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릉에서의 깨달음’이란 길라잡이
우리는 조릉에서 장자가 터득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개별자들의 삶은 타자와 밀접하게 관계될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타자와의 적절한 관계맺음은 맑은 연못과 같은 맑은 마음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 앞의
깨달음은 인간 삶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한성에 대한 통찰이다. 유한에 대한 자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바깥에 외부가 있다는, 즉 자신의 외부에 타자가 존재한다는 자각과 동시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뒤의 깨달음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자신으로 환원불가능한 타자와의 소통이 우리 마음에서 가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장자에게 혼탁한 물[濁水]로 비유되는 마음과 맑은 연못[淸淵]으로 비유되는 마음의 차이는 중요하다. 전자의 마음이 타자와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상태라면, 후자의 마음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편의상 앞으로 혼탁한 물과 같은 마음을 인칭적 마음이라고 부를 것이고, 맑은 연못과 같은 마음을 비인칭적 마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편의 때문만은 아니다.
혼탁한 물로 비유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선입견이 있는 마음인데, 그 마음은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personality)을 철학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맑은 연못으로 비유되는 마음은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 제거된 마음이기 때문에 비인칭성(impersonality)으로 규정될 수 있다.
혼탁한 물[濁水] | 맑은 연못[淸淵] |
타자와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함 |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함 |
인칭성(personality) | 비인칭성(impersonality) |
앞으로 우리는 인칭성과 비인칭성이라는 개념을 빈번히 사용할 생각이다. 이 개념 쌍은 원래 사르트르(J. P. Sartre)가 썼던 것인데, 최근에 들뢰즈(G. Deleuze)가 다시 복원하여 사용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사르트르는 『자아의 초월성(La Transcendence de l'égo)』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책에 대한 의식, 소설의 주인공에 ‘대한’ 의식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의식 속에 거주하지 않는다. 이런 의식은 단지 대상에 대한 의식이자 스스로에 대한 비정립적인 의식일 뿐이다. (…) 무반성적인 의식에는 어떤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 내가 시내전차를 잡으려고 따라갈 때, 내가 시간을 볼 때, 내가 그림을 응시하는 데 몰두할 때, 어떤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따라 잡아야만 할 시내전차 따위에 대한 의식, 그리고 의식에 대한 비정립적인 의식만이 존재한다.
사르트르에게 반성되지 않은 영역에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절대적으로 자발적이며 순수하게 지향적인 (즉 비인칭적인) 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자아에 대한 인칭적 의식은 단지 이런 비인칭적인 순수 자발적인 의식을 반성할 때에만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칭적 의식은 비인칭적인 의식에 비해 항상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사르트르의 인칭성과 비인칭성이란 개념이 의식 철학이라는 한계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개념을 의식 철학적 전제들 너머로 확장해서 사용하려고 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비인칭적 의식은 책을 읽고 있는 의식, 영화를 보고 있는 의식 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런 사례의 의식들에는 기본적으로 나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책이나 영화를 지향하고 있는 의식이 함축적으로 나라는 자의식을 기반으로 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비인칭적 의식도 기본적으로 나에 대한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있거나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만약 나라는 의식이 부재하다면 우리는 책의 내용이나 영화의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영화에 몰입한다고 해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 내용의 흐름이 기억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칭적 자의식이 기..억의 구심력으로 작동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인칭성이라는 개념을 더 근본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성적이지 않은 지향적인 대상 의식’이라는 사르트르의 생각을 비판해야만 한다. 대상에 대한 의식마저도 지워졌을 때에만 비인칭성이란 개념은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대상이 대상이라는 형식 속에 머물러 있는 채로 지향된다는 것은 동시에 내가 나라는 형식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기에 있는 것이 사과라고 의식하는 경우, 암암리에 그 사과에 대한 의식은 여기에 있는 것이 나라는 의식을 수반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칸트(I. Kant)의 말처럼 ‘대상에 대한 의식은 주체 자신에 대한 의식을 수반하고 있다’고 우리는 보아야 한다. 장자철학에서 비움(虛)이라는 개념이 지닌 중요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비움은 대상 의식의 제거가 인칭적 자의식의 제거의 첩경임을 간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자가달성하고자 하는 비인칭적 실존상태인 허심(虛心)은 인칭적 자의식뿐만 아니라 대상 의식마저도 제거된 유동적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어쨌든 장자에게 이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이라는 경험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모든 학문이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의식과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사적이고 고유해 보이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단지 철학은 사적이고 고유한 질문을 보편적인 질문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데서 다른 학문과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장자의 철학을 이해하려 할 때 이런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복잡한 논리들과 애매한 우화들을 파고 들어 가다 보면 우리는 타자와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그의 문제의식을 매번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은 우리가 『장자』를 읽어나갈 때 만약 길을 잃게 되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장자 이해의 원점과도 같은 것이며, 동시에 『장자』 안에서 장자 본인의 저술과 그렇지 않은 저술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은 장자철학의 가능성과 한계가 공존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