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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2. 효도와 공손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학이 제일 - 2. 효도와 공손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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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효도와 공손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1-2. 유자가 말하였다: “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공손하면서도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다. 군자는 근본을 힘쓴다. 근본이 서면 도()가 끊임없이 생성된다. 효성스럽고 공손하다고 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1-2. 有子曰: “其爲人也孝弟, 好犯上,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유약에 대해

 

이것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유약(有若, 여우 르우어, You Ruo)의 말이다. 유약이라 하지 않고 유자(有子, You Zi, Master You)’라고 한 것은 유약을 스승으로 모시는 집단에 의하여 그렇게 기록되었음을 말해준다. 정자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그 많은 중니의 제자들을 칭함에 유독 증삼(曾參, 쩡 선, Zeng Shen)과 유약만을 ()’로 존칭했다는 사실을 들어 논어자체의 편집이 증자와 유자계열의 제자들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을 펴지만 그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아마도 증삼과 유약만이 공자 사후에 강력한 교단을 형성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곧 전체 논어편찬의 주체세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유약은 공자보다, 13세 연하, 33세 연하, 36세 연하(공자가어』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3), 43세 연하(중니제자열전40)라는 제설이 분분하다. 공자 사후에 그를 연장자로서 대접하려 했다는 고사로 볼 때는 13세 연하라는 설도 설득력이 있지만 그가 말년 제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나이를 올려 잡기도 힘들다. 36세 연하라는 가어의 설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가어』 「칠십이제자해에는 그가 기억력이 뛰어났으며[爲人强識], 옛 문화를 숭상하였다[好古道]라고 말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그런데 유약은 원래 노나라 사람이며 무인 출신이었다. 유약은 BC 487() 애공(哀公) 8 ()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했을 때 노나라의 결사대 3백 명 중의 한 사람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유약은 이때만 해도 공자를 만나지도 못했고 아직 제자가 아니었다. 유약은 아마도 뒤늦게 자유(子游, 쯔여우, Zi-you)를 통하여 공자 문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공자가 죽었을 때, 남은 어린 제자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그래서 자하(子夏, 쓰시아, Zi-xia), 자장(子張, 쯔장, Zi-zhang), 자유(子游) 등 중추를 이루고 있던 제자들이 제안을 했다. 아마도 유약은 공자처럼 키가 컸고 덩치가 좋았고 나이도 그들보다 많았고 무장의 기품이 서렸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공자와 비슷하게 생긴 유약을 공자를 대했던 예로써 대하여 공자집단을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유약을 스승대리로 모시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소꿉장난 같은 발상이었다. 공자의 말년제자들의 발상의 유치함을 잘 나타내주는 고사이다. 그러자 중심이 버럭 화를 냈다: “안될 일이다! 우리 공자선생님의 덕성은 저 맑은 강한의 물로 씻고 씻어도, 저 푸른 가을하늘의 태양에 쪼이고 또 쪼 여도 더할 나위 없이 하얗게 빛난다. 거기에 뭘 구질구질하게 덧붙이겠다는 거냐[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

 

이것은 맹자』 「등문공(滕文公)4의 기록이다. 이것은 아마 공자 사후, 공자 교단의 리더십의 계승을 놓고 유약의 일파와 중심의 일파가 갈등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고사일지도 모른다. 유약을 옹립하려던 세 사람은 모두 말년의 제자로서 노나라 출신의 인물이 아니었고 모두 어렸다. 노나라 사람이었던 유약은 공문집단을 어느 기간 동안 리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노나라 출신이며 매우 성격이 야무지고 예학에 관하여 성향이 확실한 증삼의 일파가 공자학단의 주축세력이 된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이 양파의 관계가 그토록 헤게모니 쟁탈전이라도 벌일 정도의 험악한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유약 일파도성세가 있었지만 결국 부드럽게 증자 문하로 세력판도가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여진다.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에는 공문제자 한 사람이 유약에게 교묘한 질문을 던졌는데, 유약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궁색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분연히 일어나, “유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시오! 그 자리는 그대가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니요[有子避之, 此非子之座也]!’라고 성토하는 장면이 매우 소상히 그려져 있다. 이 일화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유약은 말이 어눌하고 좀 역부족의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유약의 말이 이 학이(學而)편에만 세 번 나온다. 모두 규범적인 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예의 스페시알리스트(specialist, 전문가)였다. 그래서 같은 유파인 증삼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을지 모른다. 학이편 둘째 번 장에 나오는 유약의 생각은 공자의 인의 사상이 매우 규범윤리화된 후대의 인식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편해(篇解)에서 말했듯이 군자의 덕성을 아필시키기 위한 공자교단의 학칙으로서는 손색이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와 제()

 

()는 분명 부모와 자식간의 덕목이다. 그것은 종적(vertical)이다. ()는 황본, 정평본에는 다 로 되어있는데, 형제간, 그리고 좀 외연을 넓히면 평배(平輩) 상하간의 덕목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은 횡적(horizontal)이다. ()는 횡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공손함(fraternal submission, 레게Legge )’을 나타내는 일반적 덕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유가의 생각은 바로 이러한 혈연적 관계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느낌을 모든 인륜의 덕성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까운 인간에 대한 자연스러운 선의(善意)를 확충해나가는 것이 모든 도리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노자가 말하는 우주론적 근본원리로서의 도가 아니라, ‘인륜의 길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범상(犯上)’이니 작란(作亂)’이니 하는 규범 윤리적 논리에 꿰어 맞춘 것은 별로 현명치 못하다. 유약은 머리가 좀 아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순수한 의도는 인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으면 윗사람을 범()하거나 난을 일으킬 일이 없어진다는 뜻일 수도 있다. 범상(犯上)하지 않는다, 작란(作亂)하지 않는다는 규범어로써 인()을 규정할 수는 없다.

 

 

문법적 기능

 

선의(鮮矣)’라고 할 때의 ()’는 강한 단정을 나타내는 조사이다. 그에 반해 제일 마지막 구절의 기위인지본여(其爲仁之本與)’()’는 단정을 주저시키는 조사이다. ‘라고나 할까?’ 정도의 의문을 내포하는 서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효제야자(孝弟也者)‘라고 할 때의 야자(也者)’의 용법은 주어를 한번 객관화시키면서 무게를 실리게 하는 조사이다. 우리말의 라고 하는 것은정도에 해당되는 어기(語氣)를 나타낸다. 그리고 미지유야(未之有也)’미유지야(未有之也)’의 지()를 동사 앞으로 도치시킨 것이다. 이것은 미()라는 부정사를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효제(孝弟)와 인()의 관계

 

제일 마지막 구문, ‘효제야자(孝弟也者), 기위인지본여(其爲仁之本與)!’에 관한 송 유들의 재미있는 논의가 있다.

 

문제는 이 부분이 딴 판본(정평본 등)효제야자(孝弟也者), 기인지본여(其仁之本與)’라고 되어 있어 발단되는 것인데, 이러한 타본의 논리를 따른다면 효제라는 덕목이 곧 인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즉 효제 그 자체와 인의 뿌리[]와 가치상으로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효제(孝弟)’라는 것은 구체적인, 개별적인 덕목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의 핵심적 가치가 효제의 레벨로 격하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가 정자에게 묻는다: “효제가 곧 인의 근본이라면, 이것은 곧 효제를 통하여 인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孝弟爲仁之本. 此是由孝弟可以至仁否]?”

 

이에 정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럴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는 글자이다. 그것은 실천이다. 인을 실천하는 것이 효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했을 따름이다. 효제는 인의 한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라고 말하면 되어도, 막바로 인의 근본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대저 인은 성()이요 체(). 효제는 용()이다. () 중에는 인ㆍ의ㆍ예ㆍ지 사단밖에는 없다. 어찌 성() 중에 효제라는 덕목이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은 사랑[]을 주로 하고, 사랑이란 가까운 사람(혈연)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효제라고 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라고 유자가 말한 것이다.

非也. 謂行仁自孝弟始. 孝弟, 是仁之一事, 謂之行仁之本則可, 謂是仁之本則不可. 蓋仁, 是性也; 孝弟, 是用也. 性中, 只有箇仁義禮智四端而已. 曷嘗有孝弟來? 然仁主於愛, 愛莫大於愛親. 故曰: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이미 송유들도 유약의 언급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 그 자체가 아닌 위인(爲仁)’이라는 표현에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이란 결코 후대의 유자가 말하는 바 구체적 덕목을 고정적으로, 실체적으로 지적한 바가 없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이란 정의불가능한 것(the Undefinable)이며, 한정불가능한 것(the Unconditioned)이며, 오직 삶의 유동적 현실 속에서만 끊임없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노모스(nomos)적 울타리에 갇힐 수 없는 것이다노모스(νομος)의 원뜻에 가축을 사육하는 장소라는 뜻이 있다.

 

송유나 기타 주석가들의 문제는 바로 논어의 권위를 절대시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논어의 권위로부터 강요당해서는 아니 된다. 논어는 있는 그대로 절대적 권위를 갖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계발을 던져주는 단초일 뿐이다. 권위는 오직 우리 인간에게 있을 뿐이다. 유약의 언급은 근본적으로 공자사상을 저급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유약류의 인식구조는 논어와 공자를 형해화한 노모스적 세계로 몰고 가고, 예기의 곡례적(曲禮的) 세계로 함몰시킨다. 장자가 혐기(嫌忌)하는 바 일곡지사(一曲之士)’의 곡례(曲禮, 세세한 예의 덕목의 나열)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점을 해결하지 못한 송유는 또다시 이를 체용론(體用論)으로 바꾸어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 () ()
() 효제(孝弟)

 

뿐만 아니라 ()’맹자가 말하는 사단(四端)의 일단(一端)으로 논의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는 은 맹자가 양묵(楊墨)에 대하여 아폴로제틱(apologetic, 변명의)하게 설정한 사단 즉 인ㆍ의ㆍ예ㆍ지의 한 덕목으로서의 이 아니다. 그것은 사단을 초월하는 개념이며, 사단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성론적인 개념인 동시에 곧 우주론적 개념인 것이다. 어찌 성() 속에 인의예지만 있고 효제는 없다 하는 식의 구차스러운 말을 하고 있는가? 아니, 인간의 성()이라는 게 무슨 인터넷 사이트와도 같은 것이래서 그 속을 검색해보니 무엇은 있고 무엇은 없다라는 식으로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송유(宋儒)의 주석에는 이렇게 졸렬한 구석이 있다.

 

 

()의 의미

 

다산 또한 이러한 송유(宋儒)의 오류를 근본적으로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나, 공자가 말하는 인의 가치가 효제라는 구체적 덕목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에 관하여서는 비교적 차분하고 일리 있는 말을 하고 있다. 한번 다산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인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하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다는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어버이와 자식간의 두 사람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형을 섬김에 공경스러운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형과 아우 사이의 두 사람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임금을 섬김에 충성스러운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은 임금과 신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백성을 지도하는 데 자애로운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은 지도자와 백성 사이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부부. 붕우의 사이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모두 인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효제가 그 근본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仁者, 二人相與也. 事親孝爲仁, 父與子二人也; 事兄悌爲仁, 兄與弟二 人也; 事君忠爲仁, 君與臣二人也; 牧民慈爲仁, 牧與民二人也. 以至夫 婦朋友, 凡二人之間, 盡其道者, 皆仁也. 然孝弟爲之根. (1,9b)

 

 

정약용은 구구하게 ()’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송유의 해석방식을 취하지는 않으나, 그가 말하는 이인상여(二人相與)’이라는 자형(字形)을 분해하여 이인(二人)’으로 푼 매우 상투적인 글자풀이에 기초하고 있다. 인의 고자형인 𡰥은 어떠한 경우에도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자형으로 풀이될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 따뜻한 방석 위에 앉은 모습이며, 온화롭고 따뜻한 사람의 모습이다. ()의 이()형태에 두 사람의 뜻이 없다. 그것은 임석온난(袵席溫暖)’의 뜻이며 그 의미로부터 유교의 최고덕목으로서 확대해석 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해(字解)의 논의를 떠나,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다산의 관계론적 사유(Relational Thinking)’는 정당하다. 인간을 고립된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간()의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동양적 인간론(人間論)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러나 다산의 문제점은 그러한 관계론적 사유가 기껏해야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또 에토스(ethos)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은 분명히 관계론적인 것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 인적 관계, 물적 관계, 우주론적 관계의 총상(總相)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성격이 윤리적인 데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공자의 인은 윤리적인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적(ethical)이라기보다는 감성적(Feeling-oriented)인 것이요, 단순히 감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심미적(aesthetical)인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 판단에 기초한 도덕적 요청(postulation)이 아니다. 다산논어는 너무 지나치게 이성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다. 그리고 윤리적인 송유의 질곡을 근원적으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역시 조선유학의 틀 속에 갇혀 있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側隱之心)도 결국 심()의 토탈리티와 관계되는 것이요, 어떤 리()나 성()적인 측면만을 척출(剔出)하여 낸 국부적 일면만은 아닌 것이다.

 

종로5가 근처에 효제동이 있고 효제초등학교가 있다. ‘효제(孝悌)’라고 쓰는데 황본(皇本)의 글자를 썼다.

 

 

()’()’는 다 거성(去聲)이다. ‘()’은 상성(上聲)이다. 그 이하도 다 같다. 유자(有子)’는 공자 제자인데, ()이 약(, 르우어, Ruo)이다.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라고 하고, ()이나 장자(長者)를 잘 모시는 것을 ()’라고 한다. ‘범상(犯上)’이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범하는 것을 이른다. ‘()’이란 드물다는 뜻이다. ‘작란(作亂)’이란 패역하고 잘 다투는 짓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능히 효성스럽고 윗사람을 잘 모시면 그 마음이 화순하여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일이 적어지며 그 마음이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 , 皆去聲. , 上聲, 下同. 有子, 孔子弟子, 名若. 善事父母爲孝, 善事兄長爲弟. 犯上, 謂干犯在上之人. , 少也. 作亂, 則爲悖逆爭鬪之事矣. 此言人能孝弟, 則其心和順, 少好犯上, 必不好作亂也.

 

 

앞의 편해(篇解)에서도 말했듯이 이 학이(學而)텍스트는 기본적으로 고등 과정에 속하는 사람들을 향한 이야기 모음이 아니라, 아주 기초과정에 속한 공단(孔團) 입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오리엔테이션 같은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범상(犯上)하지 말라든가, 작란(作亂)하지 말라든가 하는 이야기가 강조된 것이다. 우리가 반항하고 투쟁하고 의로운 항거를 하는 것은 보편적인 사회행동에서는 매우 필요한 가치체계이지만, 자기가 속한 조그만 단체 내에서는 우선 원대한 목표를 향해 그 조직의 하이어라키(hierarchy, 계층)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공 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정언명령에 속하는 것이다.

 

 

()’는 평성이다. ()’라는 것은 오로지 힘쓴다는 것이다. ‘()’이란 뿌리와 같은 것이다. ()이라는 것은 사랑의 이치요, 마음의 덕이다. ‘위인(爲仁)’이란 행인(行仁)’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라는 것은 의문이 곁들인 말이다. 겸손하게 물러서면서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군자가 범사에 오로지 근본에 힘을 쓰면, 근본이 서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곧 도()가 스스로 생겨나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윗글에서 말한 바 효제(孝弟)’라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니 배우는 자는 이것을 힘쓰면 곧 인도(仁道)가 이로부터 생겨난다.

, 平聲. , 專力也. , 猶根也. 仁者, 愛之理, 心之德也. 爲仁, 猶曰行仁. 與者, 疑辭, 謙退不敢質言也. 言君子凡事專用力於根本, 根本旣立, 則其道自生. 若上文所謂孝弟, 乃是爲仁之本, 學者務此, 則仁道自此而生也.

 

정자가 말하였다: “효제는 순덕(順德)이다. 그러므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아니 하나니 어찌 다시 이치에 역하고 항상스러움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덕에는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확립되면 그 도가 충대(充大)하여진다. 효제가 먼저 집안에 행하여지고 난 후에 인과 사랑이 사물에까지 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가까운 사람을 가깝게 만들 줄 알아야 먼 백성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인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효제로써 근본을 삼는다는 것이요, 인간의 본성을 논한다면, 인이야말로 효제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혹자가 질문하기를, ‘효제가 곧 인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효제를 통하여 인 그 자체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 하였는데,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유자의 말씀은 인을 행하는 데 효제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일컬은 것뿐이다. 효제는 인의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효제가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말한다면 가()하지만, 그것이 곧 인의 근본이라고 말한다면 불가(不可)하다. 대저 인이란 성()이요 체()이다. 이에 비하면 효제는 용()인 것이다. () 중에 인ㆍ의ㆍ예ㆍ지 사단(四端) 밖에는 없다. 어찌 성 중에 효제라는 덕목이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은 사랑[]을 주로 하고, 사랑이란 가까운 혈연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러므로 효제라고 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진저라고 유자가 말씀하신 것이다.”

程子曰: “孝弟, 順德也, 故不好犯上, 豈復有逆理亂常之事. 德有本, 本立則其道充大. 孝弟行於家, 而後仁愛及於物, 所謂親親而仁民也. 故爲仁以孝弟爲本. 論性, 則以仁爲孝弟之本. 或問: “孝弟爲仁之本, 此是由孝弟可以至仁否?” : “非也. 謂行仁自孝弟始, 孝弟是仁之一事. 謂之行仁之本則可, 謂是仁之本則不可. 蓋仁是性也, 孝弟是用也, 性中只有箇仁智四者而已, 曷嘗有孝弟來. 然仁主於愛, 愛莫大於愛親, 故曰: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여기 성()과 용()이 대비되어 있는데, 이때 성()은 곧 체()이므 로, 이것은 곧 체용론(體用論)을 가지고 인(=)과 효제(=)를 말한 것이다. 체와 용이라는 개념은 송명유학자들이 너무 쓰기를 즐겨하기 때문에 유학의 개념인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불학(佛學)의 개념이며 원시유학에서는 그런 개념적 언사 자체가 없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체는 본체, 용은 작용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겠지만 본시 이러한 문제는 단순한 레토릭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 전체와 구조적으로 관련된 문제라는 데 그 의미심장함이 있다. 체용은 중국적 사유에서 생겨난 말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적 사유, 더 나아가서는 인도ㆍ유러피안적 사유에 서 생겨난 말이다. 체는 곧 실체(Substance)를 가리키는 것이요, 용은 나타난 작용의 세계 즉 현상(Phenomena)을 가리키는 것이다.

 

() ()
실체(Substance) 현상(Phenomena)
실재(Reality) 나타남(Appearance)

 

그러나 원래 인도적 맥락에서나 희랍적 맥락에서는 실체는 본체(Noumena)의 세계이며, 실재(Reality)의 세계이며, 관념의 세계이며, 이데아의 세계이며, 궁극적으로 초월적 세계(Transcendental Realm)이다. 즉 삼라만상의 현실적 우주를 초월하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이러한 플라토니즘적 이원론(Platonic Dualism)을 전제로 해야만 이해되는 말을 송유들은 전혀 그러한 문제의식 없이 쓰고 있다. 즉 체라는 것은 현상 내의 한 물건의 본체로 생각하고, 그 본체라는 말 자체에 전혀 초월적 의미가 함유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물건의 나타나는 작용으로서의 용()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체()와 용()이 모두 인도유러피안적 사유개념 속에서 말하는 용() 즉 현상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인도ㆍ유러피안적 사유 중국적 사유
()  
() ()
()

 

그러니까 아무런 인식론적 반성이 없이 체와 용이라는 말을 물체와 작용이라는 뜻으로 마구 쓰는 것이다. 그들이 마구 쓰는 이유는 레토릭상 매우 편리하고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그렇게 편리한 개념적 장치에 의하여 세상을 설명하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불학에서 그러한 경험을 얻고 나서는, 매우 신나게 그런 사유의 틀을 적용하게 된 것이다. 그 촌스러운 말장난의 허ㆍ실과 장ㆍ단에 관해서는 내가 여기서 함부로 논할 수가 없다. 그들의 무식한 레토릭이 중국적 사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을 수도 있고, 중국 본래의 정신을 왜곡시켜 역사를 후퇴시켰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주자학이라는 것도 바로 이렇게 정확한 개념적 규정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이 많다. 소라이(荻生徂徠)가 송유들을 비속하다고 까대는 그 혐오감도 이해할 만 하지만, 그 렇다고 송유의 논의를 무가치하다고만 치지도외(置之度外)할 수는 없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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