박지원)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6. 후사가와 죽지사(박지원)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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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朴趾源, 1737 영조13~1805 순조5, 仲美, 燕巖)은 명문가(名門家)인 반남박씨(潘南朴氏)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과업(科業)에 특별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서 지구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였거니와, 노론(老論) 벽파(僻派)로 몰려 당대의 실력자인 홍국영(洪國榮)을 피해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기도 하였고,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44세에 연행(燕行)을 하기도 하였다. 말년(末年)에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온포(蘊抱)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문장(文章)이다. 율문(律文)보다는 산문(散文)에 승()하여서, 허생전(許生傳)양반전(兩班傳)호질(虎叱)등은 그의 기지(機智)와 풍자정신(諷刺精神)을 돋보이게 하였다.

 

홍재전서(弘齊全書)에서 신박한 걸 좋아하고 기이함에 힘쓴다[好新務奇]’ 하였다고 평한 것은 그에게 패관소품(稗官小品)과 같은 산문이 승()했던 사정을 지적한 언설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연암(燕巖)이 관심을 보였던 서적(書籍)은 청()에서도 금서(禁書)로 지적한 이지(李贄)ㆍ고염무(顧炎武)ㆍ모기령(毛奇齡) 등의 저작(著作)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관에서도 전후칠자(前後七子)의 복고노선(復古路線)을 부정한 원굉도(袁宏道)로 대표되는 공안파(公案派)의 시설(詩說)이었다.

 

다만 그가 말년에 정조(正祖)의 문체순정(文體醇正)에 굴복하여 열하일기(熱河日記)문장으로 장난친 것[以文爲戱]’한 패관소품(稗官小品)으로 인정하고 과농소초(課農小抄)와 같은 정통(正統) 고문(古文)을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결코 연암(燕巖)의 기승(氣勝)한 산문이 폄하(貶下)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연암(燕巖)이 산문에 극승(極勝)하였다는 점은 유명한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서 운문(韻文) 부분인 명()이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반증되지만, 결코 그의 시편이 가볍지 않은 것은 대동시선필운대간행화(弼雲臺看杏花), 회원수원(懷袁隨園), 담원팔영 선삼(澹園八咏 選三), 원조대경(元朝對鏡), 산행(山行), 강거(江居), 노숙구련성(露宿九連城), 도압록강회망용만성(渡鴨綠江回望龍灣城), 체우통원보(滯雨通遠堡), 도중사청(道中乍晴), 만조숙인(輓趙淑人)10여편이 선발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기발한 시재(詩才)가 돋보이는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을 보기로 한다.

 

我兄顔髮曾誰似

우리 형님 모습이 누구와 비슷했던가?

每憶先君看我兄

아버님 그릴 때마다 형님 얼굴 뵙곤 했지.

今日思兄何處見

이제 형님 생각나면 어느 곳에서 뵈올까?

自將巾袂映溪行

의관을 갖추고서 시내물에 비추며 걸어가야겠네.

 

대체로 연암(燕巖)의 시작(詩作)에는 사실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품은 애완(哀婉)한 격조(格調)로 선형(先兄)을 그리고 있지만, 특히 입의(立意)의 기발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형에게로 이동하고, 형의 모습이 다시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단장한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은 정감(情感)의 토로(吐露)를 직접적으로 언표(言表)에 나타냄이 없이도 그 애절함을 지극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곰살궂게 다듬지도 않았거니와, 구성의 솜씨도 산문적이어서 기승(氣勝)한 그의 산문(散文)을 운문(韻文)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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