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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6부 표류하는 고려 -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식민지적 발전Ⅰ(몽골풍, 권문세족, 도평의사사)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식민지적 발전Ⅰ(몽골풍, 권문세족, 도평의사사)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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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적 발전

 

 

일국의 왕실에서 왕위를 장난처럼 주고받았을 정도라면 나라꼴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장장 30년간의 무모한 대몽 항쟁으로 전 국토는 피폐해졌고 더 무모한 일본 정벌의 준비로 백성들의 삶은 파탄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기업은 망해도 사장은 살아남는다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격언만이 아니다. 왕실이 그랬듯이 고려 사회의 지배층도 나라와 백성의 처지와는 무관하게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찍이 없었던 영화를 누렸다. 식민지적 발전이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있다면 그것을 누린 자들은 바로 그들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진국의 첨단 유행을 맨먼저 받아들이는 것은 상류층이다.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몽골 복장을 몸에 걸치고 몽골식 변발을 했다. 게다가 그들은 몽골식 이름을 만들고 몽골어를 한 마디라도 배우려 애썼으니, 오늘날 망국적인 영어 학습 열풍의 원조는 이 시대다몽골 지배기가 오래 지속되면서 이런 상류층의 풍조는 점차 일반에게도 퍼져 나갔다. 정치와 제도는 식민지 시대가 끝나면 바뀌지만 풍속은 원래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도입된 몽골식 풍속, 이른바 몽골풍은 몽골 지배기가 끝난 뒤에도 살아남았는데, 조선 시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게 꽤 많다. 이를테면 여자들의 족두리, 옷고름에 차는 장도, 신부 볼에 찍는 연지, 귀에 구멍을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 등이 모두 이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밖에 왕의 밥상을 수라라고 부르는 것, 장사치나 벼슬아치처럼 사람을 가리키는 말에 []’ 자를 붙이는 것도 몽골풍이다. 심지어 투전 같은 오락이나 줄타기 같은 기예까지 몽골에서 도입된 풍속이었으니, 몽골 지배기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고유의(?) 풍속이라는 게 과연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기야, 문익점(文益漸, 1329~98)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붓대 속에 목화 씨를 넣어 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면 이른바 백의민족이라는 말도 없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가 되면서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중앙 정치가 실종되었으므로 이제 고려의 상류층은 정치적으로 매우 자유롭다. 따라서 그 자유가 선진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으로 나타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그런 문화적 현상을 발생케 한 더 중요한 배경은 그들의 경제적인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른바 권문세족(權門勢族)을 이루어 정치와 경제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귀족이 선도한 몽골풍 사대의 역사가 오랜 고려인들은 언제 몽골에 항전했느냐는 듯이 쉽게 몽골의 습속을 받아들였다. 그림에서 보듯이 몽골 복식이나 매 사냥이 유행한 것을 몽골풍이라 부르는데, 고려 귀족들이 이 유행을 선도했다. 그래도 문화적 측면이라면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게 나쁘다 할 수 없겠지만, 친원파 모리배들이 득세한 것은 해방후 고려사회의 치명적인 독소로 남았다.

 

 

정치가 허물어지면 그 틈을 노려 득세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권문세족은 몽골 지배기에 떵떵거렸지만 그 뿌리는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할 무렵, 바로 무신정권 시대에 이미 싹텄다. 당대 최고의 재산은 뭐니뭐니해도 토지, 따라서 그들의 전략은 토지 겸병이다. 전시과(田柴科)의 근본적인 결함(관리들의 토지 세습으로 토지가 부족해지는 현상)은 앞서 말한 바 있지만, 정치의 기강이 살아있으면 그럭저럭 제도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 권력으로 수조권(收租權)이 세습되는 관행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신들이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치부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공권력 자체가 혼탁해진 마당에 전시과(田柴科)가 더 이상 유지될 리 없다.

 

그러자 세도가들은 각종 편법을 구사해서 토지를 겸병하기 시작한다. 수조지는 소유지로 바꾸고, 미약한 양반 가문이나 농민들이 소유한 토지는 강탈한다. 심지어 하급 관리들이 탈법적으로 토지를 갈취하면, 세도가들은 그것을 무마해주는 대신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기도 한다(여기에는 세도가들만이 아니라 당대의 권력자인 사원들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이런 식으로 토지가 차츰 세도가들에게 겸병되면서 백성들은 이중삼중의 불법적 수조권자들 때문에 죽어나고, 국가 재정은 세원 부족으로 허덕인다. 당시 민란이 잦았던 데는 이런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세도가들은 이렇게 긁어모은 토지를 나 양민들에게 경작시키고 생산물을 수취다. 이것이 바로 농장(農莊)’이지만, 그 과 달리 목가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대지주의 농장을 경작하는 농민들을 전호(佃戶)라 불렀는데, 이들은 나중에 소작인더 일반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장차 세기 중반까지 악명을 떨치게 되는 농민 수탈 구조인 소작제도의 원형이 것이다. 당시 전호들은 농장주에게 신분상로도 예속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생산물의 1/2이라는 엄청난 소작료를 물어야 했다.

 

토지를 빼앗긴 양민들은 전호가 되어 해지고, 아직 농장에 편입되지 않은 농민들은 한층 과중해진 세 부담에 피폐해지며, 관료들은 봉급을 받지 못해 재정난에 허덕인다. 이런 총체적인 난국에 고려 왕조가 망하지 않고 버틴다면 오히려 그게 더 희한할 지경이다. 당연히 망했어야 할 고려 왕조의 수명을 늘려준 건 바로 몽골이다.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는 굳이 망할 필요가 없는왕조, 즉 원나라의 식민지 지방정권이 되었으니까(바꿔 말하면 몽골에 의해 정복당한 것으로 고려는 이미 멸망한 왕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것도 식민지적 발전이라 해야 할까??

 

그랬으니 식민지 시대에 그런 문제점이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사실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현상은 더욱 증폭되고 확산된다. 고려 왕실 자체가 독립 정권이 아닌 판에 정치 무대라고 해서 손대지 못할 영역일 수 없다. 그래서 농장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성장한 세도가들은 정치 분야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들이 권문세족이라고 불리는 신종 족속들이다. 개국 초기에는 호족, 다음에는 외척, 그 다음에는 무신, 또 그 다음에는 권문세족이 차례로 내정을 주물렀으니, 고려를 과연 왕국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처음에는 한족의 송, 다음에는 거란의 요, 그 다음에는 여진의 금, 또 그 다음에는 몽골의 원나라를 차례로 모국처럼 섬겼으니, 그런 고려를 과연 나라라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그런 회의 섞인 시선은 후대인들의 몫일 뿐이고 당대를 지배한 권문세족은 경제적 부를 누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정치에서도 고려 식민지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하기야, 왕은 황제의 사위일 뿐 실질적인 권력자는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왕 자신이 정치에 관심이 없으니 그나마 모든 국정을 그들이 맡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권문세족은 공식적인 정치 참여를 위한 메커니즘을 만들게 되는데,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바꾼 게 그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도병마사란 원래 변방의 군사 문제를 다루던 회의체였으며,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설치되는 임시적인 성격을 지닌 기관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개편한 도평의사사는 군사 문제만이 아니라 국정 전반을 취급하게 되었고, 회의체가 아닌 집행기관으로 발전했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구성원이 대폭 늘어 3품 이상의 관리 70~8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정기구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도평의사사는 조선 초기까지 존속하다가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의정부議政府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그 멤버의 대부분이 권문세족들로 채워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신정권에게 배운 수법일까? 권문세족은 자기들끼리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서로 혼맥을 통해 끈끈한 이해관계를 유지하며, 과거보다는 음서를 통해 지위와 기득권을 대물림하는 등 철저한 문민독재(文民獨裁)’로 일관한다. 당대에는 그런 권력형 부조리가 큰 문제였으리라. 그러나 후대의 관점에서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로 인해 대단히 좋지 않은 역사적 선례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20세기 일제 식민지 시대 친일파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권문세족들은 적극적인 친원파였다여기서 권문세족과 무신정권기 이전까지 고려 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했던 전통적인 개경 귀족의 차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물론 권문세족들 중에는 개경 귀족 출신도 많으니까 양자는 상당 부분 겹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집단의 큰 차이는 개경 귀족들이 유학을 숭상한 반면 권문세족들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이는 아마도 권문세족들이 토지 겸병으로 농장을 늘려나가는 과정에서 사원 세력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기에 권문세족들은 개경 귀족들과 달리 중국의 한족 왕조에 대한 향수를 느끼지 않고, 거부감 없이 몽골 지배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비롯한 원나라의 고려 지배기관들에 접촉해서 연고를 맺으려 했고, 심지어 원나라의 고관들과 혼맥을 구축하기도 했다. 원래 원나라가 고려에 요구한 주요 공물로서 귀족 집안의 처녀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누구나 마지못해 그에 따랐으나 권문세족들이 득세하면서부터는 오히려 원나라의 지배층과 인연을 맺는 통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운이 좋아 자기 집안의 딸이 원나라 황실의 첩실로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 가문 전체가 크게 뜰 수 있었으니 아마 단기간에 집안을 일으키는 데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문세족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원나라와 운명공동체이므로 미래도 함께 하리라는 것이다. 물론 원나라가 영원히 고려를 지배한다면 권문세족의 미래도 영원히 보장될 것이다. 당시 그들은 그러리라고 굳게 믿었겠지만(일제 치하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식민지 지배가 종식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머잖아 몽골은 중국 대륙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아울러 한반도를 죄던 손아귀도 놓게 된다. 그에 따라 식민지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에게 눌려 있던 신흥 사대부 세력이 개혁을 주도하게 되고 나아가 새 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렇다면 장차 새 시대를 주도할 세력이 물밑에서 자라난 게 또 하나의 식민지적 발전이라 해야 할까?

 

 

제주도 말 목장 몽골이 징발하는 군마를 충당하기 위해 고려 정부는 제주도에 대규모 말 목장을 조성했다. 제주도에는 삼국시대부터 작고 힘센 토착 말이 있었는데, 몽고말들과 피가 섞여 오늘날 조랑말의 순수 혈통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림은 조선시대 제주도 말 목장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다시 부는 북풍

무모한 항쟁

반군과 용병

황제의 사위들

식민지적 발전

식민지적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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