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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4. 증자는 하루에 세 번 자신의 몸을 살피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4. 증자는 하루에 세 번 자신의 몸을 살피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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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증자는 하루에 세 번 자신의 몸을 살피다

 

 

1-4. 증자가 말하였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돌이켜 본다.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벗 사귐에 믿음직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가르침 받은 것을 익히지 못하지 않았나?”
1-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의 연속된 테마

 

3에서 공자의 말이 나오고 갑자기 제4장에서 증자의 말이 나오는데 외면적으로 보면 양자에는 연접되어야 할 필연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3장에서 이미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경계하면서 반어적으로 인의 본질을 드러내려고 하였다면, 그 인의 본질은 인간의 내면적 성실성에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4장의 증자 말은 충()과 신()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것도 인()의 다른 측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충신(忠信)을 내면적 주제로 삼는 인간의 치열한 자기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언영색장의 공자 발언에 연관하여, 증자의 제자가 자기 선생의 말을 생각해내어 그것으로 공자의 말씀을 보충하는 부가적 파편으로 이 4장을 삽입했을 것이다. 증자가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도()를 충서(忠恕)라고 한 것과 관련하여(이인(里仁)15), 여기는 충신(忠信)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5(경사이신敬事而信), 6(근이신謹而信), 7(언이유신言而有信)에 연거푸 신()이 들어간 구문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학이(學而)편은 연관 된 테마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증자란 인물

 

증자는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6세 연하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말년의 어린 제자임을 알 수 있다. 노나라 무성(武城)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증석(曾晳, 쩡 시, Zeng Xi)()은 점()이다. 자석(子晳)이라고도 부른다이 공자의 제자였다고 한다면, 그러한 연줄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자가 되었을 것이지만, 안연이 그의 부친 안로(顏路)와의 인연으로 공자와 사제지정을 맺은 것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 증석은 그 실존성이 의문시되는 인물이다. 증자는 결코 공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공자 자신에 의하여 중요하게 언급된 바가 없다. 공자가 말년에 잠깐 가르쳤던 인물인 것 같다. 선진(先進)편에서 공자가 손꼽은 사과십철(四科十哲)의 명단에도 끼어있지 않다. 공자는 그가 좀 아둔한 인간이라고 가볍게 평했을 뿐이다[參也, . 선진(先進)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자는 논어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효경의 저자로서 유교학사에서 매우 중후한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파라독시칼(paradoxical)한 현상의 배면에는 공자 사후에 전개된 공문집단의 유전 의 역사가 숨어있을 것이다.

 

태백3장에서 7장까지 증자에 대한 기술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보아도 여기서 우리가 받는 증자에 대한 성스러운 느낌은 전혀 공자와는 무관한 사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공자가 죽고 난 멀고 먼 훗날에(백 년 정도의 시간 경과) 증자의 제자들이 증자를 추념하여 쓴 것으로 논어에 삽입된 것일 뿐이다. 증자의 제자들은 증자를 공자 이상의 중후한 인물로서 다루고 있고 논어를 읽는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증자가 성인인 것처럼 인식을 강요당하게 된다. 태백3~7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공자의 사후에 어느 일정기간 증자가 노나라의 공자교단을 확고하게 리드했다는 사실이며, 그 공자-증자교단속에서 자사(子思)가 교육되었고, 또 자사의 문하에서 맹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맹자는 곡부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추현(鄒縣, 騶縣, 쩌우 시엔, Zou Xian) 지방의 사람이다. 맹자는 청년시절 한때,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자사도 죽고 없었다. 맹자는 자사의 문하생에게 배웠던 것이다. 자유(子游)ㆍ자하(子夏)학파의 사람들이 예의 형식적 측면을 강조하였다면, 증자는 비교적 예의 내면성을 강조하였다고 전하여진다. 그러한 내성적 정신주의에서 자사가 나왔고 맹자가 나온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증자에 대한 존경심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 때문에 후대에 증자는 효경의 저자로서 추앙되었을 것이다.

 

증자가 ()’와 관련된 어떤 덕성의 구현자로서 그 역사적 이미지가 구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효경이라는 문헌의 저자라는 사실을 확보하지는 않는다. 효경여씨춘추(呂氏春秋)에 그 구절들이 정확하게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불위(呂不韋, 뤼 뿌웨이, Lü Bu-wei, ?~BC 235)의 시대이전에 서물로서 확실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효경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그것은 대강 전국말기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된다. 전국말기에 증자계열의 학자의 손에 의하여 집필되었을 것이다. 증자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본격적인 평은 잠깐 뒤로 미루고 우선 본문을 세밀히 검토해 보자!

 

 

()와 호() 용법

 

우선 ()’의 용법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에서 ()’주격으로도 소유격으로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날마다’, ‘매일 매일의 뜻이다. ‘항상(always)’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세 가지로라는 뜻으로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세 개의 주제를 나타낼 수도 있고, 하루에 세 번[三次]’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위인모이불충호(爲人謀而不忠乎)?’()’는 의문스럽게 반추하는 느낌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말(句末)에 붙인 조사로, 현대 중국어의 ()’와 거의 동일하다. 황본, 정평본에 모두 與朋友交而不信乎與朋友交, 言而不信乎로 되어 있다. ‘()’한 글자가 더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주자본을 따르면 불신(不信)이 사귐 그 자체에 속하는 말이 되고, 황본을 따르면 불신은 말[]과 관련된다. 그러나 황소에 어찌 사람과 더불어 사귐에 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豈可與人交而不爲信乎]?’로 되어 있어 실제로 주자본과 같은 의미로 풀이되고 있다. 주자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전불습호(傳不習乎)의 다양한 해석

 

그런데 문제는 가장 끝 구절이다. ‘전불습호(傳不習乎)?’의 해석은 다양한 가능성이 생겨난다. ‘불충호(不忠乎)’ ‘불신호(不信乎)’ ‘불습호(不習乎)’라는 말구의 패러랄리즘을 존중한다면 일단, ()과 불습(不習) 사이에는 ()’가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전불습호(傳不習乎)’의 해석은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내가 남에게 전한 것을 내가 익히지 않고 있지는 아니한가?

2. 내가 남에게서 가르침으로서 전하여 받은 것을 익히지 않고 있지는 아니한가?

 

전한다는 행위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하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 제2의 뜻을 따랐다. 주자는 ()’수지어(受之於師)’, ‘()’숙지어기(熟之於己)’ 해석하였다. 그리고 다산도 주자를 따랐다. 1의 해석은 진사이(仁齋)가 따르고 있다.

 

그러나 불습호(不習乎)’의 윗 문장과의 패러랄리즘을 존중치 않고 전()과 불습(不習) 사이를 그냥 접합시킬 경우 또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이 생겨난다.

 

3. 내가 익히지도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4. () 즉 고전(古典)을 익히지 못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3의 경우 전()은 동사가 되며 불(不習)은 전()의 직접목적이 된다. 그리고 4의 경우는 전()이 명사화되어 습()이라는 동사의 목적이 된다. ‘전하여 내려온 것의 뜻으로 공자시대에 존재하던 고전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상기의 네 해석이 어느 것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시카와(吉川)는 제3의 해석을 따랐다. 나는 주자의 해석이 가장 부드럽다고 생각되었다.

 

전불습호(傳不習乎)
이토 진사이(伊藤仁) 요시카와 코오시로오(吉川幸次郞)
내가 남에게 전한 것을 내가 익히지 않고 있지는 아니한가? 내가 익히지도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주희(朱熹), 도올(檮杌)  
전수 받은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 고전을 익히지 못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증자학파의 날조

 

우선 이 장의 증자의 말은 공자의 경지에 비한다면 너무 격이 떨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삼성(三省)’이라는 말이 한자문화권에서 출판사 등의 로고로 쓰일 만큼 일반에게 잘 알려진 말이지만, ‘하루에 세 번이라든가 하루에 세 가지로라는 등의 표현은 꼭 유치원 생도를 가르치기 위해 짜여진 것과도 같은 정격화된 형식적 표현이다. 물론 초보생을 위한 훈시적 성격으로는 적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하여튼 논어전체를 통해 숫자의 카테고리에 의하여 표현된 로기온 자료들은 거개(擧皆)가 모두 후대의 문제(門弟)들에 의하여 만들어져 첨가된 것이다. 논어의 파편 중에서 성립연도가 늦은 편에 속한다. 일례를 들면 양화(陽貨)8에 공자가 자로에게 육언육폐(六言六蔽)’를 말하는 따위의 구절 들은 후대의 구성임이 명백하다. 그 도식적 내용에는 전혀 공자의 생생한 사상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주로 자장(子張)학파계열에서 도식적 정리방법을 많이 활용하였다고 간주되고 있다. 여기 삼성(三省)’ 운운하는 것도 공자의 사상과는 무관한 후대의 형식화된 사고의 표현일 것이다. 어찌 인간이 하루에 세 가지만 반성함으로써 그 인()함이 달성될 수 있으리오? 마치 중고생이 책상머리 방학계획표에 몇 가지 도식을 그려놓고 실천한다 하다가 하나도 하지 못하고 마는 차원의 이야기 밖에는 되지 않는다. 진사이(仁齋)가 이 구절을 평하기를 고인들이 말하는 수신이란 후세의 사람들이 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홀로 허령한 사유에만 빠져 고원미묘(高遠微妙)한 설()을 일삼는 것과는 달리, 타인과의 관계에서 모()하고 교()하고 전()하는 데서 달성되는 것이므로 이 구 절은 증자 말년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의 대표적 표현이며, 증자의 일생지학(一生之學)이 이 장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좋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ㆍ신()ㆍ습()’의 삼성(三省)이라고 하는 도식적 이해로는 도저히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 그 인간을 충분히 접하지 못한 증자의 사상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공자의 말년 학단 속에서 오히려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증자가 하루에 세 가지로 반성한다는 이야기나, 예수가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가14:30) 한 이야기나, 예수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2:19) 한 이야기가 모두 후대의 설화적 양식에 불과한 것이다. 다산이 주자의 말을 빌어 삼성(三省), 고비성인지사(固非聖人之事)’주자는 말하였다: “세 번 성찰한다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도무지 성인 차원의 일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은 증자 만년의 진덕공부(進德工夫)가 아직 찌꺼기가 남아 경지에 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 말일 뿐이다. 배우는 자는 매사에 즉하여 성찰할 뿐, 세번에 한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卷第二十一라고 한 것도 무언가 이 구절에서 불안감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里仁)15에서, 공자가 증삼에게 오도(吾道)일이관지(一以貫之)라 하니 삼()이 이에 긍정을 한 후, 공자가 나간 후에[子出], 문인이 그 대화의 내용을 증자에게 묻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증자는 대답한다: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이다.” 이 유명한 구절 때문에 공자 사상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 있는 것은 충서(忠恕)’일 뿐이라는 유교의 대논쟁이 두 밀레니엄 이상을 지속되어 왔고, 그 논의의 주체세력으로서의 증자의 권위는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 이인(里仁)의 구문도 후대의 구성이다. 전혀 공자의 삶에서 이루어진 대화일 수가 없다.

 

우선 공자가 증자를 부르는 말은 ()’으로 되어 있는데 이 이인의 고사에서는 그 전체적 기술이 모두 증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증삼을 증자(Master Zeng)로 높여 부르는 증자계열의 교단에서 기록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증자에게 공자와의 대화의 내용을 물은 문인(門人)’은 공자 당대의 타 제자라기보다는 역시 증자의 제자가 될 수밖에 없다. 황간은 소에서 이 일이관지(一以貫之)’ 대화는 공자가 증자 집을 방문했을 때 이루어진 것이며, ‘자출(子出)’이라 한 것은 공자가 증자의 집의 문을 나섰다는 의미며, ‘문인문왈(門人問曰)’이란 증자의 집에 남아 있던 증자의 제자들이 그 내용을 되물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문인(門人)이 증자의 제자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형병(邢昺)의 소()도 그 입장이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미 공자가 살아 있을 때 증자가 문인을 거느리는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다. 증자는 공자의 문하에 들어온 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당시 20대초반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증자로 불릴 수 있는 하등의 위치를 확보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공자와 그렇게 중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공자의 사상을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로 꿰뚫는다)하는 것이 곧 충서(忠恕)’라 한 것은 후대 증자학파의 굴절된 공자인식을 나타내는 한 전형이다. 공자의 사상은 근원적으로 충서(忠恕)’ 따위로 논의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타케우찌(武內義雄)나 와쯔지(和辻哲郞)가 지적하고 있듯이 공자를 부자(夫子)’로 호칭하는 문장은 모두 후기의 구성파편들이라는 것이다. ‘부자란 원래 [] []’란 뜻으로 그토록 높임말이 아니었고 공자시대에는 특별하게 쓰여진 용례가 별로 없는 말이었다. 후대에 공자를 지극히 높이는 말로서 새롭게 만들어진 조어이며, 이 조에 가 나오는 파편은 대체적으로 후대의 교조주의적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타케우찌, 論語之硏究, 219-225).

 

 

()이 진실됨에서 충성심으로

 

이인편에서 말하는 충서(忠恕)’()’과 여기 학이편에서 말하는 위인모이충(爲人謀而忠)’()’은 결국 동일한 후대 증자학파의 인식체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의 ()’은 아직 군신(君臣)관계에 있어서의 충성(loyalty)’의 의미로 전화되어 있지는 않다. 논어에서 이 거론되는 대목을 전부 일별해보아도, 그 충의 의미는 역시 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됨(truthfulness)’ 정도의 개인 내면의 실존적 가치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증자가 지었다고 하는 효경에 오면 사태는 일변한다. 효경1장에서 6장까지가 전반을 형성하고 그 나머지 7장에서 18장까지가 후반을 형성한다금문경(今文經)18장으로 구성되고 고문경은 2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전반부의 장이름만 일별해 보아도 그 구성이 얼마나 정치적인 위계질서 속에서 공자의 사상을 틀 지우고 있는가 하는 것을 쉽사리 간파할 수가 있다.

 

제일(第一)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제이(第二) 천자장(天子章)
제삼(第三) 제후장(諸侯章)
제사(第四) 경대부장(卿大夫章)
제오(第五) 사장(士章)
제육(第六) 서인장(庶人章)

 

1장의 개종명의(開宗明義);란 뜻은 효경의 종지(宗旨)를 열고[], 오효(五孝: 천자ㆍ제후ㆍ경대부사ㆍ서인의 다섯 종류의 효)의 대의(大義)를 밝힌다[]는 뜻으로 총론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총론에서 이미 효의 시()사친(事親)’이요, 그 중()사군(事君)’이요, 그 종()입신(立身)’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사친(事親)의 효()를 철저히 사군(事君)의 충()으로 전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효의 시작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事親]이지만, 그 종국적 존재의의는 입신(立身)’이다. ‘입신이란 곧 정치적 출세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적 출세란 곧 그 이름을 후세에 날리어 부모의 영예로운 이름을 역사에 드러내는 것이다[揚名於後世, 以顯父母].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하거나 정계에 나가 장관 한 자리라도 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유의 원형이 모두 효경개종명의에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효는 다섯 레벨이 있다. 즉 천자의 층차, 제후의 층차, 경대부의 층차, 사의 층차, 서인의 층차가 있는 것이다. 이 다섯 층차를 관통하는 일관된 덕성이 곧 이다. 이미 논어에서 말하는 일개 덕목이 아니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는 정치적 세계전체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근원적인 이념이다. 그 핵심을 구성하는 ()’의 효를 보면 이와 같은 말이 있다.

 

 

그러므로 효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하고, ()으로써 윗사람을 섬기면 순()하다. 충순(忠順)함을 잃지 않으면서 윗사람을 섬겨야 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사()는 그 작위와 봉록을 보전할 수 있으며, 제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의 효다.

故以孝事君則忠. 以敬事長則順. 忠順不失, 以事其上, 然後能保其祿位而守其祭祀, 蓋士之孝也.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효가 사군(事君)으로 전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곧 ()’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에는 중심(中心) 즉 충심(衷心)이라고 하는 논어의 원래적 의미가 사라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충은 다시 (, 순종함)’이라는 말로 재해석되고 있다. 사의 최고 덕성은 효에서 충순(忠順)’으로 전화되고, 이 충순이야말로 작록(爵祿: 직위와 봉급)을 유지하는 최대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집안의 제사를 이어갈 수 있는 전통의 고수자가 된다는 것이다. 공자사상이 우리나라 조선왕조에서 이해된 핵심적 틀은 논어에서 제공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효경에서 왔다. 13경 중에서 유독 효경만이 경()의 타이틀을 당초로부터(아마도 한대 漢代로부터) 보유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한왕조(漢王朝)가 공자사상을 국가종교(state religion)의 이념체계로서 활용하기 위하여 그 효를 절대시하는 과정에서 효경은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의 대세를 미리 간파한 증자계열의 학파에서 이미 전국 말기에 효경의 텍스트를 성립시켰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 증자학파의 효에 대한 오랜 집념과 그 집념의 축적의 성과일 것이다. 그러나 니체사상을 나치가 악용했듯이, 증자학파의 도덕주의는 끊임없이 정치이념화 되어갔던 것이다.

 

증자는 효와 충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증자가 논어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맹자가 자사-증자계열을 존숭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기 보다는, 전국말의 유가에서 충효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기 위한 음모로서 철저히 증자의 이미지를 재구축시켰고, 그렇게 구축된 이미지에 따라 증자 설화가 날조되었고, 그 권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날조된 설화들이 논어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논어의 증자관계의 파편들은 그러한 후대의 윤색의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다. 이러한 증자 설화의 왜곡 때문에, 공자사상이 충서와 같은 도식적 개념으로 왜곡되는 비극이 초래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공자 사상 운운하면 우선 충서를 들먹이곤 한다. 너무도 재미없다. 공자의 진실 위에 증자의 이데올로기가 덮어 씌워진 것이다. 유교가 철저히 정치화된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정치 자체를 유화(儒化)시켜려 했다. 그에게는 유교(Confucianism) 라는 이념의 멍에가 없었다.

 

 

전한시대의 증자에 대한 인식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증자라는 역사적 인물이 과연 어떤 인간이었나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에는 증자에 관한 기록이 놀라웁게도 간략하게 적혀있다.

 

 

증삼은 남무성사람이다(무성에 북무성, 남무성이 있었다). ()는 자여(子輿)이다. 공자보다 46세 연하이다. 공자는 그가 효의 길에 능통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는 효경을 지었다. 노나라에서 생애를 마치었다.

曾參, 南武城人, 字子輿. 少孔子四十六歲. 孔子以爲能通孝道, 故授之業. 作孝經. 死於魯.

 

 

우리가 보통 중니제자에 관해 상고할 때 대표적인 문헌으로서 사기(史記)67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공자가어38편의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를 든다. 기존의 상식에 의한 문헌의 성립연대로 본다면 물론 사기공자가어보다 앞선다. 가어는 위() 왕숙(王肅, 왕 쑤, AD 195~256)의 위작(僞作)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외관상의 정보에 의하면 왕숙은 이 문헌을 주()했을 뿐이며 위작하지 않았다. 왕숙은 서문에서 어려서부터 정현의 학문을 흠모하여 배워왔는데 점점 사리를 깨우치고나서 정현의 의리(義理) 가 문맥에 맞지 않을 때가 많아 논박케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이전의 스승을 박한다 하여 자기를 비난하지만 공문의 길에 가시나무가 가득차게 되어, 그 가시나무들을 쳐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공자 22세손인 공맹(孔猛, 콩 멍, Kong Meng)의 집에 전해내려오는 선인지서(先人之書)’가 있어서 그것을 읽어보니 왕숙 본인이 생각하는 바와 많이 일치되고 또 공자의 사도를 전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일어 주를 달고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고 했다. 전통적으로 이 왕숙의 서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논어2만 자 정도의 분량인데 가어만 해도 분량이 그 4배가 넘는다. 그리고 공자에 관해서 매우 조직적으로 포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기술내용이 기존의 전적들과 상관관계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왕숙의 공자가어는 왕숙이 주만 단 것이 아니라 본문 자체를 기존의 전적 여기저기서 따다 붙여 만든 위서(僞書)라고 생각했다. 한번 위서판정이 난 후에는 아무도 이 문헌을 진지하게 고구(考究)하질 않았다. 그래서 공자가어는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근 2천년을 서가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천지를 굉동시킬 만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가어논례(論禮)라는 편이 있다. 이편은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반부의 내용은 예기』 「중니연거(仲尼燕居)의 내용과 일치하고, 후반부의 내용은 예기』 「공자한거(仲尼閒居)의 내용과 일치한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어예기를 베낀 것이라고 생각케 된다. 그런데 최근 상박초간(上博楚簡) 문서 중에서 민지부모(民之父母)라고 명명하게 된 문장이 등장했는데(200212월 출간), 그 내용이 바로 예기공자한거가어』 「논례(論禮)후반부의 조형에 해당되는 전국시대 문헌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민지부모의 문자에 비추어 예기가어를 비교해본 결과, 예기를 공자가어가 베낀 것이 아니라, 가어의 문장이 예기를 앞서는 조형에 가깝다는 사실이 거의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팡 푸(龐樸) 교수는 가어』 「논례(論禮)예기』 「공자한거가 모두 맹자시대 이전에 성립한 유물이며, 후인이 위조하여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단정짓는다.

 

가어의 성립시기가 과연 맹자를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속단키 어려운 문제이지만, 최소한 현존하는 금본(今本) 가어10권 체제도 결국 왕숙의 위작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어의 정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존의 서물에 없는 내용이 많고, 또 그것이 날조될 수 있는 성격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나라에서 가를 번역한 한학자 이민수 선생도 공연히 사서(四書)육경(六經)이니 십삼경(十三經)이니 하는 한계를 정해놓고 이런 소중한 문헌을 근시안적이고 소극적인 안목으로 대하고 있다. 육경 속에 예기를 집어넣으면서 왜 가어는 안 집어넣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공자연구에 있어서는 가어가 결코 논어밑이 아니라고 했다. 참으로 통찰력 있는 언급이다. 최근 양 자오밍(楊朝明)공자가어통해(孔子家語通解)(臺北樓, 2005)를 펴내면서 가어야말로 공자연구제일서(孔子硏究第一書)’유학제일서(儒學第一書)’라고 평하였다. 원시유가를 파악하는 데 제일 적절한 책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간백(簡帛)문서의 출현으로 이렇게 전국시대 사상사의 이해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가어가 맹자 이전부터 편집되어 공문에 가전(家傳)되어 오던 책이라고 한다면 진실로 공자이해나 논어편집사의 가설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향후의 숙제로 남겨둔다. 후학들의 분발을 기대해본다.

 

사기(史記)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가어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는 모두 공씨집안에 내려오던 제자적(弟子籍)’이라는 어떤 문헌에 기초하고 있다고 사료되는데, 사기가어를 비교해볼 때, 오히려 가어가 그 원사료인 제자적의 모습을 보다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다고 추론된다. 72제자해는 전통적인 관념에 의하여 ‘72’를 말했지만 실제로는 76명의 제자를 기록하고 있다. 사기』 「열전가어』 「제자해논어의 관련기사와 사마천 자신의 풍부한 역사적 지식에 기초하여 가감한 느낌이 든다. 가어』 「제자해가 훨씬 더 간결하고 오리지날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증삼의 경우 가어』 「제자해에는 열전에 생략된 재미있는 고사들이 붙어있다.

 

남무성(南武城)’은 당시에 북무성(北武城)도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무성(南武城)은 지금 산동 비현(費縣) 서남 90리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인데 그곳이 바로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성재(城宰)를 지냈던 곳이다(옹야12, 양화(陽貨)4). 그 근처에 있는 비읍(費邑)도 계씨의 본거지로서 공산불요(公山弗擾)가 한때 그곳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공자를 부르려 한 적이 있고, 자로가 삼환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했을 때 주요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또 자로가 자고(子羔)를 비읍의 읍재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선진(先進)24에 나오고 있다. 계씨가 민자건()을 비재()로 삼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옹야7에 나온다. 하여튼 이 지역이 공자의 교단과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러한 코넥션으로 증자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부상했다는 추측도 할 수 있다. 효경에 관하여는 가어』 「72제자해의 언급이 열전과 약간 다르다.

 

 

증자의 사람됨의 뜻이 효도를 보존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증자 때문에 효경을 짓게 되었다.

志存孝道, 故孔子因之以作孝經.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증자가 직접 효경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는 증자에게 촉발 받아 공자 자신이 효경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효경에도 공자가 어린 중심을 앞에 앉혀놓고 훈시하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마천은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의 기록을 왜곡하여 전한 것이다. 증자가 효경의 저자라고 하는 사마천 당대의 통념을 반영한 것이다. 한서』 「예문지효경이라고 하는 것은 공자가 증자를 위하여 효도를 진술한 내용이다[孝經者, 孔子爲曾子陳孝道也]’라고 하여 공자저작설과 증자적통설을 종합하는 애매한 기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증자가 노나라에서 태어나 노나라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노나라에서 줄곧 살면서 공자교단의 적통을 이었다는 그의 생애의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맹무백(孟武伯)과 그의 아들인 맹경자(孟敬子)의 후원을 얻어 공자교단을 이끌어 갔을 것이다(태백4). 그리고 증씨는 원래 증(, , Zeng)이라는 나라의 후손들인데 양공(襄公) 6에 거(, , Ju)가 증()을 멸망시키자 노나라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증자가 한때 월()나라에 가서 높은 벼슬[尊官]을 하고 구인(九仞)이나 되는 고당(高堂)에서 으리떵떵하게 살았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사기(史記)』 「열전(列傳)정의(正義). 그런데 공자가어』 「제자해에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재미있는 이야기 가 증자의 삶에 관한 중요한 정설로 실려 있다.

 

첫 번째 고사는 제()나라가 그를 초빙하여 경()대부와 같은 급이지만 대부보다 더 존귀한 자리, 즉 식음이 부여된다으로 삼으려 했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제나라로 가기를 거절한다. 그 이유인즉:

 

 

내 부모님이 연로하신데 남의 녹을 먹으면 남의 일만을 걱정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차마 부모님을 떠나 남 심부름일 하는 짓은 못하겠다.

吾父母老, 食人之祿, 則憂人之事, 故吾不忍遠親而爲人役.

 

 

두 번째 고사는 그의 계모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계모가 심지가 고약한 악모였던 모양이다. 그를 항상 박대하였다. 그러나 증자는 계모의 박 대에도 불구하고 계모를 극진하게 모시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參後母遇之無恩, 而供養不衰].

 

그런데 증삼의 실상을 전달해주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음의 세 번째 고사인 것이다. 이 고사에 나오는 식물을 리()로 해석한 판본도 있어 그렇게 되면, 요즘 중국요리에 올라오는 푹 삶은 배가 될 것이다. 그런데 보통 판본에는 여()로 되어있다. 여는 중국원산의 1년생 초본인 명아주(chenopodium album)이다. 높이가 2m까지 자라기 때문에 줄기를 잘라 청려장을 만든다. 그 씨가 까맣기 때문에 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그 씨는 기름을 짠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황록색의 작은 꽃이 아름답게 핀다. 이 명아주의 어린잎은 잘라서 식용으로 쓴다. 사실 명아주 풀잎은 질기기 때문에 푹 삶아야 되고, 조악한 악식 의 대명사로서 여갱(藜羹)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리 아름다운 음식이 아니다. 증자는 이 명아주 나물을 자주 먹었던 모양이다. 이 나물음식을 회채(灰菜)’라고도 한다. 부인에게 명아주 나물을 푹 삶아 내오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부인이 명아주 나물을 푹 삶아 내오지 않았다. 그러자 증자는 화가 나서 부인을 내쫓아 버렸다옛날에는 이혼의 개념이 이렇게 남성일방적인 것이었다[及其妻以藜烝不熟, 因出之].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항의를 했다: “당신 부인은 칠거지악을 범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사소한 일로 매정하게 내쫓을 수 있소[非七出也].”

 

그러자 증삼은 이런 항의에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명아주 나물을 찌는 일은 작은 일에 지나지 않소. 나는 그 명아주 나물을 잘 익혀 달라고 당부했소. 그런데도 그 여자는 내 명령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소. 그렇다면 이렇게 작은 일에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큰일에는 어떠 하겠소[藜蒸, 小物耳. 吾欲使熟, 而不用吾命, 況大事乎]!”

 

그리고는 주위의 만류도 듣지 않고 결국 부인을 내쫓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부인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증삼의 아들 증원(曾元)이 재취를 할 것을 청원했다. 그러자 증삼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은나라의 고종은 후처 때문에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 효기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주나라 선왕(宣王)의 대신이었던 윤길보는 후처 때문에 자기 둘째 아들 백기를 내쫓고 말았다. 나는 위로는 고종에 못미치고, 중간으로는 길보에도 비견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 내가 그와 같은 잘못을 또 안 저지르리 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高宗以後妻殺孝己, 尹吉甫以後妻放伯奇. 吾上不及高宗, 中不比吉甫, 庸知其得免于非乎?

 

 

사마천은 이 고사가 증자의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고 판단되어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서 빼버렸다. 그러나 이 고사야말로 증자라는 한 인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리얼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냐 아니냐는 일차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설화에 나타나고 있는 중심의 자기 인식구조와 당대 사람들의 중심이라는 인격체를 파악하는 인식구조,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남존여비의 시대라고 하지만 무뢰한 계모에게는 무조건 충성을 다하고, 자기를 떠받들고 애까지 낳은 양처에게는 요리하나 잘못했다고 내쫓아 버리는 그 인식구조가 증자라는 인격체가 상징하는 ()’라고 한다면 그러한 효의 개념의 정합성, 즉 인테그리티(integrity, 고결함)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백호통(白虎通)에 이 고사를 비꼬아 말하기를: “그렇게 작은 일로 마누라를 내쫓는데 세상 어느 구석에 증삼마누라 노릇할 여자 있겠나! 그놈의 계모는 그렇게 무은무의(無恩無義)하건만, 증삼이 그렇게 극진히 섬겼으니 증삼 계모 해먹기는 정말 누워 떡먹기로다!”

 

이것은 분명 남존여비의 시대정신이나 봉건시대의 관습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증자라는 인격체의 성스러운 모습이 얼마나 조작된 것인가? 아마도 이 고사는 우리의 조작된 관념과 역사적 인격체의 실상과의 괴리감을 잘 나타내주는 정직한 고사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인테그리티(integrity)의 결여를 공자가 노둔한 놈[參也, ]’이라 평한 것은 매우 적확한 평가였던 것이다. 이를 후대의 주석가들이 미화시켜, 중심은 비록 아둔한 사람이었지만, 그러한 아둔함 때문에 오히려 효성이 지극할 수 있었고 공자사상의 적통을 이었다고 극찬한 것은 모두 논어라는 텍스트 그 자체의 오독에서 초래된 것이다.

 

 

맹자 시대의 증자에 대한 인식

 

그렇다면 이제 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맹자 시대에 맹자가 인식한 증자라는 인격체의 문제점을 한번 다시 살펴보자! 맹자』 「이루(離婁)19사친(事親)이야말로 섬김의 근본이요, 수신(守身)이야말로 지킴의 근본이다라는 것을 역설하면서 증자가 그의 아버지 증석을 모시는 고사를 일례로 들어 설명하는 장면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텍스트 자체가 상세하지 않아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고사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큰방에서 식구가 다 함께 먹는데, 아버지는 진지상을 따로 독상으로 받아 잡수셨다. 물론 아버지 진지상에는 식구가 삥 둘러앉아 먹는 큰 상에 오르는 반찬보다는 귀하고 좋은 것들이 올라갔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가 진지를 다 잡수시고 그 상을 물릴 때의 상황이었다. 남은 잔반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먹으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전 제로 해서 이 일화를 읽어야 할 것이다.

 

증자는 그 아버지 증석을 봉양하는데 그 진지상에는 반드시 술과 고기가 올라갔다[曾子養會晳, 必有酒肉]. 그런데 아버지 증석이 진지를 다 잡수시고 상을 물릴 때, 증자는 상을 들고 나오면서 꼭 아버지께 여쭈었다: “이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까요[將徹, 必請所與].” 그리고 때때로 아버지 증석은 증자에게 묻곤 하였다(맛있는 반찬을 다 먹었을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더 먹을 여분이 있느냐?” 이럴 때, 비록 남은 음식이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증자는 반드시: “네 있습니다[問有餘, 必曰有]”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증석이 죽고, 이제는 증자의 아들 증원(曾元)이 증자를 봉양하는 상황이 되었다. 증원이 증자에게 진지상을 올릴 때도 반드시 술과 고기는 있었다. 그런데 증자가 진지상을 물릴 때, 그 아들 증원이는 증자가 하던 것과는 달리, 잔반이 있어도 그것을 누구에게 줄까요 하고 묻는 적이 없었다[曾晳死, 曾元養曾子, 必有酒肉. 將徹, 不請所與]. 뿐만 아니라 증자가 증원에게 아직도 남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증원이는 반드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問有餘, 曰亡矣]”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주자의 해석에 의하면, 중원이는 음식을 옹고로시 남겨두었다가 증자 진지상에 다시 올릴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원의 태도는 증자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 식욕과 몸뚱이만 모시려고 하 는 태도라는 것이다[將以復進也. 此所謂養口體者也]. 이에 비한다면 증자가 증석을 모시는 태도는, 아버지 중석의 기분과 주변상황을 다 고려한 것으로, 그 뜻을 모시는 태도라는 것이다[若曾子, 則可謂養志也]. 증원의 효는 단지 몸뚱이 만을 먹이려는 물질적인 효였고, 증자의 효는 아버지의 모든 상황을 고려한 정신적이고도 고차원적인 효였다는 것이다. 논어』 「위정(爲政)7에 자유(子游)가 공자에게 효를 묻는 대목이 있다. 이때 공자가 말하기를, 요새 효라는 것은 멕이는 것만 장땡으로 아는데, 개나 말도 멕이기는 마찬가진데, ()함이 없다면 도대체 뭐가 다르겠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아마도 맹자가 말하고 있는 증자의 고사는 이러한 논어의 정신을 발현한 어떤 설화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바로 맹자에게 있어서 존경하는 스승 증자의 효성스러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고사가 바로 이 이루 상 19의 이야기라고 할 때, 도대체 증자의 라는 것이 이렇게 진지상을 둘러싼 프로토콜상의 번쇄하고도 말초적인 형식,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비판을 우리는 안심하고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맹자 시대에 존속된 증자의 효의 일화도 이러한 의례적인 사소한 형식을 반영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소한 의례적 행위에도 물론 깊은 인간의 마음이나 정감이 표현되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우리에게 어떤 은은한 감동이나 드라마틱한 감격을 전달해주는 바가 없다.

 

이루31에는 또 하나의 재미난 고사가 실려 있다. 증자가 큰 스승이 되어(공자교단의 리더가 되어) 자기의 고향인 무성(武城)에 돌아와 잠깐 거()할 때의 일이었다. 무성의 사람들은 성주인 대부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증자를 극진하게 대접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때마침 월()나라로부터 도둑떼가 침략하여 들어왔다. 그때 무성의 시자가 말하였다: “떠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증자는 사양하지도 않고 말했다: “암 떠나구 말구.” 그리곤 집을 지키는 사람에게 엄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 집에 없을 동안 어떠한 사람도 여기 들어와 살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풀 한 포기도 나무 한 그루라도 다치지 말게 하여라[無寓人於我室, 毁傷其薪木].” 그리곤 얼마 있다가 월나라 도둑떼가 물러나려 하자 피난 가있던 증자는 무성사람에게 전갈을 보내었다: “우리집 담장과 기와를 잘 수리하여라. 내가 곧 돌아가리라[修我牆屋, 我將反].”

 

그리고 도둑떼가 완전히 물러나자 증자는 유유히 돌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증자의 모습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매우 얌체짓거리처럼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좌우의 제자들이 증자에게 간언하였다: “선생님! 여기 무성사람들은 선생님을 극진하게 모시기를 이와 같이 충성스럽게 하고 또 공경스럽게 하였습니다[待先生, 如此其忠且敬也]. 그런데 적국의 도둑떼가 몰려오자 선생님께서는 먼저 잽싸게 피해 도망가시었고 백성들은 그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도둑떼가 물러나니까 비로소 유유히 돌아오셨습니다. 뭔가 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寇至則先去, 以爲民望. 寇退則反, 殆於不可].”

 

그러자 그 중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심유행이 증자를 변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네들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닐쎄! 옛날에 선생님께서 우리 심유씨 동네에 머문 적이 계셨네. 그때 우리 동네에 가을 수확을 도둑질해가는 도둑떼가 몰려들었네. 그때 선생님을 모시고 있던 제자들이 70명이 나 되었는데 한 사람도 그 재난에 간여하여 싸운 사람이 없었네[沈猶行曰: “, 非汝所知也. , 沈猶有負芻之禍, 從先生者七十人, 未有與焉”].”

 

그런데 자사(子思)가 위()나라에 거할 때, ()나라로부터 도둑떼가 침략해온 적이 있었다. 이때 주변사람들이 자사에게 여쭈었다: “도둑떼가 몰려오니 피난을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或曰: “寇至, 盍去諸?”]?” 그러자 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도망가다니! 만약 내가 떠나면 임금께서는 이 땅을 누구와 더불어 지키실 수 있겠는가[子思曰: “如伋去, 君誰與守?”]?”

 

물론 증자와 자사의 태도는 동일한 사태에 대하여 매우 대조적이다. 증자는 비겁했고 이기적이었고 고답적이었고 형식적이었다. 그런데 자사는 용감했고, 남의 입장을 생각할 줄 알았고, 긴박한 상황을 대중과 더불어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증자와 자사의 이러한 대조적 모습에 우리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맹자는 이에 대해 무리하게 증자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외관적으로 이 두 분의 행위는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같은 원칙 위에 서있다. 증자께서는 당시 스승이요 부형과 같은 입장에 계셨다. 그런데 자사는 단지 신하였을 뿐이요, 미천한 존재였다. 그러니 행동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이 두 분이 서로 입장이 바뀌었다면 두분 다 동일한 행동을 하셨을 것이다[曾子子思同道. 曾子, 師也, 父兄也. 子思, 臣也, 微也. 曾子子思易地, 則皆然].

 

한때 우리나라 노무현 대통령이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잘 써서 유행이 되었지만(이 말은 한국사람의 조어인 듯하다), 이 말의 유일한 출전이 바로 이 맹자의 평어 속에 들어가 있는 역지(易地)’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러한 맹자의 판결을 증자의 행동에 대한 정당화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왜구의 침략을 피해 의주로 도망가는 임금 선조의 행차가마에 우리 민중들은 돌을 던졌다. 과연 임금도 아닌 일개 학자가 극진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월구(越寇)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을 무성(武城)의 사람들은 과연 경외롭게 바라보았을까? 그러면서 그 피난통에도 내 집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건들지 못하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는 증자의 모습을 과연 우리는 효()의 휴매니스트적 전범으로서 기릴 수 있을 것인가?

 

여기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이미 맹자 시대에 전달된 증자의 일화들은 맹자가 구구한 변명을 일삼아야 할 정도의 구질구질한 이야기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신화화 되어버린 위대한 인물들의 역사적 실상에 대한 통찰 은 비단 그 인물을 깎아내리는 효능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정보들에 대한 총체적 조감을 새롭게 감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공자말년의 제자들, 공자의 유랑 장정의 고난에 직접ㆍ간접으로 참여한 적이 없는 어린 세대들은 공자의 인간내면의 핵심적 생각들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그들에게 공자는 이미 너무도 멀리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신화화 되어버린 공자의 형태만을 쫓고 있었다. 공자의 사상은 안회와 더불어 죽은 것이다. 증자의 효행(孝行)은 공자의 인()의 지극히 협애한 일면만을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증자의 효에 대한 내면적 생각조차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점점 형식주의적으로 윤색되어갔고 그것은 결국 곡례(曲禮)’ 스타일의 제식으로 고착화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종교적인 충효(忠孝)’의 사상으로 비약의 전기를 맞는다. 아마도 콘스탄티누스대제(280~337)의 기독교 신앙의 공인(the Edict of Milan, 313)이나, 한무제가 유술()을 한 것이나 우리는 보편사의 문제의식 속에서 비슷한 성격의 사실(史實)로 해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 나 유교는 최소한 신화적 허구를 인민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유교의 근원적 성격이 신앙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모범에 의한 교화(Teaching by Example)’였기 때문이다.

 

 

()’은 실정(悉井) 반이다. ‘()’는 거성(去聲)이다. ‘()’은 평성(平聲)이다. 증자(曾子)’는 공자 제자이다. ()이 삼()이고 자()가 자여(子輿, 쯔위, Zi-yu)이다. 자기 내면의 세계를 다하는 것, 그것을 ()’이라 부르고, 실증성이 있는 것, 그것을 ()’이라고 부른다. ‘()’이라는 것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움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 익어 배는 것을 의미한다. 증자는 이 세 가지로써 날마다 그 몸을 반성하여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잘못이 없으면 더욱 힘쓴다.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바가 성실하고 절절한 것이 이와 같으니, 학문하는 근본을 얻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순서를 말하자면, ()과 신()을 먼저 근본으로 삼아 그런 자세로 전수받은 것을 익혀야 한다.

, 悉井反. , 去聲. , 平聲. 曾子, 孔子弟子, 名參, 字子輿. 盡己之謂忠. 以實之謂信. , 謂受之於師. , 謂熟之於己. 曾子以此三者日省其身, 有則改之, 無則加勉, 其自治誠切如此, 可謂得爲學之本矣. 而三者之序, 則又以忠信爲傳習之本也.

 

 

()이라는 말을 현대인이 기독교의 신앙(Belief)과 결부시켜 해석하 는 오류가 많은데, 그것은 반드시 경계되어야 한다. 신은 서양언어의 믿음이 아니다. 신은 오직 실증성(verifiability)을 일차적 특성으로 하는 것이며, 실증성이 확보되었을 때만 믿음성(credibility)이 보장되는 것이다. 동방고전에서는 사람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든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든가 하는 것은 전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은 오직 실증적 사태에 국한되는 것이다. 서양적 가치관의 유입으로 왜곡된 단어의 대표적 사례 중의 하나가 믿음[]’이다. ‘은 주로 인간의 ()’과 관련되며, 그 언의 실증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일성기신(日省其身)’을 나는 날마다 그 몸을 반성한다로 번역하였다. 보통 자신을 반성한다라고 애매하게 번역하는데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다. ‘몸이 곧 자기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도 모두 몸의 현상이며,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 몸(Mom)이다.

마지막 삼자지서(三者之序)’ 구절은 주자어류21에 관계된 문답을 참고하여 보완하였다.

 

 

윤언명(尹彦明)이 말하였다: “증자는 지킴이 매우 간약하였다. 그러므로 행동함에 반드시 자기 몸에 구하였다.”

사현도(謝顯道)가 말하였다: “공자의 뭇 제자들의 배움이 모두 성인 공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근원에서 멀어지고 그 본래 모습을 상실케 되었다. 오직 증자의 학문만이 오로지 그 마음을 쓰는 것이 더욱 더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후세에 전한 바가 폐단이 없었다. 증자의 제자인 자사와 맹자의 학문을 관찰하면 증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애석하도다! 증자가 선행(善行)이 충분히 세상에 전하여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히 보존되어 민멸하지 않았으니 우리 배우는 자들은 이에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尹氏曰: “曾子守約, 故動必求諸身.” 謝氏曰: “諸子之學, 皆出於聖人, 其後愈遠而愈失其眞. 獨曾子之學, 專用心於內, 故傳之無弊, 觀於子思孟子可見矣. 惜乎! 其嘉言善行, 不盡傳於世也. 其幸存而未泯者, 學者其可不盡心乎!”

 

 

송유들이 증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대저 도통(道統)의 관념 에 사로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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