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盜)와 유(儒)
우리는 이러한 공자에 대한 힐난의 반면에 깔려있는 역설적인 공자의 힘과, 당대에 무(武)에서 문(文)으로 화(化)한 자로의 모습, 공자의 가르침의 정도를 지키기 위해 억울하고 또 평화롭게 죽어간 자로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당대에 통념으로 깔려 있었다는 정황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도(盜)’의 문제에 관하여 재미있는 「외물(外物)」 4편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유(儒)와 직접 연결되는지 한번 살펴보자!
유란 본시 『시경』을 읊으며 예를 운운하며 도굴을 일삼는 놈들이다. 오야붕인 대유는 밖에서 망을 보면서 무덤 안에 들어간 꼬붕 소유들에 말을 전한다. “이놈들아! 벌써 동이 트는데 뭘 꾸물거리고 있냐?”
儒以『詩』ㆍ『禮』發冢, 大儒臚傳曰: “東方作矣, 事之何若?” 小儒曰: “未解裙襦, 口中有珠.”
무덤속의 소유들은 말한다. “아이쿠 아직 시체 속바지 저고리를 못 벗겼다우. 아! 아가리 속에 찬란한 구슬이 보이는구만, 왜 『시경』에 이런 노래 있지 않수: ‘푸르고 푸른 보리가 무덤가에 무성쿠나. 살아 베풀지 못한 이들이 어찌하여 죽어 구슬을 머금고 있는고!’”
“『詩』固有之曰: ‘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爲?’”
그리곤 시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턱밑을 세게 누르자, 무덤 속 유들이 쇠망치로 톡톡 아래턱을 친다. 서서히 아가리가 벌어지는 것이다. 입속의 구슬에는 흠집하나 내지않고 솜씨좋게 훔쳐 달아나는 것이다.
接其鬢, 擫其顪, 儒以金椎控其頤, 徐別其頰, 無傷口中珠.
우리는 이러한 『장자(莊子)』의 기술을 단순히 꾸며낸 창작 설화로 볼 수가 없다. 엄연한 당시의 유(儒)들의 실상을 전하는 리얼한 역사적 장면을 희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가 어려서 종사하고 목격한 세계는 이러한 세계였다. 즉 낮에는 상례를 주관하는 사제자로서의 무(巫)의 집단이지만, 그들이야말로 묘혈의 내부구조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밤이면 음험한 도굴꾼으로 변하여 왕후장상들의 보물을 훔쳐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儒)의 세계요, 도(盜)의 세계요, 협(俠)의 세계요, 객(客)의 세계였다. 『설문』에 유(儒)를 가리켜 술사(術士)라 말한 것도 결국 이런 특수한 기술을 소유한 인간들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기술자들은 천시받는 사람들이었다.
또 전통적으로 유(儒)란 주유(侏儒, 난장이)를 의미했으며 소지소언(小知小言)의 편협한 인간들이라는 매우 부정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무당계열의 사람들에는 실제로 꼽추가 많았다. 꼽추였기 때문에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사색에 깊게 빠지거나 천문(天文)이나 수리(數理)에 밝거나, 보통사람들이 못가지는 통찰력을 소유하여 결국 영적인 무당의 길로 들어갔고, 이러한 당골 집단은 세습적 씨족을 형성하면서 의례화되어갔다. 이들이 말하는 ‘시례(詩禮)’가 기껏해야 도굴을 위한 양념격이라고 하는, 유(儒)의 타락한 모습에 대한 장자의 통렬한 비판은 비단 유가의 도덕주의에 대한 도가의 준엄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 공자라는 인간의 자기부정과 자기도약의 핵심적 과제상황이기도 했던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소인(小人)과 군자(君子)의 준엄한 분별, 그리고 소인유(小人儒)가 되지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하는(「雍也」 11) 간곡한 당부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과거모습의 잔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던 것이다. 공자는 어떤 경우에도 서인(庶人)에게 ‘소인(小人)’ 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소인(小人)은 곧 유(儒)에 대한 비판이요, 사(士)에 대한 비판이다. 종교적[巫] 질곡에 빠져 보물이나 탐내고 있는 자들, 바킥 컬트(Bacchic Cult)적 광란 속에서 주색에 곯아 몽롱하게 소일하는 집단으로부터 어떠한 새로운 문화의 리더십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광기 속에 은총의 강림을 외치며 십일조나 강요하고, 의미없이 장대한 성전이나 지으려하고, 성직자의 직위마저 세습시키려고 하는 오늘 우리나라 교계의 작태는 바로 공자가 목격한 소인유(小人儒)의 세계였던 것이다. 니체가 노예도덕의 극복을 외쳤을 때, 인간이 노예도덕에 함몰된 가장 근원적 이유로서 든 것이 인류사에 있어서 성직자의 출현이라는 사건이었다.
성직자들은 귀족주의에 빠져 침울하고 감정을 폭발치 못해 위장질환과 신경쇠약증에 잘 걸린다. 그 치료제로 고안한 것이 단식이니, 성적 금욕이니, 황야로의 도피, 이 따위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금욕주의적 자기최면은 오만, 복수, 영민함, 방종, 사랑, 지배욕, 덕, 질병 등 이 모든 것을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든다. 성직자적 인간의 위와 같이 본질적으로 위험한 생존형식의 기반 위에서 비로소 인간 일반은 흥미로운 동물이 되었고, 여기에서 비로소 인간의 영혼은 좀 더 고차원의 의미에서의 깊이를 얻었으며 아주 사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직자민족의 대표적인 사례가 유대인이며 이 유대인의 사악함을 유감없이 구현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공자의 사문에 대한 갈망도 바로 니체가 저주한 유대교-기독교의 위선적 소인유의 세계를 탈피하려는 것이다. 은대적(殷代的) 종교주의로부터 주대(周代的) 인문주의로 문명의 축을 바꾸려는 창조적 시도였다. 니체가 초월적 신존재 앞에 비소해진 인간에 대해 치욕과 분노와 구토를 느끼는 그 감정을 공자는 소인유에게 느꼈을 것이다. 신, 영혼, 자아, 정신, 자유의지, 이런 것이 모두 가공적인 것이요, 따라서 죄, 구제, 은총, 벌, 용서, 회개, 양심의 가책, 악마의 유혹, 신과의 해후, 하늘나라, 최후의 심판, 영원한 생명, 이 따위 것들이 모두 가공의 개념이라고 니체는 포효한다. 이러한 가공의 세계에 인간이 종속되게 된 근본이유는 자연적인 것에 대한 증오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연적 인간의 생의 약화, 생의 퇴조, 생의 데카당스(Deca-Dence, 퇴폐)를 초래한다. 초자연적 희망을 말하는 모든 자들은 사기꾼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혈관에 독을 붓는다. 그들은 생명의 경멸자다.
물론 공자의 언어는 이토록 격렬하지는 않다. 그러나 공자가 인(仁)을 말한 것은 니체가 갈망한 원초적 생명과 우주적 생명력에 대한 대긍정이다. 니체는 2천 년의 기독교 질곡과 고독한 맞대결을 했지만, 공자에게는 그토록 가혹한 하중이 짓누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정신을 근대라는 크로놀로지(Chronology, 연대기)에서만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역사적 사태는 시간을 초월하여 동시점적(contemporary)이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근대화 = 탈주술’의 도식을 외치기 양천년(兩千年) 전에 이미 공자는 그러한 근대적 문명의 도식을 완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史記)』 「골계열전」에 서문표(西門豹, 시먼 빠오, Xi-men Bao)가 업(鄴, 예, Ye)의 영(令)이 되어 하백에게 처녀를 바치는 풍속을 단절시키기 위하여, 그 신화와 관련된 모든 무당들과 동네의 장로들을 그들의 논리를 역이용하여 물속에 수장시키는 장쾌한 모습, 그리고 동네사람들을 각성시켜 관개시설을 하게 하는 그런 모습이, 모두 공자의 사상적 기저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씨족공동체의 조선신앙(祖先信仰)의 신화적 편협성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한 신화적 세계관이 더 이상 현실적 삶의 질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부조리의 인식을 공자는 과감하게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축에서 일상적 삶의 질서의 축으로의 전환이었다. 공자에게서 윤리란 곧 민(民)의 삶의 재발견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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